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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루시라고 합니다.
연휴에 대청소하면서 버리려던 책들을 후루룩 훝어 보는데 '살사'라는 단어가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J 스콧 버거슨과 여러 명의 주한외국인들이 필자로 참여한 ‘더 발칙한 한국학’이란 단행본. 오래 전 이 책을 샀던 때는 살사를 몰랐으니 이 부분은 안읽고 스친 것 같아요. 읽는 동안 귓가에서 살사 음악이 울려퍼지는 듯 즐거웠습니다. 살사를 사랑하는 여러분과 같이 나누고 싶어, 틈을 내 옮겨보았어요. 즐감하세요^^ ♥
한국 살사 문화의 시작, 그리고 마콘도
켈리 맥클러스키 ( Kelly McCluskey )
여러분도 한번쯤은 “백인들은 춤을 못춘다(White can't dance)”라는 영어 표현을 들어 본 적 있을 것이다. 그와 달리 라틴 아메리카(일반적으로 브라질과 카리브해 섬 국가들을 비롯해 멕시코 남부의 나라들을 모두 포함하는) 사람들은 즐기며 사는 방법을 아는 민족들이다. 삶의 미학을 공부하며 평생을 보내는 사람들이라고나 할까?
백인이며 미국인인 나는 이 피할 수 없는 매력에 끌려 5년간 라틴 아메리카를 떠돌았다. 멕시코를 시작으로 남쪽으로 내려가며 마야의 고대도시, 민속의상을 입은 토착민들의 장터, 심지어 대통령 관저의 쿠테타 현장도 목격하며 떠돌던 나는 1989년, 비로소 콜롬비아 칼리에서 살사의 뜨거운 현장을 만나게 되었다.
인구 3백만의 작은 도시인 칼리. 이곳에서는 찌는 듯한 1월 한달 동안 도시 전체가 세계 최고 규모의 살사 파티장으로 변한다. 아직까지도 나는 그 엄청난 광경을 잊을 수 없다. 페스티벌은 교통을 차단한 3.4킬로미터의 드넒은 가로수 길과 4개의 1차선도로에서 펼쳐진다. 골목마다 살사음악을 연주하는 밴드들이 있었고, 거리는 춤추는 사람들로 가득찬다. 몇 걸음 마다 사람들이 ‘아구아르디엔테’라는 토속주를 권하는데 한 잔만 마셔도 무릎 뼈가 녹아내리는 듯 노곤해져 살사 춤에 열을 올리기에는 더없이 좋았다.
한국에 온 것은 1995년이다. 당시 나는 존 그리밋(John Grimmet) 이라는 친구와 의기투합했다. 애틀란타가 고향인 그는 일찍부터 음악과 리듬에 대한 취미를 길렀고, 놀라운 건 라틴 음악에 빠져 지내는 것만으로 스페인어를 거의 완벽하게 구사했다는 점이다. 스페인어권 국가에는 발 한 번 들인 적이 없는데 말이다. 우리는 ‘백인적인’ 음악 일색인 한국에 라틴뮤직을 알리고 싶었다.
홍대에 살사음악을 틀다
당시 외국인들 사이에서는 홍대 부근 “황금투구‘란 클럽이 유명했다. 그곳 주인인 영구는 종종 외국인 디제이들의 공연을 주선한 테크노클럽 ’상수도‘같은 혁신적인 클럽을 몇 군데 연 사람이다. 그는 홍대 근방을 싸구려 맥주촌이 아닌 뛰어난 세계음악을 만날 수 있는 예술과 엔터테인먼트 중심지로 변모시키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
존과 나는 그곳이 사람들에게 살사를 들려줄 수 있는 좋은 장소라고 판단했다. 영구에게 뜻을 전하자 그는 선뜻 목요일 밤에 ’남아메리카 음악 감상회‘를 열도록 허락해주었다. 따라서 한국에서 최초로 살사 음악이 등장한 건 황금투구가 처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부분에 대해 몇몇 사람들이 그 이전에 살사 음악에 빠진 주한 미군들이 있었다는 것을 지적해 주었다. 그러나 미군부대에 소개된 살사문화는 일반적인 한국인들과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목요일 밤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대체 살사가 뭔지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살사라는 춤과 음악을 접해본 적이 없었고, 때문에 관심도 없었다. 게다가 주 5일제 근무가 도입되기 전 당시의 목요일은 정말이지 홍대에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다시 토요일에 살사 음악을 틀 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매다가 재즈바 ‘보스톤’을 발견했다. 외진 곳에 있어서인지, 이곳은 토요일 밤 10시에도 텅텅 비어 있었다. 보스톤의 주인은 30대 한국인으로 정통 재즈를 좋아했지만, 친절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성격이어서 우리는 토요일 밤 8시부터 폐점 시간까지 살사 음악을 틀 수 있었다. 여기에 탄력을 붙여준 인물은 아르헨티아인 ‘라울 아루아’다. 그는 우연히 보스톤에 놀러왔었는데, 그는 살사는 물론 차차, 삼바, 머렝게, 쿰비아 까지 못 추는 춤이 없는 남자였다.
신나는 음악에 맞춰 라울의 열정적인 살사 강습이 시작되었다. 살사 음악을 전파하려면, 뭔가 사람들을 끌어들일만한 프로그램이 필요했던 것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토요일마다 그 작은 바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 고객의 대부분은 외국인 영어 강사들과 그들의 친구들, 그리고 몇몇 라틴 아메리카인 들이었다. 하지만, 이 뜨거운 문화에 합류를 시작한 한국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쾌활하고 대범했으며, 새로운 생각을 이해하고 그 세계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보였다. 이들은 이 새로운 음악을 친구들에게 알렸고, 그 친구들 중 많
은 사람이 더 큰 관심을 찾아왔다. 바야흐로 한국 살사의 태동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런 즐거움은 몇 달 간만 지속 되었다. 보스톤이 새 주인에게 팔린 것이다.
마르께스가 지어 준 이름 ‘마콘도’
그즈음 나는 이재경이라는 한국 여인과 결혼했다. 당시 한국 전화시스템에서 상용되는 모든 음성 안내를 맡은 그녀의 별명은 ‘삐언니’(삐 소리 후 음성을 남겨주세요). 우리가 만난 건 황금투구의 살사 나이트 초창기 때였다. 빨간 베레모를 쓰고 독일 군복 재킷을 걸친 그녀를 보고 뭔가 흥미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서울의 여러 대학에서 영어강사로 4년 째 일하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은 마돈나와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들으며 자랐고, 미국이외에, 라틴 아메리카 라는 전혀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 라틴 아메리카의 멋진 문화를 지속적으로 알려주려면 작고 허름해도 내가 운영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아내와 나는 발품을 팔며 싼 공간을 찾아 헤맸다. 그러다가 홍대 전철역 근방의 동네에서 보증금 2천만 원, 월세 80만 원의 작은 지하 가게를 찾아냈다. 당시 시세로 엄청 싸다는 건 장점이었지만, 찾아오기는 너무 어렵다는 치명적 단점도 있긴 했다.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모든 공사는 우리 스스로 해결했다. 캐나다 출신의 영어강사로 그리스에서 몇 번 술집을 공사한 경험이 있는 닉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우리는 바닥과, 벽과, 술집 주변에 베니어 합판을 깔고 , 합판인 걸 숨기기 위해 색을 칠하고 칼로 긁은 후 불꽃을 그렸다. 목수인 닉은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들여 바닥을 평평하게 하고 트러스로 지탱했다. 더불어 둥글게 휜 멋진 바를 설치하고 디제이 부스를 한 단 높게 설치했다. 난 특히 그 디제이 부스가 자랑스러웠는데 당시 홍대에서는 혁신이라 할 만 했다(대개의 디제이들이 사람들의 시야를 가로막는 장막에 가려있거나, 바 뒤에 있었다).
바 이름은 ‘마콘도’로 정했다. 콜롬비아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인 ‘백년의 고독’에 등장하는 허구의 도시 마콘도. 소설 속 동네는 라틴 아메리카 대륙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소도시의 전형이다. 나는 ‘마콘도’라는 이름을 통해 콜롬비아를 비롯한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에서 경험한 마법같은 시간을 다시 보내기를 희망했고, 더불어 내 젊은 시절 추억이 담긴 ‘칼리’의 축제에 경의를 표한 것이다. 또한 한국에서 그 세계를 재창조 하고 싶다는 소망도 담았다.
라틴 비트와 문화를 소개하다
개업일은 1996년 12월 31일 화요일 밤이었다. 개업이라기보다는 공사가 채 끝나지도 않았으나 친구들이 몰려와 맥주를 팔아주었다는 것이 맞다. 처음 몇 달 간은 무척 힘겨웠다. 마콘도는 여전히 완공이 안 된 상태였고, 얼마간 미숙한 부분도 있어서 보스톤을 찾는 사람들은 계속 그곳에 머물렀다( 바뀐 주인은 살사바로 이곳을 운영했다). 우리는 휴일 없이 일주일 내내 가게를 오픈했지만 석 달이 지나도록 가게는 텅 비어있었다. 나는 밤이면 밤마다 디제이가 텅 빈 바에서 화끈한 살사음악을 쉴 새 없이 트는 모습을 공포에 질려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뉴욕과 마이애미, 산후안, 푸에르토리코에서나 들을 수 있는 최신 살사음악들이 아무도 듣지 않고, 춤추지 않는 공간에 몇 시간이고 울려 퍼졌다.
당시 나는 수익이 없는 상태에서도 인터넷으로 수 백 달러씩 들여 살사 음반을 사들였었다. 그것도 모자라 1997년 늦은 봄에는 모든 살사 레이블의 지사가 있는 뉴욕으로 갔다. RMM은 세계 최고의 살사 레이블이었는데, 사장인 랄프 메르카도(Ralph Mercado, 고로 RMM은 그의 이름의 약자다)를 만나 획기적인 디스카운트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황금 체인을 몸에 두르고 수행원에 둘러 싸여 살사 거물처럼 보이던 그는, 최소한 5백 달러어치를 주문하면 도매가로 주겠다며, 할인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앨범 구입에 드는 예산과 디제이 그리밋의 완벽한 솜씨는 우리 바의 수준이 세계적인 그것에 필적함을 말해주었지만, 가게가 붐비기까지는 인내가 필요했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갈 즈음부터 조금씩 물이 오르기 시작했는데, 초창기 손님의 편차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예를 들어 최초의 단골은 일본인 야쿠자였다. 그는 유쾌한 성격의 소유자로 늘 엄청난 양의 술을 마셨지만 내가 두려워하던 마피아 같은 짓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 후 멕시코 대사인 가르짜와 콜롬비아와 도미니카 공화국 영사들, 프랑스 대사관 직원들이 단골이 되었다. 점차 손님이 늘어나면서 또 다른 실험을 감행했다. 유명한 아프리카 댄스 비트인 수쿠스(soukous)를 소개했고 뒤이어 메렝게, 쿰비아, 바차타, 레게톤 등의 라틴비트를 선보였다.
비슷한 방식으로, 라틴 문화에 대한 인지도를 넓히기 위해 우리는 주말마다 ‘달콤쌉싸름한 초콜릿’, ‘에렌디라’(소설 ‘백년의 고독’을 영화화 한 작품) 같은 라틴 영화도 상영했다. 1997년 여름의 절정 무렵은 전국에 딱 두 곳인 살사바 ‘마콘도’와 ‘보스톤’이 다 성황을 이루었는데, 이에 힘입어 아직 시장도 형성이 안된 상태에서 새로운 살사바가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 바의 파트타임 디제이 중 하나였던 루이스는 이태원의 ‘문 나이트’라는 클럽에서 살사 음악을 틀기 시작했고, 이태원의 살사족도 우리 바를 찾았다. 우리 바 최초의 한국인 살사 댄스 강사인 제임스 ‘매직’ 킴은 눈 깜짝할 사이에 춤을 섭렵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마콘도는 의도와는 상관없이 트레이닝의 기반이 되었고, 그로부터 머지않아 살사바는 홍대에 5곳, 이태원에 2곳이 생겨났다.
마콘도에서 주최한 살사콘테스트도 빼놓은 수 없는 이야기다. 사람들은 빽빽하게 들어차다 못해 계단까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손님한테 가는 것조차 불가능해 술을 팔수도 없었다. 콘테스트는 치열했다. 참가자들은 그날 밤 하루를 위해 몇 달 동안 공들여 연습을 했다. 쌍쌍의 참가자들이 차례로 춤을 추었고, ‘이들이야 말로 오늘의 우승자들’이라고 확신하기가 무섭게 다음 커플이 등장해 플로어를 장악하고 모든 사람들을 새롭게 사로잡았다. 그 전까지 한국에서 이런 광경은 볼 수 없었다. 완전히 몰입한 나머지 얼이 빠진 듯 한 관객들을 보며 나는 그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었다.
1등은 제임스에게 살사를 배운, 평소에는 조용한 한국인 커플에게 돌아갔다. 콘테스트가 끝났을 때 우리는 재능이 출중한 수많은 살사 커플들의 데뷔전을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바야흐로 한국에서도 살사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활력적이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그런 사람들에게 말이다.
에필로그
IMF의 여파는 마콘도에도 호되게 불어 닥쳤다. 홍대의 거의 대부분 바들이 간판을 내리거나 주인이 줄줄이 바뀌었다. 한국의 환율이 폭락하면서 많은 외국인들이 짐을 싸서 떠나버렸고 마콘도는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직원을 내보내고 바텐더, 청소부, 디제이까지 겸하며 혼자서 마콘도를 지켰지만 몸은 녹초가 됐고 수 천 만원의 피해도 입어야 했다. 보스턴은 끝내 문을 닫았고, 그 후 아르헨티나 친구 라울이 몇 사람 몫을 혼자하며 나를 도왔다. 라울은 적자에 늪에 빠진 마콘도를 다시 일으켜 전성기의 영광을 다시 가져다 주었다. 2000년도에 내가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마콘도를 라울에게 넘겨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이가 좀 있는 살사계 친구들은 나를 한국 살사의 대부 쯤으로 이야기한다. 내가 어떻게 여겨지는지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홍대 쪽의 문화사에 있어 외국인들이 끼친 영향은 인정해 주기 바란다. 마콘도는 물론이고 한국 대부분의 살사바가 성공을 거두기까지는 라울, 존, 루이스 같은 외국인들의 힘이 정말로 컸다. 이는 엑스팻(expet은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부르는 말)이나 한국인의 승리라기보다는,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다른 문화가 서로 교배하면서 생긴, 예술적 혹은 문화적 성공으로 봐야한다.
나는 한국 살사의 미래가 밝기를 원한다. 그것은 윤택한 경제를 의미하는 동시에, 한국과 다른 세계가 교류하는 유쾌한 문화의 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라틴 춤 열풍이 시작된다면, 나는 당장이라도 한국으로 달려가 누구보다도 먼저 댄스플로어로 뛰어 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