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 월드컵 가는 ‘프리스타일 축구’ 지존 우희용
우희용씨의 공을 다루는 기술은 ‘외계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브라질의 호나우지뉴(AC밀란)까지 놀랄 정도다. 신인섭 기자 | |
우희용(46)씨는 ‘축구공으로 하는 묘기’를 개발하고, 이를 새로운 문화 양식으로 세상에 내놓은 사람이다. 그는 처음으로 축구 묘기로 공연을 하고, ‘프리스타일’이라는 이름으로 이를 전파했다.
프리스타일이라는 말은 축구에만 적용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월드컵’ 하면 축구를 떠올리듯 ‘프리스타일’ 하면 축구공으로 자유롭게 온갖 묘기를 보이는 종목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돼 가고 있다. 2004년 세계프리스타일축구연맹(World Football Freestyle Federation·WFFF)을 창설해 회장을 맡고 있는 우씨는 프리스타일을 ‘보통명사’에서 ‘고유명사’로 바꾸기 위해 오늘도 바쁘게 뛰고 있다.
우씨는 지난 3월 한 달을 대만에 있었다. 대만 정부에서 축구 붐 조성을 위해 우씨를 초청한 것이다. 그는 대만 전역의 초등학교를 돌면서 전교생 앞에서 묘기 시범을 보여줬다. 공을 머리에 인 채로 달리고, 줄넘기를 하면서 헤딩을 하는 묘기에 아이들은 놀라고, 감탄했다. “축구가 이렇게 멋진 스포츠인 줄 몰랐어요”라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보며 그는 보람을 느꼈다.
축구 달인 고 김용식 선생의 제자
우씨는 축구 선수 출신이다. 그는 축구라는 레드오션에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대신 프리스타일이라는 블루오션을 개척했다. 그의 반생(半生)은 열정과 반전이 있는 드라마였다. 서울 구로남초등학교 축구 선수였던 우희용은 한국 축구의 전설이었던 고(故) 김용식 선생에게서 배웠다. 축구 묘기의 개척자였던 김용식 선생은 서울 효제초등학교에서 일요축구교실을 열었다. 그는 아이들에게 축구공 하나씩을 나눠주며 “이 공을 늘 갖고 다녀라. 축구를 잘하려면 공 다루는 기술이 좋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체격이 왜소했던 우희용은 미련할 정도로 그 말을 따랐다. 그래서 개인기만큼은 늘 또래 중 으뜸이었다.
그러나 불운은 성장기의 우희용을 늘 따라다녔다. 고교 시절 구타와 기합을 견디지 못해 학교를 옮겼다. 그런데 그 학교의 축구부가 해체돼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무릎 성장뼈를 크게 다쳐 2년간 운동을 쉬어야 했다. 대학도 못 가고 부모님 뵐 낯도 없어 친구 집을 전전하며 살았다. 그래도 축구에 대한 갈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해외에서라도 뛰겠다’라는 일념으로 은행 창고지기를 하면서 기술 연마에 매달렸다.
1989년 헤딩 오래하기(5시간6분30초, 38만9694회) 세계기록을 세워 기네스북에 올랐다. 그리고 90년 ‘운명의 티켓’을 손에 쥐게 된다. 이탈리아 월드컵에 출전하는 국가대표팀이 타는 비행기 표 한 장을 어렵게 구한 것이다. 그는 한국 팀을 응원하는 차원에서 경기장 앞에서 축구 묘기를 보였다. 그랬더니 구경꾼 중에 동전을 던져주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내가 거지인가’ 싶어 동전을 줍지도 않았다.
그러다 로마역 앞에서 집시 가족에게 지갑을 털리는 사건을 맞았다. 현금과 신용카드에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표까지 몽땅 들어 있는 지갑이었다. 넋이 나가서 하루 종일 역 광장을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수중엔 동전 한 푼 없어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모자를 던져 놓고 가방에서 축구공을 꺼냈다. 묘기를 하고 있으니까 구경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모자에 동전을 던져주기 시작했다. 모아보니 빵값과 차비 정도는 됐다. ‘살았다’는 안도감과 ‘이거 돈 되는 거구나’ 싶은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로마서 지갑 털리고 길거리 공연
그후로 우희용은 월드컵 경기가 열리는 곳마다 가서 ‘좌판’을 벌였다. 월드컵이 끝난 뒤에는 독일로 가서 본격적인 로드 쇼를 했다. 독일 사람의 도움으로 독일 5부리그 축구 선수로도 뛰었다. 4년 동안 원 없이 축구를 했고, 돈도 벌고 이름도 날렸다.
미국으로 옮긴 그는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에서 ‘축구 묘기’를 공연으로 발전시켰다.
2003년 축구 종주국인 영국 런던으로 진출했다. 당시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였던 호나우지뉴(브라질)와 함께 찍은 나이키 광고가 ‘미스터 우(Mr. Woo)’를 알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호나우지뉴와 우희용이 축구 묘기로 경쟁하는 내용이었는데, 촬영이 끝난 뒤 호나우지뉴가 “나보다 훨씬 뛰어나다”며 그에게 사인을 요청했다. 사인을 해 주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 나가자 ‘도대체 미스터 우가 누구냐’라며 사람들이 술렁댔다. 2004년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2004) 때는 대회 공식 스폰서인 통신업체 ‘T-모바일’의 TV 광고 모델로 큰 인기를 끌었다. 주최 측은 CF를 통해 “유로2004 경기를 보기 전에 미스터 우를 먼저 봐야 한다”며 그의 묘기를 소개했다.
우씨는 자신이 만든 기술에 직접 이름을 붙인다. ‘러시안 발레’(무릎을 굽힌 상태에서 양발을 교대로 뻗어 볼을 차올리는 것), ‘블라인드 힐킥’(공을 뒤로 넘겼다가 발뒤꿈치로 다시 앞으로 차올리는 것) 등이 그가 개발한 기술들이다. 하나의 기술을 만들어 완전히 몸에 익히기까지는 하루 5시간 정도 연습을 해서 6개월 정도 걸린다고 한다. 자꾸 연습을 하다 보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불쑥불쑥 떠오른다. TV에서 항아리를 발바닥으로 돌리는 장면을 보고 발바닥으로 축구공을 다루는 동작을 만들기도 했다. 우씨는 “기술은 얼마만큼 반복해 연습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지만 어떤 동작도 내가 하면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고 말했다.
새 기술 개발하면 6개월간 연습
프리스타일을 즐기는 사람은 전국에서 수만 명에 이른다. 이들 사이에서 우씨는 ‘지존’으로 대접받는다.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뛰어난 의지력과 창의성이 프리스타일에 딱 맞는다고 했다. 특히 우리 젊은이들은 틀에 매이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멋지게 보여주려는 열망이 강하기 때문에 프리스타일의 종주국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우씨는 “프리스타일은 축구 경기에도 접목시킬 수 있다. 공을 잘 다루는 사람이 뛰어난 선수가 되는 건 당연한 이치다. 펠레·마라도나·호나우지뉴에서 최근의 호날두(포르투갈)까지 수퍼 스타들은 모두 묘기에 가까운 축구 기술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도 어린 시절 축구공을 끼고 살았을 정도로 개인기 훈련에 몰두했다. 2002년 월드컵 포르투갈전 결승골 장면(가슴 트래핑 후 발로 공을 띄워 수비수를 제친 뒤 슈팅)을 보면 그가 얼마나 개인기 훈련에 충실했던가를 알 수 있다는 게 우씨의 말이다.
우씨는 “프리스타일은 축구라는 경기에서 독립해 새로운 문화 상품으로 성장하고 진화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줄 수 있는 콘텐트이기에 인터넷을 타고 급속도로 번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프리스타일이 뛰어난 콘텐트라는 자신감이 있기에 체계만 잘 잡으면 세계적인 스포츠로 발전할 수 있고, 올림픽 종목으로도 선택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뜻 맞는 사람들과 함께 WFFF의 사단법인화 작업을 하고 있다. 올해 중 법인이 설립될 것으로 본다.
우씨는 지난해 10월 인천대교 개통 기념 행사에서 헤딩과 리프팅을 하며 인천대교 17㎞를 주파했다. 4시간46분34초가 걸렸고, 기네스 협회가 이를 인증했다. 바다 위에서 휘몰아치는 강풍도 우씨의 몸에서 축구공을 떨어뜨리지 못했다. 그는 후반생(後半生)의 드라마를 또다시 써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