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운몽」은 봉건적인 정치 도덕관을 배격하고 사람들은 자기의 의사에 따라 서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현실세계에서 양반 사대부들이 내세우는 부귀공명이란 하나의 꿈과 같이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다.
◎작가 김만중에 대해
「구운몽」의 작가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은 조선 인조·숙종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산(光山), 예학의 대가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이며, 숙종의 첫 왕비인 인경(仁敬)왕후의 숙부이다. 병자호란때 아버지 익겸(益兼)이 강화에서 순절할 후에 유복자로 태어났고, 어렸을 때는 스승이 따로 없이 어머니에게서 「소학(小學)」, 「사략(史略)」, 「당시(唐詩)」등을 배웠다고 한다.
서포는 스물아홉살 때(현종 6년, 1665) 정시(庭試) 문과에 장원함으로써 벼슬길에 오르기 시작하여, 나이 오십이 될 때까지 예조 참의, 판서, 대사헌, 좌우 참잔, 대제학 등 높은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니 당쟁이 치열했던 현종·숙종 연간에 서인(西人)의 지반 위에서 벼슬길에 올랐던 그는 굽히지 않는 격한 성격으로 현종 초에 발단이 된 예송(禮訟)과 숙종 때의 경신환국(庚申換局)·기사환국(己巳換局)등 정변이 있을 때마다 거센 정쟁(政爭)에 휘말렸다. 그러다가 끝내는 남해 절도에 위리안치되어(숙종 15년 윤3월) 숙종 18년(1692) 4월에 56세의 일기로 이 곳 유배지에서 삶을 마쳤다. 죽기 한 해 전에는 서울에 계시는 노모의 부음을 듣기도 하였다.
서포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남달리 지극하였다고 한다. 서포의 조카 손자인 김춘택(金春澤)의 「북헌집(北軒集)」에 의하면 서포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하여 국문소설을 많이 썼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남긴 것으로 알려진 작품으로는 남해 적소에서 어머니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하여 썼다는 「구운몽」과, 숙종이 장희빈에게 빠져 민비를 폐출시킨 일을 풍자한 것이라는 「사씨남정기」가 있을 뿐이다. 이 외에 한시문집 「서포집」과 한문 수필류 모음집인 「서포만필」이 있다.
김만중은 소설창작에서 당시의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인물의 성격과 인간관계에 대한 폭넓은 묘사에 기초하여 당시 사회현실을 보다 진실하게 반영한 사실주의적 소설「사씨남정기」와 낭만주의적 소설「구운몽」을 세상에 내놓았다. 김만중은 이 소설 등에서 인물성격의 전형화와 심리묘사, 잘 짜여진 구성과 세련된 소설문체 등 여러 면에서 조선 중기소설의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어 놓았을 뿐 아니라 당대의 불합리하고 모순에 찬 현실을 폭넓게 반영하면서 사회의 부정적 현상들에 대한 비판적 기백을 뚜렷이 보여 주었다.
◎「구운몽」
「구운몽」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성진이 꿈에 양소유로 환생하여 역시 환생한 팔선녀를 만나 더없는 부귀영화를 누리나, 그것은 모두 하룻밤의 꿈이었다. 그리하여 꿈에서 깨어난 성진은 어제 자기가 잘못 마음먹었음을 안 육관대사가 하룻밤의 꿈으로 인간 속세의 부귀영화와 인간의 애욕이 물거품처럼 허무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에 꿈에서 깨어난 성진은 바로 세수한 다음 스승 앞에 엎드린다. 육관대사는 성진이 옴을 보고 미소지으며, 인간 재미가 과연 어떠하더냐고 묻는다. 성진은 그저 더 큰 법을 가르쳐 달라고 말한다. 이어 팔선녀가 또 들어와 제자가 되겠다고 한다. 이에 육관대사는 불법 닦음은 여자에게는 어려운 일이라고 내보내니, 팔선녀는 물러나와 구름같이 탐스러운 머리를 깎고 얼굴의 연지분을 다 떨어버리고 비단옷을 벗어 버리고 무명옷을 입은 채 맨발이 되어 불도 닦기를 간청한다. 이에 비로소 육관대사는 아홉 사람을 앞에 놓고 더 큰 법을 이야기한다. 후에 대사는 도를 성진에게 물려주고 천축으로 가 버리고, 팔선녀는 성진의 아래에서 계속 불도를 닦아, 후에 아홉사람은 모두 극락으로 갔다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을 보면, 불가로부터 시작하여 유가의 인생관으로 옮겨갔다가 다시 불가로 되돌아오고 있다. 물론 한편에는 신선 사상이 곁들여지기는 하였으나, 주된 인생관은 유·불(儒佛)이라 여겨진다. 신선 사상의 그림자가 다른 둘에 비하여 좀 흐리기는 하나, 이 작품에는 동양의 삼대 사상이라고 할 유·불·선의 세 사상이 나타나 있다. 유(儒)는 현실적, 합리주의적, 실천적인 이념을 내세웠고, 불(佛)은 내세적, 현실 부정적 이념을, 그리고 선(仙)은 고답적, 도피적 이념을 내세웠던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 각자는 각자의 생각에 따라 때로는 이것을, 때로는 저것을 택하고 의지해 가며 생활하고 사고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한 동양적 인생관이 이 소설에서 주제로 택해져서 각각 그 인생도를 그려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내용을 보면, 양소유는 두 부인에 여섯 낭자를 거느리고 사는 이른바 일부다처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그리하여 혹자는 평하여 「구운몽」은 일부다처를 합리화시킨 작품이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잠시 재고해야 할 점이 있다고 본다. 옛소설을 읽어보면 대부분의 작품이 해피앤드로 끝을 맺고 있다. 주인공이 어렸을 때나 또는 젊었을 때 갖는 고난의 풍파 속에서 끝내는 대성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는 식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 부귀영화를 꾸미는 하나의 방법으로는 거의 대부분이 일부다처로 묘사되어 있다. 이는 오늘날의 견해로 보면 불공평하고 여성을 무시한 일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그 당시 사회에 있어서는 당연한 일로 여겨졌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대개의 경우 남성을 중심으로 꾸민 옛소설들은 그 남주인공의 부귀영화를 꾸밈에 있어 일부다처를 등장시키고 있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면 여기 「구운몽」도 일반 다른 옛소설과 같이 일부다처를 당연시하거나, 또는 합리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일부다처를 꾸몄다고 할 것인가? 「구운몽」이 주인공 소유의 부귀영화를 꾸밈에 있어서 결국 일부다처를 가지고 왔다. 그런데 이 일부다처 중에서 다처에 속하는 여성들의 고민이 군데군데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정소저가 황태후의 명으로 양소유의 납채(納采)를 다시 돌려보내고는 불전에 올린 발원문에 “제자 경패 삼생의 죄 듕하여 날 제 녀자의 몸이 되고……<중략>바라건대 부처는 우리 두 사람의 정사를 슬피 넉여 세세생생(世世生生)의 계집의 몸을 면하게 하시고”라는 구절이 있다.
원래 죄가 중해서 여자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세세생생에 계집의 몸을 면하게 해 달라는 애절한 소원이 당시 사회의 일부다처에 휩싸여 있는 여성들에게는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공통되는 고충이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이는 결코 일부다처를 원하거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말이 아닐 것이요, 일종의 체념을 가지고 일부다처라는 풍습을 보는 말일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의 인격을 가진 여성으로서 자기의 정당한 생활권을 무시당함을 탄하는 말로 보아야 하겠다.
한편, 드디어는 양소유를 중심으로 한 집에 모여 살게 된 그들은 전생으로부터의 인연을 거들며 남해 관음보살상 앞에서 천연히 의형제를 맺은 장면이 있다. 이러한 장면은 언뜻 보면 여덟 사람이 매우 의가 좋고 서로 여성으로서의 질투가 없이 화목하다는 것을 뜻하는 듯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는 다처라는 데에서 겪어야 하는 여성으로서의 괴로움에서 어찌하면 벗어날 것인가 하는 눈물겨운 노력의 표시하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부다처는 부귀공명을 누리는 데 반드시 수반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바로 그 부귀공명을 쓸쓸한 배소(配所)에서 체념하여야 했을 그에게 이는 얼마나 탐탐하게 보였을 것인가? 한편 「사씨남정기」에서는 바로 그 일부다처의 폐단을 그린 그가 「구운몽」에서는 진정으로 찬양하고 나섰을까? 또 어머니의 근심을 풀기 위해 지었다고 전해지는 이 작품에서 여성이며 청상 과부인 어머니에게 일부다처를 찬양하는 뜻을 그렇게 과시하려고 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당시 일반인들이 생각했던 일부다처에 대한 하나의 반성 내지는 비판이 여기에 담겼고, 아울러 정당하게 있어야 할 여성의 위치나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고 보고 싶다.
양반계층의 출신으로 그 사회에서 입신양명하였으나 쓸쓸한 배소에서 당시의 사회를 응시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서포는 현실긍정과 부정의 쌍곡선 속에 방황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양반계층에 속하면서 그는 현실부정이라는 불가적 인생관이 담긴 「구운몽」을 썼던 것이고, 그것도 양반 계층이 천시하던 한글을 가지고 역시 천시하는 소설을 썼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