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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북한사찰순례기 (2)
9월 7일 묘향산으로 향하다.
5일날 저녁 다섯시에 도착하여 아리랑 공연을 보고 6일에는 개성과 판문점을 관광한 후 다시 평양으로 돌아와 조선역사 중앙 박물관을 관람하였다. 그리고 저녁에는 음식점(이름이 생각나지 않음)에 들러 식사도 하고 이 식당에서 일하는 봉사원들이 부르는 ‘반갑습니다’도 오랜 만에 듣고 우리 순례단원들도 함께 나가 봉사원들과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평양의 음식점이나 호텔, 또 여행 가이더 들은 대개 모델같은 미인이고 마이크를 들었다 하면 노래를 하나 같이 가수처럼 잘 불렀다. 우리 순례단원의 남성 참가자 몇 사람은 북한의 여러가지 맥주와 소주 등을 마시며 북한에서의 여러가지 색다른 체험을 하며 여행을 즐겼다.
세쨋날인 7일에는 북한의 대표적 사찰인 보현사가 있는 묘향산으로 향하였다. 평양에서 묘향산 까지는 약 160km이다. 이정도 거리는 미국이나 남한에서는 2시간 정도면 충분히 갈수가 있다. 하지만 여름에 장마로 평양에서 묘향산에 이르는 고속도로인 관광도로 일부 구간이 부서져 갈 수 없다고 한다. 우리 순례단과 같은 기간에 평양을 방문한 대부분 사람들은 묘향산을 가지 못했다. 하지만 순례단 단장인 필자 입장에서는 북한의 대표적 사찰인 보현사를 방문하지 않으면 큰 문제였다. 필자는 우리의 사정을 잘 설명하였더니 안내하는 여행사, 가이더와 운전사가 많이 고민하고 노력하여 허락을 받은것 같았다. 고속도록가 아닌 평안남도 평성시라는 곳을 통과하여 지방도로를 통하여 묘향산을 간다고 하였다. 지방도로를 이용하면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우리는 아침 7시 30 분에 출발하였다.
평양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평성시를 차를 타고 통과하였다. 꽤 큰 도시였다. 토요일 아침이었지만 많은 주민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가는 길은 지방도로이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들의 모습과 거리의 모습에서 오랜 전에 잊어버렸던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옷 복장은 수수했으며 걸음은 빠르지 않았다. 우리 일행이 탄 버스에도 특별하게 주목하지 않았다. 대학 간판도 볼 수 있었다. 평성시를 지나고 2-3군데의 군을 지나고 청천강을 따라 올라갔다. 가이더의 설명에 의하면 이 길을 가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외국인들은 이 길을 아주 좋아한다고 한다. 전에도 무슨 사정으로 이 길을 따라 묘향산을 간 사람들이 더러 있었던 것 같다.
평성시를 지나고 2-3개의 군을 지나 한참 간 후에 드디어 묘향산을 빨리 갈 수 있는 관광도로에 도달했다. 몇 시간을 달려왔기 때문에 우리 일행은 그곳에서 잠시 휴식을 갖고 버스를 사이에 두고 길 한쪽에서는 여성들이 반대쪽에서는 남성들이 화장실 시설이 없는 노천 화장실을 이용하여 소변을 보았다. 화장실이 별로 없는 인도 여행이 생각났다.
약 한 시간 정도 더 달렸다. 도로 오른쪽에는 폭이 넓은 맑은 물이 많이 흐르고 있었다. 청천강이다. 풍경이 아름다웠다. 드디어 보현사가 있는 향산 읍에 도착하였다. 묘향산하면 먼저 서산대사가 떠오른다. 그리고 이 묘향산에는 김일성 대원수, 김정일 대원수, 김정은 원수가 세계 각국에서 받은 수 만점의 각종 선물을 전시해 놓은 ‘국제친선 전람관’이 있다. 이곳은 묘향산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이 의무적으로 관람을 해야 한다. 내부의 사진 촬영은 금지된다. 이 관람을 마치고 점심은 평양에서 가지고 온 도시락으로 보현사에서 좀 떨어진 개울가에서 먹었다. 주변의 기념품 가게의 화장실을 이용하여 생리문제도 해결하였다.
보현사에 도착하여 입구에서 높이와 길이가 몇 미터씩이나 되는 타일로 예술적으로 만든 안내도를 이용하여 묘향산에 대해 설명을 하였다. 안내인은 금강산은 1만 2천봉이지만 묘향산은 8만 4천 봉이라고 한다. 가장 높은 주봉은 비로봉이다. 그리고 보현사에 들어갔다. 이 보현사는 북한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아주 최근인 8월에 CNN에서 이곳을 소개하였다고 한다. 그 보도에 의하면 스님은 25명이라고 한다. 북한에서 출판된 ‘조선의 절 안내’라는 책에 의하면 보현사는 고려시기인 1042년에 처음 세우고 이조 중기와 후기에 걸쳐 다시 지은 절이라고 한다. 천년 사찰인 셈이다. 이 곳에는 조계문, 해탈문, 천왕문, 9층탑, 만세루, 8각 13층탑과 중심 건물인 대웅전이 있고 또 관음전, 영산전, 해장원, 만수각,수충사, 팔만대장경 보존고 등의 건물이 있다. 이 사찰의 특징중의 하나가 9층탑과 8각 13층 탑 두개가 대웅전 앞에 앞 뒤로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세루 앞의 9층탑은 그냥 지나친다. 하지만 이 탑은 아주 귀중한 탑이다.
절의 중심은 예나 지금
이나 일주문에서 대웅전에 이르는 공간이다.대웅전과 그 앞에 놓여있는 탑이 절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보통의 경우,대웅전앞에 두 개의 탑을 세운다면 나란히 가
로로 놓게 된다.그런데 특이하게도 보현사에서는 두 개의 탑이 앞뒤로 세워져 있다. 보현
사의 탑들이 이렇게 선 까닭은 무엇일까? 앞쪽에 위치한 9층탑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졸
한 맛이 돋보이는 고려시기의 석탑이다. 북한에서 국보 142호로 지정할 만큼 그 자체로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지만 보현사에는 2인자의 신세를 면치못하고 있다.보현사 8각 13층탑,
이 탑은 보현사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보물이다.그런데 이 탑이
세워진 것은 9층탑이 건립된 후 한참만의 일이었다.
[탑에서 보면 1탑 1금당형식이었는데 그 이후에 교리변천상 만세루와 하나의 탑을 더
건설할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처음에,보현사의 중심탑은 9층탑이었고 대웅전과 1탑 1금당의 구조였다.그런데 절의 규모가 커지면서 그 가운데 만세루가 들어섰고, 대웅전 앞의 탑을 가로막은 형상이 되었다. 이에 13층탑을 새로 만들어 중심탑으로 삼았다. 바로 이 때문에 보현사는 두 개의 탑이 앞뒤로 서있는 독특한 구조를 갖게 된 것이다. 고려 석탑의 백미로 손꼽히는 이 탑은 북한에 있
는 석탑들중에서도 최고의 조형미를 자랑하고 있다. 각층의 지붕 모서리에는 바람방울을
달아 장식적인 아름다움을 한층 더 높혔다. 상륜부만 보수했을 뿐, 나머지는 옛모습을 그
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13층탑은 날렵한 상승감과 안정감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 비결은
각층의 높이에 숨어있다.가운데 7층탑을 기준으로 상하에 위치한 두 개의 탑들을 각각 짝
지워보면 모두 같은 높이임을 알 수 있다. 각층의 높이가 일정한 비율로 줄어들도록 만든
것이다.이 탑의 또하나의 특징은 8각이라는 점이다.우리나라에서는 흔치않은 8각탑의 전
통,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평양에 있는 고구려 시조 동명왕릉. 왕릉 옆에는 고구
려의 전통을 간직한 정릉사가 있다.이곳에서 8각탑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이같은 8각
탑은 백제나 신라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주로 북한 지역에서 발견된다. 이 다각탑의
전통이 고구려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강원도 월정사의 8각 9층탑, 이곳 역시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던 곳이다. 8각탑의 전통은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도 옛영토를 중심
으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시기에 세워진 보현사 13층탑에도 이지방에 남아있던
고구려의 정서가 반영되어 8각의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고려 석탑의 극치, 보현사 8각
13층탑은 지난 천년세월동안 보현사 최고의 보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다.
인터넷에서 뽑은 글 ----
종각에는 지금은 6. 25 전쟁시기에 없어진 금강산 지역의 본사였던 유점사의 종이 옮겨져 있다. 해탈문에서 보현사 청벽스님과 월광스님이 마중나와 우리 순례단을 환영하였다.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대웅전으로 향하였다. 대웅전에는 비로자나불이 주존불로 좌우로는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먼저 우리 일행은 헌향을 각자 하고 두 스님과 함께 삼귀의와 반야심경 독경을 하였다. 청벽스님의 간략한 보현사 소개가 끝난 후 8각 13층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였다. 필자는 2005년 순례 사진이 들어있는 미주현대불교 기사를 보여주면서 스님께 소개를 하고 최형민 스님의 안부를 물었다. 청벽스님은 그때 자신이 목타을 치며 행사의 집전을 맡았다고 사진 속의 자신을 가리켰다. 최형민 스님은 현재도 건강하게 생존하고 있는데 80세가 넘어서 절에 매일 나오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최형민 스님은 현재는 북한 스님들 중에는 매우 드문 일제시대 부터 스님으로 활동하였던 분이다. 지금 북한의 대부분의 스님들은 필자가 보기에 승납이 매우 짧다. 그래서 불교적 지식이 짧고 불교 의식 집전이 세련되지 못했다. 2005년 순례 당시 최형민스님은 필자가 드린 미주현대불교를 보면서 “ 이야기만 많이 들었던 미주현대불교를 직접 볼 수 있어 매우 기쁘다”고 하며 필자를 정답게 반기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생존해 있으면 꼭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볼 수 없어 섭섭하였다. 기념촬영이 끝나고 우리는 안내인의 설명을 들으면서 관음전, 영산전, 수충사, 팔만대장경 보존고, 종각 등을 둘러 보았다. 팔만대장경 보존고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었다. 이 곳에는 대장경 판이 보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해인사 팔만대장경 전질을 인쇄한 책이 보관 되어 있는 것이다 .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사찰 순례를 가게되는 것은 이곳에 상주하느 스님들을 만나 설법을 듣거나, 사찰의 대웅전을 비롯하여 여기에 딸린 부속건물과 탑을 찾아서 참배를 하기 위해서이다. 또 사찰에 온 사람들의 기도를 비롯하여 다양한 모습을 보는 것도 눈을 즐겁게 한다. 그런데 북한의 사찰순례시에는 아쉽게도 매번 신도들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없었다. 2005년도에는 그래도 최형민 스님을 비롯하여 여러 스님들과 한복입은 북한 신도들도 좀 있었다. 하지만 이번 순례의 첫번째 방문 사찰이고 북한의 대표적 사찰인 보현사에 우리 순례단이 방문한다는 것을 알렸을 터인데 일반 신도들이 거의 보이지 않은 것은 매우 아쉬운 장면이었다.
보현사는 일제시기 31 본사중의 하나로 묘향산에 수십개의 말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대부분 사라졌고 지금은 10여개가 있을 따름이다. 보현사 대웅전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올라가면 불영대, 축성전, 상원암, 묘향산 암자중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능인암 등이 있다. 오른 쪽으로 올라가면 화장암, 금강굴, 하비로암 등이 있다. 2005년 순례 때에는 상원암을 찾았다. 경치가 빼어난 이 곳을 가려면 경사가 급한 곳도 여러 곳이 나오는 길을 2시간 이상을 올라가야 한다. 오르내리는 시간을 다하면 5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2005년 순례시에 이곳을 방문하였는데 나이가 든 사람들에게는 무리한 코스였다. 또한 이곳을 가게되면 서산대사가 주석하였던 금강굴은 갈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이번 순례에는 금강굴과 하비로암을 택했다.
하비로암은 최근에 시멘트로 도로포장을 말끔하게 해 놓아서 승용차로는 7-8 분 정도면 거뜬히 갈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우리 순례단이 이용하는 버스는 커서 진입할 수 없었다. 1998년 부터 보현사의 안내역을 시작하여 현재는 안내실장을 맡고있는 혜정보살의 안내로 순례단은 하비로암을 향하여 걸어갔다. 가이더 설명에 의하면 보현사에서 이곳까지는 약 1시간 30분이 걸린다고 한다. 우리 순례단 중 70세 이상 고령인 참가자 4명은 함께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보스톤에서 참가한 변복순 보살님은 70대 후반이지만 50대 보다도 더 빨리 올라갔다. 걷는다기 보다는 날으는 것 처럼 유연하게 산길을 다녔다. 함경북도 회령이 고향인 변 보살님은 이미 1980년대에 고향을 방문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회령은 북한에서 미녀가 많다는 고장이기도 하다. 매일 요가를 한다는 변 보살님의 체력과 유연성은 50대 초반처럼 보였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변보살님에게 맞는 말 같았다.
하비로암은 묘향산 주봉인 비로봉 아래에 있다고 하여 하비로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비로봉을 향하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서 하비로암, 중비로암, 상비로암이 있었는데 현재는 하비로암만 있다고 한다. 길 왼쪽에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가 요란하였다. 하비로암에 도착하니 그곳에 계신 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필자를 소개하니 2005년 순례때 상원암에 있던 정명스님이라고 하면서 필자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필자의 몸이 그때와 너무 달라졌다고 비교적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지금은 당시에 비해 12-3키로 정도 빠진 몸이니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8년의 세월이 흘렀고 단 한번 밖에 만나지 못해 필자에게는 스님의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어째든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스님과 함께 삼귀의와 반야심경 독경을 하면서 예불을 하였다. 정명스님에 의하면 이 하비로암에는 고려말 스님인 무학대사의 자취가 있는 절이라고 한다. 본전 현판은 비로암이라고 붙어 있었다. 지금 건물은 약 130년 전인 1882년에 개축한 것이라 한다. 고려시대 불상인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셨으며 2009년에 단청 보수가 있었다고 정명스님은 설명하였다. 조계종 총무원장 일행이 2011년에 다녀갔다고 한다. 기록을 보면 아래와 같다.
남측의 조계종(총무원장 자승스님)과 북측의 조선불교도연맹(이하 조불련, 위원장 심상진)은 2011년 9월5일 오전 묘향산 보현사에서 ‘팔만대장경 판각 1천년 기념 조국통일기원 남북불교도 합동법회(이하 합동법회)’를 봉행하고 이 법회를 기점으로 민족문화의 보존과 계승을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이 행사 후에 자승스님은 하비로암을 방문한 것이다.
이 본전 건물 바로 위에는 보련대
보련대는 비로암 건물의 왼쪽 바로 위에 있었다. ‘조선의 절 안내’라는 책자에는 하비로암 건물 중에서 “건축구조적으로 장식에서 가장 화려하다.”라고 되어 있다. 사진으로 보련대 불상을 소개하기도 하였는데 본전인 비로암 불상을 보련대 불상이라고 잘못소개하고 있다. 이 보련대는 1900년대 초 홍수로 무너진 건물을 다시 지은 것이라 한다. 정명스님은 우리 일행에게 이 보련대 왼쪽 벽화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왼쪽에는 호랑이 그림과 부엉이 그림이 있었다. 정명스님은 호랑이 눈이 사람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인다고 설명해주었다. 밑에서 보면 호랑이 눈이 밑을 보고 위에서 보면 호랑이 눈이 위를 쳐다본다는 것이다. 부엉이 눈도 마찬가지이다. 이 두 동물이 두 눈을 부릅뜨고 도둑을 감시하는 것이다. 비로암 뒤쪽에는 칠성각과 산신각이 있다. 산신각이 좀 더 위에 있는데 이 산신각이 묘향산에 있는 산신각으로는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산신각으로 해발 600미터라고 한다.
정명스님과 짧은 해후를 아쉬워 하며 우리는 보현사 안내실장 혜정 보살의 안내로 금강암으로 향하였다. 혜정보살은 지름길로 가자고 하며 숲속으로 우리 일행 앞에서 걸어갔다. 사람의 통행이 적은 길이지만 다닌 흔적은 있는 길이었다. 도중에 큰 나무들이 넘어진 곳도 몇 군데 나오고 경사가 급한 곳을 올라갈때는 마치 차마고도를 가는 것 처럼 느끼기도 하였다. 가면서 혜정보살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37살인 혜정보살은 본인의 결혼이야기도 짧게 해주고 묘향산에서 사는 긍지를 자랑하였다. 이곳에서 활동하는 동안 전에는 주로 기독교인들이 많이 왔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유럽 불교인들도 많이 온다고 한다. 불교인들은 많지가 않다고 한다. 북한 제일의 사찰에 불교인들보다도 타종교인이 많이 온다는 그의 설명을 들으니 서글프기도 하고 안타까웠다. 잘 포장된 도로를 걷는 것보다 원시적인 산길을 걸으니 참가자 대부분이 다 좋아하였다. 오르락 내리락 하다가 계곡사이에 나무를 놓아 다리를 만든 곳을 건너야 했다. 그런데 그 나무 다리의 한쪽이 썩어 금방 부러질 것 같았다. 그래서 한 사람씩 건너게 하였다. 다리 아래로 떨어질 것 같기도 하고, 다리가 부러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스릴를 맛보면서 약 40분 정도 산길을 도착하니 비로소 금강암이 나온다. 금강암이라는 현판은 없고 대신 ‘청허방장’이라는 현판이 나왔다. 순례단 일행중 7명이 산행을 자주 하는 사람들이고 필자를 포함하여 대부분 50대 후반부터 60대 초반이었지만 산길이 힘들었는지 금강암에 도달했을때는 대부분 지쳤다. 금강암 오른쪽에 약수터가 있었다. 서산대사께서 생전에 사용했을 약수를 한 모금 마시니 오장이 찌르르릉 울리는 것 처럼 시원하고 좋았다.
우리는 서산대사의 영전에 향도 올리고 금강암밖에서 함께 반야심경을 독경을 하면서 예불을 드렸다.
금강암과 서산대사
금강암은 서산대사가 반평생을 지낸 곳이라고 한다. 혜정보살 설명에 의하면..바위의 길이가 15m쯤된다.
너비는 10m로 그밑에 이렇게 집을 훌륭하게 지었다. 그러나 보현사에서 멀지도 않고 능인암처럼 아주 높은 곳이 아닌데도 아쉽게도 이 암자에 상주하는 스님은 없었다. 이곳을 지키는 사람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혼자 살고 있었다. 앞으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져 이 암자에 스님이 상주하는 곳이 되기를 기원한다.
조선시대 500여 년을 통틀어 최고의 승려로 꼽히는 서산대사(1520~1604)는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승병의 총수(總帥)로 더욱 유명하다. 그의 본명은 현응(玄應)이고 법명은 휴정(休靜), 호는 청허(淸虛)이나 별호인 서산(西山)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다음글은 묘향산을 취재한 KBS에 보도된 내용을 인터넷에서 뽑은 글이다.
강사 설명중 서산대사는 아주 유명한 스님이었기 때문에 한번 길을 나서면
천여명의 스님들이 함께 동행했다는 말이 있으니 얼마나 유명했는지 알 수 있다.임진왜란
이 끝난 후에는 조정에서 서산대사에게 높은 승직을 주었다.팔도의 승려를 거느리는 최고
지위에 올랐던 서산대사,그가 출가한 것은 열아홉살때의 일이었다.서른 중반에 선종과 교
종을 동시에 총괄하는 양종 판사에 올랐으나 그는 출세의 길을 버리고 수도자 길을 택한다.
전국의 명산을 떠돌며 수행에 열중했던 서산대사는 마흔 후반, 묘향산에 이르러 그 아름다
움에 매료된다.
지리산은 웅장하나 수려하지 못하고,
금강산은 수려하나 웅장하지 못하다.
묘향산은 웅장하면서도 수려하다.
금강굴, 서산대사가 반생을 보낸 곳이다. 서산대사의 거
처였던 이 금강암은 자연 지세를 잘 이용해 지은 건물이다. 바위아래 움푹 들어간 곳에 암
자를 지어 바위로 지붕을 삼고 있다.
강사 얘기중 여기는 보시는 것과 같이..바위의 길이가 15m쯤된다.
너비는 10m로 그밑에 이렇게 집을 훌륭하게 지었다.
불교 교리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실천을 통해 당대 스님들의 존경을 받았던 큰스님 서산대사.
이곳에서 그는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왔던 수많은 제자들과 인연을 맺었다.제1수제자로 알려진 사명대사가 서산대사를 처음 만난 것 또한 바로 이곳이었다.지금도 이곳에서는 두사람의 재주겨루기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산에 오르는 경기를 하자고 사명당이 먼저 제의를 했다.사명당이 작은 봉우리를 짚고 높은 봉우리에 올랐는데 서산대사는 단숨에 높은 봉우리에 올랐다.그리고는 그렇게 해서야 무슨 재주겨루기할 재미가 있나,이렇게 얘 기했다고 한다.서산대사는 이곳에 살면서 자신의 수행뿐만 아니라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 냈다. 이런 그의 제자들은 곧 닥쳐올 나라의 큰 위기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게된다.
전국의 명산을 떠돌던 서산대사는 묘향산의 금강암에 오랜 기간 머물렀다. 묘향산은 서북의 명산이란 뜻에서 서산(西山)이라 불렸는데 그의 별호인 서산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이곳에서 그는 불법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실천을 통해 당대의 스님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고 그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오는 많은 제자들과 인연을 맺었다. 그의 선에 대한 견해를 밝힌 ‘선가귀감’은 법정스님이 한글로 번역하였고 이를 다시 영어로 폴 현각 스님이 영어로 번역하여 ‘The Mirror of Zen”이란 이름으로 샴발라에서 출판되었다.
뫼향산에서 활동한 서산대사의 제자 편양 언기스님
서산대사의 제자로 대부분 사람들은 사명대사 만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대명대사외에도 스님에게는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많았고 그 중에서 양치기 스님으로 알려진 편양 언기의 법손들이 현재 한국불교의 대부분이라는 설이 있다. 편양스님은 평양과 묘향산에서 활동하였고 서산대사가 입적한 묘향산 내원암에서 입적했다고 한다.
다음은 편양 언기 스님에 대한 글이다.
편양(鞭羊彦機, 1581-1644)대사는 선조 14년 죽주현(竹州縣, 현재의 경기도 안성 죽산)에서 태어났으며, 속성은 장(張)씨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12세 때 금강산 유점사에서 서산의 제자인 현빈인영(玄賓印英)대사 문하에서 출가하였다. 스님은 현빈대사의 문하에 있을 때 평안도의 목장에서 양치기 생활을 하며 지낸 적이 있다. 주지하듯이 편양(鞭羊; 양을 돌보다)이라는 법호는 이 무렵 생겼다.
스님은 금강산에서 교학을 익히고 참선공부를 하다가 22세 때 묘향산의 서산대사 문하에서 3년 동안 가르침을 받으며 정진하였다. 이때 서산대사로부터 깨달음을 인가받는다. 현빈대사가 서산대사의 제자이므로, 스님의 경우, 엄밀하게는 서산대사의 손상좌(孫上座)이겠으나, 서산대사에게서 인가를 받았으므로 서산대사의 법을 이은 적자(嫡子)로 평가받는다.
스님은 서산 대사 문하에 든 후 3년을 시봉하다 법을 이어받고, 평양성 모란봉에 움막을 짓고 머물렀다. 이 때 수백 명에 이르는 걸인들을 돌보았으니, 중생과 일체가 되어 보살행을 실천하셨다. 스님은 조선 백성들이 가장 어려울 무렵 가장 힘겨운 처지에 있는 계층과 함께 생활하며 제도에 전념하였다. 원효 대사 이후 민중과 함께 숨 쉬는 해동 불교의 맥을 이은 분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을 철두철미한 선사(禪師)인 동시에, 보살행을 실천하신 대 자비의 화신인 것이다.
스님은 선사로서의 삶을 치열하게 살다가 1644년 5월 10일 묘향산 내원암(內院庵)에서 세수 64세, 법랍 53세로 입적하였다. 내원암은 스승 서산 대사가 입적한 곳이기도 한데, 대사의 사리는 서산 대사의 부도 옆에 나란히 모셔졌다.
스님은 서산대사의 제자 81인 가운데 가장 막내였다. 서산의 문하에 많은 도인들이 즐비하였는데, 이 중에서도 사명(四溟)․소요(逍遙)․정관(靜觀)․편양(鞭羊)의 4대 문중을 이른바 ‘서산문하의 4대 문파’라고 한다. 스님은 서산의 법을 풍담(楓潭)에게 전수하였으며, 풍담은 다시 월담(月潭)에게로, 월담은 환성(喚惺)에게, 환성은 호암(虎岩)에게, 호암은 연담(蓮潭)에게 전하여 스님이 입적한지 3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한국 승려 중 95% 이상이 스님의 문하라 할 정도로 융성한 문파를 이루고 있다. 그렇지만 스님의 문파를 제외한 나머지 문파는 대부분 대가 끊겼다.
자비대사 편양대사 이덕진 교수 글
우리 일행은 예불을 마치고 다시 혜정보살의 안내로 버스가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이지만 사람들의 행적이 드문 곳이어서 도로가 잘 닥인곳이 아니어서 조심스럽게 내려오지 않으면 안되었다.
묘향산 하비로암에서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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