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나전칠기 뿌리, 원주에 뺏겼다
원주시, 김봉룡 유작 10여 점 매입…유족, 선생유품 무상기증 약속
8월 통영나전칠기 심포지엄서 원주-유족 교감…통영은 뭘했나?
김영화 기자 | hannews@chol.com
▲ 통영나전칠기의 양대 산맥으로 평가받는 김봉룡 선생의 생전 작업 모습.
송주안 선생과 더불어 통영나전칠기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던 일사 김봉룡(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 1902∼1994) 선생의 유작과 유품 모두가 원주로 가게 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원주시와 원주역사박물관(관장 박종수)은 지난 연말 한국 전통 나전칠기에 일대 혁신을 일으킨 선생의 유작 10여 점을 매입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또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유족으로부터 매도의사를 확인했으며, 선생이 사용하던 유품을 원주시에 무상으로 기증하겠다는 약속까지 받았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을 지역신문인 원주투데이가 12월 26일자 문화면 전면을 할애, 특집으로 다뤘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지난 8월 통영나전칠기 심포지엄이 열린 통영에서 발제자로 나선 원주역사박물관 박종수 관장이 이날 참석한 유족 대표인 장남 김옥환 선생을 만나 의견을 타진, 끈질긴 설득 끝에 이 일이 성사된 것이다.
당시 한산신문과 김옥환 선생이 단독 인터뷰 시 "통영나전칠기 발전을 위해 아버지 유품이 필요하면 언제든 형제 모두 통영에서 전시할 수 있도록 원하고, 또 통영과 외지에 있는 통영공예인 전시회 등도 제안한다"고 통영에 대한 의사를 이미 밝혔다.
특히 유족 대표로서 김옥환 선생을 통영시 문화예술과장과 담당자에게도 소개를 시켰으나 통영에서는 그 어떤 노력도 없었다.
반면, 원주는 깊은 관심과 발 빠른 노력으로 나전칠기 양대산맥의 한 획을 유치해내는데 성공하며 통영에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 김봉룡 선생의 유작.
팔각 패화칠기 과반, 공작무의 나전칠기 서류함
과연 어떤 작품들인가, 또 어떤 의미가 있는가
▲ 8월 통영에 전시된 '도태장초문 나전칠화병'.
원주역사박물관이 구입하는 선생의 유작 중에는 전통 나전칠기 기법을 되살린 '팔각 채화칠기 과반'을 비롯 '공작무늬 나전칠기 서류함'과 '도태장초문 나전칠화병' 등 대표작들이 모두 포함돼 있다.
이중 '팔각 채화칠기 과반'은 나전을 쓰지 않고 칠에 안료를 섞어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제작한 옻칠 칠기 기법의 대표작이다.
이 기법은 신라 천마총과 백제 무녕왕릉 등에서 출토된 유물에서 같은 기법을 확인할 수 있을 뿐 고려 이후 유물에서는 흔적을 찾을 수 없어 단절된 기법으로 여겨졌다.
1970년대 선생의 손으로 복원된 후 현재 여러 제자를 통해 전승되고 있다.
'공작무늬 나전 칠 서류함'은 1975년 방한한 미국 존슨대통령에게 선물로 증정한 것과 같은 작품이다.
당시 청와대 요청으로 제작한 두 점 중 한 점을 청와대가 사들여 존슨대통령에 선물했으며 현재 미국 존슨 대통령 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원주가 소장할 작품은 유족이 소장하고 있던 남은 한 점으로 존슨 대통령에게 선물한 것과 함께 만들어졌다.
'도태장초문 나전칠화병'은 문광부가 한국미술오천년이란 타이틀로 미국순회 전시를 기획했을 당시 한국 나전칠기의 대표작으로 소개된 작품으로, 한국 나전칠기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각인시킨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장은 통영 열매는 원주, 통영심포지엄서 첫 의사 타진
그럼 유작 매입 및 유품 기증은 언제부터 추진됐을까?
정말 가슴 아프게도 통영이 장을 펼친 지난 8월 통영나전칠기의 회고와 전망 심포지엄에서 출발했다.
통영전통 공예의 사양화 극복과 통영나전칠기발전의 근본적인 성찰, 나아가 대안 모색을 위한 이 심포지엄에 통영, 원주 학계·문화 관계자 200여 명이 참석했다.
물론 통영나전칠기의 발전방안과 육성 시책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있었다.
이날 마지막 발제자로 나선 박종수 원주역사박물관장은 '원주 옻(漆) 공예의 특징과 육성시책'이라는 주제로 원주 나전칠기와 옻칠 공예의 특성, 그리고 행정에서의 역할 등을 고찰했다.
그리고 이날 참석한 유족 김옥환 선생을 만나 소장하고 있는 유작을 매입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시작됐다.
마침 김봉룡 선생의 고향인 통영시가 선생이 부소장으로 재직하며 후진을 양성했던 옛 경남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 건물을 매입하고 통영나전칠기 발전방안을 모색하는 다양한 소식이 알려지자 원주 측 유작매입은 더욱 발 빠르게 진행됐다.
박종수 원주역사박물관장은 유족이 살고 있는 대전 자택까지 찾아가 협의를 진행했고 그 노력의 결실로 최근 원주를 방문한 선생의 장남 김옥환씨로부터 "소장하고 있는 유작을 원주시에 매각하고 보관중인 부친의 유품을 함께 기증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선생이 남긴 유작의 가치와 원주로 가져와야 한다는 당위성을 높이 산 시의회 역시 2012 본예산을 심의과정 중 역사박물관 유물구입비를 1억원 증액하며 힘을 보탰다.
원주투데이를 통해 박 관장은 "선생의 고향인 통영시가 최근 나전칠기 관련 다양한 사업을 추진 중인 것을 알게 된 후 자칫 하다가는 선생의 유작을 원주로 가져오기 어렵겠다는 판단을 했다"며 "원주가 '옻칠의 고장'이라 불릴 수 있도록 옻칠공예를 중흥시킨 선생의 유작을 원주로 가져올 수 있게 돼 세계 최고의 옻칠산지인 원주의 도시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한국나전칠기의 원조, 중요무형문화재 10호 첫 지정자
김봉룡 유작품 원주행, 통영으로선 불행한 일, "충격"
하얀 두루마기에 흰수염을 기르고 나전칠기 작업을 하는 김봉룡 선생의 생전 모습은 통영홍보물이나 광고현판에서 자주 만날 수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 송방웅 선생의 아버지인 송주안 선생과 더불어 통영나전칠기, 나아가 한국나전칠기의 원조이자 양대 산맥으로 불리던 인물들이다.
196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의 첫 지정자이자 평생을 통영나전칠기 기법과 후학 양성에 힘쓰던 인물이다.
17세에 통영에서 나전칠기에 입문한 선생은 이후 평생을 전통적인 나전칠기 기법을 고수하면서 작품제작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25년 파리에서 개최된 세계장식품박람회에서 은상을 받았으며, 1950년대부터 통영시에 세운 나전칠기강습소를 맡아 후진양성에도 힘썼다.
특히 일제 강점기 민족의 맥이 끊어져 가는 가운데에서도 나전기법과 옻칠을 고수했으며, 1950년대 나전칠기기술 양성소에서 부소장(소장 도지사)을 역임, 통영의 나전과 옻칠 인재 양성에 매진한 인물이다.
당시 유행하던 화학성 칠기를 사용하지 않고, 1968년부터 옻칠의 주산지인 원주에서 나전기법과 옻칠 전통 맥을 잇는 데 주력했다.
또 1968년부터는 원주와 인연을 맺어 당시 지역 유지들이 설립한 원주칠공예주식회사의 공예부장으로 활동, 이형만, 양유전 선생 등 원주 옻칠을 대표하는 장인들을 길러내며 불모의 땅 원주에 옻칠공예를 발전시켰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 송방웅 선생은 "김봉룡 선생은 일제시대 통영사람으로 통영의 나전칠기를 잇고 평생을 외길 인생을 사신 한국나전칠기의 원조다. 유작과 유품이 원주로 가게 된 것은 정말 참담하다"고 심정을 밝혔다.
또 "통영시가 통영나전칠기 부흥을 외치고 있는 가운데 이런 일이 발생, 더욱 안타깝다. 지금이라도 당장 서둘러 유족과 협의를 해야 할 것이며, 통영나전칠기 관련 역사 자료 및 관련 역사관 등도 생각해 봐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통영옻칠미술관 김성수 관장 역시 "김봉룡 선생 유품의 원주행은 말도 안되는 일, 통영으로선 상당히 불행한 일이 발생했다. 통영의 역사 근원을 하나 잃어버린 사건"이라고 단언했다.
또 "입으로만 맨날 통영나전칠기 부흥이라고 외치지 말고 역사와 뿌리를 소중히 여기는 일을 행정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김봉룡 그 어르신은 통영의 정신이자 뿌리"라고 강조했다.
나아가 "이제 통영은 뿌리를 잃게 됐다. 누누이 통영나전칠기 기술양성소의 가치와 선생의 위상 등을 강조했으나 행정은 외면했다. 통영나전칠기 기술양성소 그 유서깊은 역사의 자리에는 이중섭 살았던 곳 푯말만 잇고 통영의 역사의 핵이 되는 통영나전칠기 기술양성소는 이름조차 그 푯말에 없다. 이게 통영의 현실이다"고 꼬집었다.
또 "이제 속수무책 당하지만 말고 그 어른의 양성소 거리를 복원하고 통영나전칠기 기술양성소 자리에 기념관을 세우고 나전과 옻칠 아카데미가 열리고 활성화되는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출처: 통영 한산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