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과 교회, "술"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 잠23:29~35
“술”을 주제로 설교 한다고 페이스북에 올리니 목회자들은 잘해야 본전이고 오히려 분란만 난다고 말립니다. 반면, 일반성도들은 솔직히 고민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기준이 필요하다 등 반응이 뜨겁습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먼저 아래 질문에 스스로 답변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항목마다 먹어도 되면 ○, 안되면 ×, 잘 모르겠으면 △ 를 하는 것입니다.
성찬식에서 먹는 포도주
약으로 먹는 술 ex) 결석환자의 맥주
스테이크 먹을 때 와인 1잔
삼계탕 먹을 때 인삼주 1잔
음식에 맛을 내기 위해 넣는 술
칵테일
집에서 담근 과일주
집에서 가족과 함께 간단하게 먹는 술
명절에 가족과 함께 먹는 술
직장에서 회식할 때
동창과 식사하면서 하는 반주 1잔
호프집에서 맥주 마시기
소주집에서 소주 마시기
단란주점에서 마시기
주 1회 정도 마시는 것
종류, 회수 등 모두 상관없다
어떻습니까? 스스로의 답변이 성경적 또는 신앙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본인도 놀랄정도로 의외의 답변이 나왔나요? 신실한 그리스도인 50여 명을 대상으로 질문지를 주고 체크를 하고 걷어보면 답변 결과가 정말 다양합니다. 약 1/4 정도는 성찬 포도주와 약으로 먹는 술, 음식에 넣은 술 정도만 먹어도 된다고 답변합니다. 1/3 정도는 단란주점 정도만 빼고는 거의 대부분 가능하다고 답변합니다. 나머지 분들은 정말 다양합니다.
제가 이 질문을 드리고 스스로 체크를 부탁드리는 것은 한 가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술에 대한 인식과 행위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다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한 기독교 월간잡지 편집장이 페이스북에 맥주파티를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많은 기독인들이 "신선하다", "재밌겠다" 등의 반응을 보였고 실제 모임은 성황리에 재밌게(?) 진행된 것 같습니다. 이 제안에 대한 댓글들은 술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너무 부정적이며 불필요하게 금기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 제 주변에 기독교계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는 분들 중에 술을 적당히 마시는 분들이, 전혀 안 마시는 분들 보다 훨씬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교계와 관련한 일을 하시는 분들이 이 정도이니 일반 직장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더 관대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는 목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진보적인 교단의 목회자들은 특별히 술을 금기시 하지 않고, 보수적인 교단의 목회자들 중에도 많은 분들이 한두 잔 정도는 괜찮다 생각하고 실제 그렇게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잠언’에서의 술에 대한 가르침
저는 술에 엄격하든 관대하든 우리가 모두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로서 먼저 성경이 무엇이라 말하는가를 살펴보고, 이를 중심으로 문화화하든, 상황화하든 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침 우리가 읽고 있는 '잠언' 말씀 중에 술에 대해 비중 있게 언급한 부분이 있어 이를 중심으로 성경에서 술에 대해 어떤 지침을 주고 있나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잠언'의 원제목은 '미쉴레 솔로몬'으로 '미쉴레' 즉, '마샬'은 지혜, 금언, 격언이란 의미입니다. '잠언'은 기록 목적을 자녀들(그리스도인들 이라고 해도 좋을 듯)로 하여금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고,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기 위함으로 했습니다.(1:2,3) 이를 통해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고, 지혜 있는 자는 학식이 더하고,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고 말합니다.(1:4,5)
이런 맥락에서 술에 대한 잠언의 기록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즉, 잠언의 가르침이 지혜롭고, 공의롭고, 정직한 것이라는 전제입니다. 잠언에서 술에 대한 가르침은 우리가 읽은 23장에 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23:20,21은 "술을 즐겨 하는 자들과 고기를 탐하는 자들과도 더불어 사귀지 말라. 술 취하고 음식을 탐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자기를 즐겨 하는 자는 헤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술과 음식을 과도하게 먹고 게으른 자가 가난해 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29절 이하에서는 재앙과 근심, 분쟁, 원망, 상처, 붉은 눈이 술에 잠긴 자,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다고 지적하며, 그것을 보지도 말라(23:31)고 경고합니다. 술 취한 자에게 닥치는 재난과 아픔, 감당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지적들로 술로 인해 실수하고, 싸우고, 심지어 돌이킬 수 없이 후회할 일을 하는 경우들이 많은 것을 생각할 때 이는 지금도 옳은 말들이라 생각됩니다.
성경에서 술로 인한 재앙의 예
실제 성경에는 술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재난을 당하고 죄악 가운데 빠지는 예가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첫 번째가 '노아'입니다. 당대의 의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노아가 홍수 이후에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벌거벗고 자다가(창9:21) 막내 ‘함’이 이를 봄으로 인해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들의 종이 되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창9:25) 노아의 이런 행동은 "이웃에게 술을 마시게 하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에게 추하게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는 화 있을진저"(합2:15)라는 말씀을 생각할 때 하나님 앞에 화를 당할 악한 행동이었습니다.
두 번째 사례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입니다. 소돔의 멸망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롯에게 두 딸이 후손을 얻을 욕심으로 아버지를 술에 취하게 하고 동침해 각각 아들을 낳습니다.(창19:32,33,35) 그렇게 얻은 아들이 '모압'과 '암몬'입니다. 모압과 암몬은 이후 이스라엘 백성을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적대하는 원수의 나라가 됩니다. 롯이 술에 취함으로 딸들의 패륜을 막지 못한 결과입니다.
세 번째 사례는 첫 대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아론의 두 아들들입니다.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나는 방법인 제사법을 알려주고, 이를 수행할 제사장들이 지킬 규례를 알려줍니다. 그런데 아론의 아들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 앞에 분향할 때 다른 불을 사용해 여호와 앞에서 그 불에 타죽은 끔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레10:1~3)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드린 이유가 정확히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같은 장에서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 죽음을 면하리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레10:9)고 말씀하신 것을 통해 유추해 보면 술에 취해 실수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고,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할 제사장이 술에 취하면 이를 망각하는 것입니다.(레10:10)
제사장, 나실인에는 술 자체를 금지
제사장에 대한 포도주와 독주에 대한 주의는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사용한 '나실인'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합니다. 나실인은 아예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할 뿐 아니라 포도주로 된 초나 독주로 된 초도 마시지 말고, 심지어 포도즙이나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고, 포도나무 소산의 씨나 껍질도 먹지 못하게 합니다.(민6:3,4) 혹시 취해서 실수할까 미연에 방지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짖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 서 그 공의를 빼앗는 도다"9사5:22,23)라고 경고합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마심 자체를 악하다 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자제력을 잃어 뇌물을 받고, 악인을 의롭다하고 의인에게서 공의를 빼앗게 되는 것을 질책하는 것입니다. 술 취함이 이런 불의의 원인을 제공한다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상의 구약성경 말씀들을 생각해보면 구약시대에도 술이 만연해 있었고, 지나친 음주에 대해서는 경계하면서, 때로는 그것을 강하게 금지하기도 하고(잠23:31), 제사장 등 특정 업무 종사 때는 술을 금하고(레10:9), 나실인처럼 특별히 구별된 목적으로 선별된 사람들은 아예 접근조차 못하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민6:34)
예수님은 술꾼(?)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부터 술이 등장합니다. 잘 알다시피 예수님은 연회장에 술이 떨어지니 더 좋은 술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본문은 기적으로 인해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제자들이 그를 믿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요2:1~11)
이 사건을 해석할 대 어떤 분들은 예수님이 술을 주었지만 술을 마셨다는 말은 없다며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당시 문화적 상황도 그렇고 잔치자리에 술을 내준 분이 술을 마시지 않았다 해석하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눅7:33,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고(먹보) 포도주를 즐기는 자(술꾼)이라고 비난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이 술을 즐겼고, 그러니 우리도 즐길 수 있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바래새인들이 세례 요한의 금식하고 금주하는 것에 대해서는 귀신 들렸다 하면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어울리며 먹고 마신 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먹보와 술꾼이라고 한다며, 바리새인들의 표리부동과 외식을 힐난하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문화는 식사를 하면서 포도주를 조금씩 하는 것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이 사막지역으로 물이 귀했음으로 포도주를 만들어 음료로 마셨던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성찬을 제정하실 때 포도주를 들어 자신의 피라고 말씀하실 것도, 식사 시간에 포도주가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울의 경계, “술 취하지 마라”
바울은 여러 서신서를 통해 술 취하는 것에 대해 경계합니다. 바울이 경계한 말씀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6:10) 술 취하는 것을 도적, 탐욕, 사기 등과 같이 취급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경고합니다.
이는 육체의 일에 대해 언급하는 갈라디아서에서도 동일합니다.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21)
로마서에서는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며"(롬13:13) 다른 방탕, 음란, 호색, 다툼, 시기와 같이 술 취함을 밤과 어둠의 일로 제시하면서, 이것들로부터 벗어나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4)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도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벧전4:3) 말하면서 술 취함을 포함한 이런 방탕한 것들은 이방인의 행실이고, 예수 믿기 전의 행실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 술에 대해 가장 많이 인용되는 말씀은 아마도 에베소서의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일 것입니다. 술 취함과 성령 충만을 비교해서, 술 취하는 것은 세월을 허비하는 것이고(5:16) 어리석은 것(5:17)이며, 성령 충만에 취하면 찬송하고, 서로 화답하고, 감사하고 피차 복종하게 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5:19~21)
바울은 교회 직분자인 장로와 집사를 세울 때도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딤전3:3, 딛1:7, 감독),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딤전3:8)라는 내용을 넣어 술 취함에 대해 경계합니다.
술은 일종의 문화
그런데 오히려 바울이 술을 권하고 있는 장면도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목회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5:23)고 권면합니다.
아마도 이는 깨끗한 물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안전한 포도주를 권하는 것일 것입니다. 눅10:34 등 사마리아인의 비유 등에서 볼 때 당시 포도주가 약으로 쓰여진 것을 생각할 때 포도주를 약처럼 사용하라는 사랑의 당부 일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구약과 신약 성경에서 술과 관련한 말씀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를 볼 때 성경에서도 식사 때 음료와 같이 마시는 술이나, 잔치 자리에서 즐거움을 위해 마시는 술을 금하지 않았고, 병에 대해서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용하도록 권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문화적 풍습은 현대의 유대인들에게도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독일이나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에서 식사 때 맥주나 와인을 한두 잔 하는 것은 일종의 음료와 같은 문화입니다. 여담이지만 포도주는 알콜이 12도 정도지만, 맥주는 4도 정도입니다. 포도주는 성경에 나오니 괜찮고 맥주는 안 된다는 것은 조금 넌센스입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은 술 자체를 금하고 있다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취해서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을 경계했고, 특정한 자들에 대해서는 구별된 사용을 위해 금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술을 문화적 상황에 따라 유연성 있게 적용할 여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유 그러나 방종의 위험
예수님은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32)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진리에 거하면 자유롭게 된다 했는데, 교회에서 술 문제 뿐 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율법적 억압으로 적용하고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는 본질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가급적 성도 개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반면, 바울은 로마서에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2,13)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은 성도들이 그 자유를 죄를 짓는데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최대한 자유를 보장하고, 성도는 최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하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술 자체의 취할 수 있는 성격과, 취함으로 인해 실수 할 수 있음에 대해 크게 염려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또 제사장, 나실인처럼 특별한 사역을 맡은 자들이 실수할 가능성 등을 염려해 아예 금하는 경우도 있음도 분명합니다. 따라서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이 먹는 것을 금하는 것은 아니어도 일정한 경계와 한계를 설정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 나라, 그의 영광을 위해
그렇다면 그 경계와 한계는 무엇일까요?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고 말하였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 때문에 선한 것이 비방 받고 오해받지 않도록 하라(롬14:16)면서, 우리가 목표로 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평화와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만일 음식으로 인해 서로 비방함으로 평화를 깨고, 덕이 안 된다면, 자신은 고기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겠다고 선언합니다.(롬14:21)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의 평화와 덕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포기하는 것! 바로 그것이 믿는 자의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방인에게 제사 드린 음식을 먹을 수 있지만 그것으로 인해 어떤 형제가 실족한다면 그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 안에서 주어진 자유는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양심과 자유에 대해 생각하고 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어떤 행동의 동기와 결과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고, 많은 사람을 유익을 구해 그들로 구원을 얻도록 인도하는 길(고전10:33)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바울의 가르침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큰 계명에 부합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을 사랑함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술 뿐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행동, 선택의 지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그를 통해 이웃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가? 이웃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가가 기준이라 생각됩니다.
우리나라에서 술을 금한 이유
우리나라에서 술과 담배를 금했던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먹을 것이 없을 때 술과 담배로 인해 낭비와 가정파탄과 사회적 범죄가 너무 심각했었습니다. 당시 문화적 상황 속에서는 술과 담배를 금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거룩함 즉, 구별된 삶의 지표요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기독교인들의 금주, 금연 운동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 사회적으로 공감을 얻었고 존경의 대상이 되었으며, 1938년에 ‘청소년 보호법’을 제정할 때 청소년들의 술, 담배를 금하는 법률 제정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담배에 대해서는 현대에서도 연구하면 할수록 유익한 것이 없어 많은 나라에서 실내 뿐 아니라 실외에서도 금연을 법제화 할 정도로 백해무익한 것으로 판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술에 대해서는 상당부분 문화적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물론 여전히 알콜 중독 등의 폐해가 심하고, 우리나라가 국가별 술 소비량이 11위를 차지할 정도로 지나친 음주문화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술 자체가 인간관계를 위한 문화가 되었고, 우리가 가진 인격과 지성이 술을 취할 정도가 아니라 문화적으로 즐길 수 있는 성숙도를 상당부분 유지할 수 있다 생각됩니다. 또 현대 사회에서 술을 전혀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은 것도 현실입니다. 요즘은 일반 사람들도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술을 한 잔도 마시지 않아야 한다거나, 그렇게 하는 것이 거룩함(구별됨)의 표징이라고 생각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럼으로 술에 대해서도 자신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취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덕이 되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자신의 삶과 상황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굴복하거나 타협하는 것일 것입니다.
스스로 기준을 정하자!
지금까지 들으시면서 그래서 먹으라는거야 먹지 말라는 것야 의문이 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모두 종이에다가 자신이 스스로 지킬 주량을 적으시기 바랍니다. 모두 마셔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안 마시는 분은 안 마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마실 수 있다 생각하고, 마실 수밖에 없는 분은 자신이 지킬 주량을 적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지키기 해봅시다.
어떤 이유 때문에 이를 지키지 않았거나 못했다면 그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외부에 압력 때문인지, 분위기 탓인지, 아니며 스스로 절제하지 못해서인지..등.. 결국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주도적으로 살아갈 자유와 책임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니까요.
때로 성경의 가르침이라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옳고 덕이 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 인간적인 억압과 핍박을 감내하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술 뿐 아니라 모든 선택과 행동의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스스로 정한 기준을 지켜나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상황에 휘둘리지 말고 그리스도인으로 오직 그의 영광과 이웃 사랑, 교회의 덕을 위하는 방향으로.
한 가지 덧붙일 것은 교회 내에서 또는 그리스도인들끼리의 술에 대해서입니다. 에베소서는 ‘교회론’으로 유명한 책입니다. 교회가 무엇인가와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가장 분명하게 다른 성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에베소서는 술 취함과 성령 충만을 비교합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성령 충만 안에서 서로 화답하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피차 교제하며 복종하는 곳이라 말씀하십니다.(엡5:18~21)
구약과 신약 모든 성경의 가르침이 술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술의 폐해와 치나침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것을 상기할 때 저는 그리스도인들 끼리나 교회가 술을 통해 교제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생각합니다. 교회는 성령 충만함으로 교제하고 성령 충만함으로 사랑하는 곳일 때 더욱 거룩하고 더욱 덕이 되리라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술에 대해 관대 하더라도 목회자들은 최대한 천천히 술을 마시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지난 100여 년 동안 한국교회에서 금주가 기독교인의 지표와 같이 지켜져 왔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목회자로 부름받은 자들의 음주가 혹시 어떤 성도나 일반인들을 시험에 들 수 있게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며 좋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자들이 꼭 술을 선도적으로 먹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우리 다음 세대쯤 되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싶기는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제가 술에 대해 이야기 했지만 사실 이는 술 뿐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행동하고 선택할 때 동일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가? 우리 모든 행동이 ‘코람데오’(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자녀와 주님의 제자로서 부끄럽지 않고 오히려 영광이 되고 덕이되는 삶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멘!
* 위 내용은 7.6(금) 인천 더함공동체교회 금요기도회에서 이진오 목사가 설교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