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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산림 대법회 제16강 - 2 (2011. 6. 6.)
萬善同歸中道頌 유인물
大方廣佛華嚴經 卷第六 正宗分(정종분)
第二, 如來現相品(여래현상품)
六, 偈讚佛德(게찬불덕)
3, 南方의 法喜慧菩薩(남방 법희혜보살).
萬善同歸中道頌
18. 供養影響如來(공양영향여래)
19. 懺悔罪性本空(참회죄성본공)
20. 勸請法身常住(권청법신상주)
21. 迴向了無所得(회향료무소득)
22. 隨喜福等眞如(수희복등진여)
23. 讚歎彼我虛玄(찬탄피아허현)
24. 發願能所平等(발원능소평등)
25. 禮拜影現法會(예배영현법회)
26. 行道足躡虛空(행도족섭허공)
27. 焚香妙達無生(분향묘달무생)
28. 誦經深通實相(송경심통실상)
29. 散華顯諸無着(산화현제무착)
30. 彈指以表去塵(탄지이표거진)
31. 施爲谷響度門(시위곡향도문)
32. 修習空華萬行(수습공화만행)
33. 深入緣生性海(심입연생성해)
34. 常遊如幻法門(상유여환법문)
35. 誓斷無染塵勞(서단무염진로)
36. 願生惟心淨土(원생유심정토)
37. 履踐實際理地(이천실제이지)
38. 出入無得觀門(출입무득관문)
39. 降伏鏡像魔軍(항복경상마군)
40. 大作夢中佛事(대작몽중불사)
41. 廣度如化含識(광도여화함식)
42. 同證寂滅菩提(동증적멸보리)
- 永明延壽禪師(904-975) 萬善同歸集 -
18. 供養影響如來(공양영향여래)라.
환화공구를 나열해서 影響如來에게 공양한다.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와 같은 여래에게 공양 올린다. 세속적인 지식으로 그런 논리로 보면 모순덩어리지요. 모순덩어리입니다.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 같은 여래에게 무슨 공양을 올려요? “올릴 데가 어디 있으며 받을 사람이 어디 있느냐? 그런데 뭐 하려고 올리느냐?” 이런 소리 할 겁니다. 세속적인 논리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정말 모든 존재의 실상을 우리가 제대로 안다면 이렇게 밖에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맞는 겁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中道입니다.
이것이 중도적으로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이고ㆍ중도적으로 공양구를 나열하고ㆍ여래에게 공양 올리는 것이고, 그런 말이지요. 그 다음도 참회하는 것.
19. 懺悔罪性本空(참회죄성본공).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참회 다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사실은 불교 전체입니다. 불교 전체의 용어가 이 속에 거의 다 들어 있습니다. 참회한다는 것.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그런데 참회는 罪性이 本空함을 알고 참회하는 겁니다. 죄의 성품이 본래 공하다. 본래 공한데 무슨 참회할 것이 있느냐? 본래 공한 줄 알고 참회해야 그것이 진 참회다.
참 깊은 의미이고, 정말 아주 진리의 말씀이고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
20. 勸請法身常住(권청법신상주)라.
法身常住. 법신은 상주합니다. 항상 있는 겁니다. 어디 가라 해도 가지도 않는 것이 법신입니다. 부처님하고 관계없어요. 이 법신은 영원한 존재이고ㆍ모든 존재의 원리이고요. 항상 있는데, 항상 있는 법신을 또 오래 계시기를 권청하는 겁니다. “부처님이 오래 계십시오ㆍ법신이 오래 계십시오.” 하고 권청하는 겁니다. 그런 자세. 그러한 우리 수행하는 자의 안목. 안목이 이렇게 돼야한다.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 다음에 회향.
우리가 회향이라는 말, 얼마나 잘 씁니까? 필요한 용어들이 다 있다니까요.
21. 迴向了無所得(회향료무소득)이라.
無所得임을 알고 깨닫고 회향한다. 迴向은 無所得을 회향한다.
얻을 바 없음을 요달 한다. “회향” 하면 뭔가 소득이 있지요. 회향이 소득이 있습니다. 뭔가 결실이 있는 것이지요. 결실을 바라고 회향합니다.
뭘 회향해도... 보살계를 설하고 회향을 하든지ㆍ경전을 공부해서 회향을 하든지ㆍ한 철 참선을 하고 회향을 하든지, 전부 회향할 때는 뭔가 그 소득을... 또 우정 그 소득을 한 마디씩 피력해 보라고합니다.
옛날에 극락 암에서는 운자까지 내줬어요. 수좌들에게 운자를 딱~~ 전부 내줘 가지고 한 철 공부한 것을, 한 철의 소득을 시로 한 번 표현해봐라.
우리 극락 암에 살 때 그런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래 소득을 꼭 그렇게 우리가 평가를 한다니까요. 꼭 평가를 하고 표현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無所得이 중요하다고 반야심경에는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그 다음에 수희찬탄.
22. 隨喜福等眞如(수희복등진여).
따라서 기뻐한다. 그런 말도 있는데요. 隨喜. 따라서 기뻐한다. 무엇을 따라서 기뻐하느냐? 그 사람 잘 한 것을ㆍ또는 공덕을 우리가 따라서 기뻐하지요. 그것은 다른 말로하면 복입니다. 그런데 그 복은 누가 무엇을 얼마나 했고ㆍ보시를 얼마 했고ㆍ좋은 일 얼마 했고ㆍ봉사를 얼마 했고, 이것을 가지고 따지는데, 그 까짓 것, 그 공덕이 얼마겠습니까? 眞如라고 하는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여의 복과 비교 한다면 천만 분의 일도 안 되는 겁니다. 기존의 복,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그 복. 그 복은 眞如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福等眞如라. 복이 진여와 같다는 사실을 알고, 따라서 기뻐해야 된다.
달마스님이 양무제보고, 양무제가 그렇게 절을 많이 세우고ㆍ탑을 많이 세우고ㆍ스님들 장학금을 그렇게 많이 줘가지고 수십만 명 스님들을 키우고 그랬는데 달마스님은 “所無功德(소무공덕)이다. 공덕 하나도 없다.” 그랬잖아요. 진여의 공덕. 진여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본래 공덕. 사람ㆍ사람이 본래가지고 있는 공덕 하고 비교하면, 그까짓 것은 해인사 같은 절 천개ㆍ만개를 지었다 해도 진여의 공덕에 비교하면 억만 분의 일도 안 됩니다. 그러니까 달마스님은 그 점을 보고 있고, 양무제는 당신이 불사한 것만 보고 있고요. 진여를 보고 있는 입장에서의 달마스님은 그런 공덕은 눈에 안 들어오는 것이지요. 아~~ 참, 이런 말도 너무 아주 불교의 핵심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隨喜. 따라서 기뻐하는 것은 복이 진여와 같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기뻐한다. 그 다음에 찬탄.
23. 讚歎도 彼我虛玄(찬탄피아허현)이라. 그랬습니다.
우리가 찬탄한다면 남을 찬탄하는 것이지요. 남을 찬탄하는데, 彼가 남입니다. 그리고 나입니다. 저 상대도 그리고 나도 虛玄 = 텅 비었다.
텅 비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찬탄한다. 본래 서로가 무아요 공이다.
彼我가 虛玄하다. 텅 비었다고 하는 사실을 찬탄해야 된다. 찬탄 할 꺼리는 그 것입니다. ‘당신은 텅 비었구려ㆍ당신은 空하구려.’ 이렇게 알고 찬탄해야 그것이 진짜 차원 높은 찬탄이라는 것입니다. 뭐 얼굴이 어떻게 생겼다ㆍ공부를 얼마만치 했다. 그것 몇 푼어치 되겠습니까? 물론 그런 것도 찬탄을 해야 할 일입니다만, 그 다음에
24. 發願能所平等(발원능소평등)이라.
우리가 “발원한다.” 그러지요? “원을 발한다.” 궁극적으로 발원하는 나나, 우리가 부처님 앞에 발원을 세우는 所. 能은 내가 됩니다. 이럴 때 所는 부처님입니다. 나와 부처님이 본래로 평등하다는 사실을 알고 발원하는 겁니다. 우리가 부처님에게 발원할 때, 축원을 하든지 할 때 우리는 아주 작고 작은 보잘 것 없는 미물과 같은 그런 중생이고, 부처님은 저~~ 하늘과 같은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 앞에 발원하면, ‘부처님이 다 들어준다.’ 이것이 우리의 상식이잖아요. 이것이 우리의 상식인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能과 所가 내가 능히 발원하는 나나, 발원을 듣고 있는 所. 부처님이나 근본적으로ㆍ또는 궁극적으로 공히 평등한 존재다ㆍ평등한 존재다.
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심불급중생시삼무차별)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발원한다. 이것이 이런 차원입니다.
25. 禮拜影現法會(예배영현법회)라.
예배하는데 影現. 그림자처럼 나타난 법회로 이해하고, 거기에, 그런 법회에 예배를 한다. 그림자에게 예배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하지만 그 법회를 그림자로 이해하고 예배하는 것. 이것이 중도적인 안목으로ㆍ제대로 된 소견으로 우리가 수행하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26. 行道足躡虛空(행도족섭허공)이라.
行道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예불하고ㆍ법당을 돌고ㆍ부처님을 돌고ㆍ탑을 돌고 하는 것을 行道라 그래요. 그 전에 우리 어릴 때는 으레 있었습니다.
부처님이 법당 3분의 1쯤 나와 있는 이유가 부처님 뒤로 행도하도록 구조를 그렇게 해놓은 겁니다. 지금은 사람들 많이 모일 것을 위주로 해서 부처님을 뒤로 바짝 붙여버리는데, 부처님이 3분의 1쯤 나와야 됩니다.
옛날 법당은 다 그렇게 되어 있잖아요. 행도하라고 그런 것입니다.
염불하면서 부처님을 돌도록 하는 겁니다. 부처님도 돌고ㆍ나와서 법당도 돌고ㆍ혹 탑을 돌고, 이것이 행도인데요. 이것이 수행입니다.
염불을 하든지ㆍ경을 외우든지ㆍ화두를 들든지ㆍ제일 좋은 것이 행도입니다. 방에 앉아가지고 혼자 화두 들어봐야 이것 제대로 안 들립니다.
사실은 도량 돌면서 하는 것이, 이것이 제일 화두가 잘 됩니다.
망상이 덜 떠오르고 그 다음에 졸음은 말 할 것도 없고요. 졸음은 얼마든지 쫓을 수 있고요. 그래서 중국 불교에는, 지금도 가서 예불을 참석해보면요? 법당을 그렇게 행도하는, 부처님을 뱅뱅 도는 것을 합니다.
은해사 승가대학원 스님들 하고 조계종 대표로 광화사에 가서 한 일주일 생활하고 왔는데, 예불을 두 시간해요. 한 시간은 부처님 앞에서 하고, 한 시간은 행도입니다. 돌아요. 도는데 법성도를 돌기도 하고, 도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어요. 염불하면서 도니까 그렇게 신심 나고 좋더라고요.
중국은 지금도 그렇게 다 하고, 우리나라도 옛날에, 우리 어릴 때만 해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안하는데 사실은 이것 살려야 됩니다.
足躡虛空이라. 발이 허공을 밟는 것으로 이해하고, ‘내가 부처님을 돈다ㆍ법당을 돈다ㆍ탑을 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요. ‘내가 허공을 밟는다.’ 어디 다른데 밟는 것이 아니고, ‘허공을 밟는다.’ 라고 생각을 해야지, 그래야 그것이 행도를 제대로 하는 것이다. ‘아, 나는 부처님을 몇 바퀴 돌았다.’경전에 보면 右繞三帀(우요삼잡). 또는 여기 입법계품에 가면 선재동자가 선지식을 “아주 無量帀. 한량없는 바퀴를 돌고, 그리고 떠났다.” 이런 표현들이 여러 번 나오는데 그것 행도입니다. 그것 역시 행도예요. “그렇게 돌았다.” 라고 관념상으로 딱~ 그것이 무슨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저는 그때 광화사에서 돈 것을 늘 마음에 두고 “그렇게 하더라.”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요. 사실은 그것마저도 마음에서 사라졌어야 옳지요. 그 다음에 우리가 분향하잖아요. 부처님 앞에 분향. 늘 하는 일.
27. 焚香은 妙達無生(분향묘달무생)이라.
분향한다고 하는 것은 뭐냐? 無生의 도리. 향을 피우면 향이 사라지잖아요. 연기는 피어오르고 결국은 향은 차츰차츰 없어져요. 연기도 나면서 바로 사라져버려요. 나고 없어지고ㆍ나고 없어지고 하는 것을 향을 피우면서 그 도리를 아는 겁니다. 그 향기나ㆍ향의 연기나ㆍ향 자체나, 다 짧은 시간에 생멸하고 생사 하는 것을 눈으로 봅니다. 눈으로 보면서 우리의 생사ㆍ우리의 생멸. 우리 나 자신의 생사를 거기서 아는 것이지요. 그런데 결국은 궁극적으로 無生이다. 저렇게 끊임없이 생멸하고 생사하지만, 궁극적으로 無生이다. 하는 사실을 묘하게 깊이 있게 통달하는 것. 이것을 焚香하는, 향을 사루는 의미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 향은 그냥 무심코 사루지요? 향기 나고 악취 물러가라고 사루고, 좋은 향이니까 그저 부처님 앞에 하나 사루고, 향 사루는 의미가 妙達無生입니다.
향은 끊임없이 생멸하는 것이잖아요.
끊임없이 생멸하는 것에서 無生을 터득한다는 것이지요. 통달한다.
그 다음에 송경. 우리가 일상생활에 하는 송경.
28. 誦經深通實相(송경심통실상)이라.
경은 왜 보느냐? 경 공부는 왜 하느냐? 이 말이지요. 실상의 이치를 깊이 통달하는 것이다. 실상의 이치를... 모든 존재의 실상의 이치를 깊이 통달하기 위해서 경을 공부한다. 그 다음에 산화. 이것은 우리 꽃 올리는 것을,
29. 散華顯諸無着(산화현제무착).
옛날에 전통적으로는 산화입니다. 꽃을 이렇게 꽂아 놓는 것은 이쪽 형식이고, 본래 부처님 앞에서나, 원칙은 산화지요. 꽃을 흩습니다. 꽃을 흩으면 꽃이 땅에 떨어집니다. 그것은 사실은 着입니다. 땅에 붙는 것이지요.
떨어져서 땅에 붙습니다. 또 경전에 보면 꼭 꽃을 흩는데, 집착이 있는 사람에게는 꽃이 몸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 모르는 사람은 “아~, 저 사람은 도가 높아서 꽃이 떨어지지 않고 몸에 붙어있다.” 이런 안목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반대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뭔가 번뇌가 있고 집착이 있는 사람이 붙는 것이지, 꽃은 붙어있지만 사실은 無着을, 집착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 散華의 본래 뜻이다. 무집착. 무집착의 도리를 산화로써 보인다. 그 다음에 탄지.
30. 彈指以表去塵(탄지이표거진)이라.
彈指는 우리나라에선 거의 안 하지요. 어디 길을 가면서도, 彈指가 손가락을 퉁겨서(동영상 보시기를...)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화장실 앞에서나, 남의 방 앞에서나 노크하는 것이 아니고, 손가락을 퉁겨서 소리를 냅니다. 이것은 일깨우는 의미가 있습니다. 화장실에나, 남의 방에 들어갈 때 그렇게 가볍게 소리를 내는 것이 彈指인데, 이것이 수행의 한 방법입니다. 중국 사찰에서의 생활은 이것이 으레 일상생활화가 되어있어서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以表去塵이라.
去塵 = 먼지ㆍ때ㆍ번뇌를 제거하는 것을 표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졸음이 와도 탄지를 해서 졸음을 깨우고ㆍ번뇌가 일어나도 탄지로써 번뇌를 쫓고ㆍ망상이 일어나면 탄지를 해서 망상을 쫓고 하는 그런 의식입니다. 이것이... 그런 하나의 수행방법이 탄지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화장실에 들어갈 때만ㆍ또는 남의 방에 들어갈 때만 신호로써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번뇌가 일어날 때ㆍ망상이 일어날 때ㆍ졸음이 올 때 이 탄지로써 그것을 전부 제거한다. 去塵. 번뇌를 제거하는 것을 표한다. 彈指以表去塵이라. 그 다음에
31. 施爲谷響度門(시위곡향도문)이라.
度門이라고 하는 것은, 6바라밀지요. 우리 하는 행위를 施爲라고 합니다.
불자의 행위는 무조건 6바라밀입니다. 그것이 度門입니다.
6바라밀내지 화엄경은 10바라밀이 되겠는데요. 그 10바라밀내지 6바라밀도 골짜기의 메아리, 메아리와 같은, 골짜기에서 울려나는 메아리와 같은 자세로, 그런 자세로써 바라밀을 행한다. 그것을 또 부연하면 만행이 되지요. 우리가 그것을 붙여서 육도만행. 이렇게 표현하는데요. 여기서는 나눠 놨습니다. 앞에는 낱낱이 6바라밀 하나ㆍ하나를 들었고, 여기 度門이라고 하는 것은 6바라밀내지 10바라밀 전체 항목이고, 그 다음에 그 외의 온갖 만 가지 수행이 있습니다. 그것을 뒤에는 만행이라고 그러는데,
32. 修習空華萬行(수습공화만행)이라.
空華萬行을 수습 한다. 空華萬行. 경을 본다든지ㆍ부처님께 꽃을 올린다든지ㆍ예배를 한다든지ㆍ청소를 한다든지, 이것이 전부 만행 아닙니까?
우리가 공부하러 가고 오고하는 것도 이것 전부다 만행이고요.
운전하는 것도 목적이 공부하는 일이고, 수행하는 일이라면 그것 역시 만행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허공에 있는 꽃. 헛꽃. 空華는 헛꽃이라고 그래요. 없는 꽃이지요. 없는 꽃처럼 만행을 행한다. 空華萬行을 修習한다. 이렇게 되어야 이것이 중도적으로 만행을 하는 것이고ㆍ중도적으로 예불을 하고ㆍ찬탄을 하고ㆍ향을 사르고ㆍ경을 읽고ㆍ탄지를 하고, 이것이 전부 중도적으로 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중도적으로 해야 옳고요. 또 제대로 꿰뚫어 보면 전부 중도적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중도적으로 실천을 하라. 이런 뜻입니다. 그 다음에
33. 深入緣生性海(심입연생성해)라.
인연으로 인해서 생기는 성품의 바다. 우리 성품이라고 하더라도 어떻습니까? 전부 우리 성품 속에서 인연에 따라서, 예를 들어서 제가 중도송을 설명하면 중도송에 우리마음의 물결이 일어나지요. 그리고 또 화엄경 법문을 보면, 그것 따라서 또 마음의 물결이 일어나고요. 전부 인연 따라서, 인연에 의해서 성품의 바다에 그러한 작용이 생기는 것입니다. 인연으로 생기는 성품의 바다. 인연으로 생기는 성품의 바다에 깊이 들어간다. 성품의 원리. 저 바닷가에 보면 큰 바람이 불면 큰 물결이 치고, 작은 바람이 불면 작은 물결이 치고요. 동쪽에서 불면 서쪽으로 물결이 가고, 서쪽에서 불면 동쪽으로 물결이 가고요.
그것이 전부 緣生性海입니다. 인연으로 생기는 성품의 바다.
우리의 한 순간ㆍ한 순간 마음 작용은 전부 인연에 의해서 한 생각ㆍ한 생각이 일어나는 겁니다. 누가 좋은 말하면 기분 좋고ㆍ웃기는 말하면 웃고ㆍ기분 나쁜 말하면 금방 화가 나고ㆍ마음이 상하고, 전부 緣生性海입니다. 그런 도리에 깊이 들어가야 됩니다. 深入緣生性海.
참~~ 좋은 법문입니다. 이것 뭐 한 구절만 해도 사실은 경전 한 권입니다. 그리고
34. 常遊如幻法門(상유여환법문)이라.
환과 같은 법문에 항상 놀아야 돼요. 환과 같은 법문인데 거기에 뭐 하려고 놀아요? 손해만 보는 것이 아니냐? 환과 같은 법문이지만 거기에 항상 놀 줄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불자이고 수행자이지요. 어디 가서 뭐 하고 놀 겁니까?
如幻法門이지만 그 법문에 노는 자세. 그것이 중도적으로 우리가 법문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그 동안 화엄경 공부했지만 뭐 남는 것이 있나요? 남는 것이 있어서도 안 돼요. 왜냐? 如幻法門이기 때문에요.
그런 줄 알면서 우리는 如幻法門속에서 항상 놀아요. 그것 밖에 달리 가치 있는 일이 없어요. 최고의 가치입니다. 常遊如幻法門이라. 아~~! 얼마나 좋습니까? 여러 스님들. 포교 일선에서 이것가지고 신도님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하기로 하면, 일 년 양식은 충분히 될 것 같아요.
35. 誓斷無染塵勞(서단무염진로)라.
맹세코 끊는다. 무엇을요? 물듦이 없는, 더렵혀지지 않는 번뇌, 塵勞를... 본래 깨끗한 塵勞를, 깨끗한 번뇌. 깨끗한 번뇌라는 말이 우습지만, 아무튼 깨끗한 번뇌를 맹세코 끊는다 이 말입니다. 번뇌에 물든 적이 없어요. 그렇지만 끊어야 돼요. 끊지만 그것이 無染塵勞. 물들지 않은 塵勞.
깨끗한 번뇌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맹세코 끊는다. 본래 끊을 것이 없는 그런 번뇌를 끊는다. 이런 뜻이지요. 영명연수선사가 염불종의 宗主지요. 그리고 법안종의 3대 조사고요. 선종의 3대 조사이고ㆍ염불종의 종주이고 그래요. 그런데 이분이, “願生惟心淨土 유심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한다.” 그랬습니다.
36. 願生惟心淨土(원생유심정토)이라.
염불종에서는 으레 영명연수선사를 제일 初祖로 모십니다. 제일 최고 初師로 모셔요. 염불을 많이 주장하셨기 때문에요. 수행 방편으로써 부처님을 머리에 그리고ㆍ또 부처님 명호를 입으로 되 뇌이고ㆍ그리고 법당에 앉거나ㆍ법당을 돌거나ㆍ탑을 돌거나 하는 것. 신 구 의, 3업을 그렇게 하는 것이 수행을 가장 제대로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염불하고 기도할 때도요? 신도님들에게 각자 사찰에,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이나 아니면 주불이나 그 불상을 기억 하라고 해야 됩니다.
그 불상을 꼭 기억하고 “관세음보살ㆍ관세음보살ㆍ관세음보살” 하면, 의식은 관세음보살얼굴이나 상호를 기억하고, 입은 관세음보살 명호를 부르고, 또 몸은 절을 하면서 법당에 있고, 그러면 신 구 의, 3업이 제대로 갖춰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염불할 때 꼭 기억하라고 해야 됩니다. 기억하라고 안 가르치고 그냥 관세음보살만 부르라고 해놓으니까 온갖 망상. 놀던 것, 싸우던 것 전부 머릿속에 떠 올리면서 소리는 계속 관세음보살 부르는 겁니다. 그것이 무슨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 스님들이 관세음보살 부르라고만 하지, 부르라고 부탁만 하지,
觀相法, 觀行. 머릿속으로 “우리 절 관세음보살얼굴을 기억하세요.” 라고, 이렇게 안 가르쳐요. 꼭 기억해야 됩니다. 늘 관세음보살얼굴을 떠 올려야 돼요. 꼭 우리 절 관세음보살이 아니라도, 석굴암관세음보살도 좋고, 어디든지 관세음보살 부를 때는 관세음보살얼굴을 기억하면서, 떠올리면서ㆍ떠올리면서 입으로는 관세음보살을 부르고요. 이것이 아주 바람직한 기도입니다.
惟心淨土에 태어나기를 원하고, 그 다음에
37. 履踐實際理地(이천실제이지)라.
實際理地라고 하는 것은 진리의 땅이지요. 진리의 땅 = 實際理地.
진리의 땅을 밟는다. 우리가 많이 밟고 다니지요. 履踐 = 밟을 履. 밟을 踐자입니다. 밟고 다니는 것이 우리 일상인데요. “진리의 땅을 밟는다.” 라고 알아야 됩니다. ‘그냥 어디 길을 간다ㆍ그냥 흙을 밟는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가 밟고 있는 것은 이 진리의 땅이다ㆍ진리를 밟고 있다.’ 이렇게 이해해야 되고, 또 그것이 사실이고요. 억지로 생각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알고 보면, 열린 눈으로 보면 그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땅을 밟고 다니는 것이지요.
38. 出入無得觀門(출입무득관문)이라.
얻음이 없는 관문에 출입한다. 觀門이라고 하는 것은, 요즘 비빠사나, 그것도 관이고요. 그 다음에 참선하는 것도 관이고요. 염불도 관이라고 할 수 있지요. 여기 觀門이라는 것 속에 다 포함됩니다.
옛날에는 흔히 觀行ㆍ또는 觀門. 그것을 또 다른 표현으로 하면, 止觀(지관). 그런 표현을 하니까, ‘거기에 뭔가 얻을 것이 있다.’ 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얻음이 없는 관문을 출입한다. 우리가 “마군을 항복을 받는다.” 그러지요?
降伏鏡像魔軍입니다.
39. 降伏鏡像魔軍(항복경상마군)이라.
거울에 나타난 그림자와 같은 마군입니다. 그까짓 것, 항복 받을 것도 없지요. 아 그림자 그것 뭐 내가 앞에 서야 그림자가 있지 그렇습니다.
마군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그런 존재입니다. 뚜렷하게 뭐가 있어가지고 우리 공부를 방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마군이를 궁극적으로는 항복 받아야 됩니다. 降伏鏡像魔軍이라. 거울에 비친 그림자와 같은 마군이를 항복 받는다. 아~ 참, 정말 깊이 있는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그냥 “마군을 항복 받는다.” 그렇게 아주 일차적인, 다시 말해서 相從(상종), 상의 어떤 有의 견해에 떨어져서 이 모든 것들을 전부 일차적인 有의 견해에서만 보았는데, 이것은 有에서 無로, 有와 無가 전부 이렇게 融通自在(융통자재)하는 그런 입장을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大作夢中佛事있네요.
40. 大作夢中佛事(대작몽중불사)이라.
불사도 夢中佛事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불사를 지어야 된다.
大作夢中佛事라. 참~ 좋은 말입니다. 몽중불사라고 해서 손 발 묶고 가만히 아무것도 안 하고, 도량에 풀도 뽑지도 아니하고, 뭐 기와가 떨어져도 ‘내 얼마 안 있다가 이 절에서 나갈 건데,’ 하고, 남의 일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절 관리하면 안 되지요. 벽이 다 떨어져도 그냥 내버려두고, 어느 방에 비가 새는지, 도대체 절을 맡아 있으면서 그렇게 하면 안 되지요.
보십시오. 열심히 불사를 해야 됩니다. 大作佛事. 대작불사, 하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알고 보면 大作夢中佛事입니다. 大作佛事가 아니라,
大作夢中佛事입니다. 열심히 불사해야 됩니다. 그런데 단 우리의 마음속에는 夢中佛事라고 하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41. 廣度如化含識(광도여화함식)이라.
化. 환화와 같은 含識. 含識은 중생을 말하지요. 환화와 같은 중생들을 널리 제도 한다. 그 다음에
42. 同證寂滅菩提(동증적멸보리)라.
다 같이 寂滅菩提. 텅 비어서 고요한 깨달음을 함께 증득한다.
이것도 반대로 설명하고ㆍ또 이리 설명하고ㆍ저리 설명하고 하면 설명할 꺼리가 아주 많은 내용입니다. 스님들 공부 많이 해서 구체적인 예를 드는 것은 각자 경험과 지식에 맡겨서 설명하기로 하고요. 그렇게 설명하기로 하면 이것이 끝없습니다. 하나ㆍ하나 예화를 들어가면서 하면 아주, 제가 본 중에 짧은글로써, 한 페이지 경전으로써 이 보다 더 말하자면 함축 된 내용ㆍ또 깊이 있는 내용이 또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이것은 정말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꼭 소개해주고 싶은 그런 내용이라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131쪽
3, 南方의 法喜慧菩薩(남방 법희혜보살)
爾時衆中(이시중중)에 復有菩薩摩訶薩(부유보살마하살)하니
名法喜慧光明(명법희혜광명)이라 承佛威神(승불위신)하사
觀察十方(관찰시방)하고 而說頌曰(이설송왈)
佛身常顯現(불신상현현)하사 法界悉充滿(법계실충만)하시며
恒演廣大音(항연광대음)하사 普震十方國(보진시방국)이로다
如來普現身(여래보현신)하사 遍入於世間(변입어세간)이라
隨衆生樂欲(수중생낙욕)하사 顯示神通力(현시신통력)이로다
佛隨衆生心(불수중생심)하사 普現於其前(보현어기전)하시니
衆生所見者(중생소견자)가 皆是佛神力(개시불신력)이로다
光明無有邊(광명무유변)이요 說法亦無量(설법역무량)이라
佛子隨其智(불자수기지)하야 能入能觀察(능입능관찰)이로다
佛身無有生(불신무유생)호대 而能示出生(이능시출생)하시며
法性如虛空(법성여허공)하니 諸佛於中住(제불어중주)로다
無住亦無去(무주역무거)로대 處處皆見佛(처처개견불)하니
光明靡不周(광명미부주)하야 名稱悉遠聞(명칭실원문)이로다
無體無住處(무체무주처)며 亦無生可得(역무생가득)이며
無相亦無形(무상역무형)이라 所現皆如影(소현개여영)이로다
佛隨衆生心(불수중생심)하사 爲興大法雲(위흥대법운)하야
種種方便門(종종방편문)으로 示悟而調伏(시오이조복)이로다
一切世界中(일체세계중)에 見佛坐道場(견불좌도량)하사
大衆所圍遶(대중소위요)으로 照耀十方國(조요시방국)이로다
一切諸佛身(일체제불신)이 皆有無盡相(개유무진상)하시니
示現雖無量(시현수무량)이나 色相終不盡(색상종부진)이로다
爾時衆中(이시중중)에, 그 때에 대중 가운데
復有菩薩摩訶薩(부유보살마하살)하니, 다시 또 보살마하살이 있으니
名法喜慧光明(명법희혜광명)이라. 이름이 法喜慧光明이라. 구체적으로 하면 법희혜광명보살마하살이지요.
承佛威神(승불위신)하사 觀察十方(관찰시방)하고 而說頌曰(이설송왈).
① 佛身常顯現(불신상현현)하사, 佛身은 항상 현현해요. 드러나 있다.
法界悉充滿(법계실충만)이라. 얼마나 드러나 있느냐? 법계에 다 충만해 있다. 온 우주법계에 다 가득하다. 그래서
恒演廣大音(항연광대음)하사, 항상 광대한 소리를 연설해가지고서
普震十方國(보진시방국)이라. 시방 국토를 널리 진동시킨다.
이 화엄경은 常說遍說(상설변설). 그래요. 항상 설하고, 어디에나 항상, 시간적으로 항상, 과거ㆍ현재ㆍ미래 항상 설하고, 장소로써 우주 온 법계, 수백억 광년 저 끄트머리에 까지도 화엄경이 설해지고 있는 것. 그래서
常說遍說입니다. 시간적으로 과거ㆍ현재ㆍ미래에 언제나 설해지고 있는 것이 화엄경이고, 어디에서나 설해지고 있는 것이 화엄경입니다. 이것은 옛날이야기가 아니고, 앞에 佛身常顯現이라. 부처님의 몸은 항상 나타나서 법계에 가득하다. 그리고 항상 광대한 소리를 연설하고 있다. 그래서 시방 국토를 진동한다. 그랬는데요? 이것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다.” 가 아닙니다. 지금 모습입니다. 지금 모습...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경전에서 이러한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을 보는 열린 눈. 화엄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것을 이해하고, 이것을 보는 그런 열린 눈이 관건입니다. 이것이 문제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공부가 얼마나 됐느냐에 따라서 이것이 얼마나 이해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옛날이야기가 아니고, 부처님 당시 때도 아니고, 그냥 지금 이 순간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이것이 앞으로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물론 과거도 있었고ㆍ현재도 있고ㆍ미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그 사람의 마음이 열려있고, 깨달음의 눈이 열려있느냐에 따라서 이것이 가슴에 와 닿는 것이지요.
② 如來普現身(여래보현신)하사, 여래가 널리 몸을 나타내시사
遍入於世間(변입어세간)이라. 세간에 두루두루 들어간다.
隨衆生樂欲(수중생낙욕)하사, 중생의 욕락 = 樂欲. 중생이 즐겨하고 좋아하는 것. 욕락 = 樂欲. 같이 씁니다. 즐겨하고 좋아하는 것을 따라서
顯示神通力(현시신통력)이로다. 신통력을 顯示한다. 이것도 현재상황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을 하든, 이것이 전부 내가 좋아하는 것ㆍ내가 필요한 것 하고 있으니까 ‘이것은 전부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이렇게 돌아가고 있다.’ 이렇게 이해해야 되지요. 그래 ‘이것이 어떤 경우일까? 나에게 지금 어떤 경우가 이것일까? 여기서 설명한 것일까?’ 라고 이렇게 또 우리가 깊이 사유해야할 일입니다. 그 다음에
③ 佛隨衆生心(불수중생심)하사, 부처님이 중생들의 마음을 따르사
普現於其前(보현어기전)이라. 널리 그 앞에 나타났다ㆍ자~ 널리 그 앞에 나타났다. 지금 우리 앞에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나타나 있다는 그 말이 예요.
衆生所見者(중생소견자)는, 衆生所見者. 중생이 보는 자가
皆是佛神力(개시불신력)이로다. 다 부처님의 神力이다. 지금 글을 보고ㆍ책을 보고ㆍ사물을 보고ㆍ옆의 사람을 보고ㆍ춥고 더운 것을 알고ㆍ그 다음에 밝다 어둡다를 다 압니다. 皆是佛神力이다. 두두 물물 사사건건이 전부 佛神力이다. “부처님의 神力이다.” 이 말입니다. 야~ 참 이것, 대단한 말씀이고 어쩌면 알듯 말듯 하잖아요. 어쩌면 알 것 같지요?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전부 “부처님의 神力이다.” 그랬습니다.
우리는 어떤 제 3자가 형상을 나타내가지고 옆에 와서 “이것 봐라.” 라고 이렇게 지시하는 것으로만 잘못 오해 할 수가 있는데, 지금 내 능력으로 보고ㆍ듣고 하는 그 사실이 皆是佛神力이다. 이것 그대로 해놨네요.
佛隨衆生心하사, 부처님이 중생심을 따라서 그 앞에 나타나 있다.
“중생들보고 있는 그것은 전부 부처님의 神力이다.”
④ 光明無有邊(광명무유변)이요, 그 광명은 끝이 없음이요.
說法亦無量(설법역무량)이라. 그 설법도 또한 한량이 없다. 뭐 소리 내서 설법하는 것, 그까짓 것 얼마나 되겠습니까? 정말 그것은 몇 푼어치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說法은 亦無量이라. 했습니다.
설법은 한량이 없다. 그렇습니다. 그 전에도 자주 말씀드렸지만,
溪聲便是廣長舌(계성변시광장설). 화엄경을 이해하는 데는 하나의 열쇠 같은 역할을 하는 데요. 시냇물 소리가 그대로 부처님의 광장설법이다.
山色豈非淸淨身(산색기비청정신)가? 저 산은 어찌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아닌가? 이러한 게송이 역시 이런 내용 하고, 그대로 잘 맞아 떨어지는 그런 글입니다.
佛子隨其智(불자수기지)하야, 불자가 그 지혜를 따라서
能入能觀察(능입능관찰)이로다. 그 도리에 능히 들어가고 능히 관찰한다.
그렇습니다. 부처님의 광명은 한량이 없고, 설법도 한량이 없다. 그런데 내 지혜가 얼마 만치냐? 그 정도에 따라서ㆍ그 정도에 따라서 능히 그 이치에 들어가기도 하고 능히 그것을 관찰하기도 한다. 그 다음에 오늘 중도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요.
⑤ 佛身無有生(불신무유생)호대, 佛身은 生함이 없되
而能示出生(이능시출생)이다. 능히 出生하는 것을 보인다. 이것이 중도적인 안목으로 佛身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法性如虛空(법성여허공)하니, 法性은, 법의 성품은 허공과 같으니
諸佛於中住(제불어중주)로다. 모든 부처님이 그 가운데, 허공과 같은 法性에서 머물고 있다. 그냥 허공인데 거기에 부처라 할 것이 뭐 있나요?
그런데 그것을 부처님이 거기에 머물고 있다. “허공 그대로가 부처님이다.” 우리가 그렇게 밖에 해석 할 수가 없지요. 우리가 그렇게 느끼면 그 사람은 상당한 안목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佛身을 중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여기도 또 그렇습니다.
⑥ 無住亦無去(무주역무거)라. 머묾도 없고 또한 감도 없음이로되
處處皆見佛(처처개견불)하니, 부처님이 어디 오고 가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오고 가고 하는 것이 없는데, 곳곳에서 다 부처님을 보고 있어요ㆍ다 부처님을 보고 있어요. 우리의 안목은 불상이라도 봐야 다 부처님 본다고 하는데, 화엄경의 안목은 아닙니다. 부처님은 감도 없고 옴도 없습니다.
無來無去亦無住(무래무거역무주)지요. 그런데 處處皆見佛입니다.
곳곳에서 다 부처님을 봐요. 그러면 책이 부처님이요ㆍ글자가 부처님이요ㆍ꽃이 부처님이요ㆍ옆의 사람이 부처님이요ㆍ이 텅 빈 허공ㆍ저 푸른 청산ㆍ흘러가는 구름ㆍ푸른 하늘. 어느 것 하나 부처님 아닌 것이 없다는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處處皆見佛이니까요.
光明靡不周(광명미부주)하야, 광명이 두루 하지 아니함이 없어요.
名稱悉遠聞(명칭실원문)이로다. 그 명칭이 다 멀리까지 들린다.
⑦ 無體無住處(무체무주처)하며, 體, 실체도 없고ㆍ住處. 머무는 곳도 없으며 亦無生可得(역무생가득)이며, 또한 生가히 얻을 것이 없어요. 나는 것도 없다 이 말입니다. 亦無生可得이라. 어디에도 그 나는 것을 얻을 길이 없다.
無相亦無形(무상역무형)이라. 相도 없고ㆍ形도 없어요.
所現皆如影(소현개여영)이로다. 나타나는 바가 다 그림자와 같다.
그런데 우리는 “부처님ㆍ부처님” 하는 것이지요.
⑧ 佛隨衆生心(불수중생심)하사, 부처님이 중생심을 따르사
爲興大法雲(위흥대법운)하야, 중생들을 위해서 큰 법의 구름을 일으켜요. 그래서 種種方便門(종종방편문)으로써 示悟而調伏(시오이조복)이라.
보여주고ㆍ깨닫게 해주고ㆍ그리고 조복한다. 우리 중생들의 마음을 조복한다. 그렇습니다. 부처님설법. 화엄경에서 이것이 부처님인가? 저것이 부처님인가? 종잡을 수 없도록 이렇게 이야기되고 있지만, 그것이 한 생각 탁 경계가 무너지고ㆍ담이 무너져버리면요? 이런 것 이해하는데 사실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의 그 한 생각. 부처님이라고 하는 어떤 각자의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그 고정관념을 가지고 부처님을 자꾸 상상을 하니까, 이것이 이해가 쉽게 안 되는데 그 고정관념을 탁 무너뜨려 버리고, 그대로, 이 경에 있는 그대로 그냥 이해해버리면, 그러면 전부 와 닿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아홉 번째 게송.
⑨ 一切世界中(일체세계중)에, 一切世界 가운데
見佛坐道場(견불좌도량)하사, 일체세계 가운데서 부처님이 도량에 앉아 있는 것을 본다. 뭐 불상이라야 꼭 부처님입니까? 불상 그것 몇 개나 되겠습니까?
一切世界中에 見佛坐道場입니다. 부처님이 도량에 앉아 있는 것을 본다.
전부 이렇게 눈에 보이는 현상 이대로 두고 하는 말입니다.
현재 상황 이대로 입니다.
大衆所圍遶(대중소위요)로, 대중이 에워싸고 있는 바로써
照耀十方國(조요시방국)이로다. 시방 국토를 환하게 비추고 있다.
이것 역시 무슨 딴 현상입니까? 우정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보고ㆍ듣고ㆍ느끼고 하는 현재 상황 이대로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⑩ 一切諸佛身(일체제불신)이, 일체 모든 부처님의 몸이
皆有無盡相(개유무진상)하시니, 다 無盡相이 있어요. 다함이 없는 상이 있으시니 示現雖無量(시현수무량)이나, 그 示現함이 비록 한량이 없으나
色相終不盡(색상종부진)이로다. 그 色相은 마침내 다함이 없더라ㆍ다할 수 없더라. 어디에 봐도 진리의 눈. 그야말로 어떤 한 고정관념의 어떤 둑을 무너뜨려 버리면 진리라고 하는 것이, 정말 현재 상황 이대로에서 손에 잡히고, 눈에 들어오는 것인데, 그러한 사실을 화엄경은 그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냥 순수하게 읽어가지고 마음에 착ㆍ착 와 닿으면 ‘그것이 제대로 우리가 이해하는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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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降伏鏡像魔軍이라... 거울에 비친 그림자와 같은 마군이를 항복 받는다... 釋 대원성 보살님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_()()()_
常遊如幻法門이라...고맙습니다 _()()()_
同證寂滅菩提(동증적멸보리) ..............
釋 대원성 님 !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爲興大法雲(위흥대법운)하야, 중생들을 위해서 큰 법의 구름을 일으켜. 種種方便門(종종방편문)으로써 示悟而調伏(시오이조복)이라...보여주고ㆍ깨닫게 해주고ㆍ그리고 조복한다....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 _()()()_
緣生性海/인연으로 생기는 성품의 바다.
修習空華萬行(수습공화만행)이라. 中道! 고맙습니다_()()()_
衆生所見者(중생소견자)가 皆是佛神力(개시불신력)이로다...중생들이 보는 것은 다 부처님의 신력이다. 고맙습니다.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고맙습니다.
더운 날씨에 건강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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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셨군요. 많이 기다렸습니다.
[懺悔罪性本空..본래 공한 줄 알고 참회해야 그것이 진 참회다.] [隨喜福等眞如..복이 진여와 같다는 사실을 알고, 따라서 기뻐해야 된다.] [修習空華萬行...예불을 하고ㆍ찬탄을 하고ㆍ향을 사르고ㆍ경을 읽고ㆍ탄지를 하고, 이런 것들을 전부 중도적으로 해야 한다. 중도적으로 실천을 하라.] [衆生所見者는 皆是佛神力이다..중생들이 보고 있는 그것은 전부 부처님의 神力이다.] 釋대원성 님! 수고 하셨습니다.._()()()_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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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하고 꿈이며 幻인줄 알면서도 열심히 공양하고 기도하고 수행한다.--中道
常說遍說하고 계신 부처님. 그 곳에 제 주파수를 맞추겠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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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道足躡虛空. ..... 허공을 밟는다.
"끊임없이 생멸하는 것에서 無生을 터득한다는 것이지요"._()()()_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_()_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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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은 항상 나타나 있고 법계에 충만해 있고 광대한 소리를 내어서 법계를 진동시키고 있다
중생이 보고 듣고 하는 것이 모두 佛神力이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았읍니다
處處皆見佛--- 고맙습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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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隨衆生心 皆示佛神力 나무대방광불화엄경 고맙습니다
佛隨衆生心(불수중생심)하사 普現於其前(보현어기전)하시니
衆生所見者(중생소견자)가 皆是佛神力(개시불신력)이로다
溪聲便是廣長舌(계성변시광장설). 시냇물 소리가 그대로 부처님의 광장설법이다.
山色豈非淸淨身(산색기비청정신)가? 저 산은 어찌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아닌가!!!
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佛子隨其智(불자수기지)하야, 불자가 그 지혜를 따라서
能入能觀察(능입능관찰)이로다. 그 도리에 능히 들어가고 능히 관찰한다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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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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