母氏瑟妻 모씨슬처 어머니는 요셉아내
少小待字 소소대자 혼인날을 기다리매
蓮容素端 연용소단 연꽃처럼 단아하고
蘭性較細 난성교세 난초같이 고우셨네
會緣夢感 회연몽감 꿈의 감도 인연만나
忽産男嗣 홀산남사 홀연 사내아기 낳으니
東界友師 동계우사 동방세계 박사들이
軍光詳視 군광상시 별빛따라 찾아와서
造室辱林 조실욕림 누추한 곳 나신 분께
伏拜依次 복배의차 엎드려서 문안했네
右節記, 耶稣出世之初, 天卽垂象而先顯示於人也. 軍光星光也.
우절기, 야소출세지초, 천즉수상이선현시어인야, 군광성광야.
윗절은 예수님께서 처음 세상에 태어나실 때 하늘에 징표를 내리시어 먼저 사람에게 현시하심을 기록한 것이다.
<성경읽기>
예수님께서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 보았다. 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작은 고을 가운데서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 없이 기뻐하였다.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마태 2,1-12)
<묵상>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마구간은 우리 마음속도 욕망과 미움과 거짓과 질투와 교만으로 뒤섞인 깨끗하지 못한 처지를 가리킨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더러움을 마다않고 찾아오시는 예수의 사랑에 의해 변화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이 神처럼 되고 싶어 하는 욕망을 버리고, 참 인간이 됨으로서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됨을 가르쳐 준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심으로서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존엄성을 지니게 되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어 태어나신 강생의 신비를 깨닫고 간직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성탄은 우리가 스스로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게 하고,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새로워지게 한다. 성탄은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모든 것을 새롭게 이룩하신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어린이처럼 되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다. (마태18.3) 예수의 탄생을 기리면서 하느님께서 자신 안에 새롭게 탄생하시기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또한 동방 박사들은 새로운 별이 나타난 현상을 가리키는 진실을 찾아 멀고 험한 길을 떠나서, 별이 멈춘 곳에서 아기 예수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들은 아기 예수를 보고서 대단히 기뻐하며 땅에 엎드려 경배하고 귀중한 선물을 바쳤다. 황금은 임금을 상징하고, 유향은 하느님을 상징하며, 몰약은 시체에 바르는 것으로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예시하고 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그 자체로 아기 예수께서 세상의 새로운 임금으로서 하느님의 아들이며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죽음을 가리킨다. 우리가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구세주의 별빛을 보고 굳어진 삶의 자리를 떠나서 새로운 삶의 길을 가는 것이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구세주의 별빛을 따라서 예수님을 찾기위한 길을 떠나는 자세로 생활하도록 하자.
<영적 독서>
겸손이란 무엇인가? 이는 자신을 낮은 자리에 두고, 자신을 낮은 곳에 앉히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하느님은 위대하지만 나는 보잘것 없고, 하느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나지도, 자라지도 못했을 것이고, 현명할 수도, 지덕이 더없이 뛰어나고 사리에 완전히 통할 수도 없었을 것임을 생각한다면, 그의 마음은 하느님에게 겸손해지고, 나아가 남들에게도 겸손해질 것이다. 이것이 겸손이다.
겸손은 덕의 뿌리이다. 따라서 모든 덕이 이 뿌리에 붙어 있으면 자라나고, 우거지게 되지만, 떨어지면 꺽이고 마르게 된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겸손에서 잠시라도 떨어져서는 안 된다. 겸손은 善을 안내하여 善을 이끌어 오는 것이고, 善을 짝하여 善을 굳게 하는 것이며, 善과 동행하여 善을 감싸주는 것이다. 그러니 만약 겸손에서 잠시라도 떨어진다면, 교만이 장차 틈을 타고 들어와 나를 완전히 무너뜨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臺)를 쌓으려면 그 토대를 단단히 해야 한다. 만약 가벼운 모래로 쌓는다면, 쌓으면 쌓을수록 더욱더 위태로워질 것이며, 더욱 더 빨리 무너질 것이다. 선한 일을 할 재능의 토대 가운데 겸손보다 더 단단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만약 그것을 겸손한 마음으로 쌓아두지 않는다면, 재능이 많으면 많을수록,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더욱더 위험해질 것이고,더욱더 쉽게 무너질 것이다. ..
교만한 이들은 서로 다투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 그러나 겸손한 이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을 가장 편안하다고 생각한다. 교만한 이들은 높은 곳을 찾는다. 그런데 누군들 높은 곳을 찾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모두가 다투는 것이다. 그러나 겸손한 이들은 낮은 곳을 찾는다. 그런데 그 누가 낮은 곳을 찾겠는가? 그러므로 홀로 편안한 것이다. 겸손한 이들은 낮은 곳에 산다. 그런데 낮은 곳은 더 떨어질 일이 없다. 그러나 교만한 이들이 높은 곳에 살고 있으니 위태로울 것이다. .....
겸손한 마음은 훌륭한 덕과 뛰어난 슬기를 담는 그릇이다. 그런데 다른 그릇은 부어 넣으면 넣는 만큼 차오르게 되지만, 이 그릇은 부어 넣을수록 더욱더 비게 된다. 그래서 부어 넣을수록 더욱더 담을수 있게 된다. .....
다른 덕이 자라나면, 겸손은 그와 함께 자라난다. 그래서 덕이 채워질수록 자신을 더욱더 비었다고 보게 되고, 겸손이 두터워질수록 더욱 더 자신에게 겸손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더 비게되고, 비면 빌수록 하느님은 더욱더 그에게(은혜를) 내린다. 그러므로 겸손한 이는 가난한 듯하지만 날로 부유해지고, 천한 듯하지만 점점 귀해지고, 어리석은 듯하지만 매우 지혜롭고, 세상 사람인 듯하지만 실은 하늘나라의 사람이다.
(칠극, 겸손으로 교만을 누르다. 5, 54-80쪽)
-김동원(비오) 신부님 엮음-
첫댓글 '우리가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구세주의 별빛을 보고 굳어진 삶의 자리를 떠나서 새로운 삶의 길을 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세상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심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가장 비천하고 가난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심은 나의 교만과 욕망의 마음을 겸손과 가난의 생활을 하라는 메세지 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마구간은 우리 마음속도 욕망과 미움과 거짓과 질투와 교만으로 뒤섞인 깨끗하지 못한 처지를 가리킨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더러움을 마다않고 찾아오시는 예수의 사랑에 의해 변화될 것이다.' 은혜로운 이 말씀으로 오늘도 행복합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구세주의 별빛을 따라서 예수님을 찾기위한 길을 떠나는 자세로 하루 하루 성찰하고 묵상하고 기도하며 살아갈수 있기를.. 주님께 청합니다.
아아!... 어찌하여 제 눈이 이 토록 귀한 말씀들을 바라 볼 기회를 주셨는지요!...주님!! 이 감사함을 어찌 다 표현하리이까 !!
"겸손한 사람은 하늘의 사람입니다."는 말씀이 오늘 성탄절에 더욱 울립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겸손의 표양이시지요. 하늘의 하느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땅에 내려오셨기 때문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