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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측이 잠시 작전회의를 하는 것 같더니, 이윽고 그들은 상호 오십 보 정도의 간격을 두고 멀리 떨어졌다.
아이들의 손에는 짚으로 만든 방망이 같은 것들이 들려있었다. 흑군과 백군은 먼저 화살을 쏘아 공중으로 날리더니, 곧장 서로에게 고함을 지르며 다가가 백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짚 방망이를 검처럼 휘두르며 아이들은 기합을 질렀다.
“이얍! 넌 이미 죽었어! 내 칼을 맞고 왜 안 넘어지는 거냐?”
“칼이 빗나갔잖아. 내 칼로 막은 거다.”
“좋아, 이번만 봐주지. 이래 뵈도 난 머리뫼 속에서 십년 간 무예를 닦았다. 맛 좀 봐라!”
“난 이 시대 최고의 무예인에게 십오 년 동안이나 비결을 전수받았다.”
“네 나이가 아직 열한 살 밖에 되지 않았는데 십오 년이라니, 그 말을 누가 믿느냐?”
“믿거나 말거나다! 내 칼 받아랏!”
한 동안의 시간이 지나자 양측 아이들은 하나 둘씩 넘어지거나 전장에서 빠져나갔다. 최후에는 대장 둘만 남았다. 둘이 사생결단을 낼 듯 노려보았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두 명의 대장을 둘러싸고 앉아 두 사람의 격투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한 대장이 소리쳤다.
“해모수 너 이놈! 감히 이 형에게 대들다니, 너는 위아래도 없느냐?!”
상대편 대장이 씩씩거리며 대꾸했다.
“형이면 다냐? 이래 뵈도 난 최고의 무예인이고 절세의 영웅이다!”
“으하하하! 영웅은 무슨 얼어 죽을 영웅이냐? 여자들이나 줄줄 달고 다니는 놈도 영웅이란 말이더냐? 코흘리개 아녀자들을 데리고 천하무적 군대를 만들 요량이었더냐? 으하하하!”
해모수 편의 대장이 지지 않고 반격했다.
“여자도 여자 나름이다. 나의 여자 동지들은 모두가 일기당천의 용사들이다. 너는 누굴 믿고 까부느냐?”
해모수는 아이들의 싸움 소리를 듣다가 기가 막혔다. 아이들의 말은 갈수록 가관이었다.
“이놈아, 일기당천의 용사들을 어디로 다 시집보냈느냐? 너 홀로 이렇게 홀아비가 되어서 돌아다니니.”
“잔소리 하지 마라. 내 여자 동지들이 모두 군대를 모아서 나를 후원하러 올 것이다. 조금만 기다려라.”
그 때였다. 갑자기 골목 한 쪽에서 “야아!” 하는 함성소리가 들렸다.
해모수가 깜짝 놀라 돌아보니, 어느 새에 열 살 전후로 보이는 여아들 수십 명이 손에 남자아이들과 똑 같은 지푸라기 방망이를 들고 고함을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해모수 대장의 여군이다!”
선두에 선 여아가 소리를 질렀다.
여아들이 들이닥치자 해로운 편의 대장은 기가 질렸는지 잠시 주춤하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해로운 대장의 여군은 돌격 앞으로!”
그의 목소리와 더불어 반대편에서 여아들 수십 명이 역시 손에 지푸라기 방망이를 들고 내리 달렸다.
양측은 서로 만나 혼전을 벌인다. 한동안의 시간이 지나자 양측 소녀들도 모두 쓰러지거나 대열에서 이탈했다.
개중에는 우는 아이들도 있었다. 맨 마지막에는 여군의 대장인 듯한 두 소녀만 남았다.
해로운 대장 편에 선 소녀가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해모수의 여자 동지야! 내 칼을 받아라!”
그녀가 해모수 편에 선 여아에게 짓쳐 들어갔다.
“네가 해로운의 여장군이냐? 내 무예 솜씨를 보여주지.”
두 여아는 한동안 어울려 지푸라기 방망이를 주고받았다.
소년 대장들은 곁에서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며 박수를 치고 고함을 지르는가 하면 발을 구르며 응원했다.
“해로운! 우리도 싸우자.”
해모수 대장 편 아이가 소리치면서 해로운 대장에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두 사람이 다시 싸움에 돌입한다.
한 참 동안 싸우던 네 아이가 갑자기 서로 떨어지더니 말했다.
“오늘은 누구 편이 이겼냐?”
“당연히 해로운 대장 편이 이겼다.”
“만날 너희 편만 이기냐?”
“내일은 너희들이 해로운 대장 편을 해라.”
“진 편은 약속대로 호떡을 사는 거다.”
해모수는 도대체 아이들의 저런 놀이가 어떻게 생겨났을까 몹시 궁금해 하며 해로운 대장 노릇을 한 아이를 불렀다.
“얘야, 이리 좀 봐 보렴. 오늘은 내가 호떡을 사마.”
해모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며 말했다.
“아저씬 누구예요? 아, 아저씨, 정말 멋지게 생겼는걸?”
“하하하, 난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냥 너희들의 놀이가 재미있어서 구경했단다. 구경한 대가로 내가 호떡을 사고 싶은데 어떠냐?”
“그거야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죠.”
“근데 너희들은 어떻게 해서 해로운 대인의 함자를 알고 있고 해모수의 이름도 알고 있는 거냐?”
“에이, 아저씨도.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동네 아저씨들이 모였다 하면, 해로운 해모수 얘긴데.”
“그런 놀이는 누가 가르쳐주던?”
“몰라요. 그냥 언제부턴가, 배워서 하고 있는 거예요.”
해모수는 아이들을 데리고 호떡 가게로 가서, 아이들이 마음껏 먹을 수 있을 만큼의 돈을 가게 주인에게 건네준 후 되돌아섰다.
“아저씨도 저희랑 같이 먹어요.”
“아니다. 난 먹지 않아도 너희들을 먹여주는 것만으로 기쁘단다. 이 담에 크면 나라를 위해서 백성들을 잘 돌보는 훌륭한 장군이 되어라.”
“네, 감사해요.”
“그래 잘들 놀아라.”
“멋진 아저씨, 안녕!”
여아들도 그에게 머리 숙여 인사했다.
며칠 후 삼칠성주가 연은소와 두 시녀를 데리고 서문에 나타났다. 해모수는 그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나누며, 골목에서 구경한 아이들의 전쟁놀이 이야기를 들려줄까 하다가, 연은소나 두 시녀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그만두었다.
슬픔을 이기지 못한 채 눈물을 흘리는 연은소, 백선의, 청아련을 뒤로 하고 해모수가 먼저 출발했다.
해성으로부터 고향 웅심산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은, 동북편의 장당경을 통과해 계속 같은 동북 방향으로 올라가다가 백악산아사달에 이르고, 거기서부터 동북으로 더 나아가는, 비교적 평탄한 행로였다.
해모수는 길을 재촉하지 않고 말에게도 쉼을 줄 겸, 일부러 느긋한 걸음으로 가니 하루에 겨우 칠팔십 리 길도 나아가지 못했다. 해성에서 장당경까지 뻗은 왕의 대로는 평소에도 오가는 길손이 무척 많았다.
그러나 그 길은 육백리가 훨씬 넘는 머나먼 장도다. 쉬엄쉬엄 올라가느라 근 열흘이 다 되어서야 장당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까지 갈 수 있었다. 아침에 여관을 나서서 대로를 따라 올라가는데, 앞에서 먼지를 휘날리며 한 떼의 군마들이 내리닫고 있는 게 보였다.
“비켜라!”
멀리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이윽고 두 줄로 선 군마 수백 기가 해모수의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해모수는 앞장선 대장인 듯한 자를 살펴보다가 깜짝 놀랐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앳된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그 얼굴과 눈빛이 몹시 눈에 익었다.
그 대장도 해모수의 얼굴을 번갯불 치듯 훑고 쏜살같이 지나갔다.
해모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설이매가 군대의 장수일 리 없는데··· 얼굴은 분명히 설이매 공주의 얼굴인데?’
일전에 해모수는 어명을 받고 장당경 환화궁에 올라갔을 때 설이매 공주가 남을 만나볼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몹시 아프다는 말을 전해들은 바 있었다. 그녀의 몸이 한두 달 동안에 벌써 이렇게 회복되었단 말인가? 그리고 군대의 장수가 되었다니 무슨 일인가?
그 무렵 장당경 환화궁의 시위대장 집무실에서는 시위대장이 심복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해모수가 지금쯤 어디에 와있는가?”
“도성 근처까지 왔습니다.”
“집에까지 가는데 불편이 없도록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네, 나리. 아무 불편이 없도록 돕는 길은, 딱 한 가지입니다.”
“그게 뭔데?”
시위대장이 예의 그 멍청한 듯한 표정으로 묻는다. 심복이 속삭이듯 대답한다.
“도성을 지나서 어느 여관에 투숙하면, 거기서 곧바로 천궁天宮으로 보내드리는······.”
“아, 그것도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어찌 하해와 같이 자비로운 시위대장이 친아우를······.”
“천궁은 복락이 넘치는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이거야말로 나리의 하해 같은 자비를 실천하는 게 아니고 무엇입니까?”
“자네, 그 말이 진심인가?”
그들이 그런 터무니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해모수는 오로지 설이매를 골똘히 생각하느라 자기 신상에 대한 염려를 접어놓고 있었다. 해모수는 마음에 깊은 의문을 품은 채 그 후로도 보름이 더 지나서야 웅심산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옛집에 들어가니, 집을 지키고 있던 하녀들이 해모수를 반갑게 맞이한다.
“그 동안 별고 없었는가?”
“예, 나리. 나리께서 돌보아주시고 또 아남성의 어르신께서 각별히 신경을 써 주셔서 편안하게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그대들도 시집을 가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잘 살아야 할 터인데?”
“나리, 저희들은 평생 나리를 모실 생각이옵니다.”
“아니다. 내가 그대들을 집으로 돌려보낼 터이니, 어서 좋은 남자 만나서 혼인하도록 하게.”
“나리, 저희들은 돌아갈 집이 없사옵니다.”
해모수가 그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천화天花는 몇 살이고 근화槿花의 방년은 몇인가?”
“소인은 스물이옵고 동생 근화는 열아홉이옵니다.”
“흠,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어서 속히 좋은 혼처를 마련해 주어야 하겠는 걸.”
“나리, 방금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저희들은 평생토록 나리를 모시고 싶사옵니다.”
“그 정성이 기특하구나. 천제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위해 좋은 배필을 마련해 두셨을 터이니, 염려하지 말거라.”
해모수는 오랜 객지 생활 끝에 집에 돌아오니, 새삼 집안 하녀들이 고맙게 생각되어, 그녀들의 장래가 복되기를 간절히 빌었다.
“내가 집에 돌아왔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조용히 지내고 싶으니.”
“네, 나리. 명심하겠습니다.”
오랜만에 숙면을 취하고 이튿날 일어나 고요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하나님을 부르고 있을 때다. 하녀 천화가 불렀다.
“나리,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무슨 손님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는데.’
이렇게 생각하며 방문을 열고 나갔다.
“나리,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아니, 이게 누군가? 아불한이 아닌가?”
“네, 그렇습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가?”
“실은, 저희 주인 나리께서 보내셔서 왔습니다.”
아불한은 황궁 시위대장 해로운의 가신장家臣長으로서 오래 전부터 해로운의 집을 위해 충성을 바쳐온 인물이다.
“잘 왔네. 어서 들어오게나.”
“그 동안 못 뵌 사이에, 풍모가 전보다 환해지신 것 같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는구먼. 장형은 잘 계신가?”
“네, 별고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옥체 건강하신지 궁금하구먼.”
“폐하도 만안萬安하신 듯합니다.”
“내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혹시 자네가 알고 있는지 모르겠네.”
“뭐든지 물어보십시오. 아는 것은 성심껏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설이매 공주마마는 평안히 잘 계신가?”
“아, 공주님 말씀이군요. 그 분은, 몸이 완전히 회복되어 지금 장당경 수비대 장수를 맡고 계십니다.”
“오, 그런 일이?”
여러 날 전에 도성 남쪽 대도大道 상에서 보았던 그 장수가 바로 설이매임을 해모수는 시원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가 무슨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군에 몸을 담게 되었을까?’
궁금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날부터 해모수는, 하녀들에게 부탁해 특별한 지인이 아닌 한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근신하는 마음으로 칩거에 들어갔다. 웅심산성의 옛 친구들과 건달들이 대거 몰려와 그와의 면담을 요구했으나, 해모수는 그들과의 접촉을 일체 삼갔다.
그 동안 다소 소홀히 했던 호흡기도와 <행심록해>에 관한 연구에 다시 전념했다.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을 때는, 어머니가 준 <행심록해>의 요체를 깊이 터득하고 지혜와 식견, 무예에서 크게 진일보할 수 있었다.
천제 하나님과의 교통에서도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눈을 뜨든지 감든지 상제님을 생각하거나 부르기만 하면, 그의 가슴에는 황홀함이 가득 차올라, 숨이 벅찰 지경이었다.
편지 한 통이 그 앞으로 도착한 것은, 그가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해 성통공완의 길을 한참 달리고 있을 때다. 가을의 기운도 이제는 산야에서 완연해졌다. 살펴보니 발신자 주소가 없었다.
겉봉을 천천히 뜯어보니, 예쁜 비단 폭에 쓴 편지가 나왔다. 비단에서 향긋한 냄새가 흘러나와 코를 찌른다. 그의 후각에 익숙한 향기다. 그건 다름 아니라, 한 떨기 어여쁘고 순결한 난초 같은, 경국지색 기진의 향내였다.
‘그녀가 내게 무슨 편지를?’
이렇게 생각하며 첫줄로 시선을 옮겼다.
심산유곡에 홀로 핀 난화, 보아줄 사람이 없고
그윽한 향기 그리움 흩어도, 맡아줄 사람이 없네
深山孤華蘭 심산고화란
隱影世來士 은영세래사
幽香密戀散 유향밀련산
終無賞春歌 종무상춘가
신유 초가을, 기진
가림토문(고대한글)으로 쓴 시에 오언절구를 엮었다.
‘······?’
해모수는 묵묵히 하늘을 우러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 기진, 기진. 그렇지. 혼사 문제를 매듭짓지 않으니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그 때 설이매의 눈꽃처럼 하얀 얼굴이 눈앞에 등장했다. 그리고 연나라 공주 예와의 혼사 여부도 아직 미해결의 상태로 놓아두었음이 상기되었다. 연은소는 또 어떡한단 말인가?
어떻게든 혼인문제를 타결해야 할 필요성이 절박한 것 같았다. 하지만 어명에 의해 웅심산성에 갇혀 지내는 몸이 누구와 혼인한단 말인가?
그가 웅심산성 관아의 호출을 받은 것은, 혼사 문제가 또다시 고민거리로 부상하던 바로 이 시기였다.
(다음장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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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2. 12. 9.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