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 일본 육사 입학
1945 해방 당시 일본군 육군 대좌(대령)
1945 미군정청 국방사령부 고문
1948 초대 육군 참모총장
1955 체신부 장관
● 미군정의 대소 방파제 구축
미군정하 한국군 창설의 주된 골간이 일본군 및 만주군 출신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일제하 독립 투쟁이나 항일 무장 투쟁의 맥을 잇는 독립군이 새로 수립될 민족 국가의 창군의 주역이 되는 것이 마땅하였지만, 그것은 전혀 실현되지 못했으며, 역사는 오히려 그 반대로 흘러갔다.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통일 민족 국가의 수립이 좌절되고, 민족의 자주국방을 위한 의지에 의해 군대가 창설된 것이 아니라, 해방 후 남한 지역에 수립된 미군정이 자신들의 한반도 점령 정책을 효과적으로 실현하고 남한에서 대소(對蘇) 방파제를 구축하기 위해 미국의 필요에 의해 조급하게 군대가 창설되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남한 군대 창설의 주역이 되어 한국전쟁에서 활약하고 그 이후 박정희(朴正熙)정권이 몰락할 때까지 한국 군대와 한국 정치를 주름잡았던 구군부 세력은 해방 이전 일본 제국주의에 봉사했던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이었다.
● 일본 육사 출신의 조선인 대좌
미군정하에서 이들 일본군 장교 출신들을 창군의 주역으로 성장시키는데 기여한 핵심적인 인물이 바로 이응준(창씨명 香山武俊)이다. 해방 당시 50대의 중견급 군장교로서 한국군의 모태인 미군정의 국방경비대 창설에 참여했던 원로급 일본군 장교들은 대부분 일본 육사 제26기생과 제27기생들이었다. 한국군 내부의 친일 인맥을 살펴보기 위해 잠시 일본 육사 출신들의 계보를 살펴보기로 하자.
일본 육사 제26기생과 제27기생 총 33명의 유학 경위는 대한제국 말의 일본 육사 유학생들과는 달랐다. 최초의 육사 입교자인 박유굉(朴裕宏, 1883년 입교한 구일본 육사의 마지막 졸업생인 제 11기생, 1884년부터 입교한 사람들은 육사 관제 개혁으로 신일본 육사 사관후보생 제1기로 출발하게 된다)의 경우처럼 개화 사상과 개화 세력의 후원 하에서 부국강병과 새로운 군사 기술을 익히기 위해 유학을 가기도 했고, 노백린(盧伯麟)과 같이 입교한 제11기생들의 경우처럼 갑오개혁 후 개화파 정부의 정책 방침과 후원에 의해 유학을 떠나기도 했다. 이갑(李甲), 유동열(柳東說) 등과 함께 1902년 12월 일본 육사에 입교한 제15기생들은 고국에 귀국한 후 대한제국의 각 요직에 등용되어 조국을 위해 일하였다.
이와 같이 소위 '한일합방' 이전에는 일본 육사에 입교한 동기나 경위가 다양했고, 따라서 일본 육사 출신이라고 하여 무조건 친일 분자라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1907년 여름, 군대가 해산되고 1910년 소위 한일합방이 되자 이미 주권을 상실해 버린 상태에서 일본 육사에 입교하는 것은 더 이상 부국강병과 신식 군사 기술 습득이라는 순수한 동기로 정당화될 수가 없게 되었다. 1907년 군대 해산 후 통감부는 구한국 정부의 군부와 무관 학교를 폐지하고, 사관 양성을 일본 정부에 위임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 무관 학교의 1, 2학년 재학생들 중 44명을 선발하여 일본에 유학시켰는데 이들이 후일 육사 제26기생과 제27기생이 되었다.
이응준은 1890년 평남 안주(安州)에서 태어나 다른 육사 제26기생들과 마찬가지로 1912년 12월 육사에 입교하였으며, 1914년 5월에 졸업했다. 대한제국 군대의 유복자들로 불리워지는―― 장차 일본 육사 제26기생과 제27기생이 될――이들 유학생들과 함께, 이응준은 육사의 예비 과정에 해당하는 동경 중앙유년학교(1920년 육사 예과로 개편되었으며, 1937년 육군 예과 사관학교로 독립됨)에 입학하였는데 그의 입교 당시 교장은 나중에 장군이 되어 조선 파견대 사령관을 지냈던 구노오(久能司) 대좌였으며, 그가 재학하던 당시 담당 구대장은 1945년 일제의 항복 당시 육군 대신이 되었던 아나미(阿南惟幾) 중위였다.
이응준은 유년학교의 예과 과정을 밟고 있던 중에 소위 한일합방을 맞게 되었다. 대한제국 무관 학교 재학 시절 노백린 교장의 영향으로 국권 회복과 부국강병의 뜻을 품고 유학 생활을 보내고 있었던 유학생들은 이제부터 조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 제국 군대의 간성(干城)이 되어야 할 자신들의 미래와 합병 소식에 비분강개하여 요코하마에 있는 어느 요정(혹은 아오야마 묘지에서 비밀 집회를 가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음)에 모여 거취 문제를 토론하였다고 한다. 그 모임에서 전원 퇴학하여 귀국하자는 주장과 집단 자결을 하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그들은 당시 연장자였던 지석규〔池錫奎, 후일 상해 임시 정부의 광복군을 조직하여 독립 투쟁을 했던 이청천(李靑天)장군의 본명〕의 주장에 따라 이왕에 군사 교육을 배우러 온 것이니 배울 것은 끝까지 다 배운 다음 장차 중위가 되는 날 일제히 군복을 벗어 던지고 조국 광복을 위해 총궐기하기로 다짐하였다. 이러한 행동 방침은 다음해 육사에 유학중이던 청나라 학생들이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전원 퇴교하였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당시 2, 3명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학교를 그만두었으며, 후일 그날의 다짐대로 유학을 마친 후 조국 광복과 독립 운동에 뛰어든 경우는 지석규의 경우처럼 극소수였다.
이들 유학생들의 정신적 동요를 눈치챈 학교측은 생도대를 통해 조선인 유학생들을 비밀리에 내사(內査)하면서 한편으로는 합병과 동시에 조선인 유학생들을 일본인 학생과 같이 취급할 것이며, 장차 일본군의 간부로서 중용할 것이라는 회유책으로 유혹하였다. 실제로 그들은 대부분 나중에 일본군의 간성으로서 일제의 군국주의 전쟁과 조선지배에 헌신하였다. 제26기생과 제27기생 중에는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중장까지 승진하여 종전 이후 전범으로 처형당했던 홍사익(洪思翊)이 포함되어 있으며, 해방 후 한국군의 핵심 인물이었던 신태영(申泰英), 김석원(金錫源)도 포함되어 있다.
육사 제26기생 13명은 1912년 5월 유년학교를 졸업하고 사관후보생으로 전국 각 부대에 배치되었는데, 이들은 조선인인 까닭에 대부분 일본 내지의 오지에서 근무하게 되었지만 보병3연대에 배속된 이응준은 홍사익과 함께 보기 드물게 동경에 근무하게 되었다. 이응준은 여기서 6개월 동안의 부대 근무를 마치고 다시 육사에 진학하여 1년 6개월간 군사학을 공부했다. 그가 육사에 재학할 당시 생도대 구대장은 제2차 세계대전중 조선군 사령관을 지낼 정도로 유력한 인물이었으며, 이응준은 해방 후 제3공화국 때까지도 이러한 일본 군부 인맥을 바탕으로 주한 일본 대사 등과 가까이 지냈다고 알려져 있다.
1차대전이 발발하자 이응준은 육사 졸업 후인 1918년 9월 최초의 일본군 출정 부대를 따라 블라디보스토그(Vladivostok)로 파견되었으며, 대부분의 동료 조선인 장교들도 참전 장교로서 소속 부대를 따라 시베리아로 출정하였다. 일제의 침략 전쟁의 일선에 조선인 장교들이 동원되어 가던 무렵, 국내에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지석규 등 몇 사람은 일군 부대를 탈출하여 독립 운동에 나서게 되었고, 합병 당시 중위가 되는 날 일제 군복을 벗어 던지자던 약속대로 중위로 예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육사 출신으로서 독립 운동에 가담한 경우는 이응준의 동기인 지석규 이전에도 있었다. 제11기생인 노백린과 김희선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개각시 군무총장과 차장에 추대되었으며, 제15기생인 유동열은 임시정부의 참모총장이 되었다. 제15기생이던 이갑 또한 독립 운동을 할 수 있는 재목으로 주목받았지만 3․1운동이 일어나기 2년 전 러시아령 니콜리스크에서 병사했기 때문에 임시 정부에 가담하지 못했다.
1920년대 초에 이응준은 대부분의 나머지 동기생들과 마찬가지로 조선군 사령부 예하 제19사단(함북 나남)과 제20사단(서울 용산)에 전속되어 조선으로 돌아왔으며, 1920년대 중반에 대위, 1930년대 중반에는 소좌로 승진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할 당시 이응준은 보병 40여단 예하 보병 79연대(용산 소재)에 소속되어 조선에서 일본군의 장교 생활을 계속했다. 이 무렵 육사 졸업생들은 김석원의 경우처럼 북중국에 동원되어 중일전쟁에서 이름을 날리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전국 각 중학교에 군사교련 교관으로 배속되어 조선인 학생들에게 군국주의 정신과 군사 기술을 교육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응준은 동기생들인 현역장교들과 마찬가지로 1930년대 말에 중좌로 진급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대좌로 승진하여 원산기지 사령부 수송관을 맡았다. 일본 육사 출신으로 대좌까지 진급하여 해방될 때까지 일본군에 복무한 한국인 장교들 가운데 일본군에서 가장 활약이 컸던 사람으로는 김석원과 함께 이응준이 손꼽힌다. 이들 두 사람은 러시아 10월혁명 후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에 참전한 것을 비롯하여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에도 출정하였다. 이들이 이끄는 소속 부대가 맞싸웠던 러시아 적군이나 중국군에는 홍범도(洪範圖), 김좌진(金左鎭), 이청천 등 독립군들뿐만 아니라 조선인 항일 무장 투쟁 부대가 들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김석원이 직접 전투부대 지휘관으로 이름을 날렸던 것과 달리 이응준은 주로 지원부대나 고급사령부 요원으로 근무했다.
● 가족 군인의 전형
이응준은 일본군 장교로서의 화려한 경력뿐만 아니라 가족 배경 또한 특기할 만하다. 이응준의 장인은 구일본 육사를 마친 후 대한제국 군대에서 활동하다가 군대가 해산되자 만주, 시베리아로 망명하여 이동휘(李東輝), 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이갑이다. 그는 1917년 6월 시베리아에서 4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응준은 17세 때에 평남 안주에서 무작정 상경하여 당시 조선군 훈련원장인 노백린 정령(대령)집에 잠시 머물 때 이갑의 눈에 들었다.
그후 이응준은 이갑의 집에 입주하여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이갑은 시베리아에서 숨을 거두면서 이미 일본군 장교가 되어 있는 이응준에게 자신의 외동딸을 맡긴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응준은 육군 대신의 사전 승인을 얻어 결혼을 하게 되어 있는 일본군 장교의 관례를 깨고 이갑의 유언대로 그의 외동딸과 결혼하였다.
또 이응준의 맏사위 이형근(李亨根)은 일본 육사 제56기로 해방 직전 일본군 소좌까지 진급하여 제13야포연대 중대장을 지냈고 해방 후 미군정하에서 경비사관학교 초대 교장을 지냈던 인물이다. 이형근은 그 이후 대장까지 승진하여 육군 참모총장과 합참의장을 지낸 한국 군부의 최고 엘리트로 군림하였다. 이형근은 일본군 제3사단에 소속되어 인도차이나와 월남 전선에서 싸웠으며 해방 후에는 이응준의 집에 숙식하면서 그를 보좌하다가 이응준의 사위가 되었다. 이응준은 미군정청 군사고문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사위를 군사영어학교(Military Language School)에 입교시켰으며 미군정하의 경비대 요직을 맡게 했다. 그후 군사영어학교가 폐교되고 나서 새로 출범한 조선경비사관학교(미군정의 명칭으로는 조선경비대 훈련소 Korean Constabulary Training Center) 초대 교장에 이형근이 임명된 데에는 미군정청 군사고문인 이응준의 영향이 압도적으로 작용했을 것임은 추측 가능한 일이다. 이형근의 동생인 이상근(李尙根, 미군정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였다가 경비사관학교 1기로 넘겨짐)은 학도병 출신의 일본군 소위로 미군정 시기에 육사 1기를 마친 후 수도사단 참모장을 지냈으며 한국전쟁때 대령으로 전사하여 준장으로 추서된 인물이다.
● 철저한 군국주의 정신의 일본 군인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응준은 그의 화려한 경력이 말해 주듯이 일제의 군국주의 정신에 철저하게 물든 일본 군인이었다. 그는 일본의 군국주의 전쟁이 본격화됨에 따라 군대를 그만두고 예편되거나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여 독립군에 가담했던 소수의 조선인 일본 육사 출신 군 장교들과는 달리 일본군 장교로서 출세의 사닥다리에 올라섰고, 일제 식민지 지배를 계승한 미군정하에서 한국군의 최고 수뇌로 발탁되어 한국군 창설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그의 군국주의 정신은 1943년 8월에 징병제 실시의 날을 기념하여 『매일일보』와 회견한 아래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이응준은 북지전선에서 혁혁한 무운을 떨치고 돌아온 일본군 대좌로 알려져 있었으며 징병제 실시를 앞둔 조선 청년들에게 일제의 군국주의 정신을 고취시키려고 애쓰고 있었다.
징병제 실시에 의하여 조선 청년에게도 국가 방위의 숭고한 병역 의무가 부여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무상(無上)의 광영이며 명예이다. … 조선 청년들도 이 국방 의무의 분담 수행에 의하여 비로소 한 사람 몫의 남자가 되어 가슴을 펴고 대도(大道)를 활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이 비상시국에 있어서 국가 방위의 최고 책무를 분담하게 된 것은 진실로 감사․감격에 이기지 못하는 터로 조선 청년인 자는 크게 감분 흥기해야겠다(『매일신보』, 1943년 8월 3일자).
위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이응준은 일제의 총알받이로 전쟁에 동원되는 조선 청년들에게 국가(일제)의 간성이 되는 기쁨에 분기(奮起)하여 보국의 정성을 다할 것을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이응준은 징병제 실시를 앞둔 조선 청년들에게 특별히 다음의 네 가지 점을 당부하고 있다.
첫째, 군인으로서 금기할 바는 성(誠)을 결(缺)하는 일이다. 아무리 학술(學術)이 우수하더라도 성(誠)을 결한다면 군인으로서의 가치는 영(零)이다.
둘째, 책임을 완수하는 것이다. 여하한 위험이 몸에 닥치더라도, 또는 여하한 곤란을 조우하더라도 명하는 임무수행과 책임이 있는 곳을 향하여 오직 매진할 뿐이다. 이것이 최대의 용자(勇者)이며 진실로 군인 정신의 소유자이다. 이응준은 이렇듯이 일제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과 책임감을 강조하면서 아래와 같은 예를 들고 있다.
내가 대륙 모(某)전선에서 싸우고 있을 때 야마구치(山口)라는 오장(伍長, 지금의 하사)이 있었다. 그는 적진 150m까지 접근하여 탄환 우주(雨注) 중에 분전하다가 전의 탄환이 오장의 손바닥을 뚫었다. 그래도 그는 태연히 사격을 계속했다. 이마에서는 선혈이 흘렀다. 그래도 피를 흘려 가면서 사격을 계속했다. 상관이 물러서라 해도 '상관없습니다' 하면서 끝까지 싸웠다. 이 감투(敢鬪)정신, 책임 관념을 배워야 할 것이다.
이응준이 세 번째로 당부하고 있는 것은 일제의 성전을 위해 최후까지 참으라는 견인지구(堅忍持久)의 정신이다. 그에 의하면 "전투는 목숨을 다투는 것이며 먹느냐 먹히느냐의 경계이다. 있는 힘을 다하여 전 정혼(精魂)을 다하여야 비로소 적을 무찌를 수 있다, 전사는 참는다는 것의 경쟁이다. 최후의 5분간만 좀더 참는 자에게 승리는 온다. 따라서 평소의 훈련도 역시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 이응준이 전쟁에 끌려가는 조선 청년들에게 당부하는 말이었다.
넷째로는 생사를 초월하라는 것이다. 이응준에 의하면 "군인과 전쟁, 전쟁과 죽음을 연결시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전장에 나섰다고 반드시 죽는 것도 아니며 국내에 남아 있다고 모두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 나폴레옹이 말한 것과 같이 탄환이 사람을 피하는 것이며, 사람이 아무리 피하려 해도 도저히 불가능하다. 생사는 천명이다. 또 우리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사형 선고를 받고 있는 것과 같다. 생사를 초월하여 일의 임무의 완수에 매진하라. 부끄러움을 아는 자는 강하다. 살아서 부끄러움을 폭로함보다는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것이 무사(武士)의 면목이다. 이것을 잊지 말도록 해야 한다. …
징병제로 끌려가는 조선 청년들을 상대로 한 이응준의 이러한 당부는 가히 웅변적이라 할 만하다. 그는 이에 덧붙여 신체 검사까지는 상당한 시일의 여유가 있으므로 체력 단련과 함께 자신이 말한 정신 요소의 함양에 일층 주력할 것이며, 일단 신체 검사에 합격하여 입대가 되면 "황국 군인의 특질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위로 성은에 보답하는 동시에 아래로 일억 동포의 기대에 부응할 것"을 간곡히 부탁하고 있다. 조선 청년들에게 징병을 영광으로 알고 생사를 초월하여 일제에 목숨을 바칠 것을 웅변하였던 이응준은 종전 후에도 살아 남아 대한민국 군대 창설의 산파 역할을 하였으며 중장까지 승진하였고 예편 후에는 체신부 장관을 지내는 등 노후까지 권력을 누렸다.
● 대한민국 군대 창설을 맡은 미군청정 군사고문
해방 후 남한을 점령한 미군은 점령 초기부터 한국인 군대의 창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점령군 사령관인 하지(John R. Hodge) 중장은 미군의 많은 잔일을 덜어 줄 병력을 필요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정부 수립에 대비하여 조기에 군대를 창설하고자 했다. 미군정은 1945년 11월 13일 남한 내부의 혁명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군정청 안에 국방사령부를 설치하여 경찰예비대 성격을 갖는 군대의 창설에 착수하였다.
이에 따라 새 국방사령관에 참페니(Arthur S. Champeny) 대령을 임명하였다. 같은 해 말경 참페니 국방사령관은 국방사령부 고문인 이응준과 함께 뱀부 계획(Bamboo Plan)을 수립, 일정한 주둔지를 근거로 하는 필리핀식 경찰예비대와 비슷한 군대의 창설안을 입안하였다. 미군정하 초기 한국 군대의 명칭이 정식 군대가 아니라 조선경비대(Korean National constabulary)라고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며 정부 수립 이전의 초기 육사 또한 정규 육사가 아니라 일종의 훈련소로 조선국방경비대(1946년 5월 1일 태릉에 설립)라 불려졌다. 이렇게 하여 정부수립 이전에 총 5개 여단 15개 연대 규모의 군대가 조직되었으며, 이때 충원된 일본군, 만주군계의 군 장성들이 이후 한국 군부의 주축이 되었다.
이응준의 영향은 군 창설 계획안의 수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창군 세력 내부에 일본 육사 출신들을 대거 진출시킨 데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것은 이응준과 함께 미군정 군사고문으로 발탁된 원용덕(元容德)에 의해 만주군의 진출이 용이했던 것과 비슷하다.
미군정은 조선 국방경비대의 간부 요원과 통역관을 양성하기 위해 1945년 12월 5일 군사영어학교를 개교했는데 1946년 4월 30일 폐교할 때까지 110명의 장교를 배출하였다. 군사영어학교 입교자들 중 군번 1번은 이응준의 맏사위인 이형근으로, 그는 경비대 제2연대장, 경비사관학교장, 경비대 초대 총사령관, 통위부로 개편된 이후 참모총장을 지냈다. 기록상 군사영어학교 입교자의 마지막 군번인 110번인 이응준은 실제로 입교하여 교육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미군정청의 군사고문으로 활약한 공로에 의해 군사영어학교가 폐교된 지 43일만(그가 군사영어학교 졸업생으로 임관된 1946년 6월 12일은 경비사관학교 1기생이 졸업하기 3일전이다)에 군사영어학교의 마지막 주자로 인정되었고 일본군의 계급대로 대령으로 임관되었다.
미군정의 원래 계획은 일본군, 만주군, 광복군 출신자 중에서 각각 20명씩, 60명을 선발하여 군사영어학교에 입교시키려 하였지만 좌익계 군사 단체는 참여를 거부하였고, 광복군(광복군 계열은 유동열이 통위부장에 취임한 후 경비 사관학교 제7기와 8기로 다수 입교했다)의 주력도 임시 정부의 정통성을 내세워 경비대를 '미국의 용병'이라 비난하면서 참여를 거부했기 때문에 이응준이 추천한 일본군 출신(군사영어 학교 출신 110명 중 87명)과 원용덕이 추천한 만주군 출신(21명)이 주축을 이루게 되었다. 이때 이응준은 원용덕과 함께 군정청 회의실에서 이루어졌던 군사영어학교 입교자 선발 심사에 입회하여 군정청 경무국 차장인 아고(Reamer T, Argo) 대령에게 조언하였다.
이후 조선 국방경비대 간부 충원 또한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의 군 경력자들로 충원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이응준은 일본군 출신들의 경비대 진출을 도와주는데 그치지 않고 좌익 계열의 진출을 적극적으로 막으려 했다. 이응준은 경비대 창설을 입안했던 아고 대령에게 군사영어학교와 경비대에의 좌익 참여를 막기 위해 철저한 신원 조사와 사상 검사를 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그의 제안에 대해 오히려 미군 장교인 아고 대령이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누구나 사상의 자유가 있으며 군벌이나 사적인 군사 조직을 만드는 보스만 경계하면 된다고 주장하면서 경비대 내에는 정보, 헌병 등의 조직이 있으니 내부의 질서 확립은 우려할 바가 아니라고 설득할 정도로 이응준은 극우적이었다. 극악했던 민족반역자와 친일파들조차도 해방 후의 혁명적 정세 속에서 좌익 타도를 명분으로 재빠르게 애국자로 변신을 꾀하고 있었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친일행위가 상대적으로 조선민족 일반에게 가시화되기 힘든 일본 군대 조직 내에서 활약했던 이응준의 그러한 행동은 새로운 변신이라기 보다는 군국주의 정신이 철두철미하게 몸에 밴 일본 군인의 당연한 행동 양식이었을 것이다.
일본군 장교로서 이응준의 화려한 경력은 신민지 조국의 암담한 상황에서, 개인적 야심과 민족적 양심 속에서 일본군 장교 생활을 그만 두거나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독립 투쟁에 가담했던 사람들과 무척 대조적이다. 또 해방 후에도 미군정의 군 기술자로 발탁되어 오랫동안 권세를 누렸던 그의 생애는 자신의 친일행위를 부끄러워하고 회개하여 정계나 공식적인 활동에서 은둔하였던 사람들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그의 군국주의 정신과 일본군 장교 경력은 해방 후 미국의 지배와 좌우대립 속에서 오히려 더욱 돋보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한국현대사의 비극을 있는 그대로 대변해 주는 듯이 보인다.
□ 안진(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서울대 강사)
■ 참고문헌
Robert K. Sawyer, 《Military Advisor in korea》, Office of Chief of Military History, 1962.
정창국,《육사졸업생》, 중앙일보사, 1984.
임종국 편, 《친일 논설 선집》, 실천문학사, 1987.
이기동, 「일본 육사 출신의 계보」, 김삼웅 외,《친일파: 그 인간과 논리》, 학민사, 1990.
佐佐木春隆, 강창구 옮김,《한국전 비사》상, 병학사, 1977.
한용원,《창군》, 박영사, 1984.
「매일신보」, 1943, 8, 3
첫댓글 이런 친일파가 백살 넘게 살다니
이런놈의 자식들은 지금 뭘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