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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륜산 1
길은 어디로든 뻗어 있었다.
화순 가는 길을 잡자면
해남에서 강진, 장흥,보성을 지나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높은 산도 없이 넓기만 한 들길은
어디를 밟아도 좋을 듯이 넉넉했다.
"힘이 하나도 드는 것 같지 않습니다, 선생님."
박지화가 휘적휘적 팔을 내저으면서 기운차게걸었다.
"뱃길이 몹시 지루했던 게로군."
화담 역시 조금도 지친 기색이 아니었다.
멀지 않은 곳에 품이 넉넉한 산이 하나 나타나자
화담이 걸음을 멈추고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선생님, 산이 좋군요."
지함이 넌지시 화담의 의중을 떴다.
"그렇다네. 저 산은 왕조가 몇 번 바뀌어도
전란이나 변고를 겪지 않을 곳이야."
"무슨 산입니까?"
"두륜산일세. 전에 내가 지리산 산천재(山天齋)로
남명(南冥 曺植)을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있는 영남의 선비들이 그렇게 자랑하더군.
지금은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한 면앙정,
그리고 우리 산방을다녀간 정개청(鄭介淸)을
그때 다 만났지."
"남명이라면 선생님께서 젊은 시절에
법담(法談)을나누셨다는 그분 말씀이군요?"
박지화가 물었다.
"그렇지. 방계들끼리 어울린 거지.
그 시절에두륜산까지 와서
밤새 말씨름을 하고 간 적이있었지."
"처음 오시는 곳이 아니로군요."
"도라는 것이 본시 구름이나 물을 닮아서
그걸 구하려는 사람 또한 이리저리 흘러다녀야 하는법인데,
난 그렇지 못했네.
겨우 황해도, 전라도,충청도를 돌아본 정도라네."
"두륜산에서는 무슨 말씀을 나누셨습니까?"
지함이 물었다.
"내가 남명을 만난 것은 내 나이 마흔이 훨씬넘어서였지."
화담은 길을 걸으면서 천천히 자신의 옛 일을풀었다.
서경덕이 마음 속으로 정혼했던 가희 처녀,
바로천안의 객주집에서 만났던 정옥이란 처녀의 전생.
그녀가 대가집 첩으로 팔려가자
서경덕은 농사도집어치우고 혼자 끙끙 앓았다.
사랑하는 사람을빼앗긴 고뇌가
서경덕의 마음밭에새로운 싹을틔웠다.
서경덕은 그때에서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돌아보고,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서경덕은 그때 처음으로 책을 잡았다.
따로 서당에나갈 형편이 못 되었으므로
혼자서 읽고 스스로터득해야 했다.
혹 뜻이 막히거나 분명하지 않을 때는
며칠이고 그 구절을 되뇌었다.
스승이 있었다면 금방물어 보고 깨칠 수 있었지만,
스승이 없는 서경덕은스스로 터득해야 했다.
그 뒤 서경덕은 나이 마흔한 살이 되어 향시에나갔다.
어머니의 간곡한 권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경덕은 향시의 생원과에 붙어 성균관에입학하였다.
이때 이미 성균관의 직강(直講)이 되어
성균관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면앙정 송순을 만났다.
스승인 송순은 제자인 서경덕보다
나이가 세 살이나어렸다.
송순은 벼슬길에 일찍 들어섰지만
날개 잃은해동청이었다.
송순은 대과에서 그를 장원으로 뽑아주고
훗날을기다리라던
대사헌 조광조(趙光祖)의 언약을 기대하고있었다.
조정에 파벌간의 알력이 심해서
혼자힘으로는벼슬길을 순조로이 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조광조가 사화로 실권을 잃고
유배지에서 끝내 사사(賜死)되었던 것이다.
그후송순은 미관 말직에 오래 머무르거나
한직(閑職)을전전해야 했다.
성균관 학인들과 본시 출신부터 달라서
성균관공부에 영 취미를 못 붙이던 늙은 학생 서경덕,
그리고 높은 벼슬길에 오를 생각은
언감생심 내기도어려운 신세가 되어버린 직강 송순.
두 사람은 강의가 끝나면
스승과 제자라는형식적인관계를 던져버리고
동년배의 벗이 되어 다시 만났다.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세상을 비판하고 시류를걱정했다.
얼마 안 가 서경덕은 기어이 성균관을 자퇴하고
송도로 가버렸다.
송순은 그런 서경덕을 말리지않았다.
송순 역시 권력 다툼에 진저리가 나 있어
머지 않아 한양을 뜨리라 마음 먹고 있던 중이었다.
송순도 끝내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송순은 성균관을 버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지리산에는 성리학의 대가
남명 조식이 머무르고있었다.
조식 역시 벼슬을 버리고 지리산에 산천재를차려
후학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때 영남의 선비들은 물론,
이미 조식의 고명을들은 호남의 대선비들까지
산천재에 몰려들어 있었다.
송순 역시 조식의 산천재에 머물면서 도학을토론하였다.
송순은 조식에게 서경덕을 소개했고,
서경덕은 그인연으로 지리산 산천재를 찾아가
조식과 학문을논하고 법담을 나누었다.
그 이후 조식과 서경덕 두사람은 더없는 지기가 되어
서찰을 주고 받으면서 교분을 쌓아갔다.
어떤 때는 지리산에서 나라를 걱정했고,
어떤 때는속리산에서 만나
몇날 며칠이고 이야기를 나누기도했다.
그러던 중 조식이 앞장선 가운데
두 사람이두륜산을 오른 적이 있었던 것이다.
"두륜산에서 남명과 나눈 얘기를 다 하자면
한 달도 더 걸릴 걸세.
머지 않아 그이들을 찾아갈 것이니
그때 가서 또 이야기함세.
저 산을 넘어야 해남이네."
화담은 길을 재촉했다.
일행은 두륜산 등성이에 올라섰다.
해남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가파른오르막길을 걸어올라온
나그네들의 땀을 식혀주었다.
고갯마루 나무 그늘 아래 장사꾼 차림의 사내서넛이
짐을 풀어놓고 편하게 앉아 있었다.
"어디로 가시는 선비님들이시다요?"
그들은 자기들끼리 무슨 얘기 끝엔가 웃음꽃을터뜨리더니
낯선 사람들에게 이무럽게 말을 붙여왔다.
"화순에 가오."
"여가 해남인게 아직 멀었구만이라.
초여름이라도걷자니 덥지라?
근디 워디 사시는 선비님들이라요?"
장사꾼은 말끝을 살짝 말아올려
반말인지존대말인지 구별이 안가게
은근슬쩍 얼버무렸다.
"팔도를 떠도는 나그네올시다."
"아따, 팔자가 좋은 양반님들이시구만요잉."
불쑥 말을 내뱉고는 실실 눈치를 살피는 품새가
양반 앞에서 말을 함부로 했다 싶은 모양이었다.
옆사람의 난처한 처지를 감싸주려는 듯
곁에 앉아 있는사내가 말을 냉큼 받았다.
"참말로. 마누라고 자식 새끼고 다 팽개쳐뿔고
더도말고 한 일 년만 이 선비님들
뒤를 쫓아가 뿔끄나어쩌끄나."
한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나네.
옆에서는 청승맞은 노래가락까지 뽑아올리고있었다.
정말로 자기네 신세가 한스러운 것인지
아니면 할 일 없이 유람이나 하고 다니는
팔자 좋은 양반들에 대한 야유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적의 가득한 눈길을 뒤통수에 받을 때처럼
지함은 온 몸에 소름이돋아났다.
"선비님들. 요 고개 이름이 뭔지 아시요?"
"초행이니 알 까닭이 있겠소."
"해남 사람들은 요 고개를 아침 고개라고 부르는디,
워째서 아침 고개냐 허먼, 선비님들이 지나온 길에서
오른쪽으로 쪼매 들어가먼 화내리라고
여흥 민씨들마실이 있다 이것이요.
여흥 민씨 세도가 월매나 쎈지
해남 현감 모가지를 좌지우지 흔든다요.
그래논께 현감들이 아침이먼 새복같이 요 고개를 넘어
여흥 민씨헌티 문안을올릴라고
쌔가 빠지게 달려간다고 혀서 요 고개가아침 고갠디,
해남에 오는 현감마다 다 고 모양 고짝이니
현감들이 일을 지대로 헐 수 있것소."
"우리 양반님들 백성 다시리는 거시 다 고 모양이제머.
워디라고 다르것는가.
내 전번에 화순으로 소금을팔러 가다가
사람을 하나 만났는디
영광으로 굴비를구하러 간다고 안 허것는가.
차림새를 봐헝께
영광꺼정 다님서 고런 귀한 생선 구해 묵을 처지도
아닌디 말이여.
그래 물어봉께 공물로 바칠라고 그런다등마.
공물이란 거시 뭔가. 고 지방서 나는 특산물을
나랏님헌티 바치는 것인디
원에 앉았는 것들이
즈그마을서 머가 나는지도 몰르고 품목을 정했단 말이아니것다고."
"누군지는 몰라도 그 위인 안돼얏그마이.
보나안보나 불알 두쪽만 덜렁 찬 빈털터릴 것이뻔하던디…"
"글씨. 그거시 내 말이시.
한 마실에 떨어진공물인디 워쩌것어.
찢어지는 살림에 마누라 머리도팔고
여름 넘길 보리쌀도 팔고 그래 갖고 돈을모았다대."
"야야. 집어치거라. 그런 얘기 내동 해봤자 머리만아픈께
힘없는 무지랭이가 워쩌것냐. 나 죽었다 글고살아야제.
집어치고 또 가봐야 안쓰것다고.
팔자 좋은양반님네를 만나 갖고 시간만 잡아묵었네.
자,싸게싸게 가드라고."
장사꾼들은 서로 앞다투어가며 왁자지껄
자기네신세를 한탄했다.
한동안 입담좋게 지껄여대더니 장사꾼들은
솜씨좋은말만큼이나 잽싸게 짐을 꾸렸다.
"여보시오."
지함이 느닷없이 맨 마지막으로
꾸물거리며일어나는 장사꾼을 불러세웠다.
수염을 텁수룩하게기른 사내였다.
"시방 지를 부르셨소?"
"그렇소이다."
"먼 일로 그럿라신당가?"
"생년월일을 한 번 대보시겠소?"
"뜬금없이 생년월일은 뭣에다 쓰실라고라우."
"내 사주를 좀 봐드리리다."
사주라는 말에 지게를 짊어지던 장사꾼들이
흥미가당기는지 일손을 멈추었다.
"아니, 버젓한 사대부 집안의 서방님 같은디
사주를다 보실 줄 아시요?"
"구미가 당기면 좀더 머물렀다 가시구려."
"지대로 사주만 짚을 줄 아신다면야
시간이 좀걸린다고 한들 아깝것소?"
"허허허, 믿어 보시구려.
제대로 짚지도 못하는 걸나서겠소?
엉터리로 봤다가 가는 길에
내 욕을얼마나들 해댈지 뻔히 알고 있소이다."
"웜매, 시방 이거시 되로 줬다가 말로 받는 꼴아니드라고이.
선비 나리도 말심 좋기가 구렁이 담넘어가듯 하시요이."
곁에 있는 양반들 들으라고 양반 욕을 실컷 했던장사꾼들이
배실배실 웃으며 다시 자리를 잡고앉았다.
"지부텀 봐주실라요, 선비 나리?"
"아니오. 처음 물었던 양반부터 봅시다.
걱정이 많으신 듯 하니…"
"웜매? 사주만 짚는 거시 아니고 점도 보는갑네.
쪽집게요, 쪽집게."
본인은 정작 시름 깊은 얼굴로 말이 없는데
옆에앉았던 점박이가 무릎을 치며 거들었다.
"아따, 쪽집게는 먼 쪽집게여.
나라도 이 친구 걱정많은 것은 알것그만
얼굴을 척 보라고. 시방 우리집에 우환이 꽉 들어찼소,
그라고 안써졌는갑네."
팔자 좋은 양반님네라며 은근히 비꼬던
자그마한사내였다.
그는 이미 지함에 대한 배타심을 버린
다른사람들과 달리 깐죽거리고 나섰다.
"허허. 바로 그거요. 쪽집게가 달래 쪽집게겠소.
누구나 가만히 살피면 다 알 수 있는 일인데…
남들이 무심히 스쳐 지나는 것을 침착하게 알아보면
그게바로 쪽집게지요."
지함이 너무 쉽게 자기 말을 인정해 버리자
사내는좀 머쓱한지 숱이 적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따, 오래 살다 봉께 쓸 만한 양반을 볼 날이 다있네이.
선비 나리 허시는 말씀 족족이 다명언이구만,
명언이라."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시오?"
"계유년 계해월 무자일 정사시그만이라."
지함은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생년월일을 써놓고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찢어지게 가난했구려.
기미(己未) 때 운이 돌아 치부를 하여
장차 거부가 될 상이오.
다만 화기(火氣)가 부족하여 고생할 것이니
화기를 생해주는 목(木)을 늘 곁에 두시오.
장사를 하더라도 나무나 종이를 다루는 것이 좋겠소."
"아따 징하게 좋은 소리구마. 그게 참말이다요?"
"참말이오."
"이보게나. 가야 할 때가 됐네.
벌써 해가 기울고있구만."
장사꾼들 사주를 풀어주느라 정신이 팔려 있던지함은
화담이 부르는 소리에 그제사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해가 서쪽으로 꽤 기울어져 있었다.
동그랗던 그림자도 훌쩍 키가 커져 있었다.
햇살 때문인가,
어쩐지 화담의 안색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시지라. 지들도 후딱 가봐야 쓰것그만이라.
그란디 선비님들은 워디워디 가신다요?
기왕 유람다니시는 거라믄 지가 사는 강진에도
볼 것이많은디요.
해남에서 멀지 않지라.
묵을 것이사 변변치 못혀도 지들이 심을 모다
정성껏 대접도 해드릴 것이고.
시간이 나먼 가는 길에꼭 한번 들려주시씨요이.
지 이름은 오천석이구만요.
소금장시 오천석하먼 이름값도 못하는 장사꾼이라고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구만요."
사주를 짚었던 사내가 그동안 정이라도 들었는지
아니면 고마움 때문인지 아쉬움에 미적거렸다.
"시간이 나거든 그렇게 하지요.
그러나 내 말을 마저 듣고 가야지,
그냥 가면 안 됩니다."
"먼 말씀이시다요?
거부가 된다고 하셨응께 그걸로 다 됐지라."
"아니오. 축기(縮氣)만 알고 방기(放氣)를 모르면
거부가 되어도 돈에 치어 죽습니다.
뭐든지 과하면불급만 못한 것.
그게 아무리 돈이라도 많으면 해가되는 것이오."
"무신 말씀인지 도통 모르것네.
돈이사 많을수록 존것이제."
길을 가자던 화담이
잠자코 지함이 하는 소리에귀를 기울였다.
"뭐든지 기가 과하면 부작용을 일으킵니다.
금기도그러하니 금이 과하면 목이 죽습니다.
이걸 잘 하는사람은 저걸 못하고,
저걸 못하는 사람은 이걸 잘합니다.
그렇게 이것저것 꿰어맞추다 보면 누가 더 잘난것도 없고,
누가 못난 것도 없지요."
"고러코롬 어렵게시리 말씀허실 게 아니라
쉽게 해주시지라."
"방기를 잘 하라는 것이오.
들어오는 돈을 꼭잡고만 있지 말고, 잘 쓰라는 말이오.
자기에게부족한 쪽을 메꾸는 데 쓰시오."
"오매. 돈은 버는 것보담 쓰는 것이 더 중하다
이말씀이시지라."
"그렇소. 돈은 누구나 벌 수 있는 것이오.
그러나축기를 하고 방기를 하는 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오.
즉, 그것을 꼭 쥐고 놓고는 사람이 하는 것이라오.
쥐는데 힘을 쓴 만큼 놓는데도 소홀히 하지 마시오.
그렇지 않으면 기에 치여 오래 살지 못합니다."
"명심하것소."
"그것이 거부가 가는 가장 높은 길이오."
"아이고, 선비님. 함자라도 알려주셔야 안 쓰것소."
짐짓 내리 대하듯 하던 선비 나리란 호칭이
어느새선비님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름을 알아서 무엇하겠소.
만나야 할 사람이라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겠지요."
"그래도 사람 정이 그런 게 아니구만요."
장사꾼들은 무거운 짐까지 다 짊어진 채
이름을알려줄 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기세로
버티고 서있었다.
"성은 이씨, 이름은 지함이오.
그럼, 잘들 가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