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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골, 무당골, 견우와 직녀, 칠성각
대성골.
......................................↖............. ........촛대봉 ........도장골..길상사.
..........................................↖................세석 산장...음양샘~~.......거림
..............................................>.............영신봉....한벗샘...........↗..삼신봉..... .........청학동.
...........................................................칠선봉.........↘ ........↗
..........................................................덕평봉*선비샘~~~*대성골
.......................................↙..............벽소령 산장...........↘
......................................↙............. 형제봉.........................↘
..................................................... 삼각고지.........무당골~~~원대성~~대성골~대성리
................................................~~연하천 산장..............↗
,,,,,,,,,,,,,,,,,,,,,,,,,,,,,,,,,,,,.....↖...... 총각샘~~............빗점골
.............................................↖..토끼봉~~~~단천골↘
.................................................화개재........................↘
반선.~~~~.~~~~~~.뱀사골....산장...~~~~~~~목통골↘
........↖....달궁.........................삼도봉.......불무장등....화개골(남난희)... 화개장터...섬진강
...........↖............반야봉.........노루목..... .칠불사.....(무학대사)...불일폭포..쌍계사...
..............↖..........................임걸령 샘터....피아골 산장....연곡사...........
음양수 전설 속의 두 연인,
호야와 영신이 살았다는 곳.
세석평전보다는 대성골이 살기 좋은 자연환경.
첩첩산중 애워싼 계곡들은 깊고 깊지만, 남향.
그 안에 숨어 살면 그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
세석평전 음양수에서 멀지 않은.. 대성골.
음양수는 대성골을 이루는 발원지이기 때문.
지리산 대성골 지도
'김해 대성동(大成洞)과 대성(大成)골.'
같은 한자를 사용하는 것이 눈길을 끈다.
대성골은 김해 대성동에서 유래된 듯 싶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
김해 대성동 동서로 뻗은 구릉지대 가야의 고분군.
길이 300m, 높이 20m 경사가 완만한 일대의 무덤들.
구릉의 정상을 제외한 주변은 밭으로 개간되어 있다.
1∼5세기 가야국 지배집단 고인돌을 비롯한 널무덤),
덧널무덤(토광목곽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 등
구릉 주변의 평지에는 1∼3세기 무덤들이 밀집되어 있다.
구릉 정상부에는 4∼5세기 무덤이 밀집되어 있어
삼한시대 구야국부터 가야국 시기까지 무덤이 발견.
덧널무덤은 나무판을 조립하여 널(관)을 만든 것,
통나무관에서 나무판널으로 전환 시기는 1세기경
유물로는 토기류와 철기류, 목류, 중국제 거울 등.
우리나라 고대무덤 형식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며,
중국제 거울, 토기류는 한중일의 문화교류를 입증.
대성동 3호 목곽묘 발 아래 묻힌 3인의 순장 유적.
8호 목곽묘는 5명의 순장자가 주인공 주변에 배치.
박물관에는 가야시대 번성했던 철기문화 유물들.
그릇류, 화살, 농기구, 일본에 수출한 쇳덩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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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수 전설과 관련이 깊은,, 대성골.'
음양수를 훔쳐 마신 죄로 촛대봉 바위가 된 영신
영신을 사랑했던 죄로 영신봉의 바위로 변한 호야.
'음양샘 전설' 속 영신과 호야가 살았었다는 대성골.
하여, 대성골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연인의 천국.
IMF 경제 혼란기에 대성골은 정체불명 연인들의 은신처
관계당국의 소탕령에 의해 지금은 대부분 사라진 풍속도.
아빠와 딸, 또는 엄마와 아들 같은 연인들.
옛 직장상사와 여직원 관계와 같은 연인들.
각자 가정이 있는 유부남과 유부녀 연인들.
골짜기 곳곳 굿 음식으로 사는 구도자.
등산객 안내로 생계를 유지하는 방랑자.
구걸과 막일로 살아가는 신원불명 실직자.
'대성골은 반란의 역사 전설의 고향.'
..........남부군이 몰살한 대성골 가는 길...........
세석 -0.5Km- 세석입구 -1Km- 음양수샘 -0.5Km-
1,400m갈림길 -3Km- 큰세개골 -1Km- 작은세개골 -4Km-
대성리 -1Km- 절터 -1Km- 의신마을 (총 12Km 산행 코스)
내리막 길 걷는 시간 3시간 30분,
오르막 길 걷는 시간 약 5시간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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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석 남서쪽 덕평골, 큰세개골, 작은세개골, 수곡골이 모인 계곡.
대성골은 지리산 남부능선의 물이 모두 모여든다 해서 붙여진 이름.
큰 大, 이룰 成. 골짜기마다 모인 위치에 있는 마을 이름 역시 대성골.
'옛 원대성마을을 작전상 이주하게 한 곳이 대성골.'
대성골 따라 차로 올라가 신흥에서 좌회전하면 범왕리 칠불사 가는 길
계속 직진하면 의신마을 거기서 세석과 빗점골로 가는 등산로가 시작.
대성골은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토벌대에 의해 빨치산이 몰살 당한 곳.
정충제 作 '실록 정순덕'.
이기형 작 '죽음의 골'.
이태 작 '남부군'
이들 기록에 의하면, 1952년 1월 17일과 18일이 최대 격전기
그 해 1월 한달 동안이나 야전 사령부의 3기 토벌작전이 시작
1월 17일 무렵 지리산 온 골짜기는 함박 눈이 퍼붓는 가운데
날이 저물자 빗점골, 거림골, 신흥의 빨치산이 몰려든 대성골.
1,000 명~ 1만 명에 이르는 빨치산이 몰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52년 1월 남은 빨치산은 이기형 작 '죽음의 골'에 나오는 800 명.
빨치산 몰살 사건이 대성골에서 이뤄진 것은 지형적 특성 때문이었다.
지리산 계곡 중 대성골이 가장 산세 깊은 협곡이고 궁지에 몰린 집결지.
18세 정순덕 여인이 4~5일 불바다에서 생쌀 한줌으로 버틴 곳.
잠 한숨 못자고 혹한 속에서 뜬눈으로 서서 버틴 사투 끝에 생존.
그녀의 증언에 의하면 토벌대의 작전으로 모든 도주로가 차단되고
대성골로 가는 길만 터놓아 쫓기던 빨치산들이 이곳에 몰려 들었고,
항공기를 동원한 기름통 투하 및 소염탄 폭격으로 눈밭 위엔 불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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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골의 비극.
..................
1951년 12월 2일 시작된 백야전 사령부의 제1차 동계토벌작전.
빨치산들에게 많은 타격을 주었는데, 그 타격 중 대표적인 사례
대성골 빨치산들이 입은 타격은 아래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1952년 1월 17일은 온 골짜기를 가득 메워버릴 것처럼 함박눈.
날이 저물며 빗점골, 거림골, 신흥 등지에서 몰려든 빨치산들
다음날 새벽 즈음 어디서 그렇게 많이 모여 들었는지 인산인해
정순덕 여인이 가늠하기에도 1만 명의 대병력이 들어찬 것이다.
빗점골 의신부락 뒤쪽의 토벌대가 언제 야포를 끌어다 놓았을까?
대성골로 포탄이 날아들기 시작했고 스무 발 이상씩 동시에 작렬.
귀청이 찢어질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귀가 달아나는 듯.
시간이 지날수록 희생자는 불어났고 점점 좁혀지는 포위망.
토벌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훤히 내려다보며 토끼몰이
포위망을 좁히며 포격을 퍼부어대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동작 빠른 전사들은 토벌대와 맞부딪치며 포위망을 탈출.
대다수는 독 안에 든 쥐처럼 빠져나가지 못하고 죽어갔다.
하루 종일 퍼부어대던 포격도 총격도 해가 지면서 주춤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쪽 하늘에서부터 비행기 소리.
머리 위에 떨어지는 물체들은 휘발유가 가득 찬 '드럼통'.
비행기 편대는 네 다섯 번 마개 빠진 드럼통을 떨어트렸다.
그러다가, 마지막 편대가 주먹만한 소이탄을 곳곳에 뿌렸다.
그 순간부터 하얀 눈으로 덮혀 있던 대성골은 시뻘건 불바다
- 정충제 기록, [실록 정순덕], 상권, 272~276쪽에서 발췌 -
............'의신마을 주민 정윤균(59세)씨 증언................
대성골은 숫더미 같았고 서캐 낀 듯한 인골들이 널려 있었다
훗날 나병환자들이 몰려와 인골을 추스려서 가져가기도 했었다.
몇 년 전까지 대성골 상류에서 인골을 목격한 사람들이 많다.
'폭포수골'과 세석평전 서쪽 병풍바위 아래의 인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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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아비규환의 협곡에서 비참한 최후를 마친 빨치산들 유해
지금까지도 대성골은 거목이 드물고 팔뚝 굵기의 잡목들이 주종
반세기 전 그 당시 참상을 간접적으로나마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군데 군데 숲 속에 있는., 녹쓸은 폭탄 껍데기들.'
지리산 빨치산 투쟁에 분기점을 이룬 백야전 사령부의 토벌작전
'실록 정순덕'에 대성골은 그 후 닷새 간 불길에 휩싸였다고 기록.
빨치산들의 대화 형식을 빌어 칠팔천 명이 몰살한 것처럼 말한다.
과연 그렇게 많은 수의 빨치산들이 죽었을까?
군경측 기록인 '공비연혁'을 보면 1952년 1월 5일 현재,
즉 대성골 참극 전 지리산 일대 잔존 공비수는 1,250명
그 사건 두 달 후인 3월 31일 현재 잔존 공비수는 332명
실록 정순덕'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여하튼 대성골 전투에서 빨치산들이 타격 받은 것은 사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군경 역시 적지 않은 사상자를 낸 듯.
이러한 사실은 백선엽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백선엽은 제1차 지리산 토벌(51년 12월 2일 ∼ 12월 14일)
2차 지리산 주변 각 도당의 토벌을 마치고 다시 지리산 집결.
(전남도당: 광양의 백운산·화순의 백아산·순천의 조계산,
전북도당: 회문산, 운장산일대 51년 12. 20.∼52. 1. 5 일)
수도사단과 8사단 경찰병력을 동원하여 지리산을 압박해왔다.
토벌대는 51년 1월 17일 처음 빨치산의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백선엽의 표현에 의하면 최초의 교전다웠던 교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타격을 입은 쪽은 빨치산들이었는데.
경남도당 위원장 남경우, 부위원장 허동욱이 전사한 것.
결국 대성골 전투는 토벌대와의 교전속 에서 빨치산 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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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대성동은 지금 있는 곳에서 4km 정도 더 들어가 있는 위치.
60년대 후반에 지금 있는 곳으로 옮겨졌기에 원 위치는 <원대성>.
원대성은 무당골이라 불릴 만큼 무속인들이 모여든다.
세석 음양수가 발원지인 이곳 개울은 여름 피서객 휴양지.
남향의 용왕소 주변은 돌탑 제단에 울긋불긋 천 조각 흔적들.
득도하려는 구도자 무속인을 비롯한 현실 도피자들의 은둔처.
IMF 이후 꾸준히 소탕해 왔지만, 여전히 근절이 어려운 곳.
사업 하다가 망한 경제범들로부터 애매모호한 관계의 연인들.
등산객이 남긴 식량이나 굿판 음식으로 연명하는 사람도 많다.
음양샘 전설의 주인공인 듯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리는 연인.
조난당한 등산객을 구조하거나 도와주며 생계 유지하는 기인.
소탕작전을 펼 때마다 필사적으로 탈주하는 '빠삐용' 신 풍속도.
'작은세개골' 원시림 상부는 낙석 위험이 높아 접근 위험.
예나 지금이나 대성골은 현실에서 벗어난 은둔자들 은신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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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계곡 중에서 가장 넓은 산세와 깊고 깊은 골짜기
둥근 바위들과 더위를 잊게 하는 물줄기 속으로 떠나보자.
대성골은 6·25 전쟁 중 남부군 비운을 간직한 역사의 현장.
하지만, 반세기가 흐른 대성골에는 당시 흔적이 오간 데 없다.
그곳 물은 물대로, 바위는 바위대로 묵묵히 세월을 지켜볼 뿐.
하동군 의신마을 - 의신매표소 - 밤나무 단지 - 대성마을
- 원대성마을 - 철다리(작은세개골) - 철다리(큰세개골) -
전망대 - 삼거리(남부능선) - 음양수 - 삼거리 -거림골(6 h)
비교적 인적이 드물어 유유자적한 산행을 즐길 수 있는 코스.
일부 구간의 오르막을 제외하곤 비교적 평탄해 참 걷기 편하다.
보통 대성골 코스는 대성교와 의신마을 두 곳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대성교 코스는 자연휴식년제라 의신마을만 출발 가능.
버스종점 의신마을에서 내려 50m쯤 내려와 조그만 등산로 안내판
선비샘 황토방. 벽소령산장 간판 보이면 오른쪽 길로 100m 직진
'지리산 공비토벌 루트 안내도' & '세석 9.1㎞' 팻말이 서 있다.
의신매표소를 지나면 백일홍 무궁화 개망초가 활짝 펴 있고 산비탈
밤나무 따라 몇차례 산굽이 돌면 '공비토벌 최후 격전지 2.8㎞’팻말
한 발자국마다 서서히 오른쪽 저 멀리 시원한 계곡 물소리가 들려온다.
대성계곡의 지계곡을 몇 개를 지나면 산길은 대성계곡과 나란히 달린다.
밤나무 숲과 큰 소나무들을 지나면 산 속 마을인 대성마을.
의신마을에서 1시간 거리의 대성마을은 현재 2가구 만 산다.
물이 깊어도 바닥이 투명하고 집채 만한 바위들이 둥굴 둥굴.
낙석주의를 알리는 절벽과 잇단 너덜지대를 지나면 원대성마을.
집터 흔적은 보이지 않고 밭이었던 곳에 지금은 나무가 자란다.
동자꽃, 까치수염, 도라지모시대, 참나리. 등의 대성골의 야생화
모처럼 탁 트인 하늘과 주변 봉우리가 보이면 물소리가 커진다.
작은세개골과 대성계곡 합수점이고 작은세개골 위로 놓인 철다리
아직도 철다리에서 세석산장까지는 5.2㎞.
너덜과 인상적인 산죽길을 지나 두번째 철다리가 보이면 '큰세개골'.
본류인 큰세개골 따라 오르면 지리산 최고의 기도처로 알려진 영신대.
이 곳에서 해발 1,400m급인 지리산 남부능선까지 2.4㎞ 구간이 난코스.
계곡 물소리가 서서히 멀어지면서
나타나는 흙길, 돌밭길, 침목계단.
1시간 20분 동안 바짝 땀을 흘리면 드디어 삼거리인 남부능선.
왼쪽 길은 세석대피소 방향으로 가고 오른쪽 길은 삼신봉 방향.
15분 후 나타나는 전망대 우측에 삼신봉이 보이고 정면에 촛대봉
운무에 가려진 촛대봉 바라보며 산죽 길과 之 산길을 오르면 음양수.
큰 바위틈 석간수를 마시면 자식을 낳을 수 있다는 신비의 샘물이다.
이곳에서 세석산장과 거림골로 갈라지는 삼거리까지는 걸어서 10분.
'지리산의 중심은 과연 어디일까?'
산꾼이라면 의신마을이라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영신봉-칠선봉-덕평봉-벽소령-형제봉-명선봉-토끼봉.>
1,500m급 지리산 주능선과 삼신봉으로 내려선 <남부능선>
'남부능선이 병풍처럼 에워싼 중심이 의신마을.'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의신마을 빗점골에서 사살되었고,
그 오른쪽 대성골은 3일 밤낮 포탄이 쏟아졌던 죽음의 계곡
수곡골, 작은세개골, 큰세개골 골골의 물은 대성골로 모인다.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면서도 인적이 드문..대성골.
....................찾아가는 길......................
부산 서부터미널에서 하동행 시외버스 9천 5백원
오전 6시30분부터 시작해, 7시10분(40/50분 간격)
하동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서 의신행 군내버스
오전 9시50분, 11시50분, 2천6백원. 1시간 소요.
거림 매표소 지나 5분 거리인 두지바구 산장 앞 버스 종점
덕산행 군내버스는 오후 3시, 5시50분(막차)에 출발한다.
만약 막차를 놓쳤을 경우 택시(055-972-9393)를 타고 덕산
덕산에서 진주행 버스는 막차가 오후 7시 50분에 지나간다.
진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부산 서부터미널까지 시외버스
10/20분 간격으로 출발하며 막차는 밤 9시10분. 6천원.
심야버스는 밤 10시, 11시, 자정에 출발한다. 8천5백원.
승용차:남해고속도로-하동IC-19번 국도-쌍계사-의신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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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골.
대성골은 일명 무당골 (대성골-음양수-세석)
쌍계사 입구에서 의신 쪽으로 향하다 신흥마을
왼쪽 길을 따라가면 목통골(연동골) 또는 토끼봉
신흥마을에서 오른쪽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가면
대성교 - 의신마을 - 빗점골 - 대성골 - 음양수.
쌍계사 북쪽 대성골은 무속인이 많이 몰려드는 곳.
영신봉 부근, 음양수 일대, 대성교 용왕소 주변 돌탑,
촛불제단, 제기, 울긋불긋한 천조각, 움막 기도처 등.
덕평골, 큰세개골, 작은 세개골, 수곡골이 모인 대성골
쌍계사 지나 신흥마을 오른쪽 포장도로로 가면 의신마을
의신마을 2km 전에 대성교, 위쪽 능선길로 가면 대성마을
대성마을에 음식점 겸 민박집이 두 채
임옥순 씨 집 전화번호는 055-883-0835).
...............대성마을 일대 등산로..................
대성마을에서 20분쯤 오르면 작은 세개골 - 칠선봉.
다리 건너 오른쪽 지릉타고 오르면.. 남부능선 코스.
남부능선 삼거리에서 오른쪽(남쪽)이 삼신봉 방향이고,
왼쪽은 음양수 - 세석산장(대성교 - 세석은 4시간 거리).
대성교 - 삼신봉 - 단천골 - 남부능선 - 삼신봉 3시간,
삼신봉 - 단천마을 2시간, 대성골 갈림길 - 칠선봉 3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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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 편....................
하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쌍계사 방면
08:00, 08:40, 09:40(의신),
10:30, 11:00(칠불사), 11:50 (의신),
12:40, 13:30, 14:00, 15:00, 15:30(의신),
16:40 (칠불사), 17:20(의신),
17:50, 18:40(의신), 19:30(칠불사).
구례 공용버스 정류장에서 시외버스
06:10, 07:10(신흥), 08: 00, 09:00(신흥),
09:40(신흥), 10:50, 12:25(신흥), 12:50(신흥),
14 : 30 (신흥), 16:00(신흥), 17:00, 18:00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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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대중교통 수단이 많은 무당골 일대.
그만큼 무당골을 찾는 인파가 많다는 증거.
무속 인파들만 무당골을 찾는 것은 아닌 듯.
'대성골이 무속 기도처가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이곳은 옛부터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의 도피처.
대성골은 다양한 굿 풍습들을 접할 수 있는 곳이다.
특히, 고대 사회에서 비롯된 전통적인 남도 굿 풍습.
'이곳 무속 뿌리는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대성골, 범왕리 칠불사 일대 지명은 가락국 흔적.
'음양샘의 전설'의 시대적 배경도 가락국으로 추정.
혹시, 이곳 굿풍습은 가락국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가락국 옛풍습(단오절, 추석, 견우와 직녀)을 살펴보자.
칠성 신앙. 진도의 중추절, 남사당, 풍악대, 굿판의 유래.
그 풍습들을 추적하면, 가락국의 옛 풍습 뿌리가 드러날 듯.
..................가락국 단오절의 유래.......................
단오(음력 5월 5일)는 초나라 굴원을 기념하는 날
부패를 반대하고 개혁을 요구하다가 왕에 의해 추방.
BC 287년 진에게 패망하자 호남 멱라강에서 투신 자살.
굴원이 죽자 호남 백성들은 비통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굴원의 시체를 찾으려 배타고 용주(龍舟)를 저으며 애도.
용주(龍舟)는 용처럼 생긴 초나라의 목선(木船)을 말한다.
'단오절 용주는 징과 북소리 속에서 선두 다툼 놀이.'
단오절에는 쫑즈(만두)를 먹는 풍습이 있다
굴원이 투신한 음력 5월 5일을 애도하는 행사.
대나무 통에 쌀을 넣어 강물에 던지는 제사 풍습.
굴원은 사후 사람들의 꿈에 나타나
호남 강가에서 이런 말을 했다 한다.
"당신들이 준 음식은 모두 용에게 빼앗겼습니다.
다음부터 쑥잎으로 통을 막고 오색실을 묶어주세요.
용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이 두 가지 물건입니다"
이 때부터 댓잎으로 찹쌀을 싸서
쫑즈(만두)를 만들어 굴원을 축원.
....................................................
이 전설을 보면, 가락국의 조상은 초나라.
어떤 경로로 한반도까지 들어왔는지는 수수께끼.
서해가 저지대일 무렵 유입된 초나라 유민인 듯.
저지대 또는 해로로 한반도로 대거 민족이동 한 듯.
........................추석(중추절)의 유래- 1...........................
중국의 3대 명절 중의 하나 추석은 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 주위를 분간할 수 없는 데서 오는 공포.
이때 하늘에 두둥실 떠오르는 달은 안도의 빛을 던져주는 위안
특히 휘영청 밝은 보름달은 경이롭기까지 한 숭배의 대상이었다.
하여, 원시사회로부터 중추절의 보름달은 토탬신앙의 대상이었다.
인간이 불을 사용하게 되자 그 숭배의식은 점차 희미해져 갔지만
오곡을 무르익게 해주는 것은 여전히 월신(月神)의 덕이라 믿었고
추수 후 제사의식은 감사의 대상에서 점차 감상의 대상으로 변했다.
감상은 상상을 낳고 환상은 전설을 잉태한 것이 항아 선녀의 이야기
달빛은 여성의 상징이라 항아가 선녀가 되어 달로 날아갔다는 전설.
항아의 남편은 명사수. 어느날 하늘에는 열 개의 태양이 떠올랐다.
폭염이 대지를 태우자 가뭄이 들고 모든 생물은 고사 직전에 빠졌다.
이때 항아의 남편이 화살로 9개의 태양을 떨어뜨려 세상의 생명을 구원.
하여, 신선은 불로장생약을 하사했는데 항아의 남편은 나날이 기고만장.
항아는 그 불로장생약을 훔쳐먹고 푸른 하늘 은하수 건너 달로 날아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계수나무 아래에 토끼 한 마리 외엔 아무 것도 없었다.
항아는 광한궁(廣寒宮)을 짓고 달에 군림한 월신(月神)이 되었지만
남편을 속인 죄로 하늘의 노여움을 샀기에 두꺼비(蟾 :섬)로 변했다.
보름달은 둥근 원이다. 원은 구심점을 향해 모이는 상징적인 모양새.
하여, 중국에서는 중추절에 가족들이 구심점인 부모님을 찾아 모인다.
중국에서는 달이 음기라 하여 여자만 절하고 남자들은 절하지 않는다.
중국의 추석은 보름달을 위시해
관계되는 풍물이 모두 둥글둥글.
차례상에 올려놓은 과일들도 둥글고.,
흩어진 가족도 부모님 곁으로 모인다.
옥토끼 절구공이도 둥글어 모든게 원만하길
기원하는 마음을 보름달에 가득 담는 중추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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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중추절)의 전설 - 2.........................
어느날 하늘에서 10개의 태양이 떠올라 폭염 끝에 가뭄
모든 생명이 죽어갈 때 활을 쏴 9 태양을 떨어뜨린 후예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고 부인 향아와 행복하게 살았단다.
어느날, 후예는 도를 닦기 위해 친구와 함께 곤륜산에 올랐다.
그곳에서 하늘나라 황후 서왕모(西王母)에게 불사약을 얻었다.
불사약을 먹는 즉시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될 수 있다는 약이다.
그러나, 후예는 부인과 이별이 싫어 부인 향아에게 보관하게 했다.
향아는 화장대 백보갑(百寶匣)에 숨겼는데 제자 봉몽이 알게 되었다.
3일 후 후예는 제자들과 사냥을 나가자 봉몽은 아프다며 집에 남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봉몽은 상아를 협박하여 불사약을 빼앗으려고 했다.
향아는 빼앗기지 않으려고 불사약을 삼켜버렸다.
그런제 잠시 후 몸이 가벼워지며 하늘로 날아갔다.
향아는 남편을 잊을 수 없어 가까운 달로 날아갔다.
저녁에 후예가 집에 오자 시녀들이 울며 낮에 일을 알려주었다.
후예는 화가 나서 검을 들고 봉몽을 찾았지만 도망가고 없었다.
후예가 가슴을 두드리며 하늘을 향해 부인 상아의 이름을 불렀다.
이때 후예는 평소보다 유난히 밝은 달 속 그림자를 보았다.
후예는 그 모습이 향아인 사실을 알고 향아에게 제사지냈다.
백성들도 향아가 달선녀가 된 사실을 듣고 향아의 안녕을 기원.
'이때부터 중추절에 달을 향해 제사 지내는 풍속이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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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14좌를 오른 산악인 대부분 보름달에 정상등정 계획.
헤드램프는 혹한에 밧데리가 쉽게 마모되어 무용지물이기 십상.
보름달이 뜰 무렵엔 날씨도 좋고 어둠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중추절은 인간이 불을 사용하기 이전부터의 유래인 듯.'
인간이 한곳에 정착하기 전 사냥 및 유목민 시절의 풍습인듯.
아직까지도 농사를 지을 때 양력보다는 음력 절기가 도움된다.
고기잡이할 때에도 물때를 알려면 양력보다는 음력이 정확하다.
음력은 월경 주기 처럼
보름은 음기 왕성한 시기.
9 태양을 활로 쏘아 떨어 뜨렸어도
달 하나는 건드리지 못한 항아 남편.
항아 남편은 유목민 사냥꾼이자
인간의 조상을 뜻하는 것 아닐까?
항아는 달에 광한궁이란 월궁을 짓고 살다가 두꺼비로 변한다.
'남원의 광한루' 및 '지리산 달궁'은 중추절 전설에서 유래된 듯.
이 전설을 보면, 중국과 한반도는 그 민족 뿌리가 하나로 보인다.
일본의 후지산에 얽힌 '중추절의 전설' 역시 내용이 거의 유사하다.
하여, '중추절의 전설'은 한중일을 잇는 서해 항로를 통해 전파된 듯.
혹시, 서해 항로가 저지대일 무렵 그곳에 살던 민족의 전설은 아닐까?
..............김해 대성동 고분.............
김해시 대성동 420-456번지 일대의 구릉
1991년 1월 8일 국가사적 제 341호로 지정
예로부터 도굴꾼이 유물을 파헤쳐간 구지봉
1960년부터 80년대초까지 도굴에 의해 출토된 유물
경주 박물관과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990년 7월부터 경성대학교에 의해 3차례 발굴 조사
가락국 역사와 문화를 규명할 수 있는 귀중한 유적.
고대 한일관계의 명확한 역사를 밝힐 유물들.
1호분에서만 마구류(馬具)와 대형철정, 공구,
무구(武具) 각종토기, 금속구, 인골, 동물골 등
2호분에서는 주곽에서 철제갑주, 말 장식품, 대형철정,
무기류, 공구류, 금속제품, 토기류, 장신구 등이 출토
일본에 앞선 문화를 확인시켜 주는 출토품으로 평가된다.
1세기에서 5·6세기까지 다양하고 수준 높은 유물들
가락국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귀중한 유적으로서 평가
일본의 고고학계에서도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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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우와 직녀.
옥황상제 미움을 산 '선남선녀'
견우와 직녀는 벌을 받게 된다.
"직녀는 은하수 서쪽에서 베를 짜고 견우는 은하수 동쪽에 살아라!"
견우와 직녀가 용서를 빌자 옥황상제는 일년에 한번 만나게 해준다.
견우와 직녀가 일년에 한번 만날 수 있는 음력 7월 7일이., 칠석날.
그러나, 견우와 직녀가 일 년을 기다려 만나려하자 가로막는 은하수.
두 연인을 도와주려고 까마귀와 까치들이 몸으로 만든 다리가 오작교.
칠석날에 비가 오거나 흐린 경우는 두 연인이 만나 흘리는 감격의 눈물
이 무렵은 바쁜 농사 일이 어느 정도 끝나고 더위도 한풀 꺽이는 때라
여름 내내 입었던 옷을 빨아 햇볕에 말리는 풍습이 옛부터 전해져온다.
칠석날 옷과 책을 말리면 일 년 내내 좀먹거나 상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
칠석날 부녀자들은 마당에 바느질 차비와 맛있는 음식을 차려 놓고,
문인들은 술잔을 나누면서 두 별을 제목으로 시를 지었다고도 한다.
또, 집집마다 우물을 퍼내 청결히 한 다음
시루떡을 해서 우물에 두고 칠성제를 지냈고
밀국수, 밀전병을 먹고 잉어음식, 증편을 만든다.
복숭아, 수박으로 과일 화채를 만들어
이웃 간에 나누어 먹는., 칠석날 풍습
견우와 직녀 전설에 대해 북한 덕흥리 고분엔 귀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견우는 염소 만한 소를 끌고 견우성을 향해 떠나고,
직녀성이 자미원 밖에서 견우를 배웅하는 고구려 시대의 천문도 그림이다.
이 천문도를 보면, 고구려 시대부터
칠석날 칠석제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칠석날은 인류의 조상인 나반이
은하수 건너., 하나님을 만나는 날.
장마를 그치게 하는 약속을 받아낸다.
그 약속 징표로 소 한 마리를 받아
은하수 건너 소를 이끌고 돌아온다.
음력 칠월 초에 장마가 그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 견우는 인류의 조상이다.
직녀는 땅으로 내려온 인류의 조상
그녀는 아만이 되고 다시 태어나 마고.
하여, 반야봉 전설의 여주인공은 마고부인
그 이유는 '견우와 직녀' 전설에서부터 유래.
즉, 마고부인을 인류의 조상으로 여기기에
옛부터 그녀를 성모의 대상으로 섬기는 것.
그런데 왜 나반이 칠석날 하나님을 찾아갈까?
천기의 순환주기를 1월부터 6 월,
7 월부터 12 월 둘로 보았기 때문.
첫 주기는 섣달 아침에 달이 뜨고,
정월 초하루에 음양이 만나 천기왕성.
6월에는 극에 달해 하늘이 열리고 장마.
두 번째 주기는 7 월 ∼ 12 월,
천기가 왕성하지 못한 시기이다.
7월은 해가 중천에 있을 때 달이 뜨므로,
원기가 약해지는 때라 하나님을 만나는 날.
하나님이 장마 끝을 선언하는 날이..칠월칠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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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광한루원의 오작교는 견우와 직녀 전설에서 비롯된 듯.
견우와 직녀는 '인류의 기원설'을 상징하는 뜻이 담겨 있는 듯.
지리산 전설속 천왕성모 또는 마야부인 역시 직녀의 후예이다.
'밤하늘의 별을 봐야 별을 딴다.'
'님도 보고 뽕도 딴다.' 라는 말.
'견우와 직녀 전설'., 인류 기원설.
................임신의 비밀과 피임법.....................
'견우와 직녀의 전설'은 인류의 기원설을 뜻한다.
인간이 모체에서 잉태하는 과정에서부터 출산 과정.
인간의 출생과정과 '견우와 직녀의 전설'은 유사하다.
직녀가 땅에 내려와 아만이 되고
아만이 다시 태어나 마고가 된다.
그 마고의 후손은 일년에 한번 출산이 가능.
밤하늘의 별만큼 많은 정자를 은하수에 비유
까마귀와 까치의 은하수 다리는., 합궁을 상징.
견우와 직녀 두 연인이 일년만에 만나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것은 절정을 상징.
한 번에 6천만~ 2억 정자를 만드는..고환.
정자는 성교 때 정관을 통과한 후
정낭 전립선 거쳐 정액과 합쳐진 뒤,
사정을 통해 배출되며 그 양은 3∼5cc.
그 중에 정자의 양은 약 10% 이고
나머지는 윤활유 역활을 하는 물질.
고환에서 탄생한 정자는 보통 3개월 정도 생명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여자의 몸속으로 들어가면, 수명은 3∼5일로 줄어든다.
난자의 고향은 난소다. 난소에서 난포라는 주머니에 싸여 자라는 난자.
한달에 한번 생리 주기마다 두 개의 난소 중 한 곳에서 단 하나 생긴다.
이것이 배란. 이 땅에 여자로 태어나 일생 동안 생기는 난자는 약 400개
여자는 십대 중반에서 사십대 후반까지 임신가능.
생리 주기는 평균 28일. 짧게는 21일, 길게 35일의 생리 주기.
생리 주기 중에 배란일부터 다음 생리일까지의 기간은., 14일.
난소는 빗자루 모양 나팔관을 타고 올라가며 정자를 기다린다.
'내 님은 누구일까? 어디에 계실까?
무엇을 하는 님일까? 만나보고 싶네..'
난자의 수명은 고작해야 하루 이틀.
자궁 통과한 우수한 정자와 만나 수정.
나팔관에서 만나 결합된 수정란은 6일 동안 자궁 속에서 정착할 곳을 찾는다.
그 동안 자궁내막은 수정란이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성숙되고 혈관이 자라난다.
수정란이 자궁 어느 한 곳에 자리 잡는 것을 착상이라 하며 임신이라고도 한다.
난자가 정자를 만나보지도 못하고 죽으면
난자가 빠져나간 난소의 빈 공간 황체가 퇴화
착상 준비를 위해 성숙됐던 자궁내막 혈관이 막혀
몸밖으로 떨어져 나가는데 이것을.. 월경이라 한다.
'피임이란 무엇이며,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질까?'
임신이 되려면 일단 정자가 여성의 질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는 것. 정자가 질 속으로 못들어가면 불임
질 속 정자는 자궁을 통과해야 나팔관에서 난자와 만날 수 있다.
따라서 피임은 자궁 입구에서 정자 출입을 봉쇄하는 방법이다.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자궁 입구인 자궁경부를 봉쇄하는 것.
또 그곳에서 아예 정자를 죽여버리면 일은 간단해진다.
그 외에도 방법은 있다. 정자의 자궁 속 출입 금지 방법.
자궁점액을 혼탁하게 만들면 정자는 난자 구경도 못하고 힘빠져 도중하차.
만약 정자가 자궁 안으로 들어갔다면 피임방법은 없는 것일까? 천만의 말씀.
자궁 안으로 들어간 정자는 나팔관에서 난자와 결합해야만 수정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난자와 만날 일이 없게 하면 된다.
즉 난자가 만들어지는 것을 미리 막으면 된다.
또 둘이 만나는 장소인 나팔관을 막아놓으면
정자와 난자는 오작교 없는 견우와 직녀 신세.
끝으로 수정란은 자궁에 자리를 잡아야 임신이 되는 것.
착상을 하려면 자궁내막이 두텁게 성장해 있어야 하는데
이를 막으면 임신이 되지 않는데., 그것이 피임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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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의 별같은 정자 중 난자(달)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
1년에 한번 견우와 직녀의 만남은 출생의 신비를 의미한다.
현대의학이 밝힌 출생의 신비가 견우와 직녀 전설에 담긴 듯.
그런데, 하필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이 음력 7월 7일일까?
한문으로 일곱 七(칠)과 아라비아 숫자 7은 북두칠성의 모양.
한문 七에 머리로 빠져나온 것은 북극성을 의미하는 듯 하다.
'7 또는 七 숫자를 선호하는 민족의 조상은 유목민.'
북극성은 옛부터 유목민에게 길을 알려주는 밤하늘의 별.
북두칠성과 카시오페아 별자리는 북극성을 중심으로 돈다.
하여, 동서양을 막론하고 북극성을 소중히 여기는 민간신앙.
북두칠성은 7, 카시오페아는 다섯개의 별자리가 W를 닮았다.
7 & W는 남녀를 상징하고 그 한가운데 북극성은 합궁을 상징.
북극성은 원시사회에서는 어둠속에 길을 가르쳐주는 좌표였다.
한반도에서 칠성님과 관련된 신앙은 북두칠성과 관련이 있다.
별에 대한 믿음이 신앙으로 정착된 것은 도교의 영향 때문이다.
이런 양상은 민간신앙 토속무속, 불교 등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원래 도교에선 별자리가 인간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믿음이 있다.
하여, 별자리로서 인간의 미래 운세를 점치는 점성술이 발달했다.
삼국지의 제갈공명은 별자리를 보고 운명을 점치는 내용이 나온다.
북두칠성은 원래 인간의 수명, 재물을 담당하고 비를 내리는 신.
특히 칠석에 비가 내리면 풍년이 든다고 하는 믿음이 하나의 예.
칠성신이 인간의 수명을 담당한다는 믿음은 중국에서 비롯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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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두칠성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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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홀어머니와 일곱 아들
날마다 춥다는 어머니를 위해
방에 매일 불을 지핀 일곱 아들
어느날 잠에서 깨어보니
밤에는 보이지 않는 어머니
새벽녘이면 들어오는 어머니
다음날 밤 어머니를 뒤따라 가보니
얼음처럼 찬 냇물을 건너는 어머니
이웃마을 신발장수 할아버지 집으로
가서 가만 가만 이야기 나누는 어머니.
'그간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개울
얼음장처럼 차갑기만 한 그 개울물
그날, 일곱 아들이 밤새 놓은 징검다리
새벽이 되어 징검다리를 건넌 어머니.
다리를 놓아 준 사람이 너무 고마워서
다리를 건널 때마다 하느님께 빌었단다.
다리를 놓아준 사람은 이 다음에
별이 되게 해달라고 날마다 기도
그뒤, 모두 별이 되었다는 일곱 아들.
그별이 밤하늘에서 반짝이는 북두칠성
'북쪽 하늘에 국자 모양., 북두칠성.'
칠성각.
옛날에 한 노인이 늦둥이 아들을 애지중지 길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이 그 아들 관상을 보고는 한마디 했다.
"아깝다. 열아홉 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운명이로구나."
"스님! 어떻게 하면 우리 아들 수명을 연장할 수가 있나요?"
"내일 아침 남산에서 바둑 두는 두 도사에게 부탁하시오."
"스님!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죽어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스님은 몇 번 거절하다 노인에게 비법을 알려주고는 사라졌다.
다음날 아들이 남산에 가니 정말 두 도사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
아들은 그 곁에서 하루종일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애걸을 했다.
“저렇게 청하는데 살려주도록 합시다”
"하늘이 정한 운명을 바꿀 수는 없지요."
마음 좋아 보이는 도사는 살려주자고 계속 말했지만
얼굴이 몹시 추하게 생긴 도사는 막무가내로 반대했다.
결국, 두 도사 간 논쟁 끝에 생명부를 꺼내든 추한 도사.
십구(十九)로 적힌 수명을 구십구(九十九)로 고쳐 주었다.
아들은 백배 절하고 집으로 돌아와 99세까지 살았다 한다.
추하게 생긴 도사가 인간 생명을 관장하는 북두칠성이었다.
한반도 민족에게 칠성 신앙은 널리 정착되어 있는 듯 하다.
칠성 신앙은 민간 토속신앙이 되었기에 불교에서 수용한 듯
사찰의 대웅전 뒤편, 혹은 왼편 누각이 칠성당 혹은 칠성각
..................가락국에서 유래된 추석 풍습...............
추석 전날 밤, 전남 진도에는 아직도 옛 풍습이 남아있다.
남자(아이)들은 벌거벗고 밭고랑을 기어다니는 풍속이다.
이렇게 하면 풍년이 들고 몸에 부스럼이 나지 않는다는 믿음.
추석 무렵에 <올게심니를 하는 풍속>이 있다.
그해 가장 잘 익은 곡식으로 벼, 수수, 조. 등등
그 종목을 묶어 기둥, 방문 위나 벽에 걸어놓는다.
다음 해에 풍년이 든다고 믿고 있는 옛날 풍습이다.
올게심니를 한 곡식은 다음 해 밭농사 종자로 쓰인다.
그리고 남은 것은 밥이나 떡을 해서 사당에 천신한다.
풍년을 기원하는 주술행위와 조상의 은혜에 보답하는
추원보본(追遠報本)이 합쳐진 관습적 행위로 보여진다.
부뚜막에는 조왕(불과 재산을 담당하는 부엌신)이 좌정한다는 믿음.
조왕은 섣달 스무 닷새에 옥황상제에게 1년 동안 집안에서 일을 보고.
그믐날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믿기에 가정마다 밥솥 뒤에 조왕에게 정화수
신앙심 두터운 아낙은 매일 물을 갈아놓는다.
초하루와 보름날 두번 갈아주는 집들도 있다.
추석 햇곡식은 장독대에 짚을 깔고 차린다.
떡, 미역국, 무나물, 배추나물, 고기, 탕 등등.
이를 <성주 모시기>라 하는데. 장독대에 차려놓고
치성을 올린 다음에 안방으로 옮겨서 다시 비는 일.
성주는 집안을 보살피는 신 중에서도 어른에 속하고
주인의 명복과 관계가 있다고 믿어 소중하게 모신다.
어촌에서는 추석에도 상원 때와 같이 뱃고사를 지낸다.
선주네 집에서 음식을 차리고 집에서 지내는 일도 있다.
배에다 깃발을 달고 등불을 밝히고 배서낭을 위하는 일.
또는 음식을 차려 바다에 나가서 고사를 지내기도 한다.
바다 풍랑을 만나지 말고 만선을 하라는 뜻이 담긴 제사.
풍랑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당을 앞세워 큰 굿판을 벌인다.
추석날은 날씨가 청명해서 밝기를 기원하는 풍습이 있다.
비가 내리면 흉년이 든다고 해서 불길한 징조로 삼고 있다.
구름이 끼어 달빛이 보이지 않으면 보리와 메밀 흉년이 들고,
토끼는 번식을 못하고, 개구리가 새끼를 까지 못한다고 전한다.
경남에서는 8월 경, 특히 추석을 전후해서 창문을 바르지 않는다.
여름엔 찢어진 문을 그냥 두었다가 7월에는 창호지로 문을 바른다.
그러나 8월 달에 찢어진 문구멍을 새로 바르는 것이 금기로 되어 있다.
금기를 어기면 도적이 끓고 우환이 생긴다는 토템.
그래서, 찬 바람이 들어와도 9월에야 문을 바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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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의 <단오절> 풍습은 중국( 초나라, 진나라)와 유사.
중국(초, 진) 혼란기를 피해 한반도로 흘러들어온 듯싶다.
그렇다면, 대성골 무속은 약 2천년 유래를 갖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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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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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 가면, 대웅전 뒤쪽에는 으레 있는 칠성각.
칠성각 등뒤로 떠오르는 북두칠성은 동북쪽 별자리.
칠성각 탱화 속에, 대덕고승의 옷을 입은 불교 신들
인간의 수명을 주관하는 칠성신을 봉안한..칠성각(七星閣)
북두칠성, 삼존불과 7여래, 칠성신을 함께 모시는., 전각
북두칠성은 민간 신앙의 대상이며, 칠성신은 도교의 상징.
.........북두칠성(北斗七星)..............
북쪽 하늘에 국자 모양을 이루고 있는 별 7개.
기름이나 술을 푸는 국자 같아 두(斗)자를 쓴다.
동양에서는 독립된 별자리, 서양에서는 큰곰자리.
중국에서는 마차 모양으로 여겨왔으며
서양에서는 커다란 쟁기로 보기도 했다.
현대 천문학에서 쓰이는 성도(星圖)에서는
큰곰자리 꼬리에 해당하는α별에서 η별까지
천추(天樞) 천선(天璇) 천기(天璣) 천권(天權)
옥형(玉衡)·개양(開陽)·요광(搖光)으로 부른다.
7개의 별 모두가 2등급보다 밝은 별들.
북두칠성은 옛부터 항해의 길잡이로 쓰였고,
밤에 시간을 측정하는 방법에 쓰이기도 했다.
북두칠성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일주운동을 하고
북반구에서는 사계절 어느 때나 볼 수 있으므로
그 위치를 보면 밤에 시간을 알 수 있었던 별시계.
북두칠성 중 ε별은 밝기가 변하는 변광성
ξ별은 육안으로 구별되는 쌍성이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에서 활쏘는 궁사의 시력측정 용.
칠성은 비, 수명, 인간의 운명 등을 관장하는 별.
칠성단을 쌓고 그 위에 정화수를 놓아 빌기도 했고
"칠성님께 명(命)을 빈다"는 말도 찾아볼 수 있다.
.....................................................
옛부터 북두칠성은 우리나라 민간신앙의 대상
이는 불교와 도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삼존불............................
마애불이란 노출된 바위에 새긴 백제시대 보살 불상
서산 마애 삼존불은 환한 미소를 머금은 온화한 얼굴.
보존불 오른쪽에는 백제에서 유행했던.,봉지봉주형
보주를 양손으로 감사하며 받들고 있는 보살의 입상
보존불 왼쪽에 반가사유상을 삼존으로 배치해, 삼존불 .
..............................................................
......................칠여래(七如來)...............................
석가모니 이전 세상에 출현한 7 부처 = 과거칠불(過去七佛)
비바시불, 시기불, 비사부불, 구류손불, 구나함모니불, 가섭불,
석가모니불을 가리키는 칠여래는 영가(靈駕) 천도(薦度)를 주관.
1) 다보여래(多寶如來)
동방 보정세계 교주로서, 보살로 있을 때의 부처.
"내가 성불하여 멸도한 뒤, 시방세계(十方世界)에서
법화경을 설하는 곳에 보탑이 나와 설법을 증명하리라"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할 때 솟았다는 다보탑.
불국사 석가탑 다보탑은 다보여래 법화경에서 유래.
우리나라 사찰마다 세워진 탑은 '다보여래'에서 유래.
2) 보승여래(寶勝如來)
인색과 탐욕을 버리고 법의 재물을 얻게 하는 부처.
3) 묘색신여래(妙色身如來)
대원경지(大圓境智)를 나타내는 부처
4) 광박신여래(廣博身如來)
공성(空性)을 깨닫게 하는 부처.
5) 이포외여래(離怖畏如來)
수행으로 팔만 사천 마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성불
고혼 두려움을 떠나 열반의 줄거움을 얻게 하는 부처.
6) 감로왕여래(甘露王如來)
아귀와 영가들에게 음식을 먹게 하는 부처.
7)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
무량광여래(無量光如來) 또는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무한세계에 미치는 광명의 부처.
이 세상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는 부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 극락 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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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두칠성은 불교 이전부터 우리나라 민간 신앙.
삼신 신상은 옛부터 우리나라 민간신앙의 모태.
삼신각 또는 칠성각은 불교 속의 민간신앙 흔적
북두칠성 머리에 삼태성(허정, 곡생, 육위)
도교사상에서 삼태성은 '삼신 신앙의 발원지.
불교에서는 북두칠성의 제 1성은 운의통증여래,
제 2성은 광음자재여래, 제 3성은 금색성취여래,
제 4성은 최승길상여래, 제 5성은 광달지변여래,
제 6성은 법해유희여래, 제 7성은 양사유리여래.
북두칠성은 하늘을 360도 회전한다.
북두칠성이 돌며 생기는 기운., 12辰
12진을 4등분하여 金木水火를 배정하고,
천추성이 있는 방위를 토(土)로 배정한다.
북두칠성이 東에 있을 때는 木이라고 하고,
西에 있을 때는 金, 南에 있을 때는 火이고
北에 있을 때는 水라 함이 곧., 王政의 원칙.
......사마천의 천관서(天官書) 기록..........
“북두칠성 괴위에 있는 6개의 별을 문창궁.
이들 각각 상장(上將) 차장(次將) 귀상(貴相)
사명(司命) 사중(司中) 사록(司祿)이라 한다.”
..............................................
문창궁은 내정과 군사를 관장하는 행정관서.
북두칠성은 오위(五緯)와 경성(經星)을 따라 움직인다.
오위는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이고, 경성은 28수.
북두칠성이 움직이면, 이들 별 또한 북두칠성 따라 운행.
북두 자루가 子(6시 방향)와 午(12시 방향)이면,
수성과 화성이 북두칠성의 자루 끝에 놀고 있고,
寅(8시 방향)과 申(2시 방향)을 가리키면,
금성과 목성이 북두 자루 끝에서 합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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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두칠성은 방향과 시간을 알려주는 별.
밤바다를 항해하는 배에게는..'생명의 별'.
하여, 수명을 좌우한다는 토템이 생긴 걸까?
민간신앙에 기대어 이 땅에 정착한 최초의 불교.
불교가 정착 후 민간신앙을 포용한 흔적.,칠성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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