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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ARTIST
김 옥 진 Kim, Ok-jin
우리미술의 傳統 지켜온 산 證人,
頂上의 元老
김남수 / 미술평론가
韓國의 傳統山水를 최후 堡壘처럼 올곧게 지켜 온 우리시대의 산증인 옥산 김옥진은 한국화단에 전통 회화양식을 뿌리 내리게 하고 또한 우리의 옛 것을 끝까지 사수하면서 최후의 보루처럼 빛내 온 파수꾼이다. 그는 한국화단사에 기록될 우리시대의 산 증인이요, 정상의 원로다. 한국화단의 큰 별 의재 허백련 화백에게 사승하여 그 화맥을 이어받은 해방 제1세대의 제자인 옥산은 스승의 정신과 전통을 전수하였으며, 지금은 2,3,4代 의 우수한 후배작가들이 배출되어 한국미술의 창조적 발전에 많은 기여하고 있다.
한때 현대회화로 포장된 기능주의, 물량주의, 실리주의 등 서구 논리에 밀려 한국의 전통이 빈사의 위기를 맞기도 했고, 민족의 자주성을 상실한 국적불명의 미술이나 서구의 미술이 우리의 안방까지 침잠하여 방향타를 잃고 방황하고 있을 때, 값지고 소중한 우리의 옛 것을 빼앗기지 않겠다고 몸부림치고 갈등하면서 전통을 절규했던 老 화가 김옥진은 외롭고 고독한 자기와의 싸움을 계속했다. 그동안 한국미술은 여과와 검증 없이, 그리고 비판이나 분별없이 수용해버린 서구미술의 오남용 때문에 근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을 허 송하고 문화적 퇴행을 거듭했던 지난날을 못내 아쉬워하고 있는 옥산은 우리 미술인들의 분별없는 지각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예술문화의 후진국으로 전략한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옥산의 말을 빌리면 ‘근대와 현대는 어제와 오늘의 시간과 공간의 차이 일 뿐, 전통과 현대, 구상과 추상이 공존하는 예술양식이 접목될 때, 그 나라의 미술양식은 발전하는 것' 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전통과 뿌리, 고전주의를 숭상하는 선진국들은 모두 잘사는 나라들이며 미술문화를 통하여 국부(國富)를 창출한 복지국가들이라고 소신을 피력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미술은 현대화라고 하는 잿빛 획일주의 때문에 후진국으로서의 국제적 고아가 돼버린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서구의 아류로서 혼돈과 방황 속에 갈피를 못 잡는 현대미술도 언젠가는 근대나 고전으로 흘러 갈 것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그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이라고 말을 한다.
沃山의 作品世界
스승인 의재의 삼애정신(三愛精神)과 사상, 철학을 익히고 전수하면서 고법에 의한 사승을 한 옥산은 정신은 스승의 가르침을 쫓되 실기만은 개성주의가 살아 있는 독창성으로 홀로 서야 된다는 예술철학을 주장해 온 원로다. 초기 그의 화풍은 다분히 임모사(臨模寫) 등 채본 중심의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중기에 들어오면서 수묵담채 기법이나 강렬한 색조의 설채, 이상적인 공간 분할, 밀도감 있는 중후감, 등에서 스승과는 확연히 다른 독자적인 화풍과 회화양식을 구축했다. 또한 기법상의 갈필(渴筆)과 점묘(點描), 발묵(潑墨) 등한국산수의 정상의 위치를 굳히기도 했다. 그의 산수경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추경>은 수묵주조의 스승의 것과는 저항이라 일컬을 만큼 화려하고 순도가 높은 대담한 색채를 도입하고 있으며 한국미술의 근간을 이루는 소재가 산수경(山水景)임을 옥산의 예술세계를 통하여 입증 될 만큼 우리 화단의 공인으로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다.
엄격히 따져 예술행위는 의경이나 심상예술 등 사의적(寫意的)인 정신주의의 소산이라고 옥산은 역설해 왔다. 단순히 현장에서 사실만을 그대로 똑같이 묘사하는 것은 기능의 수준에서 그칠 뿐, 창작이란 새로운 산수(山水)의 창조라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이념산수를 중히 여기는 화가가 바로 옥산 김옥진이다. 장자의 화론에 ‘그림은 눈으로 보고,귀로 듣고 마음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고 기(氣)로 얻는 것' 이라고 역설하는 대목이 나온다. 옥산이야 말로 장자의 이론을 쫓는 진솔한 화가가 아닌가 싶다. 또한 예술행위는 인간주의를 실현하는 것이 궁극의 목적이라고 사상을 펴는 화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공자의 회사후소(繪事後素)를 신봉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아무리 훌륭한 재능을 가진 화가라 할지라도 그림을 그리는 이의 마음이 素朴하지 못하면 필경은 실패작이 된다는 믿음과 신앙을 가지고 있다. 천성이 순수하고 제자나 후학들에게 참된 스승으로 숭앙을 받고 있는 그는 팔순을 맞는 노화가 이지만 그에게서 동심을 발견할 수 있고 작품에서 고졸미(古拙美)를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청윤 하고 고담한 인격과 성품 탓이 아닌가 싶다.
작가의 사상과 인격을 표출하는 문인화에도 발군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그는 작가의 인격과도 무관하지 않다. 본시 문인화는 작가의 정신주의를 표현하는 추상예술이다. 추사의 서권기문자향(書卷氣文字香)을 몸소 체득해 온 작가의 마음과 자화상이 문인화를 통하여 표출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여묵(餘墨)으로 즐기는 일필일획의 고담한 문기 있는 문인화에서 작가의 모든 것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옥산 김옥진은 1927년 진도에서 출생했다. 진도의 옛 고을 이름 옥주(沃州)에서 이름을 따 옥주산인이라는 아호와 당호를 스승에게서 받았다. 소년시절 의재 허백련 문하에 입문하여 화단에 등단했고 옛 국전에서 다수상 기록을 세워 화단의 총아로 각광을 받았다. 그 후 화단의 중추적인 위치에서 많은 활약을 했으며 젊은 시절 대학 강단에 서기도 했다. 국전 심사위원만도 무려 다섯 차례나 지냈다. 스승이 창립한 연진회(鍊眞會)의 법통을 이어받아 회장직을 여러차례 재임한 그는 후학양성에 많은 기여 해 오고 있다. 현대한국화협회 발기위원이자 현 고문으로 사반세기를 이끌어 오면서 연소회(然素會), 남상회(南象會),회원들을 합한 한국 소상회(素象會/회장 李正信)의 막강한 제그룹이 있다. 국가에서 문화훈장 보관장을 받았다
毅齊 畵脈의 창조적 계승-
山水畵의 사실적 시각과 寫意의 運筆
이구열 / 미술평론가
근대 이후의 호남파 전통회화의 맥이 19세기 조선시대 말기에 크게 활약한 대표적인 남종 산수화가인 小癡 許維(1809-1892)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세인이 다 아는 일이다. 진도출신으로 서울을 오가며 명성을 높였던 그는 추사 김정희 문인이 되는 행운 속에 알게 된 중국 월말 4대가 중의 黃公望의 산수화 세계에 특히 감명을 받아 그를 마음의 스승으로 삼고, 자신을 견주어 ‘小癡'라고 자호(自號)하며 정신적으로 사풍(師風)을 지향한 한국의 ‘大癡'였다.
小癡의 화맥은 그의 넷째 아들이었던 米山 瀅(1891-1931)과 다시 米山의 넷째 아들인 南農 楗(1907-1987)으로 이어졌다. 다른 후손 중에서도 거듭 전통화가가 나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南農의 門道들도 적잖이 화단에 진출하고 있다.
진도의 許씨 문중에서는 小癡와는 방계(傍系)인 毅齊 許百鍊(1891-1977)이 배출되기도 하여 1920년대 이후의 호남파 산수화, 문인화, 화조화 전통을 새로이 진작시키고 제자들도 많이 양성하여 전국적으로 퍼지게 하였다. 그가 평생 정착하였던 광주의 毅齊계는 목포의 南農계와 더불어 전통회화의 호남풍을 한층 풍성하게 하였다.
沃山 金玉振의 수묵화 수업은 앞서와 같은 호남의 특수한 배경과 그 지역사회의 특이한 서화 애호 및 생활화의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더구나 이 沃山도 호남 예향 중의 예향인 진도에서 태어나 毅齊의 제자가 됨으로써 화가의 길을 열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毅齊선생에게서 기법을 철저하게 지도받기보다는 정신적인 자세의 감화와 영향을 더 크게 받으며 스스로 스승의 필법 및 화의(畵意)를 본받아 익히는 가운데 자신의 화면 창조를 추구하여 1949년부터 국전에 입선하기 시작했고, 1957년부터는 연특선으로 신예의 각광을 받게 되면서 중앙의 전통화단 진입을 두드러지게 성취할 수 있었다.
앞의 국전 특선작으로 시골의 향토적 풍경을 주제 삼은 <8월의 전가(田家)>(1957)나 고산계취(高山溪趣)를 화제삼은 <풍악>(1959) 등은 스승의 필법과 전통적 산수화의 사의(寫意) 정신에 충실하려고 했던 작품 태도의 화면들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위치에 오르게 되면서 창의적 시도와 독자성을 지향한 沃山 의 산수풍경화들은 자연미 대상의 현실적 정감과 정취 및 체험적 감흥을 부드러운 습필(濕筆) 구사와 사실적인 필치의 유연한 수묵담채로 전개시킨 것이었다. 1970년대 이후에는 그러한 특질성이 한층 선명하게 전형화 되어 갔다.
沃山의 그 현실적 시각의 화취(畵趣)는 자신의 회화세계를 성립시킨 것으로서 毅齊선생의 기법적 영향을 자연스럽게 소화한 것이었다. 1979년의 개인전 때에 나는 그 변화 있는 沃山의 자기 실현을 주목하면서 카달로그 서문에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沃山의 필의와 기법의 기본적 요소들은 물론 毅齊에게서의 강한 감화와 영향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무르고 있지 않은지는 이미 오래다. 극히 부드럽고 섬세한 습필을 주로 구사하는 沃山의 수묵담채의 특질은 毅齊의 심의(心意) 표현이 내포하는 고전적 엄격성과 관념적 양식에서 느끼는 바와 많이 다른 현실적 친근감과 향토적 감흥의 형상에서 엿볼 수 있다.
沃山을 새로이 주목하고 평가하게 한 실경(實景) 주제의 작품으로는 <울두목 소견(所見)>(1978.79) 연작, <독도>(1983), <마이산의 달밤>(1988), <백두산 천지>(1990> 연작, <추월산 소견>(1991, 수묵 농채) <10월의 전가(田家)>(1993) 등을 그의 화집(현대미술연구소편, 1994)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외에 어느 특정 명산이나 삼수 경색(景色)을 사실적 재현보다는 내면적 사의(寫意)의 운필(運筆)로 자유롭게 창작한 화면들도 앞의 작품들과 본질적으로 성향을 같이한 것들이다. <초하(初夏)>(1976), <소백산 일우(一隅)>(1979), <달마산 추경>(1985), <풍악>(1986, 설악산 추경) 등에서 사의의 실경 작례(作例)를 엿볼 수 있다.
그처럼 실경 시각과 체험을 담은 풍경화와 산수화들이 沃山의 화필 업적의 확실한 본색이지만, 호남의 전통회화 애호 취향의 보수적 요청이 직접 간접으로 작용하여 그리게 된 종래적 관념의 산수화도 끊임없이 병행되었다. 그것들은 으레 심의와 상상의 산수경개 구도에서 산사(山寺), 인가(人家), 인영(人影), 거룻배, 또는 범선(帆船), 폭포, 계류, 다리 등이 적절히 도입되어 인간의 삶과 산수자연의 엄숙하고 거대한 존재의 관계를 미적인 공존의 세계로 보며 그를 서정적으로 음미하고 혹은 찬미하게 한 것이 고래(古來)의 전통적 산수화 개념이다.
춘하추동 경색의 그 전통 산수 작업에서도 沃山은 능란한 필력과 자재로운 의상(意想)을 폭넓게 발휘하였다. 그 화면의 전통적 격식으로 한문 화제(畵題) 또는 제시(題詩)를 써 넣으며 그러한 산수화를 높이 사거나 즐기려는 애호가들의 환영을 샀다. 그러나 그 계열의 산수화 작업은 역시 우리 시대의 가장 고격한 전통적 필의의 대가(大家)로 마지막 정통 남종산수화의 경지를 실현시킨 毅齊선생의 절대적 영향과 그 필법의 범주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화조화와 문인화 계열에서도 그러했다.
毅齊는 많은 제자를 길렀으나 여러 측면에서 沃山은 그 수제자 위치에서 제작활동을 하고 있다. 沃山도 많은 제자를 지도하여 전통화단에 진입케 하고 있다. 서울의 沃山화실에서 사사관계를 가졌으나 이 후속 세대도 결국 호남파 화맥에 연결되는 셈이다.
날로 다원화되고 있는 오늘의 시대 변화와 문화상황의 변동 속에서는 종래의 어떤 예맥도 복합적으로 이어질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제 7순(1996년)을 맞이한 沃山 金玉鎭의 毅齊선생 화맥을 계승한 다면적 화단업적은 스스로 영광되게 여길만 한 것이다.
인간사회의 모든 가치는 여러 각도 여러 측면으로 말해 질 수 있는 대상이다. 여러 입장에서의 객관적 또는 주관적 가치관이 가능하다. 한 예술가의 평가도 그가 도달할 수 있었던 형태의 범위에서 정당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沃山에 대한 인식과 존중도 그러한 접근이 필요하다.
1996년 고희전 전시평론에서
장쾌한 抒情性을 표출한 韓國畵家
장석원 / 미술평론가, 전남대학교 교수
1. 小痴 이후 沃山 까지 輩出한 珍島
藝鄕으로 불리우는 호남의 예맥 중에서 큰 가닥의 하나가 鮮末 小痴로부터 뻗어 내려와 일제 강점기를 거쳐 온화한 호남의 풍토속에 깊숙이 뿌리박은 南畵에 연결된 韓國畵의 줄기이다. 이 줄기는 時代的으로 보아 小痴, 米山, 毅齋, 南農 等으로 이어져 왔으며 近代畵壇의 거봉이 되는 毅齋, 南農 뒤로 많은 화가들이 배출되어 전국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毅齋는 일제시기인 1938년 鍊眞會를 만들어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고 여기서 배출된 대표적인 화가가 沃山 金玉振이다. 沃山은 해방 후 나이 20세때인 1947년 鍊眞會에 입문할 수 있었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화가로서의 길을 밟게 되었다.
그 후 1955년 스물여덟에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 출품하기 시작하여 1961년 서른 두살에 국전 추천작가, 마흔둘에 국전 심사위원이 되었던 그의 활동은 당시의 국전이 지녔던 權威나 內規로 보아 짧은 기간에 눈부신 발전상을 보였다. 그는 1957년 서울로 이주하여 활동해 왔고 스승인 毅齋선생 서거 후 1979년부터 鍊眞會 회장직을 맡아왔다.
畵脈도 세월을 따라 흐르고 常變하는 것이다. 小痴가 傾倒했던 중국풍의 남화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한국적인 형식과 성격으로 바뀌어져 갔으며 특히 毅齋, 南農 이 활약할 무렵인 해방전과 이후의 급격한 시대적 변화와 역사적 굴곡은 미증유의 시련과 함께 예술의 속성 면에서도 큰 변모가 요청되고 있었던 사실을 반영한다.
시대적으로 韓國畵의 방향이 전통으로부터 서서히 일탈하여 서구적 조형방법을 흡입해 近代指向型의 새로운 화풍을 만들어 왔다는 것도 역시 전통을 고수하려는 대다수의 화가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에서 기억해 둘 만한 문제점으로 생각된다.
沃山이 작품 활동하던 해방 이후, 한국전쟁 이후의 무대는 일제의 지배체제로부터 벗어나 독립국가로서 현대적 체계질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비민주적 희생이 강요되던 시기이기도 하여 전통을 돌아볼 여지가 없었던 당시의 풍토에 南畵는 점차적으로 기반을 닦고 발전하여 왔으나 서양식 회화 기법이 도입된 후 활동 공간은 현실적으로 축소되어 왔다. 1957년부터 회화의 廣域化와 自己改新을 통하여 새로운 畵風을 시도했던 점은 높이 평가된다. 예술이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면 그 현실적 도전 앞에 과감히 응전해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2. 스승 毅齋선생과 鍊眞會 遺業
毅齋선생은 한국 근대미술의 흐름에 전통산수인 남화를 중흥시킨 인물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는 화가로서 뿐 아니라 인격자로서 존경을 받았다. 그를 중심으로 1938년 만들어진 미술단체 연진회를 비롯해서 해방 후 농촌을 살리는 것이 나라를 살리는 것이라는 신념에서 농촌지도자를 양성키 위하여 학교 三愛學會를 설립했다든지, 무등산 기슭에 5만 여평의 차밭을 마련하여 평생 여기서 나온 春雪茶를 즐기는 일, 민족정기를 살리기 위하여 무등산에 단군신전을 건립키 위해 노력했던 일 등은 그가 한 사람의 화가로서 국한해 볼 수 없는 폭넓은 인격체라는 점을 실감케 한다
실제로 그가 세운 農業技術學校(三愛學會)에서는 80세에 이르도록 직접 교단에 서서 가르치는 열의를 보였다. 1977년 돌아가신 해까지 523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沃山은 毅齋선생을 술회하기를 ‘聖人곁에서 聖人을 못 느끼듯 毅齋선생님의 곁을 떠나서야 더 훌륭한 인격자로 느낀다.'고 고백한다. 沃山은 毅齋선생 私家인 호남동 55번지에서 8년간 숙식을 같이하며 배웠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毅齋 人間像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毅齋선생의 가르침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선생은 엄격하고 대범하신 분이지요. 붓을 자유자재로 힘껏 눌러 긋는 그의 화풍은 쉽게 익히기 어려운 화풍입니다. 그의 문하에서 수업할 때에는 호된 선생님을 모시게 돼서 고생스럽기만 하다는 불평도 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면 毅齋선생님의 지도를 받은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새삼 선생님께 고마움을 느끼게 되어 송구스럽기도 하지요.'
沃山은 毅齋로부터 엄격한 지도를 받으면서도 동시에 스승을 극복하여 독자적인 회화세계를 구축하려고 刻苦의 노력을 기울인 화가이다. 毅齋 문하의 화가들 중에서 沃山만큼 스승과 다른 화풍을 구사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沃山 이야말로 스승의 참뜻을 이어 받았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毅齋의 제자들에 대한 교육방법은 난초의 체본부터 모사해 運筆法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이 3년을 익히는 四君子를 沃山이 한달 만에 떼었다는 것도 이러한 운필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毅齋는 문하생들을 제자라 부르지 않고 나이가 어려도 친구라고 했다고 한다. 「나는 알고 그는 모르니까 친구사이에 아는 것을 가르쳐준 것 뿐」이라는 것이다. 沃山이 아직 毅齋를 만나기 전, 진도사람들이 毅齋를 두고 「대나무를 보고 대나무를 그리면 대나무가 죽어버린다」고 믿었던 만큼 神話的인 가치를 부여한 데에는 毅齋가 진도 출신이어서 부풀려진 면이 있겠지만 훌륭한 예술은 사물의 혼을 빼어다 놓는다는 전래의 사상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毅齋는 가고 自然이 대나무 魂을 빼앗을 화가들이 나타나야 할 것이다. 沃山은 훌륭한 스승 밑에 제자들이 단순히 스승을 본받는 데에 그치지 않고 제각기 개성대로 연마해감으로써 일가를 이루게 될 때에 더욱 스승을 빛나게 할 것이라는 지론을 펴곤 해왔다.
1979년 沃山은 鍊眞會 會長이 되면서 毅齋선생의 遺德을 기리고 한국화의 정통을 지키며, 秋史-小痴-米山으로 이어진 정통 남화에 毅齋, 南農등 당대의 大家로 연결된 한국화의 뿌리를 보다 튼튼하게 활착시키겠다는 결의를 가지고, 湖南과 南畵에 대한 서울 화단의 편향된 인식을 실감하며 이에 대응하는 역할을 하고 회원전을 年 1回씩 정기적으로 갖기로 했다. 그래서 인지 1981년과 82년 연이어 서울의 세종문화회관에서 전람회를 가졌다.
이보다 더 중요하게 실천된 사업은 1980년 소태동 연진미술원자리에 「 毅齋 許百鍊 銅像」건립이라 하겠다. 이는 沃山개인으로 보아서는 1947년 스승의 문하에 入門한 이 후 세월이 흐를수록 무게를 더하게 되는 은혜에 대한 報恩事業이었다. 沃山은 스승의 뒤를 이어 畵의 脈을 지키고 다지는 일을 다지면서 전통과 현대의 이질성을 극복하며 새로운 전통을 수립해야 한다는 것도 이들에게 주어진 至上命題로 강렬한 의지를 갖고 임했다.
3. 美의 禮讚과 韓國畵壇
沃山은 기회가 있을 때 마다 동양화는 한국화로 改稱되어야 한다는 얘기를 해왔다. 아직 한국화라는 이름이 탄생하기 전이었다. 일본에는 일본화가, 중국에는 國畵가 있는데 왜 한국 그림을 한국화로 부르지 않느냐는 견해이다. 한국의 독자적인 자연풍토와 그 정서를 담는 전통화가 존재해 왔기 때문에 중국, 일본과 다른 고유한 명칭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 한국의 산수화가 중국의 냄새를 완전히 벗지 못했다면 한국화라는 이름을 붙이기 어렵다. 하지만 중국화가 아니라면 한국화로 불러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沃山의 주장이었다.(전남매일 1979년2월19일자) 이러한 주장은 주체적 입장에서 바로 잡아야 한다는 여론으로 정착되어 80년대 초반부터는 보편적으로 한국화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沃山은 예술이 궁극적으로 창의적인 예술 혼이 표현 되어야 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 그 자신 毅齋의 <대나무> 이야기에 매료되었듯이 예술이 묘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사물의 精氣를 표현하는 것이며, 사물의 정기를 표현한다면 그 이상의 예술이 없다고 말했다. 전설적인 화가의 이미지를 얻어 최고의 화가로서 손꼽힐 수 있었듯이 그러한 순박한 믿음이 沃山의 예술에 대한 믿음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
沃山은 말하기를 “實寫 빌려오는 것 다시 말해서 事物의 形態를 화폭을 빌려서 옮겨 놓은 것이다.”고 하였다. 그는 더 부연해서 설명하기를 “山水도 寫生해서 그 산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산의 정기와 산천의 정기를 빼다 놓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산 자체의 형상을 묘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 산의 정기를 표현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이러한 예술관은 자연과 예술과 인간이 渾然一致되는 동양적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며 그중에서도 예술 魂과 사물의 정기를 강조하는 부분은 한국적인 속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믿어진다. 좋은 그림에 대한 평가를 그림이 살았다 또는 죽었다는 식으로 판정하던 한국적 사고는 바로 예술에는 생명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는 믿음과 일
치한다. 솔거가 그린 소나무 벽화에 새들이 날아와 앉으려다 부딪혀 죽었다는 故事 역시 솔거의 그림이 단순한 사실력에 그치는게 아니라 살아있는 소나무보다도 더 생동감 있게 표현되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상의 것 그것은 무엇일까? 沃山은 예술이 하나의 꿈과 같았으면...하고 되뇌었지만 그 뜻은 예술이 꿈과 같이 영상으로 비친다는 말이 아니고 예술이 畵法을 초월해서 생명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沃山은 예술형식 면에서도 개방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1964년부터 5년간 유일하게 홍익대학교에 출강하였는데 그때에 자신의 畵論을 校誌(弘益)에 발표한 일이 있었다. 「墨과 五色의 神秘」라는 제목으로 쓰여진 이글은 1965년도 무르익었던 沃山의 藝術觀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당시에 화단의 기류가 구상과 추상 양식으로 대립하며 분열되어가는 양상을 우려했음인지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하고 있다.
“나는 추상화가와 구상화가간에 대립적 분쟁도 이해 할 수 없다. 자기의 예술관을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사회의 빈축을 받지 않아야 할 것이다. 추상화나 구상화나 회화임은 분명하다. 회화의 가치는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작품이 내재하는 미학적 가치의 如何가 감상자로 하여금 批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지나친 誇張은 작가자신의 인격을 모독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金玉振, 墨과 五色의 神秘, 弘益, 1965년 p82)
沃山은 포용력이 강한 화가이다. 그리하여 毅齋로부터 물려받은 남화의 모습을 현대적 한국화로 改新해 나갔다. 그의 화법은 전통에서 시작하여 현대적 흐름위에서 변모의 한 樣態를 제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통의 방식을 크게 일탈해 보여 줌으로서 남화의 현대적 가능성을 현실적으로 보여 준 것이다.
그의 미적 관점 역시 전통에 뿌리박고 있으면서도 현대적으로 재해석 된 것으로 과거의 관념적 양태를 벗어나 생동감 있는 활력을 더하고 있다. 현대의 미술이 개념적으로나 형식적으로 첨예하게 분열되면서도 주 맥락을 잃어 가는데 반하여 동양적 사고와 방법론은 다시금 화려한 활동을 전개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은 빗나가지 않을 것이다.
4. 결 론
毅齋가 남화의 한 劃을 그었다면 沃山 역시 남화에 연결된 한 脈으로서 다양한 작품세계를 전개시킨 화가이다. 毅齋와 沃山사이에는 한 세대를 가름하는 시간의 벽이 있을 다름이다. 沃山은 沃山답게 화가로서의 길을 올곧게 걸어왔다.
沃山으로서의 행운은 청년시절 毅齋선생과 같은 巨人을 만나 깊은 예술적 感化를 받은 것이다. 그는 어릴 적 고향인 珍島에서 누리던 예술적 감흥을 떠 올리곤 한다. 그리고 그는 어려서부터 오로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왔다. 화가로서의 沃山의 존재는 한국화단이라는 가시적 틀 안에 굳게 자리잡고 있다. 그리는 존재는 그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무겁고 확실하게 각인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월은 흐르는 것이다. 흐름 속에서 그의 존재와 그가 남긴 예술이 얼마만큼 평가 받게 될지는 누구도 확인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인식하고 그를 통해서 인식할 수 있었던 예술적 혼은 죽지 않고 두 눈을 뜨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눈빛을 통하여 그의 드라마틱하면서도 구성지고 스케일있는 화면을 다시금 바라보게 될 것이다. 예술적 魂이 살아있는 한 예술은 살아있는 것이다. 그것은 心象을 지키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다.
-한국미술작가선집, 김옥진 한국화집에서 부분 발췌 -
선생님께서 주신 비언(秘言)과 비기(秘技)
꼭 10년 전의 일입니다. 옥산 김옥진 선생님의 고희전 화집(1996)을 발간하면서 「내 생애, 소중한 스승」을 기고한 일이 있습니다.
다시 읽어 보면서 스승과 부모의 만남이 6천 겁(劫)임을 확인하였습니다. 한 겁이란 천지가 시작된 때부터 끝날 때를 일겁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화연(畵緣)과 인연은 우리 회화사에서 많이 보았습니다. 바로 정통성 입니다.
화가가 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음을 깨닫게 합니다. 선생님을 홍대에서(64년)만나 40여년을 넘게 모셔온 것이 부앙지간(俯仰之間)으로 느껴집니다.
정통산수의 태점으로부터 화격(畵格)에 이르기까지 온고지신으로 화폭을 경영함을 배웠고 21세의 약관(弱冠)에 아호를 받았으며 신문인으로 직업을 갖게 해 주셨고 천직(天職)으로 화예(畵 藝)에 종사하도록 가르쳐 일깨워 주셨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운무(雲霧)가 덮힌 천지를 굽어 내려다보며(1990년) 우리가 弘益世人間임을 말씀하셨고, 물감을 한보따리 사주셨던 일과 75년 동아미술제를 창설 후 ‘한국화' 표기를 강경(强勁)하게 발언하셨던 일이며, 평생 그림 속에서 한국산수의 창조를 위해 불사르신 화가로서의 정신을 본 보이셨습니다.
또 스케치의 중요성으로 1970년부터 35년을 봄이면 전국 곳곳을 제자들과 함께 누비심을 지켜보면서 흔들리지 아니하는 마음에 머리를 조아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주변, 친지 여식들의 혼례식에는 빠짐없이 축하작품을 주셨는데, 그 수를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늘 인간다운 인간이란, 다른 존재들과 달리 오직 인간에게만 있을 수 있는 것 인격적(人格的) 인간성의 교육을 몸소 실천 하시어 덕육(德育)에 의한 인격교육을 통해서 문학적 존재이게 하는데 마음속의 생각을 숨김없이 털어 놓음으로서 감격하지 않은 후배나 제자들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됨의 근본인 심지애덕(心之愛德)을 보여 주셨습니다.
공자가 이상으로 삼았던 경지가 그러하듯, 뜻에 맞는 벗들과 더불어 예술을 즐기며 인격도야에 의한 인간완성의 최고의 방편으로 예술을 들었음과 시(詩)에서 얻은 풍부한 감흥을 예(禮)로서 다듬고 락(樂)의 화(和)를 얻어 인간이 완성된다는 ‘흥여시 입여체 성여락'(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공자의 말씀과 ‘人生을 위한 예술' 그리고 나아가 우주의 대잔연의 법리(法理) 또 인생의 당위(當爲)원칙인 도(道)를 깨닫는데 인생과 예술의 의의(意義)가 있음을 일깨워주신 선생님의 비심(秘心)과 그림의 비기(秘技)를 끝없이 주셨습니다.
지난 7월초 아트코리아 김남수 주간과의 인터뷰에서 “사실묘사는 창작이 아니듯, 그림에 생명이 들어있어야~” “우리 조상들로부터 이어받은 정신의 작품이 우리그림이야”, “우리그림이란 한국화 즉 자기그림을 말하는 것이지...” “또한 그림 속에 생명이 있다고 하는 것은 살아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산수화는 작가의 관념을 바탕으로 한 것도 아니요, 사고와 감정을 나타내 그것에 따른 교신을 바라는 것도 아니며 현대와 같이 새로운 조형적 실재를 창조하기 위한 화체(畵體)의 형성도 아니다.
자연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이 그러하듯 ‘스스로 그러한' 형상을 통해 새로운 상징적 경지에 진입하기 위한 표현이 ‘그림의 몸'이라....
고생하는 삶, 창조의 고통을 참고 견디는 죽을 고생(苦中苦)을 통해 변하지 않는 불변의 영원한 진실성을 나타내야 함을 이르셨습니다.
선생님!
80세의 롱펠로는 보도인대학 50회 졸업 축시에서
“어떤 것도 너무 늦은 법은 없다. 우리들의 심장이 멎어 버리기전까지는 , 카토는 여든에 그리스어를 배웠고, 소포클레스가 시를 쓰기에 몰두한 것은 모두 여든이 지나서였다. 그리고 아흔이 된 테오프라스토스는 ‘인간성의 성품'을 쓰기 시작했다. 괴테가 바이마르에서 ‘파우스트'를 완성 시키는 것은 여든이 지난 후 였다.” 이렇게 읊었습니다.
선생님은 유서 깊은 인사동 화실에서 영원히 이 땅에 남을 ‘우리의 그림'을 남기셨습니다. 만수무강 하시어 더 많은 작품을 대한민국의 재산(을) 남겨주소서‘
弟子 李正信 敬賀 2006년 7월
나의 스승님을 생각하며
제자의 도리도 못 다하는 처지에 스승님을 글로 옮긴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럽고 민망한 일이지만 팔순을 맞이하여 지난 자취를 회고하는 전시회를 갖게 되신 것을 먼저 마음속 깊이 축하드리며, 스승님의 은혜를 언제나 잊은 적이 없으며 오늘도 그 고매한 뜻을 되새긴다.
옛말에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하였으나, 작금의 사회적 풍토는 그렇지 못 한 것이 안타깝고 존경심은 커녕, 스승을 욕되게 하거나 심지어는 송사를 서슴지 않는 오늘의 현실이 가슴 아프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사제지간에 모범을 보여주는 사례가 더 많아 다행스럽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 하였듯이, 옥산(沃山) 김옥진 선생님은 학문과 인격이 도인의 경지에 이르신 의제 선생님의 화도(畵道)와 교훈을 받으신 까닭에 도(道)와 예(禮)를 제자들에게 물려주신 분이다. 많은 제자들을 대하심을 볼 때 알고도 모르는 척 듣고도 못들은 척 하심은 바로 중용의 도를 득하셨음을 깨닫게 한다.
제자들에게 채본을 해 주실 때도 화선지 위에 혼신의 힘을 다 쏟으시는 영혼을 저희들에게 가르쳐주셨다. 또 옛 국전에 출품할 때 녹설 이상재, 금봉 박행보, 희재 문장호, 동작 김춘, 필자 등 많은 후배나 제자들이 지쳐서 있을 때에도 선생님께서는 괴로운 표정을 보이지 않고 묵묵히 인내를 보여주셨다.
또한 생업에 어려운 역경이 닥칠 때에도 선생님께서는 곤란한 표정을 전혀 하지 않으시는 끈기와 참을성을 소유하신 의지력이 대단한 분이시다. 때문에 선생님의 작품에서는 한 점 한 획이 예리하고 빈틈이 없으며 필선의 힘찬 생동감은 예도의 정신성으로 필자에게는 다가왔다. 반면에 정이 많고 인자하여, 어려운 사람의 간절한 부탁에는 거절을 못하시는 분이시기도 하다. 또 제자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무척이나 기뻐하시며 눈시울이 붉어지심도 보았다. 나 자신도 제자들을 가르쳐 보면서 스승님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것도 같아 부끄럽기 그지없다. 스승님께 예의에 벗어나지 않는 제자가 되기 위해 오늘도 다짐해 본다.
끝으로 오늘의 옥전이 있기까지 가르쳐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선생님의 건강한 모습이 계속 되어 남은여생을 화필생활로 즐겁게 보내시고, 많은 걸작 품을 남겨주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빌 뿐이다.
2006년 7월
不備 제자 沃田 姜智周
ART NEWS
제1회 한민족문화예술대상
서화 분야에 옥산 김옥진 선생 선정
우리나라 전통 민족문화를 조사 연구, 정립하고 발전, 선양하여 민족전통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사람들을 발굴, 시상하고 그 공적을 기림으로써 한민족 문화예술창작에 기여하며, 회원 상호간의 친목과 화합을 다지기 위해 제정된 한민족문화예술대상이 올해 처음 제정되어 서화, 국악, 영상, 한국무용, 문학, 대중문화에서 6명의 수상자를 선정했다. 특히 서화분야에는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대한민국 ‘보관’ 문화 훈장을 받은 한국화가 옥산 김옥진 선생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에 협회 송정희 이사장은 “문화예술의 창달에 이바지한 인물 중 해당 분야에서 최고이거나 이에 대한 열정 등으로 후학들에게 귀감이 되는 분을 뽑자는데 심사위원들의 의견일치를 보여 서화가 김옥진, 국악분야에 조상현, 영상예술분야에 최은희, 한국무용분야에 이매방, 대중문화분야에 반야월, 그리고 문학분야에 송수권씨가 선정되었다”고 밝혔다.
사단법인 한민족문화협회는 지난 7월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가를 받고 초대 총재로 백용기 이사장이 취임하였는데, 창립회원은 200여명으로 서예가 송정희씨, 명창 신영희, 안숙선, 조상현씨와 ‘용의 눈물을 연출한 김재형PD, 국회위원 김덕룡씨 등 사회 각 분야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는데, 앞으로도 각 분야에서 우리 민족문화예술 발전에 앞장서 나가고 있고, 후학들에게 귀감이 되는 분들이 선정되어 우리 나라 문화예술 분야에 권위있는 상으로 자리매김 되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한편 시상식에는 김정배(전 고려대학교총장)대회장, 백용기총재, 송정희 재단이사장, 김원태, 김상익, 손 문, 문미경등 문인협회인사와 시인, 강지주, 이정신, 강정자, 홍기윤, 전계연등 미술인, 그리고 엄앵란, 임이조, 문 희, 최지희, 안숙선, 신영희, 조무하등 각계의 예술인과 김창진(한림제약상무이사)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 편집부 -
뒷줄 좌로부터- 정산 홍기윤, 조치영(김옥진화백 자부), 운당 강정자
옥산 김옥진 / 沃山 金玉振 / Kim, Ok Jin
• 1927. 전남 진도 출생
• 1948. 의재 허백련 선생 師事
• 1970. 제19회 국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 1974. 제23회 국전 심사위원
• 1978. 제27회 국전 심사위원
• 1979-2000. 연진회 회장 역임(현:명예회장)
• 1980. 서울시 문화상 심사위원
• 1982. 제18회 전남도전 심사위원장
• 1984. 제3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동아미술제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
• 1995-1999. 현대한국화협회 회장역임(현:고문)
• 1996/1999. 제4회 대구 매일신문주관 미술대전 심사위원장,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심사위원
• 2006. 현재: 한국미협, 한국문인화협회, 현대한국화협회,
남북미술작가교류회 고문, 연진회 명예회장
상 훈
• 1957-1959. 제6, 7, 8 국전 특선
• 1959. 전라남도 문화상 수상
• 1979. 제28회 국전 초대작가상 수상(예술원 회장상)
• 1998. 대한민국문화훈장(보관) 서훈
• 2001. 제7회 의재 허백련 미술상 수상
예술활동
• 1956-2005. 연진회회원전(49회출품)
• 1961-1981. 국전 추천작가출품, 국전 초대작가 출품
• 1971-2005. 옥산숙회전, 연소회전, 남상회전, 한국소상회전,
초대출품(沃山 제자전)
• 1976. 동양화 중진작가 5인전(조중현, 김옥진, 조방원,
나상목, 김명제)출품
• 1978. 한국 10대작가 초대전(서울신문사 주최)
-허건, 장우성, 김기창, 이유태, 성재휴, 조중현, 안동숙,
김옥진, 서세옥, 김화경
• 1979. 화론(畵論)- 墨과5色의 신비-홍익대학교 교지에 발표
• 1981. 유럽(프랑스, 이태리, 독일, 스위스 등 8개국)미술계 탐방.
동양화 원로 중진화가 5인(조중현, 김옥진, 안동숙, 민경갑,
오태학) 합동 도예 초대전
• 1981-2005. 현대한국화협회전 (24회출품)
• 1994. 김옥진 화집 출간
• 1996. 고희전(서울 일민문화관)
• 2001. 세종문화회관 개관 원로작가 100인전 출품
• 2002. 의재미술상 수상기념 초대전 (광주 광역시예술회관,
서울 하나로갤러리) 등 개인전 13회
• 2005. 경복궁 메트로미술과관개관 원로중진작가초대전
• 2006. 월간 아트코리아 창간 10주년 초대-한국미술 조망전
(세종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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