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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c의 세고비아 수도교 보다 더 낡은 17c, 18c의 꼬임브라 수도교의 의미
공교롭게도 나 외의 입실자가 없었거나 오스삐딸레로의 의도였다거나 제3 의지의 작동이었거나 간에
뻬레그리노로서의 내 꼬임브라의 밤은 비할 데 없이 편한 오너였다.
밀린 숙제를 다 완료함으로서 홀가분했던 과거의 한토막을 재연한 듯이.
꼬임브라에서 구입하여 간밤에 먹고 마시고 남은 고기와 와인까지 의도적인 아침 식사로 깨끗이 먹어
치움으로서 방명록 외에는 아무 흔적 없이 떠나게 되었다.
꼬임브라 다운타운 전체가 그러하지만 특히 알베르게가 자리한 고지대는 성지(聖地)에 다름 아니다.
수도원과 교회가 빠지면 허허한 언덕배기에 불과할 테니까.
선물 받은 극소액자 외에는 늘지도 줄지도 않은 백팩을 메고 길 나선 시각은 스페인 시간 7시 20분.
다운타운 저지대에서 묵었으면 이른 아침부터 비탈을 올라야 했겠지만, 그래서 일이(一利)에는 일해
(一害)가 따른다는 것이겠지만 이 경우는 일리 우 일리(一利 又 一利), 모두가 이로울 뿐이었다.
수도원광장의 성 엘리자베스 여왕상(Statue of Queen St. Elizabeth/꼬임브라대학설립자 Dionisio I의
부인) 앞에서 내려다 본 꼬임브라는 아쉽게도 야경만 못했다.
1층의 너른 광장(Largo Sra. da Esperança)에 나갔으나 여전히 나쁜 시야.
미련 없이 싼따 이자벨 보도(Calçada Santa Isabel)에 들어섰다.
이어서, 후이 브라가 까힝똔 다 꼬스따 길(R. Rui Braga Carrington da Costa)을 따라 로터리까지
500m쯤을 완만한 오름으로 남서진과 서진했다.
로터리 진입 직전에 신규 도로의 진입(개설)을 막는 장애물이 있었음을 알리는 잔존물이 있다.
길의 넓이 만큼 톱으로 자른 듯 절단, 철거에서 살아남은 높고 넓고 육중한 담장이다.
후이나(ruina/殘骸)처럼 남아있는 저 담장이 왜 필요했을까.
두리번거렸으나 아쉽게도 까닭을 알아낼 길이 없는 듯 하여 발길을 돌렸다.
설마, 몬데구 강의 범람에 대비한 제방이었을끼.
까미노는 로터리를 반 바퀴 돌아 남서진하는 오브세르바또리우 길(R. Observatório)을 따른다.
잠시 후에 테마파크 라는 꼬임브라대학교의 지구물리학과 천문대(Observatório Geofísico e Astro
nómico da Universidade de Coimbra)를 지나는 길이라 천문대 길이라 했나.
프레게지아 싼따 끌라라의 작은 마을인 메주라에 진입하는 지점부터 노명이 쎈뜨랄 다 메주라 길(R.
Central da Mesura)로 바뀌더니 마을을 떠난다고 이름도 바뀌었는가.
야속하게도(?) 마을 이름이 빠진 길이다.(R. Central)
이어서, N1(IC2)국도 목전의 로터리에서 좌회전, 남하하는 길(R. 10 de Junho)을 따르다가 미나 로
(Estr. Mina)를 따라 수로(Aqueduto do Real Mosteiro de Santa Clara)를 지난다.
꼬임브라의 싼따 끌라라 수도원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든 공중 수로(水路)란다.
빌라 두 꼰지의 싼따 끌라라 수로(Aqueduto de Santa/Clara(Vila do Conde)에 이어 뽀르뚜갈에서
2번째로 큰 수로 시스템이라고.
17c와 18c초에 만들어졌다는데도 2c의 공사(로마시대)인 스페인 세고비아의 수도교(Acueducto de
Segovia)에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늠 턱 없이 미치지 못하는 축조물이다.
건축 연대를 바꿔놓는다면, 뽀르뚜갈의 수도교들은 2c축조물이고 세고비아(스페인)의 수도교는 18c
에 건축했다고 하면 수긍이 갈까.
게다가, 유감스럽게 생각되는 것은 이 수로의 고의적 절단이다.
까미노(Estr. Mina)는 수도교(Aqueduto do Real Mosteiro de Santa Clara)의 아치를 통해 통과
하지만 그 옆 N1(IC2) 국도의 신설에 수도교의 아치 2개와 중간 교각이 희생되었다.
과연 대안이 없었던가.
뽀르뚜갈에서 2번째의 대형 수로 시스템이라는 무게가 국도에 비해서 얼마나 가볍기에 아무런 타협도
해보지 못하고 날라가 버렸는가.
아침에 알베르게를 나와서 곧 걸은 후이 브라가 까힝똔 다 꼬스따 길에 희생된 담장이 이 수로?
막연히 나마 예측해 보았을 뿐인데 에측 대로다.
제방이나 다른 어떤 담장이 아니고 기능을 잃은 수로다.
궁금증의 해소 없이는 다른 어떤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성미 때문에 올인하여 찾아낸 아래 자료가
확인해 주었다.
(Aqueduto seiscentista, de abastecimento a edifício religioso, com cerca de 2Km.
Encontra-se interrompido por um corte da estrutura, efectuado pela Rua Rui Braga Carrington da Costa.
17th century aqueduct, supplying the religious building, about 2 km long.
It is interrupted by a cut in the structure, made by Rua Rui Braga Carrington da Costa.
약 2km 떨어진 신 싼따 끌라라 수도원에 물을 공급한 17세기의 수로.
신설 후이 브라가 까힝똔 다 꼬스따 길로 인해 절단,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수난의 길 까미노
까미노에 포함된 로마시대의 길을 소중히 관리하고 있는 뽀르뚜갈.
18c에 빌라 두 꼰지의 수도교를 축조할 때 16개c 전에 999개의 교각으로 건설한 로마시대의 수도교
(Acueducto de Segovia)를 본받아 교각을 999개 세웠다는 뽀르뚜게스.
(회자될 뿐 확인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로마의 토목기술을 동경하고 흠모했던가.
그런데도 자기네의 그 기술은 나아진 게 없는가.
그 구간의 국도를 지하화 하거나 대안을 찾을 수도 있었으련만 절단을 택한 볼 품 없는 토목기술인가.
또 궤도 이탈의 위험한(?) 순간이었는가.
뻬레그리노로 돌아와서 국도를 건넜다.
알베르게를 출발하여 2.5km쯤의 지점이다.
고가교((Viaduto da Estrada da Mina) 중앙에서 남북으로 시원하게 뚫린 국도를 바라보았다.
북으로 500m 정도의 잘려나간 수로를 바라보는 늙은 뻬레그리노의 착잡한 심사가 말이 아니었다.
늙은 까미노 나그네의 설움이 아니라 까미노 자체의 설움이다.
선하심후하심(先何心後何心)인가.
나라에서 2번째로 큰 규모라며 추켜 올려놓고 무참하게 잘라버리는 뽀르뚜갈의 당국자들.
여기 수로는 비중이 무거운 국도(N1)에 당한 절단이지만, 2km쯤 전의 절단은 간신히 이름을 갖게 된
길( Rua Rui Braga Carrington da Costa/후아 후이 브라가 까힝똔 다 꼬스따)에 당했다.
수로가 생명줄에 다름 아니었으나 대체 수단이 생겼다 해서 마구 잘라버리는 사람들에게 까미노를 돌
봐달라고 맡겨놓는대서야 "고양이에게 생선가게 맡겨놓은 꼴"이니 마음 편할 수 있겠는가.
고가교에서 남으로, N1 국도와 평행이기는 해도 완만하게 올라가는 까미노 뽀르뚜게스.
500m정도 지점에 자리한 까미노 마크(가리비) 4각 기둥이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순/역 까미노의 안내, 끄루스 두스 모로수스 마을 진입(탈출), 이 지점이 싼따 끌라라의 정상(해발215
m)이라는 것 등을 알리는 일.
까미노는 이 지점에서 우측(西)으로 가다가 남하하는 끄루스 두스 모로수스 보도(Calçada Cruz dos
Morouços)를 따른다.
대부분의 집이 리-모델링은 되었으나 좁고 구불구불한 옛길 그대로인 끄루스 두스 모로수스 마을.
마을을 통과하는 짧은 시간에 느낀 것은 짧은 거리지만 까미노 수난의 길이라는 것이다.
새 집이 들어설 때마다 쫓겨다녀야 했을 까미노니까.
계획적인 대규모 마을이라면 사전에 반듯한 길들을 조성하였거나 우회로(bypass)가 만들어졌을 법도
하지만, 긴 세월에 걸쳐서 하나 둘 늘어나는 집이었을 테니 그럴 수도 없었을 것이고.
예배당(Capela de Nossa Senhora Da Graça)을 지나 완만한 내리막 길이 지루한 느낌이려 할 때
우회전하며 기분 전환에 적격인, 뽀르뚜갈 전가의 보도(傳家寶刀)인 돌바닥 보도(步道)가 시작된다.
노변의 프레게지아 안내판은 내리막길의 상하가 모두 안따뉼(Freguesia Antanhol/ 2013년에 Assa
farge와 통합) 임을 분명하게 알리고 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가.
우회전(역ㄱ자) 돌바닥 길(까미노)가에는 안따뉼이 끝남을 알리는 간판이 서있으니 혼란스럴 수 밖에.
아무튼 바야흐로 리모에이루길(R. Limoeiro)이 시작되며 짧기는 해도 고마운 돌길을 지나 잠시 남남
서로 올라서 N1 국도(IC2,IC3)를 건넌다.(viaduto로)
건넌 후에는 오를 때와 반대 형태(북북동)로 내려간 후 남하(Q.ta Limoeiro)하는 까미노.
쌀바상 길(R. Salvação)로 바뀐 길을 따라 남행을 계속한다.
이끼낀 돌 담장이 오래 된 농로라고 증언하는 길이다.
삼거리에 안따뉼(Antanhol), 대칭위치에 아싸파르지(Assafarge), 두 프레게지아(Freguesia)간판이
서로 엇비슷이 바라보고 서있다.
2013년 이전에 세운 간판임이 틀림 없다.
그 해(2013년)에 두 프레게지아가 통합되었으니까.
년대와 관계없이 분명한 것은 이 삼거리에서 서북쪽은 안따뉼이며 동남쪽은 아싸파르지라는 젓이다.
안따뉼의 루가르(Quinta Limoeiro)와 아싸파르지의 루가르(Salvação)니까.
까미노는 이 지점에서 우측 길의 4각 가리비 기둥과 화살표를 상대하는 비포장 농로다.
0.5km쯤 남하해 마주친 2개의 길 중 이번에는 좌측의 발리 길(R. do Vale)을 택해야 하는데 무심코
직진하는(R. Progresso) 오류를 범했다.
국도를 건넌 후 좌측 길을 택한 적이 없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도 타성이 붙었는가.
길을 걷다가 잘못 드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길을 걷지 않는 사람은 결코 맛볼 수 없는 별미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기진맥진 상태 또는 소중한 약속을 앞 두고 범하는 오류는 치명적일 수 있지만, 작은 실수로 큰 횡액을
예방하게 된다면 심신이 느슨해질 때는 필요악일 수도 있다.
두 길(R. Progresso, R. do Vale)이 갈리는 3각점에서 내려다보이는 마을은 분지처럼 내려앉아 있다.
당연히 내려가는 발리 길을 따라 남하하는 루가르(작은 마을/hamlet)다.
전주(電柱)에 '메르세아리아'(mercearia/식료품상점) 전단이 붙어있는 정도다.
파란 화살표를 따르면 소형 승용차도 교행할 수 없는 길, 과장하면 뚱보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좁은
길을 거쳐서 예배당(Capela de São Silvestre - Palheira) 앞 광장(Largo Lapas)을 지난다.
프레게지아 아싸파르지의 루가르지만 마을의 전 골목길이 뽀르뚜갈의 전통 돌포장으로 되어 점수를
많이 따고 있는 빨례이라(Palheira).
마을(Palheira)을 벗어나(R. Mártir São Sebastião) 동남진하는 쁘린시펄 로(Estr. Principal)를 따
르는 400m쯤 지점에서 우회전, 남남서진 길(R. Outeiro Negro)에 의존하는 까미노 뽀르뚜게스.
정남으로 허허한 오르막 길이다.
마감할 예정인 쎄르나셰(Cernache)까지는 3km 내외일 듯한 지점에서 잠시 쉬었다.
정남으로 길게 펼쳐지고 있는, 잔돌멩이 비포장에 오르내림이 겹치는 마지막 까미노를 바라보며 지나
온 길을 돌이켜 보았다.
까미노를 통틀어서 짧은 하루치 거리 중에 비포장 구간이 많은데다 돌멩이가 많이 깔려 있는 길.
심하지는 않으나 오르내리는 비탈들이 겹쳐 있기 때문에 불편한 길로 손꼽힐 듯 싶은 까미노다.
정상부에 올라 앞 뒤의 비포장 숲길을 응시할 때 퍼뜩 떠오른 것은 저 비포장 까미노의 운명이다.
가장 바람직한 까미노는 지금처럼 비포장 상태를 마냥 유지하는 것이다.
동가식서가숙하듯이 이리저리 쫓겨다닐 일 없으며 원형에 손상을 입지 않고 유지될 수 있으므로.
본래 대부분의 까미노는 저랬다(비포장 숲길).
파괴가 주무인 사람들에 의해 천대와 학대를 받으면서도 질긴 생명력으로 살아있는 길.
꼬임브라는 자타가 공인하는 유서깊은 고도다.
그러나 다운타운만 벗어나면 마구잡이식 파괴가 자행되고 있다.
문일지십(聞一知十)이라 잖은가.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는 말인데 까미노에서 배운 같은 뜻의 에스빠뇰(español) 속담도 있다.
"a buen entendedor, pocas palabras"(아 부엔 엔뗀데도르 뽀까스 빨라브라스 / 몇마디로 충분히
이해한다)
중언부언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보존 가치가 충분한 수로를 마구 토막낸 것을 우회적으로 한 비판일 것이다.
숲길은 호강하는 길이며 다다익선의 까미노다.
산업화 바람이 여간 불어온다 해도 한꺼번에 큰 충격이 올 것 같지는 않은 천혜의 지형이기는 하지만
불안 요소를 지워버릴 수 있는 방도가 없다.
고도가 낮기 때문에 불시에 용도 변경이 단행될 수 있다는 것.
다만 지자체 꼬임브라의 인구밀도가 440.8/km²인데 비해 통합 프레게지아(Assafarge e Antanhol)
는 271.6/km²이며 서쪽의 쎄르나셰 역시 210/km²이므로 개간 또는 개발을 서두를 일은 없지 않을까.
나는 기진맥진 상태였다가도 산길, 숲길을 걷게 되면 생기가 절로 되살아나는 체질인 산(山)나그네다.
환갑(60년)의 세월에 걸쳐서 누빈 백두대간과 9정맥을 비롯해 산들이 만들어 준 체질이다.
단전(斷電)의 순간에 보조발전기가 가동하게 되어 있는 시스템(system)처럼 체력이 바닥을 드러내면
관성(慣性)이 작동하는 이 체질이 조선 팔도에 뻗어 있는 옛 십대로와 무수한 길들도 걷게 했다.
(단기간에 까미노의 메인 루트를 모두 걷게 한 것도 이 체질이다.)
그러므로 숲길은 호강하는 길이며 다다익선의 까미노다.
조악하다 해도 숲이 상쇄해 줄 뿐 아니라 온갖 약점을 카무플라주(camouflage)해 주므로 불편할 리
없는 길을 전일에 이어 또 걷고 있다.
아싸파르지의 빨례이라와 쎄르나셰의 뽀자다 사이 숲길 까미노를.
연 이틀을 호강하고 있으니 까미노에서 이보다 더 흡족한 일이 있는가.
숲속에는 양쪽 프레게지아에 공평하게 배분(?)하는 경계선도 있는 길인데 누군가 축지법이라도 펼친
듯 2km 안팎의 거리가 한 순간에 증발해 버린 느낌이 들도록 빨리 다가온 쎄르나셰.
이른 아침부터 10km가 넘는 길을 왔는데도 새로 시작하는 기분으로 숲에서 나오는 나를 맞는 길.
쎄르나셰의 숲이 시작되는 지점에 놓인 비포장 깐뚜 길(Rua do Canto)이다.
숲 속에서는 느끼지도 못했으나 숲을 나오자마자 본 것은 지워버릴 수 없다고 한 불안요소의 실재다.
같은 숲을 두고 북쪽 빨례이라와 남쪽 뽀자다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다.
불안하게 한 것은 북쪽 빨례이라의 숲 기슭이었는데 남쪽 뽀자다는 비교 위의 악이다.
야금야금 먹혀들고 있는 숲.
양쪽에서 공략한다면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숲 속에서 가졌던 전망은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는가.
성 뻬드로 농원(Quinta de São Pedro da Pousada/결혼예식과 회식 기타 유락 장소)을 지나고 잠간
의 서진과 서남향 길(R. do Canto)이 남행한다(Largo São Pedro).
예배당(Capela de São Pedro)을 지나 서진하여(Largo São Pedro ~ R. Eng. Felisberto Cardoso ~
R. do Tirado ~ R. 1º de Maio) N1국도(IC3)를 건넌다.
까미노 뽀르뚜게스도 같은 길이다.
깐뚜 길에서 국도까지는 1.5km쯤인데 중간 지점 노변 양쪽에 2개의 마을 간판이 서있다.
가는 방향(西)은 루가르 쎄르나셰가 시작되는 지점이며 반대방향(東)은 루가르 뽀자다의 시작점이다.
서서남으로 진행하던 띠라두 길이 중앙에 십자가가 서있는 길(Rua do Cruzeiro) 사거리에서 서북방
향(R. 1º de Maio)으로 틀은 후 N1국도(IC3)와 입체 교차(지층 터널로)한다.
십자가 길은 끝에 쎄르나셰(Lugar)의 공동묘지가 있는 막다른 길이다.
이미 언급한 적이 있듯이 까미노에서 마을 공동묘지는 내 관심을 끌어가는 곳 중 하나다.
그곳이 살기 좋은 마을 여부를 가리는 기준으로 공동묘지의 관리 상태를 보고 있기 때문인데 육안으로
환히 보이는 공동묘지의 인상은 쎄르나셰에 후한 점수를 줘도 되겠다는 생각이게 한다.
국도를 건너가는 지층 터널을 거듭 왕복하며 낙서를 살펴보았다.
스페인에서는 담벼락과 터널 내의 낙서를 빠뜨리지 않고 유심히 훑어보는 일이 습관처럼 되어 있으나
뽀르뚜갈에서는 거의 지나쳐버렸는데도 여기에서는 왜 그랬는지.
기기묘묘한 상상력을 담고 있는 전자와 달리 후자는 내용은 물론 낙서 자체가 부실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인데 여기도 뽀르뚜갈이라는 것만 확인시켜 준 셈이다.
하나의 이베리아반도지만 스페인과 뽀르뚜갈의 판이한 낙서문화를 읽을 수 있다.
진위 여부를 가리지는 못했지만 스페인의 내로라하는 화가들 중 더러는 담벼락 그림으로 시작했단다.
입체파 그림의 창시자, 20c 최고의 거장이라는 빠블로 삐까소(Pablo Picasso /1881~1973)도 담벼락
습작시절이 있었다고 회자될 정도로 스페인의 담벼락은 그림 습작의 공간이다.
이에 반해 뽀르뚜갈의 담벼락은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생각되는 낙서 공간이라 할까.
그랬음에도 여기에서는 왜 그랬는가.
쎄르나셰의 알베르게가 500m 미만에 있는데도 아직 오전이기(시간여유가 많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까미노의 상태는 다른 지역에 비해서 조악하지만 숲길이 이를 커버(cover)하고도 남을 만 한 길이다.
게다가 누적된 피로를 감안하여 고도 꼬임브라에 파격적으로 여유롭게 시간을 배정했으나 휴식 장소
로는 다운타운 보다 외곽지대(Cernache)가 낫다는 판단으로 강행한 것이 시간이 여유로운 이유다.
최고의 효도와 밀려오는 고독감의 절규에 다름아닌 9 9 - 8 8
혹시나가 역시나로 끝난 지층 터널을 나왔다.
자그마한 로터리에서 좌회전, 메주라 길(R. Mesura)과 함께 남하하는 까미노.
초입의 빵집(Padaria, Pastelaria)에서 맥주와 함께 첫(아침 식사 후) 간식(빵)을 먹을 때(1.05€) 종업
원이 안내해 준 알베르게의 위치는 남쪽 300m쯤의 지점이다.
중앙에 돌기둥이 서있는 삼각 광장(Largo Praça)과 까부 길(R. Cabo)을 이어받는 알바루 아네스 길
(R. Alvaro Anes)을 잠시 따르면 있다고 말한 그 지점에서 알베르게 찾기가 어찌나 어려웠는지.
알바루 아네스 길 우측 노변에 자리하고 있는 알베르게(Albergue de peregrinos de Cernache).
고개를 치켜들고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놓치기 십상인 작은 까미노 마크(가리비)와 소형 알베르게
표지판이 높은 위치(2층)에 붙어 있을 뿐 시선이 쉽게 갈만한 곳에서 안내 구실을 할 아무 것도 없다.
초행인 뻬레그리노스에게 쉬이 찾아낼 재간이 있겠는가.
알베르게 운영자가 인심을 잃었는가 알베르게 주변을 서성거리는 자(나)에게 문제가 있었나.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아서 애를 먹었으니까.
어쩌면, 2중 3중의 큼지막한 원색 표지판들이 존재감을 과시하는 알베르게들만 상대하는 동안에 굳어
진 고정관념 때문이었을까.
그런 류의 표지판을 찾고 있는 눈에 손바닥으로도 가려질 작은 간판이 보일 리 없지 않은가.
더구나 내 형편없는 시력으로는 더욱 보지 못했을 텐데다 한 소형버스가 알베르게 앞에 주차중이었다.
이 일대에서 가장 작은 2층 건물인 알베르게를 통째로 가리고 있으니 밝은 눈인들 쉬이 찾아지겠는가.
까미노에서 80대 늙은이가 대형 백팩을 멘 채 두리번거리며 서성이고 있다면 숙소(albergue)를 찾는
중인 뻬레그리노(peregrino)라고 단언할 만 하겠건만 맴돌기 한참 후.
시야를 가리던 소형 버스가 떠남으로서 "업은 아이 3년 찾는다"는 고생은 끝났으나 입실 시간(open/오
후2시) 까지는 2시간여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 문제였다.
망연히 서있을 수 밖에 없는 늙은이가 늦게나마 측은지심의 대상이 되었는가.
모르쇠로 일관하던 초로남이 개입했다.
어딘가에 전화를 한 그는 잠시만 기다리라는 시늉을 한 후 사라졌고 곧 그 자리에 나타난 60대 중반의
남(男)이 이 알베르게의 오스삐딸레로(hospitalero)라고 자기 소개를 했다.
보행이 자유롭지 못한 부친을 부축하여 함께 온 그는 맨날 듣는, 특징 없는 수칙을 말하고 나갔다.
18시에 스탬핑하러(stamping /순례자여권에 도장찍기) 다시 오겠다는 매우 사무적인 그였지만 그의
효도는 양과 질에서 내게 감동을 먹이고도 넘쳐날 정도였다.
90고개를 오르고 있는(89세) 늙은 아버지의 고독감을 줄이고 운동량은 늘리기 위해서 줄곧 밀착, 일상
생활을 함께 하고 있다는데 감동이 넘쳐나지 않을 리 있는가.
산해진미와 비단금침이 늙은이의 고독감을 줄여주거나 달래줄 수 있는가.
금은보화와 음풍영월인들 늙은이의 건강을 지켜주는 운동량을 늘리고 고무시켜 주는가.
이 사람의 효심이야 말로 동서고금, 장소와 시대를 망라한 효도의 극치요 시그마(sigma/ ∑ 總和)다.
부축을 하고 받으며 어렵사리 왔다가 돌아가는 늙은 부자의 뒷 모습이야 말로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나는 까미노(이베리아 반도)의 전체 메인 루트들, 시코쿠(四國/日本)의 헨로미치(遍路道), 장단(長短)
의 유-무명 순례길(Pilgrimage), 기타 지구촌의 무수한 산과 길을 걸었다.
지구의 3바퀴 반 이상 되는 거리를 걷는 중에 이보다 더 지극한 효심을 본 적이 없다.
60대와 90이 내일인 부자가 서로 의지하며 사이 좋게 걷는 모습들을 모두 디키에 담았다.
희귀하고 진귀한 사진이 틀림 없을 텐데 지중해변 알 마리아의 백팩 도둑이 야속할 뿐이다.
내 아들 딸들의 효심도 무던하다는 평이다.
까탈(厄)이 유난하다는 아홉수(89 고개)를 어렵게 넘는 중인 부모의 뒷바라지에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들(자식들)의 충심(衷心)에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감동, 호응했는가.
신속한 장기요양인정서(父3급, 母4급)의 발급으로 그들의 고충을 덜어주었으니까.
그러나 고백하건대, 이 오스삐딸레로에 비하면 턱없이 미치지 못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고령의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금은보화나 산해진미 따위가 아니다.
고독감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는 적극적 보살핌인데, 그럴만한 여건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겠지만 아쉬
운 것이 사실이다.
고령의 부모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병 중 하나일 정도로 치명적인 고독이라는 이름의 병의 침입을 막아
주는 것이 최고의 효도니까.
현대는 온 세계가 급격하게 보편화 되어 가고 있는 저출산 초고령화 시대다.
급락하는 출산율에도 인구의 증가율이 지속적인 까닭은 출산율 보다 고령화에 따른 사망율이 더 낮아
가기 때문일 뿐, 날로 더 늘어나는 늙은이의 수효만큼 그 고독감도 더 심각해 가고 있다.
오죽 그리우면 마을 곳곳에, 어디론가 떠나버린 사람들을 대신해 다양한 허수아비(かかし/案山子)를
만들어 놓고, 그 카카시로부터 체온을 느껴보고 싶어하겠는가.(메뉴 '시코쿠헨로' 5번글 참조)
신생아 출산율의 급감으로 그들(어린이)의 놀이터가 줄어가거니와 기존의 놀이터에서도 주인공 보기
가 어려울 뿐 아니라 관리 소홀로 폐물화에 가속이 붇어가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까미노(이베리아 반도)와 시코쿠 헨로(일본) 등 한적한 순례길을 걸을 때는 노변집
미닫이 문 앞에 놓여 있는 간이의자와 벤치를 보기 일쑤다.
이 집에 고령자가 있음을 의미하며, 먼동 트기를 기다렸다는 듯 비좁은 집을 나온 늙은이들의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온 종일을 무료하고 고독하게 할 뿐 아무 데도 쓰일 데 없는 시간에 시달리고 있는 일부
고령자들의 유일한 소일처가 되는 곳이다.
일제의 압제 36년에서 벗어나기는 하였으나 반쪽짜리 독립으로 인한 민족동란(6.25)을 치뤄야 했으며
연달은 4. 19민주혁명과 5. 16군부쿠데타의 와중에서도 시대적 변혁을 거역할 수는 없었는가.
어린애 울음소리 대신 99 - 88(구십구세까지 팔팔하게)을 노래하는 저출산 고령화 시대가 도래했으니.
대가족 시대에는 집 안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했다.
약간의 인터벌(interval)은 불가피하겠으나 끊긴다는 것은 대가 끊김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는 늙은이들을 고독할 겨를이 없게 하는 영약이었지만 이 영약을
빼앗긴 늙은이들은 100세 청춘을 구가하는 듯 하나 실은 밀려오는 고독감의 절규에 다름아니다.<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