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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은 우리들을 떠나 보낸다 박몽구
고향은 우리들을 떠나 보낸다
지금도 복사꽃이 환히 피는 마을
가도가도 왼통 갈라 터진 들판
창대비에 떠내려간 밭작물을 가꾸러
어머니들이 허리를 구부린 채 바삐 뛰어 다니는 마을
서울의 공장들로 처녀 총각들 다 빼앗기고
꼬부랑 노인들과 과부들이 일하는 마을
날림 상품들이 그득한 수퍼마켓 곁에서
개똥 참외들이 오들오들 떠는 마을
마을 사람들은 맨발로 서서 우리들을 떠나 보낸다
곳곳의 신작로에 차단기가 지켜설 때
아아 나는 총뿌리였다
광복 삼십년이 지나서도 더욱 들이미는
일본 열도의 가슴을 헤치는 칼이었다
튀기는 피였다
우리들의 가여운 친구들을 목조르는 마을은
우리들을 서울로 서울로 떠나 보냈고
빛을 찾아 밤에게서 떠난
나는 북북 피터진 엉덩이였다
갈라진 땅을 연결하는 함성이었다
한 불행이 깊어져 더 큰 불행을 부르는
밤을 자르는 칼날이었다
외침이었다
나의 외침을 누군가의 불타는 가슴에 심어 주었을 때
고향의 갇혀 있던 혼곤한 머리는 깨어나고
야윈 주먹은 쥐어졌다
그 밤으로 고향은 우리들을 떠나 보낸다
작은 미물에서부터
거대한 소리까지가 일어서고
그 밤으로 고향은 우리들을 떠나 보낸다
킥â 너 있었는가, 청사, 1984
닫힌 거리로 창을 열고 박몽구
닫힌 거리로 창을 열고
철쭉꽃 타는 정든 언덕을 버리고
쫓기다 쫓기다 번거로운 그림자도 버리고
떠돌이별이 된 친구와 함께 차를 마신다
찰랑거리는 풀잎마다 추녀 끝마다
떠도는 혼들 벗은 발로 떨고 있는
고향쪽으로 창을 열고
닫힌 거리로 창을 열고
고개를 돌린 채 지나가는
울긋불긋한 사람들을 부른다
눈물로 목메임으로 객지밥을 삼키면서
믿기지 않던 우리들 오랫만의 만남은
많은 말을 낳을 법도 한데
반 페이지도 메꾸기 힘들어
입다문 채 속으로 속으로
다행한 저녁의 아가리로 휘말려 들어 가는 사람들을 부른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밤새 부대끼게 하는
거친 손을 떼어내다가 숨진 친구의
눈을 감겨 주고 온 친구와 함께
골목마다 늘어선 보호자들 곁의
빙판을 용케용케 비켜 가는 사람들을 부른다
몇년째 집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형들의 안부 묻고 싶어
백주의 거리를 헤매며
빼앗긴 아들의 이름을 왼종일 부르는
어머니의 찬 손 녹이고 싶어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에 타는 불에
비추어 보고 싶어
이제 막 헤어지려는 사람들을 부른다
닫힌 거리로 창을 열고
킥â 너 있었는가, 청사, 1984
동숭동 퇴근길에서 박몽구
동숭동 퇴근길에서
해질 무렵 낙산 하늘에 잿빛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피곤한 어깨들을 매만지며 매만지며 옷깃을 추스리며
값싼 휴식을 찾아 술집으로 눈꽃을 털며 들어서기도 하고
날개도 없이 집으로 뿔뿔이 흩어져 가는 사람들
저 하늘이 먹빛으로 바뀌면
지친 사람들의 눈빛을 게슴츠레 빛나게 만드는
울긋불긋 벌거벗은 연극 포스터들도 빈 방들을 찾아 잦아들고
ꡒ총은 더 이상 거짓말을 하지 말라ꡓ
서울대 의과대학에 나붙은 대자보도 슬쩍 입이 틀어막혀 버리는가
얼얼한 한파 앞에 사람들은 모두 입을 막고 귀를 덮고
눈마저 침묵의 땅에 묶은 채 사라지는데
문득 우리들의 하루가 이렇게 값싸게 막 내릴 수는 없다고
낙산 돌무더기를 헤치며 울어대는 참새 소리 쟁쟁하네
그 울음소리를 따라
찬 바람에 휘날리던 석간신문 한 장 눈물 흘리고 있네
구로구청에서 거짓 민의가 담긴 투표함을 끝까지 지키다가
옥상에서 떠밀려 반신불수가 된 한 젊은이
치료비를 낼 형편도 못 되고
친구들은 모두 학교로 돌아갈 채비를 서두를 시간에
병상에서 휠체어를 타지 못할 몸으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운 소식 하나 떠돌아 다니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손을 접는 시간에
참새들은 더욱 메마른 돌무더기를 헤쳐 새 목숨을 찾고
이대로 오늘 막을 내릴 수는 없다는 듯
낙산 쪽에서 잿빛 하늘을 뚫고
뭉클 붉은 노을이 타오른다
철쭉꽃 연붉은 사랑, 실천문학사, 1990
만주 할아버지 박몽구
만주 할아버지
아직도 부족합니까 우리들이여
아직도 우리의 욕된 과거를 벗어 던지기에 부족합니까
1979년 해 설핏한 압제의 최후를 예감하면서
광주시 문흥동 88번지 암벽에서 본 것은
내 민주 정신에 거는 자부심이 아니었다
일시 모든 걸 잃어버린 비애가 아니었다
해 기울고 깡보리밥으로 이른 저녁을 때운 다음
병사에서 들려오는 피리소리에 맞추어 쏟아져 내리던
고향 생각이 내 전부는 아니었다
매일 운동시간이면 우리와 함께 나와 절름발이 다리일망정
그의 모든 것을 다하여 달리던 칠순의 할아버지
수염이 길어도 깎지 못하고
젊은 교도관들이 반말지꺼리로 부려도
눈 한번 흘기지 않던 만주 할아버지
이빨이 다 삭아 통보리알이 입 밖으로 흘러 내리기 일쑤지만
언젠가는 저 희고 높다란 담 밖으로
꼭 나가리라 다짐하던 독립군 할아버지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귀국하였지만
어쩌다 길이 달라 30년이 넘게 통한의 벽을 치던 할아버지
아직도 부족합니까 우리들이여
이 비극을 누가 반갑지 않게 선물한 것인지도 모르면서
아직도 분단의 상처들을 더 깊게 하는가
가슴을 얼어붙이며 눈내리는 날일수록
더 활짝 벗어부치고 온몸을 밀어가던 할아버지
초조해 하거나 헛되이 남에게 기대지 않으면서
성한 사람보다 더 빨리 뛰어다니던 독립군 할아버지
그 통한의 겨울 내가 본 것은 남의 모습이 아니었다
만주로 총자루를 쥐러 떠난 뒤로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는 내 할아버지였다
우리의 화신이었다 부끄러움이었다
끝내 물러서지 않고, 전예원, 1988
뿌리 내리기 박몽구
뿌리 내리기
쏟아지는 박래품과 바다 건너로 매도되는 선박의
저 넉넉한 밑바닥에 짓눌린
어둡고 괴로운 자들의 가슴을 보면서
우리들의 분노는 생성된다
멈추고 싶은, 더러는 착취의 시대로 돌아가고픈
것들에게 쐐기를 박기 위하여
우리들은 그림자를 돌보지 않은 채 투신한다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며
우리들이 황폐한 땅으로 새 길을 밀고 나갈 때
바리케이드를 세워 막아서는 곳에
우리들의 주먹은 굳게 쥐어진다
가짜 처녀막을 욕망으로 찢어발기고
거짓말을 전수하는 학교를 넘어뜨린다
우리들이 죽고, 살갗이 노란 우리들의 아가들이
또다시 구부정한 허리로 걸어가는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린다
압착기에 눌려 작대기에 채여
무자비한 기계 앞에서 부산하게 뛰어다니다가
마침내 일어설 수 없는 몸 위에 뿌리를 내린다
보상받을 수 없는 죽음 위에
저 밑바닥까지 손상된 마음과 함께
삽을 꽂는다 뿌리를 내린다
세월의 흘러감으로 덮이지 않는 곳에
만발한다 뿌리를 뻗는다
킥â 너 있었는가, 청사, 1984
사당동 철거지에서 박몽구
사당동 철거지에서
어느 솜씨가 이토록 보기 좋게 가루를 만들어놨을까
저것이 벽이었을까 저것이 반질반질한 요강이었을까
엉덩이 말리기 좋은 아궁이였을까
고루 알아볼 수 없이 부숴진 위에
내 눈은 섣불리 슬픔을 떨구려 했더니
아뿔싸 온통 바스러진 살들 곁에 코스모스 한 송이 나부끼네
가슴 저미는 열애도 기득권을 약속하는 책도 헌신짝같이 던지고
몸 하나 들고 산동네 사람이 된 친구는
코스모스 흐드러진 가슴을 만지며
이곳에는 모자라는 것이 없다고 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사람과 벽돌을 함께 비벼 뭉개다가
선거철이 되자 다 깎고 한쪽만 남은 머리처럼
몇 채만 남겨둔 무허가 블럭집에 사는 친구는
이곳처럼 마음내키는 대로 발 뻗을 곳은 없다고 했다
색이 바랬다고 부자집에서 버린 신발장 하나가
장롱도 되고 찬장도 되고 책상도 되고
한번 고장에 버린 테레비가 멋진 가보가 된다고
한 채가 포크레인 아가리에 먹히면 오도가도 못할 것 같은데
서너 평 집 한 칸에 열 명이 넘게 쪼그려 자면서도
다시 이웃들이 이불자락을 늘여줘 더 따스하게 잔다고
이 산동네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내 친구는 까맣게 그을은 얼굴에 볼우물이 밉지 않게 패였다
끝내 저 한 송이 코스모스의 허리마저 꺾이고 말면
돌가루들을 말끔히 씻어내고 악취도 걷어내고
고급 맨션이 들어설 예정이라지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자취를 감추고 말 것이다.
철쭉꽃 연붉은 사랑, 실천문학사, 1990
사람을 기다리며 박몽구
사람을 기다리며
한 사람이 이제 막 우리 곁을 떠나려 하고 있습니다
거기 누구 없나요
오월 언덕에 몇 포기 철쭉꽃은 자지러지고
이름 모를 궂은 비 한 줄기
어제까지도 우리 어리석음을 꾸짖던
친구 하나 이름 없이 흙이 되려 하고 있습니다
풀이 되려 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분명치 못한 전말을 위하여
모르모트가 되려 하고 있습니다
문 밖에 누구 없나요
담 너머 누구 없나요
빼어나게 과감한 습성을 지닌 것도 아닌
손가락 끝에 붙은 재주가 우리보다
그다지 나을 것도 없는 사내 하나
덧없이 바람이 되려 하고 있습니다
이 무덤을 딛고 선 이 누구신가요
이 세상에 태어나 그가 한 일이라곤
애써 저를 길러준 애비어미 돌보지 않고
억울하게 옥에 갇힌 철거민의 아들을
꺼내고자 동분서주한 것뿐
모래알만큼 많이 흩어져 있는
우리들을 모으고자
얼어붙은 한강 앞에 선 것뿐
금 가 버린 이 땅의 마음들을 잇고자
버려진 땅에 꽂은 삽 한 자루뿐
이 땅의 식어 있는 가슴들에게
앞을 제대로 보는 눈을 준
친구 하나 부스러기가 되려 하고 있습니다.
그 부스러기들을 모아 바른 길 하나 틀 사람
이 긴 어둠 속에 오지 않나요
킥â 너 있었는가, 청사, 1984
살바도르 살바도르 박몽구
살바도르 살바도르
저토록 매혹적인 카리브의 장미를 앞에 두고
누가 그 그늘에 대량의 밀수 마약이 숨었다고 생각하랴
들을 가로질러 산맥을 넘어 풍성하게 펼쳐진
사탕수수 농장을 바라보면서
누가 그 보이지 않는 그늘에 죽음의 노동이 있다고 생각하랴
보이지 않는 곳에 도사린 아메리카여 아메리카여
몇 달러의 사탕수수를 얻기 위해서라면
수만의 살바도르 사람쯤이야 파리 목숨이어도 좋아
마약을 막힘 없이 술술 풀 수만 있다면
거추장스런 말을 일삼는 대주교는 영원히 눈 감게 해야 해
당신들이 밑빠진 독의 섹스와 고양이 눈물만큼한 원조로
당신들의 또 다른 얼굴을 감추고 있다면
우리들의 마음은 무기 앞에 꼼짝 못하고 있어도
온 산천에 당신들을 몰아내고 말 힘으로 숨어 있어
우리가 원하건 말건 당신들의 안락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아무런 친구도 없는 종이호랑이 하나 세워놓고
떵떵거릴 수 있다는 야욕에 쐐기를 박는
불길이 무기도 무섭지 않게 타오르는 걸 보면
알 수 있어 알 수 있어
당신들이 얼마나 헛다리 짚고 있는가를
철쭉꽃 연붉은 사랑, 실천문학사, 1990
삽화 박몽구
삽화
밋밋하던 처녀애들 가슴 하루 다르게
봉긋봉긋 솟아오르듯
엊그제까지 잔설 분분하던 산모롱이에
밤낮 다르게 꽃사태 터지는 걸 보며
이슬 맺히지 않는 이 어디 있으랴
그 꽃소식 연일 북상의 속도를 더하더니
오늘 아침 신문을 펴들자마자
진해 벚꽃놀이로 온통 술렁이네
얼마나 많은 인파들이 몰렸는지
치맛자락을 죽 따라가면
제 집 대문까지 도로 들어온다는 소문
몰려든 자가용은 여의도를 채우고도 남을 북새통이라는데
떠들썩한 꽃놀이에서 한 발짝 비켜선 울산에서는
최루탄에 쫓긴 수많은 노동자들이
만신창이 몸 눕힐 숙소마저 빼앗긴 채
씽씽 돌팔매 되어 온 밤 떠돌고 있네
빈 밥그릇에 빗물 고여 있네
철쭉꽃 연붉은 사랑, 실천문학사, 1990
새벽 노래 박몽구
새벽 노래
첫눈이 올 때가 되어도
내 여자의 환히 비치는 핏줄같이
파란 하늘이 불현듯 얼굴을 찡그리더니
헝클어진 실타래 같은 비만 내린다
계절이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이다
광주에서도 잠들지 못한 유령이
떠돌아 다니며 법이 하지 못한 말을
귀띔해 주고 다닌다고 한다
가을비가 구질구질 내린 날
새로 으리으리하게 지은
서울 서초동 법정에서는
붓을 빼앗긴 화가가
피로 그린 그림이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만들었다
28년 동안이나 막혔던
베를린 장벽도 허물어지는 시대에
목마른 통일 꿈을 담아
평양축전에 보냈다가 붙잡힌 화가는
구해줄 손 하나도 없는 고문실에서
그를 짜내 간첩이라는 가면을 씌운
사람들을 이 땅에 두고도
이름 댈 수 없어
감방에서 피로 그 기술자들의 얼굴을 그려
법정에 내놓았다.
그의 누명 벗겨질 길 아득하고
계절을 거슬러 올라가는 늦가을 비
우리들의 눈을 적셔내린다
철쭉꽃 연붉은 사랑, 실천문학사, 1990
서시 박몽구
서시&
밥 한 그릇 흔들리지 않는 의자 하나에
우리들의 영혼까지야 맡길 수 없어
다가온 새벽도 모른 채
깊이 잠든 형제들을 깨우러 가는 걸음이
어디 우리들 뚝심 때문이겠느냐
우리 하나 무등산처럼 거대해서겠느냐
때로는 끝까지 사악한 발길들이 휘몰아 가는 길을 막다가
갈꽃 같은 이웃들을 살리고 저만 먼저 간
때로는 튀기는 불 같은 팔뚝을 세워
연약한 이들의 가슴을 덥게 뎁히고
저는 다시 무기를 쥐었다가 이름도 없이 진 이들의
떨어져 나간 살점이
우리의 상처를 덮고 새 살로 돋았음 아니겠느냐
더럽혀지지 않은 피가
우리 눈을 맑게 씻은 은총 아니겠느냐
우리도 이제 다가온 새벽에 일어나
때묻지 않은 동정 하나 들고 달려가
안개꽃같이 져서 강물같이 흘러
덧없는 살일랑 뒤에 오는 이들에게 입혀 주고
더운 피일랑 어두운 눈에 넣어 주어
먼저 간 이들이 우리들 위해 살구꽃처럼 졌듯
우리 또한 힘있게 우리들을 던져
새 길을 틀 일 아니겠느냐
끝내 물러서지 않고, 전예원, 1988
신채호의 무덤 1 박몽구
신채호의 무덤 1
서릿발 앙칼진 겨울 바람뿐
옷을 다 벗어 버린 겨울일수록 더욱 든든히 나는
나목거지 위의 까치집뿐
아무도 찾지 않는 신채호의 흙집을 두드리는 내게
친구의 죽음 앞에서도 손을 접고 있던 내게
벌판의 돌들이 채이며 물었다
몇 대를 쟁기로 파헤치고 삽으로 찍어 내려도
싫다 않고, 다시 생생한 얼굴을 내미는
논바닥이 쩍쩍 갈라진 채 물었다
너는 얼마나 더 외로울 수 있느냐고
누군가 네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좋으냐고
거짓 맹세를 하여 왜놈의 간이 되기보다는
북만주 황사바람에 백골의 그을릴지라도
빼앗기지 않을 이름을
고향 땅에 묻기를 고대했다는
신채호의 무덤 앞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집을 보았다
어느 불온한 밀정의 손이
여순 감옥 형장의 이슬로 당신을 보낸 날
당신의 그 참혹한 발자취들은
성냥불 하나를 없애기에 충분했다지만
오늘 더욱 많은 것들이
칼로도 훈장으로도 잠재울 수 없는 불길들이
타고 있다 체증으로 꺽꺽 남아 있다
아직 신채호가 무덤에 들어갈 시간이 아님을 보인듯
현해탄에 잠겨 있던 일본 잠수함이 쓰윽 얼굴을 내밀었다
끝내 물러서지 않고, 전예원, 1988
십자가의 꿈 1 박몽구
십자가의 꿈 1
온 땅의 사지를 꼼짝 못하도록 누르고 있는
저 긴 밤의 사슬들도
서슬이 시퍼런 채 흙발로 마루에 올라선 워커들도
교정에 파릇파릇 벙그는 새싹들을 뭉개고 있는
이방인들의 억센 손길도
우리들이 뿌리는 한 줄기 봄볕을
죄다 가로막기에는 너무도 미약했음인가
너 하나의 조그만 봄 손길은
갈망의 손, 손들을 모아 영산강 노도가 되어
금남로에 얼어붙은 질긴 얼음덩이를 녹여냈고
한낮에도 앞길 캄캄해 눈뜰 수 없는
사람들의 눈을 열어
캐터필러가 몰고 온 적의를 뿌리쳤었다
우리들 가슴 깊이 꼬나박힌 황무지에
삽을 들이댔었다 광주의 친구여
지금은 네 까맣게 그을린 죽음을 딛고
새 하늘 새 땅을 열 때
저 굳게 닫힌 십자가의 족쇄가 풀리기까지
주인 모르는 무덤이 입을 열기까지
두려움 없는 눈빛으로 비정의 가슴 한복판에
삽을 꽂아야 할 때
우리들 여린 가슴은 목메이는 함성은
잔인한 봄의 발 밑에 쓰러졌지만
우리들의 봄 뿌리까지 뽑히지는 않았으니
다시 다 살아 산천에서
비지땀 배인 작업장 속에서
거짓 가득한 책 속에서 뛰쳐나와 외치고 있으니
무너지기 쉬운 모래성을 향하여
한 발짝 한 발짝
행진하고 있으니
십자가의 꿈, 풀빛, 1986
십자가의 꿈 2 박몽구
십자가의 꿈 2
그해 겨울 형들은 모두 감방에서 풀려 나와
보석처럼 눈부신 햇볕을 쪼였다
따가운 눈보라도 차라리 반가왔고
오랫동안 그리던 얼굴들을 만나
소줏잔 바닥 마를 날이 없었지만
이내 시들해져야 했다
카프카서점에 모여 밤새 일 벌이는 개 추렴에도 지쳐서
욱씰거리는 근육을 펼 일자리를 찾아 다녔지만
받아주는 데는 아무 데도 없었다
학원 강사 자리에도 끼어들기 힘이 들었고
막노동 일터에까지 낯선 얼굴들은 따라다녔다
몇 사람만 모여 있어도 서에서 불러들였다
발 하나 제대로 뗄 수 없으면서
왜 그리들 힘이 났던지
포장마차를 열고 월부 책장사로 나서느라
매끄럽던 손은 어느새 흠집 투성이가 되었지만
내노라 하는 가난통에도 서로들 자신을 퍼주기에 바빴다
비정의 세월은 이내 그것도 허물어버리기 일쑤였다
이듬해 봄 몇은 어디론가 흘러가고
몇몇은 다시 감방으로 떠밀려갔다
아직 천사가 날개를 펼 때가 아니었다
그러나 누가 있어 이를 사라짐이라 부르랴
옥편보다 더 두꺼운 안경을 걸친
남주형 주변에 모여, 밤새워 어깨 껴고
젊음을 불태우던 선지자들……
책 대신, 뜨겁게 맞잡은 술잔과 술잔으로
맺어가던 사랑의 끈은 날이 갈수록 튼튼해져,
철쭉꽃 난만한 봄날
사방에서 불이 타들어와도 흩어지지 않고
고스란히 옥쇄하여 제 땅을 지켰다
십자가의 꿈, 전예원, 1986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박몽구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모든 말 삼켜버린 머리채처럼 라일락은 피어
무등골 고샅고샅 눈부신 라일락은 넘실거려
화약 연기에 그을려지던 네 얼굴 어리는구나
떨리는 치떨리는 네 목소리
봄바람에 실려 미칠 듯 온 거리에 메아리치는구나
금싸라기 같이 높고 귀한 시민들을 다치지 않고
좀처럼 낫지 않을 상처 함께 다독이는 마음으로
기다리자고 일방적인 작전개시는 없을 것이라고
미소마저 띤 따스한 손길로 시민 대표들을 돌려 보낸
철모들의 모래 위에 쓴 약속만 믿고
설마설마 자는 듯 마는 듯 무거운 눈꺼풀을 닫았던 새벽
가냘픈 라일락 허리를 꺾으며 내리던 빗소리
두려움 모른 채 쏘아보던 얼굴
저벅저벅 외마디 총성은 하늘을 가르고
네가 마지막 호소 방송으로 우리들을 부르던 소리
아직도 허공 저편으로 잠들지 못해
우리네 귓전을 이리도 맴도는구나
ꡒ시민 여러분 어서 잠을 떨치고
일어나 도청 앞으로 모여주십시오
약속을 깨뜨린 계엄군이 중무장으로 침입했습니다
시민 여러분 어서 잠을 떨치고 일어나
용감한 우리 시민군과 함께 끝까지 광주를 지킵시다
여러분 한 사람의 힘이 필요합니다
시민 여러분 어서 이불을 박차고……ꡓ
목메인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한 채
너는 자욱한 총성 속에 묻혀 버리고
그 새벽 캄캄한 속에서 분수대를 향해 나아가던
우리들은 보았다 낯선 살들의 밀림을 뚫고 보았다
한 동포가 한 동포 위에 거머리처럼 씌워져 있던 것
심부름꾼이 주인의 목덜미를 마구 잡고 흔들던 것
하지만 끝내 지지 않고
새벽을 향해 저를 던지던 든든한 빛의 화살들
7년이 흐르고 해원의 새 세상으로 가기엔
너무 먼 너는 다시 우리들의 잠을 깨우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
철쭉꽃 연붉은 사랑, 실천문학사, 1990
영산강 박몽구
영산강
모래밭에서 콘크리이트 믹서 한 대가 돈다. 기름 탱크를 빨지 않고 전깃줄을 걸어 놓지 않고 돈다. 아버지 자갈통을 짊어진 채 비틀거리는 등가죽을 빨면서 돈다. 단단한 얼굴의 돌멩이를 삼켜서 지친, 아버지가 쓰러진 말뚝처럼 돈다. 다시 굳어질 수 없다는 듯이 콘크리이트 비빔은 죽이 되어 게워내지고.
아버지는 죽이다. 콘크리이트 믹서 단단한 얼굴이 쉬지 않고 자갈 무더기를 삼키는 만큼 죽이다. 꽃게 구멍에 빠뜨려진 강물을 한 사발 들이키고, 여름이 목말라도 들이키고. 벼 모가지 잘리워 콩이파리 피곤한 줄기를 가누지 못해도 모래밭은 파헤쳐진다.
아버지 고달픈 뼛속을 빨아대며 쉬지 않는다. 진열장 안에 비끌어매인 시계바늘은 빗줄기가 뿌려도, 아버지를 죽음처럼 버려둔다. 빈 소주병을 빨아댄 채 버려 두고, 장편소설 응모 때 낙방한 원고지 빈 칸을 버려 둔다.
알맹이를 빠져 나간 착실한 돌멩이들은 콘크리이트 믹서에 담겨 고층 건물을 짓고, 모지라진 것들이 매장된 채 빗줄기 속에 흐르지 않은 채 버려진다. 아버지는 얼마나 버려졌는가. 피 묻은 발바닥을 찢는 돌멩이처럼 버려졌는가. 고달픈 몸을 믹서 아가리마다 쏟아부으며, 빗줄기에 버려져 찬비 한 뼘, 피할 수 없는 거적대기처럼 버려졌는가.
킥â 너 있었는가, 청사, 1984
영종도 추씨 박몽구
영종도 추씨
오랜만에 육지에 나가면
사람들은 억대 부자가 왔다고 놀려대고
모주꾼 친구들은 밤새워 술값이나 씌우려고
그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허나 천상 농부인 그에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랴
사실 지금이라도 논밭 몇 평 팔면
번쩍번쩍한 자가용도 사고 아파트도 산다지만
더이상 제비꽃 구경할 수 없고
육지 사람들의 오물만 버려져 악취만 풍기는
개발이 도대체 누구 코에 걸리는 물건인지 몰라
그는 안주도 없는 술을 바닥 보이도록 들이켰다
푹푹 빠지는 개펄이 싫던 판에
땅 팔고 집 팔아 육지로 간 벗들은
벌써 있는 것 다 까먹고
고향에 돌아오려 해도 오두막 한 칸 얻어 들기 어려운데
새마을연수원이 들어선다며 대대로 모셔온 산소까지 파헤치더니
바다가 죽은 자리에는 국제공항이 들어선다는 소문만
사람들의 등을 떠밀어내고 있다.
추씨는 부슬부슬 내리는 안개비 속에
그마저 조상들을 버릴 수는 없다며
고향을 잃은 벗들과 함께
지금은 흉가처럼 버려진 새마을연수원으로 몰려갔다
투기꾼의 자가용으로 그물 한 코 던질 수 없는
포구를 막아섰다
섬을 섬사람들에게 돌려 달라고 주먹을 치켜들었다
철쭉꽃 연붉은 사랑, 실천문학사, 1990
옥천에서 박몽구
옥천에서
바닥까지 비치는 거울 같은 물 속에
길길이 뛰는 어물치의 빼어난 몸매를
따라잡을 것이 무엇이더냐
물 속에 그림자를 헹구는 숲이며 티없는 하늘은
어느 화공의 붓으로도 못 이룰 절경인데
흙짐을 진 애비의 얼굴은 왜 이리 주름투성이냐
물은 저 혼자 흐린 얼굴 걷어내며 흘러가는 게 아녀
그렇게 모른 채 흘러 갈 수는 없어
딸아이 꼭지머리같이 기름진 땅을
펄쩍 뛰는 땅값만 믿고
양어깨 주저앉히는 일을 훌훌 털어 버리자고 팔아
도회로 나갔던 애비는 삼년이 못 가 훌훌 털리고
옛마을로 돌아왔지만 옛집에는 유곽이 쿵쾅거리고 있었지
황금 논배미에는 연신 검은 연기를 내뿜는 공장이 들어앉았지
그 너른장한 땅 다 빼앗기고
등 하나 따시게 눕힐 터전을 차지할 수 없었던 애비는
옛집이 들어앉았던 유곽에서 허드렛일로 풀칠을 하지만
이나마 조상님 냄새가 배인 터전을 지킬 수 있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땀 닦을 일도 잊고
이제 이곳에서 제대로 남은 것이라곤 흘러가는 물뿐이다
애비의 주름살에 걸러진 바람은 엿가락보담 단데
외지인들이 발목을 잠그고 있는 물도
그대로 흘러갈 수는 없다는 듯
오늘은 흐르기를 멈춘 채 물이끼를 잔뜩 안고 있네
철쭉꽃 연붉은 사랑, 실천문학사, 1990
우리들의 가족 박몽구
우리들의 가족
진종일 양짓발에 쪼그려 앉아 가래를 끌륵이는
노인들의 손등처럼 물기 없는 닭장차에도
어김없이 꽃씨들이 넘실거리고
부벼도 부벼도 사랑에 닿지 못하는 살갗들뿐인
아파트의 벽돌 사이로 제비가 나는데
우리들의 키는 너무도 작아
아니 우리들의 벽은 너무도 완고해
두근두근 천길 땅 밑을 흐른다 하여도
한낱 백짓장을 사이한 듯 들리던 저 소리도
태평양을 건너온 위성통신 하나로
높은 담 너머로 곧잘 사라지고
기름 하나를 담보처럼 붙들고
콧대를 높이던 중동 벼락부자들의 화대가 싸지고
큰손들이 달러를 뿌렸다는 소문 하나에
우리들의 담은 이렇게 높아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가
아니야 아니야 고개를 흔들며
모두들 한덩어리가 되어
모처럼 거머쥔 행복의 티켓을 놓치지 말라는
앵커맨의 구호 끝에 튀긴 침이 채 마르기 전에
구호의 그물에 걸리지 않은 청년 하나
맹물의 3,080원을 풀칠의 4,200원으로 인상하라며
말이 다하자, 석유를 부어 저를 바치는 외침마저
피킷을 든 손은 매몰차게 뿌리치고
때아닌 함박눈이 장례식에 가는 구름 같은 발길들을
묶어버린 아침,
한자리에 모인 가족들은 일제히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철쭉꽃 연붉은 사랑, 실천문학사, 1990
우리들의 사라짐 위에 박몽구
우리들의 사라짐 위에
돌아보지 말자 돌아보지 말자
찬 이슬이 구르는 연꽃처럼 티 없는 네 눈동자
이글이글 봄볕이 타는 보리밭보다 탐스러운 네 머리카락
이제 이 땅 위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명이여
남기지 말자 남기지 말자
가느다란 허리를 한 매듭도 남김 없이 넘실거리고 있는
라일락보다 더 두근거리는 젊음이건만
가슴 속 피 한방울 남기지 않고
짓밟고 가는 바퀴 앞에서는 꼭 조인 군화발 앞에서는
누구도 끌 수 없는 화산같이 터지는 것이니
차가운 얼음을 채워 가늠쇠를 들여다보고
총열이 따갑도록 갈기던 신역 사거리
언론보다 더 몇 천 걸음 벅차게 개벽의 꿈을 불태우는
소리들을 한 줌도 담지 않은 채 잠꼬대를 반복하던
방송국을 접수하러 가다가 쓰러진 젊음들
저들을 이제 죽음이라 부르지 말자 슬픔이라 부르지 말자
그 어디를 딛어도 넉넉하고 부서지지 않는 발판을 딛고
형제들은 끝내 물러서지 않고 새벽을 맞이하지 않았더냐
터질 것 같은 젊음을 꼭 누른 채
이 해방구를 잃는 날에는 살아 남지 못하리라는
믿음으로 밥을 쪄내던 배식반의 처녀들
그 수세미같이 헝클어진 채 잠깐 눈붙인 새벽을
희망이라 부르자 꽃이라 부르자
아아 언제까지나 부서지지 말았어야 할 정경 위에
비정한 칼들이 번뜩이고 저벅저벅 붙들려 가고
차마차마 철쭉잎처럼 스러져 가는 벗들을 그대로 보낼 수 없어
화순으로 강진으로 가 무기고들을 열고
딴딴한 팔에 거머쥐었던 건 우리들의 호전성 때문이 아니다
오늘 그 수많은 희생을 수포로 돌리려는 듯
적들은 다시 핵을 앞세운 후견인들을 짊어진 채
헌 집을 새 집인 듯 팔아 넘기려 하고
성남에서 관악에서 수십만 형제들의 손이 기계와 맞서 있는
부평에서 이정표가 서야 할 즈음에서 타는 젊음들
우리여 이제 저 열렬한 이들을 죽음이라 부르지 말자
슬픔의 비를 내리지 말자
저것은 값싸게 저를 버리는 몸짓이 아니다
이대로는 마침내 안된다는 온몸으로의 외침
마지막 털 하나까지 저를 태워
새벽을 향해 날아가는 불새이리라
돌아보지 말자 돌아보지 말자
자, 새벽을 향해 모두 우리들을 버린 채 날아가자
끝끝내 온 천지 덩실덩실 춤추는 승리로 돌아오기 위하여
끝내 물러서지 않고, 전예원,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