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7년 청은 병자호란을 종결짓고 돌아가면서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 인조의 세 아들을 볼모로 잡아갔다. 그 중 셋째아들 인평대군은 이듬해에 돌아왔으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8년 뒤인 1645년에야 귀국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둘 다 청에 8년여 동안 함께 볼모로 잡혀 있었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완전히 다른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소현세자가 당시 청에 수입된 서양문물을 대하면서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익혀 나간데 반해 봉림대군은 철저한 반청주의자가 되어 형 소현세자를 적극 보호함과 더불어 청의 내부 사정을 파악하여 본국에 전해주는 역학을 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청의 대명 전쟁에 직접 참여하여 명이 멸망하는 과정을 목격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패전국의 왕자라는 이유로 청나라 관리들로부터 멸시를 받기도 했다. 그의 이 같은 경험들은 반청 사상을 더욱 강하게 불러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청에서의 생활상은 역관이나 사은사들을 통해 조선 조정에도 전해지게 되었는데 인조는 소현세자가 서양 종교인 천주교에 심취해 있다는 사실을 듣고 몹시 분개했다. 게다가 후궁 귀인 조씨와 김자점의 이간질로 소현세자를 몹시 못마땅해 하며 경계심을 높였다. 이후 청나라는 명을 멸망시켰고 세자 일행을 풀어주어 소현세자는 1645년 2월에 한성으로 돌아왔지만 얼마되지 않아 앓아 눕게 되고 앓아누운지 며칠만에 의문을 죽음을 맞게 된다.
소현세자가 인조에 의해 제거되자 그때까지 심양에 남아 있던 봉림대군은 이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했다. 그가 귀국한 것은 1645년 5월이었다. 인조는 한달 뒤인 6월에 신하들에게 세자 책봉 의사를 밝혔으며, 9월에 봉림대군을 세자에 앉혔다.
봉림대군은 소현세자와 함께 8년여를 심양에 기거했지만, 소현세자가 거기에서 서양 문물을 배우고 실리 외교를 주창했던 것과는 달리 오히려 대명 사대주의에 더 집착하여 반청 사상을 한껏 고조시킨 인물이었다. 그의 이 같은 반청 감정은 인조를 흡족하게 하는 일이었다. 인조는 봉림대군의 반청 감정이 자신의 대명 사대사상과 일치한다고 보았고, 그 때문에 큰아들을 죽이고 차남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던 것이다. 봉림대군은 1649년 5월 인조가 죽자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가 바로 북벌론을 내세우며 국력 강화에 전념했던 조선 제 17대 왕 효종이다.
■ 효종의 북벌 정책과 조선 사회의 안정
소현세자와 함께 오랫동안 볼모 생활을 하며 반청 감정을 강하게 키웠던 효종은 왕으로 등극하자 곧 친청 세력을 몰아내고 척화론자들을 중용하여 북벌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이 같은 북벌 계획은 끝내 실행에는 옮기지 못했지만 그 덕택으로 국력이 강성해져 사회 안정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효종은 1619년에 인렬왕후에게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호, 자는 정연이다. 1631년 12세에 장유의 딸 장씨와 혼인하였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의 명으로 아우 인평대군과 함께 비빈, 종실 및 남녀 양반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피난하였으나 이듬해 강화가 성립되어 형 소현세자 및 김상헌 등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8년여의 볼모 생활 동안 많은 고통과 고생을 겪으며 반청 사상을 정립시킨 그는 1645년 먼저 귀국한 소현세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들어와 그 해 9월 세자에 책봉되고, 1649년 5월 인조가 죽자 31세의 나이로 조선 제 17대 왕으로 등극했다.
효종은 청나라에 머무르면서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전쟁으로 인해 온갖 고초를 다 겪었기 때문에 청나라에 대해 많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집권 초기부터 배청 분위기를 확산시키며 송시열의 북벌론에 근거하여 북벌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는 이 계획을 수립하기에 앞서 우선 친청파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표적인 친청 세력은 김자점이었다. 그는 인조반정의 공신이라는 입지를 바탕으로 한때 정권을 장악해 권세를 누리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아 물러난 바 있으며, 이후 김류와 제휴하면서 다시 정계에 나선 인물이었다. 김자점은 사은사로 수차에 걸쳐 청나라를 내왕하면서 청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한편 인조의 총애를 받던 후궁 조소용과 결탁하여 인조의 의심을 받고 있던 소현세자를 비난하여 인조와 이간을 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조소용이 낳은 효명옹주와 자신의 손자 세룡을 혼인시킴으로써 궁중과 유착 관계를 보다 강화시켰다. 그러나 김자점은 자신의 절대적인 후원자였던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여 김상헌, 송시열 등 반청 인사들을 대거 중용하자 그들의 탄핵을 받아 유배당했다. 그는 유배 후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역관 이형장을 시켜 새 왕이 청나라를 치려고 한다고 효종을 청에 고발하였다. 이 사건으로 청나라는 군대를 압록강 근처에 배치하고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무마되었고 김자점은 다시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광양으로 유배된 김자점은 1651년 조귀인과 짜고 다시 역모를 획책한다. 그러나 이 계획은 미리 폭로되어 아들과 함께 죽었으며, 그를 후원하던 인조의 후궁 조귀인도 사약을 받았고 그를 따르던 무리들도 모두 축출당했다.
김자점 역모 사건으로 친청 세력을 모두 제거한 효종은 북벌을 위한 본격적인 군비 확충 작업에 착수했다. 1652년에는 북벌의 선봉 부대인 어영청을 대폭 개편 강화하고, 임금의 호위를 맡은 금군을 기병화하는 동시에 1655년에는 모든 금군을 내삼청에 통합하고 군사도 600여 명에서 1천여 명으로 증강시켜 왕권을 강화시켰다. 또한 남한산성을 근거지로 하는 수어청을 재강화하여 한성 외곽의 방비를 보강하였고, 중잉군인 어영군을 2만, 훈련도감군을 1만으로 증가시키고자 하였으나 재정이 빈약하여 실현하지 못했다. 한편 1654년 3월에는 지방군의 핵심인 속오군의 훈련을 강화하기 위하여 인조 때 설치되었다가 유명무실화된 영장제도를 강화하고, 1656년에는 남방 지대 속오군에 정예 인력을 보충시켜 기강을 튼튼히 하였다. 그리고 한양 외곽과 강화도 군력을 증강시켜 수도의 안전을 꾀했다. 효종은 이러한 군비 증강을 바탕으로 두 번에 걸쳐 나선 정벌을 감행하기도 했다.(나선은 러시아를 가리킨다.) 두 번에 걸친 나선 정벌은 조선군의 사기를 한껏 높여 이후에도 나선 정벌을 핑계로 조선은 산성을 정비하고 군비를 확충하여 북벌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을 훈련도감에 수용하여 조총, 화포 등의 신무기를 개량, 보충하게 하고 필요한 화약 생산을 위해 염초 생산에 매진하였다. 하지만 이런 집념 어린 군비 확충 작업은 번번이 재정적 어려움에 부딪쳐 중단되곤 하였다. 그리고 지나치게 군비 확충에만 주력한 나머지 민생을 곤란하게 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다.
효종은 국방 강화와 동시에 경제적인 안정을 꾀하였다. 두 번에 걸친 외침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파탄지경에 이른 경제 질서 확립을 위해 그는 충청도와 전라도 근해 지역에 대동법을 확대 실시하고, 전세를 1결당 4두로 고정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다.
한편 문화면에서도 역법의 발전을 꾀하기 위해 태음력과 태양력의 원리를 결합하여 24절기의 시각과 1일간의 시간을 계산하여 제작한 시헌력을 사용하게 했다. 또 「국조보감」을 재편찬해 치도의 길을 바로잡고, 「농가집성」 등의 농서를 마련해 농업 생산을 늘리려 했다. 또한 흐트러진 윤리를 바로잡기 위하여 소혜왕후가 편찬한 「내훈」, 김정국이 쓴 「경민편」 등을 간행하였다.
효종은 평생을 삼전도의 치욕을 되새기며 북벌에 집념하여 군비 확충에 전력을 쏟은 군주였으나 국제 정세가 호전되지 않았고 이를 뒷받침할 재정이 부족하여 때로는 군비보다도 현실적인 경제 재건을 주장하는 조신들과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결국 효종은 북벌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59년 5월 4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확립한 군사력은 조선 사회의 안정을 위한 기반이 되었다.
* 제 1차 나선정벌
나선(러시아)은 흑룡강변의 풍부한 자원을 탐내어 흑룡강 우안의 알바진 하구에 성을 쌓고 그 곳을 근거지로 삼아 모피를 수집하는 등 불법적인 탈취 행위를 하였다. 그 때문에 주변의 수렵민들과 분쟁이 잦았으며, 나아가서는 청나라 군대와 충돌을 빚기도 하였다. 청은 누차에 걸쳐 나선인들의 국경 진입을 막았지만 그들은 점차 송화강 유역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 노략질을 일삼았다. 청나라 정부는 군사를 보내어 영고탑에서 전투를 벌여 그들을 축출하려 했지만 오히려 그들의 총포에 번번이 당하곤 하였다. 청은 별수없이 조선 조총군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청은 조선 조총군사 100명을 뽑아 회령을 경유하여 영고탑에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조선 조정은 심의 끝에 조총군사 100명과 여타 병력 50명을 파견하여 청나라 군사와 함께 나선 병력을 흑룡강 이북으로 격퇴시켰다. 이것이 1654년 4월에 있었던 제 1차 나선정벌이다.
* 제 2차 나선정벌
조선은 1658년 6월 청의 요청에 따라 다시 조총부대 200명과 초관 및 여타 병력 60여 명을 파견해 제 2차 나선 정벌에 나섰다. 나선 정벌에 나선 청군과 조선 조총군은 송화강과 흑룡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적을 만났다. 이때 나선군은 10여 척의 배에 군사를 싣고 당당한 기세로 다가왔는데 청군은 겁을 먹어 감히 그들을 대적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군이 화력으로 적선을 불태우자 나선군은 흩어졌고, 이후 흑룡강 부근에서 활동하던 나선군은 거의 섬멸되었다.
* 효종의 가족들
효종은 인선왕후 장씨와 안빈 이씨 두 부인에게서 1남 7녀를 두었다.
* 인선왕후 김씨
우의정 장유의 딸이며, 13세가 되던 1630년 한살 어린 봉림대군과 가례를 올리고 풍안부부인에 봉해졌다. 1637년 조선이 병자호란에 패전하자 소현세자를 따라 봉림대군과 함께 볼모로 잡혀가 8년여 동안 심양에서 생활하였다. 1645년 소현세자가 죽고 봉림대군이 세자에 책봉되자 세자빈이 되었으나 책봉이 제때 되지 못해 사저에서 아이를 낳기도 했다. 그 뒤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며, 1649년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어 2년 뒤에 정식으로 책봉되었다. 1659년 효종이 죽은 후 1662년 효숙의 존호를 받아 대비로 있다가 1674년 질병을 얻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