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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지 해안을 걷고 있는 나그네다
찜질방에서 한 60대(띠동갑) 영감을 만났다.
고성 통일전망대를 목표로 울산에서 출발했다는 분이다.
이설 관동별곡길에서는 연곡숲에서 만난 초로의 부부에 이어 2번째가 되고 서-남-동길
전 구간을 통해서는 4번째 만나는 이다.
울산발 9일째라니 고성 종점에는 언제쯤 도착하게 될까.
하루를 남겼을 뿐인 마지막 밤이 만감이 교차하던 다른 때와 달리 편하게 갔다.
찜질방에 배낭을 맡기고 길떠난 시각은 2012년 10월 16일 05시 50분.
비상용품만 챙겨 거의 빈몸으로 나와 연지1리의 소규모어항 현내항으로 갔다.
해안길이 단절되어 내륙으로 우회했던 어제 석양의 아쉬움 때문이었다.
시야가 전무한데다 폐항처럼 을씨년해 공세항길을 탔으나 칠흑해안은 오싹할 뿐이었다.
흑암의 소규모어항 공세항을 지날 때는 비록 새벽잠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었지만 늙은
이의 조급증(?)을 자책하고 있었다.
부산을 떨었을 뿐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울진대교 옆 잠수교(옛 다리를 보수했을 것이다)를 건넌 후 남대천 하류를 따라 근남면
수산리(近南水山)의 왕피천변 엑스포공원에서 비로소 떠오르는 해를 보게 되었다.
2005년에 이어 2009년에 "친환경농업! 자연과 인간을 지키는 생명산업" 이라는 주제로
'세계친환경농업엑스포'가 열렸던 곳이며 이를 기념하는 공원이다.
엑스포(Expo 또는 Exposition)는 국제(만국)박람회를 뜻하며 "공업, 농업, 상업, 수산업
등의 산업과 기예, 학술 등의 문화에 대한 활동과 성과의 실태를 생산품, 모형, 기구도
따위를 이용하여 일반인들에게 알리는 모임"이라는 것이 사전적 의미다.
세계 3대행사중 1라는 엑스포는 이미 대전(1993년)과 여수(2012년)에서 개최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열린 분야별 엑스포는 울진의 농업엑스포 외에도 관광(속초), 공룡(경남
고성), 문화(경주), 정원(순천) 등이 있으며 심지어 보안엑스포도 있다.
비엔날레(Biennale), 기타 이름으로 열리는 세계적 행사도 부지기수다.
날로 상승중인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될 것이다.
기분 좋은 일이기는 하나 손익계산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자칫, 빛 좋은 개살구가 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영암(전남)의 F1 코리아 그랑프리(Grand Prix)다.
우리나라 지자체들이 가장 빨리 고쳐야 할 가장 큰 악습은 무턱대고 판 벌이는 일이다.
수산교를 건너 반대편 왕피천을 따라 망양정 앞으로 진출했다.
망양정을 목표로 하여 간 것이 아니라 해안을 찾아갔을 뿐인데 이사를 거듭한 망양정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망양정이 내륙 어느 지점에 있다면 아마 생략하고 갔을 것이니까.
나는 명승지를 유람하는 시인묵객이 아니고 단지 해안을 걷고 있는 나그네니까.
모래가 쌓이기 전의 왕피천 하구(河口)는 1000m 이상의 포구로 되어 있었단다.
이 포구에 배가 드나들었다 해서 산포리(山浦)가 되었다는 근남면 산포리 산정(山頂).
이조25대 철종11년(1860)에 망양정(望洋亭)이 이사왔으며 이때부터 산포4리 둔산마을
(屯山)이 망양마을로 개명되었단다.
산밑에 산다 하여 둔산이라 했다는데.
자그마한 해수욕장 뒤, 올라선 망양정에서 바라보는 동쪽의 망망대해.
무지렁이 범부(凡夫)라도 대인으로 만들고 미천한 잡인(雜人)이라도 신선을 만들기에
충분한 검도록 푸른 바다.
상쾌하고 통쾌한 동해의 아침바람에 온몸과 온맘을 송두리째 맡겨버렸다.
배낭과 함께 넋까지 내려놓고 망연히 앉아 있다가 배낭 안에 있는 송강의 관동별곡을
꺼내어 망양정편을 읊어보았다.
<天根을 못내 보와 望洋亭의 올은 말이, 바다 밧근 하날이니 하날 밧근 무서신고.
갓득 노한 고래 뉘라셔 놀래관대, 블거니 쁨거니 어즈러이 구난디고.
銀山을 것거내여 六合의 나리난닷, 五月長天의 白雪은 므사일고.>(관동별곡중 망양정)
(하늘 끝을 끝내 보지 못해 망양정에 올라가니, 바다 밖은 하늘인데 하늘 밖은 무언가.
가뜩이나 성난 고래 그 누가 놀라게 했길래, 불기도 하고 뿜기도 하며 어지러이 굴까.
높이 솟는 파도(銀山)를 깎아내어 산지사방(六合)에 흩뿌리는 듯 하니 오월의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리는 듯 함은 무슨 일인가)
송강이 읊은 망양정은 여기가 아니고 한 참을 더 내려가 있는 기성면(箕城面) 망양리의
현종산((縣鍾山/417m) 남쪽 기슭, 해변의 오뚝한 콧날 위에 서있던 망양정이다.
숙종(19대/재위1674~1720)이 하사한 친필 현액 '關東第一樓' 도 현종산록의 망양정을
지칭한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관동제일루의 영예는 어느쪽이 차지할까.
숙종은 2번째 위치의 망양정을 찍었고 그의 신하(삼척부사이성조)는 죽서루라 했으니.
같은 동해변이지만 현종산 자락과 산포리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송강이 본 것은 돌고래와 높이 솟는 파도뿐인 망망한 바다였다.
그러나, 왕피천이 가세한 이곳에서 동해를 바라보았다면 그의 문학적 감성으로 미루어
가사의 내용이 다소 달라지지 않았을까.
낙동정맥에서 분기한 금장지맥의 금장산(849m/영양군 수비면 본신리) 서측 계곡에서
발원한 작은 물줄기가 본신계곡을 이루며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동으로 유로를 바꾼다.
장수포천(長水浦川)이라는 이름으로 939m울련산을 휘돌아 울진군 서면, 실직국 왕이
피신해 살았다 해서 왕피리(王避)가 되었다는 마을을 지날 때는 왕피천으로 바뀐다.
매화천과 빛내(光川)를 받아서 동해로 빠지는 울진의 생명젖줄이며 생태계의 보고라는
왕피천의 하구에 서서 침묵했을 리 없으니까.
이전의 망양정이 속세를 떠나 있다면 이곳 망양정은 세상과 몇걸음 근접해 있는 셈이다.
왕피천 하구 건너편으로 새벽에 보지 못한 현내항과 공세항 일대가 아스라했다.
거의 부딪칠 듯한 남대천하구와 왕피천하구 사이에 개발된 대규모 경작지가 볼만하다.
본래 두 하구가 직접 합류했으나 경작지 개간을 위해 양 하구에 인공제방을 쌓아 갈라
놓은 것이라고.
그 하구들 사이에 자리한 해변이 울진해수욕장이다.
연어의 고향이며 겨울철이면 천연기념물과 멸종위기종 철새들이 월동하기 위해서 찾아
온다는 왕피천하구.
경쟁력 있는 관광상품으로 판단되는지 개발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 같다.
내놓는 카드마다 색깔이 레드(red) 아니면 옐로(yellow)라 걱정이 앞서는가.
부디 철새도 쫓고 자연도 망치는 일거양실(兩失) 없기 바라며 해맞이광장으로 갔다.
망양정과 한 울안에 지은 종각에는 대형 종(울진대종)이 달려있다.
울진군민이 종을 울리며 신년해를 맞는 곳인가.
동해안은 굳이 거금을 들여 다듬지 않아도 처처가 해맞이 명소다.
그 돈을 다른 거시적 복지분야에 투입하면 안되는 이유라도 있는가.
어린 학생들한테서 까지 과학체험관 입장료를 받아 불요 불급한 치장에 낭비하는 대신
입장료를 면제해 주는 등.
물고기도 익사한다
해안길로 내려섰다.
조림한지 오래잖은 해변의 송림이 늙은 길손을 또 안타깝게 했다.
우리 해안 방풍림에 대해 많은 아쉬움을 말해왔는데 지나친 자식사랑이 자식을 버리듯
지나치게 나무를 아끼다가 나무를 버리고 마는 우리는 서양의 나무사랑을 배워야 한다.
그들은 무자비하다 느껴질 정도로 과감하게 간벌,간지를 하여 어떤 강풍도 이겨낼 만큼
튼실한 거목을 만드는데 반해 우리의 나무들은 방풍림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촘촘히 심은 후 간벌과 간지를 하지 않아 몸통이 빈약한데다 가냘프게 웃자라 미려하고
울창한 숲같으나 웬만한 바람도 이겨내지 못한다.
대서양 해변을 홀로 걸으며 깨우친 진리다.
해안도로(망양정로)를 조성하여 917번지방도로로 연장한 것은 잘한 일이지만 여기도
날림공사 예외지역이 아니다.
개설 수년에 신축한 제방과 도로가 유실 또는 함몰되고 있으니 부실공화국 딱지가 사라
질 날은 과연 요원한가.
응급 땜질을 한 길이 물맑은 동해의 희열을 울화로 바꿔버렸다.
산포리가 망양정로 따라 길게 포진되어 있다.
망양동이 포함되어 있는 산포4리에서 산포교를 건너면 2리와 3리가 뒤바뀌어.
진복리 지석묘 앞에 이르는 해안도로는 난공사 구간이었을 것이다.
특히 우뚝 선 통바위 정수리에 뿌리내린 소나무가 마치 타고 있는 초의 심지 같다 해서
촛대바위라 부른다는 바위지대를 비롯해 석산의 절개는 더욱 어려웠겠다.
촛대바위 이름에 부합되는 추암의 날렵한 촛대바위와 달리 이름에 걸맞지 않는 둔탁한
선바위(立岩)때문에 애로가 많았단다.
본래 동해로 돌출한 하나의 바위산 자락이었음이 분명한데 거의 수직으로 양쪽이 잘린
것이 신기하다.
벼락이라도 맞았나 이전 시대에 어떤 원시적인 인력으로 그랬나 불가사의한 일이다.
갈라진 연유는 알 길 없으나 관광상품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하고 이 바위가 손상되지
않게 공사하느라 무척 힘이 들었다는 것.
한없는 갈채를 받아 마땅한 귀감이며 이같은 정신이 보편적이라면 우리 자연의 참담한
훼손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련만.
한데, 이 정도의 바위는 국내외 산하에서 자주 본다.
바위에 뿌리박고 청청하게 자라는 소나무의 분포 역시 지구적이다.
기묘한 형상의 바위와 그 위에서 신비롭고 고고하게 성장하고 있는 나무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사를 아낌 없이 연발하게 하는 관광상품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그 쯤으로 만족하는 시각용이라면 그것은 단지 견광품(見光品)일 뿐이다.
소나무는 충분한 수분의 공급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는 상록수다.
그래서 농부들은 자기 전답 주변의 소나무를 핍박하거나 제거한다.
왜냐하면 가물 때 곡식들이 마실 물까지 다 빨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기의 이미지 관리를 위해 이웃 수분,양분까지 독식하는 철저한 이기주의자
소나무가 척박하기 그지없는 바위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이 불가사의한 수수께끼가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중요한 메시지중 하나다.
물고기가 익사했다면 그 물에 독극물이 함유되었거나 산소의 부족 때문이라는 진단이
가장 과학적인 답일 것이다.
그러나 산소도 충분하고 독극물도 없는 정상적인 물에서 죽었다면?
아마, 아가미의 퇴화로 헤엄을 치지 못하는 물고기였을 것이다.
한 생물학자가 한 실험에 성공했다.
끈질긴 노력으로 물고기가 물 없는 뭍에 적응, 살아갈 수 있게 한 것.
뭍에서 사는 동안 아가미가 퇴화한 물고기라는 것을 깜빡 잊은 생물학자는 그 물고기를
물에 내보냈고 물에 나들이 간 물고기는 그만 익사하고 말았다.
황당한 이야기 같으나 바위 위의 푸른 소나무는 아가미 없는 물고기에 다름아닐 것이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이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이 경지에 이르기까지 벌인 소나무의
생존을 위한 투쟁사와 생명력이다.
존경스럽지 않은가.
송강의 표현을 빌리면 갯바위에 부딪혀 육합(산지사방)에 뿌려지는 은산(하얀 파도)의
한가롭기 그지없는 해변도 훌륭한 관광자원이다.
소규모어항 산포항을 지나 산포리 끝의 고인돌스쿠버리조트와 이웃하고 있는 보통식당.
가장 평범한 듯 하나 가장 특별한 이름의 주인을 만나 사연을 들으려 했으나 아침 9시를
겨우 넘긴 시간에 문이 열릴 리가 없다.
보통이란 "특별하거나 드물지 않고 평범한 것"을 뜻하며 보통사람이란 민초에 불과한데
노태우는 보통사람을 슬로건으로 하여 대통령이 되었다.
이 무렵 보통명사에 불과한 단어 '보통사람'에 대해 저작권을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이로부터 15년이 지나 '보통사람'이 리바이벌(revival)했다.
한 대통령 후보가 "보통사람이 주인인 나라"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것.
공약이 쓰레기만도 못한 이 땅에서 그가 당선되었으면 과연 민초가 주인이 되었을까.
산포리 다음 마을은 진복리(進福)다.
진복리에서도 지석묘가 발견되었나 보다.
지석묘(支石墓/고인돌/dolmen)란 돌로 기둥을 만들고 그 위에 편평한 돌을 얹은 선사
시대의 분묘를 말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청동기시대의 묘제란다.
그 시대의 생활상과 기술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뛰어난 문화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이 지석묘는 당시에 이 지역에도 사람이 거주했음을 의미한다.
집단거주형태였음을 감안하면 이 일대에 미발견 지석묘들이 있을 것이다.
망양정 미스터리(mystery)
해안도로는 오동나무를 많이 심은 마을이라 해서 오원(梧原)이라는 진복1리를 지난다.
호수같은 바닷가의 마을전경이 중국의 동정호(양자강기슭)를 닮아서 동정(洞庭)이라는
진복2리의 어촌정주어항 동정항을 지나면 원남면(遠南)이다.
울진군 다운타운을 기준으로 근남면이 가까운 남쪽이라면 남으로 먼쪽이다.
망양정로의 해안은 동해안에서 가장 한가로운 구간중 하나다.
취락 형성에 문제가 있는지 마을이 뜨음한데다 마을 규모도 작다.
따라서 어선도 자주 볼 수 없는 해안이다.
울진군 지역에서 가장 늦게 개설된 해안길인 것도 불급이 이유였을 것이다.
원남면 첫 마을은 새 밀레니엄을 맞아 해변에 '새천년생명의 숲'을 만든 무릉동(舞陵).
오천동(烏川)과 초산동(草山),두 마을을 합병한 오산리(烏山)의 자연마을(오산3리)이다.
"깨끗하고 쾌적한 환경을 후손에게 영원히 물려주려고" 조성했다는 숲도 적막강산이다.
무릉교를 건너면 '국립수산과학원 동해특성화연구센터'가 자리잡고 있을 뿐 초산동(오
산2리)은 물론 오천리(오산1리)의 국가어항인 오산항까지도 그러하다.
후포항과 죽변항 사이의 대피항이라는 중요한 위치의 항구인데도.
그래도 어항,어촌답게 대게의 조형물들과 건조중인 오징어들이 해안로변을 채우고있는
길을 따라 오덕교를 건너면 덕신리(德新)다.
옛 평해대로의 덕신역(驛)이 있었다 해서 덕신 또는 덕말이라 한다는 마을이다.
1990년대의 자전거일주 때는 해안도로가 개설되지 않아서,4년전 평해대로를 걸을 때는
옛길을 따르느라 걷지 못했던 917번해안도로를 마침내 충실하게 걸었다.
덕신해변의 덕신교차로에서 잠시 신 7번국도를 따르다가 덕신휴게소에서 옛 7번국도로
옮겨 망양휴게소에 당도한 시각은 정오가 지난 12시 40분.
무수히 들른 곳인데 호황을 누리던 시절은 옛일이 되고 만 것 같다.
자동차전용 7번국도의 개통으로 차량들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4년전 평해대로 첫날의 첫식사를 했던 휴게소식당에서 이설 관동별곡길 마지막날의 첫
식사를 한 후 옛(2번째) 망양정터로 가기 위해 옛 7번국도에 들어섰다.
오징어목장과 해안에 건조중인 오징어떼가 즐비했던 길.
오징어를 비롯해 각종 건어물 판매 가판대 마다 멋쟁이 여인의 의상을 입은 허수아비와
마네킹이 호객을 하던 오징어거리.
거센 해풍을 피해 안에 있다가 차가 멈춰서면 진짜 사람이 부리나케 나오곤 했다.
그러나, 남태평양까지 가서 잡아온 오징어가 죽변항의 거대 냉동고에 머물다가 국내산
으로 둔갑해 팔려가던 가판대들은 흉물스러워가고 있고 거리는 인적이 끊긴지 오래다.
추억찾기 여행중이거나 내비 없는(길을 잘못 든) 차만이 이따금 오갈 뿐인, 돌보는 기관
없이 버림받고 퇴화일로에 있는 옛 국도 따라 망양정옛터(望洋亭舊址)로 갔다.
울진군 기성면(箕城) 망양리.
고려조 한 때 기성현이었다가 평해군으로 업(up)되었고 울진군 기성면이 된 것은 일제
강점기(1914년 행정구역개편때) 였단다.
고려때, 근남면의 망양동 처럼 망양정이 있다 하여 망양리인 마을 해변의 어느 곳(위치
불분명)에 있던 누정을 이조4대 세종때 이 곳(망양정구지)으로 이건했단다.
(현 망양정에 걸린 현판'망양정 약사'에는 1471년, 이조9대 성종2년에 평해군수 蔡申保
가 옮겼다고 기록되어 이다)
망양정은 자주 이사할 수를 갖고 태어났던가.
한양 ~ 평해를 왕래하던 선인들은 여기 망양정에서 잠시 여독을 풀고 시화도 남겼는데
25대 철종11년(1860)에 까닭 없이 근남면 산포리 산정으로 다시 이사를 했다.
다음 후보지는 어느 곳이 될지 망양정 미스터리(mystery)다.
동해안에 명승지 아닌 지역이 얼마나 되는가.
관동8경을 능가할 명승지가 수두룩하므로 장소 걱정할 일은 없겠다.
일군일경(一郡一景)의 불문율이 없었다면 8경은 더욱 다양했을 것이다.
소규모어항이 있는 망양2리의 뒷골목으로 해서 올라간 현종산 끝자락의 '望洋亭舊址'.
이조19대 숙종(肅宗)은 '關東第一樓(관동제일루)' 친필현액을 하사했다.
22대 정조(正祖)도 어제시(御製詩)를 내렸다.
고려말의 원재 정추(圓齋鄭樞), 생육신의 1인인 매월당 김시습(梅月堂金時習)과 청천당
심수경(聽天堂沈守慶), 아계 이산해(鵝溪李山海), 송강 정철(松江鄭澈) 등 선조때의 VIP
들, 내로라 하는 시인묵객들도 다녀간 흔적으로 시(詩) 한 수씩 남겼다.
두문동72현인의 하나인 원재(1333-'82)의 시에 있는 망양정은 시기적으로 보아 최초의
망양정이었을 것이다.
예전과 달리 찾아올 시인묵객 없고 걷지도 않고 차로 이동하는 작금에는 조망권만 확보
된 곳이면 누정이 어디에 있던 어떠랴만 관동별곡은 늘 현대판 송강들을 생각나게 한다.
송강(1536 ~'93)은 당대 가사문학의 최고봉이었으나 서인(西人)의 중추로 당쟁에 뛰어
듦으로서 파란곡절을 겪었는데 이 시대에도 닮은꼴이 양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의 마술사,시어(詩語)의 창조자라는 접두구의 영예로는 만족할 수 없었는지 일제에
아첨하더니 군사독재를 칭송했던 S씨와 그 유형.
꿀처럼 다디단 시어를 독재자의 강압에 휘둘린 후 못난 자신을 질타하다가 유명을 달리
한 P씨 등 수많은 현대판 송강(문인)들이 사미인곡을 읊어대고 있다.
백암 김제와 도해지
기성 망양해수욕장 길로 들어섰다.
지금은 빈 터에 세운 2비석이 옛일을 알리고 있을 뿐이지만 망양정이 있었던 해안이라
해서 1997년 개장할 때 망양해수욕장이라 이름지었단다.
현 망양정 소재지의 망양리, 망양해수욕장과 혼동하기 쉽기 때문에 접두어로 기성면과
근남면을 전치하는 것이 필수일 것 같다.
밀착한 도로가 7번국도였을 때는 접근성이 가장 편리했던 해수욕장.
편리한 접근성은 여전하나 국도의 이전으로 한가로워진데다 비철 탓인지 적막한 해변.
새천년의 새 해맞이 명소가 되었다는 망양해변에서 사동항으로 가는 해안길이 끊긴다.
사동리(沙洞)로 넘어가는 재마루의 에코브리지(Eco-bridge/생태통로)를 통과해 내려
가야 사동항이다.
국가어항 사동항은 기성면을 중심으로 한 어업전진기지, 자연재해 대피항이란다.
그래서 남.북방파제, 방사제, 파제제(波除堤), 물량장, 호안, 선양장, 진입 도로 등 많은
공사를 했다는데도 늙은 나그네의 눈에는 왜 산만하다는 느낌이었을까.
상상 외로 넓은 항만에 비해 정박하거나 출입하는 선박이 적기 때문이었을까.
또한, 바다를 선호하는 강태공들과 스킨스쿠버 동호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어항이란다.
다중(多衆)의 장소가 지저분해지는 것이 불가피한데 낚시꾼들이라 해서 다르겠는가.
낚시 과정에만 의미를 둘 뿐 잡는 족족 도로 풀어주는 조사(釣師)들과 달리 잡아서 먹는
재미를 제1로 하는 꾼들에게 청결한 뒷마무리를 기대할 수 있는가.
잠수해서 물고기를 잡아올린 한 스킨스쿠버를 사이비 라고 호되게 꾸짖는 대장을 본 적
있는데 이처럼 진지한 스쿠버들만 있는가.
사동리에는 해월헌(海月軒)이 있다.
광해군 때 길주목사를 지낸(이조참판에 추증) 해월 황여일(海月黃汝一/1556~1622)의
종택과 별구(別構)로 선조21년(1588)에 건립되었다는 건물이다.
지역 상류 주택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데 군(郡) 발행 팸플릿에만 문화재자료로
(제161호) 기록되어 있을 뿐 다른 아무데서도(문화재청까지도) 뒷받침해 주지 않는다.
해안에서 상거가 있다는 것이 이유지만 실은 주택 양식이나 구조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지나쳤다.
사동항에서 기성항으로 남하하는 해안길도 없기 때문에 해안을 떠나서 또 하나의 에코
브리지가 있는 고개를 넘어가야 한다.
꽤 넓고 여유로운 공간을 확보하고 있으나 활성적이지 못하다는 느낌을 주는 지방어항.
기성항에서 남하하는 해안길 역시 없다.
기성리의 새천년 생명의 숲을 지나고 정지된 기성들의 너른 농로를 지그재그해서 척산
천을 건넌 후 잠시 등산을 했다.
척산천 기성교를 건너 울진공항으로 가는 포장차로(구산봉산로)를 따라 울진공항 아래
해안길을 이어갈 수 있으나 도로를 버리고 산을 타면 지름길이 되겠기에.
판단은 맞았으나 이용하는 이 없어 이미 사라진 산길을 찾아 오르는 일이 쉽지 않았다.
기성들 전주에 붙어있던 해파랑길 안내판이 올라선 울진공항 담장 도로변에도 있다.
해파랑길도 이 지역에서 길 찾느라 고생했나.
해안의 항곡마을 버스정류소를 지남으로서 되찾은 동쪽 바다.
추석 직후라 그런지 청결감을 주는 항곡해변의 자그마한 공동묘역.
모두 봉수리(烽燧)와 표산리(表山)를 하나로 묶어 봉산리가 된 마을 앞이다.
해안으로 길게 이어지는 길은 구산항 한하고 울진공항과 함께 간다.
꽤 긴 공항길을 걷는 동안에 비행기 1대 뜨고 내리지 않는 공항을 왜 건설했는지?
정규항로를 개설했으나 이용자난으로 폐로하고 비행교육 훈련센터 용도로 전환했다나.
수요예측을 어떻게 했길래 이 꼴이며 공항마저 과잉공급인가.
국제공항이라는 이름의 양양공항을 비롯해 개항 휴업 상태인 공항이 수두룩하다.
봉산리 해변도 손질하지 않아도 손색 없는 해수욕장일 것 같다.
반도인 우리나라에서 해수욕장은 종래와 다른 차원의 문제에 봉착해 가고 있다.
해안방어를 이유로 군부대에 의해 출입이 제한되던 해안지역들이 해제됨으로서 수요에
비해 공급과잉 현상이기 때문이다.
다리 '추난개교'를 건너가면 봉산1리의 자연마을 추낭이다.
괴이쩍은 이름들이 걸음을 붙들었으나 물어볼 사람이 없고 관내 홍보자료에도 없다.
울진군, 기성면의 관계자는 물론 잘못 접속된 옆마을(봉산2리) 이장조차도 관할 마을이
아니라는 이유(?)로 모른다는 이름의 내력.
무관심 탓인가 관심 가질 겨를이 없도록 바쁜 삶인가.
동해로 흘러드는 마을옆 계곡물에서 봄이면 향기가 발산되어 춘향천(春香)이라 불렀던
이름이 추난, 추낭으로 변음되었다는 것이 어렵사리 통화한 봉산1리 이장의 설명이다.
봉산2리를 지나고 긴 해안선을 따라 당도한 곳은 구산리(邱山)의 국가어항인 구산항과
해송숲이 우거진 금빛 모래의 구산해수욕장.
신라말엽, 당나라의 구대림(丘大林)이 귀화해 구민산 아래 이 마을에 살았다 해서 구산
(球山)이라 했다거니 구미(龜尾)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마을이다.
고려말, 공민왕때 평해군수 김제가 거북의 꼬리같은 지형을 보고 구미라 명명했다고도.
생몰년을 알 수 없는 김제(金濟)의 호(號)가 백암(白岩)이다.
까닭은 어떠하던 같은 호를 가진 내게 특히 관심 가는 인물임에 틀림 없다.
1392년, 이성계의 쿠데타(易姓革命)로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정으로
망국을 통탄한 그.
출가해 기성면 구산리 북쪽 절벽 밑에 도달, 도성을 향하여 재배하며 통곡한 후 충절시
2수를 남기고 바다로 갔는데 종적이 묘연해졌다는 그.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조22대 정조는 그의 충의를 가상히 여겨 1798년에 친히 초유제문
(招諭祭文)을 지어 그의 도해지(蹈海地)에서 제사를 지내게 했단다.
왕명을 받들어 이 일을 수행한 좌승지 이익운은 도해지의 절벽에 그의 시를 음각했다.
呼船東問魯連津 五百年今一介臣 可使孤魂能不死 願隨紅日照中垠(호선동문노연진오백
년금일개신 가사고혼능불사 원수홍일조중은/동해의 뱃사공 불러 노련진나루를 묻노라.
오백년 왕조의 한낱 신하지만 외로운 영혼이 죽지 않고 뭘 할 수 있다면 붉은 해를 따라
중원땅을 비추기 원하노라 / 노련진은 춘추전국시대의 중국 제나라의 魯仲連이 나라의
패망을 한탄하여 투신 자살했다는 나룻터)
구산리 방파제 축조공사 때 절벽이 폭파됨으로서 흔적 없이 사라졌는데 1985년에 다른
암벽에 다시 새겼단다.
배낭메고 산이나 타고 길이나 걷고 있는 하찮은 늙은이가 감히 갈대삿갓을 쓰고 바다로
간 두문동72현인의 하나인 그와 같은 호를 갖고 있는 것이 송구스럽지만 지금은 왕조가
아니라는 것으로 자위한다.
백암은 내가 태어난 마을 이름이다.
나는 내 의중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고향마을 이름을 사랑한다.
마을이름 하얀 바위는 순수하고 우직함을 뜻한다.
'白'은 완전수 '百'에서 1이 부족한 99를 뜻하며(99세를 백수라 함), 모자라고 덜떨어진
상태를 의미하므로 백지(白紙)와 백치(白痴)로 비하되는 것도 좋다.
급기야 백암은 내 자호(自號)가 되었다.
김제에게도 그럴 개연성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가 군수를 지낸 평해군(고려때) 온정면의 유지들이 그를 배향하기 위해 건립한 운암
서원과 평해의 백암산, 백암온천 등에서 작호(綽號)가 탄생한 것 아닐까.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경북 선산군 옥성면 주아리(현 구미시)에서 출생한 선산김씨인
그에게 그럴 개연성이 없고 호의 내력도 알 수 없다.
구산포는 이조시대에 울릉도 뱃길이 열렸던 포구란다.
울릉도수토사(搜討使)와 관리들이 머물며 순풍때를 기다리던 대풍헌(待風軒)이 아직껏
있으며 현재는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 결정, 집행하는 등 동사(洞舍)로 사용하고 있단다.
한데, 근남면의 구산리(九山)와 한자는 다르지만 같은 이름이라 혼동을 막으려면 여기
에도 기성 또는 근남의 전치어가 필요한 지명이다.
관동팔경 소고
구산소공원을 지나면 이채롭게도 TTP를 심어놓은 구산해수욕장이다.
사빈(沙濱) 침식을 막기 위해 설치한 이안제(離岸堤)란다.
해수욕장에 괄목할 만한 투자를 한 흔적은 없으나 천혜의 백사장이 일품이다.
솔숲이 우거졌으나 역시 간벌을 하지 않아서 쓸모 없이 웃자란 나무들이 애석하다.
해수욕장 이후의 해안로는 없다.
해안을 따라 갈 수는 있지만 운암서원(雲巖書院)에 들르기 위해 도로를 따랐다.
옛 7번국도가 기성로로 강등되어 차량통행이 거의 없는 도로다.
이조순조(純朝)26년(1826), 온정면 반암동에 창건해 백암 김제(白岩金濟), 물제 손순효
(勿薺孫舜孝) 양현(兩賢)을 봉향했던 서원이다.
순조33년(1833)에 온정면 노은동에 이건했으나 고종8년(1971)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고종15년(1878) 현 구산리에 복건하고 백계 김회(伯溪金喜)를 추배하여 배향중이다.
(안내판의 "고종5년(1868) 철원"은 誤記일 것이다. 47사액서원을 제외한 철폐령이 고종
8년 3월에 발령되었으니까)
운암서원을 지나면 곧 황보천 군무교(軍舞橋)다.
다리를 건너기 직전에 북천교비(北川橋碑/碑閣內)와 안내판이 서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61호로 이조 선조때 세웠다는 비다.
황보천은 기성면 황보리와 평해읍 북쪽 오곡리 유역에서 발원해 비옥한 들을 이루면서
동해로 흘러드는 지방2급하천이다.
큰 보(堡)가 있는 노(魯)씨 집성촌에 대형 화재가 발생해 노씨가 떠난 후 입촌한 황(黃)
씨가 마을과 하천의 이름을 '황보'라 했단다.(자기네 성과 보의 합성어)
황보천이 당시의 북천이며 현 군무교 부근에 돌다리를 놓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백성의 애로를 해결하여 주려는 관(官)의 배려가 아니고 민(民)이 스스로 건립한 후 그
내력을 적은 비(碑)란다.
선조36년(1603) 3월에 건립되었다는 이 비는 민을 위한 관이 아니고 민 위에 군림하는
관에 대한 민의 역사적 고발장에 다름 아니다.
군무교를 건너면 평해읍땅이며 도로와 해안 사이가 울창한 송림지대다.
월송정 진입로 입구에는'黃氏始祖祭壇園','平海黃氏大宗會'가 송립 속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 황씨의 본산(本山)이 이곳 평해 월송리란다.
중국후한 광무제때(AD28년) 구대림(丘大林)과 함께 교지국(交趾國)에 사신으로 가던중
풍랑으로 평해 월송포에 표착해 정착한 유신 황락(儒臣黃洛)이 도시조(都始祖)다.
이어서 평해중.공업고등학교가 있다.
교문 안쪽 중앙에는 바위에 음각된'切磋琢磨'가 등.하교생들의 인사를 받고 있다.
절차탁마는 시경(詩經)을 인용한 논어의 말이다.
如切如磋 如琢如磨(옥이나 돌 등을 갈고 닦아 빛을 낸다.學而篇)
서말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잖은가.
자연 발광체 외에는 갈고 닦아야 빛을 낸다.
그 과정의 장(場)이 바로 학교다.
"학문과 덕행, 기예 등을 배우고 닦기를 등.하교때마다 다짐하라"고 세워놓은 이 학교의
교육지표일 텐데 평해대로 때에 이미 확인했으므로 군무교를 건너 해안으로 갔다.
월송리 해안과 잘 관리된 송림 속을 지그재그하며 도착한 종착지는 월송정(越松亭).
고려27대 충숙왕(忠肅)13년(1326))존무사(存撫使/고려때 백성의 질고와 수령의 殿最를
살피는 일을 담당한 지방관) 박숙(朴淑)이 처음으로 건립했다는 누정이다.
그러나 안축(安軸/1287~1348)의 취운루(翠雲樓)기문과 이곡(李穀/1298~1351)의 시를
근거로 그 이전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 것 같다.
'월국(越國)에서 소나무 묘목을 가져다 심었다'해서 ‘월송(越松)’이라 했단다.
관동지방을 유람하던 신라의 4선(仙/영랑, 술랑, 남석, 안상)이 ‘달밤에 솔밭에서 놀았다'
하여 ‘월송정(月松亭)’이라 했다고도 하나 이는 사리에 맞지 않는 주장이다.
신라는 고려 이전이며 그들이 유람할 때는 아무 누정도 없었으니까.
그보다 4선의 실체가 없다.
삼국유사를 보면 개별적인 이름은 나오나 4화랑이 한 조를 이루어 유람한 사실이 없다.
(본란 '이설 관동별곡' 5회 글 참조)
관동(關東)이란 관내도(關內道/경도, 경기)의 동쪽을 의미하는 포괄적 지역을 지칭하며
대관령(大關嶺) 동쪽인 강원도(영동)지방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관동8경은 영동지방에서 가장 빼어난 경관의 명승지 8곳을 말하며 울진군의
명승지가 이에 포함된 것은 당시의 울진군(평해군)이 강원도에 속했기 때문이다.
'팔경(八景)'은 중국 송대(宋代)의 그림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에서 시작되었단다.
후난성 둥팅호(湖南省洞庭湖)의 남쪽 링링(零陵)부근인 샤오수이강(瀟水)과 샹장강(湘
江) 합류지점의 빼어난 경치를 8소재로 그린 그림의 제목(畵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북송(北宋)의 화가 송적(宋迪/1018~ '79)이 8쪽으로 완성했는데 8폭의 그림을 일컫는
'8경'이 아름다운 자연경관의 대명사로 자리매김 되었다는 것.
무수한 시인묵객이 관동의 명승을 노래하고 그림에 담았으나 8경을 뽑은 이는 고려의
안축, 이조의 허목(죽서루기), 이중환(택리지)과 이조 후기의 화가 정선(관동8경도)과
박순우(금강별곡), 허필(관동8경도병) 등이다.
북에서 남으로 시중대, 총석정, 삼일포, 해산정, 청간정, 영랑호, 청초호, 낙산사,경포대,
죽서루, 망양정, 월송정 등 세 임호정(臨湖亭)과 유일한 임계정(臨溪亭/臨江亭), 8곳의
임해정(臨海亭)에서 8경을 뽑았기 때문에 일부가 상이한 것이 당연하다.
이는 시대적 영향보다 보는 사람의 상이한 관점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주목되는 점은 강원도관찰사 정철이 금강산과 관동지방의 명승들을 유람한 후 노정(路
程)과 소감을 노래한 '관동별곡'에 월송정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
해금강에서 망양정까지 관동지역을 두루 들렀지만 남단 월송정에는 가지 않은 것 같다.
8경을 정의하지는 않았다 해도 그에게 월송정은 명승이 아니었듯이 그는 명승 편식가
(偏食家)라 할 수 있겠다.
8도를 누빈 이중환 역시 자기의 저서 택리지(擇理志)에서 8경으로 월송정 아닌 시중대
(侍中臺)를 뽑았다.
시중대는 강원도 흡곡(통천/이북) 해안에 있는 바위를 말하며 관동8경중 최북단이다.
나 또한 시중대와 총석정(통천), 삼일포(고성)는 이북땅이기 때문에 가보지 못하였지만
이조후기 조선지리학의 1인자인 이중환의 선택에 동의한다.
월송정을 8경에 포함시키는데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중건은 거듭하였으나 망양정처럼 이사다니지 않은 누정인데도 위상이 확고하지 못하고
관동8경의 제1경에서 경외로 밀려나는 등 오락가락하는 월송정.
높은 곶(串)지역이 아닌, 평편한 솔숲 속의 애매한 임해정.
누정 마루에 올라섬으로서 11일간의 이설 관동별곡 부르기를 마쳤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