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에 대한 설화............
*중국 <송고승전(松高僧傳)> 제4권 "의상전"에 전하는
의상과 선묘낭자 사랑 설화.
당나라 등주에 도착한 의상은 주장(州將)인 유지인(劉至仁)의 청으로 주(州) 관아에 머물며 극진한 공양을 받게된다.
벼슬 높은 주장(州將) 유지인(劉至仁)은 의상을 한눈에 범상치 않은 사람으로 알아 차리고 자기 관사로 모시어, 머나먼 뱃길에 심신을 지친 의상을 편히 머물게 하고 돌보았던 것입니다.
유지인(劉至仁)에게는 선묘(善妙)라는 뛰어난 미모를 갖춘 딸이 있었다. 낭자는 신라라는 타국에서 온 청아하고 단정한, 용모가 준수한 의상을 보자마자 한 눈에 반하게 됩니다.
선묘낭자는 국경을 넘어 사랑을 표하며 스님을 사모합니다. 그러나 佛子의 길을 겆는 의상스님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반석같은 한결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선묘낭자는 마음을 고쳐먹게 됩니다.
사모하는 마음은 가슴 깊이 간직한 채. 의상을 스승으로 삼아 불도(佛道)를 행하고 믿는 마음(道心)을 일으키게 된다.
선묘낭자는 귀명할 것을 맹세하고 발원하였다.
"세세생생(世世生生) 스님께 귀명(歸命)하여 대승(大乘)을 배우고 익혀 큰일(大事)을 성취하겠나이다.
제자(弟子)는 반드시 스님의 복전(福田)이 되어 세시로 필요한 생활품을 바쳐 공양하겠나이다."
그 후로 10년 동안 선묘낭자는 멀리서 의상의 불법수행을 뒷바라지하며 공양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의상스님은 선묘(善妙)낭자의 애절한 사랑을 뒤로 하고 장안에 있던 종남산 지상사 지엄화상을 찾아갔다.
지엄화상은 당시 화엄의 새로운 학풍을 일으켜 문하에 법장(法葬=賢首)과 같은 뛰어난 제자를 두고 있었다.
의상은 스승님 지엄(知嚴)화상을 하늘처럼 받들며 스승의 특별한 가르침을 받는다.
화엄학을 공부한지 홍장 1년(668) 10월 29일에 입적 하였다. 지엄화상으로 부터 "화엄일승법도계"를 인가 받았다.
지엄화상의 화엄학을 이을 상수(上首) 제자가 둘 있었으니, 한 분은 의상으로 해동화엄이요, 다른 한 분은 법장으로 중국화엄이었다.
입당구법(入唐求法)의 목적을 다하고 신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던 의상은, 당나라에서 신라를 치려한다는 변고를 알게되고 서둘러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의상은 671년(문무왕 11년)에 신라로 돌아왔다.
<삼국유사>에는 당 나라 군대가 신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알리기 위해 서둘러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10년간 화엄불교학을 공부하고 귀국하는 길에, 의상스님은 처음 당나라에 왔을 때 자신에게 후의를 베풀어 주었던 선묘낭자 집을 찾았다. 의상이 종남산으로 들어간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를 하고 있다는 선묘낭자의 부친 이야기를 듣고, 의상은 마음이 애처로왔지만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었다.
염불삼매에 잠긴 선묘의 뒷모습을 보고 발길을 돌려 선창으로 나가 배를 타고 신라로 향했다. 뒤늦게 의상스님의 행적을 안 선묘낭자는 선창가로 달려 갔으나 배는 이미 멀리 떠나버린 후 였다.
선묘낭자는 그동안 의상을 위해 지은 가사와 장삼 보따리를 가슴에 안고 있었다. 포구에서 멀리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며 선묘낭자는 법복과 행장을 싼 보자기를 떠나는 배를 향해 던집니다.
그 순간 바다에 일진광풍이 불어 그 선물보자기가 의상(義湘)에게 전달되어입니다.
의상도(義湘圖)의 권 말미 화기(畵記)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재가(在家)의 애심(愛心)은 용맹한 신심(信心)을 일으켰다. 공경에 의하여 사랑을 이루었다"
선묘낭자는 그리고는 바다로 뛰어 듭니다.
" 나는 이미 스님께 바친 몸, 이 세상에서 다하지 못한 사랑을 저 생애서 가서라도 스님을 따라다니며 하시는 일을 도와 법의 꽃이 활짝 피도록 노력하겠다"
"이 몸이 용이 되어 스님이 타신 배를 호위하리라"
"이 몸이 변해 대룡(大龍)이 되어서 저 배가 무사히 신라땅에 닿아 스님의 법(法)이 전(傳)할 수 있게 하소서."
"나의 진정한 본심은 법사를 공양하는 일이오니. 원컨대 이 옷함이 저 배에 닿게 하소서".
세세생생 스님을 모실 수 있었으면 하는 그 바램은 그녀를 용으로 화현시킨다.
그 이후 의상에게는 선묘룡의 화신이 그림자 처럼 붙어 다닌다.
뱃길을 지키는 수호신도 선묘룡이었으며, 태백산 浮石寺를 창건할 때 산적을 몰아친 것도 선묘룡이었다.
귀국한 뒤에 동해의 굴에서 관음보살(觀音菩薩)를 친견(親見)하고 낙산사(洛山寺)를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데, 당시의 <백화도장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이 전해진다.
의상이 사찰을 창건하라는 왕명을 받고 봉황산에 갔는데,
그곳에 먼저 자리잡은 산적들 때문에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이때에 선묘룡(善妙龍)나타나 사방 십리의 대반석(大磐石)을 공중으로 세차례나 들어올렸다 놓자 산적들은 모두그 위신력에 질려 마침내 굴복하고 사죄하였다.
"浮石부석 (뜬 바위)"라는 절 이름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676년(문무왕 16년)이다.
과거 삼국(三國)의 요충지였던 죽령(竹嶺) 봉황산에 건립된 "부석사(浮石寺)" 이다.
의상은 부석사를 짓고 화엄학의 전파에 매진합니다.
양양의 낙산사, 동래의 범어사, 지리산의 화엄사, 울진의 불여사가
의상대사의 혼이 담긴 대표적인 사찰입니다.
첫댓글 한 강희. 통장님. 사진 찍으시느라. 너무 고생. 많으셨읍니다. 사진이. 너무 너무. 잘 찍으셨읍니다 잘 보았읍니다
시간이 없어 정성이 조금 부족했습니다. 이쁘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다음번에는 좀더 신경써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