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면 당전마을에서는 다른 마을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탑형태의 돌무더기를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마을 곳곳 논이나 밭주변에는 돌무더기가 쌓여있었는데 이 곳에는 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돌과 함께 푸른 비취빛의 청자파편들이 돌과 함께 쌓여서 마치 돌탑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 탑은 특정 종교적인 의미를 담아 쌓아진 것이 아니라 그냥 마을주민들이 밭을 일구기 위해 밭에 있었던 돌과 청자편들을 모아서 버리기 위해 쌓아둔 것이었다. 당전마을은 농토가 척박한 편이었다. 밭에는 돌도 많았고 이런 청자편들도 많았다. 농민들은 농사에 방해가 되는 물건이라는 생각에 모두 모아서 한쪽에 쌓아서 버려놓은 것이었다.
그만큼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해방직후 무렵까지만 하더라도 청자가 무엇인지, 어떤 가치가 있었고 누가 만들었던 것인지 누구도 알지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이렇게 동네 곳곳에 쌓여있었던 돌과 청자편은 60~70년대까지도 마을에 있었지만 80년대이후 저수지 개간공사가 이뤄지면서 모두 사라졌다.
공사현장에 돌이 필요했기에 마을에 쌓여있었던 돌을 가져가서 바닥을 다지는 데 사용했던 것이다. 이때 돌과 청자편 탑들은 대부분 사라졌고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는다.
이때 기억에 남는 일이 하나 있다. 대구 당전마을의 청자가 일본인들에게 알려지게 된 계기였다. 필자도 어르신들에게 전해들었던 일인데 1914년 당전마을 옆에 있는 계치마을에서 한 순경이 동네에서 굴러다니던 청자편을 보게 됐다고 한다.
도자기를 좋아하던 일본인이었기에 이 물건이 값비싼 도자기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곧바로 상부에 보고를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총독부에서 사람을 당전마을로 보냈다. 조선총독부 직원은 당전마을 일대를 둘러보고 마을 곳곳에 청자파편들이 널려있는 것을 직접 보게 됐고 이는 당시 경성일보라는 신문에도 보도가 됐다고 전해진다.
이를 계기로 1939년 무렵 대구면 당전마을 일대 조사가 시작됐다. 일본인들은 청자를 굽던 가마터 100여곳을 찾아냈고 보고서 형태로 제작됐다. 발굴 보고서의 사본이 미산마을의 한 주민이 보유하고 있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어딘가로 사라졌고 지금은 누가 소장하고 있는지 파악되지 않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이 시절 또 하나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대구면 계치마을의 한 주민이 도굴꾼이었는데 산에서 묘 하나를 파헤쳤다. 비싼 물건이 있으면 꺼내 팔기 위함이었다. 이때 무덤에서는 비취빛이 선명한 청자 10여점이 발굴됐다. 이때 이미 대구면 일대에는 일본인들이 도자기를 비싼 가격에 사들인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청자를 도굴한 주민은 강진읍내까지 걸어서 일본인을 만나기 위해 이동했다. 목리에서 배를 타고 강진읍시장통 인근에 거주하던 일본인을 찾아가 청자이야기를 전했다. 그 일본인은 생각지 못하게 크게 호통을 쳤다. 무색해진 도굴꾼은 다시 청자를 가져가려는 찰나 일본인은 물건을 헛간에 두고 가라고 하면서 돈을 건넸다.
읍내에서 멀리 빠져나와 돈을 세어본 도굴꾼은 깜짝 놀랐다. 이 돈이 당시에 쌀 10가마니 이상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일본인이 돈을 잘못준 것이라 생각한 도굴꾼은 곧바로 마을로 돌아가 몇일간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숨어있었다고 한다. 이 일화는 해방이전부터 온전한 청자 작품들은 상당부분 일본인들에게 유출됐을 것으로 추정을 할 수 있게 한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정리=오기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