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자료 소개: 주로 책과 신문 등 출판물에서 눈에 띄는 틀린 말, 어색한 말들을 다루었습니다. 웹 게시판에서 주고받은 내용들도 편집돼 있습니다. 우리말의 특성과 원리를 좀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듯’의 올바른 띄어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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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베개를 찾아 베고 평소대로 이마에 팔을 얹고 낮잠에 들 듯이 그렇게 가셨다는구나"
- 신경숙 「그가 모르는 장소」『문학과사회』1999년 겨울호 14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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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인용에서 ''들 듯이''는 ''들듯이''로 붙여 써야 한다. ''낮잠에 드는 것처럼''의 뜻이지 ''낮잠에 들 것처럼''의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학과지성사의 책에서 줄기차게 틀린 것이 발견되는 것이 이 ''듯(이)''의 띄어쓰기다.
이것은 사실 그렇게 혼동될 만큼 난해하지는 않다. 문장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면 분명하게 구분되기 때문이다.
어간이 ㄹ받침으로 끝나는 단어에서 뒤에 어미 듯(이)가 오는 경우가 관형형 -ㄹ(을) 뒤에 불완전명사 듯(이)가 붙는 경우와 혼동되어 이를 잘못 띄어 쓰는 사례이다.
-듯(이): 용언의 어간 뒤에 붙는 어미
먹듯, 웃듯, 가듯, 놀듯, 물밀듯, 울듯, 맴돌듯(동사 뒤): -는 것처럼
소가 웃듯: 소가 웃는 것처럼
곱듯, 맵듯, 길듯(형용사 뒤): -ㄴ 것처럼.
꽃이 곱듯: 꽃이 고운 것처럼
-ㄹ(을) 듯(이): 이때의 ''듯''은 의존명사로 미래의 예상, 추측 등을 나타낸다. ㄹ(을)은 관형형 어미로, 이 때 발음은 ''뜻''으로 난다. (받침이 있는 경우 ''을''이 붙지만 ㄹ받침 아래에 ''-을''이 오면 축약된다.)
먹을 듯, 웃을 듯, 갈 듯, 놀 듯, 울 듯, 맴돌 듯(동사 뒤): -ㄹ 것처럼
※고울 듯(Χ), 매울 듯(Χ): 일반적으로 형용사 뒤에는 쓰이지 않음
특히, 어간이 ㄹ로 끝나는 경우를 보자.
어간 -ㄹ 뒤에 붙는 어미 ''듯(이)''은 붙여 쓰고, 이때 발음은 ''듯'' 그대로임.
놀듯: 노는 것처럼, 맴돌듯: 맴도는 것처럼
어간 -ㄹ에 관형사형 어미 ''ㄹ(을)''이 붙어 축약된 뒤에 의존명사 ''듯(이)''이 올 때는 띄어 쓰고, 이때 발음은 ''뜻''으로 남.
놀 듯(뜻): 놀(을) 듯이, 놀 것처럼. 맴돌 듯(뜻): 맴돌(을) 듯이, 맴돌 것처럼
즉 놀다, 돌다, 밀다, 맴돌다, 줄다, 길다, 갈다 등과 같이 어간이 ㄹ로 끝나는 용언은 그 뒤에 ''듯(이)''가 올 때, 표기상으로는 완전히 같지만 ''듯''이 어미인 경우와 의존명사인 경우가 있고, 이에 따라 띄어쓰기를 구별해야 한다.
이를 띄어쓰기에서 정확하게 구별해주어야, 두 가지 경우가 다 올 수 있는 문장에서 글쓴이의 의도가 정확히 반영된다.
3. 수관형사 띄어쓰기
맞춤법의 기본 원칙 중 하나가 단어는 떼어 쓰되 조사는 붙여 쓰는 것이다. 현행 한글맞춤법에서는 예전보다 이 원칙을 다소 완화하여 보조용언, 성과 이름, 단음절이 연이어질 때 등에서 붙여 쓰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 언어생활을 관찰하면(인쇄물․웹문서 등), 맞춤법 규정에서는 다소 벗어나더라도 독서 능률의 향상 등을 위해서 더 많이 붙여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아홉명 가운데 여덟 사람은 그날 밤 …
…국왕의 사자, 두명의 런던 중앙경찰재판소 경관 …
…커다란 비단 머릿수건 네개에 편지를 가득 담고 …
…함께 거주해왔던 열네살 난 소년 …
-E. P. 톰슨 지음, 나종일 외 옮김『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상, 창작과비평사, 2000.1.20 초판, 23-26면
셈의 단위가 되는 명사는 한 음절이 많고, 문장 속에서 뒤에 조사가 오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독서 능률의 향상을 위해 때때로 이런 명사들을 앞에 오는 수관형사에 붙여 쓰고자 한다면 어떤 기준을 세워야 할까.
① 언어의 조합을 고려한다.
우리말+우리말: 네 개, 두 달, 일곱 마리 등으로 떼어 쓴다.
우리말+한자어: 아홉 명, 열두 권, 세 종(種) 등으로 떼어 쓴다.
한자어+한자어: 삼십명, 십이권, 오년, 십여년 등으로 붙여 쓴다.
② 서수냐 기수냐를 고려한다.
서수: 십오층, 사월과 오월, 열네살, 육학년, 아홉시 십오분 등으로 붙여 쓴다.
기수: ①의 기준에 따라 표기하되, 경우에 따라 떼어 쓸 필요도 있다.
※ "삼촌이 열네살 되던 해": ''열네살''은 서수에 해당하므로 붙여 쓴다.
※ "삼촌과 나는 열네 살 차이다.": ''열네 살''은 기수에 해당하므로 떼어 써도 좋으나 붙여 써도 혼란은 없다.
③ 뒤에 조사가 붙는지(성분), 문장의 호흡과 의미 분절이 어떠한지 고려한다.
(1순위/2순위)
한달 동안 / 한 달 동안
열두 달 만에 / 열두달 만에
삼백명 가운데 열여섯명은 / 삼백명 가운데 열여섯 명은
십여년간 / 십여 년간
세 가지 의문이 …/ 세가지 의문이 …
세 가지뿐이다./ ―
한해 두해 세월이 …/ 한 해 두 해 세월이 …
한 해 두 해도 아니고 / ―
(이집 저집 다니며, 이 집 저 집으로 다니며)
※ 단, ''한''은 자주 쓰이며 수보다 단위에 가까우므로 붙여 쓰는 것이 자연스러운 독서에 도움이 된다.(특히 조사가 붙지 않는 경우)
한가지 고민은, 물을 한바가지 퍼서 등
※ ''한달 동안''을 취하면 ''열두달 만에''를 함께 취하고, ''한 달 동안''을 취하면 ''열두 달 만에''를 함께 취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같은 문장이나 같은 단락에 나오지 않을 때는 둘 사이의 통일성을 고려하지 말고 ''한달 동안''과 ''열두 달 만에''를 함께 취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④ 이상의 준거로 판단하되 글의 성격, 단어의 출현 빈도, 그리고 유사한 단어군 혹은 텍스트 전체 속에서의 일관성과 형평성 등을 살펴서 자연스러움을 획득할 수 있어야 한다.
4. ''계시다''와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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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빠 엄마에게 아기를 가질 수 있게 해준 분이 계신단다.
-"삼신할머니와 아이들", 창작과비평사, 1999, 초판 1쇄,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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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다''로 쓸 데에 ''계신다''와 같이 잘못 쓰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윗 글에서 "해준 분이 계시단다"로 쓰는 것이 맞는 표현이다.
계시다는 ''있다''의 존칭형이다. 따라서 ''있다''로 바꾸었을 경우를 생각해보면 "해준 분이 있단다"가 되지 "있는단다"라고 하지는 않는다.
''있다(계시다)''는 경우에 따라 ''먹다''와 같은 동사처럼 활용되고, ''아름답다''와 같은 형용사처럼 활용되기도 한다.
밥을 먹는/먹은 사람: 시제가 달라짐(동사)
아름다운 사람: ''먹는''에 해당하는 활용형 없음(형용사)
학교에 있는 사람: ''있은'' 사람은 과거(동사와 같음)
일 안하고 가만히 있는다: 현재 진행(동사와 같이 활용됨)
⇒''먹다''와 견주어짐
그런 사람이 있다: 현재 상태. ''있는다''라고 하지 않음(형용사와 같이 활용)
⇒''아름답다''와 견주어짐
5. ''다습다''와 ''다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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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의 이름
-실천문학의 시집 94 정윤천 시집의 제목, 실천문학사 1993, 초판 1쇄
...키 작은 산들이 마을 쪽으로 내려오고 싶어 안달하는 모습들이 다숩고 무엇보다...
-이재무 시집 ''몸에 피는 꽃'', 창작과비평사, 1996년 2월, 초판,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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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습다''는 우습다와 같은 ㅂ변칙 형용사입니다. 표준어는 ''다숩다''가 아니라 ''다습다''입니다. 어감 때문에 굳이 다숩다라고 써야 할 필요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따습다''는 다습다의 센말입니다.
따라서 "따숩던" "다숩고"는 "따습던" "다습고"로 써야 합니다.
꾸미는 말로 쓰일 경우 ''다스운'' ''따스운''이 되는데, 이를 축약해 쓰면 ''다순'' ''따순''이 됩니다. 이를 ''다슨'' ''따슨''으로 잘못 쓰는 예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 까다로운 문법은 아닌데, ''다순'' ''따순''과 뒤섞이는지 ''다숩다'' ''따숩다''와 같이 잘못 쓰는 예가 나타납니다.
''우스운'' ''우습고''를 잘못 쓰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혼동이 올 경우 ''우습다''의 활용에 대입해보십시오.
입말로 쓰이기는 그 외에도 따시다, 뜨시다, 따셔 등등 여러 가지가 있지요.
6. 푸른/ 파란
제가 본 그림책 중에 "푸른 개"(파랑새어린이 1999)라고 있습니다. 프랑스 그림책인데, 원제는 Le chien bleu입니다. 그림도 분명히 ''파란''색으로 그려져 있구요.
하지만 사실 ''파란 개''라고 하는 것보다 ''푸른 개''라고 하는 쪽이 더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것 같기는 해요.
이것말고도 ''파란''과 ''푸른''을 구분해서 쓰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어떻게 보세요?
blue와 green을 명확하게 ''파란''과 ''푸른''으로 구분해서 써주어야 할까요?
음, 이 문제는 어린이책에서 생각하는 것과 일반단행본에서 생각하는 것이 조금 다를 수 있을 것 같네요.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bleu면 ''파란''이 정확한 역어인데, 역자가 푸른과 파란의 구별의식이 없어서 ''푸른''으로 번역할 수가 있겠고, 질문자의 판단처럼 신비로운 느낌 등 어감 때문에 ''푸른''을 일부러 썼을 수도 있겠습니다.
일상언어에서 푸르다와 파랗다가 구별없이 쓰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파란 하늘과 푸른 하늘이 꼭 같은 경우에 섞여 쓰인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것이 무슨 색 구분 개념으로 달리 쓰이지는 않는 것 같군요.
대개 그렇듯, 푸르다와 파랗다도 따져볼수록 구분해서 쓰는 쪽으로 가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green은 주로 녹색으로, blue는 파란색으로 옮겨야 하지만 푸르다와 파랗다가 여기에 딱 대응한다고 볼 수는 없겠습니다.
현재 글말에서는 푸른 하늘, 푸른 바다, 푸른 숲 등 푸르다가 더 광범위하게 쓰이고, 파랗다는 좀더 blue 쪽에 가까운 좁은 범위의 색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입말에서는 푸르다보다 파랗다가 더 자주 쓰이는 것 같습니다.
7. 모티브/ 모띠프/ 모티프, 딜레마
영어로는 motive(모티브)
불어로는 motif(모띠프)
독어로는 motiv(모티프)이며,
영어권에서는 비평용어로서 motif로 쓰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민담 연구 및 서사학, 소설론 등에서 광범위하게 쓰이는 용어로 작품에 등장하는 주제 단위를 가리킵니다.
한글표기로 모티브, 모띠프, 모티프 중 어느 것을 취할 것인가.
대다수가 모티프로 쓰고 있으며, 이를 따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모티브''라고 할 경우 행위, 의식의 동기(動機)를 가리키는 뜻으로 혼동될뿐더러 이 용어가 영어권에서 먼저 발달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굳이 이를 취해야 할 이유가 없겠고,
''모띠프''라고 할 경우 유독 다른 발음을 배제한 채 불어 발음을 채택할 이유가 없겠고,
''모티프''는 독어 발음과 같지만, 일반적인 불어발음 표기와도 일치하고, 다른 두 표기보다 의미전달에 장애가 적으며, 비평용어로서 우리말 표기로 거의 정착돼 있으므로 이를 취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참고: 모티프의 예
가면, 간통, 감방, 갑작스런 발병, 결투, 광기, 권태, 근친상간, 낙원, 다윗, 도취, 마법 걸기, 묵시록, 어둠, 복수, 불꽃, 사냥, 사탄, 세계 멸망, 심연, 아더왕, 잃어버린 아들, 연금술, 예술가, 유아 살해, 이상향, 이중역할, 자기주장, 제물, 창문, 카인과 아벨, 판도라, 피그말리온, 황금시대 등(Horst S. und Ingrid Daemmrich, 『문학의 주제와 모티프』, 1987)
박해, 거지, 경쟁자, 고등사기꾼, 구혼 시험, 기아(棄兒), 꼭두각시, 독재정치와 폭군살해, 동경, 두 여자 사이의 남자, 뒤바꾸뀐 아이, 똑똑한 바보, 매춘부, 반역자, 부자 갈등, 비밀결혼, 선보기 여행, 신의 심판, 악녀, 약탈혼, 예언, 요부, 우울증 환자, 의적, 이중인격, 구두쇠, 정조 서약, 지하세계 방문, 찬탈자, 처녀영웅, 퇴폐, 환시, 황금욕, 흡혈귀 등 (Elisabeth Frenzel, 『세계문학의 모티프』, 1976/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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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티프''라는 외국어 표기에 대한 글쓰기를 본 김에 저도 한마디.
우리는 Dilemma를 ''딜레머''로 표기하는데 이것은 ''딜레마''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Dilemma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철자도 그대로입니다. 물론 발음도 딜레마로 되지요. 이 철자를 영어와 독일어에서도 그대로 쓰는데, 각기 ''딜레머''와 ''딜레마''로 발음되지요. 불어에서는 dilemme ''딜렘므''이지요. 이쯤되면 아시겠지만 우리가 쓰고 있는 ''딜레머''는 영어식 표기에 불과한데 계속 쓸 필요가 있을까요? 저는 ''딜레마''로 바꿀 것은 제안합니다.
8. 얻다/ 엇따/ 어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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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나도 땅 임자로 등재되어 있어라?"
"물론이지요. 나 혼자 이 많은 땅을 가져서 엇따 쓰겠소."
-김주영 대하소설 [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1999년 12월 30일, 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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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다''가 줄면 ''어데다'' ''얻다''가 된다. 요즘 입말에서는 ''어디다'' ''어따''로 소리내는 경우가 많다.
''어데다'' ''얻다''로 써야 어법에 가장 맞는 표기이다.
위 글에 나오는 ''엇따'' 역시 ''얻다''로 써야 한다.
소리나는 대로 쓰면 ''얻따'' 혹은 ''어따''가 되며 ''엇다''나 ''엇따''로 써도 읽을 때 발음은 구별되지 않는다. 그런데, ''얻다'' 역시 발음은 ''얻따'' ''어따''이므로 ''얻다''로 쓰면 어법에 맞을 뿐 아니라 입말 발음을 살리려는 취지에도 어긋나지 않는다.
어법을 깨뜨려서 굳이 입말 분위기를 더 살리고자 할 경우에도 ''엇따''보다는 ''어따''로 쓰는 것이 알맞다.
9. ''아니오''와 ''아니요''
''아니오''와 ''아니요''에 대한 국립국어연구원의 설명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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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오''를 써야 할 때가 따로 있고, ''아니요''를 써야 할 때가 따로 있습니다. 먼저 ''아니오''를 써야 할 경우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는 동사, 형용사의 어간 뒤나 선어말어미 뒤에 붙는 어미입니다. 따라서 이 때에는 ''-오''가 없으면 온전한 문장이 되지 않습니다.
(1) 철수가 산에 가오.
(2) 어서 오시오.
(3)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오.
위의 (1), (2)에서 '' 오''를 빼고 보면 ''철수가 산에 가-''나 ''어서 오시-''처럼 온전한 문장이 되지를 않습니다. 이런 경우에 대해 한글 맞춤법 제15항의[붙임 2]에서는 비록 그 발음이 앞의 ''ㅣ''모음 때문에 ''요''로 나더라도 ''오''로 적도록 규정해 놓고 있습니다. (3)도 ''-오''를 빼고 보면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가 되어 역시 온전한 문장이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오''로 적어야 합니다. 이 경우의 ''아니오''는 형용사 ''아니다''의 어간 ''아니-''에 종결어미 ''-오''가 붙은 것입니다.
위의 (3)과는 달리 ''아니요''로 써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요''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아니오''를 써야 할 경우와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요''는 (4)에서처럼 자체로 문장 성분을 이룰 수 있는 단어나 구의 뒤에, 또는 (5), (6)에서의 ''-아/어''나 ''-지''와 같은 종결어미 다음에 붙는 조사입니다. (4)~(6)에서는 ''요''가 들어가지 않더라도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쓰는 말이 됩니다. 다만 ''요''가 있는 문장은 말을 듣는 상대방을 높여 주지만 ''요''가 없는 문장은 그렇지 않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4) 철수가(요) 어제(요) 참외 서리를(요) 했어(요).
(5) 여기 좀 앉아(요).
(6) 내 그림 멋있지(요).
이제 ''아니요''를 써야 하는 경우가 어떤 경우인지 분명해졌습니다. ''요'' 없이 ''아니''만으로도 쓸 수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쓰면 버릇없다고 꾸중을 듣게 될 경우에 쓰는 것입니다. 바로 (7)과 같은 때입니다.
(7) 심부름 갔다 왔니?
아니(요), 아직 못 갔다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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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로서는 (7)의 경우도 꼭 ''아니요''로 해야 하는지 의심스러운데, 좀더 흥미가 있으신 분은 이어지는 [토의: ''아니요''에 대한 의문]을 읽어보십시오.
친절한 답변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니요''가 되는 경우는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1.(7)의 ''아니요''에서 ''아니''가 무엇인지 설명이 없습니다. 부사(혹은 감탄사) ''아니''에 ''요''가 붙은 것으로 보는 것 같은데, 형용사 ''아니다''의 종결형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요. 언어 습관상 ''아니오'' 다음에 컴마를 찍지만 종결형어미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7)의 용례에서, ''아니''라고 하면 부사(혹은 감탄사)이지만, ''아니오(요)''의 경우는 ''아니오'' 혹은 ''아니어요''라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즉 실제 언어생활에서는 ''아뇨''라고 소리낼 텐데, 이는 ''아니오'' 또는 ''아녀요(아니어요)''의 준말일 것입니다.
2.저는 존칭의 뜻을 더하는 조사 ''요''가 붙은 ''아니요''가 성립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공을 던져 주세요, 빨리요.
의 ''빨리-요''와 같이 ''아니-요''가 분석되지는 않습니다.
가능한 경우는
"내일 야유회를 같이 가십시다."
"좋아요. 전 ''찬성''요. ''yes''요."
"전 ''아니''요."
와 같은 예를 들 수 있겠죠. 이 때의 ''아니요''는 [''아니''이어요]의 뜻이죠. 즉 ''찬성요''의 ''-요''와 같은 ''요''입니다. 이것은 다소 무리하게 ''아니요''란 표현을 만들어 쓴 경우죠.
3.따라서 (7)의 ''아니요'' 역시 ''아니오''로 써야 맞다는 것이 현재의 저의 판단입니다.
4.연구원의 설명과 같이 존칭의 뜻으로 ''요''가 붙는 경우라 해도 ''아니요''를 사전에 올릴 필요가 없겠습니다. 왜냐하면 ''-요''에 대한 설명으로 족하니까요.
토론1에 대한 국립국어연구원의 답변=
''아니요''의 ''아니''는 ''아니다''의 ''아니-''가 아닙니다.
(1) 철수는 집에 있니? 응, 있어./아니, 없어.
(2) 철수는 집에 있니? 예, 있어요./아니요, 없어요.
위의 예문에서 보듯이 ''아니요''의 ''아니''는 ''응''과 상대되는 말로 ''응''과 같은 감탄사입니다. 그러므로 ''응/아니''의 ''아니''에는 ''-요''가 붙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재토론=
친절한 답변 감사합니다.
1.''아니오''와 ''아니요''에 대한 그간의 국어연구원의 설명을 이해합니다. ''아니''(감탄사)와 ''아니''(감탄사)+''요''(조사)로 정리를 하는 것도 가능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제가 표준국어대사전을 보지 못해, 사전에는 이에 관해 어떤 내용이 나와 있는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2.언어규칙이나 맞춤법의 맞고 틀림에 대한 설명은 수학문제의 답과 같이 명확한 정답이 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언어생활과 언어현실에 비추어서, 이미 알고 있고 통용되는 어법에 비추어서 어느 것이 좀더 그럴듯한 설명이냐가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3.''아니오''와 ''아니요''에 대한 논의도 이런 차원에서 어떤 표기가 더 어법과 언어현실에 부합하는지가 관건이 될 것입니다.
4,
(1)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오.
에서 ''아니오''가 가능함은 그리 논란의 소지가 없습니다.
(2) 어서 오시오.
(3) 이것은 책이오.
(4) 눈물을 흘리오.
의 경우와 같이 앞의 ''ㅣ'' 모음 때문에 ''요''로 소리나도 ''오''로 적지요.
이런 ''아니오''는 입말보다 글말에 어울리고, 격식언어 혹은 구투에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5) 내 잘못이 아니야.
(6) 제 잘못이 아니어요.
와 같이 쓰이는 것이 요즘 일상언어의 표현이지요.
5. (6)의 ''아니야''와 ''아니어요''는 실제 입말에서는 대개 준말로 발음됩니다. 이때의 표기는 무엇일까요. ''아니야''→''아냐''는 비교적 명확합니다. 그런데 ''아니어요''는 어떻게 될까요?
그렇다면 현행 맞춤법에서 ''-이에요''가 허용되고 있으므로 ''아니에요(아녜요)''도 허용하는 것이 현실언어에 더 부합한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6.문제는 ''아니오'' 혹은 ''아니요''가 단독으로, 혹은 문두에 쓰이는 경우입니다. 국어연구원에서는
(12) 심부름 갔다 왔니? 아니(요), 아직 못 갔다 왔습니다.
(13) 철수는 집에 있니? 아니, 없어./아니요, 없어요.
의 두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면서 ''감탄사+조사''의 형태로 ''아니''에 ''요''가 붙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물론 이러한 설명도 가능하고 간결하게 정리가 되는 분석이며, 이렇게 규정한다고 해서 크게 어법상의 혼란이 일어나지는 않는다고 생각됩니다.
7.그러나 현실언어와 다른 용례들에서 관찰되는 어법에 비추어서, 상당한 의문점이 떠오릅니다.
우선 감탄사에는 수화자(受話者)를 높이는 조사 ''요''가 잘 붙지 않습니다.
(14) 아차, 틀렸군요./오, 불쌍한 것./아뿔싸, 놓쳐버렸네.
와 같이 감탄사는 성격상 독립적이어서 ''요''를 붙이면 몹시 어색합니다. 물론 감탄사에 ''요''가 아주 올 수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15) 심부름 갔다 왔니? 아니(오/요).
의 경우를 보면 독립적으로 쓰이므로 감탄사로 볼 수 있지만, 감탄사에 ''요''가 붙기는 어려우므로 ''아니오(요)''를 감탄사+조사로 보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오히려 이는 곧잘 독립적으로 쓰이는 ''좋아(요)'' ''싫어(요)'' ''미워(요)'' 따위와 마찬가지로, 용언(''아니다'')의 활용형의 하나라고 보아야지요.(감탄사로 분류하더라도 형태상으로는 활용형. 그리고 ''안'' ''아니'' ''아니다(안+이다?)''의 관련성도 탐구할 과제이지요.)
8.''아니오'' ''아니요''는 관습적인 표기이지 일상의 구어에서 발음하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요즘의 입말과 가까운 표기는 ''아뇨''일 것입니다. 이를 분석해 볼 때, 표현의 일관성을 고려해야 하므로
(16) 먼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구료. 아니오/아니요. (고생이랄 게 뭐 있겠소.)
(17) 나 먹을 것은 남겨놔라. 아니오/아니요. (다 먹을래요.)
에서 (16)은 (1)과 같이 종결어미 ''오''가 온 경우로 ''아니오''로 써야 하고,
(17)은 소리나는 대로는 ''아뇨''일 텐데, 서술표현의 일관성을 유지하려면 이는 ''아니어요''가 준 형태여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아니어요''가 준 형태는 ''아녀요''로, 아주 준 형태는 ''아뇨''로 표기해야 하며, 이 때 ''아니요''나 ''아니오''는 부적절한 표기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런데 ''아니다''는 ''이다''와 흡사하게 활용됨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즉 ''책이오/책요''를 분석하면 ''(책)이+오/(책)요''가 되는바, ''아니+오/아뇨''와 같이 분석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니오''나 ''아뇨''를 표기로 취해야 할 것입니다.
즉 이를 딱 굳어진 감탄사로 분류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으며, 감탄사로 보아도 표기는 ''아니오''나 ''아뇨''가 더 적절하다고 하겠습니다.
9.사전들을 보면 ''아니야'' ''아니오'' 등을 감탄사로 표제어로 하고 있습니다. ''좋다'' ''좋아''도 감탄사로 표제어로 올라 있기도 합니다. 이런 단어들을 감탄사로 잡더라도 형용사 ''아니다'' ''좋다''와 별개의 말이 아닌만큼 이 관련성을 사전에 설명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감탄적 용법과 감탄사의 구분이 확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 어법의 이해에 도움이 돼야 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10.이를 정리하면, ''아니오'' ''아니요''와 관련해서
아니오/아뇨/아녀요/아녜요
등의 표기가 가능하고, 그 각각의 쓰임새가 다르며, 하나의 표기에 대해서도 약간 다른 층위의 분석들을 해볼 수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아니요''는 일반적인 쓰임새의 표기로는 알맞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10. 비표준어의 올바른 사용
연신(연방), 얼핏(언뜻, 얼른), 섬찌ㅅ하다(섬뜩하다, 섬쩍지근하다, 선득하다), 튕기다(퉁기다, 튀기다), 떨구다(떨어뜨리다), 거진(거의)...... 괄호안은 표준어이고 그 앞은 비표준어라고 사전에는 밝혀놓았습니다. 앞의 말을 표준어로 고쳐줄 것인가 말 것인가는 책의 성격에 따라 창비에서는 달리하고 있습니다. 시의 경우는 비표준어를 고치지 않고 거의 그대로 놔두는 것 같습니다. 소설의 경우는 저자의 동의를 구해서 대화가 아닌 지문(바탕글)에서는 고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떨구다''는 잘 고치지 않습니다. ''고개를 떨구다''의 경우 ''고개를 떨어뜨리다''로 고치면 이상하기 때문이지요.
한편 사전에서 지시한 표준어가 적확한지도 따져보아야 하겠습니다. ''거진''의 경우 사전에는 경기 강원 경북 제주의 방언이라고 하고 ''거의''로 가라고 하는데 ''거지반(居之半)''의 준말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거지반''의 준말로 비표준어라고 한다면 ''거진''을 ''거의''로 고치기보다 ''거지반'' 또는 ''거반''으로 고치는 것이 더 올바를 수도 있지요.(물론 ''거의''로 고치는 것이 무난하겠죠.) ''얼핏''의 경우 많이 쓰고 비표준어로 어려운 측면이 많긴 하지만 표준어로 고칠 경우는 ''언뜻'' 외에 ''어설피'' ''설핏''으로도 고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연신''의 경우 ''연방''으로 고칠 경우 뉘앙스가 많이 달라지는 문제가 있더군요. 더 나은 말이 없을까요.
이상의 소견에 대한 자문을 구합니다.
1. 얼핏, 섬찟하다, 튕기다는 묘사문(소설, 수필 등)에서는 대체로 그대로 두어야 한다고 봅니다. 표준어보다 보편적으로 쓰이거나, 표준어의 어감이 오히려 낯설기 때문입니다. 논술문이나 격식언어에서는 좀더 표준말과 견주어보면서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2. 연신, 거진, 떨구다는 위 어휘보다 덜 보편적으로 쓰인다고 봅니다. 역시 묘사문에서는 표준어로 바꿀지 신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표준어로 고친다면 글이 표현이 조금 더 일반적이고 문어적인 느낌을 주는 쪽으로 달라질 것 같습니다.
3. 시의 경우도 비표준어의 사용이 의미있는 것인지 검토하고, 표준어와 견주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발음에 의지해 어법에 맞게 적지 못한 탓이거나, 말을 가다듬어 쓰는 훈련이 부족해 빚어진 결과인 예가 많기 때문입니다.
4. 사전에 오른 방언들을 찾아볼 때, 그 분포 지역들이 과연 얼마나 광범위한 과학적 조사를 토대로 작성된 것인지 의심스러운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방언이나 비표준어, 파격어의 사용은 언어를 살아있게 하는 요소입니다. 집필 과정에서는 규정언어의 압력이 지나치게 작용하면 글이 생동감을 잃게 됩니다.
교열 과정에서는 교열자의 권한의 범위와 우리말 가꾸기 사이에서 긴장을 늘 놓지 않아야겠지요.
11. 뿐/ 나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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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은 장차 전신하여 국민 일반의 문자로 자리잡을 수 있는 그 자체였고, 뿐 아니라 보편적 표음문자로서 세계적 지향이 있었다.
-임형택 [한민족의 문자생할과 20세기 국한문체], [창작과비평] 2000년 봄호, 290면.
모두 나름의 고민이 있지 않은가요?
이 책에 씌어진 것은 모두 나름의 고민을 하는 어린이들 이야기예요.
-오승희 동화집 [할머니를 따라간 메주], 창작과비평사, 2000년 1월 초판, 4,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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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과 ''나름''은 불완전명사로 독립적으로 쓰일 수 없는데, 위 글에서는 독립해 쓰였다.
뿐 아니라 →그러할 뿐 아니라, 그뿐 아니라
모두 나름의 →모두 제 나름의
와 같이 써야 어법에 정확히 맞는 표현이다. ''때문''의 쓰임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처럼 독립적으로 쓰일 수 없는 단어가 따로 쓰이는 현상은 언어사용의 실제에서 종종 나타난다. 조사 ''보다''가 "보다 나은 삶"과 같이 쓰이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삼일 전 SBS 뉴스에서도 서두에서부터 앵커가 이와 같이 ''보다''를 부사로 사용해서 뉴스를 전했다.
언어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과 같으니, 이런 현상을 무조건 틀렸다고만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자주 쓰거나 오히려 표현이 어색해지게 쓰지는 말아야겠고, 가능하면 어법에 맞게 말하고 글쓰도록 해야겠다.
※''뿐''의 품사는 한글학회 사전에는 매인이름씨(불완전명사)로 되어 있어서 모두 떼어 써야 하고, 금성출판사와 동아출판사 사전에는 의존명사(불완전명사)와 조사(보조사)로 되어 있어서 조사인 경우에는 붙여 써야 한다.
즉 "너뿐이다" "승리뿐이다" "싫다뿐이지" 등의 경우도 한글학회 사전에 따르자면 "너 뿐이다" 등으로 떼어 써야 한다. 이를 조사로 볼 수도 있지만 접미사로 간주할 수도 있겠고, 표기법에서는 붙여 쓰는 것이 좋겠다.
※"뿐만 아니라"는 관용구로 굳어져 인정받은 경우이다.
소생은 야멸치다란 말을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저의 독서경험과 인생경험에서 거의 야멸치다가 쓰이는 용례를 접하지 못했습니다. 용례를 발견하시는 분은 알려주십시오. (설마 사전에 오자가 난 것이 굳어진 것은 아니겠죠.)
12.-듯이/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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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주장하듯 동질성이 선이고 이질성이 악은 아니며 그 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통일이나 한반도 문제를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절실하다. 나아가 통일된 사회문화의 전망은 이질성과 동질성의 변증법적 사고 어딘가에 놓여 있다.
- 김귀옥, [통일, 이질성과 동질성의 변증법](또하나의문화 통일소모임 『통일을 준비하는 사람들』서평), 『창작과비평』2000년 봄호, 40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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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인용문 첫 문장을 보자.
"이 책이 주장하듯 동질성이 선이고 이질성이 악은 아니며 그 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책이 주장한 내용''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다.
1.동질성이 선이다.
2.동질성이 선이고 이질성이 악이다.
3.동질성이 선이 아니고 이질성이 악도 아니다.
4.동질성이 선이 아니고 이질성이 악도 아니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일 것이다).
물론 앞의 서술내용까지 상기하면서 곰곰이 생각하고 되풀이 읽으면, ''이 책이 주장한 내용''은 3이고 "그 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는 필자의 생각임을 알 수 있다. (명민한 독자는 바로 의미파악을 하겠지만.)
그러나 이 문장은 그 자체가 의미맥락을 특정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뜻이 모호한 문장이다.
''듯이'' ''처럼''을 써서 연결된 문장은 대개 이런 모호함을 동반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전체 문맥을 참조해서 아무리 해독해도 뜻을 확정할 수 없다.
이런 문장은 순조로운 독서를 방해하고 글읽기를 괴로운 일로 만든다.
''-듯이'' ''-처럼''이 들어가도 뜻이 명확하게 글을 쓰자.
13. 한참/ 한창
최근 출간된 창비책에서 "아직 한참때에"란 구절을 보았습니다. 가장 성한 상태를 나타내는 ''한창''을 시간이 경과한 동안을 나타내는 ''한참''으로 잘못 쓰고 있었습니다.
제가 본 어느 교정지에는 "내가 고개를 한참 뒤로 젖히고 올려다본"이란 구절이 있었습니다. 이때의 ''한참''은 ''한껏'' 정도로 고칠 수 있을 것 같군요.
14. 푸른/ 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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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서정주 [푸르른 날], 시집 [귀촉도](1948)
푸르른 솔
세월이 모질구나
그래서 더욱 푸르른......
-[남궁산의 판화 이야기], [삶이 보이는 창] 13호(2000년 신년호) 화보
지금은 거친 산천
하늘만 푸르릅디다
아지랭이만 탑디다
할미 설움이 강을 이루고
푸르름으로 피어나도
-김명환 [봄], 시집 [어색한 휴식](갈무리, 2000) 초판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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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용언들의 활용을 눈여겨보자.
①이르다(言, 早): 이른, 일러. 내가 일러 둔 대로, 때가 너무 일러서.
②이르다(到着): 이른, 이르러. 서울역 앞에 이르러.
③푸르다: 푸른, 푸르러. 날마다 더 푸르러지는 가을 하늘.
보통 ①을 ㄹ변칙(''일러''), ②③을 러변칙(''이르러'' ''푸르러'')이라고 한다. ㄹ변칙 용언은 많지만 러변칙은 그렇지 않다.
이때 ''이른''이나 ''푸른''의 규칙적 활용이 인정되고, ''푸르른'' ''이르른''은 인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푸르른''과 ''이르른''은 어법에 어긋난 말이다.
그런데 시어에서는 ''푸르른''이 많이 쓰인다. ''푸른''의 급박한 느낌을 완화하고 어조를 늘여 운율을 여유있게 하기 위해, 같은 ''르'' 소리를 추가한 것이다.
이 ''푸르른''이 자주 쓰이다 보니, 이 말이 마치 바른 말인 양 오해되어 쓰이기도 한다.
''푸르러''에서 역으로 유추되어서 ''푸르른''이 그럴 법하게 쓰인다고 볼 수도 있다.
위 시의 "푸르릅디다"와 "푸르름" 등도 ''푸릅디다'' ''푸름''으로 써야 어법에 맞지만, 이런 연유로 태어나 쓰인 말이다.
▶''이르른'' ''이르릅니다'' 등도 마찬가지 경우지만, ''푸르른'' ''푸르릅니다''에 비해 훨씬 드물게 나타난다.
15. 거라/ 너라
▶요즘 대인기인 드라마 [허준](MBC TV)을 보다 보면 다음과 같은 대사가 등장한다.
(궁중의 내의원에서. 의녀 예진이 들어오자)
"앉거라."
(의녀 예진에게 다른 의녀가 바느질을 지시한다.)
"…내일 아침까지 마쳐놓거라."
그 외에도
"잠시 기다리거라" "애쓰거라"
등등으로 빈번하게 "~거라"를 붙여 말한다.(2000년 3월 20일 방영분)
요즘 연산군과 인수대비의 갈등이 극한으로 치닫고 있는 사극 [왕과 비](KBS 1TV)에서도 역시 이 "~거라" 어미가 붙을 데 안 붙을 데를 가리지 않고 자주 쓰인다.
윗사람의 격식을 차린 지시나 명령에 쓰이고 있는 이 어미는 이렇게 아무 동사에나 붙을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명령형 어미 "~거라"는 ''가다'' 또는 ''~가다''에만 붙는 활용형이지 두루 통용되는 어미가 아니다.
가거라, 나가거라, 물러가거라, 돌아가거라, 걸어가거라 등
따라서 위 드라마의 예에서는 앉거라→앉아라, 마쳐놓거라→마쳐놓아라, 기다리거라→기다려라, 애쓰거라→애써라와 같이 써야 바르다.
▶서로 짝이 되는 말 ''가다''와 ''오다''에만 다른 동사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명령형 어미가 붙는다는 것도 우리말의 묘미 중 하나다.
가다(거라 불규칙 동사): 가거라, 나가거라, 물러가거라 등
오다(너라 불규칙 동사): 오너라, 들어오너라, 달려오너라 등
그러나 심지어 ''오너라''조차 ''오거라''가 되는 언어현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일부 사전에서는 ''가다''뿐 아니라 다음 동사에서도 ''거라 불규칙''을 인정하고 있다.(금성판 국어대사전 등)
자다: 자거라
일어나다: 일어나거라
그렇지만 이 두 단어 외에도, 실제 언어 현장에서는 위 드라마에서도 보았듯이 ''~거라''를 붙여 말하는 경우가 흔하다. 즉 어디까지 어법상으로 인정해야 하는가가 문제인데, 나는 이를 ''가거라''에 붙는 ''~거라''가 준용되어 생기는 현상으로 보고 싶다.
(앞으로 어느 시기에 가서는 ''어/아라''와 더불어 ''거라''를 일반적인 명령형 어미로 인정하는 것이 더 언어현실에 부합하게 될까?)
16. 아직/ 여태
''아직''은 서술어나 문장 앞에 쓰여 말하는 사람이 어떤 일이나 상태 또는 시간이 어떻게 되기를 기다리는데, 그 때까지는 그래도 시간이 남아 있는 상태임을 나타낸다.
이와 비슷한 말로는 ''여태''가 있는데 그 뜻과 느낌이 다르다.
''여태''는 어떤 일이나 상태나 시간이 이미 어떻게 되었을 것이라고 또는 되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못한 상태에 쓰인다. 어떤 대상이나 일이 현재 좋은 상태에 있을 때에는 쓰기 어려운 말이다.
이런 의미 차이를 염두에 두고 보면
* 회장이 아직/여태 안 왔다.: 아직, 여태 모두 쓸 수 있으며
*''그는 아직 어리다.''는 가능하지만 ''여태 어리다''는 잘못된 표현이다.
*''할아버지는 아직 정정하시다''는 가능하지만 ''여태 정정하시다''는 어색하게 느껴진다.
17. 칠흙/ 칠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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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는 아무 거리낌 없이 수사에 응할 입장이 못 되었기 때문에 경찰을 피해 숲으로 달아나 버린 것이다. 그 때는 칠흙같이 어두운 밤이었지만 경찰은 너무나도 쉽게 알프레드를 추격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야광 운동화를 신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이클 콕스 지음, 조규화 추천, 서연희 옮김 『패션이 팔랑팔랑』, 김영사, 1999, 1판 1쇄, 8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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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어디가 잘못 되었을까요.
초보자가 아니고 편집교정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누구나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흙칠''이란 말은 있지만 ''칠흙''이란 말은 없습니다. 모르죠, 흙칠할 때 쓰는 흙을 칠흙이라 불러도 될지.
''칠흑 같은 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의 칠흑은 漆黑입니다.
검은 칠을 한 장롱이나 문갑을 보면 반들반들 윤기가 나면서 아주 새카맣죠. 그렇게 칠을 해놓은 것처럼 새카맣다, 깜깜하다는 뜻이 아닐까요.
18. 깊숙이/ 깊숙히
"7가지 과일 성분이 머리결 깊숙히!"
우리 집에서 쓰는 애경산업의 ''리앙뜨 과일샴푸'' 용기에 씌어 있는 문구입니다.
★한글맞춤법 제25항 규정은 이렇습니다.
제25항 ''-하다''가 붙는 어근에 ''-히''나 ''-이''가 붙어서 부사가 되거나, 부사에 ''-이''가 붙어서 뜻을 더하는 경우에는 그 어근이나 부사의 원형을 밝히어 적는다.
1.''-하다''가 붙는 어근에 ''-히''나 ''-이''가 붙는 경우
급히 꾸준히 도저히 딱히 어렴풋이 깨끗이
[붙임] ''-하다''가 붙지 않는 경우에는 소리대로 적는다.
갑자기 반드시(꼭) 슬며시
2. 부사에 ''-이''가 붙어서 역시 부사가 되는 경우
곰곰이 더욱이 생긋이 오뚝이 일찍이 해죽이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어휘가 있을 때 그것이 어느 경우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해봐야 합니다.
''깊숙히/깊숙이''의 경우 ''깊숙하다''가 있으므로, 어근에 ''이/히''가 붙어 부사가 되는 위 25항-1의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가 붙어야 하는지 ''-히''가 붙어야 하는지는 이 조항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이와 관련된 규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51항 부사의 끝음절이 분명히 ''이''로만 나는 것은 ''-이''로 적고, ''히''로만 나거나 ''이''나 ''히''로 나는 것은 ''-히''로 적는다.
그리고 1,2,3으로 세 경우의 예가 나오는데, 여기에 예로 든 어휘는 그를 따르면 되지만, 그렇지 않은 어휘는 어떻게 소리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깊숙히/이''가 분명히 ''깊숙이''로만 소리나는지, 아니면 ''히''로 나거나 ''이'' ''히''로 나는지를 알아야 ''깊숙히''인지 ''깊숙이''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소리나는지는 여기에 적용되는 확실한 법칙이 없기 때문에 정답을 쉽게 찾을 수 없습니다.
맞춤법을 좀 아는 사람이면 틀리지 않고 쓰는 ''깨끗이''도 ''깨끄치/깨?치''(깨끗히)로 발음하는 사람이 있고(이것을 꼭 ''히''로 소리나는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지만요), 글쓸 때 ''일일히'' ''번번히''로 잘못 쓰는 사람도 많이 보아 왔습니다. 이 어휘들은 맞춤법에 ''1. ''이''로만 나는 것''의 예로 나와 있지요.
★''-하다''가 붙은 말 중 어근이 ㄱ으로 끝나는 경우, 사전들을 보면 대개 어근에 ''이''가 붙어 부사가 되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렇지만 ''솔직히''는 한글맞춤법에 ''3.''이, 히''로 나는 것''의 예로 나와 있어서 ''-히''가 붙습니다. ''1. ''이''로만 나는 것''의 예에는 ㄱ받침이 있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깊숙이/히''도 ''이, 히''로 소리나는 것으로 ''깊숙히''가 돼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표준국어대사전 등 사전들에서 ''깊숙이''가 맞는 것으로 올려놓고 있습니다. 즉 ''이''로만 소리나는 것으로 본 거죠.
(결국 ''깊숙이/히''는 사전을 찾아 확인하는 수밖에 없네여.)
★시험삼아 ''넉넉히/이''를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니, ''넉넉히''로 올라 있고, ''넉넉이''는 ''넉넉히''의 옛말이라고 되어 있네요.
요즘은 ''-히''를 붙여 발음하는 경우가 많아지는 추세인데, 제 개인 생각은 편집자들이 이런 추세를 그대로 반영하기보다는 ''-이''를 제대로 찾아서 써주었으면 합니다.
또 ''(안개가) 자욱하다''를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니 ''자욱이''로 올라 있고, ''자욱히''는 ''자욱이''의 북한어라고 하였군요. 저의 언어감각과 요즘 경험으로는 거의가 ''자우키(자욱히)''로 발음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전통적인 발음, 윗 세대들의 발음은 ''자우기(자욱이)''가 우세하였기 때문에 ''자욱이''로 올라 있는 것 같습니다. ''자욱이''의 발음과 표기도 유지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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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샴푸를 쓰다 보면 가끔 황당하다고 느껴지는 것이, 자세히 보면 이런 글귀가 적혀 있지요.
"사용 후 물로 충분히 씻어내지 아니하면 탈모 또는 탈색의 원인이 될 수 있으므로 물로 충분히 씻어내십시오."
충분히 씻어내는 것이 얼만큼 씻어내는 건지 모르겠단 말씀입니다. 너무 많이 헹구다 보면 물이 아깝고, 샴푸 기운이 다 빠져나간단 말입니다. 안 그래요?
19. 치닫아/ 치달아
70년대 후반인가 80년대 초반이던가요, 혜은이의 ''제3한강교''라는 노래가 유행을 했죠.(나이든 혜은이는 엄청 토실토실-뚱뚱해졌지만, 길옥윤이 마악 발탁해서 키울 무렵엔 어린 소녀 같고 웬지 구슬퍼 보이는 모습이었어요.)
그는 이렇게 불렀습니다.
강물은 흘러갑니다~아아~ 제3한강교 미츨.
당신과 나의 꿈을 실코서, 마음을 실코서.
즉, ''밑을''을 ''미츨''로 발음하였고, ''싣고서''를 ''실코서''로 발음하였죠.
''밑을''은 ''미틀''로, ''싣고서''는 ''싣꼬서''로 발음하면 정확한데, ''싣고서''는 실제로는 ''식꼬서'' ''시꼬서'' 정도로 소리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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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 한가로운 앞마당의 감나무,
아시터 옛집과 내가 헤어지고 나면 서로 어디까지 치닫을지 모른다
-조용미 [옛집], 『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을 날아오르다』, 창작과비평사, 2000.6.10., 초판,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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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보면 ''치닫다''에서 온 ''치달을지''가 ''치닫을지''로 잘못 표기되어 있습니다.
어학 용어로는 정확히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는데, 이런 현상은 어법을 오적용(誤適用)한 경우지요.
* ''밑을''을 ''미츨''로 발음: ''같이→가치''와 같이 구개음화하는 것으로 오인한 발음임.
* ''싣고서''를 ''실코서''로 발음: ㄷ변칙 동사 ''(짐을) 싣다''의 활용형이 ''실어서'' ''실으니'' 등으로 되는데, 이로부터 유추하여 ''싣고서'' ''싣는데'' ''싣지만'' 등 규칙적으로 활용되는 경우조차 ''실고서'' ''실는데'' ''싣지만''이 되는 것으로 오인함. 즉, 변칙 활용형을 토대로 역행적으로 어법을 적용해서, 마치 원형이 ''실다''이고 이것이 규칙적으로 활용되는 것처럼 인식하고 발음함.
* ''치달을지''를 ''치닫을지''로 표기: ㄷ변칙 동사의 활용형을 규칙 동사처럼 잘못 표기함. ''걷다(步)'' ''묻다(問)'' ''(물을) 긷다'' ''내닫다'' ''눋다'' 등은 ㄷ변칙 동사인데, 사용 빈도가 적은 단어의 경우 정확한 활용형을 쓰는 데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함.
※ ''제3한강교''가 처음 나왔을 때는 가사가 꽤 야하고 퇴폐적이었죠.
어제 처음 만나서 사랑을 하고, 우리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밤이 새이며는 첫차를 타고, 이름 모를 거리로 떠나갈 거예요~오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노래를 듣다보니, 가사가 좀 이상하다 싶더군요. 이렇게 ''건전하고 건설적인'' 가사로 바뀌었던 겁니다.
오늘 다시 만나서 사랑을 하고, 우리들은 맹세를 하였습니다.
이 밤이 새이며는 첫차를 타고, 행복 어린 거리로 떠나갈 거예요~오오~
(어쨌거나 내 얘기는 아닌개벼유.)
※ 아주 쉬운 퀴즈 하나. 제3한강교의 현재 이름은?
20. 발자국/ 발짝/ 발걸음
누구나 알고 있다 할지라도 용기를 가지고 올리리라 결심하고.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앞의 예문에서 발자국은 그릇된 표현이다. 발자국의 사전적 의미는 ''발로 밞은 곳에 남아 있는 자국''이라는 뜻이기에 "한" "두" 라는 수관형사와 썩 잘 어울리지 않는다.
앞의 예문처럼 단위를 표현하고자 할 때는
''발짝''이 옳다. 예) 다섯 발짝만 앞으로 가거라.
한편 "발자국 소리"라는 표현도 그리 탐탁하지 않다. 발자국이 흔적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에 행위를 표현하는 ''발걸음''이란 단어를 이용해 "발걸음 소리"라고 해야 될 듯.
21. 같이/ 같은
''같이'', ''같은''의 띄어쓰기 요령을 알아볼까 합니다.
1) 쏜살같이;
''같이''가 ''처럼''의 뜻을 가지면 조사이므로 체언에 붙여써야 합니다.
2) 결코 혼인 같은 것은 하지 않을 것이다;
''같은''은 형용사의 관형사형이기때문에 조사가 아니므로 띄어써야 합니다.
-->> 쉬운 구별 방법 하나 알려드릴게요:
''같이'' 나 ''같은''을 ''처럼''으로 바꾸어보고 말이 되지 않으면 조 사가 아니므로 띄어쓰면 됩니다. 예를 들어, 위의 2)문장을 바꾸어 보면 ''결코 혼인처럼 것은 ~
~'' 이 되니까 말이 되지 않죠? 그래서 띄어서 ''혼인 같은''이라고 쓰면 됩니다.
''같게''도 이와 같은 요령으로 띄어쓰면 되구요.
<새 맞춤법과 교정의 실제>. 어문각, 1998(재판 4쇄), pp. 38-39를 참조했습니다.
반갑습니다. 좋은 착안이군요.
보충 설명을 조금 해보겠습니다.
1.같게, 같은, 같고, 같으니, 같아 등은 ''같다''의 활용형이니까 떼어써야 하지요.
2.''같이''는 활용형이 아니고 ''어간+이(접미어)''의 형태죠. 활용형이 아니라는 것은 두루 붙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른 형용사들을 생각해보면
아름다이, 슬프이, 붉이, 굵이, 다르이....
와 같은 말은 없죠.
3.그렇지만 같이, 높이, 좋이, 널리, 달리.... 와 같이 일부 형용사에서는 이가 붙어 쓰이죠. 이 단어들은 활용형이 아니므로 사전에 표제어(별도 단어)로 올리고 부사가 되지요.
4.그런데
''(나와) 같이 가자''와
''사과같이 빨간 얼굴''의 ''같이''를 보면 기능이 서로 다르죠.
이때 후자를 ''처럼''의 의미에 해당하는 조사로 보는 것이죠.
5.그런데
''사과와 같이 빨간 얼굴''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에서는 ''-와 같이''가 ''-처럼''의 의미가 되는데, 이때는 다시 ''같이''가 부사가 되어 떼어쓰죠.
6.즉 ''같이''가 체언 뒤에 바로 붙고 ''처럼''의 뜻일 때는 조사로 붙여쓰고, 그 외는 떼어써야 하지요. ''같게'' ''같아'' ''같고'' 등은 ''같다''의 활용형이니 떼어쓰죠.
7.''우리 같이 놀자''
''우리같이 놀아라''의 경우의 차이점을 알 수 있겠죠.
''우리 같이 놀자''의 ''우리''는 주어죠. 즉 ''우리가'' ''우리들이''의 구어에서의 축약형태죠.
따라서 체언 뒤에 ''같이''가 바로 왔다고 해서 문장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바로 붙이면 문장의 의미를 바꿔놓거나 잘못된 떼어쓰기가 될 수 있죠.
8.창비에서는 ''것 같다''를 떼어씁니다. ''듯하다''를 붙여쓰는 것을 보면 ''것 같다''를 꼭 떼어써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것 같다''를 한 단어로 규정하지 않는한 떼어써야 하겠죠.
또, ''이와같이'' ''그와같이'' ''이와같은'' ''그와같은''을 붙여쓰기도 하는데, ''다름아니라'' 등을 붙여쓰는 것과 같은 이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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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띄어쓰기''는 잘못된 것이고 ''떼어쓰기(떼어 쓰기)''라고 해야 맞다고 누가 주장하는 것을 보았는데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연구 바랍니다.
22. 겉잡다/ 걷잡다, 낱알/ 낟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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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어요.
-린드그렌 동화집, 김라합 옮김 『엄지소년 닐스』9면(2000년 8월 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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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잡다: 거두어 붙잡다.
걷잡을 수 없다: 기우는 형세를 어떻게 거두어 잡을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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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와 협의에 의해 인지는 생략합니다.
이 책의 판권은 지은이와 문학과지성사에 있습니다.
-박라연 시집 [공중 속의 내 정원], 문학과지성사 2000년 9월, 초판 외 문학과지성사 간행 책 판권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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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문장 중 아랫 문장은
''...판권은 지은이에 있고, 문학과지성사에 있다'' 는 뜻이다. 그렇다면 윗 문장은
''지은이에 의해, 협의에 의해 인지는 생략한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와의''는 일본어투이므로 사용하지 말자고 하는 주장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일본말의 영향이 ''-와의''의 남용을 야기하고, ''-와의''의 남용이 우리 문장을 일그러뜨리는 것이 사실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와의''가 올 자리에 ''-와''를 대신 써서 이상한 문장을 만드는 것도 문제다.
지은이와 협의에 의해 인지는 생략합니다. 는
지은이와 협의하여 인지는 생략합니다. 라고 하거나, 차라리 ''-와의''를 써서
지은이와의 협의에 의해 인지는 생략합니다. 라고 쓰는 것이 낫다.
''-와의''를 사용한 문장은 일반적으로 자연스럽고 좋은 우리말 문장은 아니다. 그러나 긴축이 필요할 때 ''-와의''를 적절히 사용하는 것도 꼭 배척할 일은 아니다.''-와의''를 사용하지 않으려면 문장 운용을 폭넓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1) 너와의 약속을... →너와 한 약속을...
(2) 연인과의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 →연인과 만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처럼 고칠 수 있지만 (2)의 경우 별로 자연스럽지 못하다.
24. 그슬다/ 그을다
오랜만입니다. 오늘은 ''그슬다''와 ''그을다''에 대해 알아보려합니다.
일단 사전적 정의로는,
* 그슬다(그스니, 그스오): 불에 겉만 조금 태우다
예문: 헤어드라이어에 머리카락을 그슬렸다.
(이 문장에서 ''그슬렸다''는 ''그슬다''의 피동사형으로 쓰임)
* 그을다: - (햇볕이나 연기에 오래 쬐어) 빛이 검게 되다.
- 얼굴이 검게 되다.
예문: 굴뚝이 연기에 그을어 시커멓다.
또한 ''햇볕에 그을은 얼굴''은 틀린 표현이고 ''햇볕에 그은 얼굴''이 맞는 표현이라고 합니다.
다 아는 거라구요? 그럼 문제 하나! 다음 문장은 강석경의 <능으로 가는 길>의 한 구절입니다.
''바다를 향해 각기 앉은 사람들은 바람막이로 조약돌을 쌓아 촛불을 지키지만 초는 조약돌까지 시커멓게 ( ) 파라핀 냄새를 온 바닷가에 진동시킨다.''
이 문장의 괄호 안에 ''그슬리고''가 맞을까요, ''그을리고''가 맞을까요? 정답은 맨 아래에 있습니다.^^
이리저리 생각을 맞춰보니 ''그슬리고''가 맞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참고로 작가도 ''그슬리고''를 썼습니다. 아쉽게도, 경품은 없네요...^^ 죄송! 맞힌 분은 어휘력과 판단력에 자족하시는 걸로...저처럼한참을 헤매신 분은, 같이 한글공부 합시다!^^
25. 종내/ 종래
''종내''와 ''종래''는 발음이 똑같이 ''종내''로 나기 때문에 종종 혼동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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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인은 슬픔과 절망을 순식간에 반전시키는 신선한 유머를 시의 뇌관으로 장착시켜 그런 현실을 살짝 뒤집으면서 종래는 비판의 핵심에까지 밀어붙인다.
-윤병무 시집 [5분의 추억] 초판 앞표지 날개 문안, 문학과지성사 2000.10
문화적으로 미리 배제된 학생들은 자신이 와 있을 자리가 아닌 곳에 와 있고 알고 싶지 않은 것을 배우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히고 종래 흥미를 잃게 된다.
-김종엽 [독서 칼럼], 중앙일보 2000년 12월 16자 4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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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쓰인 ''종래''는 모두 ''종내''의 오기입니다.
''종래''와 ''종내''의 구분은 국어사전을 보면 됩니다.
종내(終乃): 끝끝내. 필경에.
종래(從來): 지금까지 내려온 그대로. 이제까지.
-[엣센스 국어사전] 제4판 제6쇄, 민중서림 2000.1
한자 세대에게는 이런 표현이 익숙한데, 그러나 한글 표기를 정확히 분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침내''나 ''결국''으로 바꾸어 뜻이 정확히 통하면 ''종내''입니다.
26. 옥의 티/ 옥에 티
1. ''옥의 티''가 맞냐, ''옥에 티''가 맞냐를 놓고 창작과비평사의 홈페이지(www.changbi.com) 자유게시판에서 논란이 되었습니다.
이 논란은 ''쯧쯧''님이 사전을 찾아보라, ''옥에 티''가 맞다고 해서 아마 평정이 된 것 같습니다. (그 주요 내용은 이 글 끝에 갈무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옥에 티''만 맞는 것이 아니고, ''옥의 티''를 쓰는 게 더 적절하거나 적어도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쯧쯧''님의 충고대로 저도 사전을 찾아보았지요. 서너 가지(국립국어연구원 표준국어대사전, 금성판 국어대사전, 한글학회 우리말 큰사전, 동아 새국어사전)를 찾아보았는데, 표제어(玉) 아래에 옥이 들어간 속담들이 나옵니다. ''옥에는 티나 있지'' ''옥에도 티가 있다'' ''옥에 티'' 이렇게 항목들이 있군요. 대개 비슷하네요. 이것이 사전 서로 베끼기의 결과인지, 너무나도 확실한 사안이라 공통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옥에는 티나 있지"가 속담으로 유효한지는 의심스럽군요. 하여튼 ''옥에 티''에 대해서는 ''속담''으로 "모든 점이 다 좋은데, 아깝게도 한 가지 작은 흠이 있다는 말"이라고 풀이가 되어 있습니다(동아 새국어사전).
그러면 ''옥에 티''가 맞고 ''옥의 티''는 틀렸느냐.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음 두 가지 문장을 볼까요.
(1) 옥에(도) 티가 있다고, 그 애는 다 좋은데 성질이 좀 급해.
(2) 그 애는 다 좋은데, 성질이 좀 급한 것이 옥의 티지.
먼저, ''옥에''는 명사+조사의 형태로 ''에''가 처소를 나타내는 조사이니까, 문장에서의 구실은 서술어를 수식하게 됩니다. "옥에 티가 있다" "옥에 금이 갔다"와 같이 쓰이죠.
''옥의 티''는 명사구로 ''옥에 있는 티''를 뜻하며, 문장에서의 구실은 하나의 명사처럼 여러 구실을 할 수 있습니다. ''얼굴의 점'' ''손톱의 때''와 같은 형태의 말이죠.
따라서 2번 문장은 ''옥의 티''라 표기해야 바르고, ''옥에 티''라 표기하면 틀린 표기이거나 어색한 표기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샐러리맨'' 님이 쓰신 글에서
(a) …소설 당선작에 옥에 티가 있어 올려봅니다.
(b) …앞뒤가 맞지 않아 옥에 티라 생각됨.
(c) …문장력이 탁월하고, 지적한 옥에 티는…
과 같은 대목에서도 ''옥에 티''가 아니라 ''옥의 티''라 쓰는 것이 바른 문장입니다. 적어도 (a)와 (c)는 ''옥의 티''가 더 자연스럽습니다.
2. 그렇다면 사전에 나온 ''옥에 티''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이 표현은 ''옥에도 티가 있다''는 속담의 축약형입니다. 사전의 판단은 ''옥의 티''라 하지 않고 축약형 속담인 ''옥에 티''를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이겠지요. 이에 따르자면 ''쯧쯧''님의 말씀대로 이 속담의 의미를 담는 것이면 ''옥의 티''가 아니라 ''옥에 티''라고 표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을 ''옥의 티''로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얼굴의 점'' ''손톱의 때''라 해야 맞는 것이고, ''얼굴에 점'' ''손톱에 때''라고 하면 ''얼굴에 점이 많다'' ''손톱에 때가 끼었다''와 같이 서술어가 와야 되지요. 즉 엄연히 ''얼굴의'' ''손톱의''를 쓸 경우와 ''얼굴에'' ''손톱에''를 쓸 경우가 다르다는 말이죠. 속담이라고 해서 굳이 ''옥에 티''라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전들에 ''새 발의 피'' ''바람 앞의 등불''은 ''의''로 나와 있는데, ''옥의 티''는 왜 ''옥에 티''라 해놓았는지 모르겠습니다.
3. 여기엔 발음상의 문제가 들어 있습니다.
''옥의 티'' ''얼굴의 점'' 등도 발음할 때는 보통 ''옥에 티'' ''얼굴에 점'' 이렇게 소리나고, ''○○의 ○○''와 같은 표현은 사실 좀 문어적인 표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할 때 "옥에 티가 있다고" "옥에(의) 티라고는 할 수 있지만"과 같이 발음은 다같이 ''에''로 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옥에''와 ''옥의''를 구별해서 표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즉 표기에서는 ''옥에''와 ''옥의''를 가려 써야 한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참고로 ''표준어 규정'' 중 ''표준발음법''을 보면 제5항 단서조항에 "… 조사 ''의''는 [에]로 발음함도 허용한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예로, ''우리의''의 발음은 ''우리의''이지만 ''우리에''라고 하는 것도 허용한다는 것이죠. 이는 실제로 조사 ''의''의 발음이 ''에''로 많이 나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우리에 소원은 통일'' ''너에 진실을 알고''와 같이 ''에''로 소리내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너의''이고, ''의''로 표기해야 맞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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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옥에 티''와 ''옥의 티''를 구별하여 전자를 속담의 준말로 보고 그렇지 않은 경우 후자를 써야 한다는 원장님의 견해에 선뜻 동의를 할 수 없습니다. ''황금의 티''나 ''수정의 티''가 아니고 하필이면 ''옥의 티''일까요. 이 역시 속담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앞엣집'' ''뒤엣집''은 각기 ''앞에 있는 집'' ''뒤에 있는 집''이 사이시옷(말을 축약하기 위한 사이시옷, 통사적 파격)을 써서 줄어든 것입니다. 물론 이는 현재 ''앞의 집'' ''뒤의 집'' 식으로 쓰는 게 일반적이고 더 줄어들면 ''앞집'' ''뒷집''으로 되지요. 그러나 ''눈엣가시''처럼 ''눈의 가시''로 변하지 않고 (처소격 조사에 사이시옷이 붙어) 굳어진 것이 있지요. 저는 ''옥에 티''도 ''눈엣가시''와 같은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단 ''옥엣티''라고 하지 않고 ''옥에티''라고 하는 경우는 격음과 경음 앞에 사이시옷을 쓰지 않는 표기법 때문이지요.
그리고 ''옥에티''라고 붙여쓰지 않는 것는 사이시옷이 없어짐으로 해서 붙여쓰면 이상해지기 때문이지요.
저는 ''옥에 티''가 일반적으로 맞다고 생각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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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옥에 티''와 ''옥의 티''를 구별하여 전자를 속담의 준말로 보고 그렇지 않은 경우 후자를 써야 한다는 원장님의 견해에...
제 견해가 위와 같은 내용은 아니었죠.
''옥의 티''로 표기하는 게 옳겠다는 것이고, 사전을 존중하더라도 ''옥의 티''로 표기하는 것을 틀렸다고 할 수는 없겠다고 했습니다. 요컨대 ''의''와 ''에''를 구별해 사용하자는 것이죠. 속담의 의미와 관계없는 ''옥의 티''는 논외고요.
2.
''눈엣가시''와 같은 경우라고 하면서 "''옥에티''라고 붙여쓰지 않는 것은 사이시옷이 없어짐으로 해서 붙여쓰면 이상해지기 때문"이라는 해석은 틀린 것 아닌가요. 경음이나 격음이어서 사이시옷이 필요없을 때 붙여쓸 것을 떼어쓸 까닭이 없습니다.
''눈엣가시''는 한 단어로 판단해서 별도 표제어가 된 것이고, ''옥의 티''는 세 개의 단어로 된 속담으로 처리된 것이죠.
3.
사전을 보니(동아 새국어사전)
개 발에 주석 편자
개 밥에 도토리
쇠귀에 경 읽기
새 발의 피
바람 앞의 등불
이렇게 되어 있네요. ''쇠귀에 경 읽기''는, ''쇠귀의 경 읽기''가 되면 쇠귀가 경을 읽는 주체가 되니까 ''쇠귀에''로밖에는 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네 가지는 어떤 때 ''에''가 오고 어떤 때 ''의''가 오는지 알 수 없습니다. 물론 ''개 발에 주석 편자''''개 밥에 도토리''의 ''에''는 부가, ''새 발의 피'' ''옥의 티''의 ''의''는 부분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에''와 ''의''로 쓰는 것에 대한 해석이죠. 그럼 ''바람 앞의 등불''은?
4. 조사 ''의''와 ''에''가 입말에서 혼동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옥의 티''냐 ''옥에 티''냐와 같이 논란의 소지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발음상의 유사성으로 인해 ''의''와 ''에''의 구별이 무시되는 예도 많습니다. 이런 혼동을 방치하지 많고 ''의''와 ''에''에 대한 구별을 지켜주는 노력이 우리말을 가꾸는 길이라고 봅니다.
27. ''광포''와 ''광폭'' - 한자음 똑바로 읽기
…농군들이 이땅에서 사라지면서 우리들의 삶은 삭막해지고, 각박해지고, 광폭해져가고 있다.
-김용택 [땅의 소중함 왜 모르나], 동아일보 2001년 1월 6일자 ''내가 요즘 읽는 책''란
광폭한 세상을 두려움 없이
뛰며, 노닐며, 발버둥치며
-이승철 시집 [총알택시 안에서의 명상] 초판, 실천문학사, 2001년 1월, 23면
"광폭해지고" "광폭한"의 ''광폭''은 ''광포(狂暴)''의 잘못이다.
暴자는 ''포''와 ''폭'' 두 가지 음으로 읽는다. 자전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暴 사나울 포, 급할 포, 갑자기 포, 모질게 굴 포, 불끈 일어날 포
쬘 폭, 나타날 폭, 나타낼 폭
요즘은 한자를 거의 노출해 쓰지 않기 때문에, 노출된 한자의 음을 정확히 몰라 오독하여 생기는 오류는 자주 발생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표식''(標識, ''표지''의 잘못), ''광폭''과 같이 자주 쓰는 단어에서 실수가 계속되는 것은 한자의 상형성이 주는 이미지가 너무 강렬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인간이란 원래 실수하게 생겨먹은 존재이기 때문일까?
어쨌든 ''광포'' 같은 말까지 ''광폭''으로 버젓이 주요 일간신문에 박혀 나온다는 것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소설가 김성동씨는 이런 경험을 이야기한다. 1970년대 말이나 80년대 초쯤일 터인데, E여대 학생이 다음과 같이 묻더란다.
"황철영의 [용지]란 작품 읽어보셨나요?"
무슨 소린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으니, 그런 중요한 작품을 안 읽었느냐고 한참 핀잔을 하더란다. 짐작이 갔지만, 그저 잠자코 있었다고.
黃晳暎의 [客地] 즉 황석영의 [객지]의 오독이다. 나아가, 황철영의 [직직옥수](纖纖玉手, 섬섬옥수)란 말까지 들었다니 좀 과하기는 과하다. 모르면 찾아보거나, 아는 척을 안하면 될 텐데, 모르는 줄을 모르니 코메디가 나온다.
나 역시 80년경 황석영을 황철영이라고 부르는 걸 들은 적이 있고, 그 무렵 신문연재 소설을 쓰던 李貞桓이 ''이정환''인지 ''이정항''인지 나 자신이 늘 헷갈려했던 기억이 난다.
60년댄가 70년대 어느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罹災民''을 ''나재민''이라고 읽어 웃음거리가 되었던 일은 유명한 일화다.
한자를 노출하면 이런 일은 언제고 일어날 수밖에 없다. 대학에서 한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나 원로 한학자들도 종종 실수를 한다. 명백한 오독도 있지만, 음이 정착되지 않은 글자들도 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에는 80, 90년대에 책 날개에 ''시집을 상자했다''고, ''상재(上梓)''가 줄기차게 ''상자''로 나오곤 했다. 그 사람이 말하면 맞는 말이거니 싶은 문인, 교수들이 ''태작(태作, ''태''자가 안 나와요. 馬자 옆에 太자)''을 ''타작''이라고 하는 경우도 여러번 보았다. 그럴 때면 도리어 사전에 맞다고 되어 있는 ''상재'' ''태작''이 아니라 ''상자'' ''타작''이 맞는 것도 같았다.
*보너스
瀑은 자전을 보면 세 가지 음으로 나온다.
瀑 소나기 포, 거품포. 폭포 폭. 물결 일 팍, 용솟음할 팍
그런데, 일상적으로 많이 쓰는 단어에서 ''포''나 ''팍''으로 읽어야 할 경우는 거의 없다.
瀑布: 폭포.
瀑沫: 포말.
瀑瀑: 팍팍. 물이 솟아나오는 모양이나 그 소리.
폭포는 자주 쓰이고, 포말은 일반적으로는 泡沫로 쓴다. 瀑瀑은 한문 문장에 나올 것이다.
28. 이든/ 이던 外
이강숙 산문집 『술과 아내 그리고 예술』(창작과비평사, 초판 2001년 1월)을 읽고 있습니다. 담백하면서 진솔하고, 맛깔스러우면서도 늠연함이 느껴지는 수필이군요.
편집자의 손을 거쳐 나온 초판본은 막 구워낸 도자기랄까, 원료(글)가 이제 비로소 사용하고 향수할 수 있게 제품화된 상태지요. 얼마나 잘 솜씨있게 빚었느냐에 따라, 거기까지 오는 과정의 흔적은 도자기의 겉에 오히려 드러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상큼하게 투명한 첫 느낌을 주고, 또 조금씩 더 가다듬을 점도 나타나는 것이지요.
남이 이 욕망을 두고 뭐라고 하던 상관이 없다. (4면)
* "하던"은 "하든"으로 표기해야 합니다. -든, -든지, -든가 등과 -던, -던지, -던가 등을 구별하는 것은 사전에서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기본적인 문법사항입니다.
혹시 내 이름이 불리어지지나 않을까 싶어서였다. (12면)
* "불리어지지나"는 "불려지지나"가 낫겠습니다. 준말을 어느 수준에서 일관되게 사용할 수 있을지 고심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흐려지다" "잘려지다"와 같이 준 형태(''려'')로 쓰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내가 필자라면 "내 이름이 불리지나 않을까" "내 이름을 부르지나 않을까"라고 다듬겠습니다.
…음악역사학 음악교육학 음악미학 등, 여러 분야에 심취하고… (15면)
* "등" 다음에 반점(쉼표)을 찍는 것이 어법상 바른지, 찍는 것이 좋은 문장인지 생각해봅시다. 나는 글을 쓸 때 대개는 위와 같은 경우에도 반점을 찍지 않습니다만.
''아, 이 사람이 이름만 듣고 있던 황지우이구나'' 싶었고, … (24면)
* "황지우이구나"는 "황지우구나"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습니다.
나의 눈은 주로 불란서 회화풍에 길들어져 있었다. (34면)
* "길들어져"는 "길들여져"나 "길들어"가 돼야 합니다.
오후 네 시쯤이 되었을까. (37면)
* 시각을 나타내는 말들은 ''네시 이십오분'' ''다섯시 십분 전'' 이렇게 붙여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하고, 다음에 이어서 쓰겠습니다.
이강숙 산문집 『술과 아내 그리고 예술』(창작과비평사, 초판 2001년 1월)을 좀더 살펴보겠습니다. (4부로 나뉘어 있는데, 앞글에 이어 1부의 남은 부분을 검토하였습니다.)
잘못된 문장은 아닙니다만, 개인적인 문장관을 피력하자면 이런 경우 저는 "차량 소리 외에는"으로 쓰고 싶습니다. 일반적인 문장관습상 ''이외''를 쓰는 사람이 많은데, 대개는 그냥 ''외''를 쓰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경제적입니다. ''밖에'' ''말고"("소리밖에는" "소리말고는"으로 붙여야죠)를 쓸 수도 있습니다.
느낌이 참으로 좋지 않는 병동이었다. (46면)
…예술하는 사람은 고상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라고… (47면)
"좋지 않는" "고상하지 않는"은 "좋지 않은" "고상하지 않은"의 잘못입니다. ''좋는'' ''고상하는''처럼 쓰지 않듯이, 형용사 뒤에 오는 부정의 보조용언 ''않다''도 형용사와 같이 활용됩니다.
동사 뒤에 오는 ''않다''는 동사와 같이 활용되므로 "밥을 먹지 않는 사람"(현재진행) "밥을 먹지 않은 사람"(과거)과 같이 시제에 따라 달라집니다.
…혼자 누워 있는 나에게 옆의 중환자가 힘없는 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47면)
뒤의 "내게"는 필요없는 중복이군요.
음악을 해야, 문학을 해야, 시인이 되어야, 행복해지는 마음이 있고, … (51면)
"시인이 되어야" 다음에 붙은 쉼표는 필요없습니다.
서울대를 만들겠다는 생각보다 나를 만드려는 생각이 항상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71면)
"만드려는"은 "만들려는"이 되어야 합니다. ''려'' ''려고'' ''려는'' 등의 앞에 오는 동사 어간에 받침이 있으면 ''으''가 첨가되어 ''먹으려고'' ''웃으려는''과 같이 됩니다. 그러나 ''ㄹ'' 받침 다음에는 ''으''가 첨가되지 않습니다. ''만들려고'' ''흔들려는'' ''놀려고'' ''밀려면''과 같이 써야 합니다.
받침이 없으면 바로 ''려'' ''려고'' ''려는'' 등이 붙습니다. 입말에서는 받침이 없을 때 ㄹ이 첨가되는 현상이 있는데, ㄹ이 첨가된 표기는 맞춤법에 어긋납니다.
''어법''을 이해하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언어에 대한 감각이 더 예민해야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29. 어느 소설 문장 속의 우리말 오류
200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에 나타난 우리말 사용의 잘못에 대한 지적을 소개합니다.
동아일보 싸이트의 신춘문예 관련 전용 게시판에 올라온 글인데, 창비 자유게시판에 ''지나가는사람''이 옮긴 것을 가져왔습니다.
상당히 정확하고 섬세하게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진작에 우리말 클리닉에 소개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올리게 되었군요.
(글 중에 나와 있는 인터넷 주소는 작품 ''봄'' 텍스트 주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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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도구는 궁극적으로 언어입니다. 문학을 업으로 하려는 사람은 주제에 대한 깊은 사유나 소재에 대한 세밀한 관찰 못지않게 올바른 언어 사용에도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제대로 된 문장을 쓸 수 있는가의 여부는 신진 작가를 뽑는 과정에서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언어를 장악하는 것은 문학가의 기초적 자질이라고 생각합니다.
* 나는 멸치국물을 다시다 말고 돌아보았다 : 다시다는 입을 놀리거나(입맛을 다시다) 무엇을 조금 먹다는 말. 우려내다는 뜻은 없다. 광고 탓인가?
* 입맛이 영 없다고 철지난 비빔국수를 들먹이던 어머니가 사라지자 : 철은 봄철, 여름철 같은 큰 단위의 시간. 국수가 철지난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잘못된 단어 선택. 들먹이던도 마찬가지. 들먹이는 것은 남의 일을 들추어 말할 경우나, 묵직한 것이 오르내리는 경우 쓰는 말.
* 눈자위가 발그레진 : -> 발그레해진. 발그레지다는 말은 없다.
* 나는 무작정 늦어지는 어머니의 귀가에 애가 닳아 있었다 : 애가 닳다는 표현은 없다. -> 애끓다, 혹은 애타다. 애닯다는 애달프다의 비표준어.
* 오전께 나서셨는데 : ''께''는 명확한 시간이나 장소와 함께 쓰여 그것을 중심으로 한 가까운 범위를 가리키는 말. 정오께는 되지만 오전께는 말이 안됨.
* 남편의 넥타이는 바닥으로 치닿아 흐느적거린다 : 치닿다는 뭘까. ''치''는 동사 앞에 쓰이면 ''위로''의 뜻을 나타내는 접두사가 된다. 넥타이가 바닥으로 위로 닿는다??
* 남편은 남들이 말하는 외아들치고는 참으로 무던한 셈이다 : 무던한은 어울리지 않는 말. 앞뒤 문맥상 무심하다는 뜻으로 쓴 듯. 혹은 무난하다는 뜻으로? 어느 경우든 잘못된 단어 선택.
* 짐짓 내 앞이 여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 내 앞이여서 -> 내 앞이어서
* 마음에 있는 옹아리는 어떤 식으로든 풀고 넘어가야 한다 : 옹아리는 또 뭘까. 혹시 옹알이? 옹알이는 갓난아이가 옹알거리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고... 설마 응어리를 잘못 쓴 건 아니겠지?
* 문득 치미고 드는 까닭 없는 이질감 : 치미고 -> 치밀고
* 어머니는 눈에 띠게 수척해갔다 : 띠게 -> 띄게
* 막내 도련님네 사돈어른이 한다는 한의원 : 도련님은 결혼하지 않은 시동생을 부르는 말. 미혼의 시동생에게 사돈이 있을리가?
* 약으로 낳을 병이 아니란 단호한 거절 : 낳을 -> 나을. 기본형은 낳다가 아니고 낫다.
* 시큼거리는 다리만큼 나를 지탱하는 버팀목 : 시큼거리는 것은 맛. 다리는 시큰거리는 것.
* 독점기사를 빼다시로 박은 : 이 단편소설 중 최악으로 꼽고 싶은 말. 빼다시? 젊은 작가 지망생이 이런 말을 함부로 써서는 안된다. 인물의 성격 창조처럼 어쩔 수 없을 경우 조심스럽게 쓸지언정 나레이터가 스스로 이런 말을 써서는 안된다. 글쓴이가 대학의 신문사에 관여했던 데서 나온 말인 모양인데, 이런 잘못된 언어 습관은 소설 안에서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빨리 버려야 할 듯.
* 게네들이 그렇지 하며 위안 삼지도 못했다 : 게네들이 -> 걔네가
* 저녁식사 준비도 잊어버릴 만큼 생숭거렸다 : 생숭거리다? 싱숭생숭(하다)에서 유추한 것 같지만, 없는 말이다.
* 동인들 모임이 있으시냐고 묻자 아니라고 말끝을 흐렸다. 늦으시냐고 되묻자 늦으면 전화를 넣겠노라고 하시곤 : 되묻는 것은 남이 물어도 답하지 않고 도리어 묻는 것을 말한다. 재차 묻는다는 뜻이 아님.
* 눈이 시큼거리고 : 역시 눈이 신 맛을 느끼는 것은 아니겠지? -> 시큰거리고
* 손목 마디마디 검붉게 물들어 볼상사나운 게 안되었는지 : 볼상사나운 -> 볼썽사나운
* 염색약을 머리에 들이 붙는 날과 겹쳐지는 불상사가 : 들이 붙는 -> 들이붓는, 겹쳐지는 -> 겹치는
* 늘 경고는 예고 없이 찾아왔다 : 멋있어 보이는 말이지만 무의미한 말. 경고에 예고의 의미가 포함.
* 목덜미를 타고 체온을 낮추는 밤바람이 슬프듯, 나는 추적거렸다 : 추적거리다는 무슨 말일까.
* 등단하기 전에는 책을 내지 않겠다던 어머니의 고집과 이십 년을 버텨 온, 어찌 보면 가장 오래된 지우를 버리겠다고 하자 더는 놀랄 것도 없었다 : 문장 오류, 혹은 혼동. 그 결과, 의미 불분명.
* 어머니는 얼마를 주고 쓰레기 수거차에 실려 보내라고 했지만 : 실려 -> 실어
* 사실 시누이들의 등살이 신경 쓰이기보다는 : 등살은 등에 붙은 살(근육). -> 등쌀
* 삼촌네 식구나 시누이들이 빨리 가주었으면 : 왜 한 문장 안에서 삼촌은 아이 관점에서, 시누이는 화자(어머니) 관점에서? 시누이도 식구가 있는데?
* 자존심이 허락질 않아서 : 허락질 -> 허락칠
* 그래도 며칠 안 남으니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사가 내 콧등을 문질러대는 참이었다 : 시제(남으니), 표현(심사가 콧등을 문질러대다) 모두 요령부득.
* 이런 바튼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 바튼 -> 밭은. 기본형은 ''밭다''.
* 당신의 행동 하나에도 사래가 들만큼 예민해졌던 나에게는 : 사래가 드는 것은 뭘까. 음식이 숨구멍으로 잘못 들어갈 때 나오는 것은 사레.
* 며칠 간 이어졌던 당신의 행동 하나에도 사래가 들만큼 예민해졌던 나에게는 정작 어떤 표시도 해주질 않았던가 : 부정어법 표현 오류. 굳이 바로잡자면 ''"안"해주질 않았던가''.
* 나의 조울증은 ... 나도 한가한 우울증 환자에 지나지 않는다 : 조울증과 우울증은 물론 다른 병.
* 거칠게 찾아드는 낯설음 : 낯설음 -> 낯섦
* 딸린 세식구 건사하느라 아침밥도 못 먹고 나간다는 게 못마땅한 말인가 하여 나는 목덜미가 달아올랐다 : 못마땅한 말인가 -> 못마땅하다는 말인가. 잘 생각해보시길.
* 손목에 힘을 한껏 밀었다 : 기묘한 표현이다. 손목에 힘을 넣는 것도 아니고 밀면 어떻게 될까.
* 유리덮게가 푸득거리는 것을 : 유리덮게 -> 유리덮개. 설마, 오타겠지. 뚜껑이라는 좋은 말도 있는데.
* 어찌나 탐내던 사람이 많던지 좋은 값에 팔았다우. 말끝마다 우유 하는 소리를 듣다보니, 아저씨 고향이 제천이라고 했는지 담양이라고 했는지 헷갈렸다 : 팔았다우는 충청도 방언이 아니다. 정말 충청도 사람이었으면 "팔았슈" 했겠지. 지방 사투리는 완벽하게 파지하지 못하면 함부로 써서는 안된다.
* 그런 속셈을 알아채기라도 했는지 가게 주인은 금새 멀뚱히 놓여 있는 책상을 유심히 보았다 : 금새 -> 금세
* 어머니 방은 빼꼼이 열려 있다 : 빼꼼이 -> 빼꼼히
* 뒷산에나 가신 게지 여기고 : 반포 아파트에서 뒷산이면 어딜까?
* 홍합을 소금물에 담궜다 : 담궜다 -> 담갔다. 기본형은 담구다가 아니고 담그다
* 몇몇 곳에서 존비법과 관련한 잘못된 단어 선택이 보인다.. 예를 들면,
- 어머니는 ''제법'' 오랫동안 거실 베란다 쪽에 둔 난 화분을 닦고 있었다
- 처음 검버섯이 생긴 적에는 죽음의 인두라도 찍힌 것처럼 자꾸 손을 ''씻어대고''
_ 고고하고 정갈한 당신이 갑자기 삶의 예찬을 ''들먹인'' 연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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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대로 몇 가지를 주제넘게 잡아봤습니다. 너는 잘 쓸 수 있냐라고 물으시면 쓰는 사람 따로 있고 "씹는" 사람 따로 있지 않냐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축구 해설가가 다 공 잘차는 사람은 아니잖습니까...
문학을 업으로 삼으려는 분들께, 우리말을 바로 쓰는 데도 힘써 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그것은 문학하는 사람들의 작은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30. 좇다/ 쫓다
좇다와 쫓다의 구분은 사람들이 가장 혼동하는 표현 중 하나다.
좇다와 쫓다를 구분하는 기준은 물리적인 공간의 이동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공간의 이동이 있을 경우는 쫓다로, 공간의 이동이 없을 때는 좇다로 처리한다.
가령 그윽한 눈길로 그 사람의 시선을 좇았다는 이동이 있지만 직접 발걸음을 떼서 옮기는 물리적인 것이 아니므로 좇다가 된다.
다음은 좇다와 쫓다가 쓰이는 예이다.
- 국립국어연구원 『새국어소식』 2000년 1월호에서 발췌
* 그런데 이게 꼭 적절한 분별인지는 음~~ 조금 더 생각할 여지가 있네요. 예문보다 좀더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지 않을까요?
31. 그물망/ 관계망/ 의미망
요즈음 발표되는 평문이나 출간되는 평론집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가 ''그물망''이다. 그런데 ''망(網)''이라는 한자 속에는 이미 ''그물''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또 ''그물망''은 한자에서 부수중 하나를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평문에서 의도하는 그물망은 동어반복이거나 잘못 씌어진 말이다.
기술은 본성상 어떤 관계망, 그물망 안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닐까? 기술은 텍스트와 마찬가지로 그 자체가 어떤 관계적 질서의 조직체가 이닐까? -- 김상환 [테크놀로지 시대의 동도서기론], {창작과비평} (2001년 봄호) 73면.
''그물망''이 나타나는 대표적인 예문이다. 그런데 나의 경우에는 그물 또는 망이라는 단어에서 ''씨줄과 날줄이 엮인 상태'', ''관계의 경위(經緯), 질서''와 같은 어감을 읽어내곤 한다. 그래서 조금 과장해서 읽으면 위의 예문은 같은 의미가 5번이나 반복되어 있다. 첫문장을 풀어보면,
기술은 본성상 어떤 그물그물, 그물그물 안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닐까?
와 같이 읽을 수 있다. 이 문장에서 같은 의미가 4번은 아니더라도 3번이 반복되는 것은 분명하다. 이쯤되면 ''의미망''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고 나름대로 적확한 단어사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무튼 정교함을 추구하는 평론의 문장이라면 ''그물망''과 같이 동어반복적인 단어는 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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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중의 말 가운데에는 이런 반복 현상이 많습니다. 언뜻 생각나는 것으로,
-피해를 입다
라는 말을 우리가 자주 쓰죠.
저는 글을 쓸 때 이 말을 어떻게 반복되지 않게 쓸 것인가 고민한 적이 있어요.
-해를 입어서
-피해가 있어서
등으로 쓸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자연스럽게 문장을 끌어가기 힘들더군요.
물론 갈고 다듬으면 같은 뜻을 반복이 없으면서 더 또렷한 말로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김상환 교수의 글에서는 님의 지적처럼, 많은 필자들이 그렇듯 ''그물망''이란 단어가 의미중복을 고려하지 않고 쓰였죠.
아마 단순한 그물이 아니라, 그물이 다시 그물을 이룬 아주 복잡한 그물을 연상시키려는 의도일까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글에서 "어떤 관계망, 그물망 안에서"를 "어떤 관계망, 그물 안에서"라고 써버리면 참 싱거워집니다. 그물이 아주 성긴 얼맹이(표준어 어레미) 같지 않아요?
또는 우리말은 아는데 한자어를 모르거나 한자어는 아는데 우리말은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 반복하는 것은 아닐지?
사실 한글로 쓰면 의미가 안 들어온다는 말들을 하는 분들도 예전엔 많았고, 요즘엔 한자(어)는 모르는 젊은이들이 많고, 반복의 필요성이 충분하다?
역전 앞도 그래요. ''역전'' 하면 어쩐지 ''전(前)''에서 ''앞''의 느낌이 안 나니까 역전 앞이라 하고, 혹시 驛殿은 아닐지?
그리고 두 음절은 길이가 모자라다는 느낌을 주어서 음절을 하나 늘리는 효과로 ''앞''을 붙여 강조하죠. 이런 예들이 상당히 있습니다.
나는 대체로 ''역 앞''이라고 하면 반복도 없고 분명하다 생각해요.
''의미망''은 그럭저럭 괜찮은 표현이고, ''관계망''은 조금 어색하고, ''그물망''은 중복이고.
그런데 언어란 톱니바퀴처럼 딱 맞물려 돌아가지는 않지요.
-기술은 본성상 어떤 관계망, 그물망 안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닐까?
이 문장에는 호흡의 요소, 강조의 요소, ''어떤''에서 느껴지듯 ''확정''보다는 (결과적으로) ''확산'' ''환기''를 목표로 하는 점 때문에 "어떤 관계망, 그물망 안에서"라고 쓰고 있죠.
31. 딛어/ 디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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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학칙 제정 첫발 내딛어
-[서강학보] 2001년 4월 30일자 1면 톱기사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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딛다: 디디다의 준말
내딛다: 내디디다의 준말입니다.
그리고
디디다 → 디디어 →디뎌
딛다 →딛어
가 되므로 ''디뎌''로 쓰든 ''딛어''로 쓰든 틀린 말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딛어'' ''내딛어''로 표기할 경우 음절수가 줄거나 발음의 편리성이 커지는 것이 아니므로, ''디디고''를 ''딛고''로 쓸 때와 같은 준말을 쓰는 이점이 사라집니다.
또한 ''딛어''와 ''내딛어''는 실제 발음에서는 ''ㅣ모음동화''가 일어나 굳이 ''디더''와 ''내디더''로 소리내지 않는한 ''디뎌''와 ''내디뎌''로 소리나기도 합니다.
따라서 ''딛어'' ''내딛어''로 표기하지 말고 ''디뎌'' ''내디뎌''로 표기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32. 눋다/ 붇다/ 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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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밥 눌는 내음이 코를 찔렀다.
-김성동 장편소설 [꿈] 초판 266면, 창작과비평사, 200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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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 ''눋는'' 것은 기본형이 ''눋다''다. ''묻다''(問)와 같은 ㄷ불규칙동사다.
''밥이 눌으니'' ''밥이 눌어''와 같이 쓰이지만, 원형이 ''눋다''이므로 자음으로 시작하는 어미가 붙을 때는 ''밥이 눋고'' ''밥이 눋는''과 같이 기본형이 변하지 않는다.
똑같은 유형의 단어로 ''붇다''가 있다.
홍수가 나서 물이 불었다.
식욕이 좋아 몸이 불었다.
이때 ''불었다''의 기본형은 ''붇다''다. 위의 ''묻다'' ''눋다''와 같은 ㄷ불규칙동사다.
이처럼 활용형을 잘 모르는 경우, 같은 유형의 익숙한 다른 용언을 떠올려보면 편리하다.
묻고, 물으니, 물어
의 변화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발음의 실제에서 혼란이 없고 표기도 잘 일치된다.
-''걷다''(步) ''묻다''(問) ''붇다'' ''닫다''(走, 내닫다) 등은 ㄷ불규칙동사지만, ''걷다''(收) ''묻다''(埋) ''닫다''(閉) ''믿다'' 등은 규칙동사다.
그리고 ''붇다''와 ''붓다''는 다른 동사다.
붓다는 ㅅ불규칙동사로
얻어맞아 볼이 부었다.
물을 퍼다 부었다.
와 같이 쓰인다.
볼이 붓는 바람에, 볼이 붓고
물을 퍼다 붓는 사람, 물을 퍼다 붓고
와 같이 자음 앞에서는 어간 ''붓''이 변하지 않는다.
''웃다'' ''씻다'' ''솟다'' 등은 규칙동사지만, ''잣다''(실을 잣다) ''낫다''(너보다 낫다, 병이 낫다) 등은 ㅅ불규칙동사다.
*우리말 참 어렵다!
이러한 구별의 기초는 단어의 뜻을 정확히 아는 것이다. 따라서 위 인용 문장은
"마지밥 눋는 내음이 코를 찔렀다."
가 되어야 바르다.
33. 떳떳지/ 떳떳치
평소에 많이 접하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예문을 들 필요가 없겠다. 평론집 원고를 정리하다가 ''떳떳치 (않다)''가 맞는지 ''떳떳지 (않다)''가 맞는지 헷갈렸다.
맞춤법 개정안 40항을 보니 어간의 끝음절 ''하''가 ''ㅏ''만 주는지 ''하''가 완전히 주는지에 따라 준말에서 각각 ''치''와 ''지''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준이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았다. [국립국어연구원]에 문의를 해보니 앞의 받침이 입성(入聲)인 ''ㄱ,ㄷ, ㅂ,ㅅ''일 때는 ''무조건'' ''하''가 완전히 준 경우로 보아서 ''지''가 된다고 했다.
이에 따르면 거북지(거북하지), 생각지, 깨끗지, 넉넉지, 섭섭지, 익숙지, 떳떳지 등과 같은 준말이 성립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현실발음과는 좀 동떨어진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떳떳치 않다''라고 발음하기 때문이다. 또 ''하''가 완전히 줄어드는 이유나 기준 역시 완벽하게 제시되어 있지 않다. 여전히 의문점이 남아있는 준말규칙이다.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우리말 길라잡이''에 올릴 글인데, 싸이트 공사중이라 지금 안 되는군요. 여기 우선 올립니다.
34. 바니걸즈와 토끼 소녀
70년대죠, 아마. 얼굴이 하얗고 깜찍한 두 소녀가 나와서 발랄하게 노래를 불렀는데, 그 이름이 바니 걸즈였죠. 요즘 핑클이다 s.e.s다 하듯이 당시는 바니 걸즈다 와일드 캐츠다 그렇게 이름을 붙였죠.
그 작명은 누가 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나름대로 그 시대의 어떤 ''세련미''와 ''우아미''와 ''센스''와 ''호감''과 이런 걸 고려해서 작명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 시절엔 독재정권이 시시때때로, 가끔씩 ''자주성''을 표방하며---요즘에도 부르짖지 않는 자주국방을 감히 부르짖기까지 하며---우리말 사랑을 강력히 추진하기도 했어요.
제가 무슨 이런 방면의 연구를 한 것은 아니고, 그 증거로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날부턴가 텔레비전에서 쌍둥이처럼 동작을 맞춰 깜찍하게 춤을 추던 바니 걸즈가 갑자기 ''토끼소녀''가 된 거예요.
"어쩌다 한번~ 오는 저 배는~ 무슨 사연 싣고 오길래~"의 [연안부두]를 쇳소리를 내며 부른 와일드 캐츠는 ''들고양이들''이 되고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을 풍부한 성량으로 부르던 패티킴은 ''김혜자''가 되었죠.
그런데 방송에서 누구도 왜 그렇게 바꾸어 부르는지 얘기를 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짐작은 할 만하죠.
바니 걸즈, 와일드 캐츠 - 외국말
토끼 소녀, 들고양이들 - 한국말
그러니까 ''외국말을 쓰지 말고 우리말을 쓰자'' 이거죠.
자, 그런데 무식한 군사독재 시절엔 그래도 생각할 수 있는 게 우리말 사랑이니까 이런 식으로라도 우리말 정책(?)을 폈어요. 외국말이 범람한다 싶으면 한번씩 기합을 넣은 거죠. 연예인들이 또 얼마나 독재시대엔 권력에 약합니까. 밥이죠.
자, 그런데 소위 문민시대가 되니 무식하기도 별 다름없고 세계화 시대라는 것을 알기는 알았는데, 우리말 정책이 없죠.
하여간 국립국어연구원이 있어서 언제부턴가 어문정책에 관한 부분을 연구, 지원, 추진으니까 아주 없었다고 할 수는 없죠.
섣불리 또 덤벼들었다 더 망칠 수도 있으니까 오히려 정책이 없는 게 낫다는 역설도 가능하고.......
하여튼 요즘엔 간판들이 외국말 간판도 많고 또 기발한 우리말 간판도 많아요.
그런데 한가지 분명한 건 국가에서(정부에서) 우리말 정책이 없다는 것이고, 또 근본적으로 우리말에 대한 애정이 부족하다는 것이죠.
가수의 이름이나 거리의 간판을 꼬부랑 말을 못 쓰게 하자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가요 가사에 외국어(거의 영어)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노래가 많고 각종 방송 프로, 시중의 간판 들에 외국어가 활개치는 것을 보면 이제 우리말에 대한 최소한의 자의식도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아요. 영어 열풍, 제주도의 영어공용권화, 영어공용어 논란 등을 보면 정말 고삐 풀린 망아지 날뛰는 모습이죠.
물론 외국어 사용에 대해 근본적으로 의식이 바뀌어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중언어, 삼중언어, 다중언어 사용자가 점점 많아지고, 일반 대중도 파편적이나마 다중의 언어를 접하게 되니까요. 그러나 이것은 세계적 현상이고, 그만큼 다른 나라 사람이 한국어를 배우는 기회도 많아진다는 사실을 알아야지요. 그런데 우리가 우리말을 홀대하고 포기하면 이렇게 우리말이 주요 국제어가 되는 길을 우리 스스로 막아버리는 꼴이 되지요.
과거에는 주시경 선생, 최현배 선생, 이숭녕 선생, 허웅 선생 이런 분들의 이름을 들으면(그 업적에 대해서는 깊이 모르지만) 그래도 국어학자로 우러러뵈는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이런 존경할 만한 학자도 못 키우고 있고, 요즘엔 기능적인 것을 넘어서는 어문 교육과 정책이 잘 서 있지 않아요.
대학의 국어학 전공 교수나 연구자들은 얌전하게 좁은 성채에서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사는 것을 최고 덕목으로 치는 것 같고요.
오히려 독학자들이 많은 저술을 내놓고 또 강한 자기주장을 펴기도 하지요. 그 분들의 기여가 없었다면 우리말이 더 요상한 꼴로 춤추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조기조 시인이 우리말의 존대법이 유발하는 수직적 인간관계의 문제를 지적하며 ''평등어''를 꿈꾸는 제안을 했어요.
저도 이런 문제를 느낀 적이 있는데, 사회관계가 복잡화하면서 존대법을 둘러싼 고민이나 불협화가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지 않나 합니다. 기본적으로 제대로 존대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고, 또 배워도 실제 언어생활과는 괴리가 있어요.
그렇다고 에스페란토를 만들듯이 ''평등어''를 만들어 모두 이렇게 쓰자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고요.
다음에 여기에 대해서 더 얘기할 기회가 있었으면 싶습니다.
우리 교육과정에서 ''국어'' 내지 ''국어'' 관련 교육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은데 사실 ''국어'' 교육이 체계화가 되어 있지 않아요.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도 잘 정립되어 있지 않고요. 국어의 특질을 제대로 규명하고 가르치는 일이 먼저 이루어져야겠어요.
바니 걸즈가 ''토끼 소녀''가 되었다고 했지요.
그럼 바니는 어떻게 쓸까요?
(1) bonny
(2) banny
그러면 ''바니''는 무슨 뜻일까요?
영문을 모르는 소생은 ''바니 걸즈가 토끼 소녀가 되었다''는 소재로 글을 쓰려는 생각으로 ''바니''를 나름대로 스펠링을 짐작해 찾아보았더니 사전에 안 나오잖아요.
그리고 당연히 ''바니''가 ''토끼''라고 믿었는데........
여러분은 영문을 아시는지?
추신: bunny가 또 있군요.(8.21)
35. ''홀홀단신''과 ''혈혈단신''
권오삼 시인이 [시와 동화]에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에 관한 글을 쓰셨네요.(2001년 가을호)
이원수, 김녹촌, 이오덕 선생을 이어 현실주의 시정신을 추구하는 동시를 쓰는 권오삼 시인의 글을 반갑게 읽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말 클리닉'' 입주자로서, 어떤 글이라도 필자 개인에 대한 친소관계나 감정에 관계없이 청진기를 들이대지 않을 수 없네요. 혹시 불순한 의도로 글을 흠잡아보려는 수작이라고 오해하시진 않으시겠죠? (오히려 은근한 애정의 표현일 때가 더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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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 씨는 우리 나이로 올해 쉰셋,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속칭 빌뱅이라는 곳에서 홀홀단신 서너 평 슬레이트집에서 산송장처럼 살고 있다.
-[이 시대 최고의 동화작가], 19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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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홀홀단신''은 ''혈혈단신''의 잘못입니다. ''혈혈단신''은 한자말로서 孑孑單身이라 쓰고 ''의지가지 없는 외로운 홀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혈혈단신''이 ''홀홀단신''이 되었을까요? 제가 짐작하기론, 입말로 홀홀단신이라 하는 경우가 자주 있어서 이런 혼동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홀로, 홀몸 같은 말에서 ''홀''이 혼자임을 뜻하므로 혈혈단신이 홀홀단신으로 와전된 것이지요.
''혈혈(孑孑)''은 한자어 ― 중국어라 할 수 있을지? ― 의 의태어지요. 그런만큼 우리말의 감각과는 괴리가 있기 때문에 언어생활에서 우리말의 의태어로 변이되려는 경향을 갖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36. ‘긷다’의 활용형은?
문학담당 기자의 ''원로''라 할 중앙일보 이경철 기자가 ''시''를 썼네요. 중앙일보 9월 29일자 특집 ''한가위'' 첫면, ''추석이 있는 가을은 우리에게 新生의 계절''이라는 제목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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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새벽 맑은 샘물, 정화수 길러 올리는 마음으로 추석으로 간다.
-41판, 3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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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러 올리는"은 ''길어 올리는''의 잘못입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린다''고 할 때, 기본형이 ''긷다''입니다. ㄷ불규칙 동사로 긷고, 긷는, 긷게, 길어, 길은(관형형 과거), 길으며와 같이 활용합니다.
''묻다''와 같이 활용함을 알아두면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길러''라고 쓰면 기본형이 ''기르다''가 됩니다.
짐승을 ''기르다''의 ''기르다''는 르불규칙 동사죠. 기르고, 기르는, 기르게, 길러, 기른과 같이 활용합니다. ''흐르다''와 같이 활용함을 알아두면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37. 홀몸/ 홑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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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숙희를 달래는데,
"왜 그건 들여 놨어. 홑몸도 아니면서......"
하고 냉장고에서 김치를 덜어내던 아버지가 어머니를 타박했다.
(중략)
"아빠, 그게 무슨 말이야?"
숙자도 놀라서 마루로 올라와 아버지 앞에 가 앉으며 물었다.
"니들한테 우리가 얘길 안 했나? 엄마 뱃속에 아기 있다."
-김중미 [괭이부리말 아이들] 73면, 창작과비평사, 2001.10.30 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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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지역의 아이들과 어른들의 사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서 눈물을 자아내는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읽다가 ''홑몸''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다 보면 임신한 여성을 가리켜 흔히 ''홀몸이 아니다''라고 얘기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윗 대목은 혹시 ''홀몸''을 잘못 쓴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홑몸이 아니다''라고 해도 같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싶긴 하다. 그렇지만 귀에 설고 어딘지 어색하게 들린다.
그런데 사전을 찾아보니, 반대로, 임신한 상태를 가리킬 때는 ''홑몸이 아니다''가 맞다.
홑-몸 [혼-] ①딸린 사람이 없는 몸.
②임신하지 않은 몸. 흔히, 임신한 상태를 가리켜 홑몸이 아니다라고 표현함. ×홀몸.
홀-몸 ①배우자나 형제가 없는 사람. 단신(單身). 독신(獨身). 척신(隻身).
② ⇒홑몸.
(야후 국어사전. 동아 새국어사전 제4판의 설명도 같은 내용.)
내 입과 귀에 익은 말은 ''홀몸이 아니다''인데 임신한 사람을 가리켜 쓸 때는 틀린 말이 된다.
이제 두 말의 뜻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는데, 정작 글을 쓸 때 ''홑몸''을 이 사전적 지식에 맞춰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스럽다.
38. 이상문학전집과 텍스트의 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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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李箱)문학 연구를 읽는 것은 이상문학을 다시 읽는, 우회적으로 읽는 방식이다. 짧고 불행했던 삶과 더불어 그의 난해한 작품들은 끊임없이 많은 사람들의 지적, 정서적, 관음적 호기심과 창조적 자극을 유발하는 텍스트가 되어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믿을 만한 텍스트를 갖고 있는가? 이 책의 제3부는 그렇지 않은 사정을 조목조목 혹독하게 짚고 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이상문학전집] 등에 나타난 텍스트의 오류와 주석의 오류는 여기에 근거를 둔 연구들마저 사상누각으로 만들어놓는다. 학문에서건 출판에서건 기본을 튼실히 쌓고 점검하는 일을 결코 소홀히해선 안되지 않겠는가. 다양한 이론적 지평에서 이상 소설의 지층을 깊이 탐사해간 저자의 성실한 글쓰기는 이상문학을 미시적으로 다시 읽는 즐거움도 준다. ([한겨레] 2001년 11월 17일자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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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전집은 문학사상사판 전집을 가리킵니다. 시(1권)는 이승훈 교수가, 소설과 수필(2,3권)은 김윤식 교수가 엮었습니다.
텍스트에 대해서만 얘기하자면, 김주현의 비교에 따르면 원본과 다른 오류가 많습니다.
연구자들이 석박사논문을 문학사상사 전집을 텍스트로, 텍스트에 대한 비정작업 없이 그대로 인용해 논문을 씁니다. 그것은 위에 쓴 대로 사상누각이 될 여지가 많습니다.
더 아쉬운 점은 나중에 나온 전집이 먼저 것보다 충실치 못한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료의 양에서는 아마 나중 나온 전집에 추가된 글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김주현의 인용 대목들을 통해서 보더라도, 김주현교수가 지적한 것 외에도 텍스트상의 문제점들이 더 나옵니다.
임종국 편(1953)에 바로 나와 있는 것이 후대의 이어령 편과 문학사상사본에 잘못 나온다는 것은 전집 편찬 방식의 문제점을 드러냅니다. 문학사상사본의 문제점은 주로 이어령 편을 대본으로 해서 생기는 문제점인 것 같습니다.
전집을 낼 때는 후대에 잡지나 단행본에 재수록 내지 발굴 수록된 텍스트에 의지해서는 안되겠고, 애초부터 원텍스트를 확보해 이를 근거로 하면서 필요시 재수록 텍스트를 참고해야 합니다. 그래야 오류의 가능성이 좀더 줄어듭니다.
그리고 이전의 전집에 없는 텍스트를 실으면서 잡지에 발표되었던 원텍스트를 문학사상사본에서 잘못 해독해놓은 부분들이 짧은 인용문에서도 보입니다. 가령 이런 것 - ''처창한''을 ''처참한''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편집자(또는 연구자)의 어휘력 부족에 기인합니다. 아니, 태도의 문제지요. 오늘날 입말에서는 잘 안 써서 익숙지 않더라도, 과거에 많이 쓰였고 국어사전만 찾으면 바로 나오는 단어를 다른 말로 고쳐놓았으니까요. 고칠 때는 근거를 가지고 고쳐야지요.
''이 말은 저 말을 잘못 쓴 것이다''라는 ''내 생각''만으로 작가의 말- 곧 독자의 말을 고쳐버려서 텍스트를 망쳐놓는 무지와 폭력 - 이런 횡포는 없어야 합니다.
39. 처지다/ 처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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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언제나 뒤에 쳐져 물끄러미 그것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강돈묵 에세이 [러브레터와 로비레터] 제1판 1쇄, 도서출판 세손,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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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지다''를 ''쳐지다''로 잘못 표기하는 예가 출판물에서 많이 눈에 띕니다.
''처''와 ''쳐''의 발음이 귀에 구별되어 들리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혼동입니다.
또한 ''처넣다''를 ''쳐넣다''로 잘못 표기하는 경우도 많이 보입니다.
역시 ''처''와 ''쳐''의 음이 구별되어 들리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혼동입니다. 또 ''치다''의 활용형 ''쳐''(치어)로 오인하여 표기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처-''는 접두어로 ''마구'' ''많이'' ''천격스럽게''와 같은 뜻을 덧붙이는 역할을 합니다. ''처먹다'' ''처박다'' ''처마시다'' ''처쟁이다''와 같은 말들이 쓰입니다.
''쳐박다''(''쳐 박다'')라고 쓴다면 (망치나 손 등으로) 쳐서 박는다는 뜻이 됩니다. ''쳐서''라는 의미와 뒤에 오는 말이 연결될 수 있다면, ''쳐(치어)''는 ''처-''의 잘못이 아니라 뜻이 다른 단어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대부분은 ''처-''로 쓰는 것이 맞습니다.
40. 같은 책/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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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비평 2000년 봄호의 육영수 교수 글 [19세기말 유럽과 나]에서 각주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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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4번을 보면 "같은 책, 14~16면"이라고 되어 있는데, 주3번은 책 제목이 나와 있지 않은 설명 주이다. 아마 주2번 E. Weber의 책을 가리키고자 함인 듯하다.
이 경우 ''같은 책''을 쓸 것이 아니라, "E. Weber, 앞의 책, 14~16면"이라고 표시해야 한다.
2. 주26번을 보면 "Fin de Siecle지의 1897년 8월 8일 기사내용 중 일부. 같은 책, 190~91면에서 재인용."이라고 되어 있다.
바로 앞 주25번에 E. Weber의 책이 나오므로 역시 이 책을 가리키는데, 이와 같이 앞에 문장이 붙을 경우에도 ''같은 책''을 쓰기보다는 "E. Weber, 앞의 책"으로 표기하는 것이 더 낫다.
왜냐하면 앞에 오는 내용에 Fin de Siecle와 같이 지면이 나올 경우, ''같은 책''을 쓰면 구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같은 책''은, 바로 앞 주에 단일한 책이 나올 때에만 그 책을 가리키기 위해 바로 다음에 오는 주에 써야 하겠다.
3. ''앞의 책''은 같은 저자의 문헌이 한번 나온 뒤 두번째 이후 주에서 다시 나올 때 "E. Weber, 앞의 책, 7면"과 같이 쓴다.
그러나, 같은 저자의 다른 책이 여러 종 나오고 또 번호 사이가 뜨거나 몇 페이지 건너서 쓰는 경우 어떤 책을 말하는지 확인하려면 독자가 상당히 애로를 겪게 된다.
이 때는 굳이 ''앞의 책''을 쓰지 않고 "저자, 책 제목, 면수"와 같이 표기하면 독자들이 어떤 문헌을 말하는지 곧바로 알게 된다. 출판사와 출판연도가 없으므로 이미 앞에서 제시된 책임도 드러난다.
긴 글에 여러번 등장하는 문헌은 "앞으로 제목(혹은 제목의 약칭)만 쓰겠다"고 밝히고 간편하게 표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