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복도로 흘러나왔는데 주의를 기울여 보니 바로 그 작은 김치 할머니의 외아들인 아직 한번도 불러보지 않아 입밖에 내기에는 좀 쑥스러운 삼촌 목소리였다. 여자의 가늘고 고운 목소리도 들렸다. 아마 저 빨간 구두의 주인이 틀림없다. 구두는 크기가 작고 굽이 높은 것이 앙증맞게 생겼다. 갑자기 이야기가 멈추었다. 내가 다가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누고?" 대답대신 난 열린 방문 앞으로 쭈뼛거리며 나갔다. "니가 여기 무슨 일이고?" "할매가 오라캅니더." "할마씨가? 와?" "난 잘 모릅니더." 다짜고짜 언성을 높이며 마치 죄지은 사람 취급하는 것이 기분이 무척 나빴다. 달아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입을 삐죽이 내밀고 두 손을 앞으로 그러모은 채 오른손으로 왼손 엄지가락을 주무르며 서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쳐다보던 작은 김치 할머니의 아들은 여자에게 다그치며 성질을 부렸다. "왜 그래? 저 애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여자는 서울에서 왔음이 분명했다. 방을 나오면서 내 손에 땅콩을 한 웅큼 쥐어주는데 손가락이 가늘고 길었다. 여자는 여관을 나올 때까지 내 어깨에 그 가늘고 긴 손을 얹고 있었는데 은은히 풍겨오는 냄새가 아주 좋았다. 작은 김치 할머니의 아들은 내내 툴툴거렸다.
김치 할머니 집에서 텔레비젼은 그 날 이후로 볼 수가 없었다. 어머니 이야기로는 김치 할머니 아들이 사온 지 며칠 되지 않아서 들고 나갔다고 했다. 큰 김치 할머니와 작은 김치 할머니간에 대판 고성이 오간 것은 어느 저녁 먹고난 후의 한밤중이 되어서였다.
"빨리 그 가스나랑 치워뿌리지 뭐할라고 그렇게 질질 끌어쌓노?"
"뱃속에 자슥이 들어섰다고 같이 살아지는가?"
"그라믄 허구한 날 저렇구로 집구석에 남아도는 기 없도록 할끼가?"
"어이구 이 나이 먹도록 자식이 저렇게 애믹일줄 누가 알았나. 그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때려치웠을 낀데."
"해보나마나한 소리!"
석이 아재는 늘 장난이 심했다. 그는 도무지 어른을 두려워할 줄 몰랐다. 가끔 재미삼아 옥상으로 올라와 기와지붕을 타고 우리 집으로 오려다 큰 김치 할머니한테 들켜 욕을 지청구로 들어도 눈 하나 까딱하는 법이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형님!" "형수님!"하고 씩씩하게 부르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런 아재에게 늘 고분고분한 음성으로 "예, 되름!"하며 마치 자식을 품듯 따쓰하게 받아주셨다. 나이 차가 저렇게 많이 나는데도 불구하고 형, 동생 사이가 되는 것은 그 시절 비일비재했던 터라 어린 나는 별 의심을 품는 일없이 한 동기처럼 잘 지냈지만 어느 날 나는 다른 친척 형으로부터 석이 아재에 대한 비밀을 듣게 되었다. 그것은 아재하고 우리하고는 핏줄이 완전히 다르다는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그 형은 이제부터 석이 아재에게 아재라고 부르지 않겠다는 뜻을 은연중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