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지성에서 강의한 내용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강사인 이재형님의 글입니다.>
1. 시민의 불복종과 공산당 선언
제가 늘 듣는 라디오 음악프로그램 코너에 커플송이라는 코너가 있어요.
두 음악은 따로 들을 때보다는 같이 들으면 그 의미나 느낌을 더 잘 느낄 수 있는 음악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책이나 글도 그런 게 있어요.
비슷한 주제를 다룬 글인데, 글쓴 사람에 따라 보는 눈이 조금씩 다르고, 그 이후에 나타나는 영향도 다른 글이 그런 글일 겁니다.
시민의 불복종과 짝이 되는 글은 ‘공산당 선언’이라고 생각해요.
두 글은 거의 같은 시기에 쓰여졌고, 글의 분량도 비슷하고, 문제 의식도 상당히 비슷한데, 그 글을 읽고 나타나는 현상은 차이가 드러납니다.
공산당 선언은 워낙 유명한 글이라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공산당 선언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기초해서 1848년 런던에서 열린 대회에서 채택한 선언입니다.
당연히 조직 활동의 미래를 담고 있고, 이 내용은 이후 사회주의 국가 대부분에서 현실화하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민의 불복종은 노예제와 멕시코 전쟁에 반대하는 소로 개인의 주장을 그가 살고 있던 마을의 마을 회관에서 강연한 내용입니다.
소로 생전에 그의 강연을 들은 사람도 얼마 되지 않고, 글로 읽은 사람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아마 톨스토이가 우연한 기회에 ‘시민의 불복종’을 읽지 않았다면 소로가 우리에게 알려질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톨스토이는 시민의 불복종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고, 톨스토이 제자들 대부분에게 ‘시민의 불복종’은 실천 지침이 됩니다.
시민의 불복종을 가장 깊이 내면화하고 운동에 성공한 사람은 인도의 간디일 겁니다.
그 이후 마틴 루터 킹, 함석헌 등 간디를 따랐던 제자들도 시민의 불복종 개념을 운동에 적용합니다.
공산당 선언과 시민의 불복종 두 글 모두 혁명적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두 가지 혁명의 길이 지난 150여 년간 꾸준히 지구 곳곳에서 실험되고 있었던 겁니다.
공산당 혁명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현상을 이해하고 조직을 건설하고, 국가를 개조하는 길을 담고 있다면, 시민의 불복종은 조직보다는 개인의 양심을 중심으로 국가를 넘어서 존재하는 삶의 양식을 찾고자 한 글입니다.
2. 불편한 정부와 군대없는 작은 정부
<대부분의 정부가 언제나 불편한 존재이고, 모든 정부가 때로는 불편한 존재이다.>
마음이 편하고, 불편하고는 외형적 조건을 떠나서 내가 느끼는 감정입니다.
돈이 많고,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건 다하면서 살아도 그게 꼭 마음이 편해지는 길은 아닙니다. 외형적 조건이 열악하고 어려움이 많아도 마음이 그걸 다 느끼는 것도 아닙니다.
국가가 내게 잘해줄 수 있을 겁니다.
내가 사는 곳에 도로를 만들어 주고, 의료보험으로 치료도 해주고, 아이들 교육도 받게 하고, 국가는 내 삶에 큰 도움을 주고 국가를 떠날 경우 받게 되는 이주의 고통은 말로 할 수 없이 크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들을 생각해 보면 과연 이런 조건을 내가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 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소로는 19세기 중반 자본 시장과 노예제를 기반으로 서부 개척이 본격화된 엄청난 성장이 시작되던 시기에 살았던 백인 남성이고, 하버드를 졸업한 지식인입니다.
그는 손해볼 게 거의 없었습니다. 미국의 주류였습니다.
그런 그가 내가 느끼는 이런 삶의 자유가 노예와 침략 전쟁과 원주민 학살을 통해 얻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엄청난 고통에 빠져서 살게 됩니다.
<최근 메사추세츠 주가 고의적이고 강압적으로 죄없는 안토니오 번즈를 다시 노예로 만든 이래 이곳에서 의 나의 삶의 투자 가치가 수십 퍼센트는 하락했다. 나는 전에는 나의 삶이 천국과 지옥 사이의 어딘가를 지나는 삶이라는 망상 속에서 살았다.
그러나, 지금 내가 완전한 지옥 속에서 산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854년 일기에서>
‘지금 내가 편하고 좋아졌는데, 나는 그게 너무나 불편하고 싫어.’
소로와 제가 느끼는 국가에 대한 감정입니다.
물론 이런 감정은 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 80% 이상의 국민들이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러면서, 참여정부 시절을 그리워 하는 분들도 많이 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전두환 정부 이후로 지금까지 시위를 안해 본 적이 없고, 그 정부를 마음으로 받아들여 본 적도 거의 없습니다.
제게는 정부가 불편하지 않았던 적이 없습니다.
< 나는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라는 표어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이 하루 빨리 조직적으로 실현되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시민의 불복종 첫 구절입니다.
공산당 선언의 첫 구절은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입니다. 이 말은 너무나 아름다운 말이어서 다양한 변주를 거치면서 자기 주장을 표현하는 은유적 표현이 되었습니다.
시민의 불복종 첫 구절도 그런 인상을 남깁니다.
그런데, 문제는 작은 정부 개념이 시장만능 국가에서는 국가의 역할을 축소해서 국가가 비효율적으로 운영하던 부문을 시장에 맡길 경우 효율이 늘어나고, 국민의 부담은 줄어든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비효율적으로 운영되는 국가 기능을 민간 시장이 운영하게 넘기고,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면서 복지 기능을 축소합니다.
그런데, 비효율이 뭔지 실체를 정확히 봐야 합니다.
복지 행정이 결코 비효율적인 국가 역할이 아닙니다.
국가 존재 이유의 핵심적 내용 중 하나입니다.
국가가 감정이 없는 기계같은 의미로만 존재할 수 있지 않습니다.
비효율과 사회 파괴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군대’입니다.
작은 정부의 핵심적 내용은 국가 폭력의 핵심인 ‘군대없는 작은 정부’입니다.
군대없는 사회를 실현하고자 노력한 현대 국가는 일본이었습니다.
일본 평화 헌법은 침략 전쟁을 할 수 없고, 군대를 가질 수 없습니다.
군대없는 사회라는 게 상상할 수 없는 멀리있는 세계가 아니라 바로 이웃한 나라에서 지난 50여년간 실험해 왔던 일입니다.
대부분의 국가가 냉전 시대의 군비확장이라는 비효율성에 발목이 잡혀 꼼짝도 못하고 있을 때, 일본은 국가를 재건해 냈습니다.
군대없는 사회 일본은 여러 가지 논쟁적 요소를 가지고 있어서 더 깊은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단지 군대없는 사회의 상상이 가능한 사례로만 이해해 두겠습니다.
군대없는 작은 정부라는 유토피아적 이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몇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생산의 자율성입니다.
농민은 자기 땅을 가지고 자기가 경작해서 생활하는 조건이어야 하고, 노동자는 회사에 고용된 사람이 아니라 그 회사의 주인으로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조건에서 군대에 의한 방위가 아니라 ‘자위’라는 개념이 생겨납니다.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의 쿠데타군에 저항한 시민군대는 자율적 노동조합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스페인의 몬드라곤 공동체 사회 같은 모델이 군대에 의한 방위가 아니라 자율적 자위를 통해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3. 국가 기계
<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기계로서 자신의 육신을 바쳐 국가를 섬기고 있다. 상비군, 예비군, 간수, 경찰관, 민병대 등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이 판단력이나 도덕 감각을 자율적으로 사용하는 일은 전혀 없으며 오히려 그들 스스로가 자신을 나무나 흙이나 돌과 같은 위치에 놓아 버린다.>
기계성은 현대 사회의 모든 조직을 이해하는 핵심 개념입니다.
인간은 기계 사회의 한 부품으로 존재하는 정도입니다.
국가는 이 기계성을 이용하여 온갖 폭력을 일으키는 주체입니다.
올림픽만 열리면 태극기를 흔들면서 열광하는 우리들에게 국가의 기계성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이해되지 않는 개념인데, 촛불 봉기 덕분에 이 개념을 이해하는 정도가 아니라 많은 분들이 몸으로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군대의 움직임을 쉽게 볼 수 없는 일반인들에게 인간이 기계가 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 힘들었는데, 촛불 진압 과정에서 보여주는 전경들은 감정이 사라진 기계의 이미지를 서울 한복판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줬습니다.
교육도 그런 교육이 없습니다.
이 효과가 이후에 국가 공무원이 되는 길을 거부하는 흐름으로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수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공무원이 될려고 그렇게 애쓴다는 게 이상한 일입니다.
촛불봉기의 다양한 저항 중에서 기계이길 거부하는 것 자체가 저항이 된 경우가 ‘이길준씨’ 일 겁니다.
진압 경찰로 투입되었다가 느낀 양심의 고통 -기계가 아닌 인간성을 느낀 일- 이 사실 자체가 저항이 됩니다.
그런 사례는 앞으로 꾸준히 드러날 겁니다.
이번 군법무관들의 국방부 불온 서적 헌법소원도 그런 사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