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5장의 첫 본문은 잃은 양의 비유인데, 예수께서 비천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수군거리자, 예수께서 비유로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양 백 마리를 가진 사람이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양을 찾아 나선다는 것인데, 그와 같이 하늘에서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더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마태복음 18장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표현과 분위기가 조금 다를 뿐 같은 내용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은 누가의 고유 자료입니다. 8~10절을 보겠습니다.
8 "어떤 여자에게 드라크마 열 닢이 있는데, 그가 그 가운데서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며, 그것을 찾아낼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겠느냐?
9 그래서 찾으면,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1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드라크마는 고대 그리스의 은화인데, 로마 시대의 은화인 데나리온과 거의 같은 값으로, 노동자가 하루 받는 임금에 해당되는 돈이었습니다. 이 본문에도 잃은 양의 비유처럼, 죄인 한 사람의 회개를 소중히 여기고 기뻐한다는 초대교회의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이어지는 본문은 그 유명한 ‘두 아들의 비유’ 이야기입니다. 이 본문도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누가만의 고유 자료이며, 오늘날의 교회에도 깊은 울림과 깨달음을 주는 귀한 말씀입니다. 이야기의 내용은 거의 다 아실 것 같지만, 조금 간추려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 가운데 자기 몫을 미리 받아내어 멀리 떠나 방탕하게 살다가, 그 재산을 전부 탕진했습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아들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데, 아버지는 멀리 아들이 보이자 달려가서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고는 좋은 옷을 꺼내 입히고 손에는 반지를 끼우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였답니다. 때마침 큰 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왔는데, 상황을 파악한 큰 아들이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자, 아버지가 나와서 그를 달랩니다. 큰 아들과 아버지의 대화 내용을 보겠습니다. 29~32절입니다.
29 그는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내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31 아버지가 그에게 말하기를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느냐? 또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 아니냐?
32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 하였다."
이 이야기는 아마도 한국교회 강단에서 가장 많이 선포되는 설교 중 하나일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 또는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비유’라고 일반적으로 말하지만, 저는 ‘두 아들의 비유’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본문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이야기가 표면적으로는 작은 아들에게 초점을 맞춘 이야기 같지만, 내용을 깊이 들여다보면, 큰 아들에게 더 큰 비중을 둔 이야기일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작은 아들의 문제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이 큰아들의 문제가 제기되어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이며,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작은 아들은 아버지께로 몸과 마음이 다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큰 아들은 몸만 아버지와 함께 있을 뿐, 마음은 아버지를 떠나 있습니다. 작은 아들의 가출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까, 큰 아들의 가출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몸의 가출이 아니라 마음의 가출이기에,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안으로 곪아가는 더욱 골치 아픈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오래 참고 기다려서 작은 아들을 되찾았는데, 이제는 큰 아들이 돌아오기를 다시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본문의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겉으로는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으나 안에는 용서 없는 이기심으로 가득 찬 비뚤어진 당시 종교인들의 한 단면을 보여주려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자기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총애를 받기에 합당한 선택된 사람들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지만,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과 가르침은 그들 신앙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파격이었습니다.
여인들과 이방인, 죄인, 가릴 것 없이 아무하고나 어울리는 예수, 죄에 찌든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들보다 더 옳고 하나님 나라에 가깝다고 말하는, 부당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독설을 거침없이 퍼부어대는 예수님을 당시 주류 종교인들은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들은 평생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왔는데, 실컷 죄 짓고 살다가 뒤늦게 회개한답시고 예수와 어울리는 파렴치한 사람들도 용서할 수 없었지만, 그들과 어울려 희희락락하는 예수는 더욱 용서할 수 없는 악독한 자요, 유대 공동체 신앙의 근간을 뒤흔드는 이단자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그 이면에 담겨진 속마음을 보시는 예수님의 시각의 차이는 그토록 컸고 메우기 어려운 골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대한 교회의 해석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을 조건 없이 맞아주었습니다. 탕진했던 돈을 되찾아오라고 요구하지도 않았고, 냄새나는 옷을 벗어버리라고, 깨끗이 목욕하고 몸단장을 한 다음에 오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교리에 사로잡힌 해석자들은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작은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왔다는 바로 그 점, 바로 그것 때문에 아버지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작은 아들이 돌아왔을 때 비로소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용서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은 처음부터 변함이 없었습니다. 집에 있을 때나 집을 떠난 후에나, 아버지의 사랑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달라진 상황은 단지 아들이 선택한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나 방탕한 삶을 산 것도, 그래서 괴롭고 외로웠던 것도 모두 아들의 선택에 따른 결과였습니다. 만약 아들이 집에 돌아가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나름대로 독립하여 살아가면서 아버지와 관계를 회복하였다면, 그 또한 해피 앤딩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집을 나갔다거나, 집으로 돌아왔다는 게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마음이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다는 데 있습니다. 이 비유에 대한 교회의 해석에서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버지와 집을 늘 동일선상에 놓고 본문을 해석하는 데 있습니다. 집을 떠난 것은 아버지를 떠난 것이고, 집에 돌아온 것이 아버지께 돌아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갖고 있는 치명적인 결함이고 병입니다.
교리주의자들에게 본문에서의 집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교회를 떠나면 하나님을 떠난 것이요, 교회로 돌아와야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의 결과로, 60년 전까지도 가톨릭교회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여기서의 교회는 가톨릭만을 의미하는 것이고 개신교회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가톨릭교회가 개신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불과 6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지금은 개신교회 중에 ‘가톨릭은 사탄이며 구원이 없다’고 가르치는 곳이 많습니다. 형제의 싸우는 모습을 보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실까요?
기독교인만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선하고 바르게 살아가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독선과 배타는 큰아들의 심보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전하고 들으면서도 여전히 큰아들의 신앙, 큰아들의 삶에 머물러있는 교회와 교인들이 우리 한국 교회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자기 신앙에 대한 확신으로 너무 쉽게 이웃을 판단하고 상처를 주는 교회와 교인들이 많은 것입니다. 자기와 같은 방식, 같은 신념, 같은 종교가 아니면 다 틀린 것이며, 지옥불에 떨어질 불쌍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는 기독교인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셨습니다. 혹 문제가 있더라도 그 인격은 존중해 주셨습니다. 아니, 예외가 있기는 있었습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어서는 안 된다고, 특정 종교조직 안에 들어와서 수련을 쌓아야만, 종교의식과 의무를 다해야만,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존중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한국교회 교인들은 기독교 교리를 배우기 전에 예수님처럼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하나님을 독점하려는 무모한 욕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구원받기 어려운 종교로, 끊임없이 우리 사회에, 넓게는 지구마을에, 갈등을 양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구원을 받아야할 대상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한국교회 자체입니다.
기독교 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생각하는 소위 한국의 보수정통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기독교 뿐 아니라, 역사상 지구마을에 꽃핀 수많은 아름다운 종교들, 아름다운 문화들을 통해서도 당신을 충분히 나타내셨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독점하려는 무모한 집착을 내려놓고, 다른 문화와 종교전통 아래 살아가는 모든 지구마을 이웃들을 자매형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무 차별 없이, 아무 전제도 없이, 뭇 생명들에게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셨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한국교회 교인들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믿음은 바로 그 믿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본문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작은 아들이 돌아왔지만, 큰아들의 가출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집안에 있지만 아버지를 떠난 큰아들은 언제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될까요? 교회 안에 있지만 하나님을 떠난 오늘의 한국교회와 교인들은 언제나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까요?