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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리 목월 문학관
동리 목월 문학관
울산대학교 시 창작과 야외수업을 경주 동리 목월 문학관에서 하기로 했다
집합장소는 불국사 주차장 10시에 모이기로 했다
차가 밀려 겨우 제시간에 맞춰 도착하니 몇 명 문우들이 먼저 와 있었다.
경주의 봄은 파스텔과 원색이 어우러져 눈길 가는 곳마다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2006년 3월 24일 개관한 동리 목월 문학관은 경주 출신으로
한국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소설가 김동리(1913~1995)와 시인 박목월(1916~1978)의
문학적 위업을 기리기 위해 4200여 평 부지에 세워진 2층 건물이다.
이곳에는 동리전시실, 목월전시실, 영상실 창작교실로 꾸며져 있으며
문학관 2층 왼쪽은 동리전시실, 오른쪽은 목월전시실로 쌍둥이처럼 배치되어있다.
문학관은 유족으로부터 기증ㆍ위탁받은 김동리와 박목월의 저서를 비롯하여 약 7천 여종의
장서와 육필원고를 비롯한 문학자료 1천 5백여 점, 생활유품 2백 50여 점, 추사ㆍ운보ㆍ
월전 등의 애장품 30여 점 등 국내문학관 중 가장 많은 자료를 보유하고 있으며
두 문인의 생전에 집필하던 서재가 복원되었다.
지도교수 김성춘교수님 안내에 따라 동리 목월 문학관에 들어서니
돌다리 아래 좌측과 우측 못에 수련과 연산홍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새소리 물소리를 들으며 계단을 오르니 2층 규모 전통 골기의 건물이
경주가 낳은 두 거장의 힘을 상징하는 듯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아사달의 혼 탑
문학관 건물 우측에는 다보탑과 석가탑의 명장(名匠)인 아사달과 그의 아내
아사녀의 사랑을 기리는 '아사달의 魂(혼)' 탑이 세워져 있다.
앞면에는 석가탑에 담긴 아사달의 예술혼을 기릴 수 있도록 조각했고,
뒷면에는 아사녀의 애절한 사랑과 기원을 부조로 새겼다.
아사달의 혼 탑을 뒤로하고 계단에 올라서면 왼쪽으로 동리관이 있고, 오른쪽으로 목월관이 있다
우리는 먼저 왼쪽의 동리관으로 갔다
동리 문학관 입구의 동리 흉상
동리관에 들어서니 동리 흉상이 먼저 반기며 후배 문인 이어령(전 문화부 장관)의 글귀
'동리 문학은 나귀이다. 모든 것이 죽고 난 뒤에 찾아오는 나귀이다.'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전시장 내부 전경
긴 타원형으로 배열된 전시장 내부는
김동리의 체취가 묻어나는 주민등록증, 편지, 훈장 등 온갖 유품이 진열돼 있으며
벌건 인주가 묻은 낙관도 수십 개가 진열돼 있으며 인주가 묻은 낙관도 수십 개다.
동리의 사진과 책
전시장 끝에는 그가 쓰던 책상과 의자, 펜, 메모지 등과 생전에 입던 양복을 그대로 옮긴 서재도 꾸며져 있어,
등신불(等身佛)처럼 타오르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의 대표작인 등신불, 황토기’등의 소설을 영상화한 애니메이션 상영하여 소설 한 편을 본듯한 재미를 맛볼 수 있었다.
재현 해 놓은 동리 서재
-동리 문학세계-
샤머니즘과 토속 성을 주조로 민족의 정체성을 탐구한 김동리선생은
노벨문학상 10위권 내에서 거론된 세계적 작가로 인정받았다.
경주는 고조선 이후의 무속적 분위기에, 통일 신라의 불교가 접목되어 형성된 독특한 정신적 전통을 지니고 있다. 토속적ㆍ무속적 분위기가 짙게 감도는 경주의 분위기는 어린 시절 김동리의 내면적 정서의 기조를 이루었다.
1. 초기 : 토속적, 샤머니즘적, 동양적 신비의 세계에서 선택. 인간 생명의 허무적인 운명과 신비함을 추구하였다. 작품 - 무녀도, 황토기)
2. 중기 : 6·25를 계기로 역사의식과 현실 의식이 강화되면서 참여 의식이 강한 작품 창작하였다. 작품 - '귀환 장정', '흥남 철수', '실존무', '밀다원 시대', '역마' 등
3. 후기 : 더욱 근원적인 인간 구원의 문제를 다룸. 근대 문명에 대한 차원 높은 비판 의식의 형상화 했다. 작품 - '등신불', '사반의 십자가' 등
동리는 1934년 「백로」라는 시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였다.
1백여 편의 시를 발표하였고, 시집으로는 「바위」「패랭이꽃」그리고 유고시집인
「김동리가 남긴 시」가 있다.
동리는 언어를 “태양(太陽(양))과 무주(巫 呪(음))”어로 나누어 파악하였다. 전자가 소설에 닿아있다면 후자는 시 장르로 이어진다.「소설은 형상(形象)이요, 시는 영상(映像)이다. 소설은 육체를 갖춘 생명이요, 시는 육체를 거세한 영혼이다. 따라서 시는 영혼을 노래해야 한다.
사람의 혼을, 산천의 혼을…… 이것이 시의 가장 본질적인 의의요, 기본적 기능이다.」
이에 따라 동리의 시는 상당 부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
「이승과 저승 사이/ 외딴집 한 채, 그 속에/ 늙은 홀아비 혼자 산다.」 (「외딴집」4연 )는 동리의 시 세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풍경이라고 하겠다.
-김동리작품-
<무녀도>, <황토기>
일제 강점기부터 동리는 근대의 한계를 비판하고 나섰다.
「무녀도」에 나타나는 예수교와 샤머니즘의 대결은 이를 드러내는 방편이다.
샤머니즘의 무당은 화랑을 기원으로 한다. 그들은 하늘과 땅을 매개하며, 한이 있는 인간을 한이 없는 자연의 세계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 시나위가락(神出曲)이 울리는 가운데 모화가 물속으로 들어가는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자연으로의 귀화합일(歸化合一)’을 상징하는 셈이다.
여기서 예수교가 수용하지 못하는 샤머니즘의 정신이 빛을 발하기도 한다.
동리는 근대를 비판하면서 민족현실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삼엄한 상황 탓에 일제를 직접 비판할 수 없었지만, 설화를 수용하여 현실을 환기시켰던 것이다. 「황토기」의 ‘절맥설(絶脈說)’,‘상룡설(傷龍說)’,‘아기장수설화’는 비극적인 조선의 상황을 암시하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역마> <달>
「문학이 정치의 도구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주장을 작품으로 검증하는 길은 무엇일까. 정치성이 배제된 세계에서 인간의 근원적 모습을 담아내는 일이 한 가지 방편이 되겠다.
해방기 동리 작품의 큰 축은 이러한 논리 위에서 구축되는데, 「역마」와「달」은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역마」에서 부각되는 것은 운명과의 대결이다. ‘화개장터’라는 공간적 배경은 등장인물의 삶과 일치하면서 풍수지 리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주인공의 사주(四柱)도 운명의 조건이다.
「달」에서는 이루지 못하는 사랑을 죽음으로 완성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죽음의 장소가 물(자연)이라는 점에서 「무녀도」의 흔적이 느껴지기도 한다.
<실존무><사반의 십자가>
인간은 이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다. 한 개인이 전쟁과도 같은 불가항력의 상황에 맞닥뜨리면 이러한 인식은 전면적으로 불거진다. 동리는 전쟁을 배경으로 실존의 의미에 파고들었고, 「실존무」는 그 대표적 작품이다.
화려한 이론이나 수사(修辭) 따위로 가 닿지 못하는 실존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다는 측면에서 당시 동리가 입은 커다란 상처를 가늠할 수 있다.
「사반의 십자가」는 영웅소설이 아니다.
이적을 행한다는 예수는 주인공에게 아무런 도움이 못 되며, 예지자는 틀린 점괘를 내 놓는가 하면 적에게 잡혀가기까지 한다. 이는 동리가 큰형 범부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동리는 동양학자인 범부를 『반신적(半神的) 인간』이라고 하여 공자, 인자로서의 예수와 같은 반열에서 파악했었다. 말하자면 범부로부터 신성을 제거하고자 하는 노력이 「사반의 십자가」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실존무」와「사반의 십자가」를 거치면서 동리는 자신의 세계를 우뚝하게 세워나갔다.
<늪> <까치소리>
노년으로 접어들면서 동리는 이제껏 펼쳐왔던 문학세계를 종합적으로 보여주었다.
가령「을화」는 단편「무녀도」를 개작한 장편소설이며, 「늪」은 인간의 세계와 선(仙)의 세계(수풀)사이에 놓인 도저한 죽음(늪)의 깊이를 다루고 있다.
선(仙)이란 자연(山)의 질서와 완전히 하나가 된 존재(人)이니 두 작품의 세계는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은 셈이다.
「까치소리」에서 6.25를 매개로 벌어진 비참한 운명(팔자)과 맞서는 의지적 인간이 등장한다. 그렇지만, 이 인물은 패배하고 만다. 「늪」과 「까치소리」의 절망적 색채는 기억해 둘 만하다. 젊은 시절의 작품들과 달라진 점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동리는 『김동리 역사소설』을 펴냈다.
육체의 고향이자 정신적 안식처였던 화랑의 세계를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주목을 요한다.
김동리 프로필
이름 : 김동리 (金東里) (1913~1995)
본명 : 김시종 (金始鍾)
19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등단(백로)
193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화랑의 후예 당선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산화(山火) 당선
1947년 청년문학가협회장
1948년 첫 평론집 [문학과 인간]
1951년 한국문총 사무국장 피선, 문총구국대 부대장
1954년 예술원 회원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 교수, 자유문학상
1958년 예술원 문학부분 작품상(사반의 십자가)
1965년 민족문화중앙협의회 부이사장, 민족문화추진위원회 이사 피선
1668번 국민훈장 동백상
1972년 중앙대학 예술대학장
1973년 중앙대학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
1981년 4월 예술원 회장
1983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피선, 대한민국 예술원 원로회원 추대 5,16 민족문학상
1989년 한국문인협회 명예회장 추대
1990년 소설가협회장 피선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
저서: 무녀도, 황토기, 사반의 십자가, 소설 신라 열전, 문학개론 등
목월 전시관 입구의 목월 흉상
동리 문학관을 나서면 맞은편에 목월 문학관이 있다.
목월 문학관도 목월 흉상이 먼저 반기며 詩로 덮인 詩 세상으로 들어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시구를 보며 詩 세상에 떠도는 나그네가 된다.
전시장 내부 전경
전시장에 재현해 놓은 목월의 서재는 지금도 그가 쓰고 있는 듯 가지런하며 체취가 묻어나며 기둥 옷걸이에 걸려있는 양복과 수많은 책은 마치 목월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또 그가 젊은 시절 즐겨보던 책과 일기, 창작노트도 긴 세월을 머금고 있으며, 육필 원고가 눈길을 끌게 한다
전시장에서 필자
또 전시실를 가득 메우는 목월의 육성의 시가 가슴 속을 파고들어 문학의 향기는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다운 향내를 뿜어내고 있었다
생전의 목월 서재 재현
- 목월의 시 세계 -
일제강점기 시대 민족의 얼과 혼을 민족정서를 바탕으로 향토적 서정과 시공간을
초극하는 상징적인 자연을 노래한 박목월선생은 북에는 ‘소월’, 남에는‘목월’
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국 근대문학사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박목월은 동심의 소박성, 민요풍, 향토 성이 조화를 이룬 자연친화적인 작품을 발표하여 특유의 전통적 시풍을 이룩하고자 했던 작가로,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초기 시풍과는 달리 고유의 정서와 리리시즘을 섬세한 감각으로 재현하면서도 일상의 현실과 삶의 체험을 시 세계로 끌어들이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갈등이나 대립을 초극하기 위한 의지를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애환에 대한 정서의 자연스러운 감응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산도화>, <난·기타> 등의 시집에서 잘 드러난다. 후기 시는 <경상도 가랑잎>에서처럼 카랑카랑한 경상도 방언을 시의 언어에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고향의 토속적인 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다.
그의 언어는 토착어의 리듬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러한 시 세계의 변화를 포괄하고 있으며, 자기 삶의 본바닥인 고향으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삶과 죽음의 관계를 보다 여유가 있게 바라보고자 하는 정신적 달관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그의 시는 삶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달관의 자세로 보여주면서, 경험적 현실의 갈등을 내면화하는 데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목월이 문학의 길로 나아가는 데 있어 함께 한 김동리, 정지용, 조지훈, 박두진 등 네 문인은 목월의 문학적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목월은 김동리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고독감을 달랬으며, 문학적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정지용의 추천을 통해 본격적으로 문단에 입문한다. 또한, 목월은 조지훈과 박두진을 만남으로써 자신의 문학적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
김동리는 박목월보다 세 살 더 위이고 목월의 중학교 선배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서울의 경신학교에 다니던 동리가 휴학을 하고 경주로 내려와 있던 1934년의 겨울방학 때였다. 목월이 계성학교를 졸업하던 그 해, 즉 1935년 1월 동리의 소설 「화랑의 후예」가 『조선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이듬해 소설 「산화」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다. 두 번이나 신춘문예에 당선된 친구 김동리의 존재는 목월에게 있어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서로가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상대역이 될 수 있다는 점이오, 다른 하나는 문학적 성장의 촉발 자의 구실을 하였다는 점이다.
정지용은 『문장』에 목월의 시「길처럼」과 「그것은 연륜이다」두 편을 첫 추천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등을 서로 대고 돌아앉아 눈물 없이 울고 싶은 리리스트를 처음 만나 뵈입니다 그려. 어쩌자고 이 험악한 세상에 애련 측 한 리리시즘을 타고나셨습니까!”
정지용은 목월 시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이듬해 9월, 목월은 「가을 어스름」과「 연륜」이란 시로써 세 번째 추천을 받고 등단한다.
박목월은 청년문학가협회의 결성 준비 관계로 몇 번 서울 나들이를 하는 동안 여러 문 학인을 알게 된다. 해방 전까지 그가 알던 문학인은 윤석중, 김동리, 조지훈, 세 사람 정도였다.
『문장』의 추천 동기생인 박두진을 알게 된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3인 시집의 출판을 처음 발의한 것은 조풍연이다. 목월의 시가 맨 앞으로 나온 것은 시가 짧고 가벼우며 그만큼 순수하기 때문이다. 이 순서는 조지훈이 결정한 것이며 시집 제목을 『청록집』으로 하자고 주장한 것은 목월이었다.
푸른 사슴이라는 것이 보다 참신하고 날렵하다는 은근한 자부심과 새롭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좌ㆍ우 대립이 심화될 시기에 『청록집』이 나오자 반향이 컸다. 이러한 이유로 우익진영에서 저자의 한 사람인 목월의 시단적 위치는 높아진다.
이별가/박목월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락카노 뭐락카노
썩어서 동아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하직을 말자 하직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오냐. 오냐. 오냐.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박목월 프로필
박목월/朴木月(1916~1978)
본명 : 박영종(朴泳鍾)
1916년 1월 6일 경남 고성 출생
1933년 대구 계성 중학교 재학 중 동시《통딱딱 통딱딱》이 『어린이』에,
《제비맞이》가 『신가정』에 각각 당선
1935년 계성중학교 졸업
1939년 『문장』에《길처럼》,《그것은 연륜이다》,《산그늘》등이
정지용의 추천으로 등단
1946년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3인 시집 [청록집] 출간
1950년 『시문학』을 편집, 발행.
1953년 홍익(弘益)대학 조교수
1955년 제3회 아세아 자유문학상
1957년 한국 시인 협회 창립
1961년 한양(漢陽)대학 부교수
1963년 한양대학 교수
1965년 대한민국 예술원(藝術院) 회원 선임
1968년 한국시인협희 회장,대한민국 문예상 본상
1972년 국민훈장 모란장
1973년 시전문지 [심상(心像)] 발행인
1974년 한국 시인 협회 회장
1976년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장
1979년 유고시집 [크고 부드러운 손] 간행
시집
<청록집>(1946) <산도화>(1955) <구름의 서정시>(1957) <난·기타>(1959)
<청담>(1964) <경상도의 가랑잎>(1968) <어머니>(1968) <청록집·기타>(1968)
<무순>(1976) <크고 부드러운 손>(1979)
동시집
<박영종동시집>(1946) <산새알 물새알>(1962)
수필집
<구름의 서정시>(1957) <밤에 쓴 인생론>(1966)
기타
<문장의 기술>(1970) <실용문장백과>(1975)
대표작품/나그네, 물새알 산새알, 이별가, 얼룩 송아지, 불국사·하관, 등
단체사진
2층 동리, 목월관을 둘러보고 1층 영상실에서 동리, 목월일대기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영상물을 보고 가슴 가득 두 문인의 숨결을 담아 그곳을 빠져나왔다.
왕벚꽃이 흐트러지게 피어난 불국사 잔디밭에서 옹기종기 모여앉아 맛있는 점심을 먹고 일부는 무장사지로 떠나고 필자는 바쁜 관계로 아쉽지만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취재 김광련 시인
한국 한비문학 작가협회 여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