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남은 한 조각의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고
죽음은 한 조각의 구름이 사라지는 것이다
구름은 실체가 없으니 생사 또한 이와 같다”
선혜는 묵은 밭처럼 잡초가 무성한 풀밭을 향해서 한동안 합장한 채 걸음을 떼지 않고 있었다. 고명인이 세수를 하고 올라온 뒤에야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선혜의 두 눈이 붉어져 있었다. 문득 고명인은 이곳이 일타를 다비했던 다비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스님, 이곳이 큰스님께서….”
“맞습니다. 우리스님 법구(法軀)는 이곳에서 다비되어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돌아가셨지요.”
선혜는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허공을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지프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무겁게 말했다.
“옛 고승들의 말씀이지요. 태어남을 한 조각의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라 하고, 죽음을 한 조각의 구름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구름 자체는 실체가 없는 것이니 생사 또한 이와 같지 않겠습니까.”
선혜는 생사란 실체가 없는 것이니 거기에 얽매일 일이 아니라는 말투로 얘기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스승 일타를 못 잊어 하고 있었다. 잠시 추억에 잠기어 눈시울이 붉어져 있는 것이었다. 고명인은 풀밭으로 들어가 한 줌 흙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 한 줌의 흙이 고명인에게 일타가 간 곳을 말해 줄 리 없었다. 흙은 어제의 흙이 아니라 오늘의 흙일 따름이고, 망초와 엉겅퀴 꽃은 무성한 풀밭에서 무심하게 피고지고 있을 뿐이었다.
이른 아침의 은해사는 어제 보았던 은해사와 또 달랐다. 낮에는 경내가 참배객과 관광객들로 붐비어 들떠 보였는데 지금은 고찰의 품격이 물씬 느껴졌다. 보화루를 들어서자 추사의 글씨라는 대웅전의 편액이 눈길을 끌었고, 양쪽으로 심검당과 설선당이 보였다.
“고 선생, 주지실은 심검당 저쪽입니다. 먼저 인사하고 나오겠습니다.”
“그러시죠. 저는 대웅전 앞에 있겠습니다.”
고명인은 어제 종무소에서 받은 은해사 안내쪽지 중에서 대웅전 편을 폈다. 대웅전이란 편액의 글씨는 물론이고 기둥에 걸린 4폭의 주련 글씨도 추사 김정희가 쓴 것이라는 소개가 보였다. 한문에 서투른 고명인으로서는 안내쪽지에서 주련의 시를 번역한 글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부처님은 우주에 가득하시니
삼세의 모든 부처님 다르지 않네
광대무변한 원력 다함이 없어
넓고 넓은 깨달음의 세계 헤아릴 수 없네.
佛身普遍十方中
三世如來一切同
廣大願雲恒不盡
汪洋覺海涉難窮
주련의 한자를 한 자 한 자 읽고 있는데, 선혜가 다가오더니 합장을 했다.
“저는 먼저 갑니다. 하룻밤을 함께 보냈으니 이것도 큰 인연입니다. 법타스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서향각(西香閣)으로 가보십시오.”
“서향각이 어디 있습니까.”
“주지실이 서향각입니다.”
선혜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야 고명인은 심검당을 돌아 천천히 걸어갔다. 역시 안내쪽지에는 심검당의 주련 글씨도 소개되어 있었다.
도를 배우려는 뜻 처음과 같이 변함없고
천만 가지 어려움도 깨달고 또 깨달았네
곧바로 허공을 두드려 골수를 내고
뇌 뒤에 꽂힌 금강정을 뽑아버리니
돌연히 눈앞에 나타난 우주 전체
산하대지가 바로 허공 꽃인 것을.
學道如初不變心
千魔萬難愈惺惺
直?敲出虛空髓
拔却金剛腦後釘
突出眼睛全體露
山河大地是空華
참선수행 끝에 깨달은 경지를 노래한 누군가의 오도송 같은데, 솔직히 고명인은 어마어마한 깨달음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깨달음 이후 돌연히 나타난 우주 전체와 산하대지가 허공의 꽃(空華)이라니 보편적인 논리라기보다는 종교적인 체험의 세계 같았다.
법타가 거처하는 서향각은 심검당 뒤쪽 가까이에 있었고, 흰곰처럼 생긴 개 한 마리가 서향각을 지키고 있었다. 고명인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러나 다행히 개는 줄에 묵이어 있었고, 선한 눈망울의 개는 고명인을 경계하지 않고 꼬리를 흔들었다. 법타가 문을 열어놓고 방안에 앉은 채 웃고 있었다. 선혜에게 고명인의 얘기를 들은 것이 분명했다.
“고 거사, 어서 오시오.”
방 안에는 원형다탁이 놓여 있고, 다탁 주위에는 신도인 듯한 한 가족이 앉아 담소를 하고 있었다. 법타가 다탁 중앙에 앉고 나자, 시자가 냉장고에서 손님 수만큼 아이스콘을 꺼내왔다.
“여름에는 시원한 것이 최고지 뭐, 번거롭게 뜨거운 차를 우릴 것도 없이 말이여.”
고명인은 법타의 언행에서 또 다른 수행자의 모습을 느꼈다. 과묵하고 깐깐한 산승(山僧)이라기보다는 활달하고 진취적인 지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고명인이 아이스콘을 반쯤 먹고 있을 때 법타가 물었다.
“고 거사는 내게 무슨 얘기를 듣고 싶어서 왔소.”
“일타스님의 상좌스님이라고 해서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건당(建幢)이 뭔 줄 아시는지 모르겠네. 난 일타스님을 법사(法師)로 모시고 싶어 74년에 건당을 했어요. 은사가 부모님이라면 법사는 스승님인거지.”
법타는 은사가 따로 있는데, 일타를 법사로 삼고 싶어 건당을 했다는 얘기를 밑도 끝도 없이 먼저 꺼냈다. 고명인은 법타의 은사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은사님은 일타큰스님이 아니란 얘기군요.”
“그래요. 내 은사님은 추담스님이라고 대단한 스님이지. 남북분단 전에 건봉사 스님이었어요. 일제강점기 때는 독립운동도 하고 만해스님과 친했어요. 법주사 주지도 하셨지. 법주사 콘크리트 미륵불을 조성한 분이 추담스님이에요. 1960년대 군사 쿠데타 후 스님이 청와대에서 자금을 얻어다 한 거예요. 박정희 대통령이 안 만나주니 청와대 앞에서 일주일 동안 서서 시위를 하셨어. 그래, 박정희 씨가 이상하게 여겨 스님을 불러서 물어 보니까 좋은 뜻이거든, 잘은 모르지만 재벌 협찬 받은 거지 뭐.”
법타의 얘기가 재미있었는지 가족의 가장인 남자 신도가 물었다.
“스님, 일타 큰스님은 언제 만나신 것입니까.”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청주시내에 있는 신원정사에 다녔지. 주지스님은 벽산스님이었어요. 중학교 3학년 때였을까, 일타스님이 객승으로 우리 절에 오셨는데, 젊은 스님이 그렇게 맑을 수가 없었어요. 수행을 잘하려고 손가락을 태웠다는데, 젊은 스님이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내 느낌은 스님이 한없이 맑다는 것이었어요.”
중학생인 법타는 절에 열심히 다녔다. 당시는 통행금지 시간이 있을 때였다. 그래서 법타는 새벽 4시에 사이렌이 울리자마자 일어나 아버지 자전거를 타고 3km 거리를 달렸다. 석교초등학교 부근에 집이 있었는데 절까지는 십리가 조금 못 됐던 것이다. 중학생 법타의 신심은 법주사까지 소문이 났다. 체격이 작은 소년이 어른들보다 더 부지런히 새벽부터 절에 다니자 스님들이 예뻐하고 좋아했다. 그러나 어린 법타는 인기를 얻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인기가 뭐 별것인가. 삶이라는 것이 금생의 일만은 아니잖은가.’
법타가 두 번째로 일타를 만난 곳은 법주사였다. 일타를 처음 보고 신심을 낸 지 2년 후였다. 대학생들이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법주사에서 수련회를 할 때였다. 수련회 참가 자격이 대학생 불자였으므로 법타는 참여할 수 없었다. 대학생 불자들을 따라가려 했지만 끼어 주지 않아서였다. 그때 고등학생 법타는 이렇게 생각하며 분심을 냈다.
‘맨날 설법을 들을 때마다 먼저 도통하는 사람이 선배고 어른이라고 들었는데, 구도의 길에서라면 선배가 어디 있고 후배가 어디 있겠는가.’
법타는 무작정 시외버스를 타고 법주사로 갔다. 그러나 수련회의 대학생들은 절에 없었다. 대학생들은 사하촌 수정여관 큰방에서 스님들에게 법문을 듣는 모양이었다. 그런 사실을 모른 법타는 지객스님이 시키는 대로 객승 방으로 갔다. 한겨울이어서 객승 방은 아궁이에 장작을 활활 지펴놓고 있었다. 그런데 두 스님이 머물고 있는 객승 방 앞에 선 법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뵀던 맑게만 느껴지던 일타가 와 있었던 것이다. 법타가 인사를 하고 난 뒤 대학생수련회에 온 이유를 말하자 일타가 대뜸 출가를 권유했다.
“너 중 돼야겠다. 그게 좋은 거다.”
법타가 세 번째로 일타를 만난 곳은 강원도 도피안사 포교당에서였다. 추담을 은사로 출가한 법타는 조계종단장학생으로 동국대 인도철학과를 입학하게 되었는데, 입학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같은 학과 도반이자 기숙사에서 한방을 쓰던 일타의 상좌 성진(性眞)과 함께 도피안사로 가 비로소 일타의 법문을 가슴깊이 듣고 나서 제자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성진이 다리를 놓았다기보다는 일타가 법타를 잊지 않고 불러서 갔고, 법타는 그곳 군대에서 졸병으로 포교를 하고 있는 혜인도 만날 수 있었다.
“강원도 도피안사 포교당에서 일타스님과 참으로 많은 대화를 했어요. 스님은 청정할 뿐만 아니라 대철학자처럼 인생에 대해서 무엇을 물어도 막힘이 없었어요. 그래서 스님의 제자가 되어야겠다고 발심한 거예요.”
고명인은 계속 입을 다물고 있기가 뭐해서 법타와 남자 신도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건당을 할 때 무슨 특별한 의식이 있습니까.”
“건당할 때 포은(包隱)이란 법호를 주시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즉석에서 적어주더군요.”
大包無外
小入無內
隱現自在
是名包隱
“무슨 뜻입니까.”
“밖이 없이 크게 포용하고, 안이 없이 작게 들고, 숨고 나타남이 자재하니 이름하여 포은(包隱)이다, 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말이요, 맨날 같이 다니는 성진스님의 법호가 포운(包雲)이에요. 포은과 포운, 헷갈리잖습니까. 훗날 내가 일타스님에게 건의해서 내 법호를 바꾸었어요.”
“바뀐 법호는 무엇입니까.”
“명색이 내가 통일운동 하는 사람 아닙니까. 우리민족이 하나의 중도로 화합해야 전쟁 없이 평화통일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유교에서 말하는 중용도 있고 해서 하얗고 까만 것이 아닌 중화(中和)로 하면 어떨까요, 하고 스님께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스님께서 그게 좋겠다, 포은도 하고 중화도 하라고 하셨어요.”
남자 신도가 또 고명인의 얘기를 가로막듯 말했다.
“스님, 일타스님께서 은해사 주지를 하신 게 94년도가 맞습니까. 그때 저희들이 수련회 할 때 일타스님께서 법문을 해주신 일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스님께서 이곳에 들어오신 날이 94년 6월 20일이었습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그 전에 총무원의 한 권승(權僧)의 무리들이 은해사뿐만 아니라 동화사, 갓바위 절을 농간하고 있었어요. 우리스님이 은해사 주지를 맡은 것은 종단차원에서 결정된 일인데, 스님의 이름으로 정화하여 은해사를 우리나라 최고의 율도량(律道場)으로 만들자는 명분을 앞세운 것이지요.”
개혁종단이 권승에 의해 오염된 은해사를 정화시키는 데 일타의 이름을 빌린 것은 매우 상징적인 일이었다. 율사인 일타가 은해사를 맡아야만 은해사가 계율정신이 살아 있는 율도량으로 거듭 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우리스님께서 계율정신을 강조하면서도 당시 부주지였던 내게 신신당부를 하신 것이 있어요. 우리나라에 4대승지(勝地)가 있는데 북한의 금강산 마하연과 묘향산의 상원암, 그리고 남한의 운부암, 백흥암이 4대승지로서 도통할 수 있는 곳이라는 거였습니다. 그러니 운부암, 백흥암, 기기암 등 은해사 3대 선방을 복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보조국사의 결사정신이 깃든 거조암을 정비하여 개혁정신을 살리고, 은해사에 승가대학원을 두어 스님들을 가르치는 교수스님을 양성하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나마 백흥암은 육문스님이 잘 관리하고 있었지만 운부암은 형편없었어요. 벌집 같은 누각에다 하숙방 같았거든요. 운부암 선방이 복원되자, 스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던지…. 선방 좌복에 앉아 미소를 지으며 말년을 수좌들과 함께 보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때가 스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이태 전이었습니다.”
개가 갑자기 짓기 시작하자, 법타가 하던 얘기를 멈추고 일어섰다. 대여섯 명의 신도들이 법타를 만나기 위해 우르르 서향각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시자가 법타를 보고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묻자, 법타는 거절하지 않고 모두 주지실로 안내하라고 지시했다. 그러고 나서 법타는 고명인에게 주지실이 소란스러우니 밖으로 나가 얘기를 나누자고 제의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