이정재 1급 참모로,후엔 임화수의 참모로 역사의 뒷편에서 주먹을 휘두르던중 4.19를 만나 이정재,임화수,곽영주등과 함께 구속되었고 사형언도를 받고 복역중 형 집행정지로 자유의 몸이됨. 그후,낙향하여 사업(동부연쇄점본부)에 몰두하며 나름대로 역사와 민족앞에 속죄의 길을가다가 1988년,63세를 일기로 갑자기 죽음을 맞이했다.
유언은 별다른게 없었다.이미 광퐁노도의 삶과 인생을 통해 세상에던져 놓았던 역사와 민족앞에 참회한다던 그의 말이 세상에 남은 후배 주먹들에게 던지는 화두였다.
(나는 살아오면서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 한 적은 없다. 다만 의리와 우정을 말하면서 실상은 그러지 못했던 협객의 길이 아쉬울 뿐이다. 그런 마음으로 후배들의 인도에 나섰던 나도 사실은 마음 편하지 않았다.)
유지광의 죽음은 사분오열 치닫으며 극렬한 쟁투를 벌이고 있던 국내 주먹계에 잠시 소강 상태를 맞았다,
그것은 누구랄 것 없이 인간 유지광에 대한 공과를 떠나 협객을 자처하뎐 대선배에 대한 예의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엄청난 조문 행렬이 연이었다. 찿아드는 전국 주먹 보스들은 물론,일본 야쿠자 양대산맥인 야마구치 구미파, 청년사파 에도 도요히사와 대판의 패자 가네야마 오사부로등 100여명 야쿠자와 대만,홍콩,중국 트라이어드 (삼합회) 에서까지 조문을 왔다.
또한 김두한의 후계자 조일환씨와 김두한의 벗이였던 김동희씨도 와서 그의 죽음을 애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