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4대 악녀(惡女)(1)
<1> 달기(妲己) ◇ 상(商/殷)왕조 말기/ BC 11세기 경/ 주왕(紂王)의 비(妃)
주왕과 달기 / 요녀 달기(妲己) / 경국지색 포사(褒姒)
달기(妲己)는 중국 상(商/殷)나라 유소(有蘇) 출신의 여인으로, 훗날 중국 역사상 폭군으로 악명 높은 주왕(紂王)의 애첩이 되는데 중국 역사상 절색(絶色)의 여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미인이며, 아울러 음탕한 여인의 대명사로도 손꼽히는 여인이다. 상(商)나라 말기의 주왕은 달기를 몹시 총애하여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달기는 정실 황후인 강황후의 질투를 받았고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느 날 자객 강환이 주왕을 습격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달기는 이를 강황후에게 덮어씌우고 자백하라고 눈을 파내는 등 악행을 저질렀고 결국 강황후는 사망하게 된다.
은주달기조(殷紂妲己條)에 보면 달기는 포락지형(炮烙之刑)이라는 형벌을 만들었는데 기름을 바른 구리(銅) 기둥을 숯불 위에 걸쳐놓고 죄수가 벌겋게 달구어진 기둥위로 맨발로 건너게 하여 미끄러져 떨어져 불에 타 죽는 모습을 보며 손뼉을 치며 깔깔대고 웃었다고 한다.
또 돈분(躉盆)이란 형을 만들었는데 구덩이에 죄수들과 독사와 전갈을 함께 집어넣고 그들이 물려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즐겼다고도 한다. 주왕은 달기에게 완전 빠져 달기가 하자는 대로 하여 악행도 서슴지 않았는데 이를테면 멀쩡한 신하(진상위)의 눈알빼기,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보기, 한 여름에 뼈가 시려 강을 못 건넌다는 노인의 다리뼈를 잘라 골수보기 등 상상을 초월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또, 술을 채운 연못 주변에 고기를 걸어둔 숲(酒池肉林)을 만들어서 술에 취한 나체의 남녀가 서로 뒤쫓아 혼음(混淫)하는 것을 보고 즐기는 등 날마다 음탕한 밤을 보냈다. 충신 구후(九候)는 달기의 악행을 보다 못해 천하절색인 딸을 주왕에게 바쳤는데 달기는 그 딸을 모함으로 죽이고 아버지인 충신 구후 또한 참살한다.
또, 주왕의 숙부이기도 한 재상 비간(比干)이 “선왕(先王)의 전법(典法)을 따르지 않고 아녀자의 말만 따르시니 재앙이 가까울 날이 머지않았습니다.”라고 간언하자, 달기는 주왕에게 “성인(聖人)의 심장에는 일곱 개의 구멍(七竅)이 있다고 들었습니다.”고 하면서 주왕을 부추겨 비간을 죽여 심장을 도려내서 드려다 보았다고도 한다.
충신 비간의 죽음으로 백성들은 상나라(商/殷)에 손톱만큼의 애정도 없어졌고, 주(周)를 중심으로 팔백 제후가 일어나 중국의 두 번째 나라였던 상(商/殷)나라는 31대 주왕(紂王)을 끝으로 왕조의 문을 닫고 마는데 결국 달기(妲己)라는 여인으로 인해 망했다고 할 것이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군사를 몰아 쳐들어와 패색이 짙어지자 주왕은 보물이 저장되어 있는 녹대(鹿台)로 올라가 불을 지르고 불에 뛰어내려 자결하는데 주왕(紂王)이 죽은 뒤, 달기도 무왕(武王)에 의해 참수된다. 무왕(武王)은 타버린 주왕의 시체를 가져다 관례대로 목을 치고 주왕의 몸에 화살을 세대 쏘았다고 한다.
첫 화살은 하늘의 명을 거역한 죄로 금 화살, 두 번째는 나라를 망하게 한 죄로 은 화살, 세 번째는 백성을 힘들게 한 죄로 동화살 이렇게 세대를 타버린 주왕의 몸에 꽂았다. 주왕의 애첩 달기도 잡혀 끌려 나왔는데 달기 또한 목이 잘려 역시 화살 세대를 맞고, 주왕의 목과 함께 백기에 걸렸다고 한다.
달기의 처형 때 달기의 미모에 대한 일화가 있는데 묶여 끌려 나오는 그 모습, 눈물까지 흘리는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목을 쳐야 할 망나니들이 넋이 빠졌다고 한다. 망나니는 달기의 촉촉한 눈망울을 보면 칼을 든 팔을 부들부들 떨며 끝내 칼을 못 올렸다고 하고 다른 망나니로 교체해도 마찬가지였다.
90세 할아버지 망나니를 내 세웠으나 그 마저 차마 못 쳐서 할 수 없이 달기 머리 위에 비단을 덮어 못 보게 한 후 간신히 목을 쳤다고 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에는 주나라 군대가 조정(朝庭)에 진입한 후에 주공(周公=주 무왕)이 달기를 취하여 그의 시녀로 삼았다고 나와 있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아버지는 옛날이야기를 즐겨 들려 주셨는데 달기를 꼬리 아홉 개 달린 구미호(九尾狐/여우)라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포락지형을 받고 죽은 시체를 공동묘지에 내다 묻으면 밤에 달기가 몰래 궁궐 담을 넘어 나와서는 하늘에 한번 공중제비를 돌면 여우로 둔갑하는데 무덤을 헤치고 불에 그슬린 시체를 파내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심장을 꺼내 먹는다는....
<포사(褒姒)>
BC 8세기 주(周) 왕조 말기, 상(商)나라를 멸망시킨 주(周)나라 역시 유왕(幽王)의 비(妃) 포사(褒姒)라는 여인에 의해 결정적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포사는 주(周)의 마지막 임금 유(幽)의 왕후였는데 포사는 궁에 들어온 후 한 번도 웃지를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날 실수로 적군이 쳐들어오지도 않는데 봉화(烽火)를 올린 일이 있었는데 제후들이 사방에서 군사들을 이끌고 허겁지겁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비로소 포사가 깔깔 웃었다고 한다. 유왕은 포사의 웃는 모습을 보고자 이따금 거짓으로 봉화를 올렸고 포사는 그때마다 깔깔 웃고....
남자들이 여자가 웃는 모습을 한 번 보기 위해 엄청난 돈을 쓴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천금매소(千金買笑)’라는 사자성어가 바로 이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 이 포사는 4대 악녀에는 들어가지 않지만 거의 준하는 악녀이다.
*중국 고대사에서 신화시대인 삼황오제(三皇五帝)의 뒤를 이어 하(夏)-은(殷)-주(周)로 이어지는데 은(殷)나라는 사실 상(商)나라로 그 수도가 은허(殷墟)였기 때문에 ‘은나라’ 라고도 불렸다.
<2> 여태후(呂太后) ◇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비(妃)/BC 240년 전후/ 아명 여치(呂雉)
한고조 유방(劉邦) / 유방의 부인 여태후(呂雉)
여태후의 아버지 여문(呂文)은 산동(山東) 출신의 유지로, 가족들을 데리고 유방(劉邦)의 고향인 패현(沛縣)으로 이사를 하여 딸(아명 呂雉)을 낳는데 이 딸이 장성하여 유방과 결혼하게 되고 훗날 유방이 한(漢)나라의 왕이 되자 태후(太后)가 된다.
여태후는 두 아이를 낳는데 첫째가 후일 노원공주(盧元公主)로 불리게 될 딸이고, 둘째가 황제를 계승하게 될 유영(劉盈)이었다. 유방과 여치는 결혼 후 평범한 농민들의 삶을 살았는데 젊은 날 유방은 가정에 헌신적인 남자가 아니라 바람기가 많고 주색잡기에 능한 한량(閑良)풍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진(秦)나라 말기, 농민 반란이 일어나자 항우(項羽)와 손을 잡은 유방(劉邦)은 진나라를 멸하고 다시 항우와 치열한 패권다툼을 벌이게 되는데(楚漢戰) 전쟁 초기에 항우의 병사들에게 포로가 되었던 여치는 이 기간 내내 초나라의 군영에 인질로 잡혀 있으면서 온갖 굴욕과 멸시를 받아야 했다.
이때에 받은 심리적인 타격이 훗날의 극단적인 행동으로 표출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한다.
유방(劉邦/漢)이 항우(項羽/楚)를 물리치고 한왕(漢王)이 되자 황후가 된 여치에게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유방의 총애를 받고 있던 제2부인 척희(戚姬)라는 여인이었다.
척희는 대단한 미인이었으며 혁명과 전쟁의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8년간이나 유방과 함께 전선을 누빈 혁명동지이기도 했다. 척희에게는 여의(如意)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태자인 여치 소생의 유영(劉盈)은 선량하지만 나약한 성품인데 반해 척희 소생의 여의(如意)는 제왕으로서 필요한 품성을 모두 타고난 왕자였다고 한다. 유방은 나약한 태자 영(盈)을 폐하고 여의를 대신 후계자로 세우려고 하다가 중신들의 반발로 일단 보류한 적이 있는데 그 이후 여태후(呂太后)에게 척희 모자는 목의 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여태후는 이미 정계를 은퇴한 장량(張良)을 찾아가 그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태자의 폐위를 막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한나라(劉邦)가 천하를 통일하는 데는 세 사람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유방(劉邦/漢高祖)의 고향 친구인 소하(簫何)는 재상을 맡아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으며, 재사(才士) 장량(張良)은 최종적인 승리의 설계자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명장(名將) 한신(韓信)이 있었다.
천하가 평정되자 장량(張良)은 스스로 은퇴하고 소하(簫何)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으나, 한신(韓信)은 유방이 항우와 싸울 때 그를 여러 번 위기에서 구해내는 등 일등공신으로 후일 한왕(韓王)의 자리를 차지하는 등 권력욕이 강했다. 한신은 물러날 때를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항상 불평불만이 많았으나 유방은 차마 탓하지 못했다. 유방을 위해 껄끄러운 한신을 제거한 사람은 여황후였다. 그녀는 유방이 출타한 동안 한신에게 모반죄를 씌워 그의 일가친척, 친구들과 함께 그를 처형했다.
유방과 한신은 혁명 중에 서로에게 맹세하기를 “하늘과 땅을 보며 죽게 하지 않고 쇠붙이 무기를 보며 죽게 하지 않겠다.”라는 서약을 했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서로 상대방을 죽이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맹세였지만, 여황후는 이를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했다. 한신을 죽일 때 자루를 씌우고 대나무 창으로 찔러 ‘하늘과 땅을 보지 않게, 쇠붙이 무기를 보지 않게’ 죽인 것이다.
다음은 전쟁영웅인 양왕(梁王) 팽월(彭越)의 차례였다. 여후는 팽월의 측근들을 협박해서 그를 반역죄로 모함하도록 한 다음 그를 처형했다. 그녀는 팽월을 하나의 시범 케이스로 삼았다. 그의 뼈와 살로 육젓을 만들어 각 제후들에게 보내어 엄중하게 경고하였다고 한다. 유방이 죽고 열여섯 살의 아들 영(盈)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여치는 태후의 신분으로 정사에 깊숙이 관여했다.
연적인 척부인에게 오랫동안 칼날을 갈아왔던 그녀는 유방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그녀에 대한 복수를 단행했다. 여태후는 척부인의 머리카락을 모두 자르고 팔다리에 수갑을 채워 죄수복을 입혀 감옥에 가두고 곡식을 찧는 고된 노동을 시켰다. 당시 여의(如意/척부인의 아들) 왕자는 조왕(趙王)으로 봉해져 임지인 하북(河北) 지방에 나가 있었다. 여태후는 아예 후환을 없애기 위해 여의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를 장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러자 심성이 착했던 황제(劉盈/여태후의 아들)는 자신이 아예 성 밖으로 나가 어린 동생을 맞이하고 항상 그를 곁에 두면서 어머니의 음모로부터 보호했다.
그렇다고 순순히 포기할 태후가 아니었다. 여러 달이 지난 어느 겨울날 새벽, 황제가 잠시 사냥을 나간 틈을 이용해 태후는 여의(呂意)를 독살하는데 성공했다. 이때 여의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아들의 죽음을 듣고 척부인이 원망하자 척부인의 팔과 다리를 자르고 두 눈을 파냈으며 독한 증기를 쐬게 해서 귀를 멀게 하고 약을 먹여 벙어리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척부인을 “인간돼지”라고 부르도록 했다.
척부인의 비참한 모습을 본 어린 황제(惠帝) 영은 큰 충격을 받았다.
황제 영은 자신의 친누나인 노원공주가 낳은 딸 장씨를 왕후로 맞이해야 했다. 즉 자신의 조카와 결혼한 셈이었다. 또한 황제의 후궁들이 낳은 아들들을 황후가 데려와 키우게 하고 생모들은 모두 죽였다. 혜제의 뒤를 이어 그가 후궁으로부터 얻은 두 아들(척부인의 손자)이 차례로 허수아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첫째가 유공(劉恭)이었는데, 4년째 재위하던 어느 날 자신의 친어머니가 태후 장씨가 아니라 할머니인 여태후에게 죽임을 당한 어느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는 한을 품었다. 이 사실이 여태후의 귀에 들어가자 그녀는 소년 황제를 가두어 놓고 굶겨 죽였다.
기원전 180년 어느 날 오랜만에 궁 밖으로 나갔던 여태후에게 개 한 마리가 갑자기 덤벼들어 그녀의 겨드랑이를 물었다. 그 일로 인해서 그녀는 병에 걸렸으며, 여태후는 그녀가 독살했던 유여의(劉呂意/척부인의 아들)의 귀신이 나타났다고 소리를 지르며 두려움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하는데 향년 62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