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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암과 싸우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박봄
양반진단 97년 7월 폐암 초기진단
8월 수술, 재발 뼈전이, 방사선치료
한방진단 97년 11월 ㅇㅇㅇㅇ원이송
MRA 정보진단 F005-17 말기암 진단
전이(뼈, 폐, 림프, 대장림프, 뇌)
현재 CT - NOMAL (정상판정)
2000년 8월 1일 현재 건강히 생활, 사업재개증
남편은 대단히 건강한 사람이었다. 병원에 가야할만큼 아파 본 적이 없었고, 가끔 감기가 들더라도
콩나물국이나 한사발 마시고 푹 자면 낫는다는 신조로 생활했다.
또 옛말처럼 '밥이 보약' 이라고 생각해 남다른 건강식품을 챙겨 먹은 적도 없었다.
옛날엔 담배를 피웠지만 4~5년 전부터 담배도 끊은 상태였다.
그런데 97년 7월 즈음 전에 없던 증상들이 나타났다. 별로 더위를 타는 체질도 아닌데
굉장히 피곤해 했고, 마른 기침을 했다.
원래도 성격이 부드러운 편은 아니었지만, 몸이 피곤해서 그런지 짜증도 부쩍 많이 냈다.
"몸이 왜 이런지 모르겠다"며 유난히 피곤해 하는 모습을 보고 왠지 심상찮은
기분이 들어 병원에 가보자고했다.
그랬을 떄도, 스스로 건강에 워낙 자신이 있었던 남편은 공연한 사람을 환자 취급한다고
오히려 불쾌해했다. 사위가 내과 전문의로 우리 집 근처의 병원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한번 휙 다녀오면 되련만 그마저도 내켜하지 않았다.
그래도 여러가지 증세가 워낙 심상찮아서 어느 날 저녁을 먹은 뒤 나는 "바람이나 쐴 겸 갔다오자"며
사위가 근무하는 병원으로 남편을 이끌었다. 가서 증상을 설명하고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해독판 위의 필름을 들여다 보던 사위가 당황한 표정으로 필름을 휙 빼 버리는게 아닌가.
가슴이 철렁했다. 무언가 석연찮은 점을 눈치챈 남편과 나는
"뭐야? 왜 그래? 뭐 죽을 병이라도 걸렸어? 숨기지 말고 있는대로 그냥 얘기해봐." 하고 물었다.
죽을 병에 걸렸으리라곤 꿈에도 생각치 않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이었다.
사위는 할 수 없이 필름을 보여주며 "한쪽 폐가 이상해요, 큰 병원에 가 봐야겠습니다." 했다.
우리가 봐도 필름의 한 쪽의 희끄무레했다.
남편은 이틀 뒤에 K大 부속병원에 입원해서 여러가지 검사를 다 받았다.
병원을 다녀본 적이 없고, 당시로선 암에 대해서 암무 것도 아는 게 없었기 때문에
이것 저것 검사를 받으면서도 무슨 검사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검사 결과 폐암임이 판명되었다. 겁을 주지 않기 위해선지 실제로 그랬는지 초기라고 했다.
주치의가 워낙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암에 관한한 백치에 가까웠던 우리는
종기 하나 떼내는 것 쯤으로 여겼다.
8월 12일 수술을 받았는데 환자가 워낙 건강해 수혈도 없이 수술을 했다.
다만 오른쪽 앞가슴에서 뒤쪽 등까지를 반원형 으로 60cm정도 절개한 걸 보고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큰 수술이구나 했다. 수술을 마치고 나온 주치의는
"수술이 아주 잘됐다."며 대단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수술 뒤에 바로 광복절 연휴가 끼어 있었고, 그연휴 기간 동안 문제가 발생했다.
남편은 호스를 두 개 꽂고 있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분비물이 호스로 배설되지 않아
허벅지 쪽이 엄청나게 부어 올랐고, 수술한 부위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16일날 주치의가 와서 보고는 "이렇게 되도록 뭐 했느냐"며 당직의사를 야단쳤고,
비상이 걸렸다. 여러 의사들이 우왕좌왕 병실을 들락거리는 걸 보니
문제가 생겨도 단단히 생긴 모양이였다.
호스 꽂았던 자리를 도려내는 등의 조치를 취한 뒤에 들은 설명으로는
수술 전엔 몰랐으나 열어 봤더니 임파선까지 전이가 되어있었고, 그 떄문에 생긴 일이라고 했다.
초기가 아니었다. 그 뒤 몸 안의 지방질이 빠지기 시작하는데 이틀에 링거병 하나가 가득 찰 정도였다.
병원측에선 지방질이 그렇게 빠지면 안된다고, 그걸 말려야 한다면서 그때부터 일주일간 금식을 시켰다.
다행히 더 이상 상태가 악화되지는 않아 8월 29일 일단 퇴원을 했다.
퇴원 이틀 뒤에 미국에 가 있던 아들이 귀국을 했다. 소식을 모른 채로 귀국했던 아들은
아버지를 붙들고 펑펑 울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저녁부터 고열과 오한, 구토가 시작되었다.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남편은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응급처치를 한 뒤 남편은 격리실로 옮겨졌다. 그 와중에 의사가 와서 사타구니 쪽 동맥에서
피를 상당량 뽑아갔고, 나더러도 마스크를 끼고 옷을 격리실용 지정복으로 갈아 입으라고 했다.
그후 남편은 20일간을 격리실에 있었는데. 열이 얼마나 심하던지 수은주가 온도계 끝까지 올라갔다.
열이 오를 때나 내릴 때 남편은 온 몸을 뒤틀며 몸을 심하게 와들와들 떨었다.
이빨도 심하게 딱딱 부닥쳤기 때문에 의사는 재갈을 물리기까지 했다. 사람도 전혀 못 알아 봤고,
심하게 헛소리를 했다. 의사들이 번갈아 오가며 자기들끼리 수군수군거렸고 급기야
"이대로 가면 오늘 밤 넘기기가 힘들다"는 소리 까지 나왔다.
며칠 뒤 다행히 열은 잡혔는데, 이젠 항암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항암제를 맞기 전에 다시 여러가지
검사가 진행 되었고, 1차로 항암제를 맞기 전에 다시 여러가지 검사가 진행 되었고. 1차로 항암 주사를 맞았다.
항암 주사를 맞은 뒤 다시 퇴원을 했는데, 그때부터 극심한 통증이 시작되었다.
남편은 침대 머리를 붙잡고 거꾸로 처박힌 듯한 자세로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며 괴로워 했다.
보다 못한 내가 사위를 불렀다. 사위는 몰핀 마약주사를 맞는 게 안 좋다고 했지만
그때의 내 심정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만큼 절박했다.
그대로 놔 두었다가는 그야말로 통증 때문에 죽을 것 같았다. 사위가 아침에 와서 몰핀를 놓아주는 것으로
근근히 버티고 있자니 이번엔 방사선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방사선 치료를 받은 뒤 남편의 몰골은 더 말이 아니게 되었다. 오른쪽 팔과 어깨,
허리를 펴지 못하고 오그라 붙어 있는 것이었다. 들리는 말로는 "갈빗대 하나가 녹아 없어졌다"고 했다.
그 이후 남편을 치료를 거부하다시피 했다. 주사를 놓으려고 하면 소리를 질렀고,
링거도 막 빼 버리곤 했다. 그때 주치의는 "두세 달 사실려나 모르겠다"고 했다.
남편이 치료를 못 견뎌하고, 더 이상 희망도 없는 상태라 나는 퇴원을 원했다.
집안일 하는 여자도 막상 세상을 떠나려면 정리할 게 많은데 사업하던 사람은 말해 무엇이랴.
이왕 두세 달 밖에 못 살 거라면 집에서 마지막을 준비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주치의는 이 상태로 퇴원은 안 된다고 했지만 나는 사정사정 해서 퇴원을 했다.
집으로 돌아와 뒷일을 정리하고 있던 즈음, 이런저런 수소문 끝에 친구의 소개로 ㅇㅇㅇㅇ원을 알게 되었다.
나 혼자서 결정할수는 없는 문제라 시댁의 아주버님들에게 " 아무방법이 없다고 하니 거기라도 가 보려고한다."며
의논을 했더니 그러라고 하셨다. 11월 중순 나 혼자 일단 ㅇㅇㅇㅇ원에 와서 상담을 했다.
그 동안의 검사 결과와 주치의 소견서를 써 오라고 해서 다녔던 병원에 가서 부탁을 했다. 처음엔 안써 줄려는걸
어렵게 어렵게 부탁을 해서 소견서를 받아왔다. 그뒤 C원장님을 만났더니 다행히 받아 주셨다.
그때 내가 부탁드린 것은 살려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두세달 밖에 못산다는데 조금만 더 살게 해달라는것이었다.
그렇게 그냥 보내기에는 너무 한스러웠다. 남편은 고향인 대구에서 맨손으로 서울에 올라와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회사일로 밤낮없이 뛰어다니느라 가정엔 소홀한 편이었고, 그러다보니 나는 나대로 교회 일에 정을 붙이고 살았다.
한 집안 에서 살긴 했지만 한 20년간을 대화도 별로 없이 썰렁하게 지낸 편이었다.
남편으로선 밤잠 안 자고 죽자사자 뛰어다녀 이제 좀 먹고 살 만하다 싶을때 난데없이 일격을 당한 셈이었고,
나는 나대로 가슴을 치는 게 있었다. 남편이 사업에만 몰두한다는 이유로 내 일 에만 신경을 쓰고,
제대로 돌봐주지를 못했다는 자책이었다. 개척 교회 일을 맡아 나는 참 헌신적으로 일했다.
그리고 밖에 나가면 조금이라도 남들에게 서운한 마음을 주지 않기 위해 세심한 배려를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남에겐 그렇게 하면서 정작 가장 가까운 남편을 위해선 무엇을 했던가" 싶었다.
나는 하나님께 간절한 회개의 기도를 올렸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신다면 그 동안 못했던 정성을 다 쏟겠다"고.
그리고 그 이튿날부터 철야 금식기도를 시작했다. C원장님께도 "제가 생명을 걸고 해 볼 테니까 잘 좀 보살펴 달라"고
간절히 부탁드렸다. 그후 7~8개월간을 나는 정말 생명을 거는 심정으로 살았다.
남편에게 저녁을 먹인 뒤 교회로 가서 철야기도를 드리고, 새벽에 돌아와 아침을 드린뒤
부리나케 영등포까지 버스를 타고 나가 거기서 주안행 전철을 탔다.
그렇게 ㅇㅇㅇㅇ원에 도착하면 대게 아침8시쯤이었는데 문을 열때까지 계단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문을 열자마자 제일 먼저 접수를 했다. 그리곤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 집으로 가서
남편을 데리고 ㅇㅇㅇㅇ원까지 오는 것이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와 부스스한 차림새로 병원 계단에 앉아 있을땐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볼까봐 외투를 푹 뒤짚어 쓰고 있곤 했다.
ㅇㅇㅇㅇ원에서 하라는 것은 빈틈없이 지켰다. 구해다 먹은면 좋다는 건 다 구해다 먹었고,
남편이 음식 냄새도 못 견뎌할 정도였으므로 집안도 병원보다 더 청결하게 유지했다.
솔잎이 좋다길래 뒷산에서 솔잎을 꺽어다가 침대 밑에 깔아두기도 했다.
된장, 간장도 ㅇㅇㅇㅇ원에서 권하는 소금으로 직접 담그었고, 손이 헤질 정도로 먹을거리들을 정성껏 장만했다.
ㅇㅇㅇㅇ원 오니까 처음엔 검사를 안하는 것만으로도 살것 같았다. 예전의 병원에선
수시로 혈액을 뽑아가고 온갖 검사를 해대서 그것만으로도 사람이 지칠 지경이였다.
오죽하면 인턴들이 혈액을 뽑으러 복도에 나타나면 보호자들이 "헐크 떴다" 고들 했을까.
남편은 ㅇㅇㅇㅇ원에 와서 처음 한 달간 생식을 했는데, 그 뒤 밥을 먹기 시작하면서부터
뚜렷이 차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약을 20일 간격으로 타 갔는데 두번쨰로 타 간 약을 거의 다 먹을 무렵이였으니
40일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무엇보다 통증이 줄어들었고, 도무지 산 사람의 눈 같지 않던 눈이 제자리를 찾았고,
그 이전엔 오줌도 받아냈는데 화장실도 혼자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로 놀라운 속도로 예전의 상태를 회복해 갔다.
98년 7월, ㅇㅇㅇㅇ원에 온 지 8개월 만에 원장님의 지시로 같은 시기에 암치료를 받던
다른 환자들과 함께 처음으로 엑스레이를 찍었다. 그 결과 같이 찍은 사람들 중에서도
상태가 가장 낫다는 진단이 나왔다. 그리고 그 뒤 사위 병원에 가서 다시 한번 엑스레이 촬영을 했는데
굉장히 깨끗한 상태라고 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이번에는 CT 촬영을 했다.
ㅇㅇㅇㅇ원에 올 당시에 가져왔던 CT 사진과 비교한 결과 내가 봐도 딴 사람의 사진같았다.
암세포가 있었던 흔적조차 없다고 했다.
지금 남편은 아프기 전의 상태로 완전히 회복되었다. 누가 봐도 아주 건강한 사람 같다.
사업도 열심히 하고 있다. 날이 궃으면 수술했던 자리가 아직도 아리긴 하지만
그것을 불평한다면 송구스런 일일 것이다. 워낙 깨끗하게 치료가 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집에 전화를 하거나 찾아온다. 남편을 간병하면서 내가 겪고 느낀점을 말하자면
암이란 참으로 고약한 병임에 틀림없다. 암환자들이 겪는 통증은 겪어보지 않은 상상도 할 수없는 통증이다.
남편이 그런 통증에 시달릴 때를 돌이켜 보면, 솔직히 차마 사람으로선 겪지 못할 병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찾아오면 피해갈 도리가 없다.
낫고 안 낫고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방도가 한계에 부닥치면
그 다음은 하나님께 맡기는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 조언을 청해 오면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이야기 해준다. 성경에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말씀이 있지않은가. 죽고 사는 건 하나님께 맡기고 조금더 살 수 있다면, 사는동안 통증이 없다면
그걸로 족하다는 마음을 가지는 게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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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윗글은 생존율 0% 인 말기암을 극복 하고 10년 이상 건강 하게 살아 남은 수십명 회원들의
조직체인 대한 암환우 협회 회장님 이신 배강수님의 아내 되신 분의 수기로써
저와 갑장이신 연장전님의 건투를 빌며 이자리에 올립니다
윗글의 주인공 이신 배강수님은 최근 까지도 생로병사의 비밀이나 스페셜 ,다큐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 하셔서 자연치료의 중요성을 역설 하시며 암환우들에게 많은 치료정보와 진실을
전달해 주시고 계신분 입니다
또한 윗글에 나오는 ㅇㅇㅇㅇ원은 인천의 한 한방병원 으로써
2000년대 초 KBS 에서 "K 한방병원의 진실" 이라는 특집 3부작 을 제작 하였고
그 1부 방영에서 암치료가 기존의 암3대치료요법( 수술 ,항암,방사선) 외에 또다른 치료법이 존재
한다는 이유로 의사 협회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2,3부가 예고편 까지 방영 하였으나
결국은 방영 되지 못하는 방송 사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대한 암환우 협회는 그곳에서 치료받고 말기암에서 벗어난 환우들의 조직체로써
배강수님은 그 협회의 회장님 이십니다
저희집사람은 2004년도 진행성암 2기 말 판정을 받았지만
일절 수술 항암 방사선 등 기타 병원 치료를 하지 않고 현재 일반인 보다 더욱더
건강한 생활을 누리고 있습니다
진단받을 당시
병원 치료 받지 않고 고치겠다는 일념으로 전국을 헤메던중
인천의 K 한방병원을 알게 되었고 저희도 잠시 그곳에서 치료를 받었었습니다만
다시한번 자연치료의 우수성에 확신을 가지게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은
말기란
생명력이 급속도로 무너져 가고 있는 시기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더 독한 항암제와
더 독한 정신력으로 버티라는것은 무리가 있다 생각 합니다
지금은 마음의 평정과 더불어 면역력과, 항상성, 기혈 순환에 더욱더 집중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 합니다
오구삼살방,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한순간 마인드를 바꿈으로써 이겨 내신분들이 알게 모르게
너무나도 많이 계시기 때문 입니다
반드시 이겨내실겁니다
연장전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