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47) : 장개석
장개석은 중국 절강성 닝보(寧波)에서 태어났다. 소금 장수였던 아버지는 일찍이 죽었다. 어머니 홀로 재혼을 하지 않고, 장개석 남매를 키웠다. 엄격한 유교 교육을 시켰다. 14살 때 5살 위 모복매(毛福梅)와 결혼했다. 큰아들 장경국, 장개석 사후 대만총통을 낳았다. 그러나 장은 내연의 처 야이오이청 등을 두었고 사랑을 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여러 학숙, 서당을 다니면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17살, 1904년이 되어서 신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청나라는 외침을 받아 망해 갈 무렵이다. 군사학을 공부를 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중국 바오딩 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가, 다음해 일본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09년에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일본제국군의 장교가 되었다. 신해혁명 때 중국에 돌아왔고, 손문을 도와 군사업무를 보았다. 1923년 손문과 부인을 살해하려 기관총으로 공격을 받았을 때, 장개석은 손문과 부인을 구출했다. 장개석은 손문의 신임을 받았다. 손문은 광저우에 황보군관학교를 세우고 장개석을 교장으로 임명했다.
손문이 죽고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상대는 손문의 부인 송경령과 국민영웅 왕징웨이(汪精衛)이다. 장개석은 서열이 낮았다. 황포군관학교는 많은 엘리트 간부를 배출하였다. 열세였던 장개석은 국민당의 실권을 장악하는데 군관학교 장교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실권을 장악한 장개석은 당시 재벌인 송씨 가문과 관계를 맺고 송씨의 3째 딸, 14살 아래인 송미령과 결혼을 한다. 결혼 조건으로 기독교로 개종을 하고 본처와 이혼을 했다. 송미령의 언니 송경령은 손문의 부인이다. 송씨 재매 3명은 모두가 미국에서 유학을 했다. 송경령과 송미령은 미국의 동부의 명문 웨슬리 대학을 졸업했다. 언니 송경령 손문의 사후, 모택동 군과 장개석 군이 싸울 때, 모택동 군대의 편을 들었고 모택동이 승리를 하고 난 후에 국가 부주석까지 지냈다. 가족사가 재미있다. 큰 언니 송아령은 당시 최고 재벌 공상치(孔祥熙)와 결혼했다. 부군과 함께 장개석 정부를 도왔다. 15년간이 중앙은행장을 지냈다. 일본이 항복하고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되자, 송아령은 남편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미국에서 생을 마감했다. 장개석의 아내 송미령은 생전에 미국의 지원을 받기 위하여 유창한 영어로 대미 선전활동을 하였다. 타임지에 ‘용의 여인’으로 ‘올해 남편의 연인’으로 표지에 계재되었다. 1943년에 루즈벨트, 처칠, 장개석이 모인 카이로 회담에서 남편의 통역을 해주어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다. 1975년 장개석이 죽자, 미국으로 갔고, 뉴욕의 맨하탄에서 2003년 102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장개석은 내전에서 패했다. 방대한 무기와 장비를 갖고 있으면서도 자신과 국민당의 부패로 국민의 신망을 잃어 패하고 대만으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그는 대한민국의 은인이다. 상해임시정부를 인정했고, 중경으로 피난을 간 후 임시정부를 도왔다.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 거사를 보고, ‘중국군 100만 대군이 못한 일을 조선사람 하나가 해냈다’고 격찬 했다. 그 후 임시정부에 대하여 재정적 지원을 했다. 김구선생과 신임이 두터웠다. 장개석은 1943년 카이로 회담 때, 조선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 했다. 해방이 되었다. 김구가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날 장개석은 김구를 비롯한 200여명의 임시정부 요인들을 초청하여 파티를 했다. ‘조선이 독립을 못하면, 중국이 독립 못한다. 그러면 동북아의 평화는 오지 않는다’는 연설을 했다. 그리고 김구에게 20만 불의 거액을 주었다. 지금의 20억에 해당한다. 축하금 으로는 너무나 큰 돈이었다. 거액의 지원금에 대하여 미국성은 오해를 했다. 장개석은 조선의 독립을 시켜 청과 같은 조선의 관계를 유지하고, 만주를 차지 하려한다고 판단했다. 그 돈은 직접 가져오지 못했다. 미군정은 임시정부의 입국을 임시정부의 자격으로가 아니라, 개인자격으로 입국을 허용했다. 군정은 임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그 돈을 이승만 대통령이 받고자 했다. 김구 선생이 직접 받으면 주겠다고 했다. 미군정은 반대했다. 남북한이 각각 정부를 수립하고, 김구의 지위는 약화되었다. 김구가 경교장에 있을 때 10만불을 받았다는 설이 있다. 1953년 장개석에게 한국최고의 훈장 건국훈장을 수여했다.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도 대한민국 임정을 도운 공로로 1966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대만으로 쫓겨 간 장개석은 죽을 때까지 죽고 난후에도 1987년까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사독재를 했다. 세계 최장의 계엄령이다. 철저한 반공주의를 내세워, 백색테러를 강행했다. 간첩혐의를 씌워 14만명을 투옥시키고, 4천명을 처형시켰다. 그러나 경제발전을 이룩하였다. 업적에 대하여 양비론이 있다. 대만 국민의 민주주의 탄압과 산업화의 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