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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계단문화관광테마거리
부산역의 원래 자리가 중앙동 40계단 근처였는데 1953년 부산역 대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고 함. 현재의 부산역은 그 당시 초량역이라 불렸는데 화재이후 부산역을 재건하지 않고 초량역을 부산역이라 바꿔 부르게 됨
영선산 착평공사((營繕山 鑿平工事 1909~1912)때 영선산이 헐리면서 영주동에서 옛 부산역과 국제연안부두의 왕래를 쉽게 하기 위해 계단이 만들어지는데 그 계단의 층수가 40이라 40계단이라 불립니다. 지금의 위치는 1953년 부산역 화재로 인하여 옮겨져왔다.
2006년 건설교통부 선정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의 우수상을 수상한 길이다.
삼광사 http://www.samkwangsa.or.kr/ 미국 CNN - 한국서 가봐야 할 50선정
다보탑은 1997년에 만든 것으로 전체높이가 30m에 달하는 동양 최대의 석탑으로 티베트, 미얀마, 인도에서 온 부처님의 진신사리 10과가 봉안되어 있다. 삼광사는 관음기도 도량으로 24시간 사찰을 개방하여 애국불교ㆍ대중불교ㆍ생활불교를 실천수행하고 있는 대가람 <삼광사 연등축제>
선암사[仙巖寺 ]
선암사가 위치한 당감은 본디 제의를 올리는 신성한 곳으로, 당은 신이 내리는 신성한 나무를 모시는 집이고 감은 감로수를 뜻하는 말이다. 선암사 약수가 유명한 것도 그로부터 연유하였다. 1990년대 들어 불교교양대학과 원효합창단·불교봉사단 등을 세워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관음전·극락전·산신각·칠성각·원효각·명부전 등이 있다.
송공단
http://tour.dongnae.go.kr/Body/tour/index.php?BdCode=tour_4_4&CgCode=tour_2_5_6&view_type=movie
송공단의 기원은 농주산전망제단(戰亡祭壇)인데 이 제단은 1608년(선조 41)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李安訥)이 송상현 공의 기제사를 올리기 위해 동래읍성 남문 밖에 있던 조그마한 야산인 농주산에 설치하였다가 1742년 지금의 위치에 송공단을 세워 옮긴 것이다. 솟을삼문에는 1972년 3월 25일 박정희 대통령께서 내린 친필 편액이 걸려있다.
송도해안산책로
송도해안볼레길에는 2개의 구름다리와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곳곳에 있다. 송도해안볼레길의 진수는 기암절벽의 해안선을 따라 삼림욕을 즐기는 것이다. 곳곳에서는 조각작품이 설치돼 있으며, 8000만년전 공룡발자국도 접할 수 있다. <사진:100m 절벽 아래 자리 잡은 아름다운 산책로인 부산 서구 ‘송도해안볼레길’>
수미르공원 중구 중앙동 6가
"수미르"란 이름은 한자의 물수와 용을 나타내는 순우리말인 미르를 합친 뜻이다. 1998년 8월 조성된 이후로 청소년을 비롯해 가족단위의 다양한 시민들이 이용하고 있다.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청소년들의 놀이공간으로도 자리매김하고 있다
수영고적민속예술관
(사)수영고적 민속예술보존협회는 부산 수영구 수영사적공원 내 수영민속예술관에서 제39회 수영 전통민속예술축제를 마련한다고 28일 밝혔다.
수영근린공원[수영사적공원]
공원 옆에는 임진왜란 때 목숨을 바쳐 싸운 25분의 위패를 모신 25의용단이 있다.
공원 안에는 수영 출신의 안용복 장군을 기리는 사당(수강사 守疆祠 영토를 지킨 다는 뜻)도 있다. 좌수영의 능노군(노젓는 병사) 군졸이었던 안용복은 숙종 때 두 차례에 걸쳐 울릉도와 독도를 침략한 왜인을 몰아내고 일본으로 건너가 독도가 우리 땅임을 확약 받은 인물.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67년 10월 30일에 안용복 장군 기념 사업회에서 수영사적공원 내에 안용복장군충혼탑을 건립하고 매년 4월18일 제향을 올리고 있다.
수영성남문 (水營城南門)
무지개 모양으로 쌓은 문(홍예문) 양쪽 옆에 개 조각상인 ‘박견(拍犬)’을 만들어 놓아 왜구를 감시하던 성의 임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좌수영지』에 의하면 4개의 문 중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나타났으며, 성문 옆에 조각상을 배치한 것은 다른 지방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성으로 평가받고 있다. 성문 양 옆으로 우주석隅柱石이 있습니다. 우주석이라는 말을 풀어보면 '모퉁이 우'에 '기둥 주'자를 쓰니 '모퉁이에 서 있는 기둥 돌'이 됩니다. 박견은 조선개의 한자식 표현입니다(칠 拍박). 개는 귀신을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유 없이 밤에 짖을 때는 귀신이 있어서라고 합니다. 그렇듯 우리의 조선개는 사악한 것을 물리치고 복을 불러들이는 상징으로 남아있습니다.
좌수영성은 왜구의 침입을 막는 것이 제일 중요한 임무였습니다. 박견이 올려져 있는 이유는 왜구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함입니다. 세월의 흔적으로 이빨도이 무디어지고 눈도 그 형태가 희미해져버렸습니다. 하지만 300년을 넘게 제 주인을 위해 한 자리를 지키며 조국수호의 임무를 한치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수영야류[水營野遊]
구전에 따르면 수영야류는 약 200년 전 좌수영(左水營) 수사(水使)가 마을의 대광대패[竹廣大牌]가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 초청하여 공연하게 한 것을 군졸들이 따라 시작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그 뒤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에 산신제(山神祭)와 함께 거행되어 그해의 만사형통을 빌었다.
제1 양반마당은 말뚝이(하인)가 양반의 이중인격을 폭로하면서 양반의 무능과 허세를 풍자한다.
제2 영노마당은 영노가, 자신이 양반이 아니라고 거짓말하는 양반을 잡아먹는다.
제3 할미·영감마당은 제대각시와 살림을 차린 영감과 본처인 할미가 싸우다가 영감의 발길에 채여 할미가 죽는다.
제4 사자춤마당에서는 거대한 사자와 범(담보)이 대무(對舞)를 벌이다 범이 사자에게 잡아먹힌다.
좌수영성전투
그 후 왜군은 이곳 좌수영 일대에 7년 동안이나 주둔하면서 민(民)의 재산과 가축을 탈취하고 인신(人身)을 겁탈·살육하는 등 온갖 만행을 자행하였다. 왜군의 치하에서 생존을 위한 자발적인 항전이 전개되었으니 이를 좌수영성 전투라고 한다.
25의용단 (25義勇壇)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좌수사로 있던 박홍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 때 수병(守兵)과 성민(城民) 25인이 성문 밖의 선서바위에 모여 피로써 맹세한 후, 바다와 육지에서 적을 상대로 7년간 대항하였다. 이러한 사연은 광해군 원년(1609) 지방민들의 청원으로 알려지게 되어, 동래부사 이안눌이 이 때의 일들을 모아『정방록』을 만들고, 이들의 집 문에 ‘의용(義勇)’이라는 두 글자를 써붙여 그 뜻을 기리도록 하였다. 순조 때에는 동래부사 오한원이 이들의 후손들에게 역(役)의 의무를 면제시키고 글을 지어 포상하였다. 철종 4년(1853) 경상좌수사 장인식이 비를 세우고, ‘의용단’이라 이름하였으며, 제실·의용단을 설치하여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시네마테크 부산
http://tour.busan.go.kr/kor/01_tour/01_04/01/1194138_1625.jsp
신선대[神仙臺]
또 신선대라는 명칭도 산봉우리에 있는 무제등이라는 큰 바위에서 신선의 발자국과 신선이 탄 백마의 발자취가 있다는 데서 유래되었으며, 옛날에는 이곳에 가까이 가면 신선들이 노는 풍악소리가 들려왔다고도 한다.
아치섬(조도 朝島)
APEC나루공원
예전에 이곳이 강나루였다고 해 나루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수목으로 잘 정돈된 공원 안에는 산책로가 나 있고 연녹색 잔디밭에는 중간 중간 돌길이 놓여있다.
길이 960m·폭 60~160m·면적 10만 70㎡이다. APEC 기념광장·야외무대·조망대·잔디광장 등이 있고, 3,500m의 산책로와 700m의 조깅코스가 있다. 공원 곳곳에 부산비엔날레 조각프로젝트에 출품된 조각이 있으며, 수영강에는 시시각각 색이 변하는 조명분수가 있다.
안적사[安寂寺] 기장읍 내리 692번지
안적사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는 제작시기가 1919년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제작되었지만, 전통적인 구도와 섬세하고 아름다운 무늬, 미끈한 선 처리 등이 돋보여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2005년 3월 3일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9호로 지정받았다.
암남공원
구름다리를 타고 오르는 정상에는 전망 좋은 정자가 있어 쉬면서 자연의 멋을 맘껏 느낄 수 있다.
약 1억 년 전 형성된 퇴적암ㆍ원시림ㆍ100여종의 야생화와 370여종의 식물등 도심에서 보기 드문 자연생태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원시자연공원으로, 해양성 식물이 자생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어린이대공원
옛날 신라시대 성지(聖知)라는 지관이 팔도강산 명산을 답사하다가 이곳이 명산이라 하여 그 혈맥에 철장을 꽂았다는 데서 '성지곡(聖知谷)" 이라는 이름이 생겼으며, 1971년 성지곡 유원지로 지정되었다가, 1978년 세계 아동의 해를 맞아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어린이 대공원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에덴공원 사하구 하단동
8·15광복 후에는 개인 소유가 되었으나, 1953년 부산중앙교회 장로 백준호가 사들여 도로를 닦고 나무를 심어 공원을 조성하였다. 아담과 하와가 살던 에덴동산에 비유하여 에덴원이라고 불렀으며, 그 뒤 자연스럽게 에덴공원으로 불리게 되었다.
연산동고분군[蓮山洞古墳群]
동래 복천동 고분군과 함께 옛 가야시대 지배계급의 집단 묘역임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도굴되었으나 부산지방에서는 무덤의 내부구조와 외부의 봉토가 완전하게 남아 있는 유일한 가야시대 무덤으로서 부산의 옛 무덤 연구에 귀중한 유적이다.
영도등대 해양문화공간
오륙도(五六島 제3경)
올림픽공원
용두산 공원
용두산은 광복 전에 일본인들이 용두산신사(神社)를 세웠고 그 뒤 산 일대에 공원을 조성하였다. 광복 후 신사는 철거되고 고목들은 불에 타 초라해졌다
6.25전쟁 때 용두산은 부산으로 밀려든 피난민들의 대규모 판자촌이 형성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1954년 12월 10일에 일어났던 큰 불로 용두산 피난민 판자촌이 불타 없어진 뒤 이곳에 나무를 심었다. 1957년에는 古 이승만 대통령의 호를 따서 "우남공원"이라 불렀으나, 4.19혁명 이후 다시 용두산 공원(면적 약 69,000㎡)으로 환원되었다.
부산타워 부산을 상징하는 탑으로 해발69m 높이 120m로 세워졌으며, 부산타워 꼭대기의 전망대는 경주 불국사 다보탑 지붕에 얹혀있는 보개(寶蓋)를 본떠 만든 것으로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부산의 밤경치는 타도시의 야경보다 출중합니다. 1973년 11월 21일에 만들어졌다. 1973년에 완성된 한국 최초의 타워 전망대로, 높이는 120m입니다. N서울타워보다 2년 앞서 준공되었습니다.
꽃시계 전국적으로 18개소에 설치되어 있는 꽃시계중 유일하게 초침이 있는 곳입니다.
시의 거리 시민의 정서를 함양하고 문화공간을 제공하며 국·내외 관광객 유치 및 문화명소의 홍보를 목적으로 용두산공원 진입로에 시비를 건립. 길이 109m로 조성되었습니다. 세계민속악기박물관. 용두산미술전시관. 세계모형배전시관
우장춘기념관 동래구 온천2동 850-48번지
씨 없는 수박을 처음 만든 사람은 일본인이며 기하라 히토시가 1943년에 만들었다. 우장춘 박사는 이것을 한국에서 만들어 시연하였기에 우장춘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최초로 만든 사람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1958년 농사원 원예시험장장이 되고, 1959년 두 번째로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았다. 그의 연구소는 학생들의 수학여행 견학코스가 되기도 하였고 연구소에서는 늘 고무신 차림이었기에 '고무신 박사'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한국에 온 지 9년이 되던 1959년 8월 10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유엔기념공원(제10경)
유엔군 사령부는 개성, 인천, 대전, 마산 등지에 흩어져 있던 유해를 이곳으로 이장하여 안치하였다. 처음에는 미국, 벨기에, 프랑스,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그리스, 인도, 필리핀, 타이 등의 11,000위가 봉안되어 있었으나 대부분 자국으로 송환되고 현재는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프랑스, 네덜란드, 뉴질랜드, 터키, 미국, 영국 등 11개국의 2,300여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1955년 유엔총회에서 ‘유엔기념묘지’로 지명한 세계 유일의 묘지로서, 세계평화 유지를 위한 국제협력정신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하는 상징적 의미가 큰 유적이다
유엔조각공원을 세계평화와 자유의 상징이 되는 국제적 관광명소로 가꾸기 위해, 공원 옆에 조각공원을 조성하였다. 이곳은 한국전쟁50주년 특별기획 유엔기념공원 국제조각 심포지엄에 참여한 6.25참전 21개국(전투부대 파견국: 16개국, 의료지원 및 시설파견국 : 5개국)의 조각가들이 제작한 34점의 조각품을 기증받아 조성되었다.
을숙도[乙淑島] 새가 많고 물 맑은 섬
을숙도조각공원 을숙도문화회관 내에 있다. 천혜의 자연경관을 가진 을숙도와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이 어우러진 조각공원은 2004년 부산비엔날레의 부산조각프로젝트 사업과 연계되어 조성되었다. 부산조각프로젝트는 2년마다 열리는 부산비엔날레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행사이다.
을숙도생태공원
생태공원은 을숙도 인근 일웅도 66만㎡에 조성됩니다. 핵심 시설은 '오대양 육대주 오리, 기러기 공원'입니다.
일웅도 중앙 24만㎡에 세계지도모양의 습지를 만들어 각 대륙에 서식하는 140종의 물새를 인공사육하면서 관람객들이 볼 수 있는 곳으로 만듭니다. 기존의 을숙도 생태공원이 있지만 겨울철 철새만 볼 수 있다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사계절 조류를 탐조하는 관광이 가능해집니다. 또 그 옆에는 방문객들이 습지의 생태를 관찰하고 체험하는 습지공원과 조류를 관찰할 수 있는 비지터센터가 들어섭니다.
일웅도 아래쪽에는 갈대숲과 각종 산새와 들새가 서식할 수 있는 산새, 물새원이 조성됩니다. 일웅도 바깥 둘레에는 수차공원과 산책로 자전거 도로가 만들어 진다.
<을숙도청소년생태체험수련원>
이기대공원[二妓臺公園] 남구 용호3동 산1번지
이기대(二妓臺)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좌수영 남쪽으로 15리에 '두 명의 기생(二妓)'의 무덤이 있어 이기대라고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이곳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수영성(城)을 함락시키고 축하연을 열고 있을 때 수영(水營)의 의로운 기녀가 왜장을 술에 취하게 한 뒤 끌어안고 바다로 투신하여 함께 죽은 곳으로서 이기대가 아니라 의기대(義妓臺)가 올바른 명칭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밖에 경상좌수사가 두 명의 기생을 데리고 놀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명칭이라고도 한다.<해녀막사><이기대동굴체험><공룡발자국>
임시수도기념관[臨時首都記念館] http://monument.busan.go.kr/main/main.jsp
1983년 7월 경남도청이 창원시로 옮겨감에 따라 도지사 관사는 1984년 6월 25일 임시수도 당시의 역사적인 사실과 유물전시를 위하여 임시수도기념관으로 지정되었다. 기념관에는 임시수도 당시의 이승만 대통령의 유품을 중심으로 하는 소장품 152점이 여섯 개 방에 전시되어 있다.
자갈치 시장(제7경)
이곳의 장이 성장하게 된 것은 1889년 일본인들이 자국어민을 보호하기 위해 인근에 부산수산주식회사를 세우면서 그곳으로 상인들이 몰리자 자갈치시장 상인들도 서서히 근대화를 모색하게 되었는데, 1922년에 이르러 부산 어업협동조합이 남포동에 건물을 짓고 위탁판매 사업을 시작함으로써 자갈치시장의 상인들이 구심점을 찾아 모여 들었다<자갈치축제>
자성대공원[子城臺公園]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부산진성을 헐고 성의 동남부에 일본식 성을 쌓아 지휘소로 사용했고, 그 뒤에는 명나라 만세덕의 군대가 주둔한 일이 있어 만공대라고도 했었다. 이후 자성대를 중심으로 성과 사대문을 쌓고 관아를 정비하여 부산진첨사영(釜山鎭僉使營)으로 사용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다. 지금은 임진왜란에 참가한 명나라 장수 천만리(千萬里)의 후손이 세운 천장군기념비(千將軍記念碑)가 남아 있고, 동쪽 산 중턱에 최영장군비각(崔營將軍碑閣)이 보존되어 있다.
장영실 과학동산
이곳에는 장영실이 만든 천문기기인 혼천의를 비롯, 천상열차분야지도, 앙부일구(해시계), 측우기 등 조선시대 각종 천문기기 복원품 18종 19점이 전시됐다. <사진:왼쪽으로 동장대, 정면으로 배산과 금련산 황령산, 오른쪽에 동래읍성 역사관>
절영해안 산책로
영도의 원래 이름은 절영도(絶影島)입니다. 절영도란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천리마가 빨리 달리면 그림자가 못 따라 올 정도라 하여 끊을 절(絶), 그림자 영(影)을 붙여 절영도라 불려졌다. 영도의 육지와 인접한 섬으로써 말을 방목하기에 적당한 지리적 조건을 갖고 있어 예로부터 나라에서 경영하는 국마장(國馬場)이 있었으며 명마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정공단[鄭公壇]
1972년 부산광역시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되었다. 1766년(영조 42) 부산첨사(각 진영(鎭營)에 속한 종3품의 무관으로, 첨절제사(僉節制使)의 약칭) 이광국(李光國)이 순절지인 부산진성의 남문자리에 설치하였다. 광복 후 새로이 단을 쌓고, 옛 비석을 되찾아 세운 후 다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조선통신사 축제
일본에 파견된 사절단에 통신사의 명칭이 처음 쓰인 것은 1413년(태종 13) 박분(朴賁)을 정사로 한 사절단이었지만, 중도에 정사가 병이 나서 중지되었다. 그 뒤 통신사의 파견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1429년(세종 11) 교토[京都]에 파견된 정사 박서생(朴瑞生)의 사절단으로 최초의 통신사라고 할 수 있다. 파견목적은 임진왜란 전에는 주로 왜구 금지요청이 주가 되었으나, 그 후에는 강화와 포로들의 쇄환(刷還), 일본국정의 탐색이었고, 1636년(인조 14) 이후는 막부장군의 습직(襲職) 축하가 주임무였다. 조선통신사는 수백명의 사절단이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었던 한류의 원조인 것이다.
파견절차는 일본에서 새로운 막부장군의 승습이 결정되면, 대마도주는 막부의 명령을 받아 통신사청래차왜(通信使請來差倭)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조정에서는 중앙관리 3인 이하로 정사(빨간색 복장) ·부사(남색 복장) ·서장관(청록색 복장)을 임명하고 300~500명으로 구성되는 사절단을 편성하였다. 일행이 통과하는 객사에서는 한시문과 학술의 필담창화라고 하는 문화상의 교류가 성대하였다. 특히 통신사에 대한 화려한 접대는 일본의 재정을 압박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으며(100만 냥, 일본의 거의 1년 예산정도), 그 때문에 1711년 아라리 하구세키는 통신사 접대에 관한 규정을 바꾸기도 하였으나 1719년에는 다시 환원되었다.
막부장군에게 조선국왕의 국서를 전달한 통신사는 대개 6개월~1년이 소요되었다. 그들은 방문하는 곳마다 서화 ·시문 등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것이 화려한 행렬도를 그린 병풍 ·회권 ·판화 등의 형태로 전해진다. 또 그들은 귀국 후 일본에서 겪은 일들을 여러 형태로 남겼는데, 이것이 《해행총재(海行總載)》라는 견문록으로 엮어져서 당시 두 나라 간의 외교적인 역할 및 문화교류의 실상을 보여준다.
부산시는 2011.4.21일 동구 범일동 자성대공원에 ‘조선통신사 역사관’을 개관했다. 조선통신사는 조선 국왕이 막부장군에게 파견한 공식 외교사절로, 1607(선조 40)년부터 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했다.
영가대(永嘉臺)는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 있던 조선시대 유적이다. 1617년 조선통신사가 일본으로 출항하기에 즈음하여 이곳에서 용왕에게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는 해신제를 거행한 이래로 역대 통신사의 출항지가 되었다.
1910년 소실된 것을 2003년 자성대공원 안에 복원하였으나, 본래의 자리는 성남초등학교와 경부선철도 사이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614년(광해군 6) 경상도 순찰사 권반(權盼)은 당시 부산진성 근처의 해안이 얕고 좁아 새로 선착장을 만들었다. 이때 바다에서 퍼올린 흙이 쌓여 작은 언덕이 생겼고 이곳에 나무를 심고 정자를 만들었다. 최초로 만든 인공항만 조성
1617년(광해군 9)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였던 오윤겸(吳允謙)이 처음 영가대에서 일본으로 출발한 이후 통신사행은 줄곧 이곳에서 출발하고 이곳으로 돌아왔다. 1624년(인조 2) 선위사 이민구(李敏求)가 일본 사절을 접대하기 위해 부산에 파견되었다가 이 정자를 보고 권반의 고향 안동의 옛 이름인 영가(永嘉)를 따서 영가대라고 이름지었다.
조엄(趙曮) 1763년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고구마 종자를 가지고 와서 동래(東萊)와 제주도(濟州島)에 재배하게 하여 최초로 고구마 재배를 실현하였다
변박[卞璞]
1763년(영조 39) 조엄(趙曮)을 정사(正使)로 한 통신사행(通信使行)의 기선장(騎船將)으로 일본에 건너가, 대마도 지도와 일본 지도 및 풍물을 본떠 그리는 등 화원 김유성(金有聲)과 함께 활약하였다. 현재 일본 시즈오카현의 세이겐사[淸見寺]에 그가 지은 오언율시《제청견사용전운(題淸見寺用前韻)》이 남아 있다.
유작에 보물 2점, 부산광역시문화재 2점이 있는데, 1760년에 고쳐 그린《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와《부산진순절도(釜山鎭殉節圖)》(육군박물관 소장), 1783년에 그린《왜관도(倭館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를 비롯하여, 일본에 남기고 온《묵죽도》와《유하마도(柳下馬圖)》등이 있다.
중앙공원(대청공원) 중구 영주동 218-20번지
1999년 10얼 16일 부산민주항쟁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개관한 민주공원은 민주주의의 산 교육장으로 그리고 시민들의 문화공간으로 널리 애용되고 있다.
천마산조각공원 서구 남부민동 천마산
충렬사(제5경)
http://tour.dongnae.go.kr/Body/tour/index.php?BdCode=tour_4_4&CgCode=tour_2_5_1&view_type=movie
75광장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 맑고 푸른 남해바다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으며, 달빛에 어우러져 출렁이는 보름밤의 바다 야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의 신비로움에 빠지게 한다.
태종대행 부산시티투어버스를 타고 용두산공원을 지나 연안여객터미널도 지나 영도75광장으로 갑니다
태종대(제2경)
유람선을 타고 보면 등대와 자살바위, 신선바위, 망부석, 아치섬, 태종대의 해안절벽, 해송 숲 등 천혜의 절경들이 태종대의 진면목을 나타내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이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후, 전국을 순회하던 중 이 곳의 해안 절경에 심취하여, 활을 쏘며 즐겼던 곳이라 하여 태종대라 유래되었다.
태종대 망부석에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고려시대 때 왜구들이 와서 남편을 잡아가자 아내가 이곳에 와서 남편을 기다리다 돌이 되었다고 한다.
통일아시아드공원
부산아시안게임 성화를 형상화한 높이 10m의 ‘빛 기념물’, 강화유리에 한반도기와 핸드프린팅을 새겨넣은 ‘만남의 벽’, 바닥분수, 운동시설, 피크닉장 등을 갖추고 있다. 야간조명과 우레탄 포장 보행로로 설치돼 있다. 도심 속 시민휴식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평화공원[平和公園]
2005년 11월 부산에서 개최된 ‘2005 APEC 정상회담’ 때 주요인사의 방문지에 유엔기념공원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를 계기로 이 지역을 정비하여 공원으로 조성하게 된 것이다. 평화공원이라는 이름도 유엔기념공원과 연계하여 지어진 것이다.
해동용궁사(海東龍宮寺)
대웅전 옆에 있는 굴법당은 미륵전이라고 하여 창건 때부터 미륵좌상 석불을 모시고 있는데 자손이 없는 사람이 기도하면 자손을 얻게 된다 하여 득남불이라고 부른다.
대웅전 앞에는 사사자 3층석탑이 있다. 원래 이 자리에는 3m 높이의 바위(미륵바위)가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절이 폐허가 되고 6·25전쟁 때 해안경비망 구축으로 파괴됨에 따라, 1990년에 정암이 파석을 모으고 손상된 암벽을 보축하여 이 석탑을 세우고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불사리 7과를 봉안하였다.
이밖에 단일 석재로는 한국 최대의 석상인 약 10m 높이의 해수관음대불, 동해 갓바위 부처라고도 하는 약사여래불이 있다. 절 입구에는 교통안전기원탑과 108계단이 있고, 계단 초입에 달마상이 있는데 코와 배를 만지면 득남한다는 전설이 전한다.
관불(灌佛)의식 불교경전 《보요경(普曜經)》에 의하면 부처님이 탄생할 때 9마리의 용(龍)이 태자로 태어난 아이를 목욕시켰다는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 관욕(灌浴), 욕불(浴佛), 석존강탄(釋尊降誕)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관욕(灌浴) 의식은 고대 인도로 부터 유래되었다. 부처님의 형상을 깨끗이 씻으면 자신의 마음에 쌓인 죄와 번뇌를 씻고 맑고 깨끗해지며 복을 누리게 된다고 알려져 있다.
해운대(海雲臺 제1경) 미국 CNN - 한국서 가봐야 할 50선정
일제 침략 이후에는 일본인들이 행락의 터전으로 삼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휴양관광지로서의 근대적 개발이 시작된 것은 일제 침략 이후였다. 오늘날 해운대는 온천장 ·풀장 ·골프장 등 위락시설과 숙박시설 등을 고루 갖추고 있다.
해운대 동백섬
예전에는 독립된 섬이었으나 오랜 세월에 걸친 퇴적작용으로 현재는 육지화된 섬으로, 해운대해수욕장의 백사장과 연결되어 있다. 옛날에는 동백나무가 많았으나, 현재는 소나무가 울창하다. 섬에는 동백공원이 있고, 공원 내에는 신라 말기의 유학자 최치원(崔致遠)의 동상과 시비(詩碑)가 있으며, 동쪽의 해벽(海壁)에는 최치원이 '해운대'라고 새긴 바위가 있다.
해운정사 해운대구 우1동 410
원통보전은 해운정사의 큰법당으로서 1989년에 완공되었습니다. 법당 내부가 108평 규모로 우리나라에서 몇 안되는 큰 법당 중의 하나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을 주불로 모신 원통보전을 큰법당으로 건립하셨습니다. 원통(圓通)이란 ‘부분이 아닌 전체’ 즉 ‘편벽되지 않고 두루 통한다’는 의미입니다. 참선 대도량 대한불교조계종 해운정사는 국내 최초로 천여 명의 대중들이 참석한 가운데 3박4일 주야 용맹 참선대법회를 가졌습니다.
해월정
해월정 너머 이기대와 오륙도, 조금 더 너머로는 영도의 태종대가 보인다.
대한팔경
백두산천지/금강산일만이천봉/부전고원/압록강/모란봉
경주석굴암일출/해운대달맞이고개저녁달/제주한라산고봉
해월정사[海月精舍] 해운대구 중2동 달맞이고개에 있는 사찰
부산 와우산 기슭의 달맞이고개, 청사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다. 성철스님이 말년에 머물며 수행하던 절이다. 주지인 천제스님이 성철스님을 모시기 위해 창건했으며, 관음전, 와우산방, 해월전, 적광전을 비롯해 2007년 10월 31일 개원한 지상 4층 높이의 봉훈관(사진:奉訓館)이 있다. 봉훈관에는 성철스님이 남긴 친필과 소장했던 경전을 전시·보관하는 시월전(示月殿)이 있다. 전통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수묵화 벽화와 한글로 ‘해월정사’라고 적힌 일주문 현판 등이 이채롭다.
혜원정사[慧苑精舍] 연산 4동 1113-1
혜원정사의 창건은 1925년 당시 부근마을에 살고 있던 김덕만(金德萬) 노인이 땔감나무를 하러 이곳 산에 왔다가 옛 절터를 발견하고 부인 김순임(金順任)과 함께 이곳에 작은 사찰을 건립하게 되었다.
이들은 가산(家産)을 털어 금동부처 한분을 조성하고 금당(金堂)을 건립하여 30여 년간 머물렀고 그 이후 자손들이 이 사찰을 10여 년간 계승 유지하다가 뿔뿔이 흩어져 폐사가 되었다. 고산스님이 1975년 사찰터 물색차 이곳을 답사하던 중 옛 절터였던 이곳에 주목하고 사찰재건을 시작하시어 오늘날의 혜원정사가 창건되게 되었다. 혜원정사 팔상도는 2002년 부산시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 1925년 무렵에 제작된 불화로 모두 8폭이며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채색불화를 계승하고 있다.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단계로 나누어 그린 그림
회동수원지
오륜대는 1832년 편찬된 동래 부읍지에 “오륜대는 동래부 북쪽 15리에 있었는데 시내와 바위가 기이하다. 옛날 다섯 명의 노인이 지팡이를 꽂고 놀며 즐긴 곳이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오륜대“라 한다고 전해지 고 있다
대한불교법화종에 속하는 사찰이다. 1706년(숙종 32) 증원(證元)이 지은〈명월산흥국사사적비문〉에 따르면, 48년 금관가야의 수로왕(재위 42∼199)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수로왕은 명월산에서 왕후 허황옥(許黃玉)을 맞아 환궁하였는데, 왕후의 아름다움을 달에 비유하여 산 이름을 명월산이라 하였고, 근처에 명월사(明月寺)를 지어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였다고 한다. 또 왕후과 왕자들을 위해 진국사(鎭國寺)와 흥국사를 지었다고 하나 이때는 불교가 전래되기 훨씬 전이므로 신빙성은 떨어진다.
조선 후기부터는 한동안 폐사로 남아 있었다. 1942년 우담(雨潭)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칠성각·종각·요사 등이 있고, 법당 오른쪽에 가락국태왕영후유허비(駕洛國太王迎后遺墟碑)와 18세기 초 증원이 세운 명월산흥국사사적비가 있다. 이밖에 1986년에 세운 오층관음보탑과 석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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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덕도[加德島]
남쪽 끝의 동두말(東頭末)에 있는 가덕도 등대는 남해의 관광명소로 꼽히며, 문화재로 천성진성(天城鎭城:부산기념물 34), 가덕도 척화비(부산기념물 35), 연대 봉수대, 가덕도 자생동백군(부산기념물 36) 등이 있다.
가덕도의 지명은 고려시대 때 이 섬에서 더덕이 많이 난다고 하여 가덕도라고 칭하였다 한다
가덕도 대구 가덕도 대구가 전국 생산량의 30%를 차지하며 제 1의 생산지로 탈바꿈 하는 등 어획량 확보를 위해 10년이 넘게 계속되어온 부산의 수산자원 방류사업이 결실을 거두고 있다. 머리가 크고 입이 커서 대구(大口) 또는 대구어(大口魚)라고 부른다.
<가덕도 숭어축제> 참숭어(밀치)는 눈동자의 주변으로 둥근 노란테가 있다. 개숭어(가숭어)는 머리가 참숭어보다 크고 눈에 노랑색이 없고 흰색이다
가덕도 소양보육원
소양 보육원은 부모를 잃은 아이나 또는 결손 가정의 아이들을 돌보기 위하여 1947년에 강원도 춘천에서 지두용 장로가 세운 기관이다. 설립자 지두용 장로님은 당시 27세의 젊은 나이에 사회사업을 시작하였다.
1951년에는 6.25 전쟁 중에는 부산으로 피난을 와서 가덕도의 현재 위치에 보금자리를 잡았다. 소양보육원은 마음의 상처 치유와 심리적 안정을 위해 1999년 소양 오케스트라를 창단해 그동안 100여 차례의 크고 작은 국내, 외 공연을 해왔다. 소양보육원은 지난해 보건복지부 아동시설평가에서 부산시 최우수 아동시설로 선정됐다.
감지해변산책로 영도구 동삼동
태종대 자갈마당을 지나 오르막이 시작되는 곳에 놓여 있는 이정표에서부터 길은 시작되고, 그 흔한 돌멩이 하나 찾아보기 힘들만큼 잘 닦여져 있어 말그대로 '산책로'라 불릴 만하다. 또한 운동시설, 전망정자등의 부대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절영해안산책로와 연계한 도심 속의 쾌적한 산책공간이다
감천동 문화마을(태극도마을) 사하구 감천2동
예술창작단체인 ‘아트팩토리 인 다대포’가 ‘꿈을 꾸는 부산의 마추픽추’라는 프로젝트로 이곳을 아름다운 미술공간으로 꾸미고 있다. ‘무지개 꿈으로 그려낸 우리 마을’이라는 주제로 산동네를 살린다는 문화전략이다.
<마추픽추 역사보호구>
페루 남부 우루밤바 계곡에 있는 잉카 유적. 마추픽추는 열대우림이며 아름다운 절경을 자랑하는 잉카 제국의 창조물이다. 마추픽추는 이 우르밤바 계곡지대의 해발 2,280m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마추픽추는 '나이 든 봉우리'라는 뜻인데, 산자락에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공중도시'라고도 불린다. 잉카인들이 스페인 사람들의 공격을 피해 산속 깊숙이 세운 것이라고도 하고, 군사를 훈련해서 후일 스페인에 복수하기 위해 건설한 비밀도시라고도 한다. 또한 자연재해, 특히 홍수를 피해 고지대에 만든 피난용 도시라고도 한다. 도시의 총면적은 5㎢, 그 절반에 해당하는 비탈면은 계단식 밭이다.
감천사(甘泉寺)
가뭄이 심해도 물이 마르지 않고 지하암반에서 물이 솟아 식수로 사용하였다고 하며 물맛이 달아 달 "감(甘)" 샘 "천(泉)"자의 감천암이라 하였다.
감천사 길 건너편에는 연제구의 전통사찰로 지정된 혜원정사가 자리 잡아 이웃하고 있다.
광안리어방축제[漁坊祝祭] 소규모로 열리던 민락활어축제, 광안리해변축제, 남천벚꽃축제를 종합하고, 수영구의 전통민속놀이인 좌수영어방놀이를 조화시켜 2001년부터 열리고 있다.부
'어방(漁坊)'은 어촌 지방의 어업협동기구로, 지금의 어촌계와 비슷하다. 부산지역에서 가장 먼저 어업이 발달했던 수영은 예로부터 어자원이 풍부하여 조선 현종 때 좌수영어방을 두고 어업의 권장과 진흥을 위하여 어업기술을 지도하였다. '진두어화(津頭漁火)'란 배가 오가는 나루와 고기잡이를 하는 등불이나 횃불을 말한다.
광안리해수욕장 백사장은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레스토랑과 카페, 횟집 등 300여 개 식당이 해변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다. 최근 조성된 보행자 중심의 테마거리(1,250m)에는 다양한 조형물과 벤치, 녹지대가 꾸며져 부산시민의 최고 휴식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광안해수월드>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종합건강 레져타운중 하나이나
국제시장
국제시장[國際市場] 중구 신창동에 있는 재래시장이다. 국제시장 먹자골목
1945년 광복이 되자 일본인들이 철수하면서 전시 물자를 팔아 돈을 챙기기 위해 국제시장 자리를 장터로 삼으면서 시장이 형성되었다. 한국전쟁 후 피난민들이 장사를 하며 활기를 띠었고, 미군의 군용 물자와 함께 부산항으로 밀수입된 온갖 상품들이 이곳을 통해 전국으로 공급되었다. 이른바 도떼기시장이 바로 국제시장이었다.
본래 ‘도떼기시장’에서 출발하여 1948년에는 공식명칭을 ‘자유시장’으로 정하고 단층목조건물 12동을 건립하였다. 6·25전쟁 중에는 부산으로 몰려든 피난민들로 그야말로 성시를 이루었다. 1969년 1월 사단법인 국제시장번영회가 설립되어 상공부장관의 인가를 받았고, 1977년에 정식으로 시장개설허가가 나왔다
도떼기시장 상품, 중고품, 고물 따위 여러 종류의 물건을 도산매ㆍ방매ㆍ비밀 거래 하는, 질서가 없고 시끌벅적한 비정상적 시장.
도떼기시장 이란 말은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쁘고 분주하며 시끄러운 곳'을 의미하는데 부산 최대 규모의 재래시장인 '국제시장'의 전 이름이 바로 <도떼기시장>입니다. 국제시장이 시장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45년 광복과 함께였습니다. 광복이 되자 일본인들이 철수하면서, 이른바 전시통제물자가 한꺼번에 나와서 돈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부평동 공설시장 일대에 각종 물자가 쏟아져 나오니 넓은 빈터가 시장터로써 상설시장이 서게 된 것입니다
“돗다!” 사람들이 빙 둘러섰고 가운데 단위에 있는 사람이 도저히 알아듣지 못할 암호 같은 소리를 계속하다가 한 사람이 소리쳤다. “지금 경매는 저 사람에게 낙찰되었다는 뜻입니다
일본말 돗다!돗다!~우리말로 됐다가 차츰 변해서 도떼기로 변했다
깡통시장(현 부평시장) 부산 중구 부평동 부평시장 수입제품 골목을 이르는 말이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 주둔하던 미군 부대에서 반출한 깡통음식들을 난전에서 사고 팔았던 것이 시작이다.
부산 중구 부평동 국제시장 인근에 위치한 깡통시장(현 부평시장)은 1910년 상인 스스로 모여들어 이미 100년 역사를 가진 특별한 시장이 됐다. 현재도 50여명의 상인이 깡통시장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들 상인이 취급하는 상품은 시대에 따라 크게 변화해왔다.
“70~80년대 양주와 전자제품이 귀했던 때는 이곳 깡통시장의 명성도 대단했지요. 멀리 서울에 사는 연예인도 물건을 사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올 정도였습니다.”
금정산성 막걸리 우리나라 막걸리 중에 유일하게 향토 민속주로 지정되어 있다. 우리나라 200여 민속·토속주 가운데 1979년 ‘민속주 1호’로 등록된 술이기도 하다.
제1회 금정산성 막걸리 축제. 기간 :2011.05.27(금) ~ 2011.05.29(일)
기장 멸치 전국 유자망 멸치 어획고의 60%를 차지하는 하는 까닭에 유명해진 것입니다. 기장하면 대변의 멸치를 연상하리만큼 기장멸치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봄철 대표적인 수산물이다. 멸치의 성어기인 매년 4월말에 개최되며, 기장멸치축제는 기장군 대표 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기장 미역 동해 기장지역에서만 생산이 되는 미역으로 미역이 가장 잘 자랄 수 있는 해양 조건을 갖추고 있기에 훌륭한 품질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전국 미역 생산량의 약 5% 정도로 그 양도 적으면서 자연산 돌미역처럼 잎이 좁으며 줄기가 두툼하게 있으면서도 부드럽고 쫄깃한 맛이 좋아서 조선시대부터 외국에 수출을 하며 임금님의 수라상에 오르던 미역이라 전해지고 있는 명품미역입니다. 2008년 4월 말에 제 1회 기장미역 다시마 축제가 성황리에 개최되었습니다.
김성종 추리문학관 《여명의 눈동자》로 유명한 소설가 김성종이 1992년 사재로 마련한 추리문학관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추리문학 전문 도서관이다. 196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 것을 계기로 등단한 작가는 1986년 추리문학대상을 수상하고 한국추리작가협회 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우리나라 추리문학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달맞이길
고갯길 꼭대기에 있는 달맞이동산에는 해월정(海月亭)이 있다. 그밖에 청사포(靑沙浦)·달맞이길 어울 마당이 해안가에 있으며, 맞은편으로는 카페촌·화랑가·레스토랑들이 있다. ‘달맞이길 월출’은 대한팔경(大韓八景) 중 하나로 꼽힌다. <달맞이 갤러리촌>
백운포(白雲浦) 이기대공원길과 신선대길이 서로 만나는 백운포 언덕 아래 좌로는 명승 오륙도와 우로는 절경 태종대를 벗하며,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 따라 현해탄 너머 대마도가 바라다 보이는 흰 구름도 머물러 쉬어 간다는 아름다운 백운포.
백양산(642m)금정산맥의 주능선에 솟은 산으로 부산진구와 사상구의 경계를 이루며 북쪽으로는 금정산과 이어져 있다. 1740년 이후 백양산에서 나누어지면서 생긴 이름으로 보이며, 백양사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상수도의 시초인 성지곡수원지가 자리 잡고 있으며, 도심하천인 동천의 발원지가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상수도 시설은 1895년 부산에 거주한 일본인을 위해 만들어진 상수도가 처음이었다.
보수동 책방 골목 http://www.bosubook.com/
한국전쟁으로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었을 때 이북에서 피난 온 손정린 씨 부부가 보수동사거리 입구 골목안 목조건물 처마 밑에 박스를 깔고 미군부대에서 나온 헌 잡지와 만화, 고물상으로부터 수집한 각종 헌책으로 노점을 시작했는데 그것이 보수동책방골목의 시초가 되었다. 보수동책방골목번영회는 2005년부터 해마다 9월에 보수동책방골목축제를 열고,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적극적인 마케팅을 하고 있다. 보수동책방골목의 정기휴일은 첫째·세째주 일요일이다. 부산시 중구가 지난해 2011. 12월 문을 연 ‘보수동 책방골목 문화관’은 책방골목의 역사와 미래의 희망이 담겨 있다
부산국제영화제 영상문화의 중앙 집중에서 벗어나 지방 자치시대에 걸맞은 문화예술의 고장으로 발전시키고자 기획된 영화제. 1996년 제1회 시작. PIFF 문화의 거리(PIFF거리)
부산대교 1934년 준공된 영도대교와 더불어 영도와 내륙부산을 연결하는 동맥이자, 부산의 산업을 촉진시키는 교통로이기도 하다. 1976년 10월에 착공하여 1981년 1월 30일에 완공됨으로써 기계공업단지 및 신흥만으로 성장하는 영도지구의 물동량을 신속히 처리할 수 있는 산업도로겸 임항도로로서 기능을 발휘하게 된 부산의 새로운 명물이다.
부산 맛집 가야밀면 이북의 냉면이 부산으로 내려와 부산의 음식으로 정착한 것이 바로 밀면이다. 밀면의 역사를 더듬어 가면 전쟁이 지나간 195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4후퇴로 함경도 흥남 내호에서 냉면집을 하던 친정어머니와 함께 피란온 정한금(77)씨가 우암동 피란촌에서 ‘내호냉면’이란 냉면집을 열면서부터 부산 밀면의 역사가 시작된다.
면발의 주재료였던 메밀과 전분은 물량이 크게 달렸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밀가루로 만든 냉면. 당시 미군부대에서 나누어준 밀가루는 풍족했다.
밀면이 대중화되기 시작한 시기는 70년대 초. 오늘날 밀면의 대명사인 부산진구 가야2동의 가야밀면이 문을 연 것이 그 무렵이다. 가야밀면이 개발한 독특한 맛이 80년대 들어 서민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밀면은 전성기를 맞는다.
부산 맛집 기장곰장어 4대째 장인정신으로 이어온 기장곰장어의 전통. 현제 음식분야 대한명인으로 등록된 집이기도 하다
부산 맛집 돼지국밥 돼지국밥의 메카 부산에는 서면,사상터미널 앞,평화시장 등에 돼지국밥 골목이 형성되어 있다.이 가운데 부산시가 지정한 향토음식점은 자갈치 신창국밥(1969년 개업),덕천고가,연산동 경주박가국밥 세 곳이다.
부산 맛집 동래파전 동래파전은 임진왜란 때 동래성에 침입한 왜군에게 파를 던져 왜구를 물리치고 전쟁에 승리한 뜻을 살려 먹던 음식이었다는 유래가 있으며, 한국전쟁 후 동래기생들이 부산으로 진출하여 운영했던 요정의 술상에 으레 동래파전을 올려 ‘동래기생’이란 이름과 함께 유명해졌다고 한다.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것도 동래 파전의 특징이다(해산물)
부산포 해전(釜山浦 海戰)
1592년 4월 13일 왜군이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이후 우리의 전국토를 빠른 속도로 침략하자, 왜군의 해상보급로는 물론 후방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동 9월 1일(음) 전라좌수인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함대가 부산진성 앞바다(오늘날의 부산 북항)에서 왜군의 선박을 격파하고 불태우는 성과를 거둔 해상전투이다. 1592년 4월 13일 왜군의 침략이 있자 경상좌도 해안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의 수사 박홍(朴泓)은 도망쳐 버렸고,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영(慶尙右道水軍節度使營)의 수사 원균(元均)의 패전으로 수군 만여 명이 모두 해산하였다. 이처럼 수군이 스스로 무너지면서 왜군이 쉽게 상륙하게 된 요인이 되었다.
동래할매파전(복천동 367-2)이라는 곳이 4대째 이이 온 원조 파전 식당이다. 부산 동래구청 인근 골목 안에 위치한 ‘동래할매파전’은 부산시 지정 향토음식점 1호점이기도 한 이곳의 역사는 4대에 걸쳐 며느리들이 전통 맛을 이어오면서 80여년에 이른다.
부산 맛집 말미잘매운탕 기장군 칠암 해변에 있는 말미잘매운탕으로 유명한 "부잣집". 모두 자연산으로서 수심 100m 이상의 깊은 바다에서 주낙으로 잡는데 주로 아나고 잡이 어선들이 잡아서 공급을 하고 있으며, 일본에서도 수출해달라고 하는데 양이 부족해서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하는군요. 현재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산 맛집 돼지곱창골목 문현동 돼지곱창골목. 일제시대 때 이 골목 근처에 도축장이 있었다고 한다. 소나 돼지를 잡으면 나오는 대창, 간, 염통 같은 부산물로 단백질 한번 맘껏 섭취하지 못하던 서민들에게 값싼 음식을 만들어 팔던 게 시초였다고. 지금은 15곳 가량의 곱창식당들이 '60년 원조' '70년 원조' '100년 원조'까지 저마다 원류를 자처하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부산 맛집 복국 금수복국 부산 해운대의 명물 '뚝배기 복국'의 원조 금수복국 1970년에 개업한 40 여년의 전통 원조 복집.
부산 맛집 복국초원복국 1960년대 부산 중앙동 에서 일식집 '남미료'를 시작으로 일식집 '일육정'(1966 년 개업)이 지금의 초원복국의 모태가 됩니다. 일육정은 일본관광객들이 많이 찾았으며 또한 그때는 흔한 자연산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던 전통일식점 이었다.
부산 맛집 18번 완당집 PIFF광장의 터줏대감으로 '60년 전통의 맛'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다. 완당(5천 원)은 중국 완탕이 한국인 입맛에 맞게 변형된 음식이다.
부산 맛집 재첩국
사상구 삼락동에 위치한 하동재첩국과 할매재첩국은 순수 국산 재첩을 사용한 시원하고 담백한 재첩국을 전문적으로 파는 곳이다. 두 집다 부산시 지정 향토음식점이다
부산의 자갈마당 충북집은 태종대 앞에 있는 자갈마당의 한 음식점으로, 이승기씨가 이대호선수와 함께 방문했던 곳입니다.
부산바다축제 해양문화도시로서 부산의 이미지를 대내외에 홍보하기 위해 1996년 처음 개최하였다. 기초자치단체가 주관하는 지역축제와 연계하여 개최하는 대규모 축제로, 바다를 주제로 한 각종 행사가 펼쳐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종합관광축제다.
부산비엔날레 부산광역시와 (사)부산비엔날레조직위원회가 주최하는 격년제 통합 미술제이다. 비엔날레(biennale)는 '2년마다'라는 뜻을 가진 이탈리아어로 2년마다 열리는 국제적인 미술전람회를 가리킨다
부산세계불꽃축제 2005년 11월 16일에 이 축제의 시초였던 “APEC 정상회의 경축 첨단 멀티미디어 해상쇼”가 개최되었었는데, APEC 주요 인사와 약 100만명의 인파가 몰려 해상쇼가 크게 성공하게 되었다.
부산진매축기념비
뒷면 비문 내용과 부산시 시사편찬실 등에 따르면 일본인 나카무라가 중심이 돼 만든 부산매축주식회사는 1926년부터 1937년까지 478만원을 들여 자성대 앞쪽 범일동 일대와 우암동 앞바다를 포함한 30만3천여평을 매립했다. 1939년 4월 매립 준공을 기념해 세운 비가 바로 '부산진매축기념비'다. 앞서 역시 일본인이 경영하는 조선기업주식회사가 부산진 앞바다 14만4천여평을 매립한 뒤였다.
지금의 대청동과 남포동 중앙동도 모두 1902년부터 1912년 사이 매립으로 생겼다.
부산항축제 부산항은 대한민국 제1의 항만이며, 세계 제3위의 컨테이너항만이다. 부산항축제는 시민들이 바다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로 꾸며져 있다.
삼락강변공원[三樂江邊公園]
지명을 강상청풍(낙동강 위의 맑은 바람), 노전낙조(갈대밭의 저녁노을), 누하표전(원두막 아래의 딸기밭)의 삼락으로 칭송하였다. .
삼락강변공원 옆의 부지 22만 1,614㎡에는 2008년 조성이 완료된 삼락습지생태원이 있다. 삼락습지생태원은 원래 잔디양묘장이었던 곳을 자연습지생태원으로 탈바꿈시킨 곳으로 연꽃단지 2곳과 갈대체험장, 논체험장, 소규모 야생화원, 물억새군락지 등이 있다. 감전야생화단지 삼락공원에서 하단, 엄궁방향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바로 감전야생화단지라고 있다. 부산 최대의 야생화 및 수생식물 체험학습장.
낙동강의 갈대와 어우러져, 봄에는 꽃창포와 붓꽃, 여름에는 원추리와 비비추, 가을에는 벌개미취와 꽃범의 꼬리 등이 무리지어 꽃을 피워 장관을 이루며 강물의 범람을 고려하여 물에 강한 60여종의 100만 그루가 조성되어 있다.
성지곡수원지
성지곡은 백양산 계곡에서 발원한 동천(東川)이 흐르는 곳으로, 신라의 지관 성지(聖知)가 발견한 명당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1900년대 중반 이곳 상류에 댐을 만들어 1910년부터는 부산 시내의 급수를 담당했다. 낙동강취수공사가 완공되던 1972년에 상수도 공급을 중단하면서부터는 유원지로 사용되었다. ‘물을 마시며 그 근원을 생각한다’는 뜻의 ‘음수사원’이란 글씨가 새겨진 것을 볼 수 있다
송도해수욕장 1913년 문을 연 대한민국의 제1호 해수욕장이다. 해수욕장 동쪽의 노송이 우거진 언덕은 송림공원 또는 송도공원이라 한다. 해수욕장 오른편의 거북섬에 소나무가 자생하고 있어 송도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한다.
백사장 길이 800 m,. 2000년부터 5년여 간 정비사업을 펼쳐 줄어든 백사장을 확장하고 분수대, 귀신고래 조각 등을 설치하며 해변공원이 되었다. 주위에 수산시장과 암남포구, 암남공원 등이 있다.
순정효황후 윤비 백납병풍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윤비가 부산 해운대구 우1동 장지마을에 2년간 머무른 적이 있었는데 윤비가 자신을 돌봐준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이 12폭 병풍을 건넸다는 것. 이후 병풍은 그의 딸이 서울로 시집갈 때 딸에게 건네졌으며 딸이 병풍에 있던 60점의 그림 중 9점의 그림을 소지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주 원장이 그림을 입수하게 됐다.
병풍 소지자 김남숙(72·여·경기도 성남시)씨는 아버지로부터 병풍을 건네받은 뒤 운반이 어렵자 대형 병풍을 폭마다 잘라 두루마리 형식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이후 김씨는 집에 귀한 손님이 올 때마다 그림 한 장씩을 오려줘 현재 그림은 9점(2폭)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 한때 국내 굴지의 대기업 회장이 이 병풍 그림을 집 한 채 값을 주고 사겠다는 뜻을 전해오기도 했다고 한다.
병풍에 담긴 그림 60점은 꽃, 개, 풍경 등 제각각 다른 소재를 다룬 산수화, 화조화, 풍속화 등으로 구성돼 있으며 각각 다복과 풍요, 장수의 의미를 담고 있다. 병풍은 1907년께 순종 즉위 후 동궁계비 윤비가 순정효황후가 되는 것을 축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백납병풍(百衲屛風)은 병풍 한 폭에 여러 장의 그림을 마치 옷을 깁듯이(衲) 붙여 놓았다고 해 붙은 이름이다.
영도대교 길이는 214.6 m, 너비는 18 m이다. 1931년에 착공, 1934년 3월에 준공되었다. 부산시청 남쪽에서 영도의 북서단을 잇는 이 다리는 개폐교(開閉橋)로 유명하였다. 선박이 통과할 때에는 다리의 중앙에서 양쪽으로 들어 올려서 배를 통과시켰다. 1966년 9월 영도구의 인구증가에 따른 교통량의 증가로 개폐를 중지하였으며 전차궤도를 철거하였다. 1980년 바로 옆에 부산대교를 건설하였다. 부산시기념물 제56호
운수사[雲水寺]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조선 제24대 헌종 1년(1660년)에 중건하였다. 운수사의 창건에 관한 전설을 보면, 절의 경내에 있는 약수터에서 안개가 피어올라 구름이 되는 것을 보고 이곳에 절터를 잡아 운수사라고 하였다 한다. 그 옛날 이곳 운수사에서 들려오는 저녁의 범종소리는 사바세계로 은은하게 울려 오욕칠정을 잠재울 만했을 것이며, 그 은은한 종소리가 낙동강 건너 저 멀리 김해들녘까지 울려 퍼져 모든 중생들의 죄업에 대한 해탈득도의 여운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운수사 대웅전(유형문화재 제91호)은 부산에서 유례가 드물 만큼 잘 정제되고 뛰어난 기법의 목조건물이다. 특히 조선중기의 잘 정제된 건축기법을 두루 갖추고 있는 특이한 건물로서 건축사적으로 크게 주목되며 아울러 임란 이전 목조건물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부산지역에서 가장 오래 전의 건물로서 문화재적 가치는 어느 것에 비할 바 아니라 할 수 있다
운수사 부도탑 운수사 법당 입구 아래 100여 미터쯤 솔밭에 고승(高僧)의 사리(舍利)와 유골(遺骨)을 보존하는 부도(浮屠)2기(基)가 안치되어 있다. 모라 지명의 유래를 살펴보면 <마을>이라는 우리말의 고래어인 <모라>에서 연유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청사포 달맞이언덕을 따라 송정방향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 아래로 보이는 곳이 청사포이다. 청사포의 원래 이름은 靑蛇浦이다. 그러나 뱀 蛇가 좋지 않다 하여 언제부터인가 모래 沙를 사용하여 오늘날까지 불리어지고 있다.
태극도 마을
마을의 유래는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태극도 마을을 “태극을 받들며 도를 닦는 신흥종교인 태극도를 믿는 사람들이 4,000여 명 모여 집단촌을 이룬 마을”이라고 한다.
<그리스 산토리니섬>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으로, 단애 위에 달라붙듯 하얀 집과 교회가 늘어선 풍경이 독특하다. 피론(Firon) 항구에서 티라(Thira) 마을까지 580계단은 보통 나귀를 타고 올라가며, 마을의 좁은 골목에는 선물가게·레스토랑·호텔 등이 몰려 있다. 산토리니는 ‘빛에 씻긴 섬’이다. 하얀 골목, 파란 교회당, 담장을 치장한 붉은 부겐빌레아마저 선명하다. 엽서를 보며 동경했던 바닷가 마을은 현실과 조우하면 더욱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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