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6-02
현시에 있어서 나의 유일한 염원은 삼천만동포와 손목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
- 백범 김구, <삼천만 동포에 읍고(泣告)한다>에서
2008 - 시민·사회단체 ‘쇠고기수입·대운하 반대’ 100인 시국선언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최병모 변호사 등 시민.
사회단체 인사 100명은 2일 한미 쇠고기 수입과 대운하 건설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이날 오전 `이명박 정부 출범 100일에 즈음하여'라는 제목의 시국선언문을 통해 "대통령과 정부가
현 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쇠고기 재협상 등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대통령은 지난 100일 동안 비도덕적 공직자 인선, 학교 자율화, 공영방송 장악, 공공부문 민영화,
대운하 건설 사업, 쇠고기 수입 협정 등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정책들을 일방적으로 추진해왔다"며
"이것이 바로 지난 한 달 동안 시민들이 촛불을 밝혀야 했던 이유"라고 말했다.
이들은 특히 "쇠고기 수입 협상 결과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졸속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재협상을 요구하는 국민의 요구에 대통령과 정부는 변명과 거짓 해명으로 일관해왔다"며 "촛불집회는 전면적인
시민 불복종 운동"이라고 평가했다.
이들은 "대통령 취임 100일을 맞은 지금 오히려 한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음을 우려하고 있다"며
"대통령이 국민 앞에 사과하고, 쇠고기 수입 협상과 대운하 사업, 공영방송 장악 시도 등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준삼 기자 jslee@yna.co.kr (서울=연합뉴스) /한겨레 2008-06-02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91038.html
2008 - 대규모 시위 이틀째…세종로서 경찰과 대치
정치권 장외투쟁, 시민 거리시위와 '결합'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시민 2만여명(경찰 추산·주최측 추산 3만여명)이 1일 밤에도 서울 도심에서
대규모 거리시위를 벌였다.
특히 이날 통합민주당 의원 20여명이 촛불문화제에 참석한 데 이어 일부 의원들은 거리시위에도 참여하는 등
정치권의 장외투쟁과 시민 거리시위가 본격적으로 결합하는 양상을 보여 향후 사태 추이가 주목된다.
시민들은 오후 7시45분께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을 반대하는
국민대책회의'가 주최한 촛불문화제가 끝난 직후 인근 태평로 일대로 진출해 양방향 차로를 모두 점거하고
세종로 방향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이들은 `독재타도, 명박퇴진', `협상무효, 고시철회' 등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고,
세종로사거리에서 경찰이 설치한 차벽에 가로막히자 오후 8시 30분께 서대문 방면으로 한때 방향을 돌렸다가
다시 세종로사거리로 돌아왔다.
경찰은 세종로사거리 이순신장군 동상 주변에 전경버스 10여대로 차벽을 구축하고 7천여명을 동원해 시위대의 청와대
방면 진출을 막고 있으나 시민들의 적극적인 돌파 시도로 저지선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시위대는 창문이나 차문을 뜯어낸 뒤 버스 안에 들어가 시동을 걸고 차를 후진시키거나 브레이크를 풀어놓은 뒤
바퀴에 연결한 밧줄을 당기는 방식으로 버스 3대를 전후좌우로 밀어 빈틈을 조금씩 만들려 하고 있으나
오후 11시 30분 현재까지 경찰과 직접 충돌하지는 않았다.
오후 11시 54분께는 한 시위자가 전경버스 창문 유리창을 깨고 커튼에 불을 붙이는 등 돌출적인 과격행동에 나서기도 했으나
즉각 진화돼 큰 피해는 없었다.
이에 경찰은 소화기 분말을 뿌리고 조명을 비춰 시위대를 후진시킨 뒤 전경버스에 연결된 밧줄을 끊고 있다.
경찰은 전날에 이어 저지선 뒤쪽에 살수차를 준비시켜 놓고 있어 차벽이 뚫릴 경우
전날과 마찬가지로 물대포 발사 등의 물리적 충돌이 빚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태다.
이날 거리행진은 20여개 대학 학생회에서 나온 대학생 1천여명이 깃발과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서 이끌었다.
또한 정세균, 송영길 의원 등 민주당 의원 20여명이 서울광장에서 열린 촛불문화제에 끝까지 참석한 뒤
해산했지만 천정배, 조경태, 안민석, 김상희 의원 등 일부 의원들은 거리행진에도 합류했다.
앞서 시민과 대학생 등 3천여명은 대낮인 오후 4시20분께 청와대 인근 경복궁역 사거리에서
"경찰이 평화적 거리시위를 과잉진압하고 있다"고 항의하며 1시간여 경찰과 대치하다가 해산했다.
한편 서울뿐 아니라 부산, 광주, 대전, 청주 등 전국 곳곳에서 시민들의 거리 시위와 촛불문화제가 열렸으나
별다른 충돌 없이 모두 종료됐다.
전날인 31일 밤부터 1일 오전까지 계속된 주말 거리시위에서는 4만명(경찰 추산.
주최측 추산 10만여명)이 참여했으며 해산되는 과정에서 경찰의 물대포 사용 등으로 60여명이 다치고 228명이 연행됐다.
(서울=연합뉴스) /한겨레 2008-06-02
http://www.hani.co.kr/arti/ISSUE/40/291020.html
2008 - 이틀째 대규모 거리시위 강제해산…70여명 연행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9일째 `촛불 거리시위'가 2일 오전 4시30분께 경찰의
강제 해산 작전으로 9시간여만에 마무리됐다.
경찰은 지난달 31일부터 1일 아침에 걸쳐 거리시위자 228명(3명 훈방)을 연행한 데 이어 대규모 거리시위
이틀째인 1일 밤부터 2일 새벽까지 진압 과정에서 70여명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등 혐의로 현장에서 체포했다.
전날 오후 7시45분께 서울광장에서 촛불문화제를 마치고 태평로 일대로 쏟아져나온 시민 2만여명(경찰추산·주최측
추산 3만여명)은 세종로사거리 이순신장군 동상 앞에서 청와대 방면 진출을 막는 경찰과 대치하며 밤샘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경찰이 행진을 저지하기 위해 세종로 차도에 주차해 둔 전경버스 약 20대 중 4대를 밀어냈으나
차벽을 뚫고 나가는 데는 실패했다.
대치 5시간만인 2일 오전 0시45분께 경찰은 대규모 경력을 투입하고 분말소화기 등을 뿌리면서 세종로 일대
차로에 남아있던 시위대 3천여명을 좌우측 인도와 서울광장 방면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해 오전 4시30분께 작전을 완료하고
차량 소통을 재개시켰다.
전날 시위 진압 과정에서 `물대포'를 쏘고 경찰특공대까지 투입했던 경찰은 이날은 물대포 사용 등은
자제했지만 일부 시민들이 방패에 맞거나 밀려 넘어져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경찰의 강제 해산으로 차로에서 밀려난 시위대는 그대로 귀가하지 않고 서울광장과 인근 인도,
횡단보도 등에서 마무리 집회를 벌였다.
(서울=연합뉴스) /한겨레 2008-06-02 오전 05:32:26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91025.html
그간의 역사연구에 관한 저작을 모아 `한국사학 논집`을 펴낸 원로 국사학자 이기백박사.
2004 - 국사학계 1세대 사학자 이기백 교수 별세
우리나라의 대표적 사학자며 ‘한국사신론’의 저자인 이기백 서강대 명예교수가 2일 오전 5시45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이 교수는 광복 후 교육받은 국사학계의 제1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평북 정주 출생인 이 교수는 일본 와세다 대학을 거쳐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이화여대·서강대·한림대
교수와 역사학회·진단학회 대표간사를 역임했고, 1979년 학술원 회원으로 선임됐다.
그는 우리 역사를 쉽게 소개하는 많은 글을 쓰면서 역사의 대중화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이 교수는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한국에 가장 시급했던 ‘식민사관(植民史觀)’의 극복에 앞장섰다.
그는 한민족이 파벌성·의존성 등을 특성으로 하며 이는 반도라는 지리적 조건에서 비롯됐다는
일본인 학자들의 이론을 비판하고 우리 역사가 내재적 발전 과정을 거쳐 왔음을 밝혔다.
이 교수를 유명 인사로 만든 것은 1961년 간행된 ‘국사신론’이었다. 당시까지의 연구 성과를 충실히 반영하면서
민족적인 자주성을 강조하는 이 책은 우리 역사에 대한 이해에 목말라하던 대중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1967년 ‘한국사신론’으로 이름을 바꾼 이 저서는 계속적인 증보를 거치며 60만부 가까이 판매됐고,
각국 언어로 번역돼 국제적으로도 대표적인 한국사 개설서 역할을 했다.
우리측 해군 대잠수함 초계기인 P-3C가 울산 동남쪽 47㎞
해상에서 찍은 북한 상선 청진2호의 모습.
2001 - 북한 상선 3척, 제주도 해협 침범
2001년 6월 2일 북한 상선 3척이 제주도 해협 우리측 영해를 침범, 항해하다 다음날 3일 오후 서-남해 공해상으로
빠져나간 사건이 발생했다. 북한 선박의 제주도 해협 무단 통과는 이 때가 처음이다.
군당국의 지나치게 유화적인 대응에 북한 상선들은 4일에도 해상 휴전선이나 다름없는 서해안
백령도 인근 NLL(북방한계선)과 제주해협, 심지어 동해안 독도 영해까지 잇달아 침범을 시도했다.
군당국은 독도에 한해 해경정이 진로를 차단, 영해 침범을 저지했으나 나머지 서-남해안에서는 침범 행위를 묵인했다.
정부는 북한 선박이 사전 협의없이 영해를 침범할 경우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3일 밝힌 바 있었으나
연이은 영해침범에도 경고사격이나 나포 등 강경조치를 취하지 않아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북한측의 동시다발적인 영해 침범은 1953년 정전협정 이후 유례없는 일이며, 남북 해빙무드를 틈탄 고도의
정치적 군사적 의도가 포함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단순히 수송비와 시간을 절감하려는 경제적 실리확보
목적이라기보다 김대중 정부와 미국의 부시정권에 대한 간접적인 불만표시가 담겨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국회에서는 군당국의 소극적인 대응자세를 추궁하고 대책강구를 촉구했다. 특히 국회에서 공개된 남북간의
교신내용을 근거로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는 밀약설도 제기돼 2001년 정가를 시끄럽게 달구었다.
1997 - 서울지법, 정태수 전 한보그룹 총회장에 15년 선고
1997 - 여, 야 국회의원 `6.10 동지회` 결성
1997 - 미국 연방배심, 오클라호마 폭파범 맥베이에 유죄 판결
1994 - 병원, 의원 등에 환자진료기록, 처방전의 한글사용 의무화
1994 - 뉴욕 소더비경매장에서 고려불화 2억4,000만원에 낙찰
1993 - 제1차 북한-미국 고위급회담
해군 잠수함 장보고함
1993 - 잠수함 장보고함 취역
해군은 1993년 6월 2일 진해항 기지에서 국방부장관, 해군참모총장 등 군수뇌부와 장병들이 참석한 가운데
해군 최초의 잠수함인 장보고함 취역식을 가졌다.
장보고함은 독일에서 건조된 1천2백t급 209형 현대식 잠수함으로 평균속력 22노트로 수중을 항해하면서
대함미사일과 어뢰를 발사할 수 있는 최첨단 지휘통제 및 사격통제 체제를 탑재하고 있다.
독일 HDW사로부터 1천5백억원을 주고 인수한 장보고함은 전자수행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한번에 최고 7천5백마일을 항행할 수 있다. 장교 6명을 포함, 모두 33명의 승무원이 탑승하는
장보고함의 초대 함장에는 안병구 대령이 임명됐다. -조선
1991 - 프랑스 핵확산금지조약 가입
1991 - 방글라데시에 시속 100km급 태풍 강타, 사상자 수백병 발생
1990 - 제주신문노보 `제민일보` 창간
1989 - 김영삼 민주당 총재, 한국정치지도자로는 처음 소련 방문
1988 - 에너지 연구소, 방사능폐기물 잘못 보관해 방사능 유출, 토양 오염됨
1988 - 남극조약 가입 33개 나라, 남극광물조약에 가입
1986 - 제13회 월드컵 멕시코서 개막 -
1986년 5월 31일 멕시코의 아즈텍 경기장에서 개막된 월드컵에는 축구 강호 24개국이 모습을 드러냈다.
66년 북한이 이룩한 8강신화를 창조하려는 한국팀은 대회 최강으로 지목되는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와 한조가되어 있었다.
서독 프로리그에서 활약중인 차범근까지 끌어들인 한국대표팀은 아르헨티나에게 3대1로 패하며
반칙만이 난무하는 팀이라는 혹평을 받는다.
불가리아와 무승부를 기록하며 이탈리아와의 한판에 목숨을 건 대표팀은 최순호의 동점골과 허정무의 추격골로 최선을 다했지만 세계의 장벽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경기방식이 조정 되어진 이번 대회는 이전에 2차 리그로
4강을 뽑던 방식을 버리고 16개국을 뽑아 토너먼트를 벌이는 방식으로 조정이 되었다.
4강을 가리는 4경기 중 3경기가 승부차기로 갈만큼 접전이었던 이 대회에서 아르헨티나는 축구의 신동이라는
걸죽한 스타를 탄생시킴으로 월드컵에 한발자국 다가서게 된다.
신의 손이라는 논쟁을 불러일으킨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문제의 골 이후 3분 뒤 미드필드에서 단독드리블로
수비수 5명과 골키퍼마저 제치고 성공시킨 마라도나는 이 대회의 영웅으로 추대를 받게 된다.
프랑스와 벨기에를 각각 2대 0으로 물리친 서독과 아르헨티나는 결승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지만
마라도나의 2어시스트로 서독을 물리치게 된다. 가난한 아르헨티나의 감격적인 우승이었다.
/KBS 영상실록 worldcup.kbs.co.kr -Google
1986 - 교수연합시국선언문 발표(23개대 2백65명)
1986 - 원자력발전소 5.6호기 준공
1982 - 파나마정부, 북한 외교관 5명 추방
1982 - 영국군, 포트스탠리 공격 개시
1981 - 효창공원, 9년만에 일반 공개 /
1981 - 스리랑카, 비상사태 선포
1980 - 전두환 중정부장 서리 사표. 국군보안사령관-국보위상임위원장만 겸임
1980 - 장기신용은행 개점
1980 - 일본 교토통신 서울지국 폐쇄
1979 - 교황 요한 바오로2세. 폴란드 방문
1979 - 교황 바오로 2세, 고국 폴란드 방문(1979)
1979년 오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공산국가인 조국 폴란드를 방문한다.
그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 도착하자 거리로 나온 수백만 명의 국민들이 찬송가를 부르거나 기도를 하며 열광적으로 환영한다.
교황은 폴란드 국민들의 신앙심이 더 굳건해지기를 기원했다.
바오로 2세는 9일 동안의 방문 기간에 젊은이들과 어울려 민요를 부르는 등 폴란드 국민에게 친근한 교황으로서 인상을 남겼다.
그의 방문은 폴란드 국민의 자유에 대한 갈증을 분출시켜 14개월 후 폴란드 자유노조 운동의 탄생을 가져왔다. /YTN
1978 - 제11회 아르헨티나 월드컵 축구대회 폐막
홈팀인 아르헨티나가 네덜란드를 꺾고 우승
1978 - 한국 최초의 우주인(우주비행 참가자) 이소연(李素姸) 출생
이소연 [李素姸, 1978.6.2~ ]
이소연(李素姸, 1978년 6월 2일/음력 4월 27일 ~ )은 대한민국의 연구자로, 2008년 4월, 대한민국 최초로 우주 비행 참가자(Space Flight Participant)로서 국제 우주 정거장에서 11일간 체류하였다. 전 세계적으로는 475번째, 여성으로서는 49번째 우주인이며, 역대 3번째로 나이가 적은 여성우주인이다. 아울러, 2명의 아시아계 미국인을 포함하여 4번째 아시아 여성우주인이기도 하다.
약력
광주광역시 출신으로, 아버지 이길수씨와 어머니 정금순씨의 1남 2녀 중에 첫째이다. 광주과학고등학교, 한국과학기술원(KAIST) 기계공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2008년 3월에는 바이오시스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우주 여행
대한민국 과학기술부(현 교육과학기술부)가 2000년 12월 러시아와 공동으로 우주여행자 양성계획을 수립하고, 2006년 4월에 우주여행자 모집공고를 한 이래, 전체 지원자 3만 6206명중 고산과 함께 최종후보 2인으로 선발되었다. 두 사람은 2007년 3월부터 모스크바 북동쪽 근교의 스타 시티에 위치하는 유리 가가린 우주인 훈련센터(GCTC)에서 우주적응과 우주과학 실험수행을 위한 기초 훈련을 받았다.
2007년 9월 5일 고산이 우주 비행 참가자로 선정, 이소연은 고산이 만일의 문제로 탑승할 수 없을 경우를 대비 예비 우주 비행 참가자로 선정되었으나, 2008년 3월, 고산의 관련 보안 규정 위반으로 인해 이소연이 우주 비행 참가자, 고산이 예비 우주 비행 참가자로 변경되었다.
ISS에서는 9박 10일간 머물면서 18가지 우주과학 실험 등의 우주임무를 수행하고, 한국시각 4월 19일 오후 2시 6분 30초에 기존에 머물고 있던 엑스퍼디션 16의 공식 크루멤버였던 러시아의 유리 말렌첸코, 미국의 페기 윗슨과 함께 소유스 TMA-11로 갈아타고 도킹을 풀었고, 한국시각으로 오후 5시 28분경 예상착륙지점에서 420km 떨어진 카자흐스탄 국경 부근의 오르스크시 남동쪽 초원지대에 착륙, 귀환하였다. /위키백과
1970년 6월 2일 오전 11시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금산 위성통신지구국이 개통됐다.
1970 - 금산 위성통신지구국이 개국하다. /위키백과
1970 - 금산 위성통신지국 개국(1970)
충청남도 금산 위성통신 지구국이 1970년 오늘 개국했다.
지구궤도에 떠 있는 통신위성과 전파를 송수신함으로써 한국과 외국 사이의 통신과 텔레비전 중계가 가능해졌다.
우리 나라는 금산 위성지구국 개국 3년 전인 1967년 2월 인텔셋(INTELSAT), 즉 국제전기통신위성기구에 가입했었다.
금산지구국은 미국, 대만, 홍콩, 필리핀 등 태평양 연안 4개 나라와 국제전신·전화, 컬러 텔레비전 방송을 교신했다.
1977년 9월에는 금산에 제2지구국이 개국하고 1983년 10월에는 AFKN이 이동용 위성이,
1985년 2월에 충청북도 보은 제4지구국이 개통됐다.
이에 따라 텔레비전 위성중계 방송량도 해를 거듭 할수록 꾸준히 늘어났다.
특히 1984년 LA올림픽 중계와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을 계기로 우리 나라의 위성중계를 활용한 방송 송수신이 대폭 증가했다.
금산 제1지구국 개국 당시에는 위성통신 회선이 22개에 불과했지만 요즘은 천백 개가 운용되고 있다.
1970 - 금산 위성통신지구국 개국
우리나라 최초의 위성지구국인 금산 제1위성통신지구국이 1970년 6월 2일 충청남도 금산에서 개국됐다.
높이 35m의 콘크리트지주 위에 세운 직경 27m의 원형안테나와 부속시설은 체신부가 1969년 5월 총공사비 1
8억 4천만원을 들여 착공, 1년 만에 완공한 것이었다.
이 지구국을 통해 태평양지역 통신위성 인텔새트(INTELSAT)Ⅲ호에 접속하여 태평양 연안 7개 국가간 136회선의 국제통신망이 구축됐다. 세계에서 31번째로 국제통신위성기구 가입국이 된 우리나라는 이로써 태평양상에 떠있는 통신위성 인텔새트Ⅲ호, F-4의 중계로 전세계에 전파를 보낼 수 있게 되었고, 또 바다건너 한 구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안방에서 듣고 볼 수 있게 됐다.
금산위성통신지구국 개국 후 우리나라의 국제통신은 경제성장에 발맞춰 빠른 속도로 성장, TV뿐 아니라 태평양연안과의 직통전화 회선도 늘고 빨라지게 됐다.
1977년 9월에는 인텔샛 인도양 위성용 금산2국이 개통되어 서유럽 아프리카 중동 동남아에도 국제회선을 공급함으로써 서비스와 운용상의 문제점을 해결하여 균형을 갖춘 국제통신망 발전을 도모했다.
국제위성통신망은 국가 경제활동의 필수적인 국제통신 서비스는 물론 지구촌 곳곳에서 개최되는 각종 국제행사 및 해외 현지 스포츠의 위성TV 생중계 시대를 여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70 - 금산 위성통신지구국 개통
6월 2일 금산에 위성 통신 지구국이 완공, 개통됨으로써 우리 나라도 우주통신의 대열에 끼이게 되었다. 보유 국가순으로는 31번째, 지구국 개통순위로는 45번째였다. 내외자 18억원을 들여 완공된 이 위성지구국은 태평양상공의 미국통신이 위성 인터세트 3호를 통해 미국을 비록 홍콩, 필리핀, 중국, 그리고 월남까지 통신상대국으로 삼고 있다. 시설 용량은 음성 통화 60회선, TV 1회선이나 현재는 음성 22회선, TV 1회선을 사용하고 있다. 이 위성통신방식은 재래의 국제통신에서 받는 자연현상의 영향을 전연 받지 않기 때문이나, TV화면은 오히려 국내보다 선명하며 아무 장애 없이 안전하고 명랑한 대화를 할 수 있다. parkchunghee.or.kr /Google
1970 - 금산 위성통신지구국 개국
"현재 세계각국의 국제통신은 대체로 단파 무선과 해저케이블에 의존하고 있으나 이들은 여러가지 애로와 불편한 점이 있어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국제통신 방식으로 위성을 이용하기에 이르렀다.
1964년 8월 미국을 비롯한 11개국이 워싱턴에서 통신위성 사용을 위한 잠정조치에 관한 협정 및 특별협정을 체결하고 국제통신위성기구(INTELSAT)를 설치하였다.
INTELSAT는 위성에 의한 세계통신망을 구성하기 위하여 최초의 상업통신위성인 Early Bird를 미국에서 1965년 4월 대서양 상공에서 발사하여 미주와 유럽 대륙간의 위성을 통한 통신 소통을 가능하게 하였다.
우리나라는 1967년 2월 24일 INTELSAT에 56번째로 가입하고 위성통신 지구국 건설을 위하여 68년도에 미국 수출입은행 및 필코포오드 회사간에 차관 협정이 체결되어 충남 금산에 대지 11,511평, 건평 1,011평의 시설을 내외자 18억원으로 착공하여 카세그레인형 안테나를 기초탑에 마지막으로 건립함으로써 완공되어 운용시험을 거쳐 6월 2일에 개통한다.
이 지구국은 1969년 5월 발사되어 태평양 상공 동경 174도의 적도 위에 정지한 INTELSAT Ⅲ호 F4와 연결, 미국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과는 직통으로, 기타 지역은 미국과 홍콩을 중계로 교신하게 되어, 전신, 전화, 테렉스 및 사진전송은 물론 TV중계까지 할수있게 된다.
우리나라는 이로써 선진 우방과 문화교류, 유대강화 등 상호 협력으로 지역적인 간격을더욱 좁혀 자유진영의 국제적 결속에도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체신부에서는 이와같이 국제통신 업무의 일대혁신을 가져올 통신위성 금산지구국의 개통을 온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자 하는 뜻에서 기념우표를 발행한다." www.kstamp.go.kr /Google
1970 - <오적> 필화사건, 필자 김지하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
1970 - '오적' 파문으로 시인 김지하 구속
1970 - `五賊` 파문 - 김지하 구속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 시도로 정치·사회적인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1970년, 잡지 ‘사상계’에 세상을 들끓게 한 시(詩) 한 편이 발표됐다.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것다. /(중략) 예가 바로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라 이름하는/ 간뗑이 부어 남산만 하고 목질기가 동탁 배꼽 같은 천하흉포 오적의 소굴이렷다. ”
김지하의 담시(譚詩) ‘오적(五賊)’이었다.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은 사상계 편집위원 김승균이었다. 그는 평소 알고 지내던 김지하에게 오적촌이라 불리던 동·서빙고동에 관한 장시를 청탁했고 김지하는 당대의 힘 있고 끗발 있는 사람들을 ‘오적’으로 한데 묶어 그들의 부패와 타락상을 풍자적으로 시에 담았다.
이것이 사회적 사건으로 비화된 것은 야당인 신민당이 기관지 ‘민주전선’ 6월 1일자에 ‘오적’을 싣고부터였다. 이튿날 민주전선은 압수됐고 김지하는 김승균, 사상계 대표 부완혁, 민주전선 편집국장 김용성과 함께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됐다. 사상계는 이 사건이 빌미가 돼 그해 9월 폐간되고 김지하 등 관련자들은 보석으로 풀려나 2년 뒤 선고유예를 받았다. /조선
1970 - 오적필화사건으로 김지하 등 구속
1970년 6월 2일 담시 <오적>에 대한 반공법 위반혐의로 시인 김지하, <사상계> 발행인 부완혁, 편집장 김승균 등이 구속되었다. <오적>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체제에 맞서 활동하던 김지하가 당시 부정부패의 주범들을 '오적'이라 규정하고 이들의 행태를 통쾌하게 풍자한 시이다. 원래 <사상계> 5월호에 발표되었으나 신민당 기관지인 <민주전선>에 다시 게재되면서 정치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김지하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이후 당대 정치·사회 문제를 풍자한 시를 계속 발표하다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긴급조치 4호 위반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소식이 세계에 알려지자 사르트르·보부아르 등 유명작가들이 김지하 석방을 요구하는 호소문에 서명해 김지하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될 수 있었다. /브리태니커
1970 - 미 F4팬텀기 2개 대대 군산에 도착
1967 - 이스라엘-시리아 교전
서베이어1호
1966 - 미국 무인우주선 서베이어 1호, 처음으로 달착륙 성공
1966 - 미국 무인탐사기 `서베이어 1호` 달 착륙
1966년 6월 2일 오전2시17분. 인간의 달 착륙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할 목적으로 쏘아 올린 미국의 무인탐사기 `서베이어1호`가 달의 `폭풍의 바다` 연착륙에 성공했다. 서베이어 1호는 레이다, 컴퓨터, 4기의 로켓을 사용해 세다리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서베이어 1호` 의 달 착륙은 1970년까지 달에 인간을 보내려는 미국 계획에 있어 의미있는 성과였다. `서베이어 1호` 의 달착륙 성공후 360도로 사진을 촬영할 수 있는 TV카메라가 12일간에 걸쳐 1만매 이상의 사진을 보내왔다. 화질도 매우 선명해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이 사진을 통해 폭풍의 바다가 아폴로 달착륙선의 착륙후보지로 적격이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착륙 후에는 600개의 주사선(走査線)의 텔레비전으로 주변의 풍경과 X선ㆍ화학분석ㆍ유성진(流星塵) 등의 측정자료를 송신했다.
이로써 달에 인간이 착륙할 수 있는 안전성이 입증되었고 그로부터 3년 후 1969년 7월 21일. 아폴로 11호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달착륙에 성공, 인간이 달에 첫발을 내디뎠다. /조선
1964 - 서울대 고대생 등 2천여명 박정희 대통령 하야 요구하며 데모
1963 - 인천 화약공장 폭발사고 9명 사망
1963 - 사우디아라비아, 노예제 폐지
1961 - 라틴아메리카(남미)자유무역위원회(LAFTA) 발족
1959 - 국제언론인협회(IPI) 한국가입을 정식거부
1959 - 싱가포르, 자치국 선언
1959.05.31 싱가포르 제1회 총선거
1959.06.03 자치국 독립선언
1959.06.05 이광요 내각 성립
1955 - 국회. 국방부원면사건조위 구성
소련공산당 서기장 흐루시초프.
1955 - 소련-유고 국교정상화 선언, 유고의 독자 노선 인정
1955 - 유고-소련 평화조약 체결(1955)
1955년 오늘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
이 나라의 티토 대통령과 흐루시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이른바 ’베오그라드 선언’이라 불리는 평화협정을 체결한다.
소련은 이 협정으로 유고의 독자노선을 인정하기로 한다.
이로써 냉랭한 관계를 유지하던 두 나라의 관계가 정상화하는 기미를 보인다.
1955 - 소련-유고 정상 공동성명(베오그라드 선언)
1955년 5월 26일 소련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베오그라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티토와 악수를 나누고 레닌의 이름으로 국제 노동자 운동을 위해 화해할 것을 요청했다. 독자노선을 취하고 있는 티토에 대한 소련의 이같은 태도변화에는 양국의 관계단절 이후 7년이 소요됐다.
소련수상 니콜라이 불가닌을 포함한 고위대표단을 대동한 흐루시초프는 1948년 공산권에서 축출된 유고에 이념적인 협력을 요청했다. 또한 과거 유고에 취했던 도발적인 태도에 대해 사과하고 이를 1953년 처형된 전 소련 내무장관 라프렌티 베리아의 음모로 돌렸다.
6월 2일 소련의 흐루시초프 수상과 유고의 티토 대통령은 양국화해의 베오그라드선언을 발표했다. 선언은 1.유고슬라비아는 중국의 대만에 대한 영토권 주장을 지지한다. 2.유고와 소련은 독일문제의 해결을 지지하며 이 해결은 독일 인민의 소원 및 일반안전보장에 대한 기여와 일치하는 민주주의적 원칙하에 이루어져야 한다. 3.양국 정부는 조약체결을 통하여 독립된 구주집단안보기구를 지지한다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조선
1953 -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이 처음으로 TV에 중계되다.
1953 -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대관식(1953)
1953년 오늘,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대성당!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성대한 대관식이 거행된다.
이때 여왕의 나이 27살!
1952년 2월 아버지 조지 6세의 급서로 왕위를 계승한 지 1년 4개월 만에 대관식을 치르게 됐다.
대관식은 캔터베리대주교가 기도를 한 뒤 의자에 앉은 여왕의 머리와 손바닥에 스푼으로 성유를 붓는 순서로 진행됐다.
엘리자베스 2세는 역대 영국 왕 가운데 대영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엘리자베스 1세에 이어 국민에게 가장 큰 신뢰를 받는 왕으로 평가되고 있다.
1953 -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
1953년 6월 2일,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이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됐다. 캔터베리 대주교가 여왕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주는 순간, 런던 시내 모든 교회에서는 타종소리가 울려퍼졌다. 식이 끝나고 버킹엄궁으로 향하는 여왕의 세계마차 행렬은 3km 이상이나 늘어졌다.
엘리자베스는 원래 왕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태어난 1926년 당시의 왕은 할아버지 조지5세였고, 여왕의 아버지 조지6세는 5남1녀 가운데 둘째였다. 따라서 큰아버지 에드워드 8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미국 출신의 심프슨 부인에게 빠져 왕위를 내놓고 윈저공으로 물러나면서 그 자리를 여왕의 아버지가 대신했다. 아버지마저 1952년 2월 7일 암으로 사망하자 스물여섯 나이에 왕위에 오른 것.
올해로 재위 기간 52년째. 윈스턴 처칠로부터 현재의 토니 블레어에 이르기까지 10명의 총리가 그를 보필해왔다. /조선
1953 -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 거행
1953년 6월 2일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에서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엘리자베스 2세는 에드워드 8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조지 6세의 큰딸로 태어났다. 1947년 엘리자베스 공주는 영국 해군 중위 필립 마운트배튼과 결혼해 큰아들 찰스 왕자를 낳았다. 1951년 여름부터 아버지 조지 6세의 건강이 악화되자 여러 국가행사에 참여해 아버지를 대행하다가, 1952년 2월 6일 조지 6세가 사망함으로써 왕위를 넘겨받게 되었다. 그녀는 왕실 가정생활의 텔레비전 중계를 처음으로 허용했으며 여동생 마거릿 로즈 공주의 파혼을 묵인하기도 했다. 또한 검소한 궁중생활을 선호하며 신중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브리태니커
1952 - 실용주의의 선구자인 미국의 철학자 존 듀이 사망
1950 - 한국-일본 무역협정 조인
성라자로마을 입구에 서 있는 故 이경재 신부.
1950 - 나환우(癩患友) 시설 `성라자로 마을` 설립
천주교의 대표적인 나환우(癩患友) 시설인 성라자로마을이 1950년 6월 2일 설립됐다. 이날 미국 메리놀교회
선교사인 조지 캐롤 안 주교가 사회로부터 따돌림받는 나환우들을 위해 만든 성라자로마을은
여러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세계적인 나환우 복지시설로 자리를 잡았다.
설립후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꾸준히 활동을 계속하던 성라자로마을이 본격적으로 도약기에 들어선 것은 1970년. 故 이경재 신부가 제7대 원장으로 부임하면서부터였다.
1952년 3월부터 2년간 초대원장을 역임한 후 미국으로 갔던 이 신부가 재부임해 만든 `라자로돕기회`는 회원 2만명의 큰 조직으로 성장하며 이 신부를 후원했다. 경기도 의왕시 오전동 모락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성라자로마을에는 2000년 5월 현재 나환우 110명과 치유된 자립정착민 200여명이 26명의 수녀-직원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조선
1949 - 브라질, 대한민국 승인
1948 - 미국 하원, 한국 구제안(1억7백만달러 지출) 가결
1946 - 부산서 콜레라 창궐, 전국에 만연 - 9월말까지 1만 천여명 사망
1946 - 콜레라 창궐(1946)
해방 이듬해인 1946년 6월 초순 남한에서 콜레라의 기세가 극에 달한다.
한 달 전인 5월 2일 중국에서 부산으로 귀환한 동포들로부터 퍼지기 시작한 콜레라가 순식간에 전국으로 확산됐다.
특히 6월로 들어서 날씨가 더워지면서 환자 수가 급속하게 늘어났다.
각급 학교는 휴교에 들어가고 주민들은 예방주사를 맞은 증명서가 없으면 외출도 금지당했다.
8월까지 전국에서 만5천6백여 명이 콜레라에 걸려 이 가운데 만백여 명이 숨졌다.
1946 - 프랑스, 국민투표에 의해 왕제 폐지. 공화제 실시 결정
1946 - 이탈리아가 국민투표를 거쳐 왕국에서 공화국으로 체제를 바꾸다.
1946 - 이탈리아, 국민투표로 군왕제 폐지 결정
1944 - 프랑스 국민해방위원회가 프랑스공화국 임시정부로 개칭
1942 - 미국-중국 무기대여협정 조인
1940 - 그리스의 국왕 콘스탄티노스 2세(Constantinos Ⅱ, 1940~ ) 출생
1940 - 사탕배급제 실시
1937 -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무기정간되었던 동아일보 복간 /tgedu
1933 - 충무공 영정 봉안, 제승당 중건 낙성 /tgedu
1593년 8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를 제수받아 한산도에 통제영 본영을 설치했을 때 지금의 제승당 자리에 막료 장수들과 작전 회의를 하는 운주당(運籌堂)을 세웠다.
정유재란때 폐허가 된 이곳에 제 107대 통제사 조경(趙儆)이 1740년 유허비(遺墟碑)를 세우면서 운주당 옛터에 다시 집을 짓고 제승당이라 이름했는데,지금 걸려 있는 "制勝堂" 현판은 제 107대 통제사 조경이 쓴 글씨이다.
1976년 지금의 제승당과 충무사, 한산정, 수루 등을 새로 짓고 경내를 정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학생들 수학여행 코스로 각광받고 있는 사적지이다. 통영시청 관광과 055-650-4623 /한국관광공사 www.visitkorea.or.kr /Google
1923 - 김규식 등 창조파, 중국 상해에서 조선공화국 수립
1909 - 대한민보 창간
1909 - 오세창, '대한민보' 창간
1909 - 대한민보 창간, 시사만화 첫 등장 /tgedu
1906 - 한성농공은행 개업
1905 -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러시아-일본 전쟁 강화 권고
1898 - 동학 2대교주 최시형 처형 (양력 7월20일)
1882 - 이탈리아 통일운동가 주제페 가리발디 사망
1878 - 독일 황제 암살 미수 사건. 비스마르크 재상 탄압 강화
1875 - 벨, 전화기 발명 /동아사이언스
1875.04.06 벨, 다중 전신에 관한 특허 신청
1876.02.14 벨, 전화기 발명특허 신청
1876.03.10 벨, 전화기 실험 성공
1857 - `위풍당당한 진영`을 작곡한 영국의 엘가 출생
영국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토머스 하디(1840~1928).
1840 - 영국 시인, 소설가 하디(Hardy, Thomas) 출생
1840 - 영국 작가 토마스 하디 출생
하디 [Hardy, Thomas, 1840.6.2~1928.1.11]
1840년 6월 2일 `테스` 의 저자 토마스 하디가 잉글랜드 도싯주 어퍼보컴프턴에서 석공(石工)의 아들로 태어났다.
1862년 런던의 건축사무소에 입사, 건축공부를 하는 여가에 소설을 쓴 것이 당시 문단의 대가 G.메레디스에게 인정받게 되어
그의 권고로 처녀장편 `최후의 수단` (1871)을 간행했다.
그의 소설의 대표작으로는 `귀향`(1878) `캐스터브리지의 시장`(1886) `테스` (1891) `미천한 사람 주드` (1895) 등이 있지만,
그 밖에도 많은 장 ·단편 소설을 남겼다.
이들 작품 거의 모두는 그가 태어나 소설가로 대성한 후에도 계속 살았던 웨식스 지방을 무대로 했다.
그러나 지명은 모두 가공의 이름인데, 예를 들어 `캐스터브리지`시(市)는 작자가 살고 있던 도체스터시이다.
이렇듯 한정된 지역을 무대로 삼으면서도 그의 작품은 지방색만을 내세운 문학이 아니었다. 인간의 의지와
그것을 비극적으로 짓밟아 뭉개는 운명과의 상극을 테마로 한 비극으로,
그리스 비극ㆍ셰익스피어 비극과도 비교할 만하다고 할 수 있다.
1910년 그는 메리크훈장을 받았으며 1912년에 상처하고, 2년 후 조수로 있던 여성과 재혼,
그의 만년은 영국 문단의 원로로 자타가 공인하는 존재가 되었다. 사후에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시인 코너` 에 묻혔는데, 그의 심장만은 고인의 유지에 따라 고향에 있는 부인의 무덤 옆에 묻혔다. -조선
1840 - 영국 작가 토마스 하디 출생
하디는 후기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영국의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영국 남서부 도싯 지방에서 석공의 아들로 태어나
중등교육을 마친 뒤 건축가의 제자가 되었다. 도체스터와 런던에서 주로 교회나 사제관을 설계하고 복원하는 건축가들을
도와 일하면서 폭넓은 독서와 함께 시를 썼다. 30세를 전후해 소설을 쓰기 시작해 <광란의 무리를 떠나서 Far from the Madding Crowd>(1874)로 처음 호평을 받았다. 이후 창작에 전념한 그는 영국 남서부 지방을 배경으로 한 <귀향 The Return of the Native>(1878)·<캐스터브리지의 시장 The Mayor of Casterbridge>(1886)·<테스 Tess of the D'Urbervilles>(1891)·
<미천한 사람 주드 Jude the Obscure>(1895) 등 이른바 '웨식스 소설'들을 발표했다. 중년에 접어들면서는 다윈의 진화론 및
뉴턴의 물리학에 근거한 결정론에 지배되는 비관적 세계를 그렸다. 또한 그는 소설 속에 주어진 운명에 헛되이 저항하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인물들을 많이 등장시켜 엄격한 도덕 관습을 요구하는 빅토리아 시대에 큰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후 그는 <미천한 사람 주드>를 끝으로 소설에서 손을 떼고 시를 쓰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항상 소설보다 시를 더 중요하게
여겼던 그는 이전부터 써온 시들을 모아 <웨식스 시집 Wessex Poems>(1898)을 발표했고,
이후에는 <과거와 현재 시집 Poems of the Past and Present>(1901), 장편 시극 <패왕 The Dynasts>(1903~08), <타이태닉호의 침몰 The Convergence of the Twain>(1912) 등 많은 시집을 냈다. /브리태니커
"비관주의란 간단히 말해 일종의 게임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더 잃을 것이 없고 오히려 뭔가를 얻을 수 있으므로 결코 손해볼 것이 없는 인생관이다. 최악의 상황에서 무엇을 할지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좀더 나은 상황이 닥쳤을 때 산다는 것이 어린애 장난처럼 느껴질 것이다."
- 토머스 하디
1835 - 교황 피우스 10세(Pius Ⅹ, Saint, 1835~1914) 출생
1815 - 나폴레옹, 자유헌법 선포
1778 - 프랑스 사상가 룻소 세상 떠남
1740 - '사디즘' 프랑스 소설가 사드 출생
1740 - `새디즘`이란 용어를 낳은 프랑스의 작가 사드 출생
1592 - 이순신장군, 당포서 왜선 20여척 대파
1592 - 이순신 장군 당포해전 승리
1592 - (조선 선조 25) 이순신, 당포 해전에서 적선 21척 격파
1434 - 조선조 세종때 중신 정초 사망
455 - 반달 족이 로마를 약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