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부모의 방임으로 위탁된 은혜·혜진(가명)자매
“안녕하세요. 저는 초등학교 1학년 오은혜(가명·8)입니다. 좋아하는 것은 종이접기이구요. 가족은 엄마랑 아빠랑 선생님엄마랑 선생님아빠랑 언니랑 오빠랑 동생… 근데요 선생님, 우리 위탁(가정)인 것 알아요?” 씩씩하게 자기소개를 하던 은혜가 대뜸 물었다. 순진무구한 아이의 얼굴에 기자는 순간 질문으로 가득했던 머릿속이 하얘졌다.
감영애(48) 씨 집은 갑작스럽다면 갑작스런 늦둥이 막내들 때문에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장성한 자녀들도 있지만 자매의 애교는 감 씨 부부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을 안겨주고 있다. 이는 가족 모두가 사랑으로 살아가고, 희망을 나누는 덕분이 아닐까 한다. 감 씨는 '배'로 낳은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낳아 기르고 있는 자매에게 이런 가족 구성원으로써의 역할을 가르쳐주려 한다.
누구든 그 삶을 봤다면 그랬을 것
울산의 한 호프집. 빛 한줄기 들어올 수 없게 부착된 검은 썬팅 안으로 손님대신 아이들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이미 폐업한 지 오래라는 호프집 쪽방 한 켠 남짓이 자매의 보금자리였다.
이혼 후 아동시설에 맡겼던 자매를 다시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던 엄마는 집 어디에도 없었다. 낮인지 밤인지 모를 정도의 어둠 속에서 당시 7살이었던 아이들은 고사리같은 손으로 밥을 지어먹고, 설거지를 했다. 주부습진이 손 여기저기에 일었던 것이 꽤나 오래해 온 일이라 짐작케했다.
거기다 엄마의 허락없이는 밖에 나갈 수도 없는 자매는 서로를 의지한 채 갇혀있었다. “딱 엄마의 로봇같더라니까요. 과자 사먹으러 갈 때도 꼭 전화를 걸어 물어보고…” 감 씨의 한숨이 얕게 드리워졌다. 종종 이웃들이 부모의 책임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아이들에게 애착이 없는 엄마에게서는 ‘내 소임을 다했다’는 말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그렇게 자매는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 세상에 내던져졌다. 호프집 폐업으로 생긴 빚 독촉 때문에 엄마의 손에 이끌려 아동복지시설에 여러번 입소되기도 했고, 교회에 버려지기도 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오고 다시 버린 것 모두 엄마혼자 내린 결론이었다. 물론 그 이유는 한결같이 경제력 부족. 그러나 감 씨 부부가 아이들을 맡았을 땐 이미 이웃들에게 일하던 식당에서 월급을 가불한 뒤 잠적해버렸다는 아이들 엄마의 얘기가 돌았던 후였다.
두 번 버림받는 아픔 줄 순 없어
그런 엄마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딱하게 여겨 많이 챙긴 건 감 씨였다.
잦은 엄마의 방임으로 한 여름 씻지 않은 몸에서 풀풀나는 냄새는 코가 지릿했다. 그런 자매를 씻기고 일주일에 꼭 한 두 번씩은 반찬을 만들어주며 엄마의 빈자리를 채웠다. “상처받은 아이들을 돌보는 게 내 일이다 싶었어요. 엄마 품이 필요한 아이들을 고이 길러 부모에게 안겨주고 그 빈 가슴이 시려서 다시 보듬기 시작한 일이었죠” 그런 나날 속 어느 날 감 씨는 아동학대 신고를 받았다는 자매의 연락을 받았다.
부모의 방임을 보다못한 주변 이웃들의 신고였다. 자매는 또 다시 아동복지시설로 돌아왔다. “보다 안되겠는지 애들 엄마가 아이들을 잠시만 맡아주면 안 되냐고 하더군요. 그날 그 전화를 받고 잠 한숨을 못 잤어요” 감 씨는 고민에 빠졌다. “더군다나 아동복지시설에서는 위탁결정을 3일 안에 통보하지 않으면 고아원에 갈 수 밖에 없는 신세라는데… 무슨 수로 3일 만에 결정을 내립니까… ”
가족과의 갈등… 사랑으로 감싸안아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휴가나와 처음 모든 사실을 접한 군인아들은 감 씨를 원망했다. IMF 이후 감 씨네 생활형편도 넉넉지 않은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것 또한 당연한 반응이었겠지만 가족과도 갈등을 겪으면서 감 씨는 혼란스러웠다. “애들 엄마한테 정 그런 부탁을 하고 싶으면 숨지 말고 나오라고 했어요. 나도 내 가족 중에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위탁을 원치 않는다고. 하소연을 하든 설득을 하든 찾아와서 마음을 돌려야 될 것 아니냐고…”
감 씨는 단호했다. 그때서야 그렇게 만나기 힘들었던 아이들 엄마는 모습을 드러냈다.
말솜씨는 능했지만 아둔한 여자였다. 친척도 없고 어려운 사정을 얘기하러 온 자리에 부산에서부터 택시를 대절하고 왔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욱 감 씨는 아이들 엄마를 봐서가 아니라 애들 둘만 놓고 위탁을 생각하자 다짐했다.
어느새 아들도 결국 군대로 돌아간 뒤 위탁에 동참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무래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 아이를 맡기신 것 같아. 이제부터 당신이 얘들 엄마 하고 내가 아빠 하자” 그때 마침 남편 김종일(48) 씨도 아이들 위탁을 제안했다.
그러나 막상 키우기로 한 뒤로도 걱정이 앞섰다. 보통의 사람들처럼 내 핏줄을 따지는 이유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낳은 아이인데 내 아이처럼 사랑으로 키울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책임감에 대한 중압감 때문이었다.
“사실 저도 겁도 나고 많이 망설이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간절한 기도로 하나둘씩 준비하고 기다리면서 저도 생각이 바뀌던걸요. 가족도 옆에서 든든하게 받쳐주기도 했으니까요”
친부모의 무관심… 정부 지원 턱없어
그러나 자매는 한동안 마음을 열지 않았다. 게다가 은혜는 지적장애 3급을 판정받고 조금만 뜻대로 안되면 울어버리기 일쑤였다. 배우지 못해 이름한 자 쓸 줄 몰랐던 자매에게 가르침을 주고, 상처받은 마음을 보듬어줄 심리치료가 시작됐다.
교육과 의료서비스를 받는 데 걸림돌도 많았다. 그때마다 부부는 솔직하게 아이들을 대했다. ‘조건 없는 사랑’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며 의지할 수 있는 새 가족이 곁에 있다는 것을 인식시켜 줬다.
“힘들단 하소연도 못했어요. 해봤자 내 가슴만 아프고, 아이들에겐 무엇보다 치유받을 곳이 절실했던 거 잖아요. 요즘엔 말도 잘 알아듣고 애쓰는 게 보여요… ” 감 씨는 그 전화를 받고 자매를 맡게 된 데에도 다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 말했다.
“삶이 감사한 것을 느꼈어요. 주변의 만류가 있었지만 그대로 고아원에 갔다면 정서적으로도 삐뚤어지기 십상이었을 거에요. 그 아이들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막아줄 어른이 가까이에 없기 때문이죠. 올바로 키워주면 아이들 성장하는 과정에 조금이나마 힘을 덜 지 않겠어요?”
현재 매주 월요일이면 아이들의 얼굴을 보러 오겠다던 엄마는 연락도 잘 닿지 않는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고 했던가. 책임을 회피하려 주기로 했던 생활비도 입금하지 않고 있다.
위탁,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히다
감씨는 무기한 방임으로 일관하는 부모를 대신해 올해 9월부터 정식으로 자매의 위탁모가 됐다. 한 달 넘게 이어진 까다로운 위탁절차도 거쳤지만, 현실적인 생활비 걱정에 근심이 가득했다.
감 씨 남편은 택시기사로, 감 씨 또한 집에 딸린 공간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일을 손에서 놓아본 적이 없지만, 경기가 어려워 수입도 마땅치 않다. 다른 일을 구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한 달에 40만원씩 IMF때 진 빚을 갚아나가려면 남는 게 없다.
부쩍 추워진 날씨에 아이들 겨울옷 하나라도 더 사주고 싶지만 이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어 가슴이 미어진다. 정부 지원도 턱없어 월세 30만원 짜리 방에 살면서 애들 생활비까지 보태느라 카드빚도 불어났다.
“조급할수록 돌아가라고 기쁜 일은 배가 되게 하고, 힘든 일은 아낌없이 나누는 것이 가족임을 아이들을 양육하는 2년 동안 깨닫게 할 거에요. 자유로운 삶을 살 수도 있었고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후회는 없어요. 친가정이 가족 기능을 회복할 동안 노력해야죠. 몸은 힘들지만 내 자식 키울 때 못 봤던 재미도 얻고 있어요. 저도 애들 덕분에 마음의 위안을 얻는 셈이죠”
아이들은 여전히 부모를 그리워한다. 그러나 항상 ‘어렵고 힘들 때 옆에 있는 사람이 진짜 가족’ 이라 말하는 모습은 사뭇 진지했다.
인터뷰 말미, 아이들과 단란한 시간을 갖던 감 씨 부부에게 조심스럽게 앞으로의 바람을 물었다. 감 씨 부부는 옅은 미소를 띄운 채 말했다. “저희는 계속 아이들 곁에 있을 거예요. 우리 은혜와 혜진이가 엄마든 아빠든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기도하면서 말이죠”
글=신유리 기자/사진=김종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