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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사랑5월호'작업의 정석 코스, 경양식'
http://www2.seoul.go.kr/web2004/seoul/publication/seoul/200905/ 27~29쪽
작업의 정석 코스, 경양식집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를 캐치프레이즈로 올림픽을 치른 후, 서울은 세계의 문물이 물밀듯이 들어오는 기착지인 동시에 우리 문물이 썰물처럼 퍼져나가는 진원지가 됐다.
음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피자·스파게티·파스타 등이 일상화됐는가 하면, 인도·태국·베트남 등지 각 나라 음식점이 우후죽순으로 개업했고, 그밖에 기상천외한 메뉴들이 앞 다투어 상륙했다. 미국 일본 유럽 등지의 대도시에 국한됐던 한국 음식점이 개방을 시작한 중국과 소련은 물론, 각국 대도시로 진출한 것 역시 그즈음이었다.
국적 불명이지만 아련한 곳
하기는 외국메뉴를 다루는 식당이 없지 않았다. 다름 아닌 ‘경양식’이라는 이름이 붙은 식당. 그런데 경양식, 어딘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다. 좀이 아니라 많이 이상하다. 아주 많이. 양식이면 양식이고, 한식이면 한식이지 경양식은 도대체 무언가? 이거야 말로 국적불명의 얼치기 양식이다. 양식(洋食) 앞에 ‘경(輕)’자 붙인 말장난으로 세인들을 적당히 속이는 그런 메뉴 말이다.
아무튼 오늘은 경양식에 얽힌 얘기를 해보려 한다. 사전에선 경양식을 ‘간단한 서양식 일품요리’로 설명하고 있다. 일품? 이것도 웃기는 얘기다. 일품은 무슨 일품.
하지만 그때 그 시절, 그러니까 70~80년대는 경양식이 분명 일품요리였다. 이 정체불명의 메뉴를 먹기 위해 꼬깃꼬깃한 지폐를 만지막거리며 식당문을 기웃거렸던 것이다.
범접이 쉽지 않았던 경양식집. 가정교사 월급 탄 것을 기화로 평소 짝사랑해온 여인을 어렵사리 불러내 큰 맘먹고 들어간다. 그곳은 종로 2가 관철동 근방에 있는 곳이라도 좋고, 신촌이나, 안암동이라도 좋다. 아니 미아리고개 근처라도 상관없다. 대부분 지하라 곰팡이 냄새 스멀거리는 공간에 엉성한 파티션으로 칸막이 해놓은 테이블. 앉자마자 맞닥드리는 첫 번째 난관은 주문이다.
메뉴 선택부터 난관
웨이터가 가져온 메뉴판을 서로 먼저 보라고 실랑이하다가 펼쳤는데,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있나? 돈까스, 비후가스, 함박스텍, 비후스텍에 오므라이스까지 적혀 있다. 오므라이스야 야채+햄 넣고 캐첩으로 볶은밥을 계란옷으로 덮은 메뉴라는 거 알지만, 다른 것은 거의 장학퀴즈 풀이 수준. 돈가스는 ‘돼지(豚)+저민고기(cutlet)’의 일본식 조어이고, 함박스텍은 햄버거스테이크의 일본식 발음이란 걸 나중에 알게 되지만, 아무튼 그 때문에 한 사람이 “비후스텍” 하면 “나두 그걸루” 하는 게 상례.
“방으로 할까요, 밥으로 할까요?” 이건 또 뭔가? 경양식도 양식이니 “빵”. 그러면 맞은편도 “나두요” 한다. 물론 둘 모두 조금 있다 밥 시키지 않은 거 엄청 후회한다. “음료는 요?” 호주머니 사정 생각에 왼쪽 바지 포켓에 손 넣고 주물럭거리다 호기 있게 소리지른다. “크라운 두 병이요. OB는 싱거워서…” 먼저 도착한 맥주병을 따 두 잔에 붓고 슬슬 분위기를 잡으려고 하느~은데, 눈치 없는 웨이터 금세 다시와 희뿌연 국물 같은 걸 들이민다.
스프라는 걸 먹어본 적이 없는 두 사람, 잠시 우두커니. 그러다가 본능적으로 숟갈 들어 퍼먹기 시작. 작업이고 뭐고 분위기는 사뭇 학구적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웨이터 다시 두 사람을 놀래킨다. 아리송한 드레싱이 뿌려진 양배추 접시를 들이대는 것이다.
단무지·깍두기의 환상 조합
놀래다가 시간 다보내나 생각하고 있느~은데, 드디어 메인 디시. 커다란 접시 한 켠에 검붉은 고기 덩어리, 마요네즈 칠갑을 한 샐러드에 으깬 감자. 여기에 좀 어울리지 않는 반찬 두 가지가 더 얹어 있으니 바로 다꾸앙(단무지)과 깍두기다.
비후스텍(beef steak)이라고 했으니 당연히 ‘칼질’을 해야 할 터. 그런데 왼쪽에 포크를 쥐고 오른손으로 칼질 한 뒤, 스테이크를 먹으려니 영 불편하다.
서양 놈들 죄다 왼손잡이였나? 상대방 눈치를 슬금슬금 보다가 에라 모르겠다, 포크 오른손으로 옮겨서 왼쪽으로 한입 집어넣는다. 상대방도 따라 한다. 그리고 다시 포크 왼손으로 잡아 고기에 찌른 다음 오른손에 쥔 나이프로 고기 썰고, 다시 포크 오른손으로. 이러다가 날 새겠다. 남은 고기 모두 조각조각 절단하고 만다.
절단 끝났으니 포크 오른손으로 잡고 본격적으로 먹어댄다. 가뜩이나 느글거리는데 빵을 씹으니 더 느글거린다. 단무지와 깍두기를 우걱우걱 씹는다. 아, 이래서 단무지와 깍두기구나.
속 겨우 가라앉히고 입가심으로 맥주 한 모금 들이킨다. 이제 서먹서먹함이 어느 정도 해소되고 사변적인 질의응답이 오간다. 취미가 뭐냐, 무슨 색깔 좋아하느냐 등등. 비로소 음악이 귀에 붙는다. 에릭 클랩튼의 ‘Wonderful tonight’이나 찰리 리치의 ‘The most beautiful girl’이 나오면 분위기 딱이고, 카펜터스의 ‘Top of the world’가 나오면 환상이다.
그런 시행착오를 통해 어쭙잖은 매너를 익힌 나는, 1970년대 후반 엄청 콧대 높던 강원도 처녀를 원주 시내 경양식집으로 유인해 마음을 호리는 데 성공했으니 경양식집은 어쩌면 대책없는 노총각이 되었을 지도 모를 무지렁이 서울 촌놈을 구제해 준 행운의 공간이기도 하다.
다시 찾은 경양식집엔 추억이
그런데 먹을거리가 너무 다양해져서인가. 이젠 그런 낭만을 지닌 장소를 찾기가 쉽지 않다. 명색 음식기행 필자로서 발품을 팔기 위해 4월 하순 어느 근무하는 일요일 저녁 퇴근길에 물어물어 찾아간 곳이 신림동의 암스텔담. 지하철 2호선 신림역 3번 출구에서 서울대 쪽으로 200m쯤 가서 지하에 자리한 이 경양식집은 분위기 자체가 7080이었다. 메뉴판의 메뉴 속 주류 리스트도 패스포트, 섬씽스페셜, 조커 등 그때 그대로였다(메뉴판이 옛날 것이었음은 나중에 알았다).
무엇보다 나오는 음악이 바로 그 시절 음악. 함박스텍과 생선가스가 모둠으로 나오는 그 집 정식(9500원)을 시키고 카프리 맥주 한 병 마시면서 들은 음악은 대충 B. J. 토머스의 ‘Rain drops keep falling on my head’, 폴 모리아 악단의 ‘Love is blue’, 아프로디테스 차일드의 ‘Spring, summer, winter and fall’ 등이었다. 아! 하나 더 생각난다. 스퀴터 데이비스 할머니의 ‘The end of the world’도 흘러나왔지.
재미있는 건 칸칸이 자리한 손님 대부분이 20~30대였다는 점. 그래 너희도 언젠간 이 아저씨처럼 초로의 중년이 되어 경양식집에서의 추억을 반추할 거다. 아련한 공간을 뒤로 하고 타임머신에서 내린 나는 공연히 감상적이 되어 조금은 한산한 밤거리를 쌩쌩 내달렸다.
어느 저녁, 경양식집에 가보라!
경양식집-.
대한민국과 서울의 급격한 변화 추세대로라면 벌써 박제가 되어버렸을 이 희한한 업태의 식당은 의외로 생명력이 길어 지금도 성업 중인 곳이 많다.
신촌 연세대 근처엔 이끼를 비롯해 신촌스토리, 신돈갓, 허수아비, 메차쿠차가 있고, 그 옆 이대 입구엔 허브수가 포진하고 있다. 안암동이 질소냐! 고려대 근처엔 파비아, 스까야돈까스 박사네 왕돈까스 등이, 성신여대 근처엔 온달왕돈까스가 나름의 경쟁력을 발휘하고 있다.
지하철 4호선 명동역 8번 출구에서 북쪽으로 들어가다 계성여고 근처에서 만나는 돈카, 거기서 다시 100m 쯤 올라가서 만나는 금왕돈까스 명동점, 올 6월 복원 개관할 명동예술극장 근처의 명동돈까스도 나름의 내공을 자랑하는 경양식집이다.
어스름녘 명동에서 나와 대한적십자사 끼고 남산을 향해 올라가다 보면 줄줄이 자리한 남산돈까스, 촛불1978, 림까스 역시 저마다의 내공을 자랑하며 불을 밝히고 있다.
저렴한 가격으로 가족 외식 겸해 추억을 더듬겠다면, 잠실에 있는 돈까스의집도 괜찮다. 신천역 3번 출구로 나와 삼전사거리 횡단보도 건너 오른쪽 첫 번째 골목 안에 있는 이 집은 6000원이면 생선까스, 함박스텍을, 5500원이면 돈까스를 먹을 수 있다.
전 세계를 강타한 불황으로, 꽃이 펴도 팍팍한 마음 그대로인 요즘 어느 저녁, 아내와 함께 혹은 가족과 함께 경양식집엘 가보라. 우아한 레스토랑이나 호텔에서 먹는 양식은 아닐 지라도 단무지에 깍두기가 나오는 경양식 먹으며 고도성장을 구가했던 옛 시절을 떠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
보내드린 메일은 청사모 회원이자 국민일보 논설위원으로 재직 중이며, 서울이라는 도시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하며, 고도 서울의 미래를 생각하는 서울 토박이인 윤재석님의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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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애플와인 파라다이스도 마셨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