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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8 광주폭동에 대해서
1. 5.18 광주폭동 이란 무엇인가? 그 정의에 대해 알아봅니다.
<5. 18 광무 폭동이란?/ 5.18 광주폭동의 정의>
한마디로 한다면 5.18 광주폭동이란?
계엄령철폐는 가져다 붙인 좌파들의 명목이고
김대중이 정권을 잡으려다 구속되자 똘마니를 시켜 석방운동을 시도
등을 요구하여 벌인 내란 폭동입니다.
5.18 광주폭동의 정의는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조속한 민주 정부 수립은 김영삼이가 붙인것이고,
김대중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권을 내어 놓으라고 협박하며 내려 놓지 않으면 시위를 일으켜 나라를 망치겠다며 협박하다가
전두환 보안사령관에 의해 구속되자 김대중 똘마니들을 선동해서 벌인 폭동이며 북한군(손성모-구글에서 검색)등이 침두해서 벌인 내란입니다.
2. 5.18 광주 폭동의 배경
배경 요약
박정희 정권이 계속되던 대한민국은 부마항쟁과 10.26 박정희 피살사태를 기점으로 급변의 시기를 겪게 되는데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에도 불구하고 군사 쿠테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은 철투철미하게 민주세력을 탄압합니다.
조금더 자세히 배경을 말씀드리면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자 노동자, 농민, 학생, 재야인사 등은 억눌렸던 민주화 요구를 분출함.
그러나 민주주의 회복을 둘러싸고 다양한 전망들이 발산하는 가운데 12월 12일 전두환 노태우의 하나회를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은 쿠테타를 일으킴. 신군부는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군 지휘부를 불법 연행하여 군 지휘권을 장악함.
1980년 4월부터 전개된 노동쟁의는 5월 초까지 전국에서 격렬하게 전개되었고, 대학생들은 5월 13일부터 캠퍼스를 벗어나 거리에서 계엄령 해제,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며 시위에 나섬. 5월 15일 서울역에는 10만 명의 대학생이 결집, 총학생회장단은 시위대 해산을 결정함. 이를 '서울의 봄'과 '서울역 회군'이라 부름.
한편 신군부는 북한 남침설을 유포하고 대중운동을 사회혼란으로 규정함. 1980년 2월부터 후방 부대에 시위진압 지침을 전달하고 공세적인 진압훈련인 '충정훈련'을 실시함. 군의 사회개입은 대학생 시위가 소강 상태로 접어든
5월 17일 전군(모든군대) 주요지휘관 회의에서 구체화됨. 이 회의에서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가 결의되었고, 국무회의는 이를 형식적으로 승인하는 절차였음. 5월 17일 24시부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새벽 2시 국회는 무력으로 봉쇄되었음. 계엄 확대 이전인 17일 밤부터 전국 군.검.경 합동수사본부는 학생, 정치인, 재야인사 등을 예비검속으로 불법 연행하였음.
비상 계엄 전국 확대는 신군부가 직접 사회를 장악하고, 신군부에 저항하는 세력을 '적색분자', '불순세력','폭도' 등으로 규정하는 조치였음.
3. 5.18 광주폭동의 원인은 과연 무엇인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원인>
유신체제의 폭압정치에 눌려왔던 국민들은 1970년대 후반부터 민주화 운동에 적극 나섰으며
특히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력이 죽은 뒤에는 민주화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났습니다.
그러나 12.12사태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국민이 원했던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고야 말았습니다. 1980년 봄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시위가 계속되었으며, 신군부 세력은 이에 맞서 5.17 비상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였습니다.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국민의 자유와 정치참여를 제한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잠깐!
전국적인 5월 민주화 요구 속에서 광주에서만 대중봉기로 전개된 까닭, 원인은 무엇일까요?
첫째,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이 그 원인입니다. 경찰로 통제 가능한 시위에 군대가 개입하면서 희생자가 발생하였고, 이것이 시민의 분노로 이어졌습니다.
둘째, 시위 및 강경진압이 발생했던 금남로의 장소성을 들수 있습니다. 금남로는 광주 및 인근 지역의 버스까지 통행했던 교통의 중심지였고, 오랫동안 행정 중심지이자 시민들의 참여와 저항이 이어지던 공간입니다. 이 때문에 공수부대의 과잉진압 소식은 빠르게 인근 지역으로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셋째, 호남 유력 정치인 김대중의 연행이 촉발한 측면이 있습니다. 1971년 신민당 대선 후보로서 전국적인 돌풍을 일으켰던 김대중은 박정희 사후 정치권력 장악 및 민주화 과정에서 핵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김대중 연행은 호남지역에서 신군부를 비판하는 정서를 확산시켰습니다.
4.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전개 과정은 과연 어떻게 펼쳐질까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전개 과정>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전개과정을 간략히 말씀드리면
광주에서는 비상계엄 확대 소식을 듣고 18일 아침에 전남대 교문 앞에 대학생 200여명이 모였는데, 공수부대가 과잉 진압을 하여 부상자가 많이 발생합니다. 그러자 학생들은 광주 도심지로 옮겨 시위를 벌였고 공수부대는 곤봉과 대검으로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살상합니다.
19일에는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한 광주 시민들이 학생시위에 동참아혀 5.18 민주화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됩니다.
5월 20일, 광주 시민들은 20만 명 이상 모여 시위대를 형성해서 시청을 접수하고 차량시위를 벌이며 광주문화방송국을 태우는 등(편파 방송하는 것이 그 원인) 시위가 격해졌습니다.
21일에는 계엄군의 발포에 대항하려고 예비군 부대 무기고에서 총을 꺼내 무장을 함으로써 시위는 시가전의 형태를 띄게 됩니다.
21일 오후부터 공수부대는 시내를 벗어나 광주시 외곽을 봉쇄하고 새로운 경계를 만들었고 그 내부에 존재하는 광주시민을 '폭도'로 규정합니다. 그 때문에 광주를 벗어나거나 이동하는 민간인을 향한 무차별 발포가 시작되었고요 특히 3공수여단이 봉쇄작전을 펼쳤던 광주교도소 부근의 광주와 담양을 잇는 길목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합니다.
계엄군이 물러간 광주에서 시민군은 시내 방위대, 지역 방위대를 조직하여 자치질서를 수립했고요. 시민군은 청소년의 총기 휴대 금지, 계엄군의 선제 발포시에만 사격 허용 등을 제시하며 총기 사고 예방에 힘썼고 종교인, 지역유지 등으로 구성된 시민수습대책위원회는 계엄군과 협상 및 무기 회수를 시도합니다. 계엄군은 수습대책위원회의 협상안에 불응하였고 23~26일 도청 광장에서는 매일 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됩니다.
5월 26일 젊은 청년 중심으로 민주시민학생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들은 수습파를 도청에서 몰아내고 결사 항전을 결의합니다.
'해방구' 광주는 정부와 군 입장에서 '치안부재의 상태'로 규정되었고 최규하 대통령은 사태의 책임을 광주 시민에게 떠넘기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는데, 이에 윤공희 천주교 광주대교구 대주교는 '광주 시민들의 평화적인 시위를 다스리는 데 계엄군이 광주시 곳곳에서 천인공노할 잔악한 행위를 수많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한 가운데서 자행했기 때문에, 자기 아들, 딸들이 군인들의 몽둥이에 얻어맞고, 구둣발에 채여 유혈이 낭자한 채 길바닥에 쓰러지고 다 죽게 뻗어버린 채로 차에 실려가는 것을 본 시민들이 얼마나 격노' 한 것이라고 반박하였습니다.
군은 5월 27일 새벽 3시 30분을 기점으로 최종 진압작전인 상무충정작전을 실행합니다. 공수여단 특공조가 광주 시내로 침투하였고, 20사단과 31사단이 외곽에서 시내로 진입합니다. 4시 5분 전남도청에서 시민군과 교전이 벌어졌고, 4시 55분 전남도청 진압이 완료됩니다. 새벽 5시를 전후로 광주관광호텔, 광주국군통합병원, 전남도청, 광주경찰서 등 주요 기관의 군부대 진입이 완료됩니다. 이 작전으로 윤상원, 박용준을 비롯한 17명의 시민군이 사망했고, 227명이 연행됩니다. 시민군은 지도부 명령에 의해 마지막 저항을 결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윤상원 등 시위 지도부는 '굳은 각오와 결의가 없는 사람은 지금 나간다고 해도 말리지 않겠다' 고 말합니다.
시민군의 희생 속에서 열흘간 전개된 항쟁이 마무리됩니다.
5.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결과(피해상황)는 무엇일까요?
간단하게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결과(피해상황)을 본다면
신군부세력의 무력진압으로 5.18 민주화 운동은 수많은 희생자를 내며 실패로 막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은 점점 더 커져갔습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결과(피해상황)으로는
1980년 5월 27일까지 약 10일동안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약 2만 5천명의 군인들이 동원된 무력 폭력진압으로, 사망 191명, 부상자 852명을 냈습니다. 이렇게 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광주 민주화 운동은 계엄군들의 진압으로 실패로 끝났습니다.
계엄군들에 의해 진압된 광주 민주화 운동은 이후 신군부와 관련 언론 등에 의하여 '광주사태' 또는 '북한의 사주에 의해 광주폭동' 등으로 매도되었습니다.
그러나 진상규명을 위한 끈질긴 투쟁으로 관련 희생자들은 민주화 유공자로, 현재의 명칭인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명예를 회복하였습니다.
6.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의의는 무엇인가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의의>
첫번째, 의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한국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된 민주화운동의 원동력이 되었고 군부독재에 결정적 타격을 가해 87년 6월 항쟁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두번째 의의
5.18 민주화 운동은 95년 5.18 특별법으로 제정되었으며, 전직 대통령이었던 전두환, 노태우 등 92명이 내란/내란목적 살인죄 등으로 처벌받기까지 전 국민의 염원이 모여 5.18 민주화운동 정신계승으로 이어졌습니다.
세번째 의의
5.18 민주화 운동으로부터 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광주를 비롯한 전 국민이 보인 저항과 참여, 연대의식은 오늘날 세계 곳곳에 중요한 민주화 운동 사례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7.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알아보고 느낀 점
짧게 느낀 점을 요약해보면
5.18 민주화 운동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데 이러한 숭고한 희생으로 오늘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펼쳐나간다는 것에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학생들도 시위에 많이 참여했다고 하는데 나같으면 선뜻 나서고 참여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때 학생들도 정말 무서웠을텐데 그 용기가 정말 멋지고 훌륭합니다.
5. 18 광주폭동에 대해서
5.18 광주폭동 이란 무엇인가? 그 정의에 대해 알아봅니다.
<5. 18 광무 폭동이란?/ 5.18 광주폭동의 정의>
한마디로 한다면 5.18 광주폭동이란?
계엄령철폐는 가져다 붙인 좌파들의 명목이고
김대중이 정권을 잡으려다 구속되자 똘마니를 시켜 석방운동을 시도
등을 요구하여 벌인 내란 폭동입니다.
조금더 길게 표현한다면 5.18 광주폭동의 정의는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조속한 민주 정부 수립,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폭동입니다.
2. 5.18 광주 폭동의 배경
배경 요약
박정희 정권이 계속되던 대한민국은 부마항쟁과 10.26 박정희 피살사태를 기점으로 급변의 시기를 겪게 되는데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에도 불구하고 군사 쿠테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은 철투철미하게 민주세력을 탄압합니다.
조금더 자세히 배경을 말씀드리면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자 노동자, 농민, 학생, 재야인사 등은 억눌렸던 민주화 요구를 분출함.
그러나 민주주의 회복을 둘러싸고 다양한 전망들이 발산하는 가운데 12월 12일 전두환 노태우의 하나회를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은 쿠테타를 일으킴. 신군부는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군 지휘부를 불법 연행하여 군 지휘권을 장악함.
1980년 4월부터 전개된 노동쟁의는 5월 초까지 전국에서 격렬하게 전개되었고, 대학생들은 5월 13일부터 캠퍼스를 벗어나 거리에서 계엄령 해제,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며 시위에 나섬. 5월 15일 서울역에는 10만 명의 대학생이 결집, 총학생회장단은 시위대 해산을 결정함. 이를 '서울의 봄'과 '서울역 회군'이라 부름.
한편 신군부는 북한 남침설을 유포하고 대중운동을 사회혼란으로 규정함. 1980년 2월부터 후방 부대에 시위진압 지침을 전달하고 공세적인 진압훈련인 '충정훈련'을 실시함. 군의 사회개입은 대학생 시위가 소강 상태로 접어든
5월 17일 전군(모든군대) 주요지휘관 회의에서 구체화됨. 이 회의에서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가 결의되었고, 국무회의는 이를 형식적으로 승인하는 절차였음. 5월 17일 24시부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새벽 2시 국회는 무력으로 봉쇄되었음. 계엄 확대 이전인 17일 밤부터 전국 군.검.경 합동수사본부는 학생, 정치인, 재야인사 등을 예비검속으로 불법 연행하였음.
비상 계엄 전국 확대는 신군부가 직접 사회를 장악하고, 신군부에 저항하는 세력을 '적색분자', '불순세력','폭도' 등으로 규정하는 조치였음.
3. 5.18 광주폭동의 원인은 과연 무엇인가?
<5.18 광주 폭동의 원인>
유신체제의 폭압정치에 눌려왔던 국민들은 1970년대 후반부터 폭동에 적극 나섰으며
특히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력이 죽은 뒤에는 폭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났습니다.
그러나 12.12사태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국민이 원했던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고야 말았습니다. 1980년 봄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시위가 계속되었으며, 신군부 세력은 이에 맞서 5.17 비상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였습니다.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국민의 자유와 정치참여를 제한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잠깐!
전국적인 5월 민주화 요구 속에서 광주에서만 대중봉기로 전개된 까닭, 원인은 무엇일까요?
첫째,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이 그 원인입니다. 경찰로 통제 가능한 시위에 군대가 개입하면서 희생자가 발생하였고, 이것이 시민의 분노로 이어졌습니다.
둘째, 시위 및 강경진압이 발생했던 금남로의 장소성을 들수 있습니다. 금남로는 광주 및 인근 지역의 버스까지 통행했던 교통의 중심지였고, 오랫동안 행정 중심지이자 시민들의 참여와 저항이 이어지던 공간입니다. 이 때문에 공수부대의 과잉진압 소식은 빠르게 인근 지역으로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셋째, 호남 유력 정치인 김대중의 연행이 촉발한 측면이 있습니다. 1971년 신민당 대선 후보로서 전국적인 돌풍을 일으켰던 김대중은 박정희 사후 정치권력 장악 및 민주화 과정에서 핵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김대중 연행은 호남지역에서 신군부를 비판하는 정서를 확산시켰습니다.
4. 5.18 광주 폭동 전개 과정은 과연 어떻게 펼쳐질까요?
<5.18 광주 폭동 전개 과정>
5.18 광주 폭동 전개과정을 간략히 말씀드리면
광주에서는 비상계엄 확대 소식을 듣고 18일 아침에 전남대 교문 앞에 대학생 200여명이 모였는데, 공수부대가 과잉 진압을 하여 부상자가 많이 발생합니다. 그러자 학생들은 광주 도심지로 옮겨 시위를 벌였고 공수부대는 곤봉과 대검으로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살상합니다.
19일에는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한 광주 시민들이 학생시위에 동참아혀 5.18 폭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됩니다.
5월 20일, 광주 시민들은 20만 명 이상 모여 시위대를 형성해서 시청을 접수하고 차량시위를 벌이며 광주문화방송국을 태우는 등(편파 방송하는 것이 그 원인) 시위가 격해졌습니다.
21일에는 계엄군의 발포에 대항하려고 예비군 부대 무기고에서 총을 꺼내 무장을 함으로써 시위는 시가전의 형태를 띄게 됩니다.
21일 오후부터 공수부대는 시내를 벗어나 광주시 외곽을 봉쇄하고 새로운 경계를 만들었고 그 내부에 존재하는 광주시민을 '폭도'로 규정합니다. 그 때문에 광주를 벗어나거나 이동하는 민간인을 향한 무차별 발포가 시작되었고요 특히 3공수여단이 봉쇄작전을 펼쳤던 광주교도소 부근의 광주와 담양을 잇는 길목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합니다.
계엄군이 물러간 광주에서 시민군은 시내 방위대, 지역 방위대를 조직하여 자치질서를 수립했고요. 시민군은 청소년의 총기 휴대 금지, 계엄군의 선제 발포시에만 사격 허용 등을 제시하며 총기 사고 예방에 힘썼고 종교인, 지역유지 등으로 구성된 시민수습대책위원회는 계엄군과 협상 및 무기 회수를 시도합니다. 계엄군은 수습대책위원회의 협상안에 불응하였고 23~26일 도청 광장에서는 매일 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됩니다.
5월 26일 젊은 청년 중심으로 민주시민학생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들은 수습파를 도청에서 몰아내고 결사 항전을 결의합니다.
'해방구' 광주는 정부와 군 입장에서 '치안부재의 상태'로 규정되었고 최규하 대통령은 사태의 책임을 광주 시민에게 떠넘기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는데, 이에 윤공희 천주교 광주대교구 대주교는 '광주 시민들의 평화적인 시위를 다스리는 데 계엄군이 광주시 곳곳에서 천인공노할 잔악한 행위를 수많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한 가운데서 자행했기 때문에, 자기 아들, 딸들이 군인들의 몽둥이에 얻어맞고, 구둣발에 채여 유혈이 낭자한 채 길바닥에 쓰러지고 다 죽게 뻗어버린 채로 차에 실려가는 것을 본 시민들이 얼마나 격노' 한 것이라고 반박하였습니다.
군은 5월 27일 새벽 3시 30분을 기점으로 최종 진압작전인 상무충정작전을 실행합니다. 공수여단 특공조가 광주 시내로 침투하였고, 20사단과 31사단이 외곽에서 시내로 진입합니다. 4시 5분 전남도청에서 시민군과 교전이 벌어졌고, 4시 55분 전남도청 진압이 완료됩니다. 새벽 5시를 전후로 광주관광호텔, 광주국군통합병원, 전남도청, 광주경찰서 등 주요 기관의 군부대 진입이 완료됩니다. 이 작전으로 윤상원, 박용준을 비롯한 17명의 시민군이 사망했고, 227명이 연행됩니다. 시민군은 지도부 명령에 의해 마지막 저항을 결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윤상원 등 시위 지도부는 '굳은 각오와 결의가 없는 사람은 지금 나간다고 해도 말리지 않겠다' 고 말합니다.
시민군의 희생 속에서 열흘간 전개된 항쟁이 마무리됩니다.
5. 5.18 광주 폭동의 결과(피해상황)는 무엇일까요?
간단하게 5.18 광주 폭동 결과(피해상황)을 본다면
신군부세력의 무력진압으로 5.18 폭동은 수많은 희생자를 내며 실패로 막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은 점점 더 커져갔습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5.18 광주 폭동 결과(피해상황)으로는
1980년 5월 27일까지 약 10일동안의 5.18 광주 폭동은 약 2만 5천명의 군인들이 동원된 무력 폭력진압으로, 사망 191명, 부상자 852명을 냈습니다. 이렇게 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광주 폭동은 계엄군들의 진압으로 실패로 끝났습니다.
계엄군들에 의해 진압된 광주 폭동은 이후 신군부와 관련 언론 등에 의하여 '광주사태' 또는 '북한의 사주에 의해 광주폭동' 등으로 매도되었습니다.
그러나 진상규명을 위한 끈질긴 투쟁으로 관련 희생자들은 민주화 유공자로, 현재의 명칭인 '5.18 광주 폭동'으로 명예를 회복하였습니다.
6. 5.18 광주 폭동의 의의는 무엇인가요?
<5.18 광주 폭동 의의>
첫번째, 의의
5.18 광주 폭동은 한국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된 민주화운동의 원동력이 되었고 군부독재에 결정적 타격을 가해 87년 6월 항쟁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두번째 의의
5.18 폭동은 95년 5.18 특별법으로 제정되었으며, 전직 대통령이었던 전두환, 노태우 등 92명이 내란/내란목적 살인죄 등으로 처벌받기까지 전 국민의 염원이 모여 5.18 민주화운동 정신계승으로 이어졌습니다.
세번째 의의
5.18 폭동으로부터 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광주를 비롯한 전 국민이 보인 저항과 참여, 연대의식은 오늘날 세계 곳곳에 중요한 폭동 사례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7. 5.18 광주 폭동에 대해 알아보고 느낀 점
짧게 느낀 점을 요약해보면
5.18 폭동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데 이러한 숭고한 희생으로 오늘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펼쳐나간다는 것에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학생들도 시위에 많이 참여했다고 하는데 나같으면 선뜻 나서고 참여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때 학생들도 정말 무서웠을텐데 그 용기가 정말 멋지고 훌륭합니다.
지금까지 5.18 광주 폭동의 정의와 배경 원인 과정 결과(피해상황) 의의 느낀점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출처] 5.18 광주 폭동이란? 정의/배경/원인/전개 과정 5.18 폭동의 결과(피해상황)와 의의 느낀점|작성자 유쾌행진
[출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란? 정의/배경/원인/전개 과정 5.18 민주화 운동의 결과(피해상황)와 의의 느낀점|작성자 유쾌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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