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심심한 학교, 배움의 즐거움이 사라진 학교
충남 아산 거산초등학교
최은희
“선생님, 우리 동생 오늘 학교에 안 올지 몰라요.”
현관을 들어서는 데 4학년 정화가 달려와 말한다.
“왜?”
“몰라요. 그냥 오기 싫다고 막 울고 떼써요.”
입학한지 열흘이 조금 지나자 슬슬 기미가 오기 시작한다. 긴장이 풀어진 일 학년 아이들이 보통 이쯤 되면 학교에 가네 안가네 하며 부모들 애를 태우는 시기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나 되돌아 생각해 봐도 도통 실마리를 찾지 못하겠다.
오지 않은 석규를 기다리다 조금 늦게 아이들과 운동장으로 나갔다. 어제 오후에 학교를 둘러보니 원추리며 상상화, 수선화가 아기 잇몸에 돋아나는 이처럼 뾰족뾰족 올라오는걸 보았다. 새싹이 나고 있는 걸 찾아보자고 말했지만 녀석들은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지들끼리 수다를 떠느냐 어수선하다.
“선생님, 요기 뭐 있어요.”
들여다보니 새싹이 헌 잎을 밀어내고 움돋고 있다.
“진짜! 원추리 싹이 나네. 희진이처럼 예쁜 싹이네.”
내 말 한 마디에 희진이 얼굴이 발그레해진다. 희진이가 칭찬을 받았다고 생각한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싹을 보았다고 내 손을 잡아끈다. 눈길 주지 못했는데 어느 새 봄볕을 받고 움돋는 싹이 제법 많다. 향나무 아래 상상화는 벌써 어른 손 크기만큼 쑥 자라 있다.
“땅에서 나오는 싹도 찾고 또 나무에서도 싹이 나는지 찾아보자.”
내가 말하자 아이들이 튀밥처럼 흩어진다. 긴 다리로 펄쩍펄쩍 뛰어 다니던 근우가 명자나무에 맺힌 꽃망울을 보고 소리친다.
“여기, 선생님 여기에 싹 났어요. 근데 동그래요.”
“와! 근우 관찰력이 대단하네. 어쩜 요렇게 조그만 걸 찾아냈을까? 그럼 얘들아, 우리 이 나무에 난 싹이 꽃으로 필지, 잎으로 될지 앞으로 잘 살펴보자. 음…, 한 열 밤 정도 자면 아마 알 수 있을 거야.”
아이들에게 기다림의 공부를 슬쩍 제시해 주었다. 아마도 녀석들은 내가 잊고 있어도 매일 명자나무를 들여다 볼 것이고, 꽃이 피면 내게 가장 먼저 알려 줄 것이다. 그렇게 학교 꽃밭을 다 돌고 뒷산으로 올라가려는 데 준혁이가 소리친다.
“선생님, 석규 왔어요. 홍석규!”
“그래. 석규가 좀 늦었네. 누가 석규 이리로 오라고 할래?”
칭찬을 받아 기분이 좋은 근우가 대답도 않고 먼저 달려가고, 그 뒤로 사내애 몇이 우르르 따라간다. 석규를 기다리며 동물집에 살고 있는 강아지 보노보노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선생님, 석규 안 온대요. 자리에서 꼼짝도 안 해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용준이가 전한다. 어찌 금방 따라 오겠는가? 학교에 오기 싫어 징징대던 마음이 채 풀리지도 않았을 거고 또 뒤늦게 나오면 친구들이 왜 늦게 왔냐고 우르르 물으면 내성적인 아이가 그걸 감탕하기가 쉽지 않을 테니 말이다. 결국 오지 않은 석규를 교실에 둔 채 우리는 뒷산에 가서 새소리를 듣고, 바람소리를 듣는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공부를 마치고 현관을 들어서는데 석규가 신발을 신고 있다. 나를 보자 움찔한다.
“석규, 지금 나오는구나! 근데 어쩌냐? 우린 지금 공부 끝내고 오는데? 다음엔 꼭 같이 가자.”
그러면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석규야! 오늘 왜 학교 오기 싫었어?”
《학교 가기 싫어》 그림책을 펴들고 물었다.
“그냥요. 집에서 컴퓨터 게임 하고 싶어서요.”
석규가 말간 얼굴로 대답한다.
“니들도 학교에 오기 싫을 때 있지?”
내 말에 애들은 늦잠 자고 싶어서, 놀고 싶어서, 쉬고 싶어서 학교에 오기 싫다고 말한다. 학교가 싫어서 그러냐니까 그건 아니란다. 학교에 와서 친구들하고 놀고도 싶고 집에서 컴퓨터도 하고 텔레비전도 보고 싶단다. 왜 안 그렇겠는가?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토요일에 매일 놀던 습관이 있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에 오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닐 거다.
“나두 학교에 오기 싫을 때 많은데. 그냥 집에서 뒹굴뒹굴 놀고 싶거든. 그런데도 참고 오는 거야.”
“진짜요?”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한다. 내 말에 아이들은 학교 오기 싫어하는 자기들이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게 아님을 확신하는 눈치다.
“쟤도 학교 가기 싫어서 화가 났어요.”
석규가 말문을 튼다. 빨간 뿔이 난 모자를 쓰고 있는 계집애가 팔장을 낀 채 완강하게 서있는 모습에서 아침에 떼를 쓰던 자신을 발견한 모양이다.
“학교 가기 싫어해서 악마 꼬리가 있어요.”
치마 밑으로 삐져나온 화살표 모양의 꼬리를 발견한 지원이가 벌떡 일어서며 말한다.
“그러네? 근데 왜 악마 꼬리일까?”
“학교에 가지 마, 하면서 악마가 자꾸 자꾸 말해서 그래요.”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에 대해 아이는 악마라고 표현한다. 그건 규범에 따르는 것만이 착한 것이라 배웠기 때문이다.
“악마? 그럼 우리 마음속에는 악마도 있고 또 천사도 있는 거네? 둘 다 내 마음 속에 살고 있네?”
앞면지를 펼치니 ∨와 ×가 무수히 그려져 있다. 이게 무슨 말일까 하고 묻자, 코앞에 앉아 있던 경민이가 손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 표시는 학교 가고 싶은 마음이구요, ×는 가기 싫은 마음이에요.”
에너지가 많아 한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아이가 그럴듯하게 이야기 한다.
“아, 정말 그렇겠네? 선생님도 이거 보면서 이게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경민이 얘기를 들어보니 진짜 딱 맞는 말이다.”
아이들 눈이 예리하다. 마음으로 책을 읽으니 그런가보다. 신이 난 경민이는 아예 앞으로 나와 ∨와 ×가 몇 개나 그려져 있는지 세느라 바쁘다. 파란색으로 표시된 ∨와 빨간색으로 표시된 × 숫자가 엇비슷하다.
착하고 예의바른 트루디는 학교에 가는 걸 무척 싫어한다. 얼마나 싫었으면 학교가 불타기를 바라겠는가? 학교가 불탄다는 말에 아이들은 ‘우와!’하며 소리를 지른다. 긍정인가 부정인가 잠시 헷갈린다. 긍정적인 반응이면 그야말로 큰일이다. 이제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지 열흘밖에 안된 꼬마들에게 학교가 불타서 없어졌으면 좋을 존재로 생각된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남들 눈에 비친 그야말로 예의바르고 착한 아이가 내면에 이렇듯 엄청난 일을 꿈꾼다는 것은 그 동안 이 아이는 남들에게 바르고 착하게 보이기 위해 자신을 무척 억압했다는 말이다. 어쩌면 이 아이는 ‘학교가 불 탔으면’ 하고 바라면서도 학교에서는 누구보다도 모범적인 아이였을 것이다. 그러니 마음에 분노가 있을 수밖에.
선생님은 혹투성이 두꺼비고 교실은 구덩이 속에 있으며 급식 아주머니는 지렁이를 주고 토끼똥이랑 숯덩이를 먹인다는 말에 아이들은 와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면서 ‘진짜 재밌겠자’하는 말을 내뱉는다. 아이다운 호기심과 상상력이 긴장된 아이들 마음을 풀어 놓는다. 거짓말을 전혀 할 것 같지 않은 아이는 계속 황당한 말을 늘어놓는다. 해골이 그려진 동굴처럼 생긴 학교에 매몰차게 자기를 떼어 놓고 가는 엄마, 피가 날 때까지 때리고 창밖으로 자기들을 내던지고 유리조각 위를 맨발로 걸어가라는 선생님. 교실에서 떠들면 온 몸을 밧줄로 묶고 입을 테이프로 붙여 목을 잘라 매다는 무시무시한 벌. 아이들은 ‘으으’ 소리를 내며 몸을 떤다.
트루디의 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악당과 해적인 친구들은 트루디만 괴롭히고 모래밭과 수영장조차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체육시간도 그네타기도 소풍도 트루디에겐 온통 무섭고 두려운 일이다. 심지어는 호랑이까지 나타나 선생님을 물어가고, 가장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가게도 문이 닫혀 있다. 트루디가 말하는 선생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일을 벌이는 존재다. 수업 시간에 나타난 괴물은 책과 공책을 엉망으로 만들고 더 힘든 일은 아무도 트루디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는 거다. 그렇게 끔찍한 학교를 트루디는 몇 해 동안 다녔다. 그런 트루디가 학교를 떠나던 날 펑펑 운다.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다고. 선생님이 모고 싶을 거라고.
결국 트루디는 꿈을 꾼 것이다. 이렇게 끔찍한 일이 일어날 만큼 아슬아슬하고 재미있는 학교 생활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어찌 보면 지극히 규범적이고 모범생인 트루디에게조차 학교는 너무도 심심하고 하루하루가 비슷한 일상으로 반복되는 곳이었기에 늘 새롭고 신나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길 기대하지 않았을까? 기대하는 즐거움과 설렘이 없는 곳에서는 배움이 일어나기 힘들다. 더 이상 호기심을 갖지 못하고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나지 않는 공간은 아이들이나 어른에게 견디기 힘들다. 그래서 트루디는 말하고 있다. 제발 학교라는 곳이 좀더 신나고 좀더 즐겁고 아슬아슬한 일들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학교 가는 일이 매일매일 기다려지고 셀렜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낯선 공간에 대한 긴장이 사라지면 아이들은 새로운 것을 기대한다. 혹시나 하는 기대는 사람을 얼마나 생기 있게 만드는가? 그런데 학교란 곳이 지켜야 할 약속은 많고, 하고 싶은 것을 억누르는 공간으로 다가오면 어떻겠는가? 당연히 재미없어진다. 아침 일찍 일어나 가방을 메고 오고 싶어지지 않는다. 이미 유치원에서 배운 줄 긋기과 선 그리기를 반복하고, 다 아는 글자를 또 배워야 하고, 선생님은 늘 ‘~해라. 또는 ~해야 하는 거야.’를 말하니 어찌 재미가 있는가? 차라리 혼자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텔레비전을 보며 뒹굴거리고 싶은 유혹이 더 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요즘 아이들은 학교에 오기 전에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배웠다. 한글이나 수학 기초를 이미 배운 아이들이 숱하다. 그러니 신기할 것도 궁금한 것도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초등학교 선생들은 말한다. ‘정작 배워야 할 것은 배워 오지 않았다’고. 그래서 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것이 너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둘레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야 하는 법이라든가, 글씨를 쓸 때 연필 쥐는 법이라든가 글씨 쓰는 차례라든가, 젓가락질 하는 법, 자기 둘레를 정리하는 것들. 하나하나 손 가야하는 것도 많다. 잘못된 습관을 고치는 것도 힘든 일이다. 아이들은 좀처럼 자기에게 익숙한 것을 바꾸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모든 가르침과 배움이 ‘~해야 한다.’로 이루어지면 그 역시 힘들다. 몸을 움직이며 즐거움과 호기심이 동반되지 않으면 그것은 지루한 공부가 되기 때문이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듣게 하려면 잘 들어야 한다고 가르치면 어렵다. 잘 듣게 하는 공부를 찾아야 한다. 듣고 싶어 입을 다물고 귀를 기울이게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옛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림책을 읽어주며 보고 싶고 듣고 싶어 조바심이 나게 해야 하면 어떨까? 그러면서 가랑비에 옷 젖듯 배움이 일어나게 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날마다 새로운 배움이 일어나고 학교에 가면 뭔가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거라는 기대가 생기면 학교에 가지 말라고 해도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설 것이다.
진정한 배움은 깨닫는 과정에서 온다. 누군가가 알려준 것은 내 안에 울림을 주지 못한다. 울림을 주지 못하는 앎은 우리 삶을 변화시키기 어렵고, 몸으로 실천하기 어렵다. 그 동안 우리는 아이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가르치려 들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아는 것은 많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고 알아 나가는 기쁨을 빼앗겼다. 봄이 되면 진달래가 피고 새싹이 움돋는다고 알려주지 말자. 대신 아이들을 데리고 봄볕이 내리쬐는 들로 산으로 나가보자. 그 안에서 아이들이 발견하게 두면 된다. 그러면 아이들은 환호할 것이다. 발견하는 눈은 탐구하는 마음으로 발전하고, 호기심을 가진 마음은 즐거움을 느끼는 삶을 가져올 것이다. 아이들보다 세상을 오래 산 어른들 눈에는 그리 신기할 것도 궁금할 것도 없는 일이 아이들에겐 세계 전부가 될 수 있다. 그 배움의 시간 속에 아이들을 놓아두면 우리가 그랬듯 아이들은 천천히 몸으로 빨아들일 것이다.
《학교 가기 싫어!》라는 한 권의 책을 읽으며 나는 다짐한다. 아이들을 심심하게 하지 않아야겠다고. 날마다 새로운 배움과 즐거움이 일어날 수 있도록 내 몸을 바삐 움직여야겠다고. 그래서 나와 헤어지는 날 우리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아쉬운 마음을 가지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나를 다그쳐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