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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면 대곡마을에는 신라 고찰인 화방사가 있다. 산닥나무 자생지는 사찰 안 야산에 있다. 산닥나무의 나무껍질은 한지의 고급 인쇄지를 만드는 원료가 될 뿐아니라 판지의 주재료이다. 이러한 나무가 자생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옛날부터 한지를 남해에서 생산하였다는 증거물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소나무 숲과 무성한 다른 나무들 때문에 자라지 못하고 있는 것을 숲이 없는 양지 바른 화방사 종각 뒤쪽 20여평되는 곳에 옮겨 심어 관리하고 있다. 산닥나무는 팥꽃나무과에 속하는 낙엽관목으로 키는 1-2m정도. 경기도 강화 전등사 부근 산과 이곳에 자생지를 이루고 있다. 일본에도 규슈지방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기록을 보면, 산닥나무는 일본에서 건너왔고 강화도, 진도, 완도, 남해도, 거제도, 창녕 등지에 심었다. 산닥나무는 전체에 털이 없고 잔 가지는 가늘고 녹색이며, 위쪽을 향하여 자라며 가지가 갈라진다. 몸통은 둥글고 잎은 아주 부드럽고 가지의 끝은 뾰쪽하다. 잎의 길이는 2.5-4.5cm, 너비는 1-2.5cm 이고 뒷면은 백색을 띤다. 8-9월경에 잔가지의 끝쪽에 10개 내외의 꽃이 군데군데 모여 핀다. 꽃받침은 황색이고 꽃받침통의 길이가 5-7mm. 과실은 달걀모양인 타원형인데 길이가 약5mm 정도이다. 화방사의 산닥나무는 점점 수량이 줄어들어 천연기념물로 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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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고현 느티나무 |
지정번호 : 천연기념물 제 276호
지정일자 : 1982. 11. 4
소재지 : 남해군 고현면 갈화리 733
시대 : 약 500여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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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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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면 소재지인 탑동마을에서 서면 방향 지방도 도로를 따라 약4km 가면 갈화마을이 나타난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왼쪽 들판 한가운데에 키 큰 느티나무가 있다. 높이는 17.5m, 수관은 동서가 27m, 남북이 25m나 되며 밑동 지름이 10.6m, 사람 가슴 높이의 둘레는 9.3m나 된다. 몸통에는 큰 공동(구멍)이 2개나 있다. 수령은 500년이 넘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5백살이 넘은 나무에게 어찌 사연이 없으랴? 약 500년 전에 마을 촌장이면서 논과 밭을 많이 가지고 있는 유동지(劉同志)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는 자기 논의 한 가운데이고 옆에는 냇물이 흐르는 좋은 장소인 이 곳에 나무를 심고 여름 농사철에는 그늘 밑에서 휴식을 했다고 한다. 나무가 자라면서 나무 밑에서 지친 몸을 뉘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났고, 마을의 평안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 여름철이면 이 나무 밑에서 마을 회의도 개최하고 좌상, 공원, 총각, 대방 등 마을 임원을 선출하거나 명절에는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장만하여 마을의 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푸는 등 마을공동체의 구심점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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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방조어부림 |
지정번호 : 천연기념물 제 150호
지정일자 : 1959. 1. 23
소재지 :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
시대 : 약 350여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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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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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조면 초전마을 삼거리에서 국도 3호선은 시작된다. 3번 국도라고 하는데, 경관이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국도를 따라 바다의 절경을 보며 감탄사를 연발하다가 물건마을에 이르면 길게 타원형을 그리는 아름다운 숲이 내려다보인다. 10,000여 그루의 나무가 자라는 남해군 생태계의 보고, 물건방조어부림이다. 고기들이 숲 그늘을 찾아 해안으로 오기 때문에 '고기를 불러들이는 숲'이라는 뜻으로 붙은 말이 어부림이다. 나무 높이는 10-15m정도. 위층을 차지하는 나무는 팽나무, 푸조나무, 상수리나무, 참느릅나무, 말채나무, 느티나무, 이팝나무, 무환자나무, 아카시아나무 등 겨울철에 잎이 떨어지는 나무와 상록수인 후박나무 등이고, 산딸나무, 때죽나무, 까마귀베개, 소태나무, 구지봉나무 등의 낙엽수와 상록수인 무른나무가 뒤를 따른다. 모감주나무, 광대싸리, 길마가지나무, 까마귀밥여름나무, 감주나무, 광대싸리, 길마가지나무, 까마귀밥여름나무, 백동백나무, 생강나무, 검양옻나무, 찔레나무, 초피나무, 갈매나무, 윤노리나무, 쥐똥나무, 누리장나무, 붉나무, 보리수나무, 예덕나무, 두릅나무, 병꽃나무, 화살나무 등의 낙엽관목류는 밑을 차지하고 있다. 그 사이에는 인동덩굴, 담쟁이덩굴, 새머루, 줄딸기, 청미래덩굴, 청가시덩굴, 배풍등, 댕댕이덩굴, 복분자, 딸기, 계요 등 노박등굴과 개머루 등 겨울동안 잎이 떨어지는 덩굴식물과 마삭덩굴, 송악 등 상록성 덩굴식물들이 이리저리 서로 엉키어 있다. 고목은 약2,000주이고 하목은 8,000주 가량된다. 이곳에 방풍림을 조성한 것은 350여년전. 당시 마을 사람들은 바람이나 해일 등의 피해를 막고 고기들이 많이 모여들도록 하기 위해 숲을 조성했다. 마을에는 이 숲을 해치면 마을이 크게 망한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전주 이씨 무림군의 후손들이 이 곳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하여 마을 호수가 430호까지 이르렀다. 19세기 말엽. 이 숲의 일부를 벌채한 다음 폭풍우를 만나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그 다음부터는 이 숲을 해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5원씩(백미 5말에 해당)의 벌금을 바치기로 약속하고 마을사람 전체가 합심하여 지켜왔다. 길게 늘어선 방풍림을 따라 물건 몽돌해변이 이어져 있어 많은 사람들이 물건마을을 찾아오지만 숲은 잘 보존되고 있다. 물건 해변은 마을과 숲 그리고 바다가 함께 어울려 낭만을 찾는 연인들에게는 그만인 데이트 코스. 수령 350년이 넘는 나무들이 해안을 따라 계절이 변화할 때마다 각기 다른 풍경을 이루고 있는 모습은 감탄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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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조상록수림 |
지정번호 : 천연기념물 제 29호
지정일자 : 1962. 12. 3
소재지 : 남해군 미조면 미조리 산121
시대 : 약 370여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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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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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도 숲속에서는 햇빛을 보기 어렵다는 미조 상록수림은 마을의 해풍을 막기 위한 방풍림으로 조성된 어부림이다. 낙엽수 밑으로 후박나무, 돈나무, 사스레피나무, 광나무, 볼레나무, 메밀잣밤나무가 자라고 있고 모람과 송악이 이에 뒤질세라 나무를 따라 크고 있다. 바닥에는 자금우가 많다. 낙엽활엽수로는 느티나무, 팽나무, 말채나무, 소사나무, 돌백나무, 쉬나무, 이팝나무, 쇠물푸레, 때죽굴피나무, 팥배나무, 참느릅과 졸참나무가 자라고 사이사이에 조룩싸리, 생강나무, 찔레나무, 보리수나무, 예덕나무, 천선과 작살나무, 쥐똥나무, 붉나무, 검양옻나무, 윤노리나무, 화살나무, 누리장나무, 초피나무등이 자라고 있다. 또한 댕댕이덩굴, 칡, 개머루 등이 제멋대로 이리 저리 서로 엉키어 있다. 초목식물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맥문쓴侍霓비와 도깨비고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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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항 왕후박나무 |
지정번호 : 천연기념물 제 299호
지정일자 : 1982. 11. 4
소재지 : 남해군 창선면 대벽리 699-1
시대 : 약 500여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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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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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선면 단항마을에 영검있는 나무 한 그루가 500여년 넘게 의연한 모습으로 서 있다. 천연기념물 제299호 왕후박나무. 신상 명세는 높이 9.5m. 밑동에서부터 뻗어나온 가지가 무려 11개. 한쪽에서 다른쪽까지 가지 길이가 21m나 되는 마치 우산을 펼쳐 놓은 것 같은 장방형의 우아한 자태가 기품이 넘친다. 옛날 단항마을 어부 한사람이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큰 고기 한마리를 잡았는데 뱃속에서 씨앗이 나와 뜰에 심었더니 하루가 다르게 나무가 자랐다. 주민들은 이 나무를 동제나무라 칭하며 해마다 음력 섣달 그믐날 정성스레 동제를 올리며 풍년 풍어를 빌었다. 왕후박나무에 얽힌 내력이다. 단항마을 주민들이 더위 걱정 없이 여름을 나는 곳. 농사 정보가 교환되고 세상사가 있고, 더러 말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해 기울기 일러 막걸리 한사발에 다시 웃음사래 피는 곳. 노동의 피로를 씻는 쉼터요, 마을문화가 꽃피는 정자며 농사정보센터 이며 마을이란 공동체를 밀고 가는 힘의 원천도 정자나무에서 나온다. 화가 손장섭이 있다. 일찍이 현실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해왔다. 광주의 비극, 시위현장, 철책선 등의 주제가 화폭을 장식했다. 그러던 그의 예술에 이제 이 땅의 신목들만이 무성하게 들어찼다. 시각예술은 간단히 정의하면 상징이다. 그것은 하나의 현실은 아니지만 수많은 현실이 축적돼 한 그릇의 탕약으로 쥐어짜진 삶과 역사의 이미지다. 상징성이 뛰어날수록 그 예술은 뛰어나다. 손장섭은 이 부분에 깊이 착목했다. 그의 그림에 '남해 창선 왕후박나무'가 나온다. 그가 그린 신목 들은 민중들의 상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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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무공전몰유허 |
지정번호 : 사적 제 232호
지정일자 : 1973. 6. 11
소재지 :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산125
시대 :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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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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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락사는 이순신 장군의 유해가 맨 먼저 육지에 안치된 곳이다. 그 후 충무공의 유해는 충렬사를 거쳐 1599년 지금의 충남 아산에 모셔졌고, 관음포는 잊혀지는 듯 했다. 그러다가 충무공이 순국한지 234년이 지난 1832년, 이순신의 8대손인 통제사 이항권(李恒權)이 충무공의 진충보국(盡忠報國)의 뜻을 기리는 유허비를 세웠다. 이락사 못미쳐 밀양박씨 선산 아래에는 충무공이 탔다는 말 무덤이 있다. 주인이 전사한 관음포를 내려다보며 누워 있는 말 무덤은 묘등에 돌이 박힌 상태로 있다. 향토사학자들은 방월마을 주민들의 구전과 인근 덕신마을이 역원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이순신장군이 탔던 말무덤이라고 주장한다. 이순신 장군이 떨어진 곳이라는 뜻의 '이락사'는 명칭을 두고 논란이 많다. 의미가 좋지 않으니 관음사로 고쳐 쓰자는 주장도 있지만 수백년이 흘렀고 국가에서 정한 명칭이니 그대로 쓰자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절개를 상징하는 곧은 대와 사철 푸른 육송이 비장감을 들게 하는 사당 오른편으로 난 솔밭길은 불어오는 바람과 산새들이 우짖고 있는 역사 산책로로는 그만이다. 산책로의 끝은 이순신 장군이 전투를 하던 바다. 관음포가 한눈에 들어오는 첨망대에 앉아 잠시 쉬는 것이 좋다. 이런 풍광 좋은 곳에 누각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급히 사당만 보지말고 한 번 걸어가 보자. 첨망대 아래로 내려가면 임진란 최대의 격전지였던 노량해전을 기록한 노량해전도를 보며 충무공의 충절을 되새겨 보자. 바다 건너 화동화력 굴뚝은 뭉게구름 같은 연기를 내뿜고, 맨살을 드러낸 갯벌에는 김 양식장 뒤로 바지락을 잡는 아낙들이 엎드려 있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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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충렬사 |
지정번호 : 사적 제 233호
지정일자 : 1973. 6. 11
소재지 :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350
시대 :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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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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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는 노량해전의 치열했던 전투가 떠오르고, 노량 앞바다의 푸른 물결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노량마을 해안 언덕배기 울창한 숲 속에 자리잡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거룩한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이 충무공은 관음포 노량해전에서 순국하고 아산으로 운구를 옮기기 전에 3개월간 이곳에 안치했다. 충무공의 순국을 슬프게 느끼던 남해사람 김여빈과 고승후가 이 충무공이 순국한지 35년이 지난 1633년에 초가집 한 칸을 사당으로 건립하고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되자 남해현령 이정건이 사당 앞에 충민공비를 세웠다. 이순신장군이 순국한지 45년 후인 1643년에 이순신 장군에게 충무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58년. 어사 민정중이 통제사 정익에게 사당을 신축하도록 해서 모습을 갖추었다. 현재 사당 앞에 있는 "유명조선국삼도통제사 증시충무이공 묘비"는 1660년에 숭록대부 의정부 우찬성 송시열이 글을 짓고 정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송준길이 쓴 것이다. 현종 때에는 임금이 직접 쓴 충렬사 현판이 하사되었다. 이렇게 조정에서는 이곳 남해 충렬사를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인정하였고 세월은 흘러 순국 195년이 지난 후인 1793년에 이곳에 충무공비를 세우고 충민공비를 땅속에 묻었다. 충무공은 이 해에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남해 충렬사는 그 뒤에도 계속 성역화사업이 추진되었으나 고종8년인 1871년에 향사, 서원 철폐령에 따라 사당은 허물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1922년에 윤기섭과 고준홍이 자기집 재산으로 사우3칸을 새로 지어 제사를 지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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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량상동정마애비 |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 27호
지정일자 : 1972. 2. 12
소재지 : 남해군 남해읍 선소리 192-9
시대 :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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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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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바위에 글자나 그림을 새긴 비'를 '마애비'라고 한다. 선소마을의 마애비는 장량상이란 장수가 새긴 것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나는 선조31년(1598),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의 뒷 이야기다. 대패한 일본군 패잔병 500여명이 관음포에서 함선을 버리고 육지로 기어 올라와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던 남해읍 선소리 왜성으로 갔다. 일본 잔여병이 있는 줄 알고 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잔여병이 없자 민가에 있는 선박을 빼앗아 타고 일본으로 도주한다. 명나라 군사는 왜성에 일본 패잔병이 있는 줄 알고 찾아와 보니 아무도 없자 전투가 끝났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해안가에 있는 자연석에 글을 새겨 두게 된다. 이곳은 동쪽을 정벌하고 자연석에 글을 새겼다고 해서 '동정마애비'인 것이다. 선조 32년(1599)에 명나라 유격대장 장량상이 조선에 원정을 와서 전쟁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다는 내용의 암각문이 새겨져 있다. 선소마을 선착장에서 뒷산 우측 해변에 있다. 마애비의 사각 테두리는 당초문(덩굴풀이 뻗어 나가는 꼴을 그린 무늬)으로 장식을 하여 매우 장엄함을 느끼게 한다. 명나라 이여송과 진린이 왜군을 무찔렀다는 전승 내용이 많아 일제 때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파괴 대상 왜구 격파 기념비' 목록에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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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리 삼층석탑 |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 73호
지정일자 : 1974. 2. 16
소재지 : 남해군 이동면 다정리 196-1
시대 : 통일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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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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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읍을 지나 19번 국도를 따라 4km 쯤 가면 고즈넉한 들판에 자리잡은 다정마을이 나온다. 마을 앞 들판 윗 쪽 논두렁에 조그마한 2층탑이 보이는데 이 탑이 다정리 삼층석탑이다. 탑의 유래에 얽힌 이야기 한 토막. 원효대사가 신라 신문왕 때 이곳에 다천사라는 사찰을 창건하고 3층탑을 건립하였으나 다천사 보다 명지인 용문사가 있어서 사찰을 용문사에 합하고 탑만이 남게 되었다고 한다. 탑이 있다고 하여 다천마을을 '탑골'이라 부르기도 한다. 탑 뒷편에는 절터로 보이는 곳에 석축이 약간 남아 있다. 탑이 있었던 들과 북쪽 등을 화정들 혹은 화정 등으로 부르는데, 이를 근거로 화정사지 터가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하기도 한다. 용문사와 합한 후로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남아 있는 탑에 불공을 드렸다고 하며, 현재에도 간혹 신심깊은 불자들이 찾아오고 있다. 원래 이 탑은 삼층석탑으로 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2층의 탑신부만 남아 있고 그 위에 3개의 보주(탑이나 석등 등 맨 꼭대기에 있는 구슬모양의 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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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사 대웅전 |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 85호
지정일자 : 1974. 2. 16
소재지 :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868
시대 :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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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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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강만을 굽어보는 호구산 산자락에 깊이 파묻힌 용문사는 신라 때 원효대사가 금산에 보광사를 짓고 암자를 이곳에 둔 것으로 사찰 연기설화가 시작된다. "세월이 지나 보광사가 없어지고 조선 현종 원년(1660)에 승려 백월당이 용문사를 현 위치로 정하고 참선할 수 있는 집을 1661년에 준공했다. 그리고 6년 뒤 1666년에 일향스님이 대웅전을 창건했고 지혜스님이 다듬고 윤택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웅전 지붕은 팔작지붕(지붕 양쪽이 八자와 같이 생긴 것을 말함)이고 정면 3칸 측면 3칸인 목조 기와 절집이다. 작은 절집이지만 이중부연(두겹으로 긴 서까래 끝에 덧얹어 높이 솟게 만든 서까래)으로 안전하게 자리를 잡고 장엄하고 무게가 있도록 했다. 내부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고 뒤쪽으로 불단을 만들어 부처님을 모셨다. 부처님 머리 위에는 빛나고 엄숙하게 보이도록 관이 만들어져 있다. 대웅전에는 사찰이름에 걸맞게 용머리 조각이 많이 있어 더욱 웅장하고 화려함을 느낄 수 있다. 현재에 있는 대웅전은 숙종29년(1703)에 성화스님이 낡은 대웅전을 고쳐 새롭게 지은 것이다. 용문사는 호국사찰로 많은 사부대중이 모여든 절이다. 용문사에는 법회 때 사용하는 괘불탱화(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법한 영취산의 모임을 그린 영산회상도)가 있고 괘불탱화를 거는 당간지주가 대웅전 앞에 있다. 사찰 주위는 사찰을 보호라도 하듯 자연 성벽과 같이 산이 둘러싸고 있다. 맑은 물이 목탁소리와 함께 흐르는 계곡을 끼고 있어 여름이면 시원한 곳을 찾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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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향교 |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 222호
지정일자 : 1983. 7. 20
소재지 : 남해군 남해읍 북변리 586
시대 :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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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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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읍 북변동에 있는 남해향교는 1450년 당시 남해현령을 지낸 하신이 설립했다. 전국의 향교는 고려 인종 때 이미 개설하여 향례와 교육기관으로 활용하였고 조선초에 각도 안찰사에게 명령을 내려서 군, 현에까지 확대했다. 면 이하 지역에는 서당이 있어 기초 교육을 맡았다. 서당 교육이 끝나면 향교로 진학하여 사서삼경을 공부했다. 현령이 있는 관청과 가까운 봉강산 아래에 대성전(성현의 위패를 모신 곳)과 명륜당(교육을 받는 교실)이 앞뒤로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는데, 임진년 난리를 겪으면서 건물이 모두 불타 없어 졌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나라와 백성들의 어려움이 계속되어 70여년을 방치상태로 있다가 1669년 2월에 대성전을 중수했고 1678년 4월에 명륜당을 중수했다. 그 뒤 1892년 4월에 대성전을, 1917년에 명륜당을 지금 자리에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해향교는 대성전과 동무, 서무, 명륜당과 동재, 서재, 외삼문, 내삼문, 도덕동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5성현과, 송나라 2현과 최치원 선생을 비롯한 동국18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매년 음력 2월 상정일(나라 또는 개인의 집에서 제사를 지내는 날)과 8월 상정일에는 석전대제를 엄숙하게 봉행하고 있다. 오늘날 윤리사상이 퇴폐하고 도덕정신이 땅에 떨어졌다고 한탄하는 소리가 높아가는 것은 향교 유림들의 고리타분한 목소리만이 아니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모두의 걱정이다. 날이면 날마다 인륜을 팽개친 범죄들이 신문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질서가 무너진 결과물 들이다. 공동체를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이면서 가장 중요한 단위인 가족부터 무너지고 있다. 새로운 세대들이 살아갈 21세기를 생각하면 기성세대들이 물려주어야 할 민족문화와 정신적 유산은 참으로 중요하다. 남해향교의 유림들은 인간교화의 바탕인 인성과 덕성교육을 통해 도덕사회를 만들기 위한 정신문화를 보급하기 위해 오늘도 열심이다. 여름과 겨울 방학을 이용해 충효교실을 14년째 열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활동에 속할 것이다. 석전과 문묘 남해향교 대성전에서는 봄, 가을 두 차례 「석전」행사를 치른다. 석전은 공자 탄생 이전부터 있었던 「학교의 제사」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각급 학교에서 학문에 정진하자는 결의를 다지면서 스승에 대한 공경심을 표현하는 축제행사였던 셈이다. 대성전 안에는 문묘가 있다. 문묘에는 공자를 비롯한 안자 증자 자사 맹자 그리고 설총, 최치원, 정몽주, 조광조, 이퇴계, 이율곡, 조헌 등 18현인들의 신위도 함께 모셔져 있다. 이를테면 공자 한 사람만을 숭배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훌륭한 문인들도 함께 모시고 있는 것이다. 자기 나라의 훌륭한 학자이며 동시에 지도자의 위패를 문묘에 모시고 스승의 예를 올리는 곳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전통이다. 즉 문묘는 유교의 단순한 종교의식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인재를 양성하는 학교 체제인 것이다. 석전은 문묘에 봉안된 성현을 스승으로 삼아 그들의 교학정신을 본받아 학문의 정진을 결의하는 학교의 예식이다. 또한 문묘는 문민정치의 상징이기도 했다. 조선에서 새 임금이 등극할 때, 또는 세자가 새로이 책봉되었을 때는 즉시 문묘를 찾아 엎드려 고유했던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한국적 전통과 문화를 세계에 빛내고자 한다면, 그리고 전통문화의 창달을 통하여 민족정기를 회복하려 한다면, 이러한 교육 전통을 적극 선양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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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사 석불 |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 138호
지정일자 : 1974. 12. 28
소재지 :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868
시대 : 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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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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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사 경내에 들어서면 돌로 만든 보살이 앉은 자세로 사부대중을 맞고 있다. 이 석불은 본래 돌로 되어 있었으나 누군가가 회를 발라 하얀 모습으로 변했다. 손에 연꽃을 들고 자애롭고 온화하면서도 존엄한 표정을 하고 있다. 이 석불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약 30년 뒤에 용문사를 중건할 때 용문사 마당 땅 밑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한다. 가슴으로는 목, 팔등에 두르는 구슬을 꿴 장식품이 둘러져 있고 관을 쓰고 있어 고려초나 고려 중엽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불상은 단칸으로 된 맞배지붕 목조 기와집에 앉아 있다. 신도들은 이곳에서 정성을 모아 기도를 드린다. 바로 옆에는 명부전이 있다. 용문사는 죽고 난 후에도 극락세계를 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지장보살을 모시는 지장도량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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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은집책판 |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 172호
지정일자 : 1979. 12. 29
소재지 :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868(용문사 내)
시대 :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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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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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사 대웅전 불상 밑에 보관하고 있는, 모두 52매로 된 이 목판은 촌은 유희경 선생의 행적과 시가 수록되어 있다. 촌은선생, 좀 생소하다. 한번 알아보기로 하자. 촌은은 조선 인조 때 시인이다. 본관은 강화, 자는 응길 호는 촌은이라 했다. 그는 한시에 능하였고, 특별히 상례법에 능통하여 나라의 큰 상(喪)이나, 관리나 사대부 집에서 초상을 당했을 때 집례를 맡아 진행하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선생은 당시 집 뒤에 침류대라는 별채를 지어 놓고 천한 신분을 가지고 있는 백대붕 등과 시를 짓고 같이 지내면서 '풍월향도'라는 모임을 조직했다. 이 모임에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까지 참여하였다고 전한다. 촌은의 시는 한가롭고 담담하여 당나라 시에 가까웠다. 훗날 국가에 헌신한 아들 일민 덕분에 자헌대부 한성판윤으로 추증되었다. 촌은의 저서로는 촌은집과 상례초가 전한다. 한시집 책판은 본래 용문사에 있던 것이 아닌데, 촌은의 증손이 되는 유태웅이 호남지방의 만호(종4품의 관리)로 재직하면서 증조의 시집 3권3책으로 된 시집을 52매의 목판으로 인쇄활자로 조각하여 이동면 화계리에 있는 곡포보성과 용문사에 보관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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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암전 삼층석탑 |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 74호
지정일자 : 1974. 2. 16
소재지 :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산2065
시대 : 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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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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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금산 상봉에 위치하고 있는 보리암 앞에 상주해수욕장을 바라보고 서 있는 탑. 이 석탑은 여러 가지 전설과 얘기를 남기고 있다. 김수로왕비 허태후가 인도에 갔다가 돌아올 때 풍파를 만나 건너오지를 못했다. 그런데, 허태후가 탄 배에 파사석(인도에만 있는 석재)을 싣고 오니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건너오게 된 것이다. 이 돌을 가지고 원효대사가 보리암 앞에 세웠다고 한다. 재질은 화강암으로 상륜부 이상은 파손이 약간 되었으나 후에 복원되었다. 석탑은 1층부터 3층 옥개석(탑의 맨 위쪽에 있는 덮게 돌)까지 높이는 1.8m이고 1층 한쪽의 길이는 1.2m이다. 3층 탑신에는 우주(隅住)가 새겨져 있고, 상륜부(相輪部)에는 귀한 구슬 모양의 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보리암 삼층석탑 앞에 서면 남해 금산의 선경(仙境)과 해수관음상(海水觀音像)의 미소도 함께 감상할 수 있고, 뒤로는 상주해수욕장이 한 눈에 들어오는 다도해의 절경이 펼쳐진다. 불가사의한 일도 있다. 탑에 나침반을 놓으면 '자기 난리'가 일어나는 것이다. 즉 나침반을 놓는 곳에 따라 북쪽을 가리켜야 하는 나침반이 놓는 방향에 따라 동서남북이 모두 나타나기 때문이다. 정확히 어떤 원리로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지는 모른다. 일부 풍수학자들은 탑 아래로 우주의 지기 기운이 흐르기 때문에 방향을 못 잡는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는 탑 안에 사리가 있기 때문에, 혹은 온천수가 흐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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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선구 줄끗기 |
지정번호 : 무형문화재 제 26호
지정일자 : 2003. 6. 7
소재지 : 남해군 남면 선구리
시대 : 시대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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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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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선구줄끗기 놀이는 남해군 남면 선구리에서 해마다 정월대보름날 선구마을을 남편과 북편을 나누어서 줄끗기를 하는 전통적인 민속신앙과 놀이로서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마을 주민들은 이 놀이를 통해서 풍농과 풍어를 기원했고 해난사고의 방지와 마을의 번영을 빌었으며 또한 주민 단합을 도모 해왔다. 일제강점기의 민속문화 말살정책으로 이 놀이가 일시 중단 되었다가 1947년부터 소규모행사로 재현되어 몇 년에 한번씩 연회되다가 1989년 김찬중씨에 의해 본격적으로 재현되어 현재까지 남해군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로 정착하게 되었다. 예능보유자인 김찬중씨는 어려서부터 이 행사에 참여하였고 1993년에는 경상남도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대개의 민속놀이가 원래의 모습에서 변질되고 행사위주의 일회적인 경우가 많은데 선구줄끗기 놀이는 원형이 보존된 채로 명실상부한 정월대보름날의 세시풍속으로 해마다 연회되고 있을뿐 아니라 이 지역의 문화행사에 빠지지 않고 시연되는 전통문화로써 주민들의 생활속에 고스란히 자리 매김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남해 선구줄끗기 놀이는 지역문화재로 길이 보존될 것이며 매년 음력 대보름날이면 남면 선구마을 해변에서 행사가 재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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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장성 |
지정번호 : 기념물 제 154호
지정일자 : 1996. 3. 11
소재지 : 남해군 이동면 신전리 산115외 2필지
시대 : 고려말~조선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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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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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면 신전마을에서 시작하여 복곡-금산-내산-대지포-수장포로 연결된 남해에서 가장 긴 성이다. 남해장성은 성곽 길이가 15km나 되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남아 있는 성곽의 높이는 1-2m이고 폭은 1.5-2m이다. 30-50cm되는 자연석을 양쪽으로 겹겹이 정교하게 쌓아 올려 만들었다. 이런 축성 방법으로 보아 고려 말이나 조선초기에 쌓아 올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쉽게도 현재는 거의 훼손되고 없지만 잡목 사이로 8.7km정도 구간에서 성곽이 일부 남아 있다. 지형적 여건으로 보아 성현마을 성고개성, 화계마을 곡포성, 두곡마을 고진성, 평산마을 평산성과 연계된 외곽 방어성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곽은 삼동면 수장포와 대지포 사이는 일직선을 이루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팔(八)자형'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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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항느티나무 |
지정번호 : 기념물 제 199호
지정일자 : 1997. 12. 31
소재지 : 남해군 남면 당항리 1503-4
시대 : 약 500여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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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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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면 우형마을 앞 들판에 자리 잡은 이 느티나무의 수령은 약500년으로 전하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이 마을의 모임장소와 휴식처로 활용되고 있으며 마을의 무사태평과 풍년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내는 수호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여름철 해질 무렵이 되면 마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곳에 모여 정담을 나눈다. 느티나무는 들판과 마을사이 창고 옆에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 격전의 장소임에도 희노애락의 숱한 세월을 보내고 지금까지 버티고 서 있는 터줏대감이다. 군내 곳곳에 느티나무가 많이 있지만 이곳은 주변이 잘 정돈되어 있고 주변 경관도 좋아 활기 있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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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금산 |
지정번호 : 기념물 제 18호
지정일자 : 1974. 12. 28
소재지 :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1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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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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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이 남쪽으로 쭉 뻗어 나와 섬을 만들었다. 섬을 만들면서도 푸른 바다와 그림 같은 섬들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산도 만들었다. 기암괴석이 수를 놓고 있는 수많은 전설과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해발681m의 남해금산. 일명 소금강이라 불리기도 하는 영산이다. 금산의 첫 이름은 보광산. 보광산은 원효대사가 보광사라는 사찰을 이곳에 짓고 보광산이라 부른데서 유래한다. 그 다음 이 산의 이름을 바꾼 사람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이성계는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기도를 했다. '새 왕조를 세우고 왕이 되게 해 주십시오' 효험이 없자 마지막으로 이곳 금산을 찾아와 백일기도를 했다. '저를 왕이 되게 해 주시면 이 산을 비단으로 둘러서 보답을 하겠소' 기도가 효험이 있었는지, 그는 조선왕조를 열게 되었다. 비단을 두르려니 막막했다. 그 많은 비단을 어디서 구하겠는가? 이성계는 대신 산 이름을 비단금(錦)자를 써서 금산이라 했다. 금산에는 보리암을 비롯하여 이태조기단, 봉수대, 주세붕의 명필바위, 쌍홍문, 좌선대, 상사바위등 38경이 갖가지 옛이야기를 간직한 채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다. 애틋한 이야기가 세세손손 전해지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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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다정리 지석묘 |
지정번호 : 기념물 제 62호
지정일자 : 1983. 7. 20
소재지 : 남해군 이동면 다정리 911-5
시대 : 청동기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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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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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읍을 벗어나 19번 국도를 따라 이동면 방향으로 2km를 달리면 다정마을에 농업기술센터 건물이 보인다. 이 건물 뒷편에 15기의 지석묘군이 있다. 남해에는 모두 100여기의 지석묘가 발견되고 있어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터전을 잡고 살았음을 말해준다. 이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사회, 경제, 문화상을 추정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다정마을 지석묘는 남해에서는 가장 많고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다정리 지석묘는 남방식으로 논밭 사이에 거의 일렬상태로 배치되어 있다. 지석묘의 간격은 대개 3-4m를 유지하고 있으며 주위에는 분묘도 함께 있다. 지석묘의 개석(석실 위에 덮는 돌뚜껑)은 긴 쪽이 4m, 짧은 쪽이 2m정도로 높이는 1.3m-1.8m에 달하는 큰 바위이다. 지석묘 부근에서는 무문토기편, 마재석검 등이 가끔 발견되고 있다. 개석 아래는 지하에 냇돌 또는 관석으로 묘실을 만들고 머리 크기정도의 돌로 지석을 한 다음 그 위에 상석을 얹기 때문에 큰 바위가 땅 위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나라 지석묘의 분포는 한반도 전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대동강 유역과 전남지방에 가장 밀집된 분포를 보인다. 전남 지방은 지금까지 2천2백여 곳에서 모두 1만9천여기의 고인돌이 확인됐고 이 가운데 8백 여기가 발굴됐다. 이것은 유럽 전 지역에서 조사된 5만5천여기에 비해 단일면적 밀집되는 세계적으로 가장 많다. 한반도의 고인돌 문화는 중국의 랴오닝(요녕)과 지린(길림),일본의 규슈(구주)지방 등에 분포하는 동북아시아 거석 문화권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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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봉수대 |
지정번호 : 기념물 제 87호
지정일자 : 1998. 5. 19
소재지 :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257-3
시대 : 시대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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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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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 봉수대가 있는 금산(해발681m) 정상은 맑은 날 삼천포와 여수는 물론, 석가 세존이 지나갔다는 세존도와 대마도까지 볼 수 있는 곳이다. 금산 봉수대는 남해군의 최남단에 있는 봉수대로 낮에는 이리의 배설물을 피우고 밤에는 불을 피워 당시의 상황을 즉시 조정에 알리는 통신 역할을 했던 곳이다. 1894년 고종31년에 현대적인 전화 통신 체제로 바뀌면서 금산봉수대도 폐지되었다. 금산 봉수대는 전국 5거선 중 제2거선인 동래부터 시작되는 간선봉수대 역할을 맡았다. 금산봉수대에서 연락하면 가까운 창선 대방산 봉수대를 거쳐 삼천포 각산 봉수대나 전라도 돌산 봉수대로 연결되었다. 금산 봉수대는 자연석으로 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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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상주리 석각 |
지정번호 : 기념물 제 6호
지정일자 : 1974. 2. 16
소재지 :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 산4-3
시대 : 시대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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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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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읍에서 19번 국도를 따라 상주로 가다보면 길 오른쪽에 두모마을 표지석과 함께 두모포로 가는 길이 나온다. 두모마을 표지석에서 상주쪽으로 5백여m 가면 길 왼쪽에 금산 부소암으로 오르는 산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20분 정도 산을 오르면 '상주리 석각'이라 부르는 글이 새겨진 거북바위에 닿는다. 천하를 통일한 중국 진시황이 삼신산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시종 서불을 불렀다. "서불아 너에게 동남동녀 500명을 줄 터이니 불로초를 구해 오라" 서불은 산 넘고 물 건너 남해 금산까지 찾아왔지만 불로초는 구하지 못했다. 늙지 않게 해 주는 풀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한동안 사냥만 즐기다가 금산을 떠나면서 바위 위에 글을 새기고 갔다. 이런 이야기를 간직한 바위가 남해에 있다. 이 문자는 고대 역사를 밝히는데 귀중한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는 중요한 유적이다. 바위가 거북 모양을 하고 있어 '거북바위'라고 부른다. 이곳 암각화는 관심있는 학자들의 현장조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서불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왔다가 사냥을 즐기다가 갔다"라고 쓴 글이라고 해석하지만, 그들도 확신을 가지고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 고대문자라고 하는 사람, 고대 거란족의 문자라고 하는 사람, 훈민정음 이전의 한국 고대문자라는 사람, 산스크리트 계통의 글자라고 주장하는 사람, '귀인의 사냥터'라는 그림 표지라고 주장하는 사람 등등 아주 많은 학설이 있지만, 아직까지 정답은 '알 수 없다'가 정확하다. 서불 일행은 불로초를 구하려 온 것이 아니라 망명자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진나라의 혹정을 피해 망명한 자들이 한반도에 건너와 일부는 일본으로, 일부는 남해안에 그대로 정착했을 가능성도 있고, 그 중 일부가 서불 일행이라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부산을 비롯해 경남·제주 일원에는 신선사상이나 서불과 관련된 전설이 숱하다. 이처럼 수수께끼에 둘러싸인 거북바위 옆에는 거대한 바위벼랑이 있다. 그위로 올라가면 두모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한편 두모마을 표지석 바로 앞집의 고구마 밭이랑에는 비늘 달린 짐승의 몸통 같이 희귀하게 생긴 바위가 있다. 이 비늘무늬 바위는 거북바위, 동이바위와 더불어 상주리 일대 바위 문화의 신비감을 더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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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흘산 봉수대 |
지정번호 : 기념물 제 247호
지정일자 : 2003. 6. 7
소재지 : 남해군 남면 홍현리 산237-1
시대 :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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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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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설흘산 봉수대는 남해군 남면 홍현리 해발 490m의 산봉 자연석의 기단에 높이 6m 직경 7m정도의 방형봉수대로 왜구의 침입과 재난시 남해금산과 전남 돌산 봉수대로 연락되었다. 봉수대 오르는 길은 남면 가천마을에서 임도를 따라 오를 수 있고 또한 홍현마을 무지개 고개에서 오를 수 있는 두 갈래의 길이 있다. 남면 선구에서 응봉산 자락을 타고 넘어 설흘산 봉수대까지 오르는 등산로는 2시간 남짓 걸리는 남해 최고의 산행길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 군민 뿐만 아니라 인근 진주, 마산, 순천, 광주 등지에서 주말이나 연휴 기간에 많은 산악인이 찾아 들고 있다. 또한 앵강만 입구로 떠오르는 일출이 장관을 이루고 있어 새해 해돋이의 명소로 거듭나고 있다. 본 설흘산 봉수대는 인근 민속자료 제13호인 가천암수바위 등과 함께 보존 관리되고 있다. 남해의 봉수는 제2거선에 속하고 있으나 순천 돌산봉수와 가까이 있기 때문에 제5거선과 연락이 통하였다고 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남해현읍지에 설흘산 봉수대는 현의 남쪽 30리에 있고 동쪽으로 금산봉수에 응하고 서쪽으로 전라도 순천 돌산도 봉수에 응하고 서로 간 의 거리는 60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원형 상태가 잘 남아 있어 통신수단을 연구하는 중요한 학술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옛날에는 설흘산(雪屹山) 또는 소흘산이라고도 명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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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산 봉수대 |
지정번호 : 기념물 제 248호
지정일자 : 2003. 6. 7
소재지 : 남해군 창선면 옥천리 산75
시대 :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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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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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산 봉수대는 남해군 창선면 옥천리 산75번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당시 진주목 소속으로 남해현 소속의 금산봉수로부터 연락을 받아 삼천포 각산봉수대로 전달한 제2거선의 연락을 받아 삼천포 각산봉수대로 전달한 제2거선의 간봉이다. 대방산 봉수대의 축성법은 토석혼축이며 규모는 높이 8.6m이고 폭은 3.6m인 망대가 남아 있다. 대방산 봉수는 경상남도 지리지에 처음 나타난 것으로 보아 이 책이 편찬된 1477년을 기준으로 하여 당시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 봉수대는 위급한 상황을 중앙 또는 접경지역에 알리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전하며 인근에 있는 삼천포 각산봉수대에서 봉수를 올리면 금산봉수대와 설흘산 봉수대에 연결하게 되었다고 한다. 봉수대 오르는 길은 창선 옥천에서 오르는 동쪽로가 있고 창선 사포에서 오르는 서쪽로와 상신리에서 오르는 북쪽로가 있다. 요즘은 대상산 봉수를 찾는 학자 및 관광객이 날로 늘어가고 있는 실정이며 대방산 봉수대는 이곳 지역주민들이 보존관리하고 있는 곳이다. 대방산의 정상부에서 약간 남쪽으로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곳이 전망이 제일 양호한 곳이며, 암반(남부 약17.5m, 동서 약7.2m)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지면에서 제일 낮은 북쪽면이 약1.1m 높이이다. 그러나 대방산 봉수대는 정상부에 있지 않고 동쪽으로 약400m정도 떨어진 봉우리(해발 466m)에 위치한다. 현재 이곳은 민묘 1기가 있으며 민묘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는 원형상의 석축대가 솟아 있고 이 주변은 석담으로 둘러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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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성 |
지정번호 : 기념물 제 20호
지정일자 : 1974. 12. 28
소재지 : 남해군 남면 상가리 291
시대 :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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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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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는 단결의 정신이 면면히 살아 있는 산성이다. 임진성은 임진년에 축성되었다고 해서 임진성이라 부르지만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막기 위해 민관군이 합심하여 축성하였다는 뜻으로 '민보산성'이라 부르고 있다. 남해인의 단결된 의지를 나타내는 '민보산성', '임진성'보다는 '민보산성'이 더욱 뜻 깊은 이름이다. 임진성과 평산진성 사이의 포구를 옥포라 했다. 임진왜란 때 이충무공이 제1차로 출전하여 왜적을 무찔러 대 승첩을 거둔 거제도 옥포와 남해의 옥포가 지명이 같았으므로 패배한 왜적들이 옥포를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지자 남해에서는 이곳을 쳐들어오는 줄 알고 선조23년(1592)에 군인과 관아 그리고 백성이 함께 서둘러 성을 완공했다. 하지만 지금도 남쪽 성곽이 조금 허물어졌을 뿐, 그 원형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빨리 완공하기는 했지만, 부실공사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게 유비무환과 나라사랑의 정신으로 대비했으나 왜병과의 직접적인 전투는 없었다고 한다. 평산진성과 마주보고 있으며 자연석과 다듬은 돌을 이용하여 축성하였다. 옛날에는 성루, 감시사, 망대, 탑대, 서당이 있었지만, 현재는 286.3m의 성곽과 동쪽에 있는 출입문, 그리고 우물지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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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국산성 |
지정번호 : 기념물 제 19호
지정일자 : 1974. 12. 28
소재지 : 남해군 설천면 진목리 산18-4
시대 : 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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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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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국산성은 현성(縣城)이었던 성산성에서 동북방향으로 설천면과 고현면의 경계지점, 해발376m의 대국산 정상에 있다. 산성으로 가려면 고현면 남치, 관당마을에서 가는 길과 설천면 정태, 내곡, 동비, 진목마을에서 가는 길이 있다. 이 산성은 머리만한 자연석를 사용하여 겹겹이 쌓아 올리고 내부에 흙과 자갈로 메워 토루를 만들어 직선형 성곽을 이룬 타원형 성곽이다. 형태나 지형적으로 보아 현소재지 가까이 있어 현성의 외곽성 역할을 한 것 같다. 평상시에는 성 아래에서 거주하다 왜구의 침입을 받으면 산성으로 들어가 방어하고 공격을 하였을 것이다. 산성 성곽 위의 망루와 봉수는 외적이 침입할 때 감시와 경계구역으로, 중앙에 있는 건물지와 연못지는 지휘소와 식수를 해결하기 위한 곳으로 쓰인 자리이다. 축성 방법과 성의 형태로는 삼국시대 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안에는 지금도 여러 종류의 기와조각과 토기(土器), 자기(磁器) 조각들이 발굴되고 있다. 대국산성에는 '천 장군과 일곱 시녀'의 전설이 전해온다. 조선 경종 때, 천씨 성을 가진 뛰어난 장수가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하루는 천 장군이 일곱 시녀와 성 쌓기 내기를 했다. "너희들 일곱이서 저녁밥을 짓는 일과 내가 성을 쌓는데 누가 빨리 끝내는지 내기를 하자" 마침내 내기가 시작되자 일곱 시녀가 팔을 걷고 밥을 짓는 동안, 천 장군은 부채 하나를 들고 산허리에 올라서서 바다 쪽을 향하여 천천히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내기에서 이길 생각이 없나 보지?" 일곱 시녀가 내기에 이겼다고 좋아할 때 쯤, 이게 웬 일인가? 바다 속에 있던 커다란 바위들이 새까맣게 날아와 소낙비처럼 산꼭대기에 떨어져 저절로 성이 쌓이는게 아닌가? 일곱 시녀가 짓는 밥은 아직 채 김이 오르기 전인데... 이 전설이 사실이라 믿고 싶은 사람에게 더 말해 주어야 할 것이 있다. 대국산성의 성돌에는 아직도 굴껍질이나 조개껍질이 붙은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바다 속에서 날아온 돌이니까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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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가천암수바위 |
지정번호 : 민속자료 제 13호
지정일자 : 1990. 1. 15
소재지 : 남해군 남면 홍현리 489
시대 :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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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천 암수바위는 일명 가천미륵불이라 한다. 조선 후기 여성들의 구원처였던 미륵신앙이 담긴 문화재이다. 이 바위에 치성을 드리면 천재지변을 막고, 풍어를 이룰 수 있다고 전해진다. 남면해안도로를 따라가다 가천마을에 차를 세우고 걸어 내려가야 한다. 바위의 크기는 숫바위 높이 5,8m, 둘레 2.5m, 암바위 높이 3.9m, 둘레 2.3m의 선돌의 형상으로 숫바위는 남성의 성기형상이며, 암바위는 아기를 밴 여인의 형상이다. 또한 가천 미륵불이 있는 가천마을 앞에 탁트인 망망대해와 옹기종기한 계단식 논밭이 선조들의 고된 삶과 숙연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남면 숙호부터 평산까지 약 15km의 남면 해안도로를 따라가면 평산 암섬, 항촌, 선구, 가천 해안 등 앵강만과 남면 해안의 절경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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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구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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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구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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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미친 사람들이라면 분명 남해에서 금산부터 탐낼 것이 틀림없다. 그 다음으로 남해 최고봉인 망운산에 눈을 돌린 후, 돌아가는 시간에 쫓겨 황급히 섬을 떠난다. 이 때문에 남해의 잘록한 허리춤에 자리한 호구산(627m)은 그냥 스쳐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하지만 남해를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 호구산의 거친 산세에 눈길을 빼앗기게 된다. 지형도에는 산이름이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송등산, 괴음산 등 산군을 엮어 호구산으로 대표되는 '호구산군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남해군의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것은 그만큼 자연경관이 뛰어나고 보존가치가 있는 곳이라는 말이다. 호구산은 호랑이 형상을 닮았다는 유래가 있고, 옛날 호랑이가 지리산에서 건너와 이 산에 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정상에 오르면 멀리 광양, 여수, 하동, 통영이 모두 보이며 잔잔히 펼쳐진 바다가 포근함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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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미친 사람들이라면 분명 남해에서 금산부터 탐낼 것이 틀림없다. 그 다음으로 남해 최고봉인 망운산에 눈을 돌린 후, 돌아가는 시간에 쫓겨 황급히 섬을 떠난다. 이 때문에 남해의 잘록한 허리춤에 자리한 호구산(627m)은 그냥 스쳐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하지만 남해를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 호구산의 거친 산세에 눈길을 빼앗기게 된다. 지형도에는 산이름이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송등산, 괴음산 등 산군을 엮어 호구산으로 대표되는 '호구산군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남해군의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것은 그만큼 자연경관이 뛰어나고 보존가치가 있는 곳이라는 말이다. 호구산은 호랑이 형상을 닮았다는 유래가 있고, 옛날 호랑이가 지리산에서 건너와 이 산에 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정상에 오르면 멀리 광양, 여수, 하동, 통영이 모두 보이며 잔잔히 펼쳐진 바다가 포근함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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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대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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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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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 상봉에서 남쪽 바다를 바라보면 멀리 희미한 점으로 보이는 섬, 그나마 보통 때는 보이지 않다가 가을철 날씨가 맑은 날 그것도 눈 밝은 사람이라야만 볼 수 있는 섬, 이 섬이 바로 세존도이다.
전설에는 석가세존께서 금산 상봉에서 득도를 한후, 돌로 배를 만들어 타고 쌍홍문을 지나 세존도의 바위섬을 뚫고 지나갔다고 하는데 그때 돌배가 지나간 흔적이 바로 금산의 쌍홍문과 세존도에 난 2개의 동굴이라고 전한다.'세존도'라는 섬 이름도 이때 세존께서 이곳에 머무르다 가셨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런 때문인지 섬꼭대기에는 스님 모양을 닮은 스님바위도 있고 동굴 천장에는 '미륵'이라는 글씨도 있다고 하는데 불교와 깊은 인연이 있는 섬임에는 틀림이 없다.
세존도는 남해군의 최남단에 자리잡고 있다. 상주에서 직선거리는 25.68km나 된다. 동경128。5분12초, 북위 34。29분48초에 위치한 바위섬으로 면적은 약33,000㎡. 사람이 살지 못하니 바다 갈매기가 이 섬의 주인인 셈이다. 일년내내 시도 때도 없이 부는 바람 때문에 나무라고는 자라지도 못하고 이름없는 키 작은 풀들만 바위틈에 조금씩 자란다. 역광을 받아 드러난 섬의 윤곽은 마치 해룡 두 마리가 몸을 비벼대며 희롱하는 듯한 기묘한 생김새이다. 매끈한 구석 없이 삐죽삐죽 솟은 섬의 표면은 쉽지 않을 듯한 속내를 짐작케 한다. 해저의 섬 모습도 깎아지른 절벽을 이루고 있다. 섬 정면 한가운데 있는 구멍과 날카롭게 들쭉날쭉 솟은 정상의 돌촉들이 대조를 이루며 콧대 높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우리가 흔히 보는 동굴이 2개 있는 세존도 사진은 금산 쪽(북쪽)에서 본 모습인데 이 섬은 보는 방향이나 장소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가졌다. 남해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부처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은 누구나 세존도에 한번 가보기를 원한다고 한다. 주위에는 유인도로 간도(칠이)가 있으며, 흰영, 구들영, 목도, 소치도, 승치도, 삼여도 등 사람이 살지 않는 작은 섬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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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현수교! 잿빛옷을 벗고 붉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제주도, 거제도, 진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 남해의 관문은 동양 최대의 현수교라 불렸던 남해대교이다. 하동과 남해를 잇는 남해대교는 길이 660m, 높이 80m의 아름다운 현수교로 1973년 개통된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일컬어지고 있다. 남해대교가 가로지른 노량해협의 거센 물살은 남해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산 증인이요, 역사의 마당이다.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이 시작된 곳으로, 또 고려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무수한 유배객들이 자신의 적소로 건너오기 위해 나룻배를 탔던 한맺힌 곳이었다. 남해대교가 놓여지기 전, 남해사람들은 나룻배를 타거나 도선으로 노량의 물살을 가로질러 다녀야 했지만 30년전부터는 승용차로 1~2분이면 거뜬히 물을 건너온다. 남해를 육지와 연결한 남해대교를 건너면 벚꽃터널이 반겨준다. 봄이면 하늘이 보이지 않는 벚꽃의 터널이 장관이다. 남해대교는 태어날 때부터 짙붉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부식을 이유로 잿빛옷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2003년 산뜻한 선홍색빛으로 새단장을 하여 창선·삼천포대교와 함께 섬으로 가는 남해군 최고 관광자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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