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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인물설교]사랑의 선지자 호세아
호세아 1:1~9
호세아 선지자는 북 이스라엘 왕국 여로보암 2세 때에 사역했던 선지자입니다. 그 시기에 남 유다 왕국에서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 왕이 다스리던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북 이스라엘 왕국은 멸망 직전의 마지막 황금기를 지낼 때입니다. 여로보암 왕 이후에는 그 아들 스가랴 왕의 6개월 통치를 끝으로 살룸의 한 달 천하 후 므나헴의 쿠테타가 일어나고 십년 통치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아들 브가히야가 2년 통치 후에 베가가 일어나서 반역하여 왕이 됩니다. 그러나 그 후 호세아가 또 반역하여 왕이 되어 9년만에 나라가 앗수르 국가에 통째로 망합니다. 여로보암 2세 사후에 나라가 30년만에 완전히 망한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한 북 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 때는 북 이스라엘의 가장 최전성기였습니다. 그 때 활동한 호세아 선지자는 말하자면 북 이스라엘 최후의 선지자인 셈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신 방식은 독특합니다. 선지자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 상태를 증언하시고, 호세아 선지자의 아픔과 용서와 사랑의 행위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증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 방식은 참으로 선지자에게는 쓰라린 아픔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시지 아니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하나님은 생각하셨기에, 호세아 선지자의 개인적인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셨던 것입니다.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 선지자는 어떤 사람,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 그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그가 제사장 출신인지, 혹은 농부 출신인지 아무 것도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다만 그가 실존 인물이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그에게 말씀하실 때, 그에게 주어진 명령은 호세아 선지자로서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음란한 여인을 맞아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1:2)
하나님의 첫 번째 음성을 들었을 때 선지자는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명령이 과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내리실 명령일 리 없다고 생각할 것이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호세아 선지자는 많은 고민 끝에 이 말씀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참된 주의 백성들의 태도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내가 지시하는 한 산 거기에서 내게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처럼 모순적이고 이해할 수 없고 가혹한 명령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 명령을 받고 밤새껏 뒤척이며 생각한 다음 아침 일찍 일어나 모든 준비를 마치고 삼일 길을 떠나 그 명령에 순종하여 복주고 복주며 번성케 하며 번성케 하시는 맹세로 된 축복을 받지 않았습니까? 호세아 선지자 시대에 사역했던 또 한 사람의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께서 저 앗수르의 큰 성읍 니느웨에 가서 심판을 선포하라는 말씀을 듣자마자 반대편 서쪽 다시스로 도망치려고 욥바로 내려가 배 타고 도망치는 불순종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은 언제나 인격적이어서 그 명령을 지키고 안 지키고는 그 사람 본인의 인격적 선택과 결단을 남겨둡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기계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그 명령을 내리실 때 호세아 선지자는 불길하고 두렵고 거북스럽고 불쾌하고 슬픈 일이 자기에게 닥칠 것 알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한 것을 깨닫고 순종하기로 결단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들의 자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개인적인 슬픔과 고난과 아픔과 손해가 될지라도, 기꺼이 그 말씀에 순종하는 편을 선택하는 자가 됩시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믿고 순종함으로 현실적인 복이 아니라 재앙과 저주와 슬픔이 기다릴지라도, 주의 계명이라면 그 말씀에 순종하여 불길 속으로도, 천길 물길 속으로도 들어가는 사람이 됩시다.
결혼 적령기에 이른 호세아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결혼을 합니다. 그 여인은 디블라임의 딸 고멜이었습니다. 고멜이 애초부터 소문난 바람둥이로 악평이 난 여인인지는 잘 모릅니다. 하여튼 이 여인은 호세아 선지자와 결혼한 후에 바람을 피웁니다. 이 여인은 남편 호세아가 다정하고 자상하고 아내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이 여인은 다른 남자의 사랑을 갈망했습니다. 호세아는 아주 가난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나중에 그가 여인을 되살 수 있는 돈과 보리를 가지고 가는 것을 보면 아주 가난한 사람은 아닌 듯합니다. 그렇다면 고멜이 다른 남자를 사랑한 것은 먹을 것을 얻으려고 달려간 것은 아닙니다. 그 여인은 남편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바람기가 많았던 여인인 것입니다. 고멜의 생각에 호세아와의 결혼 생활은 따분하고 단조롭고 답답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살면 더 행복할 것 같고, 더 만족할 것 같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에게 추파를 던지는 남자를 보면, 곧장 자기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패물과 귀고리로 단장하고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집에 자기가 낳은 아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호세아는 음란한 아내 때문에 너무 힘들었습니다. 주위의 시선과 수군대는 말도 듣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집에 있는 어린 자식들이 엄마를 찾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자식들의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챙겨주느라 지치고, 아프면 어찌할 바 몰라서 이웃집 여인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아이들을 건사하느라 힘이 들었을 것입니다.
호세아는 그 바람기 많은 고멜을 찾아나섭니다. 소문을 듣고 있는 곳을 찾아가 고멜을 만나 사정해보았습니다. 애처롭게 돌아오라고 매달렸을 것입니다. 그래도 차가운 눈초리로 자기를 대하면, 아이들 이름을 대면서 엄마를 찾고 있다고 옷 소매를 잡아끌었을 것입니다. 할 수 없이 고멜이 남편을 따라 다시 집에 돌아오면 또 다시 얼마간 집에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집에서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아내가 집을 나가고 또 다시 자식들은 울고 불고, 호세아의 마음은 휑하니 찬바람이 불고 슬프고 아프고 배신감에 치를 떠는 분노감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내가 다시는 이 나쁜 여자를 찾지 아니하리라고 생각하고 견뎌봅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면 또 다시 그 고멜을 그리워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엄마를 찾는 자식들이 한없이 불쌍합니다. 이번에 소문이 들려오기를 나쁜 남자에게 걸려서 실컷 매를 맞고 산다는 말도 들립니다. 가지고 나간 패물을 다 빼앗기고 버림받고 팔려서, 어느 집 여종으로 들어가서 실컷 고생하고 있다는 말도 들립니다. 또 다시 찾아가서 돈을 주고 빼옵니다. 집에 데려다 놓고 이제 집에만 있으라고 말합니다. 부탁도 하고 사정도 하고 엄포도 놓아봅니다. 여인은 그러나 또 다시 집을 나갑니다. 그녀의 바람기는 잠잠해지지 않았습니다.
호세아는 눈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 눈물만 흘립니다. 기도조차 할 수 없습니다. 가슴이 찢어지듯 아픕니다. 내가 이 여인을 왜 만났는가? 왜 내가 이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가? 자식들은 또 무슨 고생인가? 별별 생각을 다 듭니다. 모든 것을 청산하고 이제 새롭게 출발해야지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흑인이 피부가 하얗게 변할 수 없듯이, 표범이 반점을 없앨 수 없는 것처럼, 고멜이 개과천선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이제 집 나간 고멜이 죽든지 살든지, 종이 되든지 나는 결코 상관하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게 슬픔과 낙담과 좌절 속에 있는 호세아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와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호세아에게 고멜을 다시 찾아가라는 것입니다.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란한 생활을 하고 있는 고멜을 만나 다시 데리고 와서 그 여자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고멜이 하는 생활이 음녀 곧 창기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 현장에 가서 그 여인을 다시 찾아와서 사랑하라는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그 명령을 듣고 항의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내가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내가 왜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해야 합니까? 내게 무슨 죄가 있기에, 그 악한 여인을 또 다시 데리고 와야 합니까? 배신감과 수치심과 자존심을 다 뭉갠 그 여인을 어찌 다시 데려와 사랑해야 한단 말입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따질 수밖에 없는 호세아에게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을 숭배하며 그들에게 제사 드릴 때 바치는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나는 그들을 사랑한단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지금 호세아 선지자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각종 우상 숭배, 바알 숭배와 같은 각종 우상 타락한 이교 신앙 때문에 쓰라린 배신감과 좌절감에 시달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호세아가 고멜 때문에 수많은 밤을 한숨과 눈물과 답답함으로 하얗게 날을 새웠던 것처럼, 하나님도 수많은 세월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음란한 우상 숭배 때문에 눈물과 한숨과 고통의 시간을 보내왔던 것입니다. 호세아가 한밤중에 일어나서 문을 박차고 나가 들판을 홀로 헤매면서 소리를 질러대며 자신의 울분과 고통을 쏟아내었듯이, 하나님 역시 자기 아내 이스라엘 백성의 음란함을 인하여 오랫동안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왔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을 버리지 않고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여 선지자를 보내어 그들을 부르고 또 불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또 다시 다시 찾아오고 또 다시 집을 나가고 바람을 피우면 또 다시 선지자를 보내어 내게로 돌아오라고 권면하고 권면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너도 고멜을 사랑하라고 권면하신 것입니다.
선지자 호세아는 비로소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자기에게 왜 그처럼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게 하셨는지 알게 된 것입니다. 호세아는 고멜 때문에 겪은 아픔과 분노와 좌절과 슬픔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 속 깊은 상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깊은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자기 마음을 달랩니다. 그는 자기의 분노와 슬픔과 좌절과 미움을 내려놓고 고멜을 찾아나섭니다. 고멜은 어느틈엔가 가장 비천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이제 중년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이제 퇴물이 되었습니다. 아름다움도 사라졌습니다. 그녀는 이제 버림받았고 그녀는 어느 집에 팔린 종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값은 비싸지도 않았습니다. 여종의 값운 30세겔이었지만 고멜은 그 반값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호세아는 은 열 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을 가지고 가서 그 값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종의 신분에서 자유인의 신분으로 다시 고멜을 사서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당부하였습니다.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3:3)
이후에 길고 긴 방황 끝에, 이 고멜이 다시 호세아 곁에 돌아와서 자식들과 함께 지내면서 호세아만 사랑하며 행복한 가정을 다시 이루었는지 어떤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호세아의 이 변함없는 사랑,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닮은 이 사랑을 고멜이 깨닫지 않았을까 희망해봅니다. 호세아의 가정에 다시 행복이 깃들었기를 희망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생각해볼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멜처럼 끊임없이 바람기 많은 창기처럼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가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그녀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징계와 시련을 허락하시지만 그 뜻은 언제나 남편이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2장 19절에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훗날 신랑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그 신부인 교회를 취하여 영원히 한 몸을 이루신 신약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성령께서 온전히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어 그를 떠나지 아니함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그 조건없는 사랑, 아내의 불륜과 바람기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 이스라엘의 남편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자기의 아내를 삼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끈질긴 사랑, 조건없는 사랑, 한없이 용서하고 기다려주시는 이 사랑을 우리가 배반하고 실망시키고 우리 눈이 음란하여 세상이나 죄악을 찾아 헤맬 수 있겠습니까? 이제 주님의 그 한없는 사랑에 응답하여 우리도 오직 하나님 한분만, 우리 주 예수님만 사랑함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고멜처럼 세상을 사랑하여 신랑을 떠나지 말고, 다른 남자 사랑하여 헛된 우상과 죄악을 따라 나서지 말고, 오직 변함없이 신실하신 신랑이신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정결한 신부, 현숙한 아내로 한평생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또 한 가지 이 호세아서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호세아서에 나타난 부모와 자식의 사랑의 관계에 관한 말씀입니다.
11장 1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 여기서 자기는 부모요 이스라엘은 자식으로 보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여기서 하나님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불러내었는데, 불러낸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마치 어린 아들 딸처럼 사랑하여 걸음도 가르칩니다. 팔로 안아 길렀습니다. 아프면 부모가 더 안타까워 견디지 못하며 그들이 고칠 때까지 함께 아파하며 고쳐주었습니다. 그들을 사랑의 줄로 이끌어서 길렀고, 그를 괴롭히는 고생의 멍에는 부모로서 당연히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 멍에를 벗겨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잘 먹고 건강하게 자라도록 먹을 것을 그 앞에 차려놓고 잘 길렀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부모의 사랑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기를 길러준 은공을 알고 부모님을 사랑하며 은혜를 갚으려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부모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까이 부르면 그들은 도리어 뒤로 물러갑니다. 불러도 불러도 그들은 끝끝내 돌아가고 돌아오라 하여도 일어나 화답하는 자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고멜이 낳은 세 자녀들을 호세아가 기르면서 이 하나님의 마음고생도 경험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2:2 “너희 어머니와 논쟁하고 논쟁하라 그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그의 남편이 아니니라 그가 그의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내가 그의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자식들임이라 그들의 어머니가 음행하였고 그들은 임신했던 자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호세아는 그 자녀들이 자기 자식이라는 생각을 때론 의심하곤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내의 외도가 하도 잦았기 때문에 낳은 자식,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 세 아들 딸이 자기 자식이라고 믿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 자식들이 자라나면서 아버지 호세아의 마음에 들게 경건하게 자랐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치면, 사고뭉치요 어머니를 닮아 여자 일진에 가담하여 다른 아이들을 때리고 돈을 빼앗곤 했을 것입니다. 바알 숭배 잔칫날에 아버지의 엄령에도 불구하고 몰래 도망쳐서 그 절집에 가서 실컷 놀다오곤했을 것입니다.
호세아의 고통은 자식 때문에 더욱 컸을 것입니다. 혼자서 그 고민을 감당하면서, 흘린 눈물은 고멜 때문에 흘린 눈물만큼 많았을 것입니다. 차라리 이 자식들과 인연을 끊을까 하는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을 어렸을 때부터 손수 기르면서 걸음을 가르치고, 말을 가르치고, 울고 웃었던 그 세월, 그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다시 마음에 긍휼한 마음이 불붙듯하곤 해서 또 다시 사랑하며 또 다시 용서하며, 또 다시 기다리곤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호세아는 자식들을 길러가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 마음을 깊이 이해하면서 선포하였습니다. 호세아 11:8 이하의 유명한 말씀입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 듯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결코 버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친히 자기의 편 팔로 그들을 애굽에서 아이를 건져내어 걸음을 가르치며 안으시며 아플 때 고치시며 먹을 것을 주시며 기르신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버릴 수 없습니다. 포기할 수 없습니다. 때리실 때에도 속으로는 울고 계신 것입니다. 영원히 포기하려다가도 그 마음은 불붙는 긍휼이 타오르는 것입니다.
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우리들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아무리 속을 썩인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요 우리는 그의 자식입니다. 우리가 그를 속썩이며 살지라도, 그런 우리를 그가 심히 책망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불붙는 긍휼이 가득합니다. 그런 사랑많은 아버지를 더 이상 실망시키는 자식 되지 맙시다. 우리들 모두 이 사랑을 받은 자식임을 기억하면서, 이제부터 속 썩인 만큼 더 많이 사랑하고 더 깊이 감동을 주는 착한 자식들이 다 되시기를 결심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