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시본기(神市本紀)...이조 중종때 찬수관 이맥 편찬
1)진역유기(震域留記)의 신시(神市)기에 이르기를, 환웅천왕(桓雄天王)께서 사람의 거처가 이미 완성하고, 만물이 각기 그 자리를 잡는 것을 보시고, 곧 고시례(高矢禮)로 하여금 백성들의 먹고사는 업무를 전적으로 맡도록 하였다. 이를 주곡(主穀)이라 한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농사 짓는 방법이나 도구가 준비되지 못하고, 불씨가 없어서 걱정하였는 데, 어느 날 고시(高矢)씨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굽은 나무 가지들이 거칠게 떨어 지는 것을 보았다. 앙상하게 마른나무 가지들이 제멋대로 흩어져 어지럽게 교차되 어 있는 것을, 오랫동안 말없이 침묵하여 바라보고 서 있는데, 홀연히 큰바람이 숲 에 불어닥치자 오래된 나무 가지에서 굉장한 소리가 나면서 서로 부딪쳐 비벼대자 번쩍하며 불꽃을 일으키며, 불이 났다가 꺼지는 것을 보자, 이에 홀연히 깨닫는 바가 있었으니, 『이것이다. 이것이로다. 이것이 바로 불을 얻는 방법이다.』하면서 집으로 돌아와, 오래된 홰나무 가지를 모아다가 서로 비벼 불을 만들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 하였다. 다음날 다시 굽어진 나무들이 있는 숲을 찾아 이리저리 배회하며 깊은 생각 에 잠겼는데, 갑자기 줄무늬의 호랑이가 크게 울부짖으며 달려나오니, 고씨(高矢)도 큰 소리로 한마디 외치면서 돌을 집어 맹타하였다. 그러나 겨냥을 잘못한 탓인지 바위의 한쪽에 돌을 맞아 번쩍하고 불이 일어났다. 이를 보고 마침내 크게 기뻐하며 돌아와, 다시 돌을 쳐서 불씨를 만들었다. 이로부터 백성들은 음식을 익혀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쇠를 녹이고 다루는 기술이 처음으로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며, 물건을 만드는 기술도 점차 발달되었다.
2)환웅천왕(桓雄天王)은 또다시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령하여 문자를 만들게 하였다.
대개 신지(神誌)씨는 대대로 법과 명령을 주관하는 직책을 맡고, 물건의 출납을 보좌하는 임무를 전담하고 있었으나, 다만 목소리에 의존할 뿐, 일찍이 문자로 기록하여 남기는 방법은 없었다. 신지(神誌)씨는 어느 날 무리와 더불어 사냥을 나갔는데, 갑자기 튀어나 오는 한 마리의 암사슴을 보고 활을 당기려 했으나, 그 순간 암사슴을 놓쳐 버렸다.
이에 사방을 수색하면서 산과 들을 지나 평평한 모래땅에 이르렀을 때, 비로서 사슴 발자국이 어지럽게 얽혀 있는 것을 보고, 사슴이 도망간 방향을 알 수 있었다. 머리를 숙이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신지(神誌)는 갑자기 깨닫는 바가 있어, 「기록하는 방법은 이 같은 방법뿐이구나」하면서, 그날의 사냥을 끝내고 돌아와, 되풀이하여 다시 싶은 생각하고, 만물을 널리 살핀 끝에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음을 얻어, 처음으로 문자를 만 들었으니 이것이 아주 오랜 옛날 문자의 시초이다. 그러나 후세로 오면서 연대가 아득하 고 멀어져서, 태고의 문자는 다 살아져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만들어 놓은 문자가 아직 편리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일찍이 남해도(南海島) 낭하리 (郎河里)의 계곡 및 경박호(鏡珀湖)의 선춘령(先春嶺)과 저 오소리(烏蘇里), 그 외의 암석 사이에서 때때로 조각, 즉 범자(梵字)도 아니고, 전자(篆字)도 아닌 것이 발견되었는데, 사람들이 깨닫지 목하고, 이것이 신지(神誌)씨가 만든 옛 문자가 아닌가 하였다.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 나라의 미진함과 우리 민족이 강하지 못함을 새삼 개탄한다.
3)한웅께서 풍백(風伯) 석제라(釋提羅)를 시켜 새와 짐승과 벌레와 물고기의 피해를 제거 하도록 하였지만, 백성들은 아직도 동굴이나 토굴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밑에선 습기가 올라오고, 밖에선 바람이 불어와서 사람들에게 질병을 일으켰다. 또한 새나 짐승이나 물고기 등을 급하게 쫓아내니 점차로 도망가서 숨어버리니 잡아서 먹는데도 불편하였다. 이에 우사(雨師)로 왕금영(王錦營)하여금 사람의 살 곳을 만들게 하고, 소, 말, 개, 돼지, 독수리, 호랑이 등의 짐승을 모아 목축하여 이용함을 관장케하고, 운사(雲師) 육약비 (陸若飛)로 하여금 남녀의 혼례법(婚禮法)을 정하게 하고, 치우(治尤)는 곧 세세토록 병마(兵馬)와 도적(盜賊) 막는 일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치우(治尤), 고시(高矢),
신지(神誌)의 후손들은 지극히 왕성하게 번영하였다.
치우천왕(治尤天王)의 등극에 이르러 아홉 곳의 야금소(冶金所)를 만들어 동(銅)과 철 (鐵)을 채취하여, 철을 단련하여 칼과 창을 그리고 대노(大弩)를 만들고, 사냥과 정벌, 전쟁의 무기로 삼았으니, 먼 곳의 외족(外族)들은 치우천왕을 신(神)으로 알고 심히 두려워하였다. 오래 전부터 대궁(大弓)에 대한 위력을 풍문에 듣고 간담이 서늘해진 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들은 우리 겨레를 가르쳐 이(夷)라고 하였다. 설문이 말하 는 바에 의하면 이(夷)는 "동방인으로서 큰 활을 가진자 "라는 뜻이다. 그러나 공자의 춘추(春秋)에 이르러, 이(夷)의 이름을 융(戎), 적(狄)과 나란히 오랑캐라고 호칭했는데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4)삼성밀기(三聖密記)에 이르기를 「한국(桓國)말기에 다스리기 어려운 강한 족속이 있었는 데 그것이 큰 걱정이었다. 환웅(桓雄)께서 나라를 위해 삼신(三神)을 믿는 가르침을 세우 고, 무리를 모아 잘못하면 잘라내어 없애버려도 좋다는 뜻이 들어있는 엄밀한 맹서를 하게 하였다. 그 시절에는 종족의 이름이 하나 같이 않고, 오히려 풍속도 점차 갈라져 원주민을 호족(虎族)이라 하고, 새로이 이주해온 백성을 웅족(熊族)이라 하였다.
그런데 호족은 성질이 탐스럽고 잔인하여 약탈만을 일삼고, 웅족은 성질이 우둔하며 고집이 세고 자부심이 많아 서로 어울리지 못하였으니, 같은 지역에 살면서도 서로 도와 주지도 않고, 사이가 점차 멀어져서, 서로 빌려주지도 않고, 서로 결혼도 하지 않고, 매사 에 서로 불복하고, 아직 한번도 뜻을 같이 한 적이 없었다. 이에 이르러 웅족의 여군( 女君)이 한웅의 밝은 덕이 있음을 듣고, 그의 무리를 거느리고 찾아와서 말하기를 원하 옵건데, "신시(神市)의 계율에 따르는 같은 백성이 되고자 하오니, 움막을 짓고 살 한 터전을 주옵서서" 하니 환웅이 이를 허락하고 머무를 곳을 정하여 주며, 존대하여 받아 들이니, 그 자손들이 산업에 힘쓰며 살게 되었다. 호족들은 끝내 능히 깨우치지 못하여 추방하였다」
5)조대기(朝代記)에 이르기를 「그 시기에 사람은 많고 산업은 궁핍하여 그 살아갈 방법이 없어 걱정이 되었을 때에, 서자부(庶子部)에 한웅(桓雄)이라는 대인(大人)이 있었는데, 정 (情)을 베풀며 여론을 깊이 듣고서 지상에 광명세계를 열고자 한국(桓國)에서 세상으로 내려가기로 원하였다. 그때에 안파견이 금악(金岳) 삼위(三危) 태백(太白)을 두루 살피더 니 태백이 가이 홍익인간(弘益人間)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하여, 환웅(桓雄)에게 명하여 가로대 "이제 사람과 만물이 업(業)으로 만들어 졌으니, 군(君)은 노고를 아끼지 말고, 몸소 무리를 이끌고 세상에 내려가서 나라를 열어 뜻을 펴고, 가르침을 베풀며,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주관하라. 아버지의 권위를 세우고, 서로 돕고 이끌고 보살펴서 하나같이 평등하고 화목을 돌아오게 하여라. 스승의 도(道)을 세우고, 세상이 편하도록 잘 다스리 고 교화하여, 자손 만대에 걸쳐 천하의 모범이 되게 하라." 하시며, 천부인(天符印) 세계 를 주어 세상으로 내려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桓雄)이 무리 3,000을 이끌고 처음에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와서 신시 (神市)를 만들고,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주곡(主穀), 주명(主命), 주형(主刑), 주병(主病), 주선악(主善惡)든 무릇 인간의 360가지 일을 주관하여 재세이화 (在世理化)하고 홍익인간(弘益人間)하였다. 이를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한다.
6)이때에 한 웅족과 한 호족이 가까운 이웃에 살면서 신단수(神檀樹)에 나아와 항상 기원 하며, 또 한웅(桓雄)에게 청하기를 "원하옵건 데 교화되어 신시(神市)의 계율을 따르는 백성이 되게 하소서"하므로, 환웅(桓雄)은 이에 신령한 주술로 환골이신(換骨移神), 즉 육신 위주의 동물적 사람을 변화시켜, 정신위주의 신령한 사람으로 바뀌게 하고, 또 신령 한 사람으로부터 전해 받은 영(靈)적 체험을 활성화 할 수 있게 하였으니, 곧 쑥 한 묶음 과 마늘 20개였다. 이에 조심시켜 할 바를 말하니 "너희들이 이것을 먹으면서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수련하면, 이로 인하여 저절로 참(眞)을 이루고, 차별 없이 평등하고, 만 물을 왕성하게 하며, 마당히 사람도 교화능력을 얻어 예(禮)와 의(義)를 실천하는 큰 사람 이 될 것이다." 고하였다.
웅족(雄族)과 호족(虎族)의 두 집안은 쑥과 마늘을 얻어 이를 먹으면서 21동안 금기(禁忌) 하며, 스스로 수련에 힘썼다. 이에 웅족의 집안은 배고프고, 춥고, 아픈 고통을 참고 견디 며, 신시의 계율을 준수하고, 환웅과의 약속을 지켜, 건강하고 여자다운 아름다운 모습을 얻었다. 호족의 집안은 교만하고 태만하며, 금기를 지키지 못하고, 신시의 계율을 어기어 끝내는 웅족과 같이 하늘의 사업에 참여함을 얻지 못하였다. 이렇게 두성(二姓)이 서러 같 이 않았다. 웅씨족의 여자들은 스스로 고집이 세며, 어리석고 강하여, 그들과 함께 혼인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언제나 신단수(神檀樹)아래 무리 지어 모여서 장막을 치고 잉태하 기를 원하며 빌었다. 이에 환웅께서 잠시 굳센 장군으로 변화하여 다스릴 지역을 얻은 후
그곳에서 무리들로 하여금 혼인하게여 잉태해 자녀를 낳았다. 이로부터 뭇 여자와 뭇 남자들은 점차로 결혼의 윤리를 깨닫고 따르게 하였다.
그 후 단군(檀君)이라는 왕검(王儉)이 나타나 아사달(阿斯達), 즉 지금의 송화강(松花江)에 도읍을 세웠다. 비로서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 삼한(三韓), 고리(高離), 고례(高禮), 남북옥저, 동북부여, 예(濊)와 맥(貊)이 모두 그 관경(管境)이다.
7)신시(神市)의 세대에 7회 제신(祭神)의 책력(冊曆)이 있었다. 1회 날에는 하늘님께 제사지 내고, 2회 날에는 월신(月神)에게 제사지내고, 3회 날은 수신(水神)에게 제사지내고, 4회 날에는 화신(火神)에게 제사지내고, 5회 날에는 목신(木神)에게 제사지내고, 6회 날에는 금신(金神)에게 제사지내고, 7회 날에는 토신(土神)에게 제사지냈다. 대개 책력을 만드는 것은 이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옛날에는 책력의 시작을 계해(癸亥)로 썼으나, 조선의 5대 단군 구을(丘乙; 2,099) 황제 때, 책력의 시작을 비로서 갑자(甲子)로 쓰기 시작하여, 10월로서 상달(上月)로 삼아, 이를 세수(歲首), 즉 한해의 시작으로 삼았다.
육계(六癸)는 신시(神市)씨가 신지(神誌)에게 명하여 제정한 것으로 계(癸)로서 시작을 삼 는 것이니, 계(癸)는 계(啓)요, 해(亥)는 핵(核)으로 일출(日出)의 뿌리이다. 그러므로 계 (癸)는 소라(蘇羅)가 되고, 갑(甲)은 청차이(淸且伊)가 되고, 을(乙)은 적강(赤岡)이 되고, 병(丙)은 중림(仲林)이 되고, 정(丁)은 해익(海 )이 되고, 무(戊)는 중황(中黃)이 되고, 기 (己)는 열호수(烈好遂)가 되고, 경(庚)은 임수(林樹)가 되고, 신(辛)은 강진(强振)이 되고, 임(壬)은 유불지(流不地)가 된다.
해(亥)는 지우리(支于離)가 되고, 자(子)는 효양(曉陽)이 되고, 축(丑)은 가다(加多)가 되고, 인(寅)은 만량(萬良)이 되고, 묘(卯)는 신특백(新特白)이 되고, 진(辰)은 밀다(密多)가 되고, 사(巳)는 비돈(飛頓)이 되고, 오(午)는 융비(隆飛)가 되고, 미(未)는 순방(順方)이 되고, 신 (申)은 명조(鳴條)가 되고, 유(酉)는 운두(雲頭)가 되고, 술(戌은 개복(皆福)이 된다.
8)신시(神市)가 처음 시작되어 전해 내려올 때에는 아직 산에는 사람이 다닐 길이 없고, 목 이나 물에는 배가 건너는 다리가 없었으며, 짐승들은 무리를 이루어 살며, 나무와 풀들은 무성하게 자랐다. 사람들도 짐승들처럼 무리를 짓거나 족속을 이루어 살았다. 그리하여 만물과 짐승의 무리들과도 어울렸고, 까마귀나 가치 등 새의 둥지에까지 올라가 엿보고 놀면서, 서로 의하고 살았다. 배고플 때는 먹고, 목말라 마실 때에는 짐승의 피나 고기를 사용하였다. 옷감을 짜고, 먹을 것을 경작함이 편하고 자유로웠으니, 이를 지극한 덕의 세계라 하였다. 백성들이 살면서도 일을 모르고 살았으며, 걸어다녀도 특별한 목적지가 없었으니, 길을 가도 한없이 편안했고, 사물을 보되 답답하였다. 먹을 것을 모아놓고 즐거 워 하며 배를 두드리며 놀고,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쉬었다. 대개 하늘의 혜택을 크게 입어 궁핍을 알지 못했다. 후세에 내려와 백성과 사물이 번성하면서 소박한 것은 없어지고, 절름발이와 앉은뱅이까지 힘써 일을 해야만 하고, 늙은이까지 부지런히 일을 해도 생계 때문에 걱정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농사짓는 이은 이랑을 두고 다투게 되고, 고기 잡는 사람은 구역을 가지고 다투게 되니, 다투지 않고 얻어지는 것은 장래의 궁핍 함 뿐이었다. 이렇게 된 후 활이 만들어지니, 새와 짐승은 숨어버리고, 그물 을 치니 물고기와 새우는 모습을 감추었다. 이에 칼을 든 갑옷을 입은 병사가 생기고, 너와 내가 서로 치며 싸우니, 이를 갈고, 피를 흘리며, 간과 뇌를 땅에 바르니, 이것이 어찌 하늘의 뜻인가? 하였다. 이에 가히 전쟁은 면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저들의 근원을 따지고 보면, 대개 한 근원의 조상이었다. 그러나 이미 동서로 갈리어 각각 한 구역씩 차지하였으며, 땅의 경계는 멀리 떨어져 있어 사람들과 소식의 통 하지 아니하며, 백성들은 자기는 알되, 남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냥하고 나무 를 베는 일 외엔 험한 일이 없었는데, 수 천년의 세월이 내려오고 보니 세상의 형평과 모습이 편하였다. 그리하여 중국(仲國)은 서쪽 땅의 보고가 되었으나, 그 넓은 기름진 땅 에 바람만 세차게 불고 있었다. 우리 한족(桓族)은 일부가 나뉘어져 그 지역으로 침을 흘리고 찾아가니, 토착민 또한 많이 모여들었다. 이때 같으면 한 무리가 되고, 다르면 원수가 되어 방패와 창이 서로 움직이니, 이것이 실로 오랜 옛날 전쟁의 시작이었다.
9)환웅천왕으로부터 5세를 전하여 태우의(太虞儀)환웅이 계셨으니,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를 반드시 묵념(默念=肅靜)하여 마음을 맑게 하여(淸心), 조식(調息)하게 하여 선천정기(先天 精氣)를 보전하게 하니, 이것을 일러 늙지 않고 오래 사는 장생구시(長生久視) 수련방법 이라 하였다. 태우이 환웅에게는 열 두 아들이 있었는데, 맏이가 다의발(多儀發)환웅이었 고, 막내는 태호(太 )였다. 또는 호를 복희(伏羲)라고 하는 데, 그는 어느 날 꿈에 삼신 (三神)의 신령함이 몸에 내려오자, 만가지 이치를 통찰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삼신산 (三神山)으로 가서 천제(天祭)을 올리고, 천하(天河)에서 괘도(卦圖)를 얻으시니, 그 획은 세 번 끊기고 세 번 이어져 있어서, 그 자리를 바꾸어서 이치를 추구하면, 묘(妙)하게도 삼극(三極)의 무궁한 변화의 이치가 내포되어 있었다.
밀기(密記)에 이르기를 "복희(伏羲)는 신시(神市) 세대에서 태어나 우사(雨師)의 직을 계승받았고, 후에 청구와 낙랑을 거쳐 마침내 진(陳)나라로 옮겨, 수인(隧人) 유소(有巢)와 함께 서토(西土)에서 그 이름을 빛내었다. 그의 후손들은 나뉘어져 풍산(風山)에 살았으 니, 역시 풍(風)을 성씨로 하엿다. 후에 갈라져 패(佩), 관(觀), 임(壬), 기(己), 포( ), 이 (理), 사( ), 팽(彭)의 여덟 가지의 성씨가 되었으며, 지금 산서성(山西城)의 제수(濟水)에 복희족(伏羲族)의 옛 거처가 아직도 남아있다. 임(任), 숙(宿), 수(須), 구(句), 수유(須臾)등 의 나라가 모두 여기에 모여 있다." 고 하였다.
10)대변경(大辯經)에 이르기를 "복희(伏羲)는 신시(神市)에서 태어나서 우사(雨師)를 지내 고, 신용(神龍)의 변화를 보고 괘도(掛圖)를 지었으며, 신시의 계해역법(癸亥曆法을 고쳐 갑자역법(甲子曆法)으로 바꾸어서 갑자(甲子)를 한해의 시작인 세수(歲首)로 삼았다.
(조대기에는 단군구을이 역법을 고쳤다고 했다) 여화(女禍)는 복희의 제도를 계슬하였다.
신농(神農)읕 열산(列山)에서 일어났으며, 열산(列山)은 열수(列水) 시작하는 곳이다.
신농(神農)은 소전(少典)의 아들이며, 소전(少典)과 소호(少 )는 모두 고시(高矢)씨의 방계(傍系) 후손이다. 대개 당세의 백성들은 정착하여 생업을 가졌는데, 점차로 곡식이 나 삼베의 생산이 크게 이루어지니, 약이나 돌 다루는 기술도 역시 점점 갖추게 되어, 낮 에는 시장에 나가 교역을 하고 돌아 왔다. 이때에 백성을 다스리는 유망(楡罔)이 급하게
모든 고을들을 결속하여 두 백성을 이끌려고 하였으나, 흩어지는 자가 많아, 세상의 도리 가 어지러웠다.
11)우리 치우천왕(蚩尤天王)께서는 신시(神市)의 공덕을 이어받아 백성과 더불어 옛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하였으며, 능히 백성들이 나라를 세운 뜻을 통하여 생활의 분별력을 얻었 고(開天知性), 땅을 개척하여 생활의 이치를 얻었으며(開土理生), 사람의 가치를 깨달아 생명의 존중함을 (個人崇生)을 얻었다. 온갖 만물의 원리를 모두다 스스로 살피고 단속 하니, 그 덕이 미치치 않는 것이 없었고, 그 지혜가 옳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그 능력 이 갖추어지지 않는 데가 없었다. 이에 백성과 더불어 호족(虎族)불리하여 황하(黃河) 이북에 의거하여 살도록 하였으며, 안으로는 병사를 용감하게 양성하였고, 밖으로는 시대의 변화를 관찰하다가 마침내 유망(楡罔)의 다스림이 쇠약해지자, 병사를 일으켜 출정하였다. 형제종당(兄弟宗黨)중에서 가히 장수가 될만한 인재 81명을 선출하여 모든 군(軍)을 다스리는 대장이 되게 하였으며, 갈로산(葛盧山)에서 쇠를 캐내어, 쇠갑옷과 두발창과 큰 활과 나무화살을 많이 만들어, 하나같이 가지런히 정비하여, 탁록( 鹿)을 처서 빼앗고, 구혼(九渾)에 올라가 연달아 싸워 이기니 그 세력이 질풍과 같았다.
만군(萬軍)이 두려워하고 굴복하니 그 위세가 천하에 떨쳤다. 한해 동안 무릇 아홉 제후 의 땅을 쳐서 빼앗았다. 다시 옹호(擁狐)의 산에 나아가, 아홉 곳의 야금소(冶金所)에서 쇠를 다루는 일을 통하여 , 수금(水金)과 석금(石金)을 개발하여, 뽀족한 창과 옹호의 두발창을 만들어 다시 군사를 정비하여, 몸소 군사를 이끌고 양수(洋水)에 출진하여 재빨리 공상(空桑)에 이르렀다. 공상은 지금의 진류(陳留)로 유망(楡罔)이 도읍했던 곳 이다. 이해에 12제후의 나라를 병탄하여 살해하니 쓸어진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였다. 이에 서토(西土)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하여 도망쳐 숨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에 유망 (楡罔)이 소호(少昊)로 하여금 항거하여 싸우게 하였으나, 천왕(天王)이 뽀족한 창과 옹호(雍狐)의 두발창을 휘드리며 소호(少昊)와 더불어 크게 싸웠다. 또 큰 안개를 일으 켜 적의 장병을 혼미케하여 스스로 혼란에 빠지게 하였드니, 공상(空桑)으로 돌아가 유망과 함께 도망쳐 버렸다. 치우천왕이 즉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천하를 태평하게 할 것을 하늘에 고(告)하고 맹세하였다. 다시 군대를 진격시켜 탁록( 鹿)을 에워싼 후 일거에 이를 멸망시켰다. 경계를 다스리는 사람이 "천하의 임금이 전장에서 한 번 화를 내자 쓸어진 시체가 들판에 가득했다"고 말한 것은 이것을 가르키는 말이다.
12)이 때에 공손(公孫) 헌원(軒轅)이 있었으니 토착민의 우두머리였다. 처음 치우천왕이 공상(空桑)에 입성하여 새로운 정치를 베푼다는 말을 듣고, 감히 자기 대(代)에 천자 (天子)가 되겠다는 뜻을 가지고, 이에 크게 병마를 일으켜 찾아와 싸우기를 청하니, 치우천왕은 먼저 항복한 장수 소호(少昊)를 보내어 탁록을 포위하고 쳐들어가 멸하였다.
그러나 헌원(軒轅)은 스스로 굴복하지 않고, 감히 백번이나 싸워 오는 지라, 이에 치우 천왕은 구군(九軍)에 전령을 내려 네 길로 나누어서 출동케 하고, 자신은 보병과 기병 3,000을 이끌고 곧바로 탁록의 유웅(有熊)이라는 들판에서 헌원과 연달아 싸우면서, 명령을 내려 사방에서 압축하여 참살하였으나 승산이 없으므로, 또 크게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치 못하게 하면서 전투를 독려하니, 적군은 마침내 마음이 황망해지고 손은 떨리니, 달아나 숨고, 명령을 듣지 않으므로 백리(百里)안에 병사와 말을 복수 없었다. 이에 이르러 기주(冀州), 연주( 州), 회대(淮岱)의 땅을 다 점거하여, 탁록( 鹿)에 은 성(城)을 쌓고, 회대(淮岱)에는 집을 세우니, 이에 헌원(軒轅)의 족속들이 모두다 신하되기를 원하며 조공을 바쳤다. 대저 당시 서토(西土)에 살던 사람들은 헛되이 돌촉 화살의 힘만을 믿고, 쇠갑옷의 사용법과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치우천왕의 법력 이 높고 강함에, 마음은 놀라고 담은 서늘하여 싸울 때마다 번번히 패하였다. 운급 (雲 ) 헌원기(軒轅記)에 보면, 「치우가 처음으로 쇠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당시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구리로 된 머리에 몸은 쇠로 된 치우라고 말했다.」고 기록한 것 을 보면, 역시 그 낭패가 대단히 심하였음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13)치우천왕(蚩尤天王)은 더욱더 군대의 힘을 갖추어 사면(四面)으로 진격한지 10년 동안에 헌원(軒轅)과 싸우기를 73회나 하였으나 장수들은 피곤한 기색이 없고 군사들은 물러날 줄을 몰랐다.
뒤로 헌원은 여러 차례 싸워 치우에게 번번히 패하고도 더욱 군사와 병마를 크게 일으 키고, 우리 신시(神市)를 본떠서 병기와 갑옷을 많이 만들고, 또 지남(指南)이라는 수레 를 만들어 감히 싸움터마다 출전하니, 치우천황은 불같이 진노하여 노여움에 떨었다.
형제와 종당(宗黨)들에게 크게 싸울 준비에 힘쓰도록 하여 위엄을 세우고, 헌원의 군사 들로 하여금 감히 싸울 의욕이 나지 않도록 불시에 습격하면서, 더불어 한바탕 크게 싸워 일진(一陳)을 사정없이 살해 한 연후에야 비로서 싸움이 그쳤다. 이 싸움터에서 우리의 중수중 치우비(蚩尤飛)가 불행이도 급하게 공을 세우려다 진중에서 죽게 되었다.
사기(史記)에 소위 “치우를 잡아 죽이다”라고 기록한 대목은 아마도 이를 말하는 것 인 듯하다.
치우천왕은 크게 화가 나시어 군사를 동원하여 새로이 돌을 날려보내는 비석박격기 (飛石迫擊機)를 만들어, 진을 치고 연합하여 진격하니 적진이 마침내 항거하지 못하였 다.
정예군사를 나누어 파견하여 서쪽으로는 예탁(芮 )의 땅을 지키게 하였으며, 동쪽으로 는 회대(淮岱)를 취하여 성읍(城邑)을 삼게 하고, 헌원의 동쪽 침략의 길을 지키게 하였 다. 치우천왕(蚩尤天王)이 돌아 가신지 수 천년이 흘렀으나 오히려 그 높고 빛나는 위엄과 공덕은 능히 후인(後人)의 감명을 일으키게 하였다.
지금 한서(漢書)의 지리(地理志)에 의하면, 치우천왕의 능(陵)은 산동(山東)의 동평군 (東平郡) 수장현(壽張縣) 궐향성(闕鄕城) 가운데에 있다고 하는데, 그 높이가 7척으로 진한(秦漢)의 시절에 주민들이 오히려 10월에는 늘 여기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때 마다 반드시 붉은 기운을 내 뱉었는데 진홍색의 옷감과 같았으며, 그를 말하여 치우 (蚩尤)의 깃발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치우천왕의 영걸스런 혼백(魂魄)과 사내다운 기백 (氣魄)은 자연히 보통 사람과 다른바가 천년의 세월을 지나서도 오히려 없어지지 아니 하는 듯하다.
헌원(軒轅)은 이로서 쓸쓸해지고, 따라서 유망(楡罔) 또한 영원히 멸하여 버렸다.
14)치우천왕의 공덕과 위엄은 세상에 전하여, 능히 그 이름이 떨치기를 다하였다. 유주 (幽州)와 청주(靑州)에도 그 명성과 위엄이 떨어지지 않고 있었으므로, 헌원이래로 세상 은 자연히 안정되지 못하였으니,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편안하게 베게를 베고 눕지를 못하였다.
사기(史記)에 이르되, 「소위 산을 헤쳐 길을 내도 편안하게 살지를 못하고, 탁록( 鹿) 의 강가에 도읍을 정하고도 이리 저리 쫒겨 다니느라 항상 정한 곳이 없었으며, 병영 (兵營)도 장수와 사병을 시켜 지키게 하며 살았다.」고 하였으니, 아마도 헌원(軒轅)이 살았을 때 전전긍긍하던 모습을 역역히 보여주는 기록일 것이다.
상서(尙書)의 여형(呂刑)에도 역시 이르기를, 「만약 고훈(古訓)이 있다면, “오직 치우가 난을 일으킨다”라고 만, 적은 것은 치우의 위임이 무서워 기(氣)를 빼앗긴 탓이다」라고 하였다. 세상에 그 훈(訓)을 전하는 까닭은 이로서 후인을 위하여 경계한 것이니, 역시 심한 것이였다. 그후 300년 동안은 무사하였으나, 다만 전욱( 頊)과 한번 싸워 그를 파괴하였을 뿐이다.
대저 신시개천(神市開天)에서부터 18세를 전하여 1,565년이 흘러서 비로서 단군왕검 (檀君王儉)이 나섰다. 웅씨족(熊氏族)의 비왕(裨王)으로서, 마침내 신시(神市)의 대(代)를 이어 구역(九域)을 통일하고, 관경(管境)을 삼한(三韓)으로 나누었으니, 이를 말하여 단군 조선(檀君朝鮮)이라고 한다.
15)삼한비기(三韓秘記)에 이르기를,
「복희(伏羲)씨가 서쪽 변방에 봉토를 미리 받고, 공직에 올라 정성을 다하니, 방패와 창 을 쓰지 않고서도 한 지역을 감화시켜 복종케 하고, 마침내 수인(遂人)을 대신하여 관할 지역 밖에까지 호령하였다. 후에 갈고(葛古)한웅이 있었는데, 신농(神農)의 나라와 구역 의 경계를 획정하여, 공상(空桑)의 동쪽을 우리에게 속하게 하였다. 또 수대(數代)를 지나 자오지(慈烏支)한웅에 이르렀다. 자오지한웅은 신과 같이 용감함이 몹시 뛰어났고, 그 머리와 이마는 구리와 쇠로 되었다. 능히 크게 안개를 일으키고, 아홉 개의 야금소 (冶金所)를 만들어 주석과 쇠를 캐내어 무기를 만들고, 돌을 날려보내는 비석박격기 (飛石迫擊機)를 만들었다. 천하는 이를 크게 두려워하고 함께 떠받들어 천제의 아들 치우(蚩尤)라 하더라. 대저 치우란 말은, 속어로 번개가 치고, 비가 크게 내려 산과 강을 바꾸는 것을 뜻한다.
치우천왕은 신농(神農)씨가 쇠퇴하는 것을 보고 큰뜻을 품고 여러 차례 천병(天兵)을 일으켜 서쪽으로 진격하여 회대(淮岱)의 사이를 점거하였다. 헌원(軒轅)이 있는 곳에 이르러, 직접 탁록( 鹿)의 들에서 헌원(軒轅)을 사로 잡아 신하로 삼은 후에, 오(吳) 장군을 파견하여, 서쪽의 고신(高辛)을 공격하여 공(功)을 세우게 하였다.」고 하였다.
16) 대변경(大辯經)에 이르기를,
「신시(神市)씨는 전(佺)을 계율(戒律)로 삼아 수련하고, 사람을 교화(敎化)하며, 하늘님께 제사를 지냈다. 이른바 전(佺)이란 사람이 스스로 온전해 지는 바를 좇아, 능히 그 성품 (性)을 통하고 이로서 참(眞)을 이루는 것이다.
청구(靑邱)씨는 선(仙)을 법(法)으로 삼아, 사람을 교화(敎化)하며, 땅의 경계(境界)를 다스렸다. 이른바 선(仙)이란 사람이 스스로 태어난 바를 따라 능히 생명(命)을 알아서 착함(善)을 넓히는 것이다.
조선(朝鮮)씨는 종(倧)을 으뜸으로 세워, 사람을 교화(敎化)하며, 죄를 따져 꾸짖었다. 이른바 종(倧)이란 사람이 스스로 근본이며 으뜸인 바를 따라 능히 정기(精氣)를 보호하 며, 아름다움(美)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佺)은 텅 비어 있으면서 하늘에 근본을 두고, 선(仙)은 밝으면서 땅에 근본 을 두고, 종(倧)은 튼튼하면서 사람에게 근본을 둔다.」고 하였다.
17) 주(注)에 이르기를,
「한인(한仁)을 또한 천신(天神)이라고도 한다. 천(天)은 곧 큰 것(大)이요, 하나(一)이 다. 한웅(桓雄)을 또한 천왕(天王)이라고도 하니, 왕(王)은 곧 황(皇)이며, 제(帝)이니라. 단군은 또한 천군(天君)이라 하니, 제사를 주관하는 우두머리니라. 왕검(王儉)은 또한 바로 감군(監君)이며, 땅의 경계(境界)를 지키고 다스리는 우두머리니라. 그러므로 하늘의 밝고 빛남을 한(桓)이라 하고, 땅의 밝고 빛남을 단(檀)이라 한다. 소위 한(桓) 이란, 곧 구황(九皇)을 말하는 것이다. 한(韓)도 또한 크다는 뜻이며, 삼한(三韓)을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라고도 한다.
가(加)는 즉 가(家)이다. 오가(五加)를 말하면, 우가(牛加)는 곡식을 주관하고, 마가 (馬加)는 명령을 주관하고, 구가(狗加)는 형벌을 주관하며, 저가(猪加)는 병을 주관하며, 양가(羊加)는 선악을 주관하게 하였다.
백성은 64종족으로서, 무리는 3,000이 있었다.
세상을 다스리도록 보냄을 받고 간 것을 개천(開天)이라한다. 그러므로 개천(開天)은 능히 모든 제도와 법을 창조하게 한다. 이것은 텅 비어 있는 것(虛)과 같은 것이다.
세상의 인간을 구하려고 욕심 내는 것을 개인(開人)이라한다. 그러므로 개인(開人)은 능히 사람의 일이 한바퀴 돌아 제자리에 돌아오게 한다. 이것은 혼(魂)이 함께 순행함 을 뜻한다.
다니는 길을 만들고, 산을 다스리는 것을 개지(開地)라 한다. 그러므로 개지(開地)는 능히 때에 맞게 일들을 시작하여 이루게 하고, 지혜를 함께 닦는 일이다.」고 하였다,
18) 삼한비기(三韓秘記)에 이르기를,
「대저 백두(白頭)의 큰산은 넓은 황무지(荒蕪地)에 자리잡았으니, 옆으로는 1,000리에 걸 치고 높이는 200리나 솟았다. 웅장하고 험준하니 울퉁불퉁 거창하여 배달천국(倍達天國) 의 진산(鎭山)이라 한다. 신인(神人)의 오르고 내림은 실로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어찌 구구히 묘향산(妙香山)이 다만 낭림산맥의 서쪽을 달리는 산맥을 잇는 것으로서 능히 그 와 같은 성스러운 일에 관계된다고 할 수 있으리오.
일반 세상에서는 이미 묘향산을 태백산이라고 한다. 이는 그 보는 눈이 다만 동쪽 압록 수(鴨綠水) 이남 한구석의 땅에 국한했기 때문으로, 산(山)의 조종(祖宗)을 곤륜(崑崙) 이라고 당연하게 부르짖고, 소중화(小中華)가 되는 것을 기뻐하며 스스로 달콤해져서, 조공(祖貢)을 올리는 사신(使臣)이 북쪽을 들락거리는 역사가 수 백년이 지났어도, 그것 을 부끄러움으로 여기지 않고 당연하게 생각하였으니, 이것은 곧 글로 표현 할 수 없는 크게 탄식할 일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 동방의 여러 산을 태백(太白)이라고 이름한 것이 많은데, 일반 세상에서는 영변의 묘향산이 사실에 부합된 양으로 인식되어진 것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 事)의 설(說)에 연유한 것으로, 이는 저들의 눈구멍으로는 콩 같기도 하고, 팥 같기도 하니, 어찌 안일하고 만족하게 그들과 더불어 논의 할 수 있겠는가.
지금 백두산(白頭山)의 정상에는 큰 연못이 있는데 주위가 팔십리가 되고, 압록(鴨綠), 송화(松花), 두만(豆滿)의 모든 강이 다 여기서 발원하니 천지(天池)라고 한다. 곧 한웅 (桓雄)씨가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 온 곳이다. 따라서 묘향산은 일찍이 조그마한 웅덩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므로 한웅천황이 내려와 나라를 세운 태백이라고 논하기는 부족한 것이다.」고 하였다.
19) 위서(魏書)의 물길전(勿吉傳)에 이르기를,
「나라의 남쪽에 도태산(徒太山)이 있었는데, 위(魏)에서는 태백(太白)이라 하였다. 범과 표범, 곰과 이리가 있었지만 사람을 해치지 않았으며, 사람들도 산에 올라가 오줌을 누며 지나가는 자가 없으므로 짐승들이 번성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한웅천왕이 처음 땅에 내려오시어, 이미 계셨던 산(山)은 왕이 정하여 세운 신성 (神聖)한 마을이며, 영험한 땅인 바로 소도(蘇塗)로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옛 풍속은 반드시 이 산(山)에서 시작되었으며, 옛부터 한족(桓族)의 하늘님에 대한 숭배와 공경하 는 신앙도 이 산에서 시작되었으니, 예사로운 일이 아닌 것이다. 또 그 짐승들도 빠짐없 이 신(神)의 은덕을 입은 듯 편안하게 이 산에서 서식하며, 일찍이 사람을 상하게 하는 일없고, 사람 또한 감히 산에 올라 오줌을 누어서 신(神)을 모독하지 않았으므로, 만세 (萬世)에 항상 공경하고 보호하는 표준이 되었다. 대개 우리 한족(桓族)은 모두 신시 (神市)가 이끄는 3,000도단(徒團)의 장막에서 나왔다. 후세로 내려와 비록 여러 씨족으 로 나뉘었지만 실(實)은 한단(桓檀)의 한 근원에서 나온 후손에 불과한 것이다.
신시(神市)에 처음으로 내리신 공덕은 틀림없이 전송(傳誦)되어 잊혀지지 아니하였으므 로, 선왕(先王)과 선민(先民)이 삼신(三神)일체이신 하늘님께 올리는, 옛 천제(天祭)의 성지(聖地)를 가르켜 삼신산(三神山)이라고 하였음이, 또한 틀림이 없는 것이다. 대개 신시(神市)이후로 내려오면서 신시(神市)의 이치와 거룩함의 교화(敎化)가 점점 세월을 따라 그 성취함이 더욱 회복되고 점점 깊어 졌다.
나라를 세우고 세상을 다스리는 큰 근본은 자연히 사람이나 나라가 같다고 할 수 있으 나, 아주 다른 신시(神市)의 신성함과 거룩한 풍속은 멀리 천하에 전파되어, 천하만방의 사람들이 신시(神市)의 이치와 거룩한 교화를 사모함이 있더니, 마침내 삼신(三神)을 받들고 숭모하게 됨으로, 동북쪽에 신명사(神明舍)라고 칭하는 곳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급기야, 끝에 가서는 폐단으로 흘러 차츰 허랑 방탕으로 빠져들더니, 더 나아가서 는 차츰차츰 더 기괴하고 황당무계한 설이 쉴새없이 튀어나오게 되었다. 여기에서 이른 바 연(燕)나라와 제(齊)나라의 바다 위의 괴상한 술사(術士)들의 이야기도 나왔다.
대저 저들의 땅은 구한(九桓)의 신시(神市)와 접해 있어 백성과 산물의 교류가 특히 성하였는데, 제나름대로 소문을 듣고 신기하여 놀래기도 하면서, 또다시 상상(想像)으로 추측하여, 이치에 맞지도 않는 사실을 억지로 끌어다 맞추어 말하기를, [삼신산(三神山) 은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州)로 발해(渤海) 가운데 있다.] 운운함으로서 세상을 현혹케 하는 주장을 하였다. 그렇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면, 바다가 끝이 없으므로 발해 가운데 다시 다른 바다가 있는 줄은 모르고, 문득 말하기를 삼신산 (三神山)은 발해가운데 있다고 운운하였으나, 실은즉 삼신산(三神山)이 아니고, 각각 세 개의 섬이 있는 산이다.
봉래(蓬萊)는 쑥이 무성하게 자라는 묵정밭, 곧 한웅천왕이 내려온 곳이요, 방장(방장)은 사방이 일장(一丈)인 각(閣), 즉 소도(蘇塗)가 있는 곳이며, 영주(瀛州)는 못이 섬으로 둘 러 싸인 모양, 즉 천지(天池)가 나오는 곳이며, 이것들을 말하여 삼신산이라고 말하고, 삼신(三神)은, 곧 한 분의 상제(上帝)인 하늘님(하느님)인 것이다. 그렇지만 더욱 황당하 고 괴이한 것은 삼신산(三神山)의 원 뜻을 알지 못하고, 곧 금강산을 봉래(蓬萊)라 하고, 지리산을 방장(方丈)이라 하고, 한라산을 영주(瀛州)라고 하였다.
20)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에 이르기를,
「그것은 발해(渤海)의 가운데에 있으며, 대개 일찍이 가서 본 사람이 있어 전하기를, 모든 선인(仙人)과 불사약(不死藥)이 다 있고, 그 물건과 짐승은 모두다 희고 황금과 흰 은(銀)으로 궁궐을 지었다고 운운하였다.」고 하였다. 또 선가서(仙家書)에 이르기 를, 「삼신산에는 혼(魂)을 되살리고, 늙지 않게 하는 등의 약초가 있는데, 일명 진단 (眞丹)이라 한다.」고 하였다.
지금 백두산에는 예로부터 흰 사슴, 흰 꿩, 혹은 흰매 등의 종류가 있다고 한다.
괄지지(括地志)에 이르기를, 새나 짐승, 풀과 나무가 모두 희다.」고 하였다.
또 백두산 일대에 산삼이 많이 나는데 세상사람들은 이를 일러 불로초(不老草)라고 하 고, 산(山) 사람들이 이를 캐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음식과 언행을 함부로 하지 않으며, 부정한 것을 멀리 하며, 목욕재계(沐浴齋戒)를 한 후, 산신(山神)께 제사를 지낸 뒤에야 감히 출발하였다. 아마도 혼(魂)을 되돌리고, 늙 지 않게 한다는 환혼불노(還魂不老)의 이름도 역시 생각하건대 여기에서 근원(根源)된 것으로 여겨진다.
단군세기(檀君世紀)에 이르기를, 「단군 오사구(烏斯丘) 원년에 북쪽을 순시할 때 영초 (靈草)를 얻었다.」함은, 곧 산삼을 뜻하며, 또한 이를 증거 하는 셈이다.
21)10월의 제천행사(祭天行事)는 마침내 천하 만세의 풍습이 되었다. 이는 곧 신인(神人) 의 나라 특유의 성대한 행사로서 다른 나라에는 이와 견줄만한 것이 없었다.
태백산(太白山)은 홀로 곤륜산(崑崙山)의 명성을 누르고도 남았다. 옛날의 삼신산(三神 山)이라 함은, 곧 태백산으로서 역시 지금의 백두산(白頭山)이다.
대저 그 옛날 신시(神市)의 인문교화(人文敎化)가 근세에 이르러 건재하게 행해지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천경신고(天經神誥)는 오히려 후세에 전하여 나라안의 모든 남녀가 역 시 다 말없는 가운데 믿고 숭앙하고 있으니, 곧 인간의 생사는 반드시 삼신(三神)이 주관 하는 바라고 하면서, 어린아이의 나이가 열살 미만일 때는 생명의 안전과 위험, 지혜로움 과 어리석음, 재주의 뛰어남과 못남을 오로지 삼신(三神)께 의탁하여 무릇 삼신(三神)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지으신 천일신(天一神), 즉 하늘님(하느님)이시다.
옛날 사마상여(司馬相如)는 한(漢)나라의 왕 유철(劉澈) 무제(武帝)에게 말하기를, 「폐하 께서 겸양하사 방탕하지 않으시면 삼신(三神)의 즐거움을 얻으실 것인 즉」이라고 했는 데, 위소(韋昭)는 삼신상제(三神上帝)에 주(注)를 달아, 삼신의 설(說)은 일찍이 저들의 땅에도 전파되었음이 명백하다.」고 하였다.
22) 진역유기(震域留記)에 이르기를,
「제(齊)나라의 풍속에 팔신제(八神祭)가 있었으니, 팔신(八神)이란 천주(天主), 지주 (地主), 병주(兵主), 양주(陽主), 음주(陰主), 월주(月主), 일주(日主), 사시주(四時主)를 말 한다. 하늘(天)은 음(陰)을 좋아한다 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에는 반드시 높은 산의 아래인 작은 산 위에서 지냈다. 곧 태백산 기슭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던 것이 전해온 천제(天祭)의 예법인 것이다.
땅(地)은 양(陽)을 귀하게 여긴다 하여, 땅에 제사를 지낼 때에는 반드시 못 가운데의 네모진 언덕에서 지냈다. 이것 역시 참성단(塹城壇)에서 제천 하던 풍속의 영향이다.
병주(兵主)란 치우천왕(蚩尤天王)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삼신(三神)은 천지만물의 조상이요, 치우(蚩尤)는 오랜 옛적부터 무신(武神)으로 존경받는 용맹스럽고 강한 무인 (武人)의 조상으로, 큰 안개를 만들어 일으키며, 물과 불을 마음대로 사용하며, 또 만대 (萬代) 도술(道術)의 조종(祖宗)으로 만가지 신(神을 부르고, 비와 바람을 불러 일으켰 다. 이로서 오랜 옛 날 세상에서부터 항상 천하의 전쟁무기를 만드는 일에 있어서 주장이 되었다.
해대(海岱)의 땅은 이미 엄(奄), 람(藍), 양(陽), 개(介), 우(隅), 래(來), 서(徐), 회(淮)의 팔족(八族)이 자리잡고 사는 곳이 되었으니, 곧 팔신(八神)의 설(說)은 팔족(八族)으로부 터 싹터서 당시에 성행하였다.
유방(劉邦)은 비록 동이(東夷) 계통의 인물이 아니지만, 풍패(豊沛)에서 병사를 일으켰 는 데, 풍패의 풍습은 치우(蚩尤)에게 제사를 지냈으므로, 유방(劉邦) 또한 그 풍속으로 인하여 치우(蚩尤)에게 제사 지내고 희생의 피를 북에 바르고, 북을 치며 깃발을 날렸 다.
마침내 10월에 이르러 파강( 江)의 상류에서 제후(諸侯)와 더불어 함양(咸陽)을 평정하 고 한왕(漢王)이 되었으므로, 이로 인하여 10월로서 한해의 시작으로 정하였다. 이것은 비록 진(秦)나라의 정월 초하루를 한해의 시작으로 삼던 것을 이어 받은 것이긴 하지만, 역시 동쪽 태초의 황제인 한웅(桓雄)을 받들어 공경하고, 치우천왕(蚩尤天王)을 공경하 여 제사를 지내는 것에서 기인한 때문이라 할 것이다.
그후 4년이 지나 진(秦)나라 전역이 평정되자 축관(祝官)에게 명하여, 치우(蚩尤)의 사당(祠堂)을 장안(長安)에 세우게 하였다. 그가 치우(蚩尤)를 공경하는 마음이 이와 같이 독실하였다.」고 하였다.
23) 진(晋)나라의 천문지(天文志)는,
「치우의 기(旗)는 꼬리별 혜성과 비슷하여 뒤쪽은 그 모양이 꼬부라졌다. 깃발이 보이 는 곳 바로 아래에는 병사가 있었다.」고 하였으니, 이는 치우천왕이 승천하여 별이 된 때문이라고 한다.
또 통지(通志) 씨족략(氏族略)에, 「치씨(蚩氏)는 치우씨(蚩尤氏)의 후손이다.」고 하였 으며, 혹 말하기를, 「창힐(蒼 )과 더불어 고신(高辛)도 역시 모두 치우씨의 후예(後裔) 이다. 대극성(大棘城)에 태어나 이리 저리 옮겨 다니다가 산동(山東)의 회북(淮北)으로 이사하여 살았다.」고 한다. 대저 치우천왕(蚩尤天王)의 뛰어난 풍채와 힘차고 당당한 위엄이 먼 나라 깊숙한 곳까지 전파되었음을 이로 미루어 알 수가 있다.
24) 연(燕)나라와 제(齊)나라의 선비들은, 불가사이한 꾸며낸 속임수의 이야기에 깊이 빠졌 으며, 또한 이를 높이 여기고 있었다. 이리하여 제(齊)나라의 위(威)왕과 연(燕)나라의 소(昭)왕 때부터 사신을 파견하여 삼신산(三神山)을 찾았으니, 진한(秦漢)때의 송무기 (宋無忌), 정백교(正伯僑), 극상( 尙), 이문자고( 門子高)는 최후의 사신들로서 연(燕) 나라 사람들이었다. 문성오리공(文成伍利公)과 손경(孫卿), 신공(申公)의 무리들은 모두 제(齊)나라 사람들이다.
옛날 여상(呂尙)도 역시 치우씨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역시 성은 강(姜)씨이다. 대저 치우(蚩尤)는 강수(姜水)에 살면서 아들을 두어 다 강(姜)씨가 되었다.
강태공은 제(齊)나라 다스리기에 앞서 도술(道術)을 수련하였고 천제지(天齊池)에서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 그리하여 역시 제(齊)나라에서 책봉을 받았으니, 이 땅에 팔신 (八神)의 풍속은 더욱 성하였다. 후세에 그 땅에서 도술(道術)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신선사상(神仙思想)과 황노사상(黃老思想)이 혼합되어 널리 퍼져 통하도 록 번지르하게 장식되니, 이 또한 강태공(姜太公)이 그 풍속을 도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찍이 음부경(陰府經)에 주(注)를 만들고, 자부(紫府)선생이 지은 삼황내문경(三皇內文 經)의 뜻을 선인(先人)의 말을 본받아 그 뜻을 펴서 서술(書術)하였다. 그런즉 연(燕) 나라와 제(齊)나라의 선비들이 어찌 괴상하고 신비스런 말들을 싫어 할 수 있었겠는가?
또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법과 황제중경(黃帝中經)이라는 책은 단군 조선의 태자 부루 (扶婁)에게서 나와서 우( )의 사공(司空〓禹임금)에게 전해진 것이다.
뒤에 다시 기자(箕子)가 말한 것이 주왕(紂王)의 홍범(洪範)이 되었다함은 역시 황제중 경과 오행치수의 도리(道理)인 것이니, 대저 학문의 근본은 신시(神市)의 구정(邱井)과 균전(均田)으로부터 전해진 법이다.
25)밀기(密記)에 이르기를,
「옛날엔 사람들이 죽으면 향리(鄕里)를 벗어나지 않고, 한 곳에 합장하여 지석(支石)을 만들어 표시하였다. 뒤에 변하여 단(壇)을 만들고 지석단(支石壇)이라 칭하였다. 또 제석단(祭石壇)이라고도 하였다.
산(山) 정상에 자리를 정하여 구덩이를 파고, 단(壇)을 쌓은 것을 천단(天壇)이라고 하였으며, 산골짜기에 자리를 정하여 나무를 심고, 토단(土壇)을 만든 것을 신단(神壇)이 라고 하였다. 지금 승도(僧徒(들이 혼동하여 무당이 섬기는 신(神), 즉 제석신(帝釋神을 모신 것을 단(壇)이라 부르는 것은, 옛부터 전해 온 것이 아니다. 삼신(三神)을 수호 (守護)하고 사람의 생명을 다스리는 자를 삼시랑(三侍郞)이라고 하였다. 본래는 삼신 (三神)을 모시고 따르는 젊은 아이라 했다. 삼랑(三郞)은 본래 배달나라의 신하(臣下) 였다. 역시 삼신(三神)을 수호하는 직책을 세습한 것이다. 」고 했다.
26) 고려팔관잡기(高麗八觀雜記)에 또한 이르기를,
「삼랑(三郞)은 배달나라의 신하(臣下)였다. 씨뿌려 농사하고 재물과 이윤을 주관하는 것 을 업(業)이라 하고, 교화와 제사에 사용하는 고기와 술, 즉 제물을 주관하는 것을 랑(郞) 이라 하고, 무리를 모아 공덕(功德)을 원하여 비는 일을 주관하는 것을 백(伯)이라 하였 으니, 곧 옛날에 시작한 신도(神道)이다. 모두 능숙하게 영(靈)을 내려 받아 예언하는 일이 많았는데, 신(神)의 섭리를 종종 적중하는 일이 많았다. 지금 혈구(穴口〓강화)에 삼랑성(三郞城)이 있는데, 성(城)은 삼랑(三郞)이 자고 지키며, 머무르던 장소이다. 랑(郞)은 삼신(三神)을 수호(守護)하는 관직(官職)이다.
불상(佛像)이 처음으로 들어와 절을 짓고 대웅(大雄)이라 칭하였다. 대웅(大雄)이라고 말하는 것은 승도(僧徒)들이 옛날의 풍습을 이어 받아 거듭 사용한 말로서, 본래 승가 (僧家)의 말이 아니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승도(僧徒)와 유생(儒生)은 모두 랑가(郞家)에 예속되어 있었으니, 이로서 가히 알 것이라 하였다.
혹 말하기를 옛날에는 백성들이 계곡에 흩어져 살았으므로 사람이 죽어 장사지낼 땅을 미리 정해놓지 않았다.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모두 다 동굴에 옮겨 좋고, 하늘님(하느님)과 나란히 모시고, 같이 제사를 지냈다.
세월이 지난 후에는 혹간 평지에 장사를 지내고 박달나무나 버드나무, 소나무, 잣나무를 둘레에 심어, 이것으로 무덤을 식별할 수 있게 하였다. 이처럼 신시(神市)의 세상에서는 능(陵)이나 묘(墓)를 쓰는 제도가 없었다. 그런 후 중고시대(中古時代)에 이르러, 나라는 풍부해지고 민족이 강성해지니, 건강의 유지와 증진에 힘쓰고, 담력을 얻고 보니 죽은 자를 보내는 것도 사치스러워 지고, 제사를 지냄에도 예의(禮義)가 있었으며, 묘(墓)를 쓰는 것도 자못 융성하게 되었다. 혹은 둥글게, 혹은 네모나게 하여 지극히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장식하였으며, 높이, 크기, 넓이, 폭, 모나고 바른 것까지 규격이 있었다. 내벽(內壁)과 외분(外墳)을 고르게 정리하였으며, 겸하여 교묘하였다. 고구려 때에 이르 러 능묘의 규격과 제도가 천하에 으뜸이다.
자료제공은 한민족학회 "홍익세계"에서 보냄니다. 한민족의 역사와 뿌리를 연구하시는 여러분! 우리 민족은 우리가 지키고 빛을 내야합니다. 우리 주변국들은 우리민족의 역사를 왜곡하였고, 민족말살정책까지도 벌리지 않았읍니까? 02-3492-5978(이윤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