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조선일보에 실렸던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임원들의 신사참배 |
동일 12시엔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의 인솔로 평양신사참배에 이르렀고 그 후 동경신사를 참배했다. 이듬해 6월엔 간사 유호준 목사의 인솔로 총회임원과 지도급 핵심인사들이 부여(扶餘)로 신궁 근로동원에 솔선수범했다.
한편 1938년 10월 5일부터 냉천동 감리교신학교 강당에서 양주삼 총리사의 사회로 기독교 조선감리회 제3회 총회가 개최되었는데 감독선거로 2일째 허비하고 있었다. 다음날 제21회 선거에도 당선자가 없었고 10월 12일(수) 셋째 날 벙커 부인(A.E. Bunker) 장례식이 정동제일교회에서 있어 총대원들이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인 12시 제9차 회집이 재개되었는데 투표에 임하려 할 때 조그만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감독선거의 판도가 바뀌었고, 이로써 제23회 투표결과 총 투표수 59표 중 42표를 얻은 김종우 목사가 조선인 최초의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아래의 기록은 당시 총회에 참석했던 H. D. 아펜젤러의 증언이다.
• “총대들은 마루바닥에 앉았다. 모두들 기력이 쇠진해 피곤해 있었고 혹간은 눈물을 글썽이는 이들도 있었다. 그때 열린 창문으로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들어 천장을 한 바퀴 돌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어지럽혔다. 신기하게도 비둘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명상에 잠겨있는 김종우 목사 앞에 내려앉았다. 김 목사가 조용히 손을 펴 내밀자 비둘기는 창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벙커 부인의 장례식에 참석해 우울해 있던 상태에서 이 같은 사건이 일어나자 투표장 분위기를 일순에 바꾸어 김종우 목사가 쉽사리 3분의 2가 넘는 다수표를 얻을 수 있었다.”(KMF 1938. 11. P. 241)
제3회 조선감리회 총회는 총회 셋째 날 오후 1시 반 총회원들은 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배재중학교 운동장에서 일장기 게양식이 있은 후 황거요배(皇居遙拜), 황국신민서사를 제창한 후 총독부로 가서 미나미(南次郞) 총독의 고사(告辭)를 들었고 남산 조선신궁을 참배한 후 헤어 졌다.
김종우 감독은 1939년 8월 일제의 강요로 조선 내 기독교 교파지도자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신사참배를 하고 돌아온 직후 갑자기 악성 패혈증에 걸려 9월 17일 감독 재임 11개월 만에 소천 했다.
감리회 총회가 앞 서 있었던 장로교 총회와 다른 점은 장로교의 경우 교회당에서 총회를 개최한 후 회무를 통해 정식 결의했던 점에 비해 감리교회는 총독부측에 의해 짜여 진 각본대로 총회원 모두가 동원(불러 나옴)된 바, 총회 중 배재학당 운동장(황국신민서사 제창) - 총독부(총독고사) - 남산 조선신궁참배 등이 타의로 강행되었다는 점이다.
신사참배로 요약되는 일제의 개신교 탄압(말살) 통치의 경우 신사참배의 행위는 교단장과 핵심교역자(교구장, 총회임원)는 총독부가 주관하는 각종행사와 매년 2회 이상 신사참배 등을 했고 일반교역자, 평신도는 교회 내에서 행하거나 총회 시 단체로 하게 되는데 장로교와 감리교의 경우 1938년 이후 총회적인(총회개회 시) 의식에 참여한 것 등이 “신사참배자”로 낙인 된다. 이 경우 장로교회의 절대항거자(거부자, 순교자 주기철 목사 외 출옥성도 등)는 총회에 참석하지 않고 교회 내 신사를 상징하는 “미나기”(신도적 훈련) 설치는 물론 “왕국요배”(皇國遙拜), “신민서사”등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 | ||
장로교측은 총독부의 절대적 영향권이 아닌 평양에서 총회가 계속되었던 만큼 관서(이북) 영,호남(남한) 지역 교역자의 경우 총회임원급, 노회장, 대교회 담임자가 아닌 이상 총회를 불참함으로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실례 : 장로교 경북 의성읍교회의 경우 주기철목사가 시범으로 의성경찰서에 수감되어 있었지만 담임목사와 성도들은 경찰서를 방문하여 식사를 차입하기도 했다. (지역사회에 교회가 막강한 힘을 가졌을 경우를 말함).
감리교회의 경우 총독부 통치의 핵심부(윤치호, 신흥우)에서 상동교회에 황도문화관을 설치하게 한 후 연희전문학교 교수인 갈홍기(자유당정권 초대 공보처장), 이화전문학교 성경교수인 김인영(해방직후 남산, 정동제일교회 담임목사)을 주축으로 개신교 전체는 물론 문화계에까지 “국민총동원령”에 해당하는 황민화, 내선일체 사업을 전개했다.(1919년 이후 총독부 실세는 왕실 관리자인 윤비의 부친 윤덕영이었다)
![]() | ||
▲ 1925년 완공된 남산의 신사 |
3. 민족말살(선교탄압) 통치의 전개과정
1940년 10월 2일 개최된 총리원 이사회를 통해 혁신안을 통과시킨 정춘수 통리자(화곡춘수)는 1941년 3월 감리교신학교가 황도문화관으로 변신하는 혁신안을 통과시켰는데 신흥우의 임시 거처인 정동 34번지 아펜젤러 배재학당장이 살던 교장 사택에서 특별총회가 개최되었다. 이날 회의는 신흥우 씨가 전화실을 출입하며 회의를 실제적으로 주도했다. 전화 연락 상대는 총독부 보안과장이었다.(김광우, 같은 책, 157쪽)
당시 신흥우 씨 일파가 주장한 것은 교회 헌장에서 5대 강령 ① 예수 동정녀 탄생과 부활, 내생 등 삭제, 구약은 유대역사로, 신약은 4복음서만 사용, 찬송가 부분 삭제와 정정 ② 개신교 모든 교파의 합동 ③ 황도문화관 설치, 감리교신학교를 수련소로 하여 신궁궁사를 초빙 신도학, 신지사 등 일본정신의 진수를 가르칠 것 ④ 예배당 안에 신면봉안전, 신도가정은 가미다나를 설치하고 대화봉대를 하도록 할 것 ⑤ 개신교 모든 교직자는 황도문화관에서 미소기 하라이(일본신도의 세례, 불교세례)를 받도록 했다.(같은 면, 157-158쪽)
일제의 황민화 작업은 감리교신학교의 혁신화로 구체화되었다. 혁신안을 통과시킨 화곡춘수(정춘수) 통리자는 1941년 6월 3일 휴교 중이던 감리교신학교를 개교하면서 황민화 교육에 앞장설 수 있는 교수진을 구성했다.
교장 김촌인영(김인영), 교무 갈홍기, 교수 심명섭(윤리), 박연서(목회학) 외 일본 신궁파견 강사는 2,3인이었다. 교수 홍현설, 예수교서회 임흥빈을 교수로 보강했다. 감리교신학교는 전 학년을 통털어 학생 20명을 넘지 못했다. 1942년 궁여지책으로 조선신학교(장로교)와 성결교 경성신학교를 합동했으나 교파합동이 결렬되면서 두 신학교는 분리해 나갔다.
그 후 신학교는 교사연성소로 남은 신학생을 성결교 경성신학교에서 수업(교파불문)했고 냉천동 감리교신학교는 일본군부에 탈취당해 황도문화관 본부 신세를 면하게 되었다. 일제는 전 교파를 망라해도 학생이 없는 신학교의 교수를 중심으로 황민화 작업을 주도하도록 했다.(같은 면)
1941년 3월 연회를 통해 혁신교단을 조직한 화곡춘수 통리(정춘수)는 상동교회를 황도문화관으로 확정하고, 1941년 11월 21일 국민총력 감리교연맹 이사회를 소집, 연맹역원을 발령했다. 상무이사 겸 총무부장 심명섭 교수, 기획주임 이동욱 목사(교단총무), 문화부장 김인영 교장, 선전주임 박연서교수를 임명했다.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주일학교를 완전 폐쇄했고, 진주만 폭격 이후(1941년 12월) 한국개신교회의 버팀목이었던 감· 장 선교사 전원 추방과 선교재산을 적산으로 몰수했다.(같은 책, 95쪽)
1942년 3월 개최된 감리교총회는 변홍규 목사를 총리사로 이동욱 목사를 총무국장으로 선출하였다. 당시 총회는 총독부의 각본에 따라 진행되었고 총리사와 총무국장은 총독부 경무국장의 승인이 있어야 취임할 수 있었다.(같은 책, 107쪽)
![]() | ||
▲ 신사에 오르는 남산길 |
4. 민족말살(선교탄압)에 대한 한국감리교회의 항거
* 당시의 상황 : 일제는 강압정책과 함께 회유책을 펴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 같은 인물을 만드는 정책을 썼다.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서 미국유학을 다녀온 사람, 삼일운동 33인 중 변절자를 회유하여 그들의 앞잡이로 쓰는 고등정책이었다.
정춘수 통리자는 삼일운동변절자, 변홍규 통리자는 미국 유학파 변절자이다. 이들과 함께 혁신교단을 떠받고 있는 교권자들은 당시 경무국장 “야기”의 수족같이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같은 책, 100쪽) 정춘수 교권은 1942년 6월 만기되었다. 혁신그룹에서는 자기네 반대그룹이 형성되어 양주삼 총리사를 총리사로 추대 반혁신파(개혁)교단을 만드는 계획이 비밀리에 추진되고 있는 사실을 감지했다.(증거기록, 소장개력그룹 조신일 목사가 주선했던 화신백화점 점심 초대모임)(같은 면)
당시 혁신그룹을 반대한 인사는 류형기, 정일형, 송흥국, 전효배, 구성서 목사들로 이들은 양주삼 목사 추대 선거여행을 떠났는데 평양에서 당시 평양 감리교 거물급 목사였던 오기선, 정지강 목사에게 발각됨으로 이들은 현지에서 “유언비어 죄”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 류형기, 정일형에게는 징역 1년, 전효배 목사(주모자), 구성서, 송흥국에게는 징역 9개월 그 외는 6개월간 평양감옥에 감금되었고 조신일 목사는 불온 설교사건으로 동대문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같은 책, 101-102쪽) 그 후 혁신교단 합리화를 위한 감리교회 임시총회가 소장측의 결사반대로 무산되었다.
* 관련기록 : 그 당시 총회는 일구난설의 대 수라장이었다. 임시 의장인 김인영 목사가 사회를 하다가 평신도들에게 끌려내려 오는 활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단상을 점거하고 의사진행을 봉쇄했던 원산교회의 차형은 의사, 방수원 고아원장, 문창모 해주병원장, 아현교회 장세환 씨의 맹활약상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 맹렬한 투쟁으로 일제의 도깨비 교단인 혁신교단은 무너졌다. 일제에 결사적인 항거로 친일 불법교권을 무너뜨린 후 개최된 두 번째 임시총회는 혁신교단의 무효와 기독교 조선감리교단으로의 환원, 총리로 전진규 목사, 총무국장 송정률 목사를 선출했으나 총회 시 수수방관했던 조선총독부에서는 취임승인 불허 딱지와 함께 신민회 105인 사건과 같은 방식의 반대(개혁) 세력 말살 책을 폈다.(같은 책, 104-105쪽)
“불온 삐라살포”를 빌미로 체포, 고문, 일시구금을 거쳐 교회에서의 완전 추방을 단행했다. 파면(목사직)과 면직 그리고 대명(代命)이 그것이다. 1942년 당시 파면된 홍현설(80일간 구금), 현병찬, 김광우(고문 후 교회방매, 무임) 전효배, 이진구(옥중) 등이 그에 속한다. 파면자, 대명자(유보, 교회방매, 폐쇄) 명단은 조선감리회보(1942년-1944년)에 게재된 교역자 임면공고와 기타 조사에 의해 입증이 되고 있으며, 참회와 회개를 촉구한 윤성범, 김광우의 냉천동 선언문에 있다.(같은 책, 137-140쪽)
김광우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청년목회자들은 담당 형사에게 정면으로 대결, 교인들 앞에서 따귀를 맞기도 했다’고 한다.
5. 선교탄압(교회말살)의 실체
1942년 가을 종로 중앙교회에서 개최된 서울지방 교역자회의에서 변홍규 총리사와 이동욱 총무국장이 형사 입회 아래 참석, 시국관련 담화문, 즉 대동아성전에 전교회가 비행기 헌납으로 적극 참여한다고 선언했다. 강제성을 가진 이 헌납 선언 후 감리교 재산 중 교회 38개 처 여선교회 부지(2만평) 등이 강매되었고 이 일로 일제에 비협조적인 교회 담임자가 교회방매와 함께 교단에서 추방되었다. 방매된 교회재산은 비행기 헌납금 외 교권자들이 나누어(착복) 가졌고 일부는 일본대화지(폭로기사 협박) 화대, 로비자금으로 사용되었다.
1943년은 한국기독교사에 미증유의 환란과 분쟁의 해(개신교 말살의 해)로 기록되고 있다.
첫째로, 환란이란 교회의 혁신안 중 5대 강령의 확정(강제시행)이다. 5대 강령으로 ① 예수 동정녀 탄생과 부활, 내생, 찬송가 부분삭제와 정정 ② 교파의 합동, 황도문화관 설치 ③ 감리교 신학교를 수련소로 신궁궁사를 초빙 신도학, 신지사 등 일본 신사의 진수 가르칠 것 ④ 예배당 안에 신면봉안전, 신도 가정에 가미다나 설치 대화봉대 하도록 ⑤ 교직자는 황도문화관에서 미소기 하라이(일본신도의 세례)를 받도록 할 것 등이다.
둘째로, 분쟁이란 군소교단 폐쇄와 함께 감리교회과 장로교회의 합동을 유도한 후 발뺌한 일,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감.장 합동총회는 감리교 변홍규 통리와 장로교 전필순 경기노회장이 주도했다. 두 교단의 합동절차와 합동 후의 교회관리와 행정론을 의제로 했던 이 총회에서 사회자인 변홍규 통리가 돌연 개신교 멸살정책인 “혁신안”(일본기독교 혁신교단이란 새 교단 창설)을 선언, 전 교계를 경악케 했고 전체 감리교회와 장로교회 한 개 노회(경기노회)와의 거짓 합동은 소장파 교역자들과 몇몇 평신도의 맹렬한 반대운동전개로 무산되었다. 이는 한국 개신교단의 지도체계(교단) 와해공작이다.
셋째로, 이후 한국교회는 감리교회가 선포한 혁신안을 수행하는 교회만 존재할 수 있었다. 당시의 주보를 참고하면 정동제일교회(실시), 상동교회(주도, 황도문화관), 중앙교회(주도, 교단업무수행), 종교교회(실시), 장로교 새문안, 연동, 승동, 남대문(수동적 실시), 지방의 대교회 대부분 실시(교회존재 부재)
![]() | ||
▲ 남산 신사참배행렬. |
6. 선교탄압(교회말살)의 주모자
-. 감리교 : 윤치호(고문), 신흥우(핵심뿌리), 정춘수(1차 주무), 이동욱(1차 주무), 변홍규, 이동욱(2차 주무), 김인영, 갈홍기(행동 대장) * 황도문화관 지시에 따름.
-. 장로교 : 평양 쪽 당해(當該) 연도 총회장(27회-35회 총회), 행동대장 유호준(총회간사)
* 문제점 : 신흥우는 해방직후 한국 YMCA의 대부로 서재필을 업고 야당투사로 이승만 진영과 대립, 갈홍기는 이승만정권의 공보처 장관(초대), 김인영은 남산교회를 거처 정동제일교회 담임목사가 됨. 장로교 김길창은 부산에서 부니엘학원 계명대학을 장악(부산피난 시 교권 장악) 한 바 있고, 유호준은 해방 후 장로교단 총무, KNCC 총무, 총회장 등 모든 요직을 거쳤다.
![]() | ||
▲ 윗줄 좌로부터 양주삼, 윤치호, 신흥우, 아래 좌로부터 변홍규, 정춘수, 갈홍기 |
7. 한국감리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자
![]() | ||
▲ 신사참배 거부로 순교한 주기철 목사 |
감리교회 지도부는 서울에 있었고 1941년까지는 선교부의 보호를 받았다. 때문에 친미성향(미국유학파) 인사가 지도부를 형성하고 있었던바 유학파 신흥우, 변홍규, 친일배교자 정춘수, 이동욱을 제외한 그룹 중 강력저항그룹, 류형기, 정일형, 송흥국, 전효배, 송정률, 구성서 목사와 1943년 이전 파면, 대명자(약 80여 명)는 장로교단에서 분류하는 출옥성도그룹으로 보아야 한다.
특히, 장로교 평양중심의 저항세력과 뜻을 같이 했던 성화신학교 교수와 선교부의 강력한 보호아래 있었던 감리교신학교 교수 그룹이다. 6.25 당시 납북된 김유순(감독), 순교한 박만춘 전도국 총무, 감리교신학교 교수인 정경옥, 홍현설, 서태원(감신대 교수 겸 평동교회 담임 시 납북), 김희운(종교교회 담임 시 납북) 목사 등이다.
![]() | ||
▲ 강종근 목사 |
장로교회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와 버금되는 감리교회 순교자로는 배재학당, 감리교신학교 졸업 후 연천, 창동, 철원제일교회를 시무한 강종근 목사가 있다. 강종근 목사는 1930년 9월 기독교조선감리회 동부연회에서 집사목사 안수를 받고, 1935년 양주 창동교회, 1937년 9월 철원제일교회로 파송을 받아 열심히 목회하면서 교회를 부흥시켰다. 그는 교인은 물론 일반 불신자들에게도 존경과 신임을 받았다. 따라서 일본경찰은 교회행사에 일일이 간섭하고 강종근 목사를 호출하여 목회활동을 방해하곤 하였다.
1940년 6월 철원제일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조선총독부의 “사상범 예비검속령”에 의해 구속되어 1년형을 선고받은 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받은 고문으로 신병이 약해지자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으나 회생하지 못하고 아내 윤희성이 지켜보는 가운데“나는 주를 따라간다. 마음이 기쁘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때가 1942년 6월 3일이었다. 강종근 목사의 사모 윤희성 여사는 아현동에 신성교회를 설립하고 예배당을 건축하였으며 장로로서 충성을 다해 교회를 섬겼다.(기감 역사위원회,『한국 감리교 인물사전』2002, 23쪽)
정경옥 교수의 경우는 한인 최초의 정규 감신대 교수로 4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 강해서와 감리교 교리적 선언을 기초했을 뿐 아니라 대학에 정경옥 독서 크럽을 만들어 김광우, 송정률, 마경일, 윤종선, 주신자, 김순자 등을 감리교회 차세대 지도자로 키웠다.(김광우, 같은 책, 70-71쪽)
![]() | ||
▲ 정경옥 교수 |
정경옥 교수는 1942년 봄, 일제에 의한 한국인 친미파 검거과정에서 재판도 받지 못한 채 8개월 간 진도경찰서에 구금되었고, 1945년 4월 1일 복막염이 악화되어 42세의 나이에 해방의 빛을 못 본 채 그의 천부적 재능을 맘껏 펴보지도 못하고 타계했다.(기감 역사위원회, 같은 책, 442쪽)
박만춘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 피신한 옹골찬 지도자로 해방 후 초대 전도국 총무로 피임되어 일했다.(류형기 감독 수준, 당시 류 감독은 교육부 총무) 그는 6.25 동란 당시 피난감리교단의 실무책임자(김유순 감독 등 납북)로 총리원을 이끌고 당진 근해의 섬에서 피난 중 식량을 구하려 적 치하 당진으로 잠입했다가 발각되어 죽창으로 장열한 순교를 하였다. 친형은 소설가 박영준 전 연대교수(사망)이며, 부인은 윤봉명 전도사(사망)이고, 장남 박승일(춘천장로교회 목사), 차남 박승남(실명자, 대구 거주)이 있다.
![]() | ||
▲ 납북된 서태원 목사. 서재필의 조카이다. |
서태원 교수의 신사참배거부는 물론 조상의 토지를 팔아서 1941년 건축한 대전제일교회를 한수이남 최대 규모의 교회당(청산학원대학 본관모형, 유아원, 목사관 양옥 등)을 건립할 당시 교회본당 건물 추녀 태극모형 부착 사건으로 교회에서 쫓겨난 후 예산, 논산, 공주 일원을 순회하며 목회하면서 일제하에 가장 많은 교회를 개척 발전시켰다. 해방 후 서울로 와 감신대 교수(도서관장)로 재직하면서 평동교회를 개척(사재를 털어 800평 대지매입)했고 정규신학학위 과정(일본청산학원 신학부)을 이수한 최초의 신학박사 취득 교수로 6.25 당시 납북 순교했다.
1943년 총회 때 목숨을 걸고(광복군 수준으로) 총회장을 점거하고 김인영 목사를 끌어내린 평신도 차형은, 방수원, 문창모, 장세환 등은 장로교 주기철목사보다 더 한 결사항거(폭거 수준)였다.
나오는 말
역사학자로 한국근대사에 독보적 존재로 평가받고 있는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는 필히 “비교전승”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역사적 무대와 인물 그리고 그들의 역할이 규명되어야하며 그 역할 중에도 섭리의 역할과 사욕을 위한 역할이 규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 한국감리교회는 좀 더 자세하고 또 정직하게 사실을 규명해 줄 것을 요청한다.
예를 들면 장로교회의 경우 교권자(총회장과 총회임원, 신학교 교장, 기관지 신문사 사장)가 평양에 있었고 감리교회는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하며 총리원과 신학교는 서대문 냉천동 31번지에, 대사회 활동의 창구는 YMCA에 있었다.(신문사는 장로교단에서 주관했고 YMCA는 감리교단이 주관함)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는 양주삼 목사(미남감리회, 종교교회)와 김종우(미북감리회, 정동제일교회) 목사였던바 일제의 정책을 반대했던 선교부의 신임을 받고 있던 양주삼 총리사는 총리사 임기만료와 함께 감리교회 지도력을 스스로 회피함으로 교단이 지도력 부재로 후임 총리사 선출을 못하는 망국지경에 이르게 했고 그 와중에 내려진 하나님의 섭리로 감독에 선임된 김종우 목사는 11개월 만에 하나님의 섭리(첫 계명을 거스린 희생 양)를 받게 되었다.
한 마디로, 한국 개신교에 내려진 신사참배의 박해는 장로교회의 경우 임기제 지도부(1년만 회피하면 됨)에 변두리 총회(평양) 집행부로 그 박해의 강도가 감리교회에 비하면 퍽 약한 수준(예: 10명이라면 8명이 감리교요, 2명이 장로교)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감리교회는 전임제 총리사(감독), 교구장(감리사), 서울에서의 집행부 등 총독부 정책에서 결코 피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로 인해 김종우 감독은 이 오욕적인 역사의 십자가를 지고 11개월 만에 순교했다고 보아야 한다.
장로교회의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에 반대, 긴 옥고를 치루고 순교했다면 감리교회 강종근 목사의 순교 또한 이와 똑 같은 경우가 된다. 일정 말년에 신사참배 거부로 순교한 이들은 강종근 목사를 포함해서 권원호, 양국주, 최인규, 김선규 등 5명이 해당 된다. 또한 감옥에서의 옥사, 출옥 후 죽음, 해방 전 죽음과 해방 후 죽음이 비교되어야 하되 해방 후 6.25 당시 현장에서의 순교(박만춘 목사)와 납북 순교(서태원 목사)가 이에 추가되어 비교되고 평가되어야 한다.
신사참배 반대의 역사는 장로교회만의 것이 아니다. 감리교회의 ㉮ 강종근, 권원호, 양국주, 김유순, 박만춘, 서태원 목사, 최인규, 김선규는 주기철 목사 수준의 순교자 반열로 ㉯ 6개월 이상 형(刑)을 받고 수감, 고문 받은 이진구 목사(33개월 옥고) 외 파면대명자(교회방매, 무임) 80여 명은 장로교회의 출옥성도 반열로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