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의 대통령들 중에서 풍수지리에 높은 관심과 이해를 보인 사람은 아마 김대중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일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故손석우 선생으로부터 용인의 터를 소개 받아 하의도에 있던 선영을 이장하였으며, 집까지 동교동에서 일산으로 이사를 하는 盡人事 끝에 龍床에 오를 수 있었다.

반면 전두환 대통령은 “면장이라도 하려면 논두렁 정기라도 받아야 한다”는 말로서 풍수지리를 간결하게 함축하였다. 논두렁 정기라는 표현은 집이나 묘 터가 최소한 맥의 흐름을 받아야 인물이 날 수 있다는 말이며, 한편으로는 자신이 대통령까지 오르게 된 데는 선영의 도움이 있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權不10年이라더니 퇴임 후에는 부정축재로 많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광주항쟁의 주모자로 백담사와 감옥에서 囹圄의 몸이 되었으며, 그로 인해 국민들로부터 아직까지도 지탄받는 오욕의 세월이 계속되고 있다. 또 그의 형 전기환 동생 전경환 그리고 사촌 형제들 까지 1988년 모두 구속 수감되었으며, 전경환은 65세의 많지 않은 나이에 투병 생활을 하는 등 순탄치가 못하다. 과연 그 가문의 선영은 어떠한지 살펴보자.
1, 生家 터

그가 대통령직에 있을 때는 수많은 방문객들로 몸살을 앓던 곳이지만, 2007년 11월 필자가 찾아 갔을 때는 귀머거리 노인 한사람만이 드넓은 주차장에 콩을 널어놓고 도리깨질을 할 뿐이다. 혹자는 이곳의 집터를 넓은 백사장에 기러기가 내려앉는 형상의 平沙落雁이라 말하지만, 본인이 보기에 궁벽한 산골의 첫머리에 있는 집으로 여느 시골집과 다르지 않으니 풍수적으로 큰 의미를 부여할 수가 없다.
2, 입향조 全 絪 묘소 (1504~1539) 율곡면 내천리 마을 뒷산에는 백두산 천지와 같은 연못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못재라 부르며 신성시 하였다. 바로 이 연못의 바로 위에 從仕郞 벼슬을 지낸 全 絪의 묘소가 있다.

미리 말해 두지만 全 絪 묘소는 全대통령과는 파가 다르기 때문에 전두환 대통령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러나 높은 산 정상에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연못이 있는 奇異한 모습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천하명당이라 부르는 것이다.


특히 묘소를 둘러 싼 작은 암석들로 인해 今時發福하는 蟹目穴이라 한다.
蟹目穴 : 게의 눈과 같이 당판 주위에 작은 암석이 둥글게 박혀 있는 형태
사진으로 보듯이 묘에 담을 쌓듯 작은 바위가 빙 둘러쳐 있는데, 마치 제주도에서 묘를 조성하는 방법과 흡사한 형태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바로 이웃하고 있는 묘와 주변에는 바위가 전혀 없다. 이정도가 되려면 묘소 뒤편에서부터 이미 석맥이 간간이 박혀 있어야 함에도, 봉우리에서부터 묘소까지는 그 어떠한 연결 끈도 없다. 이 현상은 이곳처럼 급경사면에 흙을 쌓아 인위적인 활개를 만들 경우 빗물에 의해 쓸려 내려갈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일부러 암석을 심어 곡장을 조성했던 것이다. 즉 최대한 자연을 훼손치 않고 한편으로는 빗물로부터 묘 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작은 바위를 활용한 것이다. 묘 터의 좋고 나쁨과는 관계없이 대단히 사려 깊은 작업이 아닐 수 없다
백번을 양보해서 설사 그 바위가 천연적인 것이라 해도 上分은 있으나 下合을 이루지 못했다. 해목혈이 되려면 당판이 게의 눈처럼 둥글게 형성되어 上分下合이 되어야 하는데, 묘의 앞쪽에는 암석이 전혀 없다. 이것이 蟹目穴이 될 수 없는 이유인 것이다. 또 한 가지는 그 땅이 혈을 맺고자 하는 생기가 있다면 지표면의 암석은 땅속의 溫氣에 의해 박환이 되어 자황색을 띠어야 합당한 것인데, 지금의 형태는 無氣의 땅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차고 억센 돌일 뿐이다.

높은 산에 연못이 있어 풍치가 좋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는데, 공연한 돌무더기를 갖고서 怪穴이라 말하고 있다. 그렇게 말해야 자신만이 隱龍과 潛龍의 괴혈을 알아 볼 수 있는 대단한 명사라는 것을 광고 할 수 있음이렷다.
古云 : 上有微茫八字分, 下有微茫八字合 (위에서 희미하게 八字로 나누고, 아래는 희미하게 八字로 합함이 있어야 한다.)
못재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주둔하던 군사요충지였다고 하는데, 아마도 높은 산에서 식수를 쉽게 조달할 수 있음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군사들이 장기간 물을 안정적으로 사용하기에는 작은 연못으로는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므로, 둑을 쌓아 빗물을 저장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실제로 못재 주변의 둔덕을 보면 인위적으로 조성한 흔적이 역력함을 볼 수 있다.

3, 祖父 全永洙(1867~1936) 묘소, 丙坐

묘소의 뒤쪽 모습
이곳은 異書와 風水에 능한 전두환의 삼촌 전상희에 의해 1940年代 무렵 암장하였다 한다. 그 후 전두환이 군인으로 출세하면서 비로소 봉분을 갖추었으며, 대통령이 되서야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한다. 이곳의 비문에는 “뭇 산들이 손을 맞잡고 절을 하며 여덟 곳의 시내가 굽이돌아 율곡의 명당을 형성한 곳”이라 표기하고 있는데, 파가 다른 全 絪의 후손들은 대통령 날 명당자리를 빼앗겼다 하여 배 아파 하는 땅이다.

그러나 조부묘소까지 이어지는 맥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못재의 물을 가두기 위해 흙을 쌓아 조성한 둑을 전영수 묘소의 용맥이라 말하는데.... 어쩌다가 우리의 풍수들이 이토록 꿰맞추기에 급급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또 한 번 양보해서 설사 그것이 천연적인 능선이라 해도 전혀 변화가 없는 直龍이며 死龍일 뿐이다. 묘소의 뒷부분은 기와를 엎어 놓은 것처럼 오목하게 虛해서 바람맞기 딱 좋은 형상이니, 이를 仰瓦라 한다. 이곳은 明堂은 커녕 그 흔한 논두렁 정기조차 없는 곳이다.
古云 : 穴後須防仰瓦 (묘 뒤가 오목한 것은 마땅히 피해야 한다)
4, 부모 묘소, 乾坐 전두환의 父 1967년 卒, 母 1978년 卒하여 이곳에 모셔진다. 그리고 1980년 대통령에 오르자 몇몇 풍수들은 이곳을 帝王之地라 말하기도 한다. 즉 풍수들마다 조부묘소가 좋다는 측과 이곳 부모 묘소가 좋다는 측으로 상반된 주장을 하기도 한다.

주산으로 부터 내려오는 용은 약 200m 가량 특별한 변화 없이 이어지다가 비로소 묘소 뒤편에서 우측으로 가지를 뻗으며 山盡處를 형성하였다. 용세가 맵시가 없어 투박할 뿐이니, 용의 老嫩 분류로 보면 老龍인 셈이다. 대개 이러한 곳은 토질도 척박하게 마련이다. 묘소의 청룡 쪽 艮방위는 깊이 함몰하였으며 용호는 교쇄하지 못해 물이 직거수로 빠져 나간다. 그 물 빠짐이 꺼림칙하였는지 묘소 앞에 나무를 심어 살짝 가려 놓았다. 무엇을 이롭다 할 것인가?

이와 같이 물이 直去水로 빠지는 경우 대부분 급전직하 추락하는데, 군인 전두환은 이곳에 묘를 쓰고 부터는 오히려 승승장구하다가 뒤늦게 물 빠짐의 영향을 호되게 받는다.
1931년 : 합천 출생  1955년 : 육사 11기 졸업 1967년 : 父 전상우 卒 1973년 : 육군 준장 진급 1977년 : 육군 소장 진급 1978년 : 母 김점문 卒 1979년 : 보안사령관 1980년 : 대통령 당선 1988년 : 백담사 유배 1995년 : 구속수감 1997년 : 추징금 2200억원 선고, 315억 징수 2003년 : 가재도구와 진돗개 등 경매 처분
대통령 하야 후 보통사람들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니, 분명 물 빠짐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보면 풍수의 이치는 비록 시기의 문제일 뿐, 어긋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조부 묘소와 부모 묘소는 풍수의 법과는 전혀 동떨어진 곳인데, 그럼에도 그는 그토록 불리한 환경을 극복하고 용상을 차지하였으며, 또 그 가족은 아직까지 수많은 재산을 보유한 체 잘 살고 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점점 풍수가 어려워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前 現職 대통령들의 선영에서 수차 보았듯이 제왕은 땅의 문제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복잡한 머리를 식힐 겸 해서 이곳 묘소에 대한 故손석우 선생의 글이 있어 옮겨본다. 영물인 봉황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새입니다 때문에 날아가는 새 형국의 이 묘 자리에 무거운 석물을 세우면 무게에 눌려서 추락하는 것은 당연지사 아니겠습니까? 두고 보시오 비석을 철거하지 않으면 3년 후 음력 3월 3일 9시 42분에 일족이 전멸할 터이니..... 1987년 6.10 민주화 항쟁 이후 육관의 예언이 맞아 떨어질 조짐이 보이자 가족들은 육관의 경고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중장비를 동원하여 갔어도 올라갈 도리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자동차용 자키 수십 개를 가지고 비석의 아랫부분을 받친 다음 들어 올리니 비석이 한쪽으로 넘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비석이 넘어지자 비록 살기를 완전히 가시지는 못했지만 급전직하의 운명은 많이 회복하게 되었다. 그 뒤에 전두환 대통령 내외가 백담사에서 연희동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으며 구속된 형제들은 모두 풀려난 것이다. 그러나 그 살기는 여전히 남아 있어 아직도 위험하다 (1993년 출판, <터>에서 부분발췌)

당시 자키를 이용해 쓰러트렸다는 석물은 어찌된 일인지 처음 그대로 꿋꿋하게 서있다.
그리고 부모님 묘소의 바로 인근에는 전두환 前대통령의 身後之地가 잘 가꾸어져 있으니, 감상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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