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호] 황금의 땅 ㅡ3권 1|
황금의 땅 3 이원호 지음 ▶▶차 례◀◀ 1.악마의 인질 ‥‥‥‥‥‥‥‥‥ 7 2. LA의 남과 여 ‥‥‥‥‥‥‥‥‥ 51 3. 복수를 위하여 ‥‥‥‥‥‥‥‥‥ 96 4. 대습격 ‥‥‥‥‥‥‥‥‥ 136 5.야망과 배신 ‥‥‥‥‥‥‥‥‥ 177 6. 산타모니카의 부대 ‥‥‥‥‥‥‥‥‥ 210 7. 집행자 그룹 ‥‥‥‥‥‥‥‥‥ 261 악마의 인질 "난 모른다. " 매린이 머리를 저으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경찰에서도 그렇게 얘기했지. 나는 그런 얘긴 금시초문이야." 그는 알몸의 어깨를 당당하게 펴고는 응접실 바닥에 책상다리를 하 고 앉아 있었다. 가운만을 걸친 밀리카는 그의 옆에 두 무릎을 세우고 앉아 고영무를 바라보았다.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으나 두 볼이 발그레 해져 있는 것은 분명 조금 전 쾌락의 여운이었다. "더구나 난 너를 알고 있지도 않아. 네가 밀리카에게 마음을 주고 있 었던 모양인데, 그렇다고 우리에게 마약이네 뭐네 하는 이상한 소리로 누명을 씌우지 말란 말이야." 매린이 고영무의 총구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밀리카의 시선이 힐끗 이쪽으로 옮겨졌다. 고영무는 한동안 매린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자신에게 총구 가 겨눠져 있는데도 전혀 동요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너는 어차피 졸개에 불과하니까 그럴 수도 있지." 고영무가 조그맣게 머리를 끄덕였다. "너 같은놈이 일을주도했을 리는 없어.그렇다면 네 여자를 데려가 겠다. 네 말대로 내가 저년에게 마음을 주고 있으니까." 밀리카 쪽으로 시선을 돌린 고영무는 총구를 위쪽으로 몇 번 치궈 들었다. "너, 일어나서 옷 입어." 매린이 번책 얼굴을 치켜 들었다. "여자는 건드리지 마라. 이 비겁한 놈, 그 여자는‥‥‥ "매 린, 괜참아요. 따라가겠어요. 어줬든 오래 있지는 않을거예요." 밀리카가옷자락을 여미며 자리에서 일어셨다. "곧 돌아올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걱정이고 뭐고 할 것 없다. 왜냐하면 저놈은 죽어 있을테니까." 고영무가 매린을 향하여 권총을 겨누었다. "너희 두 연놈들의 수작을 봐 줄 시간이 없다. " 그는 매린을 향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매린의 상체가 휘청 뒤로 젖 혀졌는데, 가슴 위쪽의 어깨에 동전만한 구멍이 뚫리면서 이내 피가 쏟아져 내려왔다. 매린이 눈을 크게 부릅뜨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가운 위로 가슴을 움켜쥔 밀리카가 온몸을 굳히고는 매린을 내려다보았다. "000 " 반대쪽 손바닥으로 상처 부위를 틀어막은 매린이 이를 악물고는 신 음 소리를 델어 내었다. 머리는 치켜 들었으나 상체는 반쯤 숙이고 있 었다. "매 린." 털씩 한쪽 무릎을 끊은 밀리카가 그의 상체를 부둥켜안았다. "이 나쁜 놈." 이쪽으로 머리를 돌린 그녀가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너희들이 나를 잘못 본 거다. 그것을 알려 줘야 할 것 같아서." 고영무는 입술 끝으로 웃었다. "그리고 너희들은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그녀를 겨누었던 총구가 아래쪽으로 내려가더니 다시 '퍽' 하는 소 리와 함께 횐 불꽃이 튀었다. "아아악." 이를 악물었으나 고통을 견디지 못한 비명 소리가 매린의 입에서 터 져 나왔다. 총알이 그의 정강이를 관통하여 다리 한쪽은 금방 피투성 이가 되었다. "그래, 내가 너를 살려서 남겨둘 줄 알았단 말이냐 "이제 그만, 그만해!" 밀리카가 날카로운 목청으로 소리쳤다. 그녀의 가운은 이미 흠백 피에 젖었고 앞자락이 혜쳐진 가운사이로 젖가습이 드러났다. "네년이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이유가 없다. " 고영무의 말소리는 낮았으나 응접실을 울렸다 "저놈은 거추장스러울 뿐이야. 난 너만 데리고 있으면 돼. 그러면 어 떤 놈이든 타협을 해 오겠지." "돈은 페르난도가 가지고 있어. 우린 가지고 있지 않아." 그녀의 시선은 허공에 떠 있는 듯 초점이 잡혀 있지 않았다. 매린이 머리를 숙이면서 악문 이 사이로 다시 긴 신음 소리를 내었다. 갑자기 밀리카가 벌떡 일어났다. "병원에 가야 돼. " "페르난도는 어디 있어?" 총구로 그녀의 가슴을 겨누면서 고영무가 다시 물었다. "그걸 말해 그리고 마약 판 돈의 절반을 가져오라고 해.내가 알기 로는 2억 달러야." "병원에 가야 돼. 매린이‥‥‥‥ "저놈은 아직은 죽지 않아. 네가 빨리 말할수록 가능성이 있지." 밀리카가 탁자 위에 놓인 전화기를 피묻은 손으로 움컥쥐었다. 어깨 에서 흘러내린 피가 가승에서 배로 흘러내렸으므로 매린은 온몸이 피 에 덮여 있었다. 그리고 한쪽 다리에서도 피가홀렀다. 그는 밀리카가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누르는데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매린, 고통을 받느니 내가 죽여 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고영무가 묻자 매린이 얼굴을 들었다. 땀에 젖은 얼굴에서 횐자위가 많은 눈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머리를 떨구더니 다 시 신음 소리를 내었다. "페르난도를 바뀌 줘요." 밀리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양탄자 바닥에 무를을 끊 고 論아 있었는데, 이제는 가운의 앞자락이 활짝 벌려져 있어 그녀의 깊은 부분도 드러났다. "폐르난도, 나예요, 밀리카. 지금 매린이 총에 맞았어요. 지금 잡혀 있어요." 한걸음에 다가간 고영무는 그녀의 어깨를 발로 밀어젖히고는 수화 기를 낚아채었다. "페르난도씨 ." 그가 수화기에 대고 말하자 저쪽에서는 잠시 대답이 없다. "이봐요, 페르난도씨, 대답해요. 난 당신의 마약을 담아 주었던 사람 이야. TV 박스에 실어 주었던 사람이라구." "빌리카를 바쥐라." 저쪽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차분한 음성으로 다시 그가 말 을 이었다. "아니면 매린을 바꿔 주든지." "매린은 대답할 수가 없어, 페르난도." "넌 한국인 미스터 고인가?" "그렇다, 페르난도." 밀리카는 가운 앞자락을 젖어 매린의 어깨를 동여매 주려 하고 있었 다. 그러나 넓게 펄겨진 가운은 길이가 짧아 그저 앞쪽에 갖다 붙인 모 양이 되었고 그것도 금방 피에 젖었다. "넌 지금 어디에 있지?" "페르난도, 잔소리 늘어놓지 마라.난 네 동생을 데리고 나간다. 그 래, 시간을 주지. 이틀 후 이 시간까지 2억 달러를 준비해라. 그때 밀리 카와 교환한다. " 저쪽에서 대답이 없자 고영무는 말을 이었다. "쓸데없는 짓 하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를 보여 주마." 수화기를 내려놓은 고영무는 밀리카를 바라보았다. "년 일어나 옷을 입어라. 나하고 같이 나가야 돼." 밀리카가 머리를 저었다. "안돼. 매린의 치료를‥‥‥‥ 그들 앞으로 성큼 다가간 고영무가 매린을 내려다보았다. "매린,네 이름은 맥밀란이 아니고 매린이었지, 너 살고 싶으냐?살 고 싶다면 빌어라. 그러면 살려 주마." 고영무의 총구가 그의 이마를 향해 겨누어졌다. 밀리카가 입을 벌린 얼굴로 고영우를 올려다보았다. 젖겨진 가운은 피투성이였고, 젖가슴과 아랫배가 훤히 보였다. 매린이 얼굴을 들었다. 흐린 시선으로 고영무를 바라보던 그가 다시 머리를 숙였다. "말해! 살기 싫단 말이냐?" 고영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살고 싶어, 살려 줘." 응접실 바박을 내려다보면서 매린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제 발. " "안돼, 매린." 고영무의 말에 놀란듯 매린이 머리를 들었고 밀리카는저도모르게 흠칫 상반신을 세웠다. "죽어야 돼." 매린의 흐린 눈이 한껏 치켜 떠졌을 때 고영무의 손에 쥔 총구에서 흰 불꽃이 튀었다. 매린은 방바닥에 됫머리를 부딪치며 뒤로 넘어겼다. "아악!" 두 주먹을 움켜쥔 밀리카가 외마디 비명을 질렸다. "자, 일어나. 5분 안에 옷을 입고 이곳을 떠나야 된다. 5분 이상 걸리 면 너도 죽이고 갈테니까." 밀리카를 향해 고영무가 입을 열었다. "저놈은 이제 죽었으니까 걱정할 것 없다. 치료받을 필요가 없단 말 이 다. " 지미는 응접실 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고든에게로 다가갔다. "고든, 단서를 찾았소?" 고든이 머리를 돌려 지미를 바라보았다. 이맛살이 잔뜩 찌푸려져 있 었는데, 위아래로 지미를 臺어보는 것이 못마땅한 표정이다. "지미, 당신들이 잡았다가 놓아 준 놈인데, 이런 식으로 우리한데 넘 기는거야?" "고든, 난 산 채로 당신한테 넘기고 싶었어. 그런데 소식을 듣고 달 려와 보니까 이렇게 되었군." 매린은 응접실 바닥에 엄청딘 피를 흘린 채 죽어 있었는데,세 방의 총알을 맞았다. 누군가가 잔인하게 쁜 것이다. 이마의 한 발로 절명한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부터 쏘아올려 고통을 받게 했음을 알 수 있었다. "미국 국적의 콜름비아 인이야. 신원은 확실하고, 전과 기록도 없 어." 고든이 다시 지미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지미, 틀림없이 마약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지?당신들이 연행했다 가 하루 만에 풀어 놓은 놈인데." 지미가 머리를 저었다. "증거가 없어서 풀어 주었어. 나로서는 그것밖에 몰라. 이제는 당신 차례가 온거야." "빌어먹을, 내가 너회들 쓰레기나 치우는 사람이냐 그가 버럭 소리를 쳤으므로 응접실에 있던 사내들이 모두 그들 쪽으 로 머리를 돌렀다. 지미가 어깨를 움필해 보이고는 방 안을 두리번거 리는 시농을 했다. "여자가 있었는데, 어디 있나?" "사라겼어." 고든이 델듯이 말했다. 이제 매린의 몸은 커다란 비널 자루에 담겨지고 있는 중이다. 시체 가 누웠던 자리에는 횐색 스프레이로 표시를 해 놓았다. "사라지다니, 도망쳤단 말인가?" "도방쳤는지 어핀지 내가 어떻게 알아? 이놈의 성기에 정사를 한 흔 적이 나타나 있어. 흘랑 벗고 말이야." 고든이 숱이 적은 머리칼을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쓸어 을렀다. "이봐, 지미. 단서를 조금만 주겠어? 나는 치정 살인이라고는 생각하 지 않아.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이 있고, 뒤쪽 문의 유리창이 깨져 있어." 지미가 머리를 저었다. "나는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어. 나도 지금 얼떨떨하단 말이야.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이야기를 했지, 안 그래?" "그렇지 않아." 고든이 그에게서 머리를 돌렸다. "너희들은 빌어먹을 자식들이야.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쫓아내기 전에 ." 집을 나온 지미는 길가에 주차시켜 놓은 자동차에 오르자 곧 휴대폰 을 꺼내 들었다. 그의 앞쪽에는 서너 대의 경찰차가 비상등을 켠 채 정 지되어 있었고 엠블런스도 세워져 있었다. "여보세요." 앨버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앨버트, 납니다. " "지미, 어떻게 되었어?" 그가 다급하게 물었다. "고문당하고 죽은 것 같습니다. 여자는 행방불명이 되었어요." 그가 타고 있는 자동차의 앞쪽으로 십여 명의 구경꾼들이 몰려 서 있었으므로 지미는 휴대폰을 쥔 채 유심히 그들을 살펴보았다. 알렉산 더가 집 밖으로 나온다. "그럼, 그 한국인, 그놈의 소행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여자는 그 친구에게 납치당했을 가능 성이 많아요." 앨버트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매린 집 근처에 잠복하고 있던 마 약부 요원 두 명은 문책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매린의 변호사였 던 알렉산더가 매린의 집에 찾아와 시체를 발견할 때까지 느긋하게 차 안에 맞아 있었다. 경찰 차량들이 도착하자 서둘러 지미에게 보고를 했으므로 그때까 지 집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보스, 내 생각은 그 친구가 혼자서 페르난도를 상대로 전쟁을 하려 는 것 같습니다. " 알렉산더가 두 명의 사내와 함께 횐색의 벤츠에 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놈을 찾아, 지미 . 알았어?" 다짐하듯 앨버트가 말했다. "알았습니다, 보스. 하지만 이것은 우리들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경 찰에 알려도 도움이 안돼요." "그건 알고 있어, 그것은 내가 결정할 문제니까 빌어먹을 네놈은 그 한국놈이나 찾기나 하란 말이다. " 아직 새벽 5시였다. 앨버트는 잠을 설친 탓인지 입이 더러워지기 시 작했다. 휴대폰의 스위치를 끈 지미는 차도로 머리를 내미는 벤츠를 보았다. 알렉산더가 떠나고 있었다. 아파트는 지은 지 오래 되어서 밝고 습기가 배어 있었다. 응접실의 한쪽 벽은 금이 가 있었는데, 그 부분의 벽지 색깔이 진한 것을 보면 물이 새어 그렇게 된 모양이었다. 그러나 응접실과서재,침실과주방 들이 골고루 갖춰져 있었고, 고영무가 혼자 지내기에는 너무 넓다고 느껴질 정도로 켰다. 평수로 치면 80평짜리 아파트였다. 더욱이 기본 가구까지 포함해서 월세로 지불하는 계약조건이어서 알맞은 곳이었다. 관리인은 고영무가 두 달 치 월세 1천 8백 달러를 현금으로 지블하 자 계약서류를 내밀고는 더 이상 군소리를 하지 않았다. 돈만 받으면 되었지 이런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과는 알수록 귀찰아질 뿐이라는 것이 태도에 나타나 있었다. 샤워를 마친 고영무는 바지에 셔츠를 걸친 가벼운 차림으로 응접실 로 들어쳤다. 딱딱한 나무의자에 않아 있는 밀리카는 그가 들어서자 머리를 들었다. 두 팔과 다리가 의자에 단단히 묶여져 있었다. "샤워해 " 그녀에게 다가선 고영무가 묶어 툴은 끈을 블며 말했다. H이곳에선 소리쳐도 문을 열고 들어 줄 사람이 없어. 하지만 귀찰게 했다가는 너도 그놈의 신세가 될거야." 한 팔을 잡아 일으키자 춰청거리며 몸을 센운 밀리카는 그가 이끄는 대로 화장실로 다가갔다. H네 몸이야 속축들이 알고 있으니까 부끄러워할 것도 없다. 문을 열 어 놓고 샤워하도록 해." 그녀의 둥을 밀어 화장실로 들여보낸 고영무는 응접실의 흔들의자 에 앉았다. 월세 가구의 일부분인지, 아니면 이전의 입주자가 놓고 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엉덩이를 붙이자 끊임없이 앞뒤로 흔들거렸다. 무심결에 앉은 것이어서 엉겁결에 두 발을 바닥에 디뎌 흔들거림을 멈추었으나 발을 ◎자 다시 앞뒤로 움직인다. 입맛을 다신 고영무는 잠자코 의자의 흔들거림에 몸을 맡겼다. 밀리 카가 반항하지 않고 고분고분 따라온 것이 조금 의외이기는 했다. 그 러나 매린이 눈앞에서 살해되는 것을 보고는 혼이 나갔을 것이다. 그는 앞쪽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집만큼 밝은 괘종시계는 아침 8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페르난도는 물론 경찰들도 자신을 찾 고 있을 것이다. 4층의 아파트로 들어왔을 때 미리 열어 놓았던 됫문으 로 해서 비상계단으로 올라왔으므로 이쪽을 본 사람은 없다. 새벽 3시 경이었고, 한층에 두 가구씩 지어 놓은 구조여서 낮에도 사람의 기척 이 들리지 않는 곳이다. 화장실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그쳤으므로 고영무는 머리를 돌려 그 쪽을 바라보았다. 열린 문으로 더운 물 냄새가 맡아겼다. 밀리카가 머리칼에서 물을 쪽뚝 떨어뜨리며 모습을 나타내었다. 화장실에 걸려 있던 남자용 가운으로 갈아 입고 있었으므로 긴 가운 은 종아리 위까지 내려왔다. 그녀는 이쪽으로 다가와 소파 위에 놓인 가방을 집어 들었다. 집에서 나을 때 들고 온 가방이다. 잠자코 그것을 바라보던 고영무는 그녀가 가방을 들고 몸을 돌리자 자리에서 일어싫다. "잠깐만, 기다려 ." 이맛살을 찌푸린 그녀가 그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고영무는 그녀에 게 다가가 손에 든 비닐가방을 움켜쥐었다. 그녀가 손잡이를 잡은 손에 잠깐 힘을 주었다가 이내 힘을 풀었으므 로 고영무는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그녀에게 시선을 준 채 고영무는 가방을 뒤집어 소파 위에 내용물을 쏟아 놓았다. 옷가지들이 쓸아져 나왔다. 그리고는 묵직한 잭나이프가 옷과 함께 떨어져 내렸다. "이 칼로 김강남을 필러 죽였는지도 모르겠군." 칼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무게를 달아 보듯 흔들면서 고영무가 말 했다. 밀리카는 머리를 곧게 세우고 그를 바라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물기가 채 밖이지 않아 반들거리는 얼굴에는 두 눈만 똑바로 고영무 를 바라보고 있을 뿐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됐어. 옷을 집어 가." 그가 턱으로 옷더미를 가리키자 그녀는 잠자코 다가와 가방에 옷을 쓸어 담았다. 고영무가 나이프 위쪽에 있는 단추를 누르자 철컥 소리와 함께 10센 티가 넘는 횐 칼날이 튀어나왔다. 밀리카는 가방에 옷을 넣는 동안 어 느 틈엔지 뒤에 서 있던 고영무의 눈을 속여 칼을 끼워 넣었던 것이다. "그래, 기회만 있으면 날 죽이고 싶겠지." 칼날을 내려다보면서 고영무가 흔잣소리처럼 말했다. "너도 그런 감정을 느껴 봐야 다른 사람들의 원한을 이해할 수 있을 게다. " 가방에 옷가지를 쓸어 담은 밀리카가 허리를 졌다. 고영무는 팔을 뻗어 그녀의 목덜미에 칼날을 대었다. 마악 화장실로 몸을 돌리려던 밀리카가 움직임을 멈줬다. "한 번 더 이런 일이 있을 적에는 네년을 죽일테니까 기억해 둬라 아예 시체를 놓고 흥정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되면 당장에 그럴테니까." 밀리카는 나무토막처럼 선 채 대답하지 않았다. "알아들었어?" 칼등에 힘을 주어 누르면서 고영무가 낮게 물었다. "알았어요." 그녀의 입에서 갈라진 듯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칼을 뗀 고영무는 날을 접고는 다시 흔들의자에 맞았다. 가방을 쥔 밀리카는 다시 화장실로 들어했다. "그놈이 여자를 데리고 갈 곳은 떤하다. 코리아 타운을 샅샅이 뒤져. 그놈은 그곳에 숨어 있을거다. " 페르난도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내들에게 다가갔다. "그놈이 숨어 있는 곳을 알려 주는 사람에겐 10만 달러를 준다고 해 라. 거리에 있는 놈들에게 모두 전해." 사내들이 몸을 돌려 방을 나가자 페르난도는 소파에 털썩 주저않았 다. "페르난도, 경찰과는 별도로 앨버트 쪽에서도 그놈을 찾고 있습니 다. " 앞쪽에 論아 있던 알렉산더가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놈들 하는 짓은 떤해 어떻게 해서든지 내 옷자락을 잡으려는거 야. 경찰은 아직 그놈 소행인 줄은 모르지?" "네, 마약부에서는 그놈 이야기를 안해 준 것 같아요. 페르난도, 우 리가 정보를 흘려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페르난도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경찰에 뭐라고 말한단 말이냐?그농이 보고타에서 매 하고 밀리카를 물아봤던 놈이라고 말해 주란 말인가?" ‥‥‥‥ ·그놈이 경찰에 잡히면 일이 시끄럼게 될 수도 있어.우리가 잡아야 돼." 알렉산더가 입맛을 다시면서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찾을 수 있어. 더구나 그놈은 혼자란 말이다. 곧 밀리카를 찾을거 야. " 페르난도의 두 눈은 툴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매린이 잔인하게 살해된 것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면서도 한쪽으로는 충격을 받았던 것 이다. 일을 추진하는 데 순진한 한국인 상사원을 이용했다는 것을 알 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가 LA까지 물아와 이런 식으로 보복을 해 올지는 상상도 못했었다. "이봐, 알렉산더." 페르난도가 부르자 알렉산더가 머리를 들었다. 이맛살을 찌푸린 페르난도는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깜박이며 선뜻 입을 열지 않고 함설였다. "페르난도, 무슨 말씀입니까?" .,. ·크링거에게 부탁을 하면 어떨까?그들은 우리와는 달리 발이 넓단 말이야. 푸쟁이 놈들이 전 도시에 깔려 있을례니까." 4효과는 있겠지요.하지만 그렇게 되면 경찰도 금방 알게 될겁니다. 그리고 크링거 쪽에서는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H어차피 그들도 관계가 있는거야.일이 터지면 그들도 온전하지 못 해. 그놈은 밀리카를 잡고 있단 말이야."
[이원호] 황금의 땅 ㅡ3권 2 알렉산더는 금방 그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의 머리에는 매린의 시 체가 떠올랐다. 남자라도 그런 식으로 고문을 당하면 배겨 낼 장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놈은 보통놈이 아니다. 알렉산더는 머리를 끄덕였다. "제가 크라우스한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협조해 주기는 할겁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겠지. 그것을 모두 들어 주도록 하게, 알렉산더." "카를로스가 알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이해할 .꾜 거야. 그는 밀리카가 어렸을 때 딸처럼 귀여워했어." "그리고 밀리카는 고급 정보를 쥐고 있어. 어떻게든 빼내 와야 돼." "알겠습니다, 페르난도." 머리를 끄덕인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페르난도가 턱을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알렉산더, 밀리카는 지금 임신중이라네." 알렉산더가 멍 한 표정으로 움직임을 멈쳤다. "비록 애비는 죽었지만 난 그 애와 내 조카를 꼭 살려서 데려오고 싶어," "페르난도." "두 달 후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결혼식을 하려고 했었네." "그런 이야기는 크링거 쪽에 할 필요 없어." 갑자기 굵어진 목소리로 페르난도가 말했으므로 알렉산더는 가늘게 숨을 벨어 내었다. "조건을 모두 들어 준다고 해. 밀리카를 찾아내면 말이야." 페르난도가 자르듯 말했다. 밀실로 들어선 이호윤은 장규식을 향해 슬책 머리를 끄덕여 보이고 는 앞자리에 앉았다. 사십대 후반의 둥글게 살편 체격이었고, 얼굴도 살집이 붙어서 두 볼이 늘어져 있었다. 그는 유장수의 자금관리를 맡 고 있는 회계사였다. "웬일이시오? 총지배인넘께서 저를 다 보자고 하시고?" 그가 두꺼운 눈시울을 올리며 물었다. "지난번에 빼내 온 20억을 다시 입금시켰소?" 장규식이 묻자 그는 눈을 끔뻑이며 대답하지 않았다. "이것 봐요, 내가 묻고 있지 않아? 그 돈은 어떻게 된거요?" 장규식이 눈을 치켜 뜨고 다그쳐 묻자 그는 입맛을 다시며 의자에 둥을 붙였다. "사장넘의 말씀대로 처리할 뿐이오. 그러니까 그 이야기는 사장넘께 물어 보지 그래요?" "이사장, 아직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장규식이 말을 멈추고 한동안 한히 이호윤을 바라보았다. "사장넘한데는 말할 입장이 안돼. 그래서 물어 보는거야." llii. it. ri "난 지금 20억이 필요해. 사장은 내가 책임질테니까 그 돈을 빼줘야 겠어." "지배인, 도대체‥‥‥‥ 이호윤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그를 한히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시 려고 이 러는거요?" "목숨이 달려 있는 일이야. 더구나 말을 멈춘 장규식이 갑자기 턱을 들고는 길게 습을 내쉬었다. "이사장, 내가 알기로는 당신이 우리 사장넘의 통장을 백여 개나 가 지고 있다고 하던데, 그 중에서 20억을 때냅시다. 책임은 내가 질테니 까." "난 못합니다. 책임을 어떻게 진단 말이오? 그렇게 되면 난 죽은 목 숨이오." "누가 죽이는데?" 입술 끝을 올려 웃으면서 장규식이 물었다. "내 손을 거쳐야 죽든지 살든지 하는 걸 모르셨나? 집행하는 것은 다름아닌 나란 말이오." "지배인, 그렇다면." 이호윤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는데 두 눈두덩과볼의 살이 더욱 늘어져 있었다. "배신하는 것은 아니오,지금 급하게 20억이 필요해서 그러는 것이 니까. 그리고 만일 거절한다면‥‥‥‥ 장규식이 힐끗 문 쪽을 바라보았으므로 엉겹결에 그도 머리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문은 닫혀 있을 뿐이다. "이사장은 이 방에서 못 나갑니다. " "지배인, 제발 이러지 마시오. 사장넘께 발각되면." "글쎄, 발각되지 않는다니까 그러네. 20억이면 사장한테는 용돈이 야. 그 돈에 사람 목숨이 달려 있단 말이다. " 장규식이 마침내 눈을 부릅였다. 그는 상체를 숙여 이호윤에게 얼굴 을 바짝 들이대었다. "만일에, 만일에 말이야, 이사장. 며칠 내로 사장넘이 교통사고나 심 장마비로 돌아가신다고 칩시다. 그때는 어떻게 되지? 이사장이 몽땅 챙겨 넣을 건가?" "지배인, 도대체‥‥‥‥ 이호윤이 눈을 치켜 줬는데 칠자위가 온통 드러났다. "어떻게 그럴 수가, 그런 일이 ‥‥‥‥ "사람 운명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 않소? 그럴 경우를 생각해 보란 발이야." "그때는 당신이 나와 함께 일을 해야 할 것 아닌가?누가 사장님의 뒤를 잇는다고 생각하지?" "그거야." 이호윤이 침을 삼키고 나서 말을 이었다. "그거야 지배인님이시지요." "그렇지, 내가 이어야지. 부동산 관계는 어절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 도 사채 돌리고 있는 것이나 업소들, 그리고 다른 사업들은‥‥‥‥ "어때?이렇게 탁 털어툴고 이야기했는데 안되겠다고 말할 수는 없 겠지? 이해가 갈텐데, " "현금이 20억은 채 못됩니다. " 어깨를늘어뜨리며 이호윤이 말했다. "모두 사채업자들한테 나가 있어서,통장에 있는 것을 한꺼번에 때 면 은행에서 사장님한테 연락이 가도록 되어 있어요. 1억 이상은사장 이 직접 연락을하니까요." "몇 개 은행이야?" "신용금고까지 합해서 10여 개 됩니다. " "그래, 지금 가지고 있는 현금은 얼마야?" "15억쯤 됩니다. 이것은 사장이 며칠 후에 쓸 제주도 공사장 공사대 금으로 준비해 놓으라는 돈이어서." "통장에는 얼마가 있고, 사채업자들한테 빌려 준 돈은 얼마" 장규식이 다그쳐 묻자 이호윤이 눈을 여러 번 깜박이면서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이봐, 이사장, 머리 굴리지 마 내가 하나하나 찾아다녀서 확인해 볼테니까 10원이라도 틀리떤 일가족을 몰살시킬테야." 그를 딘아보며 장규식이 이 사이로 말을 뱉었다. "하나도 빠짐없이 이야기를 해 봐. 그러면 내가 알아서 한몫 떼어 줄 테니까." "통장에는 28억좀 됩니다. 그리고 CD가 150억쯤 있는데 그것은 사 장님이 가지고 있고,사채업자들한테 차용증 받고 빌려 준돈이 2백억 쯤 돼요. 증권이 1백억쯤 되고‥‥‥‥ 장규식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현금이 많은 줄은 알고 있었지 만 그가 상상했던 금액보다 엄청나게 많았다. 5백억 가까운 현금에다 부동산은 그 열 배가 넘을 것이다. "CD하고 사채업자 차용증은 모두 사장님이 가지고 있긴" 장규식은 이호윤에게 말을 놓고 있었는데, 이호윤은 그것을 자연스 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예, 내가 가지고 있을 리가 있습니까? 나는 통장관리와 매일 들어 오는 사채 이자관리나 하고 있어요." "내가 이사장한레 10억을 주지. 이번 일이 끝나면." 이호윤이 눈을 치켜 뜨고 장규식을 바라보았다. "지배인, 어떻게 하시려고." "그건 알 필요 없어. 좌우간 통장에 있는 돈이나 모두 빼 와, 오늘중 으로. " "지금 시간이 오후 3신데." "잔소리 말고, 이사장." 장규식이 탁자 위에 놓인 전화기 스위치를 누르자 곧 밀실 문이 열 렸다. 박기석이 절름거리며 들어쳤다. "부르셨습니 까?" "응,너 애들 두어 명 데리고 이사장 따라가서 돈 찾아와라. 나한테 는 휴대폰으로 연락하고." 박기석이 힐끗 이호윤을 바라보았다. "이사장이 그릴 리는 없겠지만, 사장님한테 연락을 한다거나 다른 첫 할 때 어떻게 되는지 이야기해 줘라." "양평동 식구들이 불에 타 죽겠지요." 박기석이 선뜻 말을 받았다. "지금 영수가 집에 앉아 있습니다. 전화 바꿔 드릴까요?" 이호윤이 혀로 입술을 축였다. 장규식이 호락호락 자신을 놓아 주리 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집에까지 부하들을보내 인질 로 잡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박기석이 전화기를 들어 이호윤 앞에 소리나게 내려놓고는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사장, 집에다 전화를 해 보지. 매사는 확인이 중요한거니까. 전화기를 턱으로 가리키며 장규식이 말했다. . 홍성희가 됫자리에 오르자 안진홍이 문을 닫고는 조수석에 들어가 맞았다. 승용차는 미끄러지듯 아파트 현관을 출발했다. "지금 5시인데 두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죠?" 차가 아파트의 입구를 빠져 나와 큰길로 들어서자 그녀가 앞쪽을 향 해 물었다. 안진흥이 머리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글쎄요. 차가 막히지 말아야 할텐데." 그는 커다란 머리를 한쪽으로 누였다. "바쁜 일이 있으십니까?" "아녜요." 그와 이야기를 나눌 기분이 아니었으므로 흥성희는 머리를 돌렸다. 반히 바라보는그의 시선이 언짧았고 최대광과의 일로 두 번이나 허탕 을 친 그들의 감정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따라오는 것도 보호보다는 감시하려는 의도라는 것도 안다. 유 장수는 용서는 해 주었지만 자신을 믿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무모하고 경솔한 짓을 했던가를 느끼고 있었 다. 유장수는 생각처럼 쉽게 넘어가거나 매장당할 사내가 아니었다. 이 번 일로 홍성희는 유장수의 힘을 새롭게 인식한 셈이 되었다. 한강대 교를 승용차는 빠르게 넘어가고 있었는데 경부선 고속도로는 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런 속도로 가면 두 시간이면 온천에 도착할 수 있 을 것이다. 홍성희는 등받이에 머리를 대고는 눈을 감았다. 최대광은 이제 자신 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제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우직스 러움이 우둔하게 보이고 넘치는 힘은 그저 단순한 짐승의 힘처럼 여겨 졌다. 그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의 벗은 몸과 언제나흥분이 되었던 정 사의 장면이 연상되어 왔으므로 홍성희는 눈을 였다. 문득 그가 이 세 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그렇게 안된다면 한시라도 빨리 유장수의 손에 잡혀야 할 것이다. 그러면 유장수의 의 심도 사라질 것이고 상반신만 커서 고릴라에게 양복을 입힌 것 같은 이런 놈과 같이 차를 타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앞좌석의 머리받침에 머 리를 기댄 안진홍은 잠이 든 것 같았다. 차 안에는 희미한 엔진 소리만 들려을 뿐 조용했다. 홍성희는 다시 눈을 감았다. 온천에서 며칠 휴양을 하면서 유장수에게 멋진 추억을 남겨 줄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마음을 먹고는 차체의 진동에 가법게 흔들리다가 이 내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창밖이 곁은 어둠에 싸여 있을 때였 다. 고속도로를 벗어났는지 승용차는 어두운 길가에 세워져 있었고, 차 안에는 그녀 혼자만이 남겨져 있는 것을 알았다. 와락 불안감이 치밀어 오른 홍성희는 창 밖으로 머리를 돌려 사내들 을 찾았다 사내들은 길가에 서서 제각기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불똥이 밝아 졌다가 이내 사라지곤 했다. 가끔씩 한두 대의 차량이 그들을 스치고 지나갈 뿐 주변은 인가도 보이지 않는 한적한 곳이었다. 흥성희가 문 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그들이 그녀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안친홍이 땅바닥에 담배를 버리자 불똥이 튀었다. "들어가 있어요." 계세요가 아니라 있어요였다. 그녀의 직감이 채빠르게 움직였다. "여기, 어디예요?" 차에 둥을 대고 서서 그녀가 묻자 안진흥이 긴 팔을 휘저으며 다가 왔다. "말해 줘도 상관없겠군. 여기는 천안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국도요." 그는홍성희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굳어져 있는 그녀의 얼굴을들 여다보았다. "우리는 이곳에서 당신과 헤어져야돼.아마 영영 얼굴을 못보게 될 거 야." "집으로 돌아가요." 안간힘을 써서 흥성희가 겨우 말했다. 말끝이 떨려 나오는 것이 자 신의 귀에도 들렸다. "그이한테 이야기하겠어요. 당신들 마음대로 이했다가는 "못 알아듣는군. 영리한 여자인 줄 알았는데." 안진흥이 바짝 다가셨으므로 홍성희는 차에 등을 기댄 채 몸을 젖혔 다. 그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사장님께서 직접 지시하신 일이라구. 알아들었어? 이제 쓸데없는 미 련은 버 리 란 말이야." "그럴 리가 없어요." 칠쪽에서 차량의 불빛이 비치더니 이내 요란한 엔진 소리가들려 왔 다. 땅이 울리는 진동음을 내며 트럭 한 대가그들 옆을스치고 지나갔다. "이봐, 홍성회, 나는 당신을 인계해 주는 것으로 임무가 끝나. 잠자 코 있지 않으면 다쳐. " 안진홍은 그녀의 팔을 움켜쥐고는 승용차의 문을 열었다. 그에게 잡힌 팔이 저렸으므로 홍성희는 입을 벌렸다. "자, 들어가. 어서." "누구한테, 그것만 알려 줘요." 차 안으로 밀려 넣어지면서 그녀가 소리쳤으나 안진홍은 대답하지 않았다. 홍성희는 두 주먹을 움켜쥐고 앞쪽의 유리창을 통해 검은 국도를 바 라보았다. 언젠가 유장수가 했던 말이 아까부터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 다. 그는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용서하지도 않은 것이다. 탁자 위에 놓인 수화기를 집어 든 유장수는 소파에 않았다. "여보세요." "아, 유사장, 나 이성철이오." 5인 위원회의 위원인 이성철의 목소리 였으므로 그는 퍼뜩 눈을 들었 다. "웬일이시오? 갑자기 " 그쪽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하긴 내가 전화한 것이 꽤 오래 되었구만. 그만큼 적조하였습니다. " "그건 나도 마찬가지올시다. " 유장수도 부드럽게 말을 받았으나 마음을 놓지는 않았다. 그는 교활 하고 잔인한 놈이다. 아마 그쪽도 이쪽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사장, 갑자기 웬일로.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글쎄, 좋은 일이라고 하기는 첫하고, 바쁘시지 않으면 만납시다. 부 탁드릴 일도 있고." 유장수는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밤 9시가 넘어 있었다. 한동안 시계를 바라보던 유장수가 말했다. "좋습니다, 만납시다. 급한 일이신 것 같은데, 우리 가게에서 만나기 로 하지요." "그럼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 이성철이 선선히 대답하며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유장 수는 자리에서 일어셨다. "전부장, 방에 있는거냐 현관 쪽의 방에 대고 소리치자 전우석이 방문을 열고 나와 그를 바 라보았다. "지금 가게로 가자.이성철이 나한테 부탁할 말이 있다는데,가게에 서 만나기로 했다. " "이사장이 말씀입니까?" 그가 덕을 내밀고 물었다.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이제까지 이성철과 유장수는 독대해 본 적이 없다. 이성철은 건설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경기도의 관급 공사를 손 아귀에 넣고 주무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의 대진건설에서 공사를 하 는 것도 아니다. 공사를 따놓고는 다른 건설회사에 하청을 주는 것이 어서 프리미 엄만 떼어먹는 안전한 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슬금슬금 마약을 들여와서 조직을 통해 뿌리기 시작하 고 있었다. 본래 건설회사의 청부주먹 출신인 이성철이어서 유흥업과 부동산으로 기반을 굳힌 유장수와는 성격 차이가 났지만 노는 물도 다 른 사이였다. 이성철이 5인 위원회에 추천된 것도 막대한 돈을 지역의 보스들에게 뿌렸기 때문이라고 유장수는 믿고 있었다. "갑자기 웬일일까요? 사장넘. " 부랴부랴 윗도리를 입으면서 전우석이 물었다. "지배인님한테 연락을 할까요?" "내버려 둬라,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 그들은 아파트를 나와 현관 앞에 대기하고 있는 승용차에 올랐다. "이사장이 마약이 딸리는모양입니다. 인천에서 선금을 받고는 아직 공급해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 차가 움직이자 조수석에 않은 전우석이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들었어, " 그렇다고 그런 일로 만나자고 할 이성철은 아니다. 물론 이쪽에 아 직 1킬로그램 정도의 마약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놈은 그것을 짐작하 고 있을지언정 나눠 달라고 할 형편은 안된다. 5인 위원회에서는 마약 유통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으므로 위원들끼리라도 그것을 나누자거 나 있다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이사장이 김종무를 홍콩으로 내보냈는데 빈손으로 돌아왔다던데요. " 김종무는 이성철의 심복으로 전우석과는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부 하들은 보스의 취향이나 기호에 맞추도록 해야 하고 대인관계도 마찬 가지로 처신해야 한다. 전우석에게는 이성철이 적군의 대장쯤 되었고 김종무는 적군의 부장이었다. 전에는 둘이서 친했더라도 보스들의 사 이가 멀어지면 자연히 그들도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유장수는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이성철이 마약을 직접 취급하려 고 외국으로 부하를 보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호락호락 직거래를 틀 리가 없다 강일준이 제거당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신바람나는 장사 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성철이 요즘 자금이 딸린다더냐?" 유장수가 묻자 전우석이 눈을 끝택이며 그를 마라보았다. "그런 얘기는 못 들었습니다만." "서초동에 지은 오피스텔이 분양이 잘 안된다던데‥‥‥‥ 전우석이 잘 모르는지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유장수는 창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이성철은 오십대 후반으로 마른 몸집에 펀은 피부의 사내였다. 두 눈을 찌푸리고 사람을 바라보는 버릇이 있었는데, 제만에는 상대방에 게 위압감을 주려고 하는 모양이었으나 유장수는 그가 만성 배않이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유사장, 이거 밤늦게 만나자고 해서 미안합니다. " 두 눈을 찌푸린 그가 입으로는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싫다. "여긴 언제 와 봐도 장사가 잘되는 것 같습니다. 들어오면서 보니까 시설도 확장하셨던데 ." 일년 전에 확장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은 널책한 밀실에 마 주보고 앉았다. 종업원들이 술과 안주를 날라 탁자 위에 벌여 놓고 나 갈 때까지 그들은 서로 입을 열지 않았다. 시션도 한 번도 마주치지 않고 증업원들의 모습을 좇거나 탁자 위의 안주 접시로 시선을 내리 거나 해서 서로의 시선이 템글템글 돌았다. "여자는 부르지 않았숨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해서, 자, 내가 한 잔 따르지요." 술병을 집어 든 유장수가 말했다. "이사장하고 이런 자리 하는 것도 처음이지요?" 이성철이 템긋 웃었다. "다론 위원하고도 마찬가지죠.다섯 명이 모여서 마시는 경우는 제 법 있었지만,어됐든 오늘밤에 우리 둘이 한잔했다는 이야기는 오늘이 가기 전에 다른 세 명의 위원들한테 알려질겝니다. " 유장수는 잠자코 그가 따라 주는 술잔을 받았다. 서로 견제하도록 되어 있는 위원회의 조직이었다. 둘이 친하다는 소문이 나면 다른 세 명이 뭉쳐서 견제하는 상황이 되므로 가급적 둘이 만나는 것도 삼가야 했다. 모두들 사회에 단단히 기반을내린 사업가들이어서 조직 세계에 는 드러나지 않게 행동을 하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이권은 결코 양보하 는 법이 없었다. 다섯 위원들의 본거지는 모두 서울이었지만 활동무대는 달랐다. 서 울과 경기도,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의 다섯 개 지역을 대표하는 다섯 위원들이었다. 각 지역들은 시나 단위 지역들로 세포가 나누어져 있어 서 세포마다 보스가 지배한다. 그들은 엄격히 자신들의 세력권을 유지 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조정하고 때에 따라 규을을 잡는 사람은 지역 의 위원이다. 지금은 경기도 위원인 이성철과 서울 위원인 유장수가 마주앉아 있 는 셈이었다. "유사장, 우리는 제각기 자기 일만 하다 보니까 서로 털어놓고 이야 기할 시간도 없군요. 참 한심한 노릇이오. 위원 둘만 모이면 작당을 한 다고 의심들을 하니. " 이쳔철이 입을 열었다. 이제 그는 유장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으면 우리를 도와 줄 사람이 누가 있숩니까? 아무래도 같은 위원들이 도와 춰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요. 그러는 것이 모양이 좋지요." 유장수는 머리를 끄덕이며 그가 난데없는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를 열심히 생각하고 있었다. "유사장, 오늘 마약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몇 킬로만 나눠 주시 오. 내가 값은 후하게 쳐서 드리도록 할테니까." 이성철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는 긴장한 얼굴로 똑바로 유장수를 바라보았다. 위원회에서 마약 통용을 금지시키고 있는 만큼 그런 이야기를 꺼내 는 것도 금기시되어 왔다. 그런 상황에서 마약을 나눠 달라는 노골적 인 부탁은 이쪽이 그 거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은근한 위 협이다. 유장수는 번책 덕을 치켜 들고는 이성철을 쓰아보았다. 그도 나름대 로 단단한 세력을 가지고 있으나 이쪽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다. "그거 무슨 등딴지 같은 소리요?마약을 나눠 달라니?내가 마약거 래라도 하고 있단 말이오?" 이성철이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날 떠보려고 이리는 것 같은데,그만두시는 게 신상에 이로울거요. 나는 당신한테 약점 잡힐 일이 없으니까." "유사장, 오해하시는데, 나도 그 거래를 하고 있으니 서로 듐자는 의 미였소." "거래는 당신 흔자 하는 모양이고, 나는 아니오." 이성철이 입을 꾹 다물고는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까놓고 말씀드리는데, 오늘 오후에 이호윤일 시켜서 돈을 찾아 가 셨더구만. 상업은행 지점장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들었소," 이제 그 상업은행 지점은 유장수와 거래가 끊기겠지만 그것은 이성 철의 일이 아니었다. 이성철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애들 시켜서 이호윤이를 미행시켰던거요. 이호윤이는 제일 은행에 가서도 8억을 더 찾아오더구만."
< 계 속>
| |
첫댓글 잘~~~감상~~~고마습니다~~~~~
ㅎ 늘 감사히 잘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