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면 꼭 이렇게 쓰렸다.
잡소리 제외하고 할말만하고(정곡, 핵심) 쓰잘데기 없는 소리는 하지 않고, 진국이가 말 그대로 진국이 되기 위한 첫 발을 디뎌 고대민동과 중동고 66회 site에 오늘부터 제 생각을 쓰기 시작하겠습니다.
간단한 저의 역사
'55년에 (아버님 1901년, 어머님 1914년생) 이대 독자로 마포구 신공덕동, 사거리 1분만 걸으면 효창공원(김구선생, 삼열사, 삼의사)에서 태어났습니다. 걷기 시작한 후부터 아버지를 따라 애국선열에 대한 참배를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동네의 좁은 길 맞은편은 용산구 효창동, 우리 집은 마포구 신공덕동, 누나가 저보다 18세 위이신 분이 한 분 있습니다.
본은 신안동, 그러니까 세도정치하신 분들이 저희 광범위한 집안이겠지만 저의 선조는 안동하고도 옹천이라는 데서 벼슬하나 못하셨습니다.
학창시절 공연히 욕만 먹었습니다. 김삿갓(金炳淵)은 저의 할아버지뻘, 김옥균은 아저씨뻘, 김좌진은 저의 형님뻘, 김두한은 가짜, '74경제과 김관회, 생물과 김세응은 구안동 대충 이렇습니다. 74정외과 김태일은 아마 저의 5대밑 (되지 못한 것이 촌수만 높다.) 국민학교는 워낙 마포 공덕을 가야하는데 용산구 효창동의 금양을 나오고, 경복중을 떨어져 이차학교인 중동중학교를 나왔습니다.
고 1때부터 민족고대(지금은 강남과된 괴뢰 puppet대학)를 가겠다고 작심하고 세번만에 간신히 들어왔습니다. 성대경영을 편입하여 73으로 다닐 때 손들어 주던 학우가 강준만(전북대 교수)이더군요.
대학시절 혁명을 하겠다고 마음속으로 생각만하고 (75행정의 천상만이의 써클을 만들자는 권유도 있었지만,미안한 마음 지금도 가지고 있슴) 대학 4년 시절 좃나게 술만 마시고 고시도 안보고 수업도 들어가지 않고 나머지 시간에는 서관도서관에서 뉴스위크(4년간 정기구독)와 이러저러한 책들을 읽었습니다. '78년 4월에 수출입은행에 들어가 '80년에 두 번째 교통사고(15개월, 11번 수술)를 동숭동에서 시내버스에 당했습니다. 하느님(예수의 아버지가 아니라, 동학의 한울님 같은 개념)이 어여삐 여기셔서 왼쪽발목만 고정되고 살아났습니다.
대학시절 친구 : 김관회, 설훈, 장동훈, 최재일, 안충환, 이규범, 김태일, 박성화, 김용희, 장하성, 최규엽, 이혜자
알았던 사람들 : 신계륜, 신태식, 임종인, 문학진, 홍의락, 염재호, 박계동
졸업 후 10년간 데모에 단순가담만 하고 짤리지 않은 것에 대한 죄스러움이 남아 있었지만, 1990년부터는 털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술도 덜 마시고 그동안 제가 읽고 생각하였던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 특히 일본에 대해서 고대민동과 제 모교 중동 66회(73년 졸업) site에 한 자락씩 쓰겠습니다.
제 모교 중동고의 훌륭한 선배들 : 양주동, 양일동, 김광섭, 신광호, 이병철, 김지하, 하길종, 한광옥, 안정효, 송두율, 고재욱, 황재만, 정동환, 기국서
고만고만한 동창들(동기가 아님) : 김동환(친일파, 최초의 장시 국경의 밤, 나중에 최정희씨(소설가)와 같이 살며 소설가 김채원과 김지원을 낳음. 삼천리라는 월간지 주재), 이낙선, 조중연, 김무성, 정장선,안동선,장충준 등등
고대의 훌륭한 선배들 : 김윤환, 이문영, 김원벽, 임종국, 김성곤(쌍용 설립자), 홍성원, 정성헌, 김낙중, 최장집, 노향기, 이범증, 양재덕, 조성우, 이장희, 안희옥, 천영초 등등
고대의 스승님 : 조동필, 조지훈, 한동섭, 성백선, 김충렬, 허발, 최재석, 김용준, 심재우, 김상협(?)
마음속으로 아끼는 후배들 : 이삼성, 강완모, 마철현, 박영식, 정경연, 천상만, 진대우, 김종철, 백완승, 엉주웅, 오상석, 박선오, 전성, 김동관, 정태헌, 권혁범, 권혁태, 김영진, 박일남, 윤형로, 장창원, 김두식, 최청수, 한철호, 남수원, 남대원, 박민서, 송재석, 예종영, 남영숙, 이영미, 홍기원, 김영춘, 이인영, 허인회, 박래군, 박선희, 어미숙, 신동일, 신수현, 안성주, 김신, 나주시장, 손병휘, 유구영, 김두황, 유재관, 임혜란, 정태호, 민한홍, 강희철, 유인식, 조석현, 윤석환, 정진만, 조영관 82부터는 생략.
※ 생각이 나지 않아 빠진 분들께는 미안함.
인사말은 이 정도로 끝내고, 오늘은 우선 일본의 세계적 그룹인 미쯔비시의 창립자인 ( 이와사끼)에 대해 쓰겠습니다.
이와사끼의 고향은 시고꾸(四國)이며 일본 명치유신의 영웅인 사까모도 료마(坂本龍馬)의 먼 친척임. 청년시절 직업은 포졸(경찰)이었으며 반체제 인사인 료마(?)를 잡으러 오사까까지 와서 료마를 만났으나 겁을 먹고 물러남. 료마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하겠음.(19세기 중엽당시 료마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검술인 이었음)
이와사끼는 재미없는 포졸생활을 그만둔 후, 번의 무역출장소인 나가사끼에 있는 사무실의 책임자였음. 재미있는 이야기는 그 당시 국법으로 금하고 있는 돼지고기를 먹으며 이렇게 맛있고 힘이 솟는 고기를 막부에서 금하는 이유는 육고기를 먹으면 백성들이 힘이 나서 반란을 꾀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함.(맞는 이야기)
이 자가 출장소장 시절 울릉도에 와서 며칠 묵었음. 섬 주민들에게 사탕도 주고 말도 붙이더니 결국 집 몇 채를 불태우고 도망감.(묘한 놈임) 료마가 명치유신을 1년 앞두고(1867년) 교또에 있는 여관에서(2층) 친구와 술을 마시던 중 신선조(친막부무술자객단)에 급습을 당하여 죽음. 진정한 의미에서 명치유신의 제일가는 영웅은 료마임.(물론 사이고 다까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를 삼걸로 꼽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삼걸은 오쿠보를 빼야 함.)
료마는 길에서 신선조 열댓명을 상대하여도 끄떡 없었음. 이야기가 약간 옆길로 샜음. 료마는 무역을 하려고 여러 척의 상선을 가지고 있었으며, 물론 전투에도 참가하였슴.(※ 가쯔가이슈(勝海舟)에 대해서도 나중에 이야기함) 료마가 요절한 후 명치유신의 이와사끼는 정부(1868년 명치유신)로부터 료마의 상선단을 인계받음.(물론 돈도 없지만 특혜로 불하받음) 이것이 효시가 되어 정상결탁으로 오늘날의 미쯔비시그룹을 이룩함.(물론 그의 뛰어난 商才도 있었겠지만.) 오늘은 이상 끝.
※ 참고서적 : 일본어 발음으로는 료마가 유꾸. 시바 료타로작. (한국에도 몇 년 전에 번역된 책이 있음.) 노태우가 대통령시절 일본 수상이 방한하자,군대시절 이 책을 일어로 감명 깊게 읽었다고 말함. 웃기는 놈.
첫댓글 글을 아주 맛갈스럽게 잘 쓰시네요..재밌습니다..기대하겠습니다...그리고 아끼는 후배에 저도 들어가 영광입니다. 몇번 안뵈었지만 넘 좋습니다...진국형...짱...
학생 조세희의 문체를 논하라, 이문구의 문체를 논하라가 시험문제였었다지요. 이야기 서술의 태도에 이미 문제의식과 전달방법이 들어 있다는 이야기 일 수도 있지않나 싶습니다. 다양한 주제에 건설적 대안 제시력이 촘촘하게 그물망을 가진 민주사회의 역량이 아닐까 싶습니다. 요번 추모제 때도 형님께서 보여주신 울분과 열정은 여러 후배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계속 좋은 이야기 풀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