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필자가 초강초등학교 6학년 때(1965년) 담임을 맡아 헌신적으로 가르쳐 주신 선생님 조운섭 선생님을 기리며 쓴 글로서 <교육타임스>(2013년 2월호)라는 월간지에 발표한 것을 그대로 전재한 것임.)
스승은 있다
-조운섭(曺雲燮) 선생님을 기리며
-김석환
"석환아, 어서 일어나 세수하고 오너라"
매일 새벽마다 4시를 알리는 자명종이 울리자마자 나를 깨우시던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낮은 음성이 그 낡은 사택으로 추억의 발길을 이끈다. 사택 윗방에서 선생님 앞에 앉아 자정이 넘도록 지도를 받다가 잠이 들어 꿈길을 헤매던 나는 그 한 마디에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간혹 깊이 잠이 들면 선생님께서 엉덩이를 두드려 깨우기도 하셨다. 찬 우물물을 길어 세수를 하고 날이 밝아 올 때까지 중학교 입시를 위해 특별과외(?)를 받았다. 교실이 어두워지도록 학교에서 배우고 자정이 넘도록 다시 지도를 받고.... 그렇게 선생님 곁에서 백일 동안 무상으로 '스파르타식 특별지도'를 받은 덕분에 난 충청도에서 수재들만 모인다는 대전의 명문 D중학교에 합격하였다.
내가 선생님 댁에서 생활한 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배려 때문이었다. 중학교 입시가 백일 남았다는 어느 날에 선생님께서는 방과 후에 나를 앞세우고 20리 길을 걸어 집에 오셨다. 선생님께서는 입시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집이 너무 멀어 공부에 지장이 있으니 당신 사택에서 데리고 지도를 해 보겠다고 하셨다. 앞으로 열심히 공부하면 대전에 있는 D중학교로 진학할 수 있으니 믿고 맡겨 달라고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읍내 있는 중학교에 장학생으로나 합격하면 보내고 그렇지 않으면 일찌감치 기술을 배우도록 할 텐데 너무 폐를 끼칠 수 없다며 한사코 거절을 하셨다. 당시에 우리 집은 열 식구가 천수답과 화전에 의지하여 겨우 끼니를 이으며 살고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어려운 형편을 이미 알고 있지만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는 무조건 가르쳐야 한다며 아버지를 설득하셨다. 그렇게 두 분은 주객이 전도된 채 늦도록 말씨름을 한 끝에 선생님께서 판정승을 하여 이튿날부터 나는 선생님 댁에서 지내게 되었다.
내가 방 한 칸을 차지하자 선생님의 어린 아들 둘과 장인어른을 합하여 다섯 식구가 한 방에서 기거하는 불편을 감내해야 했다. 그 헌신적인 선생님의 수고에 부모님께서는 겨우 텃밭에서 기른 채소며 고구마와 잡곡이나 울안에서 딴 감으로 보답할 뿐이었다. 나만이 아니라 선생님께서는 다른 급우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셔서 문제집을 손수 구입해서 나누어 주시는가 하면 간간히 빵을 사다가 먹이곤 하셨다. 그러다 보니 박봉의 월급 봉투는 늘 비게 마련이라서 월급날에 사모님과 심하게 다투시는 걸 몰래 지켜보곤 했다.
내가 성인이 된 어느 날 선생님께 왜 우리들에게 그렇게 애정을 쏟으셨느냐고 처음으로 여쭈어 본 적이 있다. 선생님께서는 "무슨 이유가 있겠나, 그저 내 젊은 자존심 때문이었지." 라며 미소를 지으실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졸업하던 이듬해에 셋째 아이가 태어나고 당신의 어머님까지 모시게 되어 박봉으로는 도저히 식솔을 부양할 수 없어 사직을 했다고 하셨다. 서울로 떠나올 때 뒤 따라 달려오던 어린 아이들을 돌아보며 하염없이 울었다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선생님은 상경한 후 잠시 친구의 사업을 도우시다가 그 기간에 야간대학을 졸업한 게 계기가 되어 상업고등학교 상업과 교사로 다시 교직에 몸을 담으셨다.
정년을 몇 해 앞두고 평교사로 명예퇴임을 하신다는 소식을 들은 초등학교 동기생들 여남은 명이 명예퇴임식장에 참석하였다. 재학생들을 비롯한 제자들이 강당을 가득 메운 그 자리에서 나는 주최한 학교에 간청하여 송사를 하게 되었다. 그 사택에서의 추억을 회상하는 내용이 거의 전부였는데 내가 중간에 목이 메어 더듬거리자 장내는 이내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날 만난 상업고등학교 제자들도 모두 자기들을 위해 기업체를 돌며 일일이 취업을 시켜 주시기까지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누가 이 시대에 참다운 스승도 제자도 없다고 했나. 어린 나의 새벽잠을 깨우시던 그 심정으로 내가 이순에 이른 지금까지도 늘 그 자리에서 지켜 주셨다.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어찌 아셨는지 시골까지 먼 길을 달려오셨다. 내 결혼식엔 선생님 내외분은 물론 자녀 셋을 모두 대동하여 대전까지 오셔서 일찍 돌아가신 내 부모님 자리를 채워 주셨다. 내가 박사학위를 받는 날엔 눈물을 닦으며 식장 한구석에서 지켜보고 계신 것을 식이 끝날 때쯤에야 알았다. 최근에 당신은 항암치료를 받으시는 중에도 내 건강을 먼저 염려하신다.
내가 교육대학을 진학한다고 하자 선생님께서는 “너는 더 큰 일을 해야 한다”라고 하시며 극구 만류하다 못 해 화를 내셨다. 그러나 난 선생님과 같은 참된 초등학교 교사가 되겠다며 선생님 말씀을 어겼다. 초등학교 교사로 5년을 지내며 선생님을 닮고자 청춘을 불태운 것도 선생님의 깊은 사랑 때문이었다. 문학 공부를 정식으로 해 본다고 늦게야 야간대학 국문과를 다닌 게 계기가 되어 초등학교를 떠나 중등을 거쳐 대학 교수로서 교단을 지키는 동안 내 사표요 등대가 되어 주신 선생님! 게을러 자주 찾아뵙지 못하지만 당신 앞에 앉으면 난 50년을 되돌아가 까까머리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다. 이제 백발이 성성한 선생께서는 어둠에 잠든 제자의 영혼을 깨우기 위해 끝까지 헌신과 사랑을 다하는 게 스승의 길이라는 걸 늘 침묵으로 일러 주신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게 참된 삶의 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