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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동] 영광군 대학살자, 2만1,225명 (끝) |
글쓴이 : 碧波郞
조회 : 541 추천 : 16 |
comment : 호남 지역에서 빨치산들에 의한 잔혹한 大학살극이 벌어지자
백수면 논산리는 인동 張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6·25 당시 23세로 초등학교 교사였던 장맹룡(75)씨에게 6·25 당시의 상황에 대한 증언을 부탁했다. (中略) 장씨에게 기자가 가져간 ‘6·25 사변 피살자 명부’가운데 영광군 명단을 보여 주었다. 피살자 명부는 姓氏별로 기록돼 있다. 명부를 넘기던 장씨의 시선이 장씨 성을 가진 피살자들의 명단에 오래 머물렀다. 침묵이 흘렀다. 장씨와 함께 명부를 들여다보며 숫자를 헤아리던 전영선 사장이 입을 열었다.
“대충 세어봐도 백수면 일대에서만 피살자가 300여 명이네…” 장씨의 입이 달싹였다.
“300명이여. 300명… 우리 장씨가 백수면 상사리하고 여기 대전리에 많이 살았지. 논산리에도 장씨가 있었어. 池씨도 많이 살았어.”
“넓게 보면 그렇지. 이념 갈등이라고 볼 수 있지. 거기에 감정이 개입된 거고.(中略) 내 외가가 염산면 야월리야. 김해 김씨 집성촌인데 피란 온 사람을 하룻밤 재워주었어. 그런데 이 사람들이 내 외가를 나가다가 빨치산에 잡힌 거야. 그래서 어떻게 됐는지 알아? 외가 식구 15명이 은닉죄로 몽땅 죽었어. (後略)”
私的인 감정으로 일가족 32명 학살
영광읍 홍곡리에 사는 박남도(81)씨는 매년 32명의 영령을 위해 제사를 지낸다. 양친 부모, 형님 내외와 조카들 두 명. 큰집 식구들 등 27명이 6·25때 피살당했고, 작은아버지의 가족 다섯 명은 1949명 초가을 빨치산들에게 학살됐다. 박씨는 이들 영령들을 위해 매년 음력 8월25일에 합동제사를 올리고 있다.
가족들이 학살당할 당시 박씨는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참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박씨는 가족들이 좌익들에게 학살당한 이유를 ‘순전히 개인 감정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일제 때 사촌형이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죽었어. 사촌형을 징용 보낸게 그 마을에 P씨 성을 가진 理長이었다나 봐. 큰집에서는 이장에 대한 감정이 쌓였겠지. 해방 후에 큰집 4촌형들이 6형제였는데 죽은 형을 빼고 5형제가 이장네로 몰려가서 항의도 하고 행패를 부렸다나 봐. ‘너희 때문에 우리 형제가 죽었다’고 말야. 어느 정도로 심하게 했는지는 몰라도 그쪽에서도 감정이 상했겠지. 그런데 그 이장 아들이 6·25 전부터 공산당 활동을 했었어. 이장 아들로서는 우리 사촌형들의 행패를 가슴에 새겨 두었겠지. 그러다가 6·25 동란이 터진 거야. 해방 후 친일파로 몰려 몰락했던 이장네 집안이 다시 재기를 하게 됐지. 그리고는 큰집 식구들을 반동으로 몰아 죽이고 우리 식구들까지 죽여버린 거야. 우리 가족이 죽을 이유는 그것밖에 없었어.”
박남도씨는 가족들의 정확한 피살일자를 모르고 있었다.
“그 날 산천초목이 떠나가라 하고 울었어. 울어도 울어도 피맺힌 한이 풀어지지 않더군. 가족들과 함께 죽지 못하고 살아 있다는 게 원망스럽기만 했지.”
그때의 충격으로 심장병을 얻은 박씨는 지금도 말을 할 때면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한다. 맺힌 한을 생각하면 복수를 하고 싶었고, 대한청년단 단장이라는 당시의 지위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자리였지만 박씨는 보복을 단념했다. 자신의 代에서 모든 악연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대한청년단원들 중에 가족의 복수를 하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박씨는 그들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고 한다.
실제로 박씨는 멋모르고 부역에 나섰거나 빨치산을 도왔던 영광군 군남면민 2,000명을 설득해 자수를 시키는 등 좌익에 가담했던 인사들의 구제에 앞장섰다. 전쟁이 끝난 후 전남도의원을 지낸 박씨는 미군과 국군에 의한 양민학살 문제가 크게 거론되는 데 불만이 많았다.
“어떻게 미군이나 국군한테 죽은 것만 양민학살이란 말야. 공산당 놈들한테 민간인이 죽은 건 양민학살이 아니냔 말야. 좌익이 양민을 더 죽였지. 우익이 더 많이 죽였느냐 말야. 가족이 죽창에 찔려 죽고 몽둥이에 맞아죽지 않은 사람들은 그 유족들의 고통을 몰라.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 같아.”
기자는 박씨와의 인터뷰 중에 영광지역에서의 민간인 학살이 왜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있었다. 기자는 백종옥 전무의 도움을 받아 박씨의 집을 찾아갔다. 박씨와의 인터뷰에는 백전무도 자연스럽게 同席을 하게 됐다. 박씨와 백전무는 6·25 전쟁때 가족이 입은 피해의 정도를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서로 알게 되었다.
박씨의 말.
“백전무와 내가 서로 알고 지낸 지 오래됐고, 둘 다 지역유지라면 유지인데 지금까지 이렇게 서로의 피해를 모르고 살았어. 빨리 잊기 위해서 말을 않고 살았던 거지. 우리뿐만 아니라 다들 그래.” II. 염산면 봉남리에 사는 안희주(76)씨는 스물네 살에 6·25를 맞았다. 당시의 주소는 염산면 상계리. 안씨 집성촌으로 영광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빌리면 ‘숙청이 심했던 곳’이다. 안씨는 6·25때 어머니와 네 형제 등 20명의 가족을 잃었다. 아버지는 안씨가 초등학교에 재학 중일 때 사망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안씨 형제들의 경우는 한 집에 한 명씩은 조카들이 학살을 모면해 代를 잇게 됐다는 점이다.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안씨는 광주사범학교 졸업반이었다. 다른 형제들은 농사를 짓고 있었고, 바로 위의 형이 면서기를 했다. 좌익들에게 크게 꼬투리를 잡힐 환경은 아니었다. 안씨는 인민군들이 광주에 들어오기 직전에 광주를 탈출해 학도병으로 입대했다. 경찰이 영광지역의 치안을 회복한 1951년 2월에 학도병으로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염산면과 백수면에서는 빨치산 토벌작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고향에서 그가 만난 것은 가족들의 처참한 죽음이었다.
가족의 죽음 앞에서 한 번 무너졌던 안씨의 가슴은 또 한 번 무너졌다. 자신이 학도병으로 입대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좌익들이 안씨의 가족들을 학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노인이든 애든 가릴 것 없이 같은 성씨면 한 구덩이에 몰아넣고 죽였다는 거야. 누구 하나를 죽여야 한다면 그 가족 전체를 죽인 거지.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이 있쟎아. 가족들이 학살당했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내가 그랬어.”
염산면에는 이웃 함평군까지 이어지는 월암산(338m)이 있다. 염산지역 빨치산의 본거지가 됐던 곳이다. 월암산 밑에 오동리는 남조선 노동당 지하 총책이었던 김삼룡의 고향으로 그를 추종하는 지역 빨치산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中略)
이 곳의 빨치산들은 설도港에다 산 채로 水葬했다. 살아 있는 사람의 목에 돌을 매달아 바다로 던져버린 것이다. (中略) 특히 기독교인들에 대한 집단 학살이 많았다.
영광군內에서 신도들이 가장 많이 학살된 교회는 염산면에 있는 염산교회다. 염산교회는 全교인의 3분의 2가 넘는 77명이 학살당했다. 염산교회 학살 사건도 9·28 수복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염산교회 김태균(47) 담임 목사가 전하는 당시의 이야기다.
서울 수복 이후 영광에도 국군과 유엔군이 곧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우익청년들은 9월29일, 이들을 환영하는 대회를 열었다. 이 때부터 좌익들의 보복이 시작됐다. 그해 10월 7일, 좌익들은 염산교회에 불을 지르고 기삼도씨를 비롯한 청년 신도들 다섯 명을 잡아갔다. 기삼도씨는 좌익들의 죽창에 찔려 죽었고, 나머지 청년들은 새끼줄에 서로 얽혀 매인 채 바다 속으로 던져졌다. 10월 8일에는 이 교회 집사였던 노병재씨 일가족 아홉 명, 동생인 노병인씨의 일곱 식구, 역시 동생인 노병규씨의 식구 일곱 명이 설도 수문에 수장된다. 노씨 일가만 23명이 같은 날 학살당한 것이다. 노씨 일가 외에도 김동곤 장로의 일가족 등 수많은 신도들이 바닷물에 던져졌다. 그 가운데는 어린아이들도 있었다.
1950년 3월에 염산교회 3代 목사로 부임한 김방호 목사 일가의 죽음은 끔찍함의 차원을 뛰어넘는다. 교회가 소실되고 신도들이 죽어가는 가운데 김목사는 한 신도의 집에 지하교회를 만들어 예배를 드렸다.
10월26일, 좌익들이 지하교회를 덮쳤다. 그들은 김목사의 부인, 아들, 손자 등 여덟 명의 가족을 한 줄로 세워 놓고 김목사의 아들들에게 몽둥이를 주면서 김목사를 치라고 했다고 한다. 김목사의 아들들은 차마 아버지를 몽둥이로 치지 못하고 “함께 죽여 달라”며 애원을 했다.
좌익들은 김목사의 아들들을 발고 차버린 후 직접 몽둥이와 죽창을 들었다. 그들은 김목사의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창으로 찌르고 몽둥이로 패서 김목사를 살해했다. 그 뒤를 이어 김목사의 부인, 아들, 여덟 살과 다섯 살이었던 손자들이 차례로 그들의 몽둥이에 맞고 죽창에 찔려 죽었다.
같은 염산면의 야월교회도 좌익들에 의한 집단학살이 벌어진 곳이다. 교인 65명이 학살당했다. 염산교회의 피살자 77명보다 숫자는 적지만 학살당한 65명은 당시 야월교회의 신도 전부였다. 全교인이 한꺼번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야월교회에서 학살이 발생하게 된 배경은 염산교회와 같다. 청년 신도들이 국군과 유엔군 환영대회에 참석을 한 것이다.
살해하는 방법은 달랐는데 야월리에 난입한 빨치산들이 全교인을 교회에 모아 놓고 석유를 뿌린 후 교회당과 함께 불태워 죽였다고 한다. (後略)
‘국군들이 영광읍내에 진주한 1950년 10월30일경에는 영광읍 전체가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다. 사망자 수만 하더라도 군민 13만 중 3만여명을 헤아렸는데, 그 중에서도 염산면 일대는 1만여 면민 중 묵숨을 잃은 자만 5,000여 명이 넘었으니 그 당시 영광군 일대의 상황이 얼마나 처참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영광신문 이근철(36) 문화팀장은 “그 동안 많은 사람이 전쟁 중에 죽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우리 영광에서만 2만명이 넘는 민간인이 죽었다는 것은 생각치도 못했다”면서, 희생자가 많이 발생한 원인에 대해서는 “해방 이후 내려오던 이념 갈등이 전쟁으로 더 심화될 수 있었고 그런 것들이 좌우 상호간에 살육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분석을 내놓았다.
李팀장은 영광의 지역적 특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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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고갑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