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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안녕하십니까?
지금 저희가 탈출기 9장, 10장을 읽으려고 하는데요.
여기까지 읽어 오면서 제가 전에도 한번 그런 말씀을 드린 기억이 나는데
이렇게 묵상하면서 여러분들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겠어요.
이 탈출기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저는 굉장히 마음 속으로 짐이 되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제가 본당 신부잖아요. 요번이 벌써 3번째 본당 신부예요. 그런데 본당 신부로서
나는 파라오 같은 본당 신부일까? 아니면 모세 같은 본당 신부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자꾸 저한테 어떤 장면이 떠오르겠습니까? 제가 파라오 같았을 때가 자꾸
이렇게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러면서 정말 하느님의 뜻을 찾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인간적인
판단들. 때로는 제 욕심으로부터 제가 자유롭지 못한 경우도 있는 거 같애요.
내가 뭘 하고 싶은데 어떻게 이걸 하면은 될까? 뭐 이런 것들. 이렇게 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하면 될까? 그게 정말 하느님의 뜻인지는 묻지 않고 자꾸 제
마음 안에 있는. 그러다 그런 기억들이 쌓이면서 점점점점 사회 생활을 하면서
잘못하면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도 있겠다.
뭔가를 내가 움켜쥐고 있느라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들을 알아듣지 못한적이
참 많은 거 같다. 이런 생각에 조금 여러가지로 묵상할 꺼리를 찾는 것 같습니다.
그냥 우리가 이런 식으로만 성경을 읽어버리면 그거는 올바른 성경 이해는 아닐
것 같애요. "파라오는 나쁜 놈!" 뭐 그러면서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의 모습을 거기다
투영해 버리고 이런다면은 그거는 성경 독서의 올바른 방법은 아닌 것 같애요.
파라오의 모습을 보면서 혹시 내 모습도 저 안에 내 모습도 있지 않은가?
여러분들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 파라오 같은 어머니입니까? 아니면
모세 같은 어머니입니까? ^^*~~~
많은 경우 제가 부모님들을 이렇게 만나서 자녀 문제 때문에 걱정하는 부모님들을
만나면은 열 명에 아홉 명은 대부분 부모님들이 더 문제가 있어요. 자신의 문제를
자녀들에게 투영하는. 또는 이런 경우도 많은 거 같애요. 자기가 이런 이런 거를
하지 못해서 행복하지 않았는데 그거를 자녀를 통해서 이루려고 하는. 자신의
행복을 이렇게 강요하는.
저도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데 저희 어머니는 저한테 뭘 자꾸 먹으라고 하세요.
왜냐하면 본인이 이제 연세가 높으시니까 맛있는 거를 먹고 싶은데 못 먹잖아요.
그러니까 누구를 통해서 대리 만족을 느껴야 되느냐하면은 저를 통해서 ^^*~~~
그런데 사실은 저도 어떤 나이가 됐습니까? ^^*~~~ 입에 땡기는 대로 먹었다가는
좀 큰일나는 그런 나이가 됐거든요. 그래서 어떨 때는 막 어머니랑 이렇게 좀 언성이
높아질 때도 있어요. 제가 신자들한테도 잘 못하지만 저희 어머니한테는 정말 잘
못하거든요. 그래서 막 그럴 때도 있는 거 같애요.
우리들의 어떤 우리들이 갖고 있는 사실은 파라오가 갖고 있는 그 권력을 우리도
갖고 있습니다. 누군가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부모라면 자녀에 관해서 아니면
배우자에 관해서 아니면 뭐 어떤 작은 집단 안에서 우리들이 갖고 있는 그런
권력이 있습니다. 아니면 뭐 사회 생활을 하는 분이라면은 그 사회생활 안에서.
그런데 그 때 정말로 하느님의 뜻을 찾는 모세와 같은 인물인가? 아니면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파라오와 같은 인물인가?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이거는 조금은 많은 분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시는 문제인데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하느님 나라에 보낼 때가 있지요? 그랬을 때도
우리들이 돌아가신 분들을 사랑하는 마음에 특히 자녀를 먼저 보내신 부모님들이
이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자식들을 마음에서 놔주지를 않아요. 그것도 제가 보기에는 파라오랑 비슷한 겁니다.
하느님의 나라로 떠나가야 되는데 그 돌아가신 분이, 그 자녀가. 우리가 마음 속에 꽉
붙잡고 있는 겁니다. 그들이 하느님 나라고 가야 되고 그리고 언젠가 우리도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도 그 길을 따라가야 되는데.
저도 저희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 마음 한편으로 굉장히 그 어떤 효도하지 못했다는
불효의 마음, 슬픈 마음으로 이렇게 보냈지마는 어느 땐가 한 일 년쯤 지나고 나서
묵상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러라구요. "아, 내가 이제 하늘나라 가도 만날 사람이
있구나. 하늘나라 가면은 우리 아버지가 나를 반갑게 맞아 주겠구나." 그러면서
나중에 하늘나라 갈 때도 뭔가 이렇게 기대할 것이 있구나. 그냥 무섭지마는 않겠다.
이런 생각이 조금 저한테는 위로가 되는 거 같애요.
반대로 이런 파라오와 모세의 이야기를 생각을 하면서 가장 우리들이 봐야될 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안에서 어떤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모습인 거 같습니다.
국제 정치를 이렇게 바라보면은 우리가 대한민국도 역시 성숙한 모습은 아닌 것
같습니다.
국제 정치를 이렇게 바라보면은 정말 유치원 교실에서도 일어나지 않는 그런 일들이
세상 안에서 일어나고 있고 많은 어른들이 애들한테 얘기할 때는 "싸우지 말고 대화
해라. 그리고 선생님한데 물어봐서 옳고 그른거를 얘기해라." 이렇게 얘기하면서도
정작 어른들이 됐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총을 쏘고, 폭탄을 내 던지고, 테러를 하고,
그러면서 생기는 여러가지 문제들. 그 배후에는 뭐가 있을까요?
그 배후에는 그와 같은 폭력, 그와 같은 충돌, 그와 같은 누군가의 고난을 통해서
이득을 챙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게 굉장히 가슴 아픈 점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다 그와 같은 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할까?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기아의 문제, 매일 매일 그런 죽어가는 어린이들의 숫자. 사실은
제3세계에서 엄청납니다. 그리고 심지어 어떤 일도 있습니까?
제3세계에서 부모가 아이들의 눈을 빼서 판다든지 뭐 이런 끔찍한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 모든 문제가 전 세계가 군사 군비에 쓰는 그런 예산의 10%만 감축한다면은
그런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수 있는데 인류는 어떻게 하는 겁니까?
거기에다 신경 쓰지 않고 비행기 사는데, 총 사는데, 대포 사는데, 폭탄 만드는데
그런데다가. 인간이 참으로 어리석은 거 같애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포기해야 될까요? "인간 싫어!" 그러면서. ^^*~~~ 아닙니다.
다름과 같은 생각을 해 보셔야 됩니다. 우리 천주교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심볼은
어디에 있지요? 성체성사에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미사를 할 때. 성체성사의 중심
메세지는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원 사건을 통해서 또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되었다.
그걸 우리는 성체성사 안에서 어떻게 체험합니까? 밀가루 떡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하는,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변하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런
밀가루가 하느님의 몸이 될 수 있고, 포도주가 하느님의 피가 될 수 있다면은,
그렇게 변할 수 있다면은, 세상도 변할 수 있다는 겁니다. 누구를 통해서?
우리들을 통해서. 우리가 교회를 이루고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이루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렇게 하느님의 도구를 통해서 도저히
희망이 없는 거 같이 보이는 이 세상 안에서 그 희망을 간직하려는 그것이 우리가
교회를 이루고 있는. "하느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바로
그 교회의 그와 같은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열심히 세상 안에서 그런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것을 살아가면서
세상은 조금 더 좋아지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온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세상이 아직까지 인간이 탐욕에 완전히 빠져버려서 세상이 멸망하지 않고 인간의
역사가 그나마 지금까지 거슬러 왔고 그래도 우리가 순간순간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된 그런 배후에는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대는 겁니다.
이제는 누구 차례가 된 겁니까? 이제는 우리 차례가 된 겁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아
듣고 그것을 살아가야 그것이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이해하려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이 하느님의 말씀을 일고 이해하면은 이 세상이 어떻게 됐든 나는 혼자 뭐
1등칸 타고 하느님 나라 갈 수 있어! 이게 아닙니다.
여기서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그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온 고 십자가의 길, 내 십자가를 지고 살아간다면은
세상은 지금보다 조금 더 좋아질 것이고,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이다.
그것이 우리들이 얘기하는 구원의 그런 한발자욱 다가서는 신앙인의 모습이고
신앙인들이 가져야될 그런 비젼이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들이 생각하시면서
이 탈출기 텍스트를 같이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얘기하면 성경 읽기가 좀 무서워져요. ^^*~~~
하지만 지난 시간에 이어 우박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우박에 관한 재앙은 앞선 재앙들과는 조금 다르게 기후와 관련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집트 카이로 주변 지역의 강우량은 100mm가 된다고 해요.
굉장히 적은 강우량입니다. 그러면서 그 일곱째 재앙은 파랑오에 대한 경고가
매우 자세하게 전해지고 또 재앙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열려져 있습니다.
내가 재앙을 내리겠지만 이렇게 이렇게 하면은 피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 듣고 자신의 가축과 자신의 종들을 피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더라라는 그와 같은 내용입니다. 좀 이상하지요?
재앙을 내릴꺼면 그냥 완전히 힘들게 내려야지 어떻게 그렇게 피하게 내리느냐?
지혜서 11장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한테 그렇게 징벌을 내리셨지만 굉장히 신중하게 그것을
내리셨고 우리가 계속해서 반복하는 얘기가 하느님은 이집트가 멸망하는 것을
바랍니까? 아는 것을 바랍니까? 아는 것을 바랍니다. 따라서 지혜서 11장에
보면은 하느님에 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고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그들의 죄를 보아
넘겨 주신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누가 혐오하는 겁니까? 하느님은 나를 미워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가 나를 미워합니까? 내가 나를 미워합니다. 여러분들 인생에
풀어야할 중요한 숙제 중에 하나가 뭐냐하면 나를 용서하고 나와 화해하는
겁니다. 그렇게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때 어떤 모습이 되는 겁니까?
거울 앞에선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즉 하느님이 우리를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우리를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자기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그런 어떤 혐오되고 있고 저주 받는.
젊은 사람들 만나서 많이 이렇게 얘기하다 보면은 얘기하다 항상 그런 질문을
자주 던집니다. "너는 너 자신이 좋으니?" 그러면은 대부분 들려오는 대답이
긍정적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요즘은 특히 뭐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불만일까요? 외모 때문에 불만이 사람들에게 많이 있는 거 같애요.
저는 참 이애가 안 가요. 왜냐하면 여기도 제 연배랑 비슷한 그런 50대 넘으신
분들이 이렇게 있겠지만 50대 넘으면은 한 20대 애들 보면은 무조건 이뻐요.
그죠?^^*~~~ 예, 그냥 젊은 게 이쁜 거예요. 10대, 20대 애들 보면 그 자라나는
생명력, 젊은 게 이쁜 거예요.
그런데 걔네들은 자기 자신을 보면서 싫어해요. 누구처럼 예쁘지 않고, 누구처럼
잘생기지 않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얼그러진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충분히
어떤 자신감을 가지고 "어, 나는 정말 아름다워!" 생각하면서 지금은 아름다운
나이야라고 생각을 하면서 이렇게 살아야 될 나이인데 조금 이렇게 힘든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하느님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고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신다라고 지혜서 11장은 얘기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요나서를 한벅 기억해 봅시다. 이집트에 관해서는 아니지만
니네베에 관해서 얘기 하면서 니네베에 관한 야훼의 자비에 대해 요나 예언자는
불평합니다. 그러자 그 마지막 부분에 야훼가 요나 예언자에게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너는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동정하는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 4,10-11)
예, 니네베는 어디의 수도입니까? 아시리아의 수도입니다. 아시리아는 어떤
나라입니까?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뭐 유다인들을 많이 죽였던 그와 같은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나라를 이 요나서는 그 대목은 안 나오지만
그걸 읽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니네베가 어떤 곳이냐? 본래 아시리아의 수도는 아수르라는 곳이었는데 나라가
강해지면서 니네베로. 옛날에는 니네웨라고 그랬지요? 니네웨로 수도를 옮깁니다.
왕국을 옮깁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요나 예언자가 니네베는 망할 것이라고
예언을 하니까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를 하고 하느님이 그들을 도와 주니까
하느님이 그들을 구해 주는 겁니다.
그것을 읽는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막 마음이 북받칠꺼예요. 어떻게 우리에게
이렇게 큰 고난을 준 저 민족을 용서하고 뭐 중간 중간에 다른 신도 섬기고 해서
하느님을 화나게 했지만 그래도 야훼를 섬겨온 우리 민족에게는 이 큰 고난을
주는가? 거기에 대해서 굉장히 유다인들의 마음은 힘이드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요나에게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니네베도 누가 만들었다는 겁니까? 하느님께서 만들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지혜서와 요나서 안에는 이집트와 니네베 이방인들을 벌하시지 않는
이유가 하느님의 보편적 자비와 사랑 그리고 동정에 있다는 그런 생각이
담겨져 있습니다.
반면 탈출기9장 16절, 우리가 함께 읽은 "나는 파라오와 너를 살려 두었다.
너에게 내 능력을 보이고 온 세상에 내 이름을 떨치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에는 사실은 그런 보편적 자비와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상이한 건 어떤 것이냐? 지금 우리가 읽은 탈출기 9장에서는
야훼 하느님의 유일성이 중요합니다. 니가 나를 아는 것. 니가 나는 야훼다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야훼 한분 밖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유일성이 중요한 겁니다.
반면에 이런 지혜서 11장이나 요나서 같은 데에는 그런 유일한 하느님이
유일하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옛날에는 야훼 하느님은
이스라엘만 구원하면 됐고 이집트의 하느님은 이집트를 구원하면 됐는데
이제는 야훼 하느님 밖에 없으니 야훼 하느님이 이집트도 이스라엘도,
아시리아도, 니네웨도 구해야 하는 그런 보편성이 강조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탈출기의 관점과 지혜서, 요나의 관점은 신학적으로 그 뿌리는 같이
두고 있는 겁니다. 유일한 하느님이기 때문에 온 세상을 구원한다. 그런데
탈출기는 어디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습니까? 하느님의 유일성 그것을 이집트가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반면에 지혜서 11장과 요나서에서는 그 유일한 하느님은 세상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라는 겁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이 세상에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하느님이 교회만 구원하시겠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서도.
이미 신약으로 넘어오기 이전에 구약 성경에서도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당신께서 창조하신 온 세상 모든 민족을 구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면 구약에서 그 이스라엘의 역활을 신약에서 누가 하는 겁니까?
교회가 하는 겁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은 교회입니다. 하느님께서 교회를 택하신
것은 그 교회를 통해서 세상 모든,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하느님의 유일성과 보편성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겁니다.
예, 문제는 그 다음이 질문이 되는 거겠죠? 아까 말씀드린대로 그럼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도구로 불림을 받은 교회는 또 그 교회의 한 사람인
나는 세상 안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나? 이런 것들에 대해 어떤 질문이
남아 있지요?
예, 그리고 이집트 신들 중에는 이 우박 재앙과 연결시켜 본다면 앞서 한번쯤
제가 그림으로 보여 드렸을꺼예요. '누'라는 그와 같은 여신이 있습니다.
하늘을 관장하는 그와 같은 신입니다. 그 여신이 자신의 팔과 다리로 자기의
몸으로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그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 외에도 슈, 호루스, 이시스, 세트 그와 같은 신들이 이 우박 재앙과, 일곱째
재앙과 관련이 돼 있습니다. 슈라는 이집트의 신은 바람 신이고, 호루스는 하늘의
신이고 이시스와 세트와 같은 신들은 곡물을 보호하는 신들입니다.
이러한 신들이 자신의 역활이나 기능을 했습니까? 못했습니다. 자신의 기능을
하지 못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야훼와 파라오의 대결뿐만 아니라 야훼와 이집트의
신들의 대결 안에서 야훼가 승리하는 모습을 우리는 일곱째 재앙의 이야기의
행간 안에서 읽게 됩니다.
예, 20절부터 21절에 나타난 문학적인 평행 대조가 있습니다. 20절을 한번
볼까요? 파라오의 신하들 가운데 주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제 종들과
집짐승들을 재빨리 집안으로 피신시켰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은 자들은 제 종들과 집짐승들을 그대로 들에 내버려 두었다.
예, 여기서 보면 야훼의 말씀을 두려워하다. 야훼의 말씀에 자리자지 않다.
두 가지 표현이 서로 대칭되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는 집들로, 하나는 들판에.
하나는 피하게 했다. 하나는 남겨 두었다. 두 가지가 양쪽에 갈립니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은 뭐냐? 야훼의 말씀을 두려워하느냐? 표현이 좀 특이하죠?
야훼의 말씀을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 뭐 그럴 것 같은데 야훼의 말씀을
두려워한다. 야훼의 말씀에 자리잡지 않는다. 좀 특이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예,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집'이라는 이와 같은 개념입니다.
'집' 그러면 어떤 개념이 연결돼 있을까요? 맛습니다. 성전의 개념이 연결 돼
있습니다. '집 안에' 인간이 보호받고, 인간이 안전하게 느낄 수 있는 그와 같은
공간입니다. 그 공간 중에 최고로 상승된 공간은 바로 하느님의 집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그 성전에서 야훼 자신이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또 집이라는 의미가 나중에 성경을 읽다보면은 바로 그런 식의 의미로 자주
쓰입니다. 다윗의 집이라면 다윗의 왕권, 다윗의 가문에 내려진 그와 같은 어떤
권력 내지는 축복 이런 것들을 함께 함유하는 그와 같은 의미입니다.
마지막으로 여기서 피하게 하다. 남겨 두다라고 하는데 피하게 한다라는 건
집안에 피신의 개념이겠지요? 들판에 남겨 두다라는 거는 조금 더 의역하자면
이와 같은 의미입니다. 여기 영어 잘 하시는 분들 많은테니까 영어로 얘기하면
어벤던(abandon)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그거를 "그게 어떻게 되든지 난 상관 없어." 그리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는 겁니다. 그런 어떤 어감의
차이를 보면서 문학적 대조를 여러분들이 유심히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일곱 번째 재앙에서 파라오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지요? 27절입니다. "이번에는 내가 죄를 지었다. 주님께서는
옳으시고 나와 내 백성은 그르다."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구약 성경
안에서 이와 같은 대목이 여러번 등장합니다. 기억하십니까?
예를 들어 다윗이 또는 사울이 또는 열두 지파의 한 사람이었던 유다가 타마르
에게 뭐라고 하냐하면, "그 애가 나보다 더 옳다."
그리고 1사무 15장에서 사울이 사무엘에게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잖아요. 그러자 사무엘이 그 죄를 지적하니까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1사무 26,21에서 다윗이 우리야를 죽게 한 다음에 나탄이 자신에게 찾아오니까
나탄에게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표현은 다르지만 우리 말 번역은 다르지만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모두 '하탓'이라는 같은 동사가 쓰였습니다. "내가 잘못했다.
내가 죄를 지었다." 라는 그와 같은 내용입니다.
마지막으로 여기서 우박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하면서 자주 자주 몇번에 걸쳐서
등장하는 좀 특이한 명사가 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콜롯' 그러는데요.
'콜' 그러면 소리라는 소리입니다. '콜롯' 그러면 그거의 복수입니다.
'소리들' 이상하지요? 왜 거기에 복수가 쓰였나? 우리 말로 "야, 나는 어저께
정말 아름다운 소리들을 들었어!" 이런 말 안 하잖아요. "큰 소리들을 들었어!"
이런 말 안 하잖아요. 그런데 복수형을 꼭 썼습니다.
그 복수형은 탈출기 19장, 20장 뭐 이런데서 등장하는데 주로 어떤 장면이 있냐
하면 야훼 하느님이 시나이 산에서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그와 같은 소리들 또는
1사무 12장에서도 사무엘이 야훼에게 청하자 야훼가 우레와 비를 내리는 그와
같은 장면에서.
따라서 여기서 '소리들'이라는 거는 단지 큰 소리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큰
소리에 담겨 있는 어떤 신적인 권능을 함께 얘기하는 그와 같은 표현이라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신약으로 넘어와서도 그렇게 소리가 강조되는 경우가 있습니까?
여러분들 구약을 하신다고 그래서 신약을 다 이렇게 ^^*~~~
신약을 다 이렇게 접어두는 시간?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신약에서도 큰 소리가 있습니까? 소리에 관해서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을 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리잖아요. 자세히 읽어보면은
마태오, 마르코, 루카가 전부 다 그거를 다르게 전합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
중에서 어떤 거는 예수님만 그 소리를 듣고 어떤 거는 그 소리를 전체가 다 들은
것처럼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여튼 그런 소리 또는 현성용 사건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변하고 나서 제자들이 놀라는데 예수님께서 마르코 복음 9장입니다.
마르코 복음 9장에 보면은 "이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그와 같은 내용들. 또는 예수님이 마지막에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실 때 그냥 숨을 거두십니까? 아니면 큰 소리를 지르면서
돌아가십니까? 예, 큰 소리를 지르면서. 그저자 백인 대장이 뭐라고 하는 겁니까?
"아, 저분이야말로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라는 큰 소리에 관한.
더 나아가 나중에 교회가 이어지는 사건을 전하고 있는 사도행전 2장에 성령
강림 사건에서는 성령이 내리는데 어떤 모양으로 내리지요? 예, 혀의 모양의
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직역하자면은 혀 모양의 불.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혀라는 거는 소리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겁니다. 불이 있었고 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성령을 통해서 사도들이 소리를 냅니다. 그 소리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와서 사도들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소리들에 관한 성경 구절
*탈출 19,16: 셋째 날 아침, 우렛소리와 함께 번개가 치고 짙은 구름이 산을 덮은
가운데 뿔 나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자, 진영에 있던 백성이 모두 떨었다.
* 1사무 12,18: 사무엘이 주님께 간청하자, 그날로 주님께서 천둥과 비를
내리셨다. 그리하여 온 백성이 주님과 사무엘을 매우 경외하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뿔 나팔 소리, 천둥과 비를 내리는.
여기서 소리라는 말이 등장하게 됩니다.
예, 사도행전에서도 세례, 현성용, 아니면 예수님 돌아가시는 장면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 사건. 그리고 제일 많이 소리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소리 그러면 히브리
말로는 '콜' 그럽니다마는 그리스 말로는 '포네'라고 하는데요. 요즘도 왜 핸드폰
그럴 때 '폰' 그러잖아요. 같은 그리스 말에서 나온 겁니다.
포네 그러는데 그 포네라는 말이 아주 자주 등장하는 게 묵시록입니다. 묵시록
에서 하느님에 관해서 얘기 할 때. 처음으로 소리가 등장하는 거는 묵시록 1장
10절입니다. "어느 주일에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내 뒤에서 나팔 소리처럼
울리는 큰 목소리(포네 메칼렌)를 들었습니다."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에 관한 현시가 시작되는 겁니다.
굉장히 많은 소리에 관한 얘기가 있다가 마지막으로 소리가 등장하는 건
묵시 21,3입니다. "그때에 나는 어좌에서 울려오는 큰 목소리를(포네스 메칼레스)
들었습니다." 큰 목소리. 어좌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와 같은 커다란 소리, 밝은 빛 이런 것들을 신적 권능과 연결
시키는 그런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걸쳐 계속해서 등장하는 그런 표현들,
문학적인 표현으로서 우리가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유일하게 조금 다르게
등장하는 사건이 기억나십니까? 엘리야 예언자가 도망간 사건?
엘리야 예언자가 도망 가서 호렙산까지 가는데 하느님이 크게 천둥치는 데도
있지 않고 다른 큰 어떤 뭐 그런 폭풍 속에도 있지 않고 나중에 보니까 이런 산들
바람 속에 하느님이 계시더라라는 조금은 좀 의외의 장면에 대한 서술을 우리가
만나기도 합니다만 대부분은 큰 목소리, 밝은 빛과 함께 하느님이 등장하는 그런
어떤 신적 현현의 장면들이 구약에서도 신약성경에서도 발견이 됩니다.
예, 여덟 번째 재앙 메뚜기 소동으로 넘어가도록 하지요.
여덟 번째 재앙, 여덟 번째 재앙은 좀 특이합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재앙들은
앞선 재앙들과는 조금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있었어요. 그런데 여덟 번째 재앙은
일곱 번째 재앙과 연결이 돼 있습니다. 먼저 한줄 한줄 읽기 전에 10장 5절을
한번 읽어 봅시다.
* 탈출 10,5: 메뚜기들이 온 땅을 덮어 땅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우박의
피해를 입지 않고 남은 것들을 먹어 버리고"
따라서 어떤 재앙을 전제로 합니까? 우박 재앙. 앞에서 보면은 보리 이런 것들은
다 우박에 떨어져 버렸는데 이미 추수할 때가 된 그런 것들은 떨어져 버렸는데
여기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우박의 피해에 남은 것들. 제가 생각하기에 밀과
귀리가 아닌가 합니다.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만.
아무튼 그렇게 우박에 떨어지지 않고 남아 있었던 그런 작물들. 거기에 대해서도
이제 메뚜기 떼의 어떤 재앙을 얘기한다는 것. 일곱째 재앙과 여덟째 재앙은
연결 된다는 것. 그리고 분량으로 보더라도 일곱째 재앙인 우박 재앙은 모두
23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메뚜기 재앙도 모두 20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열 가지 재앙 이야기 중에서 굉장히 많은 분량을 갖고 있는. 따라서 일곱째
재앙과 여덟째 재앙은 굉장히 연결 돼 있는 그런 느낌으로 우리가 함께 읽을
수가 있습니다.
* 탈출 10,1: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파라오에게 가거라."
여기까지는 우리가 짐작할 수 있지요? 여덟 번째 재앙이니까 어떤 재앙과 공통적이
겠습니까? 우리가 세 재앙씩 세 재앙씩 묶었잖아요. 여덟 번째 재앙이니가 "파라오
에게 가거라. 물가로 가라."는 얘기 없이 그냥 파라오에게 가거라. 파견만 했으니까
두 번째, 다섯 번째, 여덟 번째 그렇게 연겨 됩니다. 단지 파견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조금 한 가지만 덧붙여집니다. "그의 마음과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만든
것은 나다." 왜 그것을 완강하게 만들었는지에 관해서는 좀 더 나중에 얘기합니다만
직역하자면, "파라오의 마음뿐만 아니라 그 신하들의 마음까지, 신하들의 심장까지
무겁게 만든 것은 바로 나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내가 왜 그것을 그렇게 만들었는지에 관해서 설명합니다. 뭐라고 설명하지요?
"그것은 그들 한가운데에 나의 이 표징들을 일으키려는 것이고" 직역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내가 나의 이 표징들을 그의 한가운데에 두기 위해서"
조금 이상해요. 그의 한가운데서. 그는 누굴까요?
그냥 앞선 대목으로 얘기하면 파라오라고 그냥 얘기했으면 좋겠는데 여기서 얘기하는
거는 신하들까지 같이 얘기했기 때문에 "그들의 한가운데에" 이렇게 얘기했으면
좋겠는데 이상하게 문장은 "그의 한가운데"라고 단수가 쓰였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여기서 의견이 좀 둘로 나뉘어요. 어떤 사람들은 '그'라고 단수가
쓰였으니까 이집트라고 봐야 된다. 이집트의 한가운데에 두기 위해서라고 봐야 된다.
또 다른 한 집단은 여기서도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을 좀 묶어서 집합적으로 얘기하는
것이다라는 내용으로 사람들의 의견이 가립니다.
예, 그런데 그 이유가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절에서도 연결이 됩니다.
따라서 이거는 조금 장절 나눈 사람이 실수한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장절은
누가 나누었을까요? 성경의 장절은 본래 고대 사봅에서는 나뉘어져 있지 않고
거의 중세 때로 넘어 오면서 누가 나누었냐 하면 출판업자들이 나눕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출판업자라고 그래서 그냥 책장사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중세 때 내지는 현대에 와서까지 많은 유럽의 그런 유럽 사회 안에서의 출판업자들은
자기의 이름을 걸고 출판을 합니다. 그러다보니까 굉장히 그런 어떤 출판업자의 이름이
비중을 갖는 그와 같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적어도 누가 출판했다라고 얘기한다면은 거기에 어떤 무게가 좀 실리는.
요즘에 우리 나라에서도 그런가요? 여러분들도 어느 출판사에서 나온 책 그러면
"나는 그 책은 믿음이 가!" 이럴 수 있잖아요.
더군다나 저희 같이 뭐 신학 공부하는 사람들은 뭐 네덜란드에 있는 뭐 네덜란드에
있는 뭐 브레일이라는 출판사라든지 독일에 어떤 출판사라든지 아니면 미국에 있는
어느 출판사라든지 그쪽에서 어떤 책이 나왔다. 그런데 그 책이 책방에 꽃혀 있는데
한권 꽃혀 있었다. 그러면은 무조건 사고 봅니다. 다른 사람이 사기 전에 사고 봅니다.
거기서 나온 책의 내용들은 뭔가 좋은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예, 따라서 중세 때 출판업자가 만든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분명히 어떤 비중이 있었던. 성경 텍스트에 관해서는 무지한 그런 어떤 책장사가
아니라 그런 어떤 지식을 갖고 있는 지식인 중에 하나였던. 제가 그 사람의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무튼 그런 어떤 출판업자가 장절을 나눕니다. 맨 처음에는 장을 나누고 그 다음에
이제 절을 나누게 되는데 그런 장절을 나누는데 여기서는 조금 문장이 잘못 끊어져
있어요. 한꺼번에 본다면은 이와 같은 겁니다.
* 10,1-2
내가 이 나의 표징들을 그들 한가운데에 두기 위하여
그리고 네가 너의 아들과 아들의 두 귀에 전하기 위하여
내가 이집트인들에게 무자비했음을 그리고 내가 그곳에 두었던 나의 표징들을
그리하여 너희들이 "나는 야훼다."임을 알 수 있도록.
내가 그들의 마음을 그렇게 그들의 심장을 그렇게 무겁게 하였다. 그 이유는
"내가 이 나의 표징들을 그의 한가운데에 두기 위하여, 그리고 네가 너의 아들과
아들의 두 귀에 전히가 위해서 무엇을? 내가 이집트인들에게 무지비했음을 그리고
내가 그곳에 두었던 나의 표징들을 너의 아들들과 너의 아들들의 두 귀에 전하기
위해서 그리하여 최종적인 결론은 뭐냐하면 너희들이 "나는 야훼다."임을 알 수
있도록. 여기서 말하는 너희들은 누구일까요? 이집트일까요? 이스라엘일까요?
예, 모세에게 너의 아들과 너의 아들의 두 귀에 전하기 위하여라고 얘기한 겁니다.
따라서 너희들이 "나는 야훼다."임을 알 수 있도록 여기서 말하는 너희들은 이집트가
아니라 이스라엘입니다. 떠라서 앞선 일곱 번째 우박 재앙에서는 이집트가, 파라오가
"나는 야훼다."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여덟 번째 재앙에서는 누가
나는 야훼다라를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까? 이스라엘이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관심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로 넘어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몇 가지 좀 짚어 볼께 있는데요. 우선 다음과 같은 표현입니다.
히브리 말은 순서가 반대이기 때문에 먼저 요거부터 이야기 하겠습니다.
"전하기 위하여"라고 이렇게 얘기했는데 히브리 말 동사는 써서 전한다는 뜻입니다.
그냥 전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써서 전해준다라는 그런 어떤 어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말 성경에는 10,2: 내가 이집트인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라고 이렇게
조금 의역을 했습니다만 그 동사 안에는 분명히 어떤 뉘앙스가 있냐하면,
이집트인들을 무자비하게, 자비롭게 대하지 않았다. 앞서 얘기한 것과 연결시켜
본다면은 여기서는 야훼가 동정심을 가진 겁니까? 가지지 않은 겁니까?
가지지 않은 겁니다. 동정심을 없이 대했다. 따라서 유다 학자들에게는 요 문장이
조금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야훼가 자비롭지 않다라는 것은 조금 문제가 되기 때문에 유다 학자들은
요 문장을 해석하면서 이것을 이렇게 무자비하게 대했다라는 얘기가 아니라 이집트
인들을 조롱했다, 놀렸다라는 의미 정도로 해석해야 돈다라고.
왜냐하면 야훼가 무자비하다. 이게 함께 맞붙어 있을 수가 없어요. 유다 신학 안에서는.
그러다보니까 고대 유다 전통 안에서는 이집트인들을 조롱했다라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너희들이 이제 "나는 야훼다."임을 알 수 있도록 앞서 얘기한 대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 중요합니까? 야훼를 아는 것이?
여러분들 이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종교, 신앙심을 갖고 있는 이유는 뭡니까?
구원되는 거죠. 구원되는 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입니다. 그런데
따라서 과거에는 교회를 어떻게 설명했냐 하면, 구원의 방주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교회에 들어와야지 나중에 심판, 노아의 홍수와 같은 그와 같은 심판이 올 때 우리는
살아 남을 수 있다.
따라서 교회에 들어와야만 한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을 전해야 한다.
거기까지만 딱 생각해 본다면은 어떤 게 옳은 방법입니까? 지금 우리 이거 하는 게
아니라 여기 홍대 앞에 나가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쳐야 합니다. 그건 거기
까지만 딱 생각을 해 본다면은.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그와 같은 그 교회에 대한 생각들을 좀 바꿨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 왔다고 자동적으로 구원도는 것이 아니다. 이게 무슨 그 뭐죠?
많은 분들이 세례 받거나 지금 저희 본당에서는 견진 성사 준비하고 있는데요.
세례 성사 받거나 견진 성사 받는 거를 자동차 면허증 따는 것처럼 생각을 하세요.
그래서 자녀들이 어떤 분들은 그런분들 많아요. 자녀들이 견진 성사 안 받았어요.
그리고 견진 성사 받을 마음도 없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너 요번에
본당에서 견진이 있다던데 견진 받아야지." 해서 막 다그칩니다. 그럼 자녀들은
안 가겠다고 그럽니다. 그러면 부모님들이 저한데 와서 뭐라고 그러냐 하면,
"아, 그 직장 다닌다고 시간이 없어서 못 오겠다는데요. 그런데 어떻게 견진을
주실 수 없습니까?" ^^*~~~
제가 이렇게 생각하다가 열 명 중에 한 명은 정말 그럴 수 있으니까 그럼 견진 교리서
갖고 가서 이렇게 읽고 견진 성사 받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저한테 오시는 분들의
말들을 제가 믿습니다. 하지만 속으로 통계치는 다 알고 있습니다. 열 명 중에 아홉
명은, 이 자녀는 사실 견진 성사 받고 그 다음 주 주일 미사도 오지 않을 사람이다.
예, 나중에 여러분 하느님 나라 갈 때 그 앞에서 베드로 성인이 딱 앉아 가지고 우리가
흔히 만화책에 나오는 것처럼 "너 견진 성사 받았어? 안 받았어?" ^^*~~~
뭐 이런 거 물어 볼 거 같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이제 교회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오늘날 공의회는 교회를 뭐라고 가르치냐 하면, '죄인들의 공동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들은 죄인들의 공동체다. 하느님의 뜻을 알아 듣고 뭐 살아 가려고 하지만 잘
못한다.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아 가려고 하지만 그렇게 잘 못하더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가려 하지만, 살아야 되는 건 아는데 그렇게 잘 못하더라. 성령의 성전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교회의 모습인데 그렇게 잘 못하더라.
그러니까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될지는 사실은 잘 모르는 거는 아니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죄인들의 공동체다. 그러고 나서 보면은 그런면은 밖에 저 길거리에 나가
있는 사람에게 "우리 성당으로 와서 같이 하느님을 믿읍시다!"라고 얘기할 수 있는
근거가 굉장히 약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는 남습니다. 그게 뭐냐?
구원 받기 위해서 중요한 것. 그것은 바로 하느님을 아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하느님을 알 수 있기에. 여기서, 탈출기에서 얘기하는 파라오가 하느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고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은 그 앎을 통해서 구원되는
것도 있겠지마는 그 아는 것 자체가, 하느님을 아는 것 자체가 곧 구원입니다라는
생각. 그와 같은 신학이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에 보면 예수님도 뭐라고 그러냐하면, "너희가 나를 아는 것은 곧
아버지를 아는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오늘날 보면은 "그거 안다는 게 뭘
그렇게 중요할까?" 아닙니다. 성경의 얘기 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구원이라는 겁니다.
예, 그러면서 3절: "모세와 아론이 파라오에게 가서 말합니다. 주 히브리인들의 하느님
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야훼 히브리인들의 엘로힘이 이렇게 말한다. 직역하면
여기서도 같은 단어가 나오지요? 히브리인들의 엘로힘. 따라서 모세와 아론은 자기를
높인다면은 이스라엘의 엘로힘, 이스라엘의 신이 야훼가 너에게 이렇게 말했다라고
얘기하는데 파라오 앞에서 아직 어떻게 보면은 겸손한 것이고 좋게 말하면. 나쁘게
말하면 굉장히 자기 자신을 조아리는 겁니다. 좀 자신을 낮추는 표현입니다.
히브리인들의 엘로힘이 이렇게 이야기한다. "너는 언제까지 내 앞에서 굽히기를 거부
하느냐?" 여러분들 혹시 연필 있으시면 언제까지에다 밑줄을 쳐 두시면 좋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하겠느냐? 조금 있다가 다시 한번 나오는 표현이기에
그렇습니다.
"너는 언제까지 내 앞에서 굽히기를 거부하느냐?" 따라서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뭡니까?
이 의문문은 수사적 의문문인데 파라오의 어떤 불순종을. 조금 더 한발 더 나아가서
얘기한다면은 아직까지는 파라오가 야훼를 자신보다 월등한, 우월한 그런 신으로 인정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 수사적 의문문을 통해서 이제 야훼의
인내가 점점 한계에 다라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왜 자녀를 야단칠 때 그런 표현 한번쯤 써 보시지 않으셨어요?
"도대체 언제까지 이럴꺼야?" 뭐 이런 것. 저도 있었던 것 같애요. 금년까지만 ^^*~~~
고3때까지만 ... 뭐 이럴께요.
다음 시간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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