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나라의 음악을 국악(Korean classical music)이라 한다. 곧 우리 민족의 고유성(固有性) 과 전통성을 지닌 민족의 음악이 우리의 국악이다. 국악이란 이름은 조선 말엽 고종때 장악원(掌樂院)에서 부터 처음 사용되었다고 한다. 외래 음악이 이 땅에 들어 오면서 서양음악에 대한 우리나라 고유한 음악이라는 뜻으로 국악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음악의 역사라는 것은 미술․문학․연극․무용 등의 예술문화는 물론 정치․경제․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음악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외부 세력의 침략과 끊임없는 항쟁으로 그 수난이 많았다 할 것이다. 더구나 고려․이조시대의 사대주의 사상에서 비롯된 역사의 어두운면에서 우리 음악은 너무나 고독했다. 당악이 들어오면 당악을 추종하고, 아악을 들여와 국가 대사에 사용하고, 향악보다 이들 음악만이 격조가 높은 양, 이것이 우리의 음악인 것처럼 착각하고 추종하여 번창 하였지만, 그 음악을 밑거름으로 더욱 우리의 음악을 풍성하고 아름답게 꽃피우려 했던 옛 음악인들이 있어 오늘날 우리의 음악을 알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외래의 그 어느 것보다 찬연한 음악으로 살아 있는 것이라 믿는다.
긴 역사를 민족과 함께 생성되어 온 우리의 음악은 시대에 따라 아악(雅樂)․당악(唐樂)․속악(俗樂) 등의 명칭으로 분류된다. 향악이나 속악은 순수한 재래의 음악이라는 뜻이고, 주로 궁정이나 지식층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일반 민간에서 사용된 음악은 이 향악이나 속악의 범주 안에 들지 않는다. 고려시대는 향악 대신 속악이라는 말을 썼고, 조선시대엔 아악과 속악으로 크게 가르고, 속악은 당악과 향악을 동시에 지칭한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관점에서 국악을 분류한다면 아악․당악․향악으로 가르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하겠다. 아악은 중국 송(宋)나라의 정악(正樂)을 말하는 것 으로 궁정에서 행하는 제사 및 연향(宴享)에 두루 쓰였다. 또한 당악이란 당나라 음악뿐만 아니라 송나라에서 들어온 중국의 속악을 총칭하는 이름이나, 그것을 한국식으로 고쳐진 동화(同化)되고 한국화된 것이 많기에 중국음악이라고 완전히 정의 내리기는 어렵다. 이 당악에 대한 한국음악이 향악이라고 한다. 이 분류방법에 근래에는 판소리․산조․잡가․민요․농악 등을 묶어 민속악으로 그 분류에 넣기도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 음악사를 상고시대,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그리고 갑오경장 이후의 근세의 음악으로 나누어 그 내용을 간략히 짚어 보기로 하겠다.
상고시대
1. 상고시대(上古時代)
이전시대의 음악을 계승 발전시킨 삼국시대는 고구려와 신라, 백제, 가야가 제각기 고유한 국가체제와 문화를 형성하였던 3세기 경부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668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고구려에서는 거문고가 가야에서는 가야금이 창안되어 이 시대의 음악사를 주도했다. 또, 문화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이 시대는 중국, 서역의 음악이 전래 되었고, 삼국의 음악이 중국, 일본에 진출하는 등 전례없는 국제교류시대가 전개되었다.
고구려의 음악문화는 고구려 고분의 벽화와 『삼국사기(三國史記)』『일본서기(日本書記)』『수서(隋書)』등의 문헌자료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악기 거문고는 『삼국사기』악지에 의하면 진(晉)나라에서 보내온 중국의 칠현금을 왕산악(王山岳)이 악기의 외형은 그대로 두고 구조를 개조하여 새악기를 만든 후, 이 악기를 위한 일백곡을 지어 연주를 하니 갑자기 '검은 학'이 내려와 춤을 추므로 '현학금(玄鶴琴)'이라 이름 붙였는데 훗날 '학'자가 빠지고 '현금(玄琴)', 즉 거문고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유래로 연주되기 시작한 거문고는 독주 악기로, 또는 춤 반주 악기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현재까지 우리 음악사에 중요한 맥을 이루며 전승되고 있다. 또 중국 문헌인 『수서(隋書)』동이전에, 고구려에서는 오현금․피리․횡취(橫吹)․소(簫)․고(鼓) 등이 연주되었다고 전하는데, 일본에 전해진 군후, 횡적, 막목, 춤의 편성과는 달리 중국 전래의 외래악기가 포함된 것으로 고구려 음악의 전혀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이 밖에 서역에서 들어온 관악기 피리가 편성에 추가되므로써 풍부한 음향을 가진 새로운 고구려 음악이 연주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수서』와 『구당서(舊唐書)』등에는 중국 수(隋)와 당(唐)나라 때 중국 궁중에서 연주되던 각나라의 음악을 7부기(七部伎)․9부기․10부기를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는 고구려악이 포함되어 있어 이는 국제적인 음악교류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라 할 수 있다.
백제의 음악문화는 지리적인 조건으로 대륙의 문화를 받아들인 시기는 늦으나 5세기~6세기 사이에 중국 남송과 북위 등에 고구려악 못지 않게 소개되기도 하였다. 삼국 중에서 일본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측되는 백제음악은 고구려 음악과 같이 군후․막목․횡적․춤의 편성으로 되어 있다. 특히 미마지(味摩之)가 오(吳)나라에서 배운 기악무(伎樂舞)를 일본에 전한, 이 기악의 가면은 일본 여러 절에 지금까지 보관 되고 있다. 이기악은 산대도감(山臺都監) 놀이 및 봉산 탈춤과 같은 가면무라고 한다. 동이전에 의하면, 백제 국내에서는 고(鼓)․각(角)․공후․쟁․우․지․적(笛) 등 일곱가지 악기가 사용되었다. 이들 악기는 중국 남조의 청악(淸樂)과 유사하다. 한편, 백제의 가요로 유명한 정읍사(井邑詞)가 있고, 곡목만 전해지는 방등산․무등산․지리산 등이 있다.
신라의 음악문화는 삼국 중 중국과의 국제교류가 가장 저조했다. 가야국의 성열현(省熱縣) 사람인 우륵(于勒)은 가야금을 위해 12곡의 가야금곡을 지어 가야금 시대를 열었다. 우륵이 지은 12곡의 가야금 곡의 제목은 대부분 현재 경상남북도의 여러 지명(地名)과, 이밖에 탈놀이 중의 사자춤과 관련이 있을 듯한 <사자기>라는 곡명, 구슬던지기 놀이의 일종인 <보기(寶伎)>라는 곡명으로 되어 있어 우륵이 향토색 짙은 각 지역의 음악 및 민간에 전승되는 놀이 등을 주제로 가야금곡을 만들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6세기 경에 신라에 수용된 가야금은 신라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당시 신라악은 대부분 가야금과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는 편성이다. 통일 전의 <신열악>․<사내악>․<미지악> 등 고악(古樂)은 가야금을 수용한 이후, 곡이 세련되고 아정한 음악으로 바뀌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또한 신라 음악사를 보면, 조상제사, 연희 등에 소용되는 음악을 위해 둔 것으로 해석되는 '음성서(音聲署)'라는 국가음악기관을 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삼국시대
2. 삼국시대
이전시대의 음악을 계승 발전시킨 삼국시대는 고구려와 신라, 백제, 가야가 제각기 고유한 국가체제와 문화를 형성하였던 3세기 경부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668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고구려에서는 거문고가 가야에서는 가야금이 창안되어 이 시대의 음악사를 주도했다. 또, 문화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이 시대는 중국, 서역의 음악이 전래되었고, 삼국의 음악이 중국, 일본에 진출하는 등 전례없는 국제교류시대가 전개되었다.
고구려의 음악문화는 고구려 고분의 벽화와 『삼국사기(三國史記)』『일본서기(日本書記)』『수서(隋書)』등의 문헌자료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악기 거문고는 『삼국사기』악지에 의하면 진(晉)나라에서 보내온 중국의 칠현금을 왕산악(王山岳)이 악기의 외형은 그대로 두고 구조를 개조하여 새악기를 만든 후, 이 악기를 위한 일백곡을 지어 연주를 하니 갑자기 '검은 학'이 내려와 춤을 추므로 '현학금(玄鶴琴)'이라 이름 붙였는데 훗날 '학'자가 빠지고 '현금(玄琴)', 즉 거문고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유래로 연주되기 시작한 거문고는 독주 악기로, 또는 춤 반주 악기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현재까지 우리 음악사에 중요한 맥을 이루며 전승되고 있다. 또 중국 문헌인 『수서(隋書)』동이전에, 고구려에서는 오현금․피리․횡취(橫吹)․소(簫)․고(鼓) 등이 연주되었다고 전하는데, 일본에 전해진 군후, 횡적, 막목, 춤의 편성과는 달리 중국 전래의 외래악기가 포함된 것으로 고구려 음악의 전혀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이 밖에 서역에서 들어온 관악기 피리가 편성에 추가되므로써 풍부한 음향을 가진 새로운 고구려 음악이 연주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수서』와 『구당서(舊唐書)』등에는 중국 수(隋)와 당(唐)나라 때 중국 궁중에서 연주되던 각나라의 음악을 7부기(七部 伎)․9부기․10부기를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는 고구려악이 포함되어 있어 이는 국제적인 음악교류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라 할 수 있다.
백제의 음악문화는 지리적인 조건으로 대륙의 문화를 받아들인 시기는 늦으나 5세기~6세기 사이에 중국 남송과 북위 등에 고구려악 못지 않게 소개되기도 하였다. 삼국 중에서 일본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측되는 백제음악은 고구려 음악과 같이 군후․막목․횡적․춤의 편성으로 되어 있다. 특히 미마지(味摩之)가 오(吳)나라에서 배운 기악무(伎樂舞)를 일본에 전한, 이 기악의 가면은 일본 여러 절에 지금까지 보관되고 있다. 이기악은 산대도감(山臺都監) 놀이 및 봉산 탈춤과 같은 가면무라고 한다. 동이전에 의하면, 백제 국내에서는 고(鼓)․각(角)․공후․쟁․우․지․적(笛) 등 일곱가지 악기가 사용되었다. 이들 악기는 중국 남조의 청악(淸樂)과 유사하다. 한편, 백제의 가요로 유명한 정읍사(井邑詞)가 있고, 곡목만 전해지는 방등산․무등산․지리산 등이 있다.
신라의 음악문화는 삼국 중 중국과의 국제교류가 가장 저조했다. 가야국의 성열현(省熱縣) 사람인 우륵(于勒)은 가야금을 위해 12곡의 가야금곡을 지어 가야금 시대를 열었다. 우륵이 지은 12곡의 가야금 곡의 제목은 대부분 현재 경상남북도의 여러 지명(地名)과, 이밖에 탈놀이 중의 사자춤과 관련이 있을 듯한 <사자기>라는 곡명, 구슬던지기 놀이의 일종인 <보기(寶伎)>라는 곡명으로 되어 있어 우륵이 향토색 짙은 각 지역의 음악 및 민간에 전승되는 놀이 등을 주제로 가야금곡을 만들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6세기 경에 신라에 수용된 가야금은 신라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당시 신라악은 대부분 가야금과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는 편성이다. 통일 전의 <신열악>․<사내악>․<미지악> 등 고악(古樂)은 가야금을 수용한 이후, 곡이 세련되고 아정한 음악으로 바뀌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또한 신라 음악사를 보면, 조상제사, 연희 등에 소용되는 음악을 위해 둔 것으로 해석되는 '음성서(音聲署)'라는 국가음악기관을 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통일신라시대
3. 통일신라시대
이 시대의 음악문화는 불교음악이 본격적으로 전래 되었으며, 궁중에서는 삼현삼죽(가야금․거문고․비파․대금․중금․소금)이 주축을 이루는 향악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신라고유의 향토음악 향악은 삼현삼죽과 박판(拍板)․대고(大鼓)․가(歌)․무(舞)로 이루어져 훨씬 다양하고 화려해졌다. 이는 서역의 악기 향비파, 당나라의 악기 박판․대고 등을 복합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상류사회 지식계층에는 거문고를 중심으로 한 금가(琴歌)의 문화가 맥을 이루는데, 이는 고려시대의 금가인 <풍입송>류의 음악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민간에서는 고대의 제천의식을 수반했던 국중대회의 전통이 팔관회(八關會)로 이어지기도 했다. 또한 이 시대의 특징으로 범패를 들 수 있다. 이는 불교의 의식음악으로 830년 신라의 진감선사가 당나라에서 배워 옥천사에서 가르쳐 불교음악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한편 신라의 향가는 진성여왕 2년(888)때 위홍과 대구화상이 편찬한 삼대목이란 향가집은 전해지지 않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처용가, 헌화가, 서동요 등 10여곡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
4.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음악사는 의종말년(1170)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는 고려조는 불교를 숭상하여 불교적인 행사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고, 전통적인 무격의식과 관련되어 면면히 이어온 것도 있다.
전기는 향가와 화랑의 전통, 팔관회와 연등회 등 통일신라의 유풍이 강하게 전승되는 한편, 중국으로 부터 아악이 전래되어 향악, 당악, 아악의 전통이 정립되었다. 종묘 사직 등 국가의 중요한 제사에 사용된 중국 고대의 의식음악인 아악은 금․석․사․죽․포․토․혁․목의 팔음(八音)악기를 당상악(堂上樂;登歌)과 당하악(堂下樂;架)으로 구분 배치하여 율려(律呂)에 맞게 교대연주하는 독특한 음악이다. 뿐만아니라 여기에 악장과 춤이 반드시 따르는 악, 가, 무 총체의 음악으로서 동양에서는 일찍부터 가장 이상적인 음악으로 인식되어 왔다.
당악은 악기나 춤에 있어서도 당악기․향악기 및 당악정재․향악정재라는 구분이 생겨나게 된다. 당악정재(唐樂呈才)는 방향․비파․생․당적․피리․장구․박 등이 당악기 반주 및 순한문으로 된 송사(宋詞)를 동반한다는 점에서 당악의 핵심을 이룬다. 송나라에서 들어온 교방악(敎坊樂)․사악(詞樂)과 원나라의 일부까지를 포괄한 중국의 속악을 통칭한 당악은, 향악과 양립하여 쌍벽을 이뤄 좌우로 구분(양부악(兩部樂); 좌방악(左坊樂) - 당악, 우방악(右坊樂)-향악) 되었다.
고려의 향악은 향악기 및 사뇌․삼국악․양부악의 전통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통일신라의 향악을 계승하였다. 중엽에는 동래에 귀양살이를 하던 중 거문고를 어루만지며(撫琴) 노래하였다는 <정과정(鄭瓜亭)>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금곡(琴曲)이 출현, 이는 우리말 가사를 가진 조선조의 <진작(眞勺)>으로 이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후기에 들어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유풍이 점차 사라지고, 아악의 전통도 주변 정치상황에 기인하여 문란해졌다. 이 시기 음악문화는 전기에 수입된 아악과 당악이 고려 후기의 혼란기를 통해서 점차 쇠퇴해 가는 일면과 이런 사회상을 반영한 새로운 노래들이 대두된 것이 또한 하나의 특징이라 하겠다. 당악은 쟁과 대고 대신 대쟁과 아쟁, 교방고가 쓰이고 새롭게 퉁소가 사용된다.
고려후기의 향악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별곡(別曲)'의 출현이다. 별곡은 8장으로 된 <한림별곡>이나 13장으로 된 <청산별곡>의 경우에서와 같이, 여러장으로 된 긴 가사가 1장의 음악으로 반복되는 유절 형식의 장가(長歌)이다. 그외 <만전춘> <이상곡> <쌍화점>이 있다. 이러한 고려의 속악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이르러 그 가사가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는 이유에서 잡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그 음절은 조선 초기의 궁중음악에 차용됨으로써 그 음악적 내용을 후대에 전하였다. 의종이 무신(武臣)들에 의해 시해(1173)된 사건을 계기로 여러차례의 외침과 장기간의 천도로 악공이 흩어지고 아악기 손실 등 그 전승에 타격을 입어, 1371년, 공민왕이 아악서(雅樂署)를 신설, 아악복구작업을 일으켰으나 크게 성공하지 못하였다.
조선시대
5. 조선시대
고려 때와는 달리 불교 대신에 유교를 국교로 삼은 조선은 예악(禮樂)을 존중하여 이를 정치․교육의 근본 이념으로, 건국 초에 아악서(雅樂署)와 전악서(典樂署)를 설치하면서 조선조의 음악을 관장하기 시작하였다.
1392년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까지 전기의 특색은, 숭유(崇儒)불교억제정책으로 연등회와 같은 불교관련 행사의 폐지, 아악의 일신 그리고 건국 개업을 칭송하는 <봉래의>․<발상>․<보태평>․<정대업> 등 신악(新樂)의 창작을 꼽을 수 있다. 또한 음악제도 보존을 위해 성종 24년『악학궤범』9권 3책의 형태와 같은 악서가 발간된 것이다. 『악학궤범』은 음악역사 서술을 생략하고, 12율의 결정법, 등가악과 헌가악의 중심음 사용법, 악기 진설법, 춤의 진퇴작변(進退作變), 악기제조법과 조현법 등 음악의 실용성을 광범위하고 상세하게 기술하는 데 치중하였다.
세종에 이르러 박연․남급․정양, 맹사성과 같은 이론가에 힘입어 음악 사업을 활발하게 벌여 아악의 부흥, 향악의 창작, 악보 창안․간행을 하였다. 아악기 제작으로 악기를 자급자족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는데, 당시 중요한 악기제작으로 편경(編磬)과 편종(編鐘)을 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정간보(井間譜; 매정간이 시간단위를 표시하는 유량악보) 창안 및 악보출간을 들 수 있는데, <정대업>․<보태평>․<치화평>․<취풍형>등의 신악이 이 기보법에 의해 악보화되었다. 이는 다른 기보에 비해 싯가(時價)가 분명한 점이 장점이다.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속악보는 용비어천가를 가사로한 여민락 만․문묘악 그리고 세조실록 악보에 전하고 있는 정대업․보태평 등이다. 성종대에 차츰 당악기는 향악에 편성되는가 하면 악기 개량도 보인다. 이러한 악기들은 박(拍)․월금(月琴)․당비파․장고․해금․아쟁․당적․당피리․태평소 등이다. 향악은 『대악후보』․『시용향악보』․및 『금합자보』에 기보되었고, 특히 직업음악인이 아닌 선비들간에 애탄(愛彈)되었던 금곡 『금합자보』의 첫머리에 실린 평조의 <만대엽>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평조․우조․평조계면조․우조계면조의 <중대엽>과 <삭대엽>을 파생하였다.
광해군에서 고종말 (1910)까지의 조선후기는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풍류음악의 발전, 일반 백성들의 생활감정을 표현한 민속음악의 발흥, 아악의 쇠퇴 등을 가장 두드러진 양상으로 꼽을 수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해 단절과 복구의 격동을 겪어 연향악 등 그 규모가 많이 축소되었다. <종묘제례악>은 점차 향악적인 색채를 상실하게 되어 향악도 아악도 아닌 독특한 음악으로 변모하여 등가 및 헌가에 향비파․가야금․거문고 등의 향악기들이 편성된 조선 전기와 달리 향악기들은 헌가에서 빠지는 등 차츰 향악의 요소가 배제되었다.
임금의 거동에는 여러 형태의 고취악이 연주되었는데, 이는 전정헌가(殿庭軒架)․전정고취(殿庭鼓吹)․전부고취(前部鼓吹)․후부고취(後部鼓吹)등을 말한다. 행례에 사용되던 음악은 대개 여민락 만․여민락 영․유황곡․정동방곡․낙양춘․보허자 등의 곡을 들 수 있다. 전정헌가와 전정고취가 전․후부고취와 다른점은, 전자는 거문고․가야금 등 놓고 타야 되는 악기와 편종․편경․건고․응고․삭고 등 들고 다니기 어려운 악기로 편성되어 있어 일정한 장소에 위치하여 연주하는 형태이고, 후자는 행악(行樂), 즉 행진할 때 연주되는 음악형태로 주로 어깨에 메고 다닐 수 있거나 들고 다닐 수 있는 악기들이어야 된다.
아정한 음악 또는 담백하고 복잡하지 않은 정악이라는 음악이 있다. 이는 전문음악이 아닌 선비들의 음악이라는 점에서 '금가'와 통한다. 정악의 또다른 뜻으로 그 명칭이 음률로 지칭되었던 예와 같이 노래를 수반하지 않는 기악곡을 가리키며, <영상회상>․<여민락>․<보허자> 등이 이 음률의 대표적인 곡에 든다.
영조 무렵에 고개를 든 판소리(타령 또는 잡가)는 문헌 유진한(柳振漢: 1711~1791)의 만화집(晩華集)에 춘향가 200구(句)가 있고, 송만재(宋晩載:1769~1847)의 판우회에는 12마당이 들어있다. 그 중 현재 춘향가․심청가․흥부가(박타령)․수궁가(토끼타령; 별주부전)․적벽가(화용도)의 다섯마당만 전하고 배비장전 이하의 7곡은 가사 또는 곡을 잃었기 때문에 전해지지 못하고 있다. 판소리는 한 사람의 창자(唱者)와 고수(鼓手)와 함께 긴 이야기를 소리와 몸짓․아니리(말체)로 끌어 가며 청중을 울리고 웃기는 대중음악이다. 소리나 아니리의 여러가지 표현에 맞는 동작을 취하는 것을 발림(科)이라고 한다. 그리고 고수가 북을 치며 "좋지"․"얼씨구" 등 감탄사나 흥을 돋구는 말들을 간간히 하는데, 이것을 추임새라고 하며, 이는 장단을 정확하게 치는 만큼이나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판소리 초창기 인물로 우춘대(禹春大)를 비롯하여 권삼득(權三得)․모흥갑(牟興甲)등을 꼽을 수 있고, 그 후에도 박유전(朴裕全)․염계달(廉季達) 등 헤아릴 수 없는 명창들이 많이 있다.
이 판소리 외에도 조선후기의 민속악은 많은 분야가 새로 생겨났다. 즉, 서울지방의 잡가(12잡가), 절간에서 타락한 우바새(男)나 우바이(女)들이 절간으로 혹은 민가로 돌아다니면서 재주를 피우고 소리를 하는 사당패 음악, 남도 무악계의 시나위와 이 시나위에서 파생되어 점차 체계를 잡은 산조(散調) 등이 있다. 그외 별곡과 함께 장가에 속하는 노래로 단가(短歌)인 가곡과 대조를 이루는 가사가 있다. 이는 음악중심인 가곡과 달리 사설이 중심이 되는 노래다. 시절가라고도 하는 시조는 가곡의 사설을 차용하지만 음악의 형식에 있어서 가곡처럼 5장이 아닌 3장으로 되어 있고, 1장의 박자수도 가곡보다 적어서 가곡을 단순화한 것이 바로 시조라 할 수 있다.
근세와현대
6. 근세와 현대
고종31년 갑오경장(甲午更張)이후 제국주의의 간섭과 침략으로 대한제국은 급속도로 붕괴의 과정을 밟게 되고, 이후 한일합방과 일제 식민지시대로 접어들면서 음악문화도 급속한 변화를 겪었다.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던 궁중음악은 왕실의 몰락과 함께 쇠퇴의 길을 걸어야만 했으며 궁중음악에 종사하던 많은 음악인과 궁중연회에 참여하였던 무기(舞伎)들은 생업을 바꾸거나 새로이 생겨난 공연장에서 공연활동을 하였다. 그 결과는 왕실을 위한 의식음악(연향, 조회, 동가(動駕), 군례(軍禮)의 중단, 제례음악의 중지, 궁중음악인의 감소를 가져왔다. 갑오경장 직후만 해도 772명이나 되던 악사들은 차차 문화 말살정책으로 1917년에는 겨우 50여명만이 남게 되었다. 서양음악이 들어왔는가 하면 서양식 군악대가 창설되고 국악은 또다시 수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조선조 음악이 공연예술로 전환되는 시대적 변천과정을 겪으며, 『조선악개요(朝鮮樂槪要)』 『조선아악요람(朝鮮雅樂要覽)』 등 여러가지 악서의 출판, 경종보 대금보 피리보 당적보 해금보 아쟁보 단소보 현금보 등의 악보제작과 오선보로의 채보 음반취입 등의 작업이 이루어져 조선조의 음악전통이 현대로 전승되는 과도기적 사명을 수행하게 된다.
이왕직 아악부(雅樂部)의 전통은 해방 이후 후계자 양성을 위한 구황궁아악부로 존속하다가 1950년 국립국악원의 창설로 그 맥을 이었다. 조선조 중 상류층에서 애호되던 정악도 왕조의 몰락과 신분제도의 붕괴로 크게 위축되었을 뿐만아니라 새로운 공연형태를 통해 대중에게 파고들기 시작한 민속악에 밀려나는 위기를 맞아, 정악 애호가들이 정악의 융성을 통해 전통문화를 계승코자 1909년에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를 결성하게 된다. 이는 최초의 사설의 음악기구라는 역사적 의의와 전통음악과 양악을 동시에 교육시키는 음악교육기관으로 평가된다.
잡가는 오늘날 12잡가로 알려진 긴 잡가와 빠른 휘모리 잡가가 주류를 이룬다. 12잡가는 <유산가>, <적벽가>, <평양가>, <달거리>, <십장가>, <방물가>, <형장가>, <출인가> 등이며 휘모리 잡가는 <만학천봉>, <곰보타령>, <병정타령>, <맹꽁이타령>, <한잔 부어라>, <순검타령> 등이 있다. 특히 서울에는 잡가를 잘 부르는 '사계(四契)축 소리꾼'과 선소리를 잘 부르는 '오강(五江)의 소리꾼' 들이 있어 오늘날까지 전승되는 서울 노래의 맥을 이어 주었다.
창극은 판소리의 새로운 변형으로서 현대국악사에 큰 의미를 지닌다. 판소리를 각 등장 인물별로 그 역을 분담하여 분창하는 양식으로 출현하였다. 이는 외래 공연양식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이 시기의 사회변화상을 반영하고 있다. 창극은 최초의 서양식 원형극장인 원각사에서 첫 선을 보였다. 판소리는 창극에 밀려 고유의 음악적 발전은 크게 진전되지 못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조선성악연구회> 결성 이후 판소리 명창들은 대규모 창극공연과 판소리 공연활동을 벌임으로써 남도음악의 전승을 공고히 할 수 있었고 그것이 오늘에 이어지는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1960년에 접어 들면서 국악원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활발해져 중앙의 대소 연주를 비롯, 지방순회연주, 국외의 파견 연주, 국가 의식의 연주악, 문묘 종묘 등 연례적인 제악 연주 및 TV 라디오 방송을 통한 각종 연주회를 연 백회이상 실시하여 국악 보급 활동에 전력을 다했다. 국립국악원은 아악이나 창작 국악 뿐만 아니라 민속악(民俗樂)부분, 즉 판소리 산조(散調) 민요(民謠) 민속무용(民俗舞踊)까지도 포괄한 범국악(汎國樂)의 종가(宗家)로 군림해 왔다.
현재 우리의 전통을 이어가려는 노력들이 다양한 곳에서 벌여지고 있다. 국악인들의 끈질긴 집념과 60년대의 탈춤부흥운동, 70년대의 마당극, 풍물, 마당굿, 대동놀이 등 연희성을 띠는 연행예술운동의 진행으로 우리 음악의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었다. 풍물의 대중화는 서양음악로 인정받게 하였다. 방송매체에서도 국악의 이론 등 다채로운 공연을 소개하고 있고, 이러한 폭넓은 활동은 현재 국악의 재평가, 정립으로 새로운 시도를 도모하고 있다. 우리 고유의 전통음악 국악을 활성화시키고, 발전시키는 모습은 국악의 해를 맞아 그 열기를 더하고 있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