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규>라는 그림으로 잘 알려진 뭉크에 대해 입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사회상의 변화(를 언급하기는 힘든 것이 세계대전의 한복판에서 살았으니)부터 노르웨이나 파리 등등 거주지의 이동, 시기별 등등 다양한 관점에서 그의 행적과 업적은 물론 사후의 그에 대한 평가나 그의 작품에 대한 소식도 꼼꼼히 다뤘다.
작품들의 뒷이야기들도 재밌게 다루고 있으며 적지 않은 그림들이 실려 좋았다.
한 작품의 다양한 버전을 만들고 판화 버전도 창작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죽음과 연애, 총기 등 그가 겪은 다양한 사건들과 그에 대한 평가, 지냈던 장소에 따라 변화하고 성장하는 모습이 흥미롭다.
13.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본 것을 그린다."
55. <절규>는 마치 환상 속이나 꿈속에서 벌어지는 모습을 그린 것 같은 이질감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사실 이곳의 배경은 오슬로 피오르에 인접한 에케베르그 언덕이다.
56. 뭉크는 파리 유학 시절인 1892년, 습작 노트에 에케베르그 언덕에서 받은 느낌을 고스란히 기록해두었다.
친구 두 명과 함께 나는 길을 걷고 있었다. 해는 지고 있었다. 하늘이 갑자기 핏빛의 붉은 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나는 우울감에 숨을 내쉬었다. 가슴을 조이는 통증을 느꼈다. 나는 멈춰 섰고, 죽을 것 같이 피곤해서 나무 울타리에 기대고 말았다. 검푸른 피오르와 도시 위로 핏빛 화염이 놓여 있다. 내 친구들은 계속 걸어가고 있었고, 나는 흥분에 떨면서 멈춰 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자연을 관통해서 들려오는 거대하고 끝없는 비명을 느꼈다.
이 노트를 읽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 수 있다. 뭉크의 노트에 '절규'라는 말은 없다는 점이다. 절규. 누가 처음 한국어로 번역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노르웨이어 스크리크는 있는 힘을 다하여 부르짖는 '절규'보다는 너무 노랄 지르는 외마디 소리인 '비명'으로 해석하는 게 더 적절하다. / 소리를 내는 쪽은 / 자연이다. 인물은 자연에서 들려오는, 소리 없는 비명을 듣고 있는 것이며, 그 거대한 비명에 괴로워하며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있는 것이다.
67. 요악하자면, 거대한 자연 풍경에서 작가가 직접 경험한 강렬하고 비실체적인 감정을 색과 형태의 왜곡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뭉크의 <절규>는 독일 낭만주의, 상징주의, 종합주의, 나비파와 연관되어 언급되지만 어느 사조와도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134. 뭉크는 이때 입은 총상 때문에 수년 동안 힘들어했다. 비록 다친 것은 왼손이지만 뭉크는 이 상처 때문에 영원히 그림을 그리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 오발 사고를 낸 건 뭉크 자신이었지만 의도치 않게 극단적인 이별을 하게 된 뭉크는 이 일로 인해 점점 히스테릭하게 변해 간다.
139. 수물한 살 젊은 뭉크에게 첫사랑 밀리는 '사랑'이라는, 그가 추구하고 탐구해야 할 예술의 구심점을 만들어주었다. 검은 새끼 돼지 구룹에서 만난 율은 30대에 들어선 뭉크에게 여자의 '관능성과 마력'의 세계를 열어 주었다. 그리고 30대 중후반에 만난 툴라는 뭉크에게 '인생'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예술에 담도록 자극한 여인이었다. / 뭉크의 인생은 이들과의 사랑과 이별을 통해 더욱 침잠하고 고독해졌다.
154. 1898년 오스고쉬트란드에 이 집을 구입하면서 뭉크는 노르웨이에 정착지를 마련하게 되고, 이는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된다.
194. 베를린이 뭉크에게 기회와 성공을 가져단준 곳이라면, 파리는 뭉크가 자기 성찰과 내공을 쌓았던 도시였다.
198. 더 이상 실내에 있는 사람, 책 읽는 사람이나 뜨개질하는 여자들을 그려서는 안 된다. 살아 숨 쉬고, 느끼고, 아파하고, 사랑하는, 살아있는 사람을 그려야 한다. 나는 그런 종류의 그림들을 그릴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의 신성함을 이해하게 될 것이고,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할 것이다.
202. 고독은 뭉크의 예술 세계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분이다.
221. '프리즈'는 건물 내부나 외부 벽 윗부분에 그림이나 부조 조각이 일렬로 연결된 띠 모양의 장식을 말하는데, 띠 벽지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222. 뭉크는 <생의 프리즈>를 통해 작품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 전시되느냐에 따라 변화하고 조정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목표였다.
223. 뭉크는 그림에서뿐만 아니라 전시 기획과 디자인에서도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였다.
247. 바르네뮌데 시기에 그의 건강 상태는 악화되어 갔지만 화풍은 오히려 예전보다 더 활력 넘치고 강렬해졌다. 이 시기 뭉크의 화풍은, 모든 생명체는 단순히 물질적 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생명력 혹은 영혼에 근원한다는 생기론에 영향을 받는다. / 이런 화풍은 1920년대까지 지속된다.
275. 급기야 나치 정부는 노골적으로 뭉크에게 에켈리를 요구했다. 뭉크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림들이 몰수되거나 강제 처분될 것이 두려웠다. / 결국 뭉크는 1940년 4월, 오슬로 시에 자신의 모든 작품과 소유물을 기중한다는 내용의 유언장을 쓴다. / 뭉크는 결국 나치 정부의 패망을 보지 못하고 1944년 1월 23일 향년 80세의 나이로 에켈리에서 세상을 떠난다.
289. 뭉크는 / 너무 긴 시간을 외로이 보냈다.
291. 1959년 가을 / 한 사진 기자가 / 뭉크의 무덤을 촬영하려고 했는데, / 찾을 수가 없었다. / 화장장 선반에서 먼지 쌓인 뭉크의 유골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뭉크는 사망한 지 16년 동안이나 사람들에게 잊힌 채로 땅에 묻히지 못했던 것이다. / 오슬로 시는 1960년 10월 뭉크의 유골함을 '우리의 구세주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299. 전 시기에 걸친 뭉크의 다채롭고 방대한 예술 세계를 감상하고자 한다면 뭉크 미술관을, 뭉크의 핵심 작품들을 감상하고자 한다면 노르웨이 국립 미술관의 컬렉션을 보는 것이 좋다. 노르웨이 제2의 도시 베르겐에 있는 베르겐 미술관에서도 뭉크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 새 건축물은 스페인 건축가인 후안 헤레로스가 설계한, '람다'라고 이름 붙여진 13층짜리 전면 유리 건물이다.
312. 절규 : 강렬한 '시각적' 자극을 자연이 질러대는 거대하고 끝없는 비명이라고 '청각적'으로 느낀 뭉크가 이때의 경험을 생생하게 표현한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