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설교 시리즈 3 – 초막절과 예수님 (대양교회 새벽기도회 20140910)
본문 – 요한복음 7장37절 ~ 44절
오늘도 이른 아침, 모든 일에 앞서 주님의 전에 기도하러 나아온 우리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제가 월요일부터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특별히 추석이라는 민족의 명절을 맞이하여 연휴기간 동안 요한복음 속에 기록된 유대 절기와 관련된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첫날 월요일은 안식일에 대하여, 어제는 유월절에 대하여 함께 살펴보았습니다.오늘은 마지막으로 초막절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초막절은 유월절, 칠칠절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역사적 3대 절기 가운데 하나로 모세의 율법에 자세한 규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초막절은 수장절, 혹은 장막절이라고도 불립니다. 이 절기가 장막절로도 불리는 것은 이 절기 기간 동안에 일 주일 간 집을 떠나서 나뭇가지로 만든 초막, 즉 장막에 들어가서 생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담에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하고, 서양 속담에도 there’s no place like home 즉 세상에 집보다 좋은 곳이 없다 란 것이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집을 떠나 일부러 일 주일씩이나 일부러 고생을 하는 것은 바로 광야에서의 장막 생활을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출애굽 이후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간 광야 생활을 경험하였습니다. 출애굽기와 민수기, 신명기에도 기록된 이 힘들었던 광야 생활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시며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돌보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였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 훈련하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후에 유대인들은 이 광야 생활을 기념하고 이 떄의 가르침을 잊지 않기 위하여 초막절을 함께 지켰던 것입니다.
또한 초막절은 수장절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는데, 이것은 초막절이 유대 민족의 절기상 추수감사제인 동시에 신년제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초막절은 모든 절기 중에서 우리의 추석과 가장 비슷한 절기였으리라 생각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추수를 함께 도우며, 일년의 결실을 거두어들이고 일주일간 단체로 텐트 야영을 하는 기간이니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도 아마 초막절을 손꼽아 기다리며 좋아했을 것으로 저는 생각이 되었습니다. 아마 이 절기는 백성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으며, 아마 가장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포함해서, 요한복음 7장, 8장, 9장이 모두 이 초막절을 배경으로 쓰여진 기록들입니다. 37절을 보시면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여수께서 서서 외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명절이 ‘초막절’임을2절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14절 말씀을 보면 이미 절기의 중간에도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가셔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유대인들과 논쟁하신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물론, 예수님의 가족들과 형제들도 예수를 믿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했음을 성경을 읽어보시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지혜인 그리스도를 알 수 없습니다. 동일하게, 세상에 아무리 뛰어난 학자요 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신다면 절대로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먼지 같은 피조물인 한낱 인간이 어찌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늘 겸손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에 겸손하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또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온전한 진리를 담고 계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내가 가진 생각이 지나치게 확신을 가질 때 우리는 진리에서 도리어 멀어질 수 있음을 알고 더욱 겸손해야 하며, 이웃과 타인을 향한 넓은 관용의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37절에서 요한은 명절의 끝 날을 큰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레위기는 큰 날, 곧 초막절의 끝 날이 여호와 앞에서 지극히 거룩한 날이라고 기록합니다. 모세의 율법이 기록된 민수기 29장에는 이 날에 여호와께 드렸던 제사의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느헤미야서 8장18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위대한 학사 에스라 또한 레위기의 가르침을 따라 이레 동안 절기를 지키며 율법책을 낭독하였고, 명절의 여덟째 날에 성회를 열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성경에 기록된 규례와 함께 어떤 중요한 전통이 함께 시행되었다고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초막절 명절 동안에 성전의 제사장들이 물을 실로암 못에서 길어다가 성전으로 가지고 가서 메일 아침에 드리는 번제(상번제)를 드릴 때 포도주를 여호와 앞에 드리는 전제의 격식을 따라 번제단에 바치는 전통이었습니다. 학자들은 이 풍습이 초막절에 뒤이어 시작되는 우기와 관련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살아가는 가나안 땅은 성경에 기록되기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하지만, 비가 적절하게 내리지 않으면 황무지와 다를 바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은 여호와의 은혜 없이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땅인 것입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달라는 대표적인 성경의 기도와 다른 비와 관련된 수많은 기도문들이 이런 문화적 배경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아마‘우물의 노래’로 불리는 이사야 12장도 이 전통적인 규례와 관련되어 낭독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시문은 문학적으로도 아주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제가 읽어드릴 테니 귀를 기울여 들어보세요.
1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2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3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4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
5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
6 시온의 주민아 소리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
아멘.
어떻습니까? 참 아름답지요? 우리의 인생의 화복 또한 모두 여호와의 손에 달려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주님의 자비와 긍휼이 아니면 우리는 한 순간도 진정한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비를 바라며 여호와께 기도했던 초막절 명절의 마지막 날 사람들 앞에 서서 이렇게 외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예수께서는 비를 기원하는 유대인들에게 자신만이 참된 생수의 근원이심을 선포하십니다. 당시로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얼마나 놀라운 주장이었을지 느껴지시나요? 갈릴리 시골 출신의 선지자가 갑자기 나아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 쟁론, 큰 분쟁이 일어났다고 요한복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살펴보면,사람들의 이해와 관계없이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신지 스스로 정확하게, 분명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제가 이틀 전에 요한복음 안에 7가지 이적이 각각의 주제별로 아주 짜임새 있게 정리되어 있다고 설명을 드렸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밝히시는 예수님의 자기 선포 또한 7가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 이다 라고 표현되는 구절들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떡이요, 세상의 빛이요, 양의 문이요, 선한 목자요, 부활과 생명이요, 길과 진리와 생명이요,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중에 초막절과 관련된 것은 나는 세상의 빛이란 말씀으로 요한복음 8장에 기록되어 있으며, 요한복음 9장에 실로암 못에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이적으로서 더욱 극적으로 표현됩니다.
우리 중 누구도 하루 앞의 일을 헤아릴 수 없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나아갈 바를 제대로 알고 있다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날마다 우리 자신의 욕심의 노예가 될 때가 많습니다. 돈 때문에 걱정하고, 건강 때문에 염려하고 좀 더 편안하고 안정된 삶을 살고자 애씁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욕심을 따라 행동할 때에 우리 영혼의 눈은 오히려 가리워집니다. 인생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볼 수 없게 됩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도리어 엉뚱한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럴 때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상처를 주고 후회하게 됩니다. 고통 받고 눈물 흘리는 이웃을 살필 수 있는 눈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예수 없는 인생, 자신만 아는 인생은 보아도 보는 것이 아니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눈 뜨고도 보지 못하는, 실상은 장님과 같은, 참으로 아무런 의미 없는 허망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