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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동녕 (李東寧, 1869.2.17~1940.3.13) |
호 |
석오(石吾). 자 봉소(鳳所). |
본관 |
연안(延安) |
출생지 |
충청남도 천안(天安) |
주요활동 |
1904년 제1차 한일협약(韓日協約) 체결로 국권이 위축되자 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 등과 상동(尙洞)청년회를 조직, 계몽운동을 벌였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폐기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그 해 북간도로 가서 이상설(李相卨)·여준(呂準) 등과 용정(龍井)에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교포교육에 힘썼다.
1907년 귀국, 안창호(安昌浩)·김구(金九)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 총무로서 활약하였다. 1910년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 소장이 되어 독립군 양성과 교포교육에 힘썼다.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대동신문(大東新聞)》 《해조신문(海潮新聞)》을 발행하였으며, 1913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고, 1919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議政院) 의장·내무총장, 1921년 국무총리 서리를 역임 중 파벌싸움으로 임시정부가 위기에 놓이자, 안창호·여운형(呂運亨)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 단결을 촉진하였다. 1924년 재차 국무총리가 되어 군무총장(軍務總長)을 겸직하고 이어 대통령대리가 되었으며, 1926년 국무령(國務領), 1927년 주석(主席)이 되었다.
1929년 김구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 이사장에 피선되고, 같은 해 재차 의정원 의장이 되었으며, 임시정부 주석은 계속 역임하였다.
1935년 양우조(楊宇朝) 등과 한국국민당을 조직, 당수가 되었는데,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에 가담하여 항일전을 구상하며, 1939년 김구와 전시내각을 구성, 조국광복을 위하여 싸우다가 쓰촨성[四川省]에서 병사하였다.
임시정부 국장(國葬)으로 장례가 거행되고,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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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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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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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인물 |
전덕기, 양기탁, 김구, 이상설, 여준, 안창호, 여운형 |
생가 |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 동리 |
묘소 |
서울 효창공원 |
기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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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출처 |
네이버 백과 |
첫댓글 와.. 할아버님.. 연안이가를 드높이기 위해 우리 후손들이 모두 일어나야 할텐데 말이져..
꼭 일어나시리라 믿습니다.
연안 이씨세요? 저도 그렇습니다. 반갑습니다 !! ^^
저희 할아버지와 같은 항렬이시네요.. 끝에 '녕'자... 저의 할아버지뻘 되는 이동녕 장군... 우리 가문을 빛내주시네요... ^^ 자랑스럽습니다. 우리나라를 지켜주신 독립투사로서 존경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