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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 하춘화의 가족. 부모님과 네 자매가 활짝 웃고 있다. | 지난 1977년 가수 하춘화에 대해 모 언론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전설적인 도선국사와 왕인박사는 영암에서 탄생했고, 근세에 와서는 정계의 낭산 김준연 선생과 가요계 하춘화도 이곳 출신이다”
하춘화는 국내 가요사의 여러 기록의 보유자로써 최초, 최고, 최다 등의 수식어가 가장 많이 따르는 가수다. 그 기록의 일단을 보자. 만 6세 최연소 음반출반 가수, 현재 133번째 음반 출반으로 국내 최다, 8천여회의 개인공연 발표로 세계 기네스북 등재, 대통령표창을 비롯한 훈장, 감사장 등 상패 180여개, 조국분단 40년만에 최초의 평양공연, 현역 연예인 사상 최초의 박사학위 취득, 여기에 이 모든 기록들이 현재에도 진행 중에 있다는 더욱 의미있는 사실.
가수 하춘화는 지난 8월 ‘아버지의 선물’이라는 자서전격의 책을 펴내고 성대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딸은 “나의 모든 영광과 찬사는 모두 아버지로 인해 가능했으며 아버지는 내가 가슴으로 배운 교과서였다”며 아버지 하종오(91)옹에 대한 사랑과 그 고마움에 대해 장내가 숙연해지도록 절절히 표현했다.
그 하옹이 지난 13일 고향을 다녀갔다. 그 옛날 하옹의 힘으로 설립된 낭주중·고등학교의 총동문회장인 김성일 향우(본사 서울지역기자)와 함께 고향에 온 하옹은 군 관계자들과 함께 지역 곳곳을 돌아보며 발전된 고향을 찬사하며 향수를 만끽했다. 9순이 넘었지만 여전히 젊고 활달한 모습으로 경이로움을 안겨 준 하옹에게 최고의 딸과 그 딸을 만든 아버지, 그리고 그들의 고향 얘기를 들어봤다. <편집자 주> | |
[대담 = 문배근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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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 하춘화의 아버지 하종오 옹(91)이 지난 13일 모처럼 고향을 방문했다. | ▲9순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아직 칠십객으로 보입니다. 건강을 유지하는 비법과 아울러 요즘 근황은 어떠신지요? =어떤 건강 비결이 있지 않느냐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만 그런 건 없습니다. 술·담배 하지 않고 일주일에 한번 정도 골프를 즐기는 것 외엔 특별한 것은 없지요. 다만 지금도 마땅한 일을 찾아 활발히 활동하려고 하는 젊고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좀 특별하다고 할까요. 요즘은 고향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있습니다. 이번에 모처럼 고향을 방문한 것도 그 일환이지요.
▲얼마 전 딸 하춘화가 ‘아버지의 선물’이란 책을 펴냈는데 이 책에서 딸은 “아버지는 내가 가슴으로 배운 교과서였다”라고 했습니다. 딸 하춘화의 가수입문 배경과 국민가수가 되기까지 어떻게 뒷바라지 하셨는지요? =그 얘기를 다 하려면 며칠 밤낮을 쉬지 않고 말해도 모자라지요. 젊어서 고향을 떠나 부산에 정착해 있을 때인 1955년 여름에 춘화는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한번 울음을 터뜨리면 동네가 떠나갈 정도로 울어대던 어린 춘화는 그렇게 울어대다가도 신기하게 라디오에서 노래만 나오면 울음을 뚝 그치고 귀를 쫑긋 세우고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곤 했지요.
그렇게 노래를 들으며 따라 흥얼거리던 춘화는 서너살 어린 나이에 300곡 이상의 노래를 막힘없이 불러대며 동네의 꼬마가수로 유명해졌고 나는 다른 가족보다 좀 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부산에서 성공한 사업가로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던 내 나이 마흔 살, 춘화가 만 여섯 살 되던 때 춘화의 재능을 살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당시 권력과 명예를 차지할 수 있는 몇몇 기회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만 춘화를 최고의 가수로 만들어야겠다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만큼 딸 춘화가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 재능을 살려주는 게 아비로서 꼭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그 세계에 대해서는 지식도 면식도 전혀 없어 황무지에서부터 시작해야 했습니다. 다행히도 사상 최연소 음반 취입가수니, 천재소녀 가수 탄생이니, 기록적인 말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지만 국민가수가 되기까지 구구절절 우리 부녀가 겪어 온 사연들을 어찌 말로 다 표현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지난 옛이야기처럼 수월하게 말을 하지만 생각해보면 아득한 긴 세월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들을 치르면서 오늘에 이른 것이, 꼭 꿈같이 느껴집니다.
▲어릴 적 고향은 어땠나요? 또 고향을 떠나게 된 어떤 특별한 동기가 있었습니까? =저는 학산면 금계리 계천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나라 잃은 서러움과 북받치는 울분으로 온 국민이 목이 터지도록 독립만세를 외쳐대던 1919년 기미년 바로 그해지요. 제가 태어난 계천마을은 비록 모두 못 배우고 가난했지만, 그래도 정든 사람들끼리 오손도손 모여 살던 조용하고 정취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너나없이 먹고살기에 급급하던 때라, 자식들 교육문제란 상상도 할 수 없는 터에, 마을 전체에서 오로지 딱 나 한사람만이 4년제 보통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 후 학제가 6년제로 개편되면서 운좋게 6년을 다닐 수 있었지요. 당시에 나는 특별히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할 때까지 급장을 도맡아 했었습니다. 일본인 선생들에게도 칭찬을 많이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아직 어린 나이인 그 당시부터 벌써 장래 문제에 대해 고민이 많았었습니다. 장차 무엇을 해야 할까? 고향에 있어봤자 농사꾼이 되는 길 외에 다른 희망이 없다는 생각에 고민 끝에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가야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됐습니다. 뭐라도 내 꿈을 펼치기 위해서는 도시로 가야한다는 결정을 하게 된거죠. 그때가 내 나이 아직 스물이 되기 전, 10대 후반께의 일입니다.
▲한때 낭산 선생 등 정계 인사들과 교류하며 각별한 사이였고, 정계 진출의 꿈도 갖고 있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고향을 떠나 부산으로 백부님을 찾아가 몸을 의탁했습니다. 처음에는 당장이라도 가고 싶고 보고 싶은 고향 생각에 잠도 제대로 이룰 수 없을 정도로 향수병을 앓았습니다만 약해지려는 내 마음을 스스로 다그치며, 고등고시 급제를 목표로 주경야독의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시험을 몇 개월 남겨놓고, 무서운 병마의 습격을 받아 뜻을 못 이룬 채 겨우 목숨만은 건지게 됐습니다. 운명이려니 하고 눈을 딴 세계로 돌려, 노력 끝에 앞날이 유망한 창설 제강주식회사 전무이사로 취임해 회사 일에 몰두하게 됐습니다. 그 때가 한국전쟁으로 정부가 부산에 와 있을 당시입니다.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니 모든 정치인들이 부산에 있게 됐고 자연스럽게 정치인들을 만나게 됐습니다. 낭산 선생도 당시에 만나게 됐는데 같은 고향출신임을 알게 되면서 특히 나를 많이 아껴주셨습니다.
이후 한국전쟁이 끝나고 정부가 다시 서울로 환도하면서 낭산을 비롯한 많은 정치인들과 헤어지면서 왠지 내 마음도 허전해지고 자꾸만 서울 쪽 구상만 하게 되더군요. 그러다 4.19의거로 자유당정부가 무너지고 민주당정부가 들어서면서 서울로 이주해 관직으로 들어갔습니다. 첫 관직은 특별검찰부 서울특별시 조사위원회위원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법률상 대한민국 모든 헌법기관은 인력 및 기동력 등 우리의 요청이 있을 시는 모두 협조를 하도록 법으로 정해진 특별기관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낭산을 비롯한 많은 지인들에게 정계로의 입문을 제안받았고 나 역시 그러한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와 함께 결국 나는 딸 춘화를 최고의 가수로 만들겠다는 선택을 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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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주고등학교 설립을 위해 당시 200만원을 희사했던 가수 하춘화가 개교식 때 축하공연을 하고 있다. | ▲하춘화가 부른 ‘영암아리랑’이 고향을 널리 알리는 데 크게 이바지 했는데요. =고향노래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은 때는 ‘물새 한마리’와 ‘잘했군 잘했어’의 대히트로 춘화와 내가 정신없이 바쁠 때인 1971년입니다. ‘영암’은 몰라도 ‘하춘화’를 모르는 국민은 아무도 없을만큼 큰 인기를 얻고 있을 당시, 고향을 떠나온 지 30년, 자나깨나 틈만나면 그리워하던 내 고향을 떠올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고 고향, 영암의 노래는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당초 나는 ‘영암의 연가’라고 제목을 설정하고 영암노래를 준비했습니다. 처음 의도와는 좀 다르게 만들어졌지만 우여곡절 끝에 그 이듬해인 1972년 ‘영암아리랑’이 탄생하게 됐고, 내 고향 노래가 내 자식 노래가 돼 온 세상에 울려 퍼지면서 당시 나는 겉으로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남다른 감회에 빠져 들기도 했습니다.
영암과 관련된 노래는 이미자가 부른 ‘낭주골 처녀’ 등 몇 곡이 있지만 그리 많이 불려지지는 않았지요. 그러나 ‘영암아리랑’의 경우 아버지 고향의 노래인지라 최고의 가수인 딸이 현재까지 40년이 다 돼가는 동안 목이 터져라 열심히 불러온 덕분에 모든 국민들이 잘 알게 됐고 따라서 영암을 알리는 데도 일등공신이었다는 점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 동안 고향, 영암을 위해 하신 일도 적지 않으신데요. =여러가지 일이 있었습니다만 한 가지만 소개한다면, 나와 보통학교 동창인 친구가 어느 날 하춘화 사무실로 찾아와 “고향에 고등학교가 없어 학교를 설립하려고 추진위원회를 구성, 내가 추진위원장이 됐다”면서 “그런데 고등학교 설립허가 요건이 부지 5천평을 확보한 연후에 허가서를 신청해야하는데 현지에서는 도저히 확보가 불가능하니 부지만 하춘화가 책임 져 달라”는 요구였습니다. 그 당시 평당 400원에 200만원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 시절, 작은 돈이 아니지요. 그러나 나는 쾌히 하춘화가 책임진다고 승낙하고 실천했습니다. 당시 부지를 찾아다니고 학교 인가를 취득하기 위해 뛰어다니던 일 등이 생각납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은, 도교육위원회에 고등학교 건립신청이 모두 6건이 접수되었는데, 그 당시 집권당 사무총장이 “19세 밖에 안되는 소녀가수 하춘화가 고향의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하는 일인데 낭주고 허가만은 필히 해주도록 하라”며 은근히 영향력을 가해서 낭주고교만 허가되고, 여타 지방은 모두 기각됐다는 점입니다. 한동안 낭주고가 ‘하춘화 학교’라고 불렸단 말을 듣고 뿌듯한 마음으로 기뻐했던 기억이 납니다.
▲고향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아무래도 가수 하춘화의 활동과 관련이 되겠지요.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요? =고향을 위해 딸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습니다. 아울러 고향에서도 우리 딸을 고향 홍보에 더 많이 이용해 주셨으면 합니다. 전국적으로 보면 각 지자체들에서 연예인에게 홍보대사를 위촉하고 동향 출신의 인기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들을 초빙해 고향을 알리려는 정책을 경쟁적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최근 마라토너 이봉주의 고향인 천안에서 이봉주의 이름을 딴 ‘봉주로’라는 길을 만들고 나무와 꽃들을 이용한 조경을 통해 특색 테마거리로 조성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한편으로는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고향을 홍보하고 알린다는 면에서 보면 전국적으로도 춘화만한 이가 없다는 것이 나의 확신입니다. 다행히 영암군에서도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사업에 ‘영암 아리랑’이라는 이름을 붙일거라 하고 또 노래비도 세우는 등 여러가지 사업을 추진한다고 하니 영암이 더욱 많이 잘 알려질 수 있도록 춘화와 함께 나 역시 힘껏 도울 생각입니다. /정리=오주석 기자
[인 터 뷰] 가수 하춘화
낭주고 개교식 때 부른 ‘영암 아리랑’ 잊지못해 고향분들과 고향에서 함께 일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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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춘화씨와의 인터뷰는 16일 전화를 통해 이뤄졌다. 아버지 하종오 옹과의 대담 이후 하씨의 육성으로 고향 영암의 얘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하씨는 먼저 지난 1976년 아버지의 노력으로 개교하게 된 낭주고등학교에서의 공연을 떠올렸다. 당시 경찰집계로 3만여명이라는 엄청난 인파가 몰리면서 영암뿐만 아니라 남도 일대가 들썩거리게 했던, 개교식날 학교운동장에서 펼쳐진 이 공연에서 열창한 ‘영암 아리랑’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하씨는 “영암아리랑과 함께 눈물바다가 된 아버지의 고향에서의 그 공연은, 영암이 아버지의 고향만이 아닌 바로 내 고향이라는 의식을 확고히 심게 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하씨는 지금도 열정적인 활동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계속 가다듬어 가면서 실현되기를 기다리는 또 하나의 소중한 꿈이 있다. 바로 아버지의 평생 꿈과 아이디어의 총집합이라 할 수 있는 하춘화 기념관과 대중예술 전문학교의 설립이다.
하씨는 “저의 가수생활 전체와 활동 당시 가요사를 곁들인 하춘화 기념관을 세우는 것은 아버지의 오랜 꿈이기도 하다”며 “대중들의 삶과 더불어 기쁜과 슬픔을 노래했던 가수라면 누구나 기념관 설립을 그려보았을 것”이라며 의욕을 보였다.
하씨에 따르면 아버지는 이를 위해 지난 50년 가까운 시간동안 ‘가수 하춘화’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기록하고 모아왔다. 그동안 발표한 음반과 음원은 물론 가수생활과 영화출연 등을 모은 3천여 시간 분량의 DVD 90개, 180여개의 트로피, 수십권의 관련 스크랩북, 엄선한 수백통의 팬레터 및 권당 1천쪽짜리의 총 22권에 달하는 앨범 등이 잘 보관돼 있다. 특히 1960년 초부터 지금까지 함께 무대에 섰던 선후배 동료 가수들의 모습도 빠짐없이 담겨있어 한국 가요사의 인물들의 변화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자료도 빼놓을 수 없다.
대중예술 전문학교의 설립에 대해서도 하씨는 확고한 의지를 나타내, 학문에 대한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게 했다. 그는 “현역에서 물러나면 가수생활의 경험을 살려 후진 양성에 힘쓰고 싶다”며 “아직 제대로 된 학문으로 자리잡지 못한 대중예술을 위해 할 일이 많다”고 했다. 팬들의 사랑으로 올라선 만큼 후진 양성으로 돌려주고 싶다는 뜻이다.
이어 하씨는 “고향분들과 영암신문 독자들께 특별히 안부를 전한다”면서 “앞으로의 일도 고향분들과 고향에서 함께 이뤄나갔으면 한다”는 뜻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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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정보 감사드리며, 영암의 자랑!!! 가수 하춘화씨의 꿈이 실현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